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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 독일 동부 영토는 20세기 유럽의 영토 분쟁과 민족 갈등,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0세기 폴란드 국가의 시작부터 20세기 초 베르사유 조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영토 변화, 독일 재통일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은 폴란드와 독일 간의 끊임없는 경계 조정과 인구 이동의 역사를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는 영토를 회복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과 이후 독일인의 추방, 폴란드인의 재정착을 겪으며 국경이 재편되었다. 전후 서독은 동방 정책을 통해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고, 독일 재통일 이후에는 현재의 동부 국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현재는 폴란드의 EU 가입과 솅겐 지역 가입으로 양국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지만, 재산 반환 문제와 일부 극우 세력의 주장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문제는 독일과 폴란드가 과거의 갈등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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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개요
명칭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옛 독일 영토
독일어 명칭de
설명제2차 세계 대전유럽에서 독일이 상실한 동부 영토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후 상실포젠 주:
제2차 세계 대전 후 상실노이마르크 지방:
추가 정보
기타주권 회복 (1949년) 후의 독일:

2. 20세기 이전의 역사

미에슈코 1세 공작 치하의 폴란드 지도. 그의 기독교 개종과 교황청의 승인은 서기 966년에 폴란드 국가의 시작을 알렸다.


서슬라브 부족들이 6세기부터 이 지역으로 이동했다. 폴란인의 미에슈코 1세 공작은 그니에즈노 지역을 거점으로 10세기 후반에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여 최초의 폴란드 국가를 형성하고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피아스트 공작이 되었다. 그의 영토는 독일 국가와 경계했으며, 국경 지대에 대한 통제는 이후 수세기 동안 두 정치체 사이에서 오갔다.

미에슈코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1018년 바우첸 평화 조약에 따라 영토의 남쪽 부분을 확장했지만 발트해 연안의 서포메라니아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1030년대의 이교도 반란과 보헤미아 침공 이후, 카지미에시 1세 복원공(1040–1058 재위)은 오데르강 중류 양쪽의 실롱스크와 루부시 지역을 포함하여 이전 피아스트 영토의 대부분을 다시 통합했지만, 서포메라니아는 1116년부터 1121년까지 귀족 그리핀 가문이 포메라니아 공국을 세울 때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아래에서야 폴란드 국가로 돌아왔다. 볼레스와프 3세 사후, 폴란드는 거의 200년 동안 분열되었으며, 그의 아들들과 그 후계자들이 통치했는데, 이들은 종종 서로 갈등을 겪었다. 1320년에 폴란드 왕으로 즉위한 블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텍은 부분적인 재통일을 이루었지만, 실롱스크 공국과 마조비아 공국은 독립적인 피아스트 영토로 남아 있었다.

레흐족이 실레지아에 정착하고, 루사티아에는 밀체니와 폴라비안 슬라브족이, 클라시코 지방에는 보헤미안족(부족)이 정착했다. 10세기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1세는 실레지아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으며, 이후 12세기까지 실레지아, 루사티아, 클라시코 지방은 보헤미아와 폴란드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여러 독립 공국이 형성되었고, 일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령인 보헤미아 왕국에 귀속되었으며, 클라시코 지방은 왕국 자체의 구성 부분이 되었다. 14세기 나미슬로우 조약에서 카지미에시 3세는 실레지아에 대한 폴란드의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실레지아 공국을 보헤미아 왕관 영지에 양도했다. 교회적으로, 실레지아를 관할하는 브로츠와프 대교구는 1821년 면제되기 전까지 폴란드의 그니에즈노 대교구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대부분 저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인 정착민들이 ''오스트지들룽''으로 알려진 이주 과정을 통해 중앙 유럽과 동유럽으로 이동했으며, 한자동맹은 발트해 연안을 지배했다.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동프로이센, 루사티아, 클로츠코 지역, 하부 실롱스크에서는 이전의 서슬라브족(보헤미아인, 폴라비아 슬라브족, 폴란드인) 또는 발트족 인구가 수 세기에 걸쳐 소수가 되었지만, 상부 실롱스크와 같은 지역에는 상당수의 인구가 남아 있었다. 대폴란드와 동포메라니아 (포메라니아)에서는 독일인 정착민이 항상 소수였다. 포메라니아와 마조비아와 같은 일부 영토는 15세기와 16세기에 폴란드와 재결합했다. 실롱스크, 루부시 지역, 루사티아(보헤미아 왕관령의 일부)와 포메라니아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더욱 확고하게 통합되었다.

12세기 말부터 독일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13세기 초 헨리 1세(헨리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규모 독일인 정착이 시작되었다. 독일인 정착민들이 가져온 새로운 형태의 농업, 기술 및 법률은 슬라브족에게도 혜택을 주었으며, 14세기 말까지 130개의 도시와 1300개의 마을이 독일 법을 채택했다. 옐레냐 구라(히르슈베르크), 우브베크 시렌스키(뢰벤베르크), 즈워토리야(골드베르크)와 같은 실레지아 도시들은 중앙 광장, 링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폴란드어로 ''리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동프로이센 남부의 위치 (주황색)


13세기, 튜턴 기사단은 이교도였던 구 프로이센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동프로이센 지역을 정복하고 병합했다. 튜턴 기사단 치하에서 도시들이 건설되고 삼림이 개간되었으며, 습지는 경작지로 바뀌었다. 주로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온 식민자들이 정착했으며, 인접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역에서도 식민자들이 왔다. 동진 정책 동안 이 지역은 압도적으로 독일화되었다.

토룬의 제2차 평화 조약(1466년)에 따라 바르미아와 말보르크 보이보드십은 로열 프로이센의 일부로서 폴란드 왕관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하고 독일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했지만, 루블린 연합 이후 폴란드 왕관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마주리와 포메자니아 및 포게자니아 남부는 튜턴 기사단 국가의 일부로 남았으며, 이는 독일의 봉토가 되었다. 1525년에 튜턴 기사단 국가는 세속화되어 공작 프로이센이 되었다. 공작 프로이센은 이후 대홍수 (역사)를 이용하여 독립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합병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형성했으며, 곧 왕국이 되었다.

