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타 시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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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보타 시게코는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난 비디오 아티스트로,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하여 비디오 아트와 비디오 조각 분야에 기여했다. 도쿄 교육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백남준과 교류하며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 아트를 시작하여, 1970년대에는 《뒤샹니아나》 시리즈와 같은 비디오 조각 작품을 제작했다. 구보타는 백남준의 아내이자 동료 예술가로서, 비디오 아트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후에는 작품 전시와 유산을 관리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마르셀 뒤샹의 무덤》, 《뒤샹니아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바지나 페인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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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 시게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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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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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시게코 쿠보타 |
원어 이름 | 久保田 成子 |
출생일 | 1937년 8월 2일 |
출생지 | 일본 니가타현 니시칸바라군 마키 (현재 니가타시 니시구) |
사망일 | 2015년 7월 23일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뉴욕 |
국적 | 일본 |
분야 | 조각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아트 |
학력 | |
학력 | 도쿄 교육대학교 뉴욕 대학교 뉴스쿨 대학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데이비드 베어먼 (1969년 결혼, 이혼) 백남준 (1977년 결혼, 2006년 1월 29일 사별) |
추가 정보 | |
참고 자료 | 동문연 아카이브 데이터베이스 국립국제미술관 시게코 쿠보타 전시 |
2. 초기 생애 및 교육
구보타 시게코는 1937년 니가타현 니시카와라군 마키정(현: 니가타시 니시카와구)의 불교 사찰과 관련된 승려 집안에서 네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9][59]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성장했으며, 자신을 "종교적인 불교 가정 출신"이라고 묘사했다.[9][10] 아버지가 불교 승려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장례식을 자주 목격했고, 사찰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11]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녀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10][11]
1960년 도쿄 교육대학교에서 조각 학위를 받고 졸업한 후,[4] 시나가와구립 에바라 제2 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62] 이 시기부터 현대 무용가인 고모 邦千谷(본명: 쿠보타 요시에)의 집에서 하숙하며[62] 젊은 예술가들의 활동 거점이 된 고모의 연구소[62]에서 다양한 전위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고모 쿠니 치야는 쿠보타를 도쿄 기반의 실험 음악 그룹 그룹 온가쿠(Group Ongaku)에 소개했는데,[4] 이 그룹에는 코스기 다케히사, 시오미 치에코, 토네 야스나오 등이 멤버로 있었으며, 1960년대 초 테이프 레코더, 노이즈 뮤직, 아방가르드 공연 등을 실험했다.[4] 고모의 연구소에는 오노 가즈오, 히지카타 타츠미 같은 부토(舞踏) 무용가들도 드나들며 장르를 넘나드는 교류의 장이 되었다.[62]
1964년, 조지 마키우나스와의 편지 교환 후 플럭서스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다.[17] 이는 당시 일본 예술계에서 여성 예술가로서 인정받기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15] 뉴욕으로 떠나기 전 마키우나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예술가로서 살아가기 위해 뉴욕에 가는 것이 저의 유일한 희망"이라며 불안감과 함께 뉴욕에서의 활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17]
구보타 시게코는 비디오 아트가 널리 인정받기 전부터 이 분야와 뉴미디어에 헌신한 초기 예술가 중 한 명이다.[10] 1965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플럭서스 활동을 중심으로 초기 경력을 쌓았고, 이후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4] 그녀는 초기 비디오 제작에 소니 포터팩을 적극 활용했는데, 이는 개인이 휴대하며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소형 카메라 중 하나였다. 구보타는 포터팩 사용 경험을 여성의 관점에서 "포터팩과 나는 남성의 동반 없이 유럽과 일본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포터팩은 제 등뼈, 어깨, 허리를 지탱해 줍니다. 베트남 여성들이 아기를 업듯이 저는 포터팩을 등에 지고 혼자 여행합니다."라고 설명하며 기술과 여성의 주체적 활동을 연결했다.[10]
