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철동력차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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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철동력차노동조합(Dōrō)은 1951년 전국철도노동조합(Kokuro)에서 분리되어 결성된 일본의 노동조합이다. 기관차 승무원 중심의 직능 조합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동력차 조종사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1960년대에는 강력한 노동 운동을 전개하며 영향력을 키웠으나, 내부 파벌 갈등과 국철 민영화 과정에서 분열과 합병을 겪었다. 민영화 이후 해고된 노동자들의 소송이 이어졌으며, 일부 조합원은 일본 철도 노동조합총연합회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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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 국철노동조합
국철노동조합은 1946년 일본국유철도 설립 준비 과정에서 결성되어 JNR 직원의 대부분을 조직했던 거대 노동조합이었으나, 민영화 반대 투쟁 실패와 조합원 수 급감으로 몰락하였으며, 현재는 다른 노동조합들이 일본 철도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다. -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 일본교직원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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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철노동조합은 1946년 일본국유철도 설립 준비 과정에서 결성되어 JNR 직원의 대부분을 조직했던 거대 노동조합이었으나, 민영화 반대 투쟁 실패와 조합원 수 급감으로 몰락하였으며, 현재는 다른 노동조합들이 일본 철도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다. - 일본국유철도의 노동조합 - 전국철동력차노동조합
전국철동력차노동조합은 1974년 국철동력차노동조합에서 분리되어 국철 분할 민영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다가 1999년 다른 노동조합들과 통합되어 해산한 일본의 철도 노동조합이었다. - 혁마르파 - 반제국주의 반스탈린주의
반제국주의 반스탈린주의는 구로다 간이치가 주창한 사상으로 스탈린주의와 제국주의의 동시 타도를 주장하며, 소련을 적색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기존 공산당을 혁명의 저해 물질로 보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한다. - 혁마르파 - 전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
전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JR총련)는 1987년 국철 분할 민영화 당시 결성된 일본의 철도 관련 노동조합 연합체로, 민영화 반대 노조원 고용 배제 등의 논란에 휩싸였다.
국철동력차노동조합 | |
---|---|
기본 정보 | |
명칭 (한국어) | 국철동력차노동조합 |
명칭 (일본어) | 国鉄動力車労働組合 (Kokutetsu dōryokusha rōdōkumiai) |
명칭 (영어) | National Railway Locomotive Engineers' Union |
약칭 | NRMW 동노 (Dōrō) |
조직 | |
종류 | 일본국유철도의 동력차 관련 노동자 조직 |
목적 | 조합원의 노동 조건 유지 및 개선,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 운수 산업을 통한 민주적 국가 경제 발전 기여 |
본부 | 도쿄도 시나가와구 가미오사키 기관차 회관 |
간부 호칭 | 중앙집행위원장 |
역사 | |
전신 | 일본국유철도기관차노동조합 (1959년 7월 24일 설립) |
설립 | 1951년 5월 24일 |
설립 장소 | 교토시 노동회관 (일본국유철도기관차노동조합 결성 대회) |
해산 | 1987년 2월 2일 |
승계 | 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 |
규모 | |
조합원 수 (1970년) | 61,650명 |
가맹 | |
가맹 단체 |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국제운수노련 (ITF) |
관련 조직 | |
관련 조직 |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 |
기타 | |
관련 단체 | 국철노동조합 국철치바동력차노동조합 전국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 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 |
2. 역사
1950년(쇼와 25년) 국철노동조합(국노)의 기관사 대우 관련 운동 방침에 반발하여, 국노 기관차 협의회를 모체로 한 '''일본국유철도 기관차 노동조합'''(기노)이 1951년 5월 24일 결성되었다. 증기 기관차 운전에 필요한 숙련 기술과 솥 불넣기 등 기관차 조작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현장 운전자들은 "일반 역원보다 기관사나 운전사가 더 위"라는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기노 결성에는 국철 본사 운전국이 적극적으로 관여했으며, 기노 세력이 강했던 현업 기관은 홋카이도 등 운전국의 영향력이 강한 지방 관리국에 많았다. 그러나 운전국과의 밀접한 관계는 직원국과의 대립을 야기했고, 노사 관계 전반은 원만하지 않았다. 이러한 운전국과의 특별한 관계는 국철 종언 시까지 이어졌으며, JR 동일본 경영에 깊이 관여한 운전국 출신자들의 영향으로 JR 동일본의 노사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노는 기관차 승무원 중심의 노조였으며, 수도권이나 오사카 지역 국철 전철 운전사 대다수는 국노에 남았다. 여객 열차 승무를 주로 하는 기관사도 국노에 남는 경향이 있었고, 기노의 핵심은 D51이나 EF15 등 화물용 기관차 승무 기관사들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국철 종언 시까지 이어졌으며, 조합 깃발에도 증기 기관차의 박스 동륜이 디자인되었다. 기노 결성부터 동노 해산까지 기관구 출신자가 조합 지도자 대부분을 차지했다.