보헤미아 영지는 모하치 전투 (1526년)까지 헝가리 왕국과 개인적인 연합을 이루어 야기에우워 왕가의 통치를 받았다. 이후, 이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 로마 황제들에 의해 헝가리 왕국 및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개인적인 연합으로 통치되었으며,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 봉기가 패배한 후, 별도의 영토로서의 존재를 사실상 잃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일부가 되었다. 18세기의 실레지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브레슬라우 조약과 베를린 조약 (1742년)을 통해 이 지역의 대부분을 프로이센 왕국에 양도해야 했으며, 오스트리아령 실레지아만 유지했다.

독일어 사용자의 평화로운 유입의 결과로, 루사티아, 실레지아 및 클라시코 지방은 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되었다.

2. 1. 중세 시대의 폴란드와 독일의 관계



서슬라브 부족들이 6세기부터 현재의 폴란드와 동독 지역으로 이동했다. 폴란인의 미에슈코 1세 공작은 그니에즈노 지역의 거점을 기반으로 10세기 후반에 다양한 인접 부족들을 통합하여 최초의 폴란드 국가를 형성하고 역사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피아스트 공작이 되었다. 그의 영토는 독일 국가와 접경했으며, 국경 지대에 대한 통제는 앞으로 수세기 동안 두 정치체 사이에서 오갔다.

미에슈코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는 1018년 바우첸 평화 조약에 따라 영토의 남쪽 부분을 확장했지만 발트해 연안의 서포메라니아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1030년대의 이교도 반란과 보헤미아 침공 이후, 카지미에시 1세 복원공(1040–1058 재위)은 오데르강 중류 양쪽의 실롱스크와 루부시 지역을 포함하여 이전 피아스트 영토의 대부분을 다시 통합했지만, 서포메라니아는 1116년부터 1121년까지 귀족 그리핀 가문이 포메라니아 공국을 세울 때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아래에서야 폴란드 국가로 돌아왔다. 볼레스와프가 1138년에 사망한 후, 폴란드는 거의 200년 동안 분열되었으며 볼레스와프의 아들들과 그 후계자들이 통치했는데, 이들은 종종 서로 갈등을 겪었다. 1320년에 폴란드 왕으로 즉위한 블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텍은 부분적인 재통일을 이루었지만, 실롱스크 공국과 마조비아 공국은 독립적인 피아스트 영토로 남아 있었다.

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대부분 저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인 정착민들이 ''오스트지들룽''으로 알려진 이주 과정을 통해 중앙 유럽과 동유럽으로 이동했으며, 한자동맹은 발트해 연안을 지배했다.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동프로이센, 루사티아, 클로츠코 지역, 하부 실롱스크에서는 이전의 서슬라브족(보헤미아인, 폴라비아 슬라브족, 폴란드인) 또는 발트족 인구가 수 세기에 걸쳐 소수가 되었지만, 상부 실롱스크와 같은 지역에는 상당수의 인구가 남아 있었다. 대폴란드와 동포메라니아 (포메라니아)에서는 독일인 정착민이 항상 소수였다. 포메라니아와 마조비아와 같은 일부 영토는 15세기와 16세기에 폴란드와 재결합했다. 실롱스크, 루부시 지역, 루사티아(보헤미아 왕관령의 일부)와 포메라니아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더욱 확고하게 통합되었다.

2. 2. 튜턴 기사단과 프로이센의 등장

13세기, 튜턴 기사단은 이교도였던 구 프로이센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동프로이센 지역을 정복하고 병합했다. 튜턴 기사단 치하에서 도시들이 건설되고 삼림이 개간되었으며, 습지는 경작지로 바뀌었다. 주로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온 식민자들이 정착했으며, 인접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역에서도 식민자들이 왔다. 동진 정책 동안 이 지역은 압도적으로 독일화되었다.

토룬의 제2차 평화 조약(1466년)에 따라 바르미아와 말보르크 보이보드십은 로열 프로이센의 일부로서 폴란드 왕관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하고 독일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했지만, 루블린 연합 이후 폴란드 왕관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마주리와 포메자니아 및 포게자니아 남부는 튜턴 기사단 국가의 일부로 남았으며, 이는 독일의 봉토가 되었다. 1525년에 튜턴 기사단 국가는 세속화되어 공작 프로이센이 되었다. 공작 프로이센은 이후 대홍수 (역사)를 이용하여 독립했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합병하여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형성했으며, 곧 왕국이 되었다.

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오스트지들룽으로 알려진 이주 과정을 통해 대부분 저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인 정착민들이 중앙 유럽과 동유럽으로 이동했으며, 한자동맹은 발트해 연안을 지배했다.

2. 3. 보헤미아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

레흐족이 실레지아에 정착하고, 루사티아에는 밀체니와 폴라비안 슬라브족이, 클라시코 지방에는 보헤미안족(부족)이 정착했다.[8] 10세기 폴란드 국왕 미에슈코 1세는 실레지아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으며, 이후 12세기까지 실레지아, 루사티아, 클라시코 지방은 보헤미아와 폴란드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8] 이 과정에서 여러 독립 공국이 형성되었고, 일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령인 보헤미아 왕국에 귀속되었으며, 클라시코 지방은 왕국 자체의 구성 부분이 되었다.[8] 14세기 나미슬로우 조약에서 카지미에시 3세는 실레지아에 대한 폴란드의 모든 주장을 포기하고 실레지아 공국을 보헤미아 왕관 영지에 양도했다.[8] 교회적으로, 실레지아를 관할하는 브로츠와프 대교구는 1821년 면제되기 전까지 폴란드의 그니에즈노 대교구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12세기 말부터 독일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13세기 초 헨리 1세(헨리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규모 독일인 정착이 시작되었다.[9] 독일인 정착민들이 가져온 새로운 형태의 농업, 기술 및 법률은 슬라브족에게도 혜택을 주었으며,[10] 14세기 말까지 130개의 도시와 1300개의 마을이 독일 법을 채택했다.[8] 옐레냐 구라(히르슈베르크), 우브베크 시렌스키(뢰벤베르크), 즈워토리야(골드베르크)와 같은 실레지아 도시들은 중앙 광장, 링을 중심으로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폴란드어로 ''리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보헤미아 영지는 모하치 전투 (1526년)까지 헝가리 왕국과 개인적인 연합을 이루어 야기에우워 왕가의 통치를 받았다. 이후, 이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 로마 황제들에 의해 헝가리 왕국 및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개인적인 연합으로 통치되었으며,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 봉기가 패배한 후, 별도의 영토로서의 존재를 사실상 잃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일부가 되었다. 18세기의 실레지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브레슬라우 조약과 베를린 조약 (1742년)을 통해 이 지역의 대부분을 프로이센 왕국에 양도해야 했으며, 오스트리아령 실레지아만 유지했다.