외가는 예술적인 분위기를 지녔다. 증조부 쿠보타 우사쿠는 귀족원 의원이었고, 외조부 쿠보타 야타로는 수묵화가(아호는 옹곡)였다.[60] 외조부의 영향으로 예술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며, 부모는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의 예술 공부를 지지했다. 쿠보타의 어머니는 도쿄 예술대학교의 초기 여성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니가타대학 교수에게 그림을 배우며 일찍부터 재능을 보여 니카회 전시회에 입선했고, '천재 소녀'로 불리며 주목받았다.[61] 고등학교 미술 교사이자 조각가의 영향과 당시 여성 조각가가 드물다는 점 때문에 조각가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61] 1956년 니가타현립 나오에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교육대학(현: 쓰쿠바대학 예술전문학군) 교육학부 예술학과 조소과에 진학했다.[4][61]
대학 재학 중 교원 양성 과정에 회의를 느끼고, 고교 시절 스승이었던 조각가 다카하시 키요시의 아틀리에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61] 이 시기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전학련)의 안보투쟁에도 참여했으며, 다카하시가 속한 신제작협회전에 두상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61] 초기부터 비정통적인 접근 방식으로 주목받았으며, 1954년 니카회 제8회 연례 전시회에서 수상한 꽃 그림은 "소녀가 그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강렬한 선과 붓놀림"이라는 평을 받았다.[4]
이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성향은 그녀를 도쿄의 아방가르드 예술계로 이끌었다. 이모이자 현대 무용가인 쿠니 치야의 소개로 실험 음악 그룹 그룹 온가쿠에 합류하게 되었다.[4] 코스기 다케히사, 시오미 치에코, 토네 야스나오 등과 함께 테이프 레코더, 노이즈 뮤직, 아방가르드 공연 등을 실험했다. 1962년에는 도쿄 분카 홀에서 존 케이지와 오노 요코를 만났는데, 그들의 비전통적인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케이지의 음악이 뉴욕에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일본 예술계에서 자신의 비정통성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과 공통점을 발견했다.[4]
오노 요코는 쿠보타를 비롯한 일본 예술가들이 플럭서스와 같은 미국 아방가르드 운동에 대해 알게 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1963년 오노의 아파트에서 플럭서스 악보를 접한 쿠보타는 그룹 온가쿠 멤버들과 함께 조지 마키우나스에게 자신들의 악보를 보내게 되었다.[4] 이를 계기로 플럭서스 서클과 교류하며 텍스트 악보,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12]
1963년 12월, 도쿄 신바시의 나이쿠아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첫사랑, 두 번째 사랑..."을 열었다.[13] 이 전시회는 앨런 캐프로의 '환경' 개념에 영향을 받은 설치 작업으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아 올린 종이 더미와 용접된 금속 조각으로 구성되었으며, 퍼포먼스 악보가 포함되었다.[14][15] 이 전시를 통해 하이레드 센터, 제로 지겐 등 아방가르드 그룹과 교류했지만, 일본 언론과 미술계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16] 쿠보타는 훗날 "여성 예술가는 일본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상했으며, 이는 그녀가 뉴욕으로 이주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15]
3. 일본에서의 전위예술 활동 (1960년대 초)
이러한 음악적 관심은 1962년 존 케이지가 일본 순회 공연을 할 때 우에노의 도쿄 문화회관에서 케이지와 오노 요코를 처음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4] 쿠보타는 케이지와 오노 요코 등이 기존 음악 관습을 파괴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자신의 비정통적인 예술이 뉴욕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4] 오노 요코는 쿠보타를 비롯한 일본 예술가들이 플럭서스(Fluxus)와 같은 미국의 아방가르드 운동에 대해 알게 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1963년 쿠보타는 오노의 도쿄 아파트를 방문하여 플럭서스 이벤트 악보를 보았고, 이는 쿠보타와 다른 그룹 온가쿠 멤버들이 플럭서스 창시자인 조지 마키우나스에게 자신들의 작품 악보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4] 이를 통해 쿠보타는 플럭서스 그룹과 연결되었고, 텍스트 악보에서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12]
1963년, 쿠보타는 제15회 요미우리 안데팡당전에 참가하여[62] 가는 금속 막대를 용접한 오브제와 원통형 기성품을 사용한 추상 조각을 출품하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다.[64] 같은 해 12월, 도쿄 신바시의 나이카 갤러리(内科画廊, 내과화랑)에서 첫 개인전 「1st. LOVE, 2nd. LOVE...」를 열었다.[13][62] 내과 진료소를 개조한 이 갤러리에서[14] 쿠보타는 "러브레터"로 비유한 구겨진 종이 조각들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아 올리고 흰 천으로 덮어 산처럼 만들었으며, 그 위에 요미우리 안데팡당전 출품작과 유사한 용접된 금속 조각을 전시했다.[15][65] 관람객은 작품을 보기 위해 종이 더미로 이루어진 산을 기어올라가야 하는 참여형 인스톨레이션이었다.[15][65] 이 전시에는 "당신에게 보낸 모든 사랑 편지로 바닥을 만들어라. 바닥에 흰 천을 깔아라. 스스로 입술을 깨물어라. 청중 중 콧수염이 있는 남자에게 키스해라."와 같은 지시문도 포함되었다.[14]