1951년, 기관차 회관으로 본부 빌딩을 건설했다. 1958년 7월, 국제 운수 노련(ITF)에 가맹했다.
1959년(쇼와 34년), 기노는 국철동력차노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는 기관차 승무원 중심의 좁은 직능 조합에서 전철 운전사까지 포함하는 동력차 조종자 전체를 포괄하려는 의도였다. 1960년 7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에 가맹했다.
결성 초기에는 비정치적이고 온건한 직능 조합이었으나, 기관사 및 운전사 양성에 수년이 걸리는 조직 구성의 특성상 세력 확대에 제약이 따랐다. 이에 조직 유지 및 확대를 위해 내부 규율과 단결을 강화하고 활동을 선예화했다. 1960년대-1970년대에는 국노 이상으로 선예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우는 아이도 입 다물게 하는 귀신 동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마루세이 운동 반대 투쟁, 파업권 파업 등을 국노와 함께 주도했으며, 직장 투쟁 시에는 흰 바탕에 머리띠 모양 청색 선과 "동력차" 글자가 들어간 헬멧을 착용하기도 했다.[15]
홋카이도와 도쿄 우에노역 발 도호쿠 본선, 다카사키선, 조반선은 특히 동로의 영향력이 강했다. 이는 해당 지역 기관사나 전철 운전사들이 동로의 이데올로기에 공명해서라기보다는, 화물용 기관차가 많이 배치된 기관구 출신이거나 기관구 출신자에 의해 발족한 운전구, 전차구 출신 전철 운전사였기 때문이었다. 준법 투쟁 당시 다카사키선에서 발생한 아게오 사건의 배경에는, 기타칸토 지역 국철선 운전을 조합 지령에 충실한 동로 조합원이 점유하여 다른 지역보다 심한 지연이 만성적으로 발생한 점도 이유로 꼽힌다.
1959년 7월, 국철동력차노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재출발했지만, 조합 임원 선거에서 파벌 활동이 두드러졌다.
파벌명 | 기반 지역 | 주요 인물 | 성향 |
---|---|---|---|
동지회 (노운연) | 아키타, 센다이, 지바, 가나자와, 히로시마, 시코쿠, 몬지 | 메구로 케이지로 | 온건 |
정책연구회 (정연파) | 구시로, 아사히카와, 세이칸, 모리오카, 다카사키, 도쿄, 나고야, 오사카, 오카야마, 신칸센 | 하야시 다이호, 마쓰자키 아키라 | 좌파, 혁마르파와 관계 |
초기에는 인맥, 지연에 따른 대립이었으나, 점차 정책 차이가 나타났다. 특히 정연파는 좌파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설된 청년부가 정연파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반주류였던 정연파가 전국적인 영향력을 확대했다. 초대 청년부장 마쓰자키 아키라는 혁마르파 최고 간부였다. 마쓰자키는 전국 청년부 조직을 장악하고 (중핵파 영향하에 있던 지바 지본은 예외), 자신의 후임 청년부장을 배출한 세이칸, 구시로, 아사히카와 지본에서 강력한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또한 혁마르파에 속하지 않은 정연파 간부들과도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을 요직에 앉혀 정연파 내 지지를 넓혔다.
정연파의 세력 신장에는 마쓰자키와 청년부의 노력뿐 아니라, 국철 본사 운전국 간부와의 밀접한 관계도 작용했다. 1968년 10월 1일 욘사토오 다이어 개정, 쇼와 47년 다이어 개정 등에서 특급 차량이 정연파의 영향력이 강한 운전소에 집중적으로 신규 배치되었다. 특급 열차 운전 업무도 홋카이도 등에서는 정연파가 강한 차량 기지 승무원이 중심을 담당했다. 홋카이도에서는 키하80계 기동차가 정연파의 세력이 강한 세이칸국 하코다테 운전소에 우선 배치되었다. L특급 "이시카리" 운행을 위해 485계 전동차가 전국철동력차노동조합(전동노) 운전사도 있던 삿포로 운전소에 배치되었지만, L특급 "이시카리" 운전 업무 대부분은 정연파의 영향력이 강한 아사히카와 기관구 운전사가 담당했다. 도호쿠 지역에서는 485계 전동차나 583계 침대 전동차가 동지회의 세력이 강한 센다이 운전소가 아닌, 정연파의 영향력이 강한 모리오카국 아오모리 운전소에 우선 신규 투입되었다. 아오모리 운전소에 집중 배치된 485계 전동차는 오사카에서 아오모리까지 광범위한 운용을 했다. 우에노에서 센다이까지 운행하는 특급 "히바리"에도 아오모리 운전소 차량이 투입될 정도였다. 노사 관계를 중시하여 운전 관리 부문이 특정 현업 기관에 차량을 집중 배치하는 방침은, JR 동일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혁마르파와 관계가 깊었던 정연파가 동력차노조 주도권을 장악하자, 정치 섹트·정당 지지를 둘러싼 내부 대립이 발생했다.