독일어 사용자의 평화로운 유입의 결과로, 루사티아, 실레지아 및 클라시코 지방은 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되었다.

3. 20세기의 정치와 영토 변화

wikitext

==== 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폴란드의 독립이 회복되면서, 독일은 폴란드 분할을 통해 획득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폴란드에 할양해야 했다. 이 지역은 대폴란드와 같이 폴란드인이 다수였던 지역과 포메렐리아와 같이 역사적으로 폴란드의 해상 접근을 제공했던 지역을 포함한다. 포메렐리아의 반환은 독일과 동프로이센의 영토적 연결을 끊어 월경지로 만들었다.

대부분 독일인 인구가 우세했던 동부 영토(동브란덴부르크, 동프로이센, 히터 및 파르 포메라니아, 실레지아의 대부분)는 독일에 남았다. 단치히는 국제 연맹의 감독을 받는 자치 영토인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 상 실레지아는 주민 투표 이후 독일 영토로 남았으나, 실레지아 봉기 이후 상 실레지아에 관한 독일-폴란드 협약에 따라 분할되었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의 영토 손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포젠, 프로이센 실레시아,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은 분할되었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포젠, 프로이센 실레시아,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 분할주에서:1910년 면적영토 점유율1910년 인구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다음의 일부가 됨:비고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서프로이센25,580 km2[19]100%1,703,474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15,900 km2[19]62%[20]57%[20]포메라니아 보이보드십
단치히 자유시1,966 km28%19%단치히 자유시
동프로이센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내)
2,927 km211%15%서프로이센 지역
독일로4,787 km219%9%포젠-서프로이센[21]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동프로이센37,002 km2[22]100%2,064,175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565 km2[23][24]2%2%포메라니아 보이보드십
리투아니아2,828 km28%7%클라이페다 지역
동프로이센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내)
33,609 km290%91%동프로이센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포젠28,992 km2[22]100%2,099,831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26,111 km2[19]90%[20]93%[20]포즈난 보이보드십
독일로2,881 km210%7%포젠–서프로이센[21]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슐레지엔27,105 km2[26]100%3,017,981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527 km2[23][27]2%1%포즈난 보이보드십
독일로26,578 km298%99%니더슐레지엔 주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오버슐레지엔13,230 km2[26]100%2,207,981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3,225 km2[19]25%41%[19]실레지아 보이보드십
체코슬로바키아로325 km2[19]2%2%[19]훌친 지역
독일로9,680 km2[19]73%57%[19]오버슐레지엔 주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총계131,909 km2100%11,093,442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46,328 km235%35%폴란드 제2공화국
리투아니아2,828 km22%2%클라이페다 지역
단치히 자유시1,966 km22%3%단치히 자유시
체코슬로바키아로325 km20%0%체코 실레지아
독일로80,462 km261%60%프로이센 자유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확대(1600년-1795년)


현재 폴란드 공화국 영토에 있는 구 독일 제국 영토(1871년 - 1945년)


==== 나치 독일의 점령과 2차 세계대전 ====

전간기 경제 위기는 1919년 ~ 1922년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에 할양된 영토가 독일로 반환되어야 한다는 미래 회복주의 주장에 대한 비옥한 토대가 되었고, 이는 나치의 정부 장악의 길을 열었다.

1938년 10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에 할양되었던 흘루친 지역(체코어: Hlučínsko, Hultschiner Ländchende)은 뮌헨 협정에 따라 제3제국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주데텐란트를 덮는 행정 구역인 주데텐가우가 아닌 프로이센(상부 실레지아)에 편입되었다. 1938년 말까지 리투아니아는 클라이페다 쿠데타에서 리투아니아에 병합되었던 메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1939년 3월 23일, 리투아니아 외무장관 유오자스 우르브시스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메멜 지역의 독일 양도 조약에 서명했다. 전간기 동안, 바이마르와 나치 양쪽의 독일 행정부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구(舊) 프로이센 기원을 제거하기 위해 수천 개의 지명을 개칭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1941년의 라히스가우 지도


독일은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렸다. 제3제국은 프로이센 분할을 포함한 폴란드 영토를 병합했는데, 여기에는 포메라니아 ("폴란드 회랑"), 체우움노 지역, 대폴란드, 쿠야비아, 웽치차 지역, 시에라츠 지역, 북부 마조비아, 폴란드에 위치한 상부 실레지아의 일부가 포함되었다. 단치히 자유시 원로원은 다시 독일에 합병되는 것을 투표했지만, 폴란드인과 유대인은 투표권을 박탈당했고 모든 비-나치 정당은 금지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두 칙령(1939년 10월 8일과 12일)은 병합된 폴란드 지역을 다음과 같은 행정 구역으로 나눴다.

  • 바르테란트 제국 대관구 (처음에는 제국 대관구 포젠)
  •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 대관구 (처음에는 제국 대관구 서프로이센)
  • 치에하노프 구
  • 카토비체 구(레기어룽스베치르크 카토비츠) 또는 동상부 실레지아


이 영토의 면적은 94,000 km였고 인구는 1,000만 명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병합된 폴란드 영토는 독일의 식민지화 대상이었다. 독일 자체에서 이주해 온 정착민이 부족했기 때문에, 식민지 주민들은 주로 동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민족 독일인이었다. 이 민족 독일인들은 폴란드인들이 쫓겨난 집으로 재정착되었다.