이 개인전을 계기로 쿠보타는 하이레드 센터, 제로 지겐과 같은 다른 아방가르드 그룹과 만나 협업하기도 했다.[16] 또한 하이레드 센터의 《쉘터 계획》, 오노 요코의 《모닝 피스》에 참여하고, 시노하라 우시오(篠原有司男) 등이 참여한 그룹전 「OFF MUSEUM」, 「토네 야스나오 개인전」, 「플럭서스 위크」 등에도 작품을 출품하며 동시대 전위예술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65]
그러나 쿠보타는 첫 개인전에 대해 일본 신문이나 미술 잡지로부터 어떠한 비평도 받지 못했다.[15][78] 당시 활동하던 주요 미술평론가 타키구치 슈조, 나카하라 유스케, 히가시노 요시아키, 미키 타몬 등에게 전시 안내장과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당하자 크게 실망했다.[78] 쿠보타는 훗날 "여성 예술가는 일본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상하며[15][79] 뉴욕으로 이주하여 활동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78] 1964년 5월, 도쿄 소게츠 아트센터(草月会館)에서 열린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참여하고 있던 플럭서스에 대한 관심을 더욱 키웠고,[65] 이후 조지 마키우나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뉴욕행을 준비했다.[17]
4. 뉴욕 이주와 플럭서스 참여 (1964년 ~ 1970년대 초)
1964년 7월 4일, 친구 시오미 치에코와 함께 미국에 도착하여 마키우나스가 마련해 준 맨해튼 소호의 아파트에서 생활을 시작했다.[66] 곧 플럭서스의 공동 식사 모임인 "디너 코뮌(Dinner Commune)" 등에 참여하며 플럭서스 공동체 활동에 합류했다.[65][66] 뉴욕 도착 직후 백남준과 재회하여 연인 관계로 발전했으나, 백남준이 샬럿 무어먼과의 작업에 몰두하면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 시기 여러 차례 열린 "영속적인 플럭스페스트(Perpetual Fluxfest)"에서 에릭 안데르센이나 오노 요코 등의 퍼포먼스에 참여했으며, 자신만의 퍼포먼스도 선보였다.[67] 특히 1965년 7월 4일 시네마테크(Cinemateque)에서 열린 플럭스페스트에서는 여성의 성기에 붓을 달아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인 《질 그림(Vagina Painting)》을 발표하여 주목받았다.[67] 후일 쿠보타는 이 퍼포먼스가 마키우나스와 백남준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연구를 통해 쿠보타가 직접 기획하고 준비한 자발적인 작품이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67][58]
1960년대 후반, 많은 플럭서스 회원들이 뉴욕을 떠났지만 쿠보타는 뉴욕에 남아 마키우나스를 계속 도왔고, 이로 인해 마키우나스로부터 "플럭서스 부의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66] 그녀는 마키우나스가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평생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18] 또한, 도쿄의 하이레드 센터와 같은 일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활동을 마키우나스와 다른 플럭서스 회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등 일본과 뉴욕의 아방가르드 예술계를 연결하는 역할도 했다.[19]
뉴욕 정착 후 학업도 병행하여 뉴욕대학교와 뉴스쿨(1965-1967), 브루클린 박물관 미술학교(1967-1968)에서 공부했다.[4] 또한 전자 음악 퍼포먼스 그룹 "소닉 아츠 유니온(Sonic Arts Union)"의 활동에도 참여했다.[68] 1967년에는 그룹 멤버인 작곡가 데이비드 버먼(David Berman)과 결혼했으나 1970년에 이혼했다.[68] 1971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백남준을 다시 만나 함께 뉴욕으로 돌아왔다.
1971년까지 일본 미술 잡지 ''비주츠 테초(美術手帖, Bijutsu Techo)''의 뉴욕 주재 국제 평론가로 활동하며 뉴욕 미술계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22] 1972년에는 더 키친에서 열린 제1회 여성 비디오 페스티벌 조직에 기여했으며,[20] 1972년부터 1973년까지는 메리 루시어, 세실리아 산도발, 시인 샬럿 워렌 등과 함께 여성 협업 그룹 "화이트 블랙 레드 앤 옐로우(White Black Red & Yellow)"(때로는 미국 국기를 연상시키는 "레드 화이트 옐로우 앤 블랙(Red White Yellow & Black)"으로도 불림)를 결성하여 더 키친에서 세 차례의 멀티미디어 콘서트를 열었다.[16]
5. 비디오 아트와 비디오 조각 (1970년대 초 ~ 2015년)
1970년경, 구보타는 백남준과 함께 캘아츠에서 가르치며 Paik/Abe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클로즈업 자화상 등 초기 비디오 실험을 진행했다. 이 시기 제작된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의 하루''는 이후 ''자화상''으로 제목이 바뀌어 조각 작품 ''비디오시''(1970-75)에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10] 이러한 작업을 통해 구보타는 개인적, 예술적 여정을 기록하고 텍스트나 오디오 해설을 덧붙이며, 크로마키, 매트, 색채화 등 초기 영상 처리 기법을 활용하는 자신만의 "비디오 일기" 스타일을 구축했다. 이는 비디오 다큐멘터리와 비디오 아트를 융합하여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을 표현하려는 시도였다.[25] 1972년, 구보타는 포터팩을 들고 혼자 유럽을 여행하며 촬영한 영상으로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 《부러진 일기: 유럽을 하루 반인치로》를 제작하여 뉴욕의 더 키친에서 발표했다.[67] 이 시기는 소형 비디오 카메라의 등장으로 많은 여성 작가들이 비디오 아트를 시작하던 때였으며, 구보타 역시 메리 루시에(Mary Lucier) 등 동시대 여성 작가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협업했다.[67]