- 1974년 일본 공산당계 전국철동력차노동조합연합회(전동노)가 삿포로 지본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16]
- 1979년 산리츠카 투쟁 관련 대립으로 중핵파계 국철 지바 동력차 노동조합(동노 지바)이 분리되었다.
- 1984년 국철 분할 민영화를 둘러싸고 전 도호쿠 철도 산업 노동조합 (현재 철도산업노동조합 [철산노])이 분열되었다.
'귀신 동로'로 불리던 동로도 1975년 파업권 파업 패배로 파업 전술의 실효성이 떨어졌다고 판단, 국노와 은밀히 협의하여 파업 전술 포기를 결정했다. "우선 동로가 결정하지 않으면 국노는 의견이 모이지 않는다"는 국노 측 요청으로 먼저 파업 포기를 선언했지만, 국노 내부 의견 분열로 방침을 결정하지 못했다. 국노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된 동로는 격노했고, 양측 노선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
트럭으로의 이행으로 화물 열차가 쇠퇴하자, 동로는 일자리 유지를 위해 1978년 화물 열차 관련 파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고산토오]] 개정에 맞춰 "화물 안정 선언"으로 발표. 파업으로 화물 수송이 감소했다는 비판에 반론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82년부터 1984년경까지 국철 직장 황폐 (빈 출장, 야미 휴가 등) 개선 운동에 국노보다 협력적인 자세를 취했다.
국철 분할 민영화에 있어 국노는 철저 항전 자세를 보였지만, 동로는 마쓰자키 아키라 위원장 아래 조합원 고용을 최우선으로 하여 민영화 찬성으로 전환했다. 1986년 1월, 철노(鉄労), 전시노(全施労)와 함께 국철 당국과 "노사 공동 선언"을 체결하고, 국노와 함께 분할 민영화 반대를 외치던 총평(총평)을 탈퇴했다.
그 결과, 동로는 거의 불채용자 없이 신회사에 채용되었지만, 조합원 개인 의사에 반하는 광역 배치 (홋카이도·규슈→수도권 등), 50세 이상 조합원 채용 보류 및 일률적 권고 퇴직 등, 결과적으로 국철에서 쫓겨나는 형태로 사퇴한 조합원도 많았다.
이후 동로는 철노 등과 국철 개혁 노조 협의회를 조직하고, 이를 모체로 민영화 후 JR에서 통합하여 전일본 철도 노동조합 총연합회(철도노련, 훗날 JR총련)를 결성, 민영화된 신회사 노동 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국철 민영화 과정에서 발생한 해고 노동자들의 소송은 JNR 해고 소송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2. 1. 결성 초기 (1950년대 ~ 1960년대)
1951년, 국철동력차노동조합(Dōrō)은 전국철도노동조합(Kokuro)에서 분리되었다. 이 단체는 더욱 좌익 성향을 띄는 것으로 여겨졌다.[2] Dōrō는 Kokuro와 함께 일본국유철도(JNR)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주요 노동조합이었다.1950년(쇼와 25년) 국철노동조합(국노)의 기관사 대우를 둘러싼 운동 방침에 대한 반발로, 국노 기관차 협의회를 모체로 한 '''일본국유철도 기관차 노동조합'''(기노)이 1951년 5월 24일에 결성되었다. 이 배경에는 증기 기관차 운전에 필요한 숙련 기술과 솥 불넣기 등 기관차 조작 준비에 시간이 걸린다는 점 때문에 "일반 역원보다 기관사나 운전사가 더 위"라는 현장 운전자들의 자부심과 엘리트 의식이 있었다.