나머지 폴란드 영토는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었고(참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또는 독일이 통제하는 총독부 점령 지역이 되었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공격 이후, 비아위스토크 구는 동프로이센에 "부속"되었지만 편입되지는 않았고, 동부 갈리치아 (갈리치아 구)는 총독부의 일부가 되었다.

==== 포츠담 회담과 영토 재편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폴란드의 국경을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30] 국경의 정확한 위치는 미정이었으나, 서방 연합국은 오데르 강을 폴란드의 미래 서쪽 국경으로 하고, 인구 이동을 통해 향후 국경 분쟁을 예방하는 원칙에 동의했다.[30] 동부 또는 루사티안 나이세 강 중 어느 강을 국경으로 할지, 베를린의 항구 슈테틴을 독일이 유지할지 폴란드가 가질지가 논의되었다.[30]

당초 독일은 슈테틴을 유지하고 폴란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포함한 동프로이센 전체를 병합할 예정이었다.[30] 그러나 스탈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소련 해군의 부동항으로 사용하고자 폴란드가 슈테틴을 갖는 대신 쾨니히스베르크를 소련이 갖도록 결정했다.[30]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이 결정에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30]

얄타 회담에서는 전후 독일을 4개의 점령 구역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폴란드의 지위는 붉은 군대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복잡했지만, 회담에서는 붉은 군대가 설립한 임시 폴란드 정부를 폴란드 망명 정부 인사들을 포함시켜 재편하고,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1939년에 대피한 폴란드 망명 정부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회담은 폴란드 동부 국경이 커즌 라인을 따르고 폴란드가 독일로부터 서쪽에서 상당한 영토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지만, 정확한 국경은 추후 결정될 예정이었다.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의 구두 약속과 관련하여 서방 연합국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소련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을 폴란드의 통제 하에 이전하기 시작했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의 일부였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지역에서 폴란드 정부의 일방적인 시행에 강력히 항의했다.[31]

1947년 점령된 독일.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는 포츠담 회담의 조건에 따라 폴란드와 소련에 의해 병합되었다.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의 압력으로, 1939년까지 국제 사회에서 독일의 일부로 인정되었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든,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모든 지역을 최종 평화 회담까지 다른 국가의 관할권 하에 두었다.[33][34][35] 미국 국무부는 폴란드에 광대한 토지를 할당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 이 지역에 새로운 장기적인 긴장이 조성될 것을 우려했다. 특히 국무부는 폴란드가 하부 실레지아에 대한 주장이 민족적 또는 역사적 정당성이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32]

연합국은 또한 다음과 같은 사항에 동의했다.

{{인용|'''XII. 독일 인구의 질서 있는 이송.'''

세 정부(소련, 미국, 영국)는 모든 측면에서 이 문제를 고려한 결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 남아 있는 독일 인구 또는 그 구성 요소의 독일로의 이송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발생하는 모든 이송이 질서 있고 인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동의합니다.}}

윈스턴 처칠은 추방이 가장 만족스럽고 지속적인 방법이며, 인구 혼합으로 인한 끝없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36]

포츠담 회담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 아니라 소련, 미국, 영국 간의 각서였으며(프랑스, 독일, 폴란드는 당사자가 아니었다), 오데르-나이세 선을 따라 결정된 동부 독일 국경 문제를 규정했지만, 각서의 마지막 조항은 독일에 관한 최종 결정, 따라서 독일 동부 국경의 세부적인 정렬은 별도의 평화 조약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명시했다.[37] 세 명의 연합국 서명자는 포츠담 각서의 조건을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따라서 이 연합국들이 포츠담 의정서에 전념하는 한, 독일의 오데르-나이세 선 경계에 대한 동의 없이는 평화 조약과 독일의 재통일은 불가능했다.[37]

3. 1. 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조약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폴란드의 독립이 회복되면서, 독일은 폴란드 분할을 통해 획득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폴란드에 할양해야 했다. 이 지역은 대폴란드와 같이 폴란드인이 다수였던 지역과 포메렐리아와 같이 역사적으로 폴란드의 해상 접근을 제공했던 지역을 포함한다. 포메렐리아의 반환은 독일과 동프로이센의 영토적 연결을 끊어 월경지로 만들었다.

대부분 독일인 인구가 우세했던 동부 영토(동브란덴부르크, 동프로이센, 히터 및 파르 포메라니아, 실레지아의 대부분)는 독일에 남았다. 단치히는 국제 연맹의 감독을 받는 자치 영토인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 상 실레지아는 주민 투표 이후 독일 영토로 남았으나, 실레지아 봉기 이후 상 실레지아에 관한 독일-폴란드 협약에 따라 분할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포젠, 프로이센 실레시아,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은 분할되었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포젠, 프로이센 실레시아, 서프로이센, 동프로이센 분할주에서:1910년 면적영토 점유율1910년 인구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다음의 일부가 됨:비고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서프로이센25,580 km2[19]100%1,703,474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15,900 km2[19]62%[20]57%[20]포메라니아 보이보드십
단치히 자유시1,966 km28%19%단치히 자유시
동프로이센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내)
2,927 km211%15%서프로이센 지역
독일로4,787 km219%9%포젠-서프로이센[21]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동프로이센37,002 km2[22]100%2,064,175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565 km2[23][24]2%2%포메라니아 보이보드십
리투아니아2,828 km28%7%클라이페다 지역
동프로이센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내)
33,609 km290%91%동프로이센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포젠28,992 km2[22]100%2,099,831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26,111 km2[19]90%[20]93%[20]포즈난 보이보드십
독일로2,881 km210%7%포젠–서프로이센[21]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슐레지엔27,105 km2[26]100%3,017,981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527 km2[23][27]2%1%포즈난 보이보드십
독일로26,578 km298%99%니더슐레지엔 주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오버슐레지엔13,230 km2[26]100%2,207,981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3,225 km2[19]25%41%[19]실레지아 보이보드십
체코슬로바키아로325 km2[19]2%2%[19]훌친 지역
독일로9,680 km2[19]73%57%[19]오버슐레지엔 주
colspan=6 style="background:#000000" |
총계131,909 km2100%11,093,442다음으로 분할:
폴란드로46,328 km235%35%폴란드 제2공화국
리투아니아2,828 km22%2%클라이페다 지역
단치히 자유시1,966 km22%3%단치히 자유시
체코슬로바키아로325 km20%0%체코 실레지아
독일로80,462 km261%60%프로이센 자유주



3. 2. 나치 독일의 점령과 2차 세계대전

전간기 경제 위기는 1919년 ~ 1922년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리투아니아에 할양된 영토가 독일로 반환되어야 한다는 미래 회복주의 주장에 대한 비옥한 토대가 되었고, 이는 나치의 정부 장악의 길을 열었다.