1970년대 중반, 구보타는 많은 비디오 작가들이 작품의 조형성에 주목하지 않는 점에 아쉬움을 느끼고, 입체 작품으로서의 비디오 아트, 즉 "비디오 조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70] 그녀는 친구이자 예술가인 앨 로빈스와 협력하여 합판, 판금, 마일러 등의 재료로 3차원 구조물을 만들고 그 안에 비디오를 통합했다. 이를 통해 비디오 아트가 기존 예술 형식에 비해 "취약하고", "피상적이며", "일시적"이라는 통념에 도전하고자 했다. 또한 텔레비전 하드웨어 자체를 조각적 형태로 위장함으로써 주류 미디어 및 기업 기술과의 연관성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녀는 "저는 사람들이 TV 브랜드를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단지 조각으로만 보이게 하기 위해 합판을 사용했습니다."라고 말했다.[13]
그녀의 첫 비디오 조각은 1975년 더 키친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발표된 《비디오 포엠》이다.[70][71] 이 작품은 TV 모니터를 자루로 덮고, 송풍기를 이용해 자루가 유기적으로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자루에 달린 지퍼 창을 통해 무음으로 입을 열고 닫는 자신의 얼굴 영상을 보여주었다.[70][71] 이 자루는 원래 "그룹 음악"(グループ・音楽)의 고스기 타케히사(小杉武久)의 퍼포먼스를 위해 구보타가 만든 것이었다.[71]
1975년부터 1990년까지, 구보타는 생전에 두 번 만나 깊은 유대감을 느꼈던 마르셀 뒤샹에게 영감을 받은 "뒤샹피아나(Duchampiana)" 시리즈를 집중적으로 제작했다.[22][70] 1976년과 1977년 르네 블록 갤러리에서 열린 두 차례의 개인전을 통해 이 시리즈를 발표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비디오 조각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70]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 후반부터 구보타는 "뒤샹피아나" 시리즈와 병행하여 자연을 주제로 한 비디오 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산, 강, 폭포 등의 자연 형태를 모방한 조각 구조물에 색이 변형되거나 단편화되고 반복되는 비디오 이미지를 결합했다.[26] 특히 미국 서부의 광활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풍경을 유목민적 삶과 자아 성찰의 메타포로 활용했다. 《세 개의 산》(1976-79)과 《강》(1979-81) 같은 작품은 조각을 통해 장소성을 환기시키고, 비디오를 통해 풍경과 조각의 의미를 확장했다.[27] 《강》에서는 거울 조각을 흩뿌린 수로에 실제로 물을 흘려보내며 물과 비디오의 유사성(정보 전달, 반사, 흐름)을 탐구했다.[7][73] 구보타는 물과 비디오의 관계를 "강은 물리적/시간적 속성과 정보를 전달하고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특성에서 비디오에 복제됩니다... 강은 먼 거리로 분리된 공동체를 연결하고... 충전된 전자는 어떤 이전 시간으로부터 전달된 정보를 담은 물방울처럼 수신기 화면을 가로질러 흐릅니다."라고 설명했다.[7] 《나이아가라 폭포》(1985-87) 역시 물을 직접 사용했으며, 《가레산스이》(1987-88) 등에서는 거울 표면을 활용해 영상뿐 아니라 관람객과 주변 환경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다.[73] 그녀는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산등성이에 비디오 모니터를 설치하는 "구조적 비디오" 작품, 즉 랜드 아트적 개입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는 자연과 기술의 융합이라는 그녀의 평생의 관심사를 보여준다.[10]
1990년대에는 생태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바람꽃(붉은 테이프)》(1993), 《비디오꽃》(1993), 《풍차 II》(1993), 《새 II》(1994), 《비디오나무》(1995) 등 작은 비디오 모니터가 내장된 뒤틀린 금속 형태의 설치 작품들을 제작했다.[26] 이러한 구보타의 하이브리드 작업은 때로 도널드 저드와 같은 미니멀리스트 조각과 유사성을 보이면서도, 그 운동의 남성 중심적이고 단일 문화적인 경향과는 차별화되는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16]
구보타는 비디오 카메라를 다루는 것을 넘어 재생 데크 편집, 컴퓨터 그래픽 통합, 자막 삽입, 재편집, 반복, 영상 순서 변경 등 다양한 기술을 활용하여 비디오 매체의 형식적 가능성을 깊이 탐구했다.[16] 후기 작업에서는 비디오가 기록된 사건을 저장하고 접근하는 기술적 특성과 자기 성찰적, 자서전적 기억 과정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기도 했다.
예술 활동 외에도 구보타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안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의 비디오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많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67] 또한 1982년 도쿄에서 열린 "도쿄-뉴욕 비디오 익스프레스" 전시를 통해 뉴욕의 비디오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고, 관련 심포지엄을 MoMA에서 개최하는 등 미국과 일본 간 비디오 아트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67]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아버지의 투병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품 ''My Father''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구보타 시게코의 생전 마지막 개인전은 2007년 마야 스탠더드 갤러리에서 열린 「남준파이크와 나의 인생」이었다.[85]
5. 1. 백남준과의 관계
1964년 일본 도쿄 쇼게츠홀 공연에서 백남준을 처음 만났다. 이후 뉴욕으로 건너가 플럭서스 본부에서 백남준과 재회하며 연인 사이로 발전했지만, 백남준이 샬럿 무어맨과의 공연에 집중하면서 갈등을 겪었다. 구보타는 1967년 작곡가 David Behrman|데이비드 버먼eng과 결혼했으나[68], 1969년[28] 혹은 1970년[68]에 이혼했다.