기노 결성에는 국철 본사 운전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였으며, 기노의 세력이 강했던 현업 기관은 운전국의 영향력이 강했던 홋카이도 등 지방 관리국에 많았다. 그러나 운전국과의 밀접한 관계는 직원국과의 대립을 낳았고, 노사 관계 전반이 원만했던 것은 아니었다. 운전국과의 특별한 관계는 국철 종언 시까지 이어졌고, 운전국 출신자가 경영에 강하게 관여한 JR 동일본의 노사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합 명칭대로 기관차 승무원 중심의 노조였으며, 수도권이나 오사카 지역의 국철 전철 운전사는 대다수가 국노에 남았다. 기관차 승무원이라 하더라도 여객 열차 승무를 주로 하는 기관사는 국노에 남는 경향이 있었고, 기노의 중심은 D51이나 EF15 등 화물용 기관차에 승무하는 기관사들이었다. 이 경향도 국철 종언 시까지 이어졌다. 조합 깃발에도 증기 기관차의 박스 동륜이 디자인되어 있었다.
1951년에는 기관차 회관으로서 본부 빌딩을 건설했다. 1958년 7월에는 국제 운수 노련(ITF)에 가맹했다.
2. 2. '귀신 동로' 시대 (1960년대 ~ 1980년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국철동력차노동조합(국철동노)은 일본국유철도(JNR) 내에서 전국철도노동조합(Kokuro)과 함께 주요 노동조합으로 활동했다. 특히, 국철동노는 '우는 아이도 입 다물게 하는 귀신 동로'라고 불릴 정도로 강경한 노동운동을 전개했다.[15] 이들은 마루세이 운동 반대 투쟁, 파업권 파업 등을 주도했으며, 직장 투쟁 시에는 흰 바탕에 머리띠 모양 청색 선에 "동력차" 글자가 들어간 헬멧을 착용하기도 했다.[15]1959년(쇼와 34년), 기로(機労)는 조합 명칭을 국철동력차노동조합으로 변경했는데, 이는 기관차 승무원 중심의 직능 조합에서 전철 운전사까지 포함하는 동력차 조종자 전체를 포괄하려는 의도였다. 1960년(쇼와 35년) 7월에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에 가맹했다.
1960년대 후반, 일본국유철도 경영진은 조합원들에게 보다 온건한 전일본철도노동조합(Tetsuro)으로 이탈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이는 대체로 실패했고 오히려 노동조합을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다.[3]
홋카이도와 도쿄의 우에노역 발 도호쿠 본선, 다카사키선, 조반선은 특히 국철동노의 영향력이 강했다. 이 지역의 기관사나 전철 운전사들이 국철동노의 이데올로기에 공명했다기보다는, 화물용 기관차가 많이 배치되었던 기관구 출신이거나 기관구 출신자에 의해 발족한 운전구, 전차구 출신 전철 운전사였기 때문이었다. 준법 투쟁 시 다카사키선에서 아게오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기타칸토 지역에서의 국철선 운전이 조합의 지령에 충실한 국철동노 조합원에게 점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심한 지연이 만성적으로 발생하고 있던 것도 이유로 꼽힌다.
1974년, 국철동노 전국 지도부는 일본사회당 국회의원 후보에 대한 국철동노의 정치적 캠페인을 지지하지 않은 홋카이도 지역의 여러 지부를 제명했고, 제명된 지부들은 전일본국철동력차노동조합(Zendōrō)을 결성했다.[4]
1979년에는 지바현 지부가 분리되어 국철 지바 동력차 노동조합(Dōrō-Chiba)을 결성했다. 이는 지바현 농민들이 나리타 국제공항의 운영 및 확장에 반대하는 투쟁을 지지한 이유로 집행위원회가 국철동노 전국 지도부에 의해 제명된 이후였다.[5]
2. 3. 조직 내 파벌과 분열
1959년 7월, 국철동력차노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재출발했지만, 조합 임원 선거에서 파벌 활동이 두드러졌다.처음에는 인맥, 지연상의 대립이었지만, 점차 정책상의 차이가 나타났다. 특히 정책연구회(정연파)는 좌파로서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새롭게 결성된 청년부가 정연파의 강한 영향력을 받게 되면서, 점차 반주류였던 정연파가 전국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초대 청년부장에 취임한 마쓰자키 아키라는 혁마르파의 최고 간부였다.
정연파의 세력 신장은 마쓰자키와 청년부의 힘뿐만 아니라, 국철 본사 운전국 간부와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1968년 10월 1일의 이른바 욘사토오 다이어 개정이나 쇼와 47년 다이어 개정 등에서, 특급 차량이 정연파의 강한 운전소에 집중적으로 신규 배치되었다.
혁마르파와 관계가 깊었던 정연파가 동력차노조의 주도권을 잡자, 정치 섹트·정당 지지를 둘러싸고 내부 대립이 일어났다.