1938년 10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에 할양되었던 흘루친 지역(체코어: Hlučínsko, 독일어: Hultschiner Ländchen)은 뮌헨 협정에 따라 제3제국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주데텐란트를 덮는 행정 구역인 주데텐가우가 아닌 프로이센(상부 실레지아)에 편입되었다. 1938년 말까지 리투아니아는 클라이페다 쿠데타에서 리투아니아에 병합되었던 메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1939년 3월 23일, 리투아니아 외무장관 유오자스 우르브시스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메멜 지역의 독일 양도 조약에 서명했다. 전간기 동안, 바이마르와 나치 양쪽의 독일 행정부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구(舊) 프로이센 기원을 제거하기 위해 수천 개의 지명을 개칭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독일은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렸다. 제3제국은 프로이센 분할을 포함한 폴란드 영토를 병합했는데, 여기에는 포메라니아 ("폴란드 회랑"), 체우움노 지역, 대폴란드, 쿠야비아, 웽치차 지역, 시에라츠 지역, 북부 마조비아, 폴란드에 위치한 상부 실레지아의 일부가 포함되었다. 단치히 자유시 원로원은 다시 독일에 합병되는 것을 투표했지만, 폴란드인과 유대인은 투표권을 박탈당했고 모든 비-나치 정당은 금지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두 칙령(1939년 10월 8일과 12일)은 병합된 폴란드 지역을 다음과 같은 행정 구역으로 나눴다.

  • 바르테란트 제국 대관구 (처음에는 제국 대관구 포젠)
  •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 대관구 (처음에는 제국 대관구 서프로이센)
  • 치에하노프 구
  • 카토비체 구(레기어룽스베치르크 카토비츠) 또는 동상부 실레지아


이 영토의 면적은 94,000 km였고 인구는 1,000만 명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병합된 폴란드 영토는 독일의 식민지화 대상이었다. 독일 자체에서 이주해 온 정착민이 부족했기 때문에, 식민지 주민들은 주로 동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민족 독일인이었다. 이 민족 독일인들은 폴란드인들이 쫓겨난 집으로 재정착되었다.

나머지 폴란드 영토는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었고(참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또는 독일이 통제하는 총독부 점령 지역이 되었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공격 이후, 비아위스토크 구는 동프로이센에 "부속"되었지만 편입되지는 않았고, 동부 갈리치아 (갈리치아 구)는 총독부의 일부가 되었다.

3. 3. 포츠담 회담과 영토 재편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폴란드의 국경을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30] 국경의 정확한 위치는 미정이었으나, 서방 연합국은 오데르 강을 폴란드의 미래 서쪽 국경으로 하고, 인구 이동을 통해 향후 국경 분쟁을 예방하는 원칙에 동의했다.[30] 동부 또는 루사티안 나이세 강 중 어느 강을 국경으로 할지, 베를린의 항구 슈테틴을 독일이 유지할지 폴란드가 가질지가 논의되었다.[30]

당초 독일은 슈테틴을 유지하고 폴란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포함한 동프로이센 전체를 병합할 예정이었다.[30] 그러나 스탈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소련 해군의 부동항으로 사용하고자 폴란드가 슈테틴을 갖는 대신 쾨니히스베르크를 소련이 갖도록 결정했다.[30]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이 결정에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30]

얄타 회담에서는 전후 독일을 4개의 점령 구역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폴란드의 지위는 붉은 군대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복잡했지만, 회담에서는 붉은 군대가 설립한 임시 폴란드 정부를 폴란드 망명 정부 인사들을 포함시켜 재편하고,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1939년에 대피한 폴란드 망명 정부에 대한 국제적 인정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회담은 폴란드 동부 국경이 커즌 라인을 따르고 폴란드가 독일로부터 서쪽에서 상당한 영토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지만, 정확한 국경은 추후 결정될 예정이었다.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의 구두 약속과 관련하여 서방 연합국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소련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을 폴란드의 통제 하에 이전하기 시작했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의 일부였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지역에서 폴란드 정부의 일방적인 시행에 강력히 항의했다.[31]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의 압력으로, 1939년까지 국제 사회에서 독일의 일부로 인정되었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든,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모든 지역을 최종 평화 회담까지 다른 국가의 관할권 하에 두었다.[33][34][35] 미국 국무부는 폴란드에 광대한 토지를 할당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 이 지역에 새로운 장기적인 긴장이 조성될 것을 우려했다. 특히 국무부는 폴란드가 하부 실레지아에 대한 주장이 민족적 또는 역사적 정당성이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32]

연합국은 또한 다음과 같은 사항에 동의했다.

{{인용|'''XII. 독일 인구의 질서 있는 이송.'''

세 정부(소련, 미국, 영국)는 모든 측면에서 이 문제를 고려한 결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에 남아 있는 독일 인구 또는 그 구성 요소의 독일로의 이송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발생하는 모든 이송이 질서 있고 인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동의합니다.}}

윈스턴 처칠은 추방이 가장 만족스럽고 지속적인 방법이며, 인구 혼합으로 인한 끝없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36]

포츠담 회담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 아니라 소련, 미국, 영국 간의 각서였으며(프랑스, 독일, 폴란드는 당사자가 아니었다), 오데르-나이세 선을 따라 결정된 동부 독일 국경 문제를 규정했지만, 각서의 마지막 조항은 독일에 관한 최종 결정, 따라서 독일 동부 국경의 세부적인 정렬은 별도의 평화 조약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명시했다.[37] 세 명의 연합국 서명자는 포츠담 각서의 조건을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따라서 이 연합국들이 포츠담 의정서에 전념하는 한, 독일의 오데르-나이세 선 경계에 대한 동의 없이는 평화 조약과 독일의 재통일은 불가능했다.[37]