1971년 캘리포니아에서 백남준을 다시 만나 함께 뉴욕으로 갔고, 1974년에는 작업실을 마련했다. 구보타는 백남준에게 비디오 아트를 배웠고, 이를 통해 현대 미술계에서 중요한 작가로 성장했다. 1977년, 암 진단을 받아 위독한 상황에서 백남준과 재혼했으며, 백남준의 암 보험 덕분에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28][29]
두 사람은 30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예술적으로 협업했지만, 구보타는 '비디오 조각'이라는 개념이 자신의 독자적인 아이디어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처음에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그냥, 아무것도 없이 맨 그대로 사용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에게 말했죠. 텔레비전 자체는 작품이 아니라고. 어떤 가게에서든 찾을 수 있으니, 뭔가를 더해야 한다고. 그는 제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래서 1960년대 후반에 제가 직접 하기로 결심했죠."라고 밝히며 자신의 독창성을 강조했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디오 아트, 특히 비디오 조각 분야에서 구보타의 선구적인 역할은 오랫동안 백남준의 명성에 가려져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구보타는 그의 주요 간병인이 되어 작품 활동과 일상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고,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작품 활동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두 사람은 2006년 백남준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다.
6. 페미니즘과의 관계
구보타 시게코의 작품이 페미니즘으로 묘사될 수 있는지 여부는 그녀의 작품 연구 및 발표에서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31][32] 켈리 오델(Kelly O'Dell)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이 쿠보타가 마르셀 뒤샹, 잭슨 폴록, 이브 클랭과 같은 남성 예술가들을 참조한 것을 이용하여, 남성적 표현에 치우친 서구 정전에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을 위한 예술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쿠보타의 작품을 해석한다고 지적했다.[33]
그러나 쿠보타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페미니즘으로 규정하는 것을 꺼렸다. 브루클린 레일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원한다면 나를 페미니스트 범주에 넣을 수 있지만, 나는 예술가로서 내 작품 외에는 다른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3] 하지만 많은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이라는 명칭 자체가 페미니스트 주장을 역사나 미술사의 별개 흐름으로 구분함으로써, 성과 정체성에 대한 더 넓은 아이디어가 예술 담론에 통합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4] 쿠보타가 페미니스트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메리 루시어와 같은 가까운 동료들은 그녀를 페미니스트로 여기곤 했다. 루시어는 쿠보타가 "일본 여성 예술가로서 자신의 지위에 불만을 품고 사소한 불의에도 쉽게 분노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였다고 회상했다.[35] 쿠보타는 자신의 작품에 페미니즘적 주제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성 문제, 여성성, 남성의 시선, 그리고 신체와 기술 및 자연의 교차점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도록 했다.[36]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은 쿠보타를 포함한 여성 예술가들이 플럭서스 운동 내에서 소외되고 주변화되었던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37] 요시모토 미도리(Midori Yoshimoto)는 쿠보타의 가장 명백하게 성(性)과 관련된 작품인 ''질 그림''(Vagina Painting|영어)[80]이 플럭서스 동료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언급했다. 이는 오노 요코나 캐롤리 슈네만의 퍼포먼스가 여성적 주제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플럭서스적이지 않다"고 평가절하되었던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3년 전시 카탈로그 ''플럭서스의 정신 속에서''에서 미술사학자 크리스틴 스타일스는 쿠보타의 ''질 그림''이 "여성 해부학의 코드에 따라 액션 페인팅을 재정의했다"고 평가하며, "월경 주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여성의 내면에 있는 생식/창조 연속선을 그녀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후 자신의 예술과 삶에서 경험한 변화와 성장의 시간적 순환과 비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38]
''질 그림''은 1965년 7월 4일 뉴욕 시네마테크(Cinemateque)에서 열린 '영원한 플럭스페스트'(Perpetual Fluxfest)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다.[41][42][81] 이 퍼포먼스에서 쿠보타는 바닥에 놓인 큰 종이 위에 쪼그리고 앉아, 속옷 가랑이에 부착한 붓에 핏빛의 붉은 물감을 묻혀 추상적인 선들을 그렸다.[43] 이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나 이브 클랭이 여성의 몸을 도구처럼 사용했던 '푸른 시대의 인체 측정법'(Anthropometrics of the Blue Period|영어, 1960)에 대한 여성적 대응으로 자주 해석된다.[44] 이브 클랭이 푸른 물감을 묻힌 여성 모델의 몸을 캔버스에 찍어낸 것과 달리, 쿠보타의 붉은 물감은 월경혈을 연상시키며, 동시에 폴록의 드리핑 기법에서 나타나는 남성적 사정 행위와도 대조를 이룬다. 쿠보타는 남근이 부재한 지점에 붓을 위치시킴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여성적 권한 부여를 시도했으며, 붓의 움직임은 그녀의 문화적 배경인 서예를 떠올리게 한다.[45]
이 작품의 급진성은 그 제작 배경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다소 복잡한 측면을 가진다. 쿠보타는 말년에 이 퍼포먼스가 조지 마키우나스와 백남준이라는 두 남성 예술가의 "간청" 혹은 "의뢰"로 이루어졌다고 회상했다.[39][58] 이 증언의 진위는 불확실하지만[58], 만약 사실이라면 그녀의 가장 유명한 퍼포먼스 중 하나가 남성 중심적 환경 속에서 여성성을 에로틱하게 소비하려는 외부의 압력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쿠보타는 이후 ''질 그림''과 유사한 방식의 퍼포먼스는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39] 또한, 실제 퍼포먼스에서 붓을 속옷에 고정했는지, 아니면 동료들의 증언처럼 신체 내부에 삽입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58] 그럼에도 ''질 그림''은 쿠보타가 치밀하게 준비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거의 유일한 퍼포먼스 작품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58] 초기에는 남성 중심의 플럭서스 내부에서 비판받기도 했지만, 이후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선언적 행위로 재평가받았다.[10] 요시모토 미도리는 저서 ''Into Performance: Japanese Women Artists in New York''에서 이 작품과 일본 게이샤의 기예 중 하나로, 신체에 붓을 삽입하여 글씨를 쓰는 '하나덴샤'(hanadensha, 花電車)와의 연관성을 제기하기도 했다.[46]
한편, 남편인 백남준의 명성에 가려 쿠보타의 예술적 성취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은 성차별적인 예술계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사례로 지적되기도 한다.