4. 독일인의 추방과 폴란드인의 재정착



1944~1945년 겨울, 붉은 군대의 급속한 진격과 함께, 독일 당국은 많은 독일인들을 서쪽으로 필사적으로 대피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옛 영토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대략 1,000만 명)에 남아 있던 독일어 사용 인구의 대다수는 이미 대피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체코와 폴란드 행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전후 시대에 초기 독일 자료에서는 대피 및 추방된 독일인의 수를 1,600만 명, 사망자 수를 170만 명[38]에서 250만 명[39] 사이로 인용했지만, 오늘날 일부 역사가들은 그 수치가 과장되었다고 여기며, 사망자 수는 40만 명에서 60만 명 사이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40] 오늘날의 추산에 따르면 독일 난민의 수는 1,400만 명이며, 그 중 약 50만 명이 대피와 추방 과정에서 사망했다.[40][41]

1945년, 새 폴란드-독일 국경의 표지 설치


동시에, 폴란드 중부의 폴란드인, 소련에 의해 옛 동부 폴란드에서 추방된 폴란드인, 억류 및 강제 노동에서 돌아온 폴란드인, 비슬라 작전으로 강제 이주된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폴란드가 획득한 독일 영토에 정착했으며, 옛 동프로이센 북부(소련이 획득한 칼리닌그라드주)는 군사 구역으로 바뀌어 이후 러시아인들이 정착했다. 반면에 최초의 폴란드 정착민들은 완전히 이질적인 환경에 직면했으며, 그곳을 완전히 이국적이고 독일적인 곳으로 인식했다.[42]

그러나 소련의 병합으로 인해 이주한 폴란드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옛 독일 영토의 전 독일 거주민들을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공식 선언과는 달리, 새로운 폴란드 땅은 처음에는 심각한 인구 부족에 직면했다.[43]

소련으로부터의 폴란드 인구 이동은 150만 명에 불과했지만, 80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독일 동부 영토에서 집을 잃었다.[44]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전간기 요구(비록 훨씬 제한적이지만)에서 비롯된 폴란드의 광범위한 독일 영토 획득은 중세 피아스트 폴란드의 국경 내에서 민족적으로 동질적인 국가에 대한 피아스트 비전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제시되었다. 돌니실롱스크포메라니아와 같은 완전히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1945-46년에 전체 원주민의 추방을 겪었다. 폴란드화는 아직 불확실한 국경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독일 지명을 인수하는 대신, 새로운 폴란드 지명이 법령에 의해 결정되었고, 슬라브 이름으로 되돌리거나 독일어 사용자가 세운 장소에 새로운 이름을 발명했다. 피아스트 비전을 인구의 의식 속에 확립하고 전 독일 영토의 합병의 역사적 정의를 그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회복된 영토'는 피아스트 왕조와 관련된 명칭의 네트워크로 덮여 있었는데, 건물 자체는 피아스트 통치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42]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고향을 탈독일화하기 위해 정화 및 동화를 위해 동원되었다. 독일어 단어는 건물, 예술 작품, 접시, 묘지에서 제거되었다.[45] 한편, 노골적으로 사기적인 국민투표가 세 가지 다른 질문에 대해 실시되었다. 이 중 세 번째는 폴란드 국민이 새로운 서부 국경에 찬성하는지 여부였다. 공식 결과에 따르면, 폴란드가 동부의 상당한 영토(크레시 지역)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90% 이상이 "예"라고 투표했다.

이 과정은 1950년 소련의 압력하에 오토 그로테볼, 동독 임시 정부 총리 및 폴란드 총리 요제프 치란키에비치가 서명한 츠고제레츠 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은 1945년 포츠담 협정에서 지정된 오데르-나이세 선을 두 국가 간의 국경으로 인정했다.[46]

4. 1. 독일인의 추방과 관련된 논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인의 추방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이주 중 하나였다.[38][39][40][41] 1944~1945년 겨울, 붉은 군대의 진격과 함께 많은 독일인들이 서쪽으로 대피했다.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에 남아 있던 독일어 사용 인구 대다수는 새로운 체코와 폴란드 행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38] 전후 초기 독일 자료에서는 추방된 독일인의 수를 1,600만 명, 사망자 수를 170만 명에서 250만 명 사이로 인용했지만,[38][39] 오늘날 일부 역사가들은 그 수치가 과장되었으며, 사망자 수는 40만 명에서 60만 명 사이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40]

오늘날의 추산에 따르면 독일 난민의 수는 1,400만 명이며, 그 중 약 50만 명이 대피와 추방 과정에서 사망했다.[40][41] 폴란드가 획득한 독일 영토에는 폴란드인, 소련에 의해 옛 동부 폴란드에서 추방된 폴란드인, 강제 노동에서 돌아온 폴란드인, 비슬라 작전으로 강제 이주된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정착했다.[42] 반면, 옛 동프로이센 북부(칼리닌그라드주)는 군사 구역으로 바뀌어 이후 러시아인들이 정착했다.[42]

4. 2. 폴란드인의 재정착과 '회복 영토'

폴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구 독일 영토를 '회복 영토'라고 부르며, 중세 피아스트 왕조 시대의 국경 내에서 민족적으로 동질적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42] 돌니실롱스크포메라니아 등 독일어를 사용하던 지역에서는 1945-46년에 원주민 추방이 이루어졌다.[42]

폴란드 정부는 이 지역의 폴란드화를 추진했다. 새로운 폴란드 지명을 결정하고, 독일 문화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진행되었다.[42][45] 건물, 예술 작품, 접시, 묘지 등에서 독일어 단어가 제거되었다.[45] '회복된 영토'는 피아스트 왕조와 관련된 명칭으로 덮였다.[42]

1946년에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세 번째 질문은 폴란드 국민이 새로운 서부 국경에 찬성하는지 여부였다. 공식 결과에 따르면 90% 이상이 찬성했다. 1950년에는 소련의 압력하에 오토 그로테볼 동독 총리와 요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총리가 츠고제레츠 조약을 체결하여 오데르-나이세 선을 양국 간의 국경으로 인정했다.[46]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전후,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다. 추방 과정에서 많은 독일인들이 사망했다. 오늘날 추산에 따르면 독일인 난민의 수는 1,400만 명이며, 그중 약 50만 명이 사망했다고 여겨진다.[66][67] 한편, 중앙 폴란드 출신의 폴란드인, 구 폴란드령에서 추방된 폴란드인 등이 이 지역에 정착했다.