쿠보타가 페미니스트 비디오 그룹 '레드, 화이트, 옐로우, 블랙'(Red, White, Yellow, Black|영어)을 공동 설립한 점 외에도, 학자들은 그녀의 비디오 아트 작업 자체가 제2물결 페미니즘의 부상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음을 지적한다. 큐레이터 에밀리 월링턴(Emily Wallington)은 비디오 매체가 "역사와 가부장적 관습의 무게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했기 때문에 여성들이 남성에 의해 재현되는 대신 스스로를 이미지화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고 분석했다.[40] 쿠보타와 동료 여성 예술가들은 이 새로운 실험적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예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7. 주요 작품
구보타 시게코는 백남준에게 비디오 아트를 배운 후,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디오 조각과 설치 작품으로 현대 미술계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구보타의 작품은 종종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해석되기도 하지만, 작가 본인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것을 주저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보타의 작품은 성, 여성성, 남성 중심의 시선, 기술과 자연의 관계 등 젠더 이슈와 관련된 주제를 탐구하며, 남성 중심적인 플럭서스 운동이나 미술계 전반에서 여성이 겪는 소외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36][37]
=== 초기 퍼포먼스 ===
- '''《질 페인팅》'''(Vagina Painting, 1965): 1965년 7월 "불멸의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아트. 음부에 붓을 꽂고 붉은 물감을 묻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로,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81] 이 퍼포먼스는 이브 클랭의 인체 측정학이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과 같은 남성 작가들의 작업을 여성의 신체와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읽히며, 페미니즘 아트의 중요한 사례로 언급된다.[38] 구보타는 후일 이 퍼포먼스가 백남준과 조지 마치우나스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으나[58], 여성의 신체를 주체적으로 드러낸 급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 구보타는 유사한 퍼포먼스를 반복하지 않았다.[39]
=== 비디오 조각 및 설치 ===
구보타는 1970년대 초부터 비디오를 조각적 매체로 활용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텔레비전 모니터 자체를 오브제로 사용하고, 이를 나무, 금속, 거울, 물 등 다양한 재료와 결합하여 독특한 형태의 비디오 조각을 창조했다.
==== 뒤샹피아나(Duchampiana) 시리즈 (1972-1990) ====
마르셀 뒤샹에 대한 오마주로 제작된 연작이다. 구보타는 뒤샹의 작품과 개념을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재해석했다.
- '''《마르셀 뒤샹의 무덤》'''(Marcel Duchamp's Grave, 1972–1975): 프랑스 루앙에 있는 뒤샹의 무덤을 방문한 영상을 여러 대의 모니터에 담아 합판 구조물에 설치한 작품. 바닥의 거울은 영상을 반사하며 공간을 확장한다. 1975년 뉴욕 더 키친에서 처음 전시되었다.[82]
- '''《비디오 체스》'''(Video Chess, 1968-1975): 1968년 뒤샹과 존 케이지가 체스를 두는 영상[49], 그리고 옷을 입은 구보타 자신과 벌거벗은 백남준이 체스를 두는 영상을 함께 보여주는 작품이다.[83] 이는 뒤샹의 작품 속 성 역할을 전복시키려는 시도로 해석되며, 당시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ude Descending a Staircase, 1975-1976): 뒤샹의 동명 회화 작품을 비디오 조각으로 재해석한 구보타의 대표작이다.[84] 나무 계단 구조물에 4대의 모니터를 설치하고, 여성이 계단을 내려오는 영상을 반복 재생한다. 이 작품은 비디오 아트로는 처음으로 MoMA에 소장되었다.[84]
- '''《문》'''(Door, 1976–1977): 뒤샹의 작품 《문: 11, 루 라레》(Door: 11, rue Larrey)를 참조하여 만든 설치 작품. 두 개의 문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열리면 다른 하나가 닫히는 구조이며, 내부 모니터에서는 뒤샹의 이미지와 목소리가 담긴 영상이 재생된다.
- '''《자전거 바퀴》'''(Bicycle Wheel, 1983-1990):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 《자전거 바퀴》를 차용한 작품. 실제 자전거 바퀴의 살에 소형 모니터를 부착하여 회전시키면서 영상을 보여준다. 여러 버전이 제작되었다.