5. 냉전 시대의 '구 독일 동부 영토' 문제

1949년부터 1970년까지 서독 정부는 1937년 독일 국경 내의 동부 독일 영토를 "폴란드 및 소련의 임시 행정 하에 있는 옛 독일 영토"라고 지칭했다.[48] 폴란드 정부는 회복 영토라는 문구를 선호하며 이 지역 일부가 수세기 전에 폴란드인에 의해 통치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1973년까지 독일 연방 공화국은 배타적 대표권을 주장하며 할슈타인 독트린에 따라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48]

빌리 브란트 총리 시기인 1970년대, 서독은 외교에서 '동방 정책'을 채택하여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고, 할슈타인 독트린의 요소를 포기했다.[49] 서독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존재와 오데르-나이세 선의 국제법적 유효성을 인정하면서, 당분간 독일 재통일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49] 이러한 접근 방식의 일환으로, 서독은 소련 (모스크바 조약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조약 (1970년)), 동독 (기본 조약 (1972년)) 및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조약 (1973년))와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68] 즈고제레츠 조약의 유효성은 연방 헌법 재판소가 1973년 동서독 간 기본 조약에 대한 판결에서 명시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동독, 서독, 그리고 베를린의 재통일을 달성하려는 장기적인 목표를 계속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역사 및 정치에서, 소위 "독일 문제"가 중요한 초점이었고, 냉전의 정치와 외교에 영향을 미쳤다. 1990년, 독일 재통일에 즈음하여 독일은 현재의 동부 국경을 공식적으로 독일 최종 규정 조약으로 승인했다.

현재도 폴란드 정부는 몰수된 개인의 자산 및 토지의 반환 및 배상에 대해 거부를 계속하고 있으며, 독일과 폴란드 양국 간의 문제가 되고 있다[59]

1920년~1945년에 상실된 독일 영토
연한 파랑: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상실한 영토
녹색: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폴란드로 할양된 영토 (회복 영토)
노랑: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소련으로 할양된 영토 (칼리닌그라드주)


추방자 기념비, 동프로이센, 단치히, 서프로이센,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동부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 상슐레지엔 및 (원래 오스트리아) 수데텐란트의 문장이 표시되어 있다.

5. 1. 서독의 입장 변화와 동방 정책

1949년부터 1970년까지 서독 정부는 1937년 독일 국경 내의 동부 독일 영토를 "폴란드 및 소련의 임시 행정 하에 있는 옛 독일 영토"라고 지칭했다.[48] 폴란드 정부는 회복 영토라는 문구를 선호하며 이 지역 일부가 수세기 전에 폴란드인에 의해 통치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1973년까지 독일 연방 공화국은 배타적 대표권을 주장하며 할슈타인 독트린에 따라 소련을 제외하고 동독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48]

빌리 브란트 총리 시기인 1970년대, 서독은 외교에서 '동방 정책'을 채택하여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고, 할슈타인 독트린의 요소를 포기했다.[49] 서독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존재와 오데르-나이세 선의 국제법적 유효성을 인정하면서, 당분간 독일 재통일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49] 이러한 접근 방식의 일환으로, 서독은 소련 (모스크바 조약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조약 (1970년)), 동독 (기본 조약 (1972년)) 및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조약 (1973년))와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68] 즈고제레츠 조약의 유효성은 연방 헌법 재판소가 1973년 동서독 간 기본 조약에 대한 판결에서 명시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동독, 서독, 그리고 베를린의 재통일을 달성하려는 장기적인 목표를 계속 유지했다.

5. 2. 독일 재통일과 국경 문제 해결

1990년 재통일 당시, 독일은 독일에 관한 최종 해결 조약과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을 통해 현재 동부 국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50] 이는 독일이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영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잔여 주권을 종료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지역에서 독일 관할 하에 직접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 줄어들었고,[50] 독일에 관한 최종 해결 조약에서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모든 영토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50] 독일의 국경 인정은 1990년 11월 14일에 체결된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에서 반복되었다.[50]

독일 재통일 과정에서 헬무트 콜 총리는 처음에는 국경의 최종적인 수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50] 나중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영토 변경을 재확인하여 추방자 연맹 사이에서 분노를 일으켰다. 한편, 일부 폴란드인들은 독일인들이 토지를 다시 사들이는 것을 통해 "두 번째 독일 침략"으로 1939년의 트라우마가 부활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다.

최종 해결 조약 제1조에 따라, 통일 독일은 동독, 서독, 베를린의 경계를 넘어 더 이상의 영토 주장을 포기하기로 약속했다.[50] 또한 독일 연방 공화국의 기본법이 수정되어, 해당 경계 밖의 영토를 이후에 허용할 수 있는 모든 헌법적 메커니즘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2004년 유럽 연합의 동쪽으로의 확대는 폴란드에서 살고 일하고 싶어하는 모든 독일인에게 허가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했다.[50] 독일 추방자와 난민은 이전 집을 방문하고 거주지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지만, 토지와 건물의 구매에는 일부 제한이 남아 있었다.[50] 폴란드는 2007년 12월 21일에 솅겐 지역에 가입하여 독일과의 국경에서 모든 국경 통제를 제거했다.[50]

독일의 일부 단체는 독일을 위한 영토 또는 독일 시민을 위한 재산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프로이센 신탁은 유럽 인권 재판소에 폴란드 정부를 상대로 회원들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압류된 재산에 대한 보상 또는 반환을 요구하는 청구를 제출하기도 했다.[51] 그러나 유럽 인권 재판소는 유럽 인권 협약이 협약을 비준하기 전에 해당 국가에 이전된 재산을 반환할 의무를 체결국에 부과하지 않기 때문에 ''Preussische Treuhand v. Poland'' 사건을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53]