==== 메타-마르셀(Meta-Marcel) 시리즈 (1976-1991) ====
뒤샹의 작품 '프레시 위도우'(Fresh Widow)를 참조하여 창문 형태의 구조물 뒤에 비디오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연작이다.[72]
- '''《창 (눈)》'''(Window (Snow), 1976–1977): 창문 너머로 보이는 텔레비전 스노우 노이즈를 마치 눈(Snow)처럼 보이게 한 초기 작품.[72]
- '''《창 (꽃)》'''(Window (Flowers), 1983): 창문에 꽃 영상을 투사한 작품.[72]
- '''《창 (별)》'''(Window (Stars), 1983): 창문에 별 영상을 투사한 작품.[72]
- '''《창 (눈과 컴퓨터 글씨)》'''(Window (Snow With Computer Writing), 1991)
==== 리버(River) (1979-1981) ====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든 초승달 모양의 구조물에 물을 채우고, 그 위에 설치된 3대의 모니터 영상이 수면에 반사되도록 한 작품이다.[47] 물결치는 수면 위에 비친 영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액체 같은 현실"을 만들어낸다.[7] 이 작품은 1983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되었고, 이듬해 미술 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 표지를 장식하며 구보타를 대표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기타 주요 비디오 조각 및 설치 ====
- '''《비디오 시》'''(Video Poem, 1968–1976): 보라색 나일론 가방의 틈 사이로 작가의 자화상 비디오를 볼 수 있게 만든 작품. 이 가방은 일본의 예술가 고스기 타케히사가 제작한 것으로, 이를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남성적 권위에 도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45][71]
- '''《세 개의 산》'''(Three Mountains, 1976–1979): 산과 피라미드 형태의 합판 구조물에 모니터를 내장하여 그랜드 캐니언 등 자연 풍경 영상을 보여주는 작품.
- '''《나이아가라 폭포》''' 시리즈 (Niagara Falls I, II, III, 1985-1987): 여러 대의 모니터로 사계절의 폭포 이미지를 보여주고 실제 물이 흐르도록 한 대형 설치 작품.
- '''《아담과 이브》'''(Adam and Eve, 1989–1991): 모니터가 내장된 실물 크기의 로봇 인형 두 개를 이용한 작품.
- '''《소변 보는 소년》'''(Pissing Boy, 1993): 깡통에 소변을 보는 로봇 조각으로, 구보타는 이 작품이 백남준을 묘사한 것이라고 언급했다.[48]
- '''《백남준 I과 II》'''(Nam June Paik I and II, 2007): 금속 파이프와 모니터로 백남준의 신체를 형상화하고, 그와 함께한 휴가 영상을 보여주는 헌정 작품.
- '''비디오 하이쿠-걸이 작품''' (Video Haiku-Hanging Piece, 1981): 폐쇄 회로 카메라가 장착된 둥근 텔레비전이 지름 약 106.68cm의 오목한 플라스틱 거울 위에 매달려 이미지를 비추는 작품.
=== 주요 비디오테이프 ===
구보타는 조각 및 설치 작업 외에도 다수의 단채널 비디오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들은 주로 자신의 경험과 주변 인물, 여행 등을 기록한 비디오 일기 형식을 띤다.
- '''《마르셀 뒤샹과 존 케이지》'''(Marcel Duchamp and John Cage, 1972): 마르셀 뒤샹과 존 케이지가 체스를 두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49]
- '''《깨진 일기: 하루 반인치의 유럽》'''(Broken Diary: Europe on 1/2 Inch a Day, 1972): 포르타팩 카메라를 들고 유럽을 여행하며 기록한 비디오 일기. 요제프 보이스와의 만남, 뒤샹의 무덤 방문 등이 담겨 있다.[50] 저예산 여행의 현실을 보여주며 당시 유행하던 여행 안내서의 환상을 깬다.[16]
- '''《나의 아버지》'''(My Father, 1973-1975): 암으로 임종을 맞은 아버지를 지켜보는 자신의 슬픔을 기록한 영상. 아버지와 함께 TV를 보던 과거 영상과 현재 자신의 모습을 교차시키며 죽음과 기억의 문제를 다룬다.[51][11]
- '''《비디오 걸스와 나바호 하늘을 위한 비디오 송》'''(Video Girls and Video Songs for Navajo Sky, 1973): 나바호족 보호구역에서의 경험을 담은 초현실주의적 영상 일기.[52]
- '''《한국 여행》'''(Korean Adventure, 1984): 백남준이 34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여 가족과 조상의 묘지를 찾는 여정을 담은 영상.[53]
- '''《한국 무덤》'''(Korean Grave, 1993): 백남준에게 헌정한 작품.
이 외에도 플럭서스 관련 오브제(《플럭서스 여행 가방》, 1964; 《플럭서스 냅킨》, 1965; 《플럭서스 알약》, 1966), 자연 풍경을 담은 비디오 조각(《록 비디오: 벚꽃》, 1981, 1986; 《녹색 설치 작품》, 1983; 《마른 산, 마른 물》, 1987–88), 신체와 치유를 주제로 한 작품(《성적 치유》, 1998), 기타 영상 작업(《소호 비누/빗물 피해》, 1985; 《두 눈을 가진 조지 마키우나스 1972, 한 눈을 가진 조지 마키우나스 1976》, 1994;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1999; 《마이애미의 겨울》, 2005-2006)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54]
구보타의 작품은 더 키친(1972, 1975), 에버슨 미술관(1973, 75), 레네 블록 갤러리(1976), 도큐멘타 6(1977) 및 8(1987), MoMA 프로젝트(1978), 휘트니 비엔날레(1983) 등 주요 미술 기관과 행사를 통해 소개되었으며, 1991년 뉴욕 뮤지엄 오브 더 무빙 이미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사후에는 2021년 일본의 니가타현립근대미술관, 국립국제미술관, 도쿄도현대미술관 등에서 대규모 회고전 「Viva Video! 쿠보타 시게코전」이 개최되었다.[76][57][77]
8. 사망 및 유산
1996년 남편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구보타는 간병에 전념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74] 이후 백남준의 재활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며 그를 주제로 한 작업을 재개했다.[74][85] 2000년에는 랜스 펑 갤러리(Lance Fung Gallery)에서 백남준의 재활을 다룬 "섹슈얼 힐링" 개인전을 열었고,[74][85] 백남준 사후인 2007년에는 마야 스탠더드 갤러리(Maya Stendhal Gallery)에서 "남준파이크와 나의 인생" 전시를 개최했는데, 이는 그녀의 생전 마지막 개인전이 되었다.[74][85]
구보타 시게코는 2015년 7월 23일, 뉴욕 맨해튼의 한 병원에서 유방암 투병 끝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3][75][56]
사후 그녀의 유산을 관리하고 알리기 위해, 남편 백남준의 오랜 협력자이자 가족의 친구였던 예술가 노먼 발라드(Norman Ballard)가 유언 집행자로 임명되었다.[55] 발라드는 구보타가 맨해튼 소호에서 거주했던 역사적인 집에 쿠보타 시게코 비디오 아트 재단(Shigeko Kubota Video Art Foundation)을 설립하고 창립 이사가 되었다.[55]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7년 후인 2022년, 뉴욕 현대 미술관(MoMA)과 도쿄 현대 미술관은 그녀의 삶과 예술을 기리는 전시회를 공동으로 개최했다. MoMA는 ''리퀴드 리얼리티(Liquid Reality)''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대표적인 비디오 조각들을 선보였고, 도쿄 현대 미술관은 ''비바 비디오!(Viva Video!)''라는 제목으로 이전에 전시되지 않았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24] 구보타는 생전 많은 예술 활동에서 애도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으며, 사후 그녀의 이름으로 설립된 재단과 미술관 전시를 통해 그녀의 예술적 유산이 기려지고 있다.[55]
저서로는 『Shigeko Kubota Video Sculpture』 와 『Shigeko Kubota』 등이 있으며, 1973년부터 1975년에 걸쳐 아버지의 투병 생활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품 「My Father」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9. 평가 및 영향
일본에서 10대 시절부터 '천재 소녀'로 불리며 일찍이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았으나[9], 비정통적인 예술 접근 방식과 당시 일본 미술계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성 예술가로서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15] 이러한 경험은 그녀가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옮겨 플럭서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국제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4][17]
뉴욕에서 백남준과의 교류를 통해 비디오 아트를 접하게 된 구보타는[11]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디오 조각 세계를 구축하며 현대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가 꼽힌다. 불교 집안 배경은 그녀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쳐 선(禪) 사상이 반영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으며[10],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기도 했다.[11]
구보타는 창작 활동 외에도 교육과 큐레이팅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비디오 아트 분야의 발전에 기여했다. 시각예술학교, 브라운대학교, 시카고 미술대학 등 여러 교육 기관에서 강의했으며[20], 1972년 더 키친(공연장)에서 열린 최초의 여성 비디오 페스티벌 조직에 참여했다.[20] 또한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비디오 큐레이터로서 활동하며[16] 초기 비디오 아트의 정립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자 예술 인터믹스와 협력하여 비디오 아트 리뷰를 발표하는 등[21] 비디오 아트 생태계 조성에도 힘썼다.
그녀의 작품은 뉴욕 현대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24], 1991년 뉴욕의 미국 이동 이미지 박물관에서는 그녀의 30년에 가까운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16] 2015년 타계 이후에도 그녀의 예술적 유산은 꾸준히 재조명받고 있으며, 2022년에는 뉴욕 현대 미술관과 도쿄 현대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었다.[24] 그녀의 유산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쿠보타 시게코 비디오 아트 재단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23]
특히 1965년 뉴욕 시네마테크에서 선보인 '질 그림(Vagina Painting)' 퍼포먼스는 당시로서는 매우 전위적이고 도발적인 시도로 평가받으며, 이후 페미니즘 미술 담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16] 또한 일본 미술 잡지 ''Bijutsu Techo''의 뉴욕 통신원으로 활동하며(1971년까지) 뉴욕 미술계 소식을 일본에 전하고, 동서양 미술계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역할도 수행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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