6. 독일 재통일 이후의 상황

1990년 재통일 당시, 독일은 독일에 관한 최종 해결 조약과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을 통해 현재 동부 국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독일이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영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잔여 주권을 종료하는 것을 의미했다.[50]

2004년 폴란드의 유럽 연합(EU) 가입과 2007년 솅겐 지역 가입은 양국 간의 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 폴란드의 솅겐 지역 가입으로 독일과의 국경 통제가 제거되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독일 재통일 과정에서 처음에는 국경의 최종적인 수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영토 변경을 재확인하여 추방자 연맹의 분노를 일으켰다. 일부 폴란드인들은 독일인들이 토지를 다시 구매하는 것을 통해 "두 번째 독일 침략"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이는 예상보다 작은 규모로 발생했다. 폴란드의 발트해 해안은 독일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 1990년대까지 "향수병 관광"은 잃어버린 영토 반환에 대한 분노와 욕망으로 여겨졌지만, 현재는 선량한 향수 투어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센 신탁과 같은 일부 독일 단체들은 여전히 독일을 위한 영토 또는 독일 시민을 위한 재산을 주장하고 있다. 프로이센 신탁은 2006년 12월 유럽 인권 재판소에 폴란드 정부를 상대로 회원들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압류된 재산에 대한 보상 또는 반환을 요구하는 청구를 제출했다. 그러나 안나 포티가 폴란드 외무부 장관은 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52] 2008년 10월 9일, 유럽 인권 재판소는 ''Preussische Treuhand v. Poland'' 사건을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53]

독일 국가 민주당은 네오 나치 조직으로 묘사되며, 2006년 9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의회에서 6석을 획득한 후, 당 대표 우도 포이그트는 그의 당이 "역사적 국경" 내의 독일을 요구하고 현재의 국경 조약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선언했다.[54]

6. 1. 폴란드의 EU 가입과 양국 관계 발전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통일 독일 정권은 독일 최종 규정 조약의 조항을 수용하여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에 대한 모든 청구를 포기했다.[69] 같은 해 11월 14일에는 독일-폴란드 간에 국경 조약이 체결되어 국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69]

2004년 5월 1일 폴란드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발전하였다. 오데르-나이세 선에서의 통관 절차가 폐지되었고, 특별한 허가 없이 상대국에서 거주 및 취업이 가능해졌다.[69] 2007년 12월 21일부터 폴란드가 솅겐 조약에 가입하여 국경 경비와 검문도 폐지되면서 왕래가 더욱 자유로워졌다.[69]

폴란드의 EU 가입은 양국 간의 경제, 사회, 문화적 교류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국경 지역의 협력이 강화되면서 과거의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과거 독일 지배를 경험한 사람들이 감소하고 새로운 이주민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과거 주민들의 묘 참배 여행은 지역에서 점차 선의의 향수를 느끼는 여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69]

6. 2. 재산 반환 문제와 역사적 화해 노력

폴란드 정부는 몰수된 개인 자산과 토지의 반환 및 배상에 대해 거부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는 독일과 폴란드 양국 간의 문제로 남아 있다.[69] 과거 주민들이 고령화되고 독일 지배를 경험한 사람들이 감소하는 한편, 새롭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고향으로 삼는 주민들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독일 재통일 과정에서 헬무트 콜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승인하고 구 독일 동부 영토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는 추방자 연합의 반발을 샀지만, 폴란드 측의 우려를 해소하고 통일 실현에 필수적인 조치였다. 1990년 통일 독일 정권은 독일 최종 규정 조약의 조항을 수용하여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에 대한 모든 청구를 포기했고, 같은 해 11월 14일 독일-폴란드 간에 국경 조약이 체결되어 국경이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2004년 폴란드의 EU 가입으로 양국 간 통관 절차가 폐지되었고, 2007년 폴란드가 솅겐 조약에 가입하면서 국경 경비와 검문도 폐지되어 왕래가 더욱 자유로워졌다. 오늘날 폴란드 발트해 연안 지역에는 독일인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고 있으며, 과거 추방자들의 묘 참배 여행도 선의의 향수를 느끼는 여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프로이센 신탁과 같은 일부 단체는 여전히 해당 지역이 독일 영토이며, 자산은 독일 시민의 소유라고 주장한다.[70] 프로이센 신탁은 2006년 12월 유럽 인권 재판소에 재산 반환 소송을 제기했으나,[71] 2008년 10월 9일 유럽 인권 재판소는 이를 수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72]

6. 3. 극우 세력의 주장

독일에는 여전히 해당 지역이 독일 영토이며, 그 지역의 자산은 독일 시민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단체가 존재한다.[70] 프로이센 신탁은 2006년 12월, 폴란드 정부에 대해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시 빼앗긴 회원의 자산에 대한 보상 또는 반환을 요구하는 23개의 개별 요구를 유럽 인권 재판소에 제기했다.[70] 그러나 유럽 인권 재판소는 2008년 10월 9일, "프로이센 신탁 대 폴란드" 소송을 수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72]

독일 국가민주당 대표인 우도 포크트는 2006년 9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의회에서 6석을 확보한 후, 자당은 독일의 "역사적인 국경"을 요구하며, 현재의 국경 조약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73]

7. 결론

'구 독일 동부 영토' 문제는 20세기 유럽 역사의 복잡한 갈등과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문제는 단순한 영토 분쟁을 넘어, 민족, 국가, 정체성,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관련된 다양한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74] 독일폴란드는 오랜 갈등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 동부 영토는 독일사에서 다양한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공산주의 시대의 폴란드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지역의 일이라기보다는 '외국의' 사건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몰비츠 (1741년), 호엔프리트베르크 (1745년), 로이텐 (1757년), 그리고 초른도르프 (1758년)에서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승리, 1757년의 그로스예게르스도르프 전투와 1759년의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의 패배가 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1807년, 동프로이센의 아이라우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대륙군이 포메라니아코워브제크에 진을 치고, 포위된 콜베르크 포위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선전 영화 『콜베르크』의 모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힌덴부르크가 탄넨베르크와 마주리 호수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이러한 노력은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과거사 문제 해결과 역사적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평화 구축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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