- 1974년에는 일본 공산당계의 전국철동력차노동조합연합회(전동노)가 삿포로 지본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16]
- 1979년에는 산리츠카 투쟁을 둘러싼 대립에서 중핵파계의 국철 지바 동력차 노동조합 (동노 지바)가 분리되었다.[5]
- 1984년에는 국철 분할 민영화를 둘러싸고, 전 도호쿠 철도 산업 노동조합 (현재의 철도산업노동조합 [철산노])이 각각 분열되었다.
파벌명 | 기반 지역 | 주요 인물 | 성향 |
---|---|---|---|
동지회 (노운연) | 아키타, 센다이, 지바, 가나자와, 히로시마, 시코쿠, 몬지 | 메구로 케이지로 | 온건 |
정책연구회 (정연파) | 구시로, 아사히카와, 세이칸, 모리오카, 다카사키, 도쿄, 나고야, 오사카, 오카야마, 신칸센 | 하야시 다이호, 마쓰자키 아키라 | 좌파, 혁마르파와 관계 |
2. 4. 국철 분할 민영화 (1980년대)
1980년대 중반, 일본국유철도(JNR) 민영화가 제안되자, 국철동력차노동조합(도로운수노동조합, 이하 도로)은 다른 노조들과 달리 민영화 계획을 적극 지지했다.[6] 1987년 JNR은 민영화되어 일본철도그룹(JR Group)으로 대체되었다. 1985년 기준 도로는 38,000명의 조합원을 보유했다.[6]새로운 조직에 고용될 노동자 명단은 JNR이 작성해 JR 회사에 전달했다. 노조원들에게 노조 탈퇴 압력이 가해졌고, 1년 만에 국철노동조합(고쿠로) 조합원 수는 20만 명에서 4만 4천 명으로 급감했다.[7] 민영화를 지지하거나 고쿠로를 탈퇴한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고 고용되었다.[7]
1987년 2월, 도로는 테츠로 등 다른 우익 노조들과 합병하여 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JR총련)를 결성했다.[8]
'귀신 도로'라 불렸던 도로는 1975년 파업권 파업에서 패배하며 파업 전술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 고쿠로와 은밀히 협의해 파업 전술 포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고쿠로 내부 의견 분열로 도로는 고쿠로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고, 양측 노선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
트럭으로의 이행으로 화물 열차가 쇠퇴하자, 도로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1978년 화물 열차 관련 파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82년부터 1984년경에는 국철 직장 황폐 개선 운동에 고쿠로보다 협력적인 자세를 취했다.
국철 분할 민영화에 있어 고쿠로가 철저 항전 자세를 보인 반면, 도로는 조합원 고용을 최우선으로 해 민영화 찬성으로 전환, 1986년 1월 철노(鉄労), 전시노(全施労)와 함께 국철 당국과 "노사 공동 선언"을 체결하고, 고쿠로와 함께 분할 민영화 반대를 외치던 총평(총평)을 탈퇴했다.
그 결과, 도로는 거의 불채용자 없이 신회사에 채용되었지만, 조합원 개인 의사에 반하는 광역 배치, 50세 이상 조합원 채용 보류 및 일률적 권고 퇴직 등, 결과적으로 국철에서 쫓겨나는 형태로 사퇴한 조합원도 많았다.
이후 도로는 철노 등과 국철 개혁 노조 협의회를 조직하고, 이를 모체로 민영화 후 JR에서 통합, 전일본 철도 노동조합 총연합회(철도노련, 훗날 JR총련)를 결성해 민영화된 신회사 노동 운동 주도권을 잡았다.
2. 5. JNR 해고 소송
국철 민영화 과정에서 발생한 해고 노동자들의 소송에 대한 내용은 JNR 해고 소송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2. 5. 1. 해고
정부는 "거리로 내쫓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9],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고용이 필요한" 사람들로 분류되어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으로 전출되었고, 이곳에서 최대 3년까지 배치될 수 있었다.[10]약 7,600명의 노동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전출되었고, 그 중 약 2,000명이 JR 기업에 고용되었으며, 3,000명은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사가현 도스시 출신의 전 일본국유철도 직원 야마구치 미토무는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으로 전출되었는데, 그들의 일자리 찾기 지원은 신문 채용 광고 복사본을 주는 것으로 구성되었다고 나중에 진술했다.[11]
이 기간은 1990년 4월에 종료되었고, 1,047명이 해고되었다. 여기에는 64명의 젠도로(Zendōrō) 조합원과 966명의 고쿠로(Kokuro) 조합원이 포함되었다.[12][13]
2. 5. 2. 합의
2010년 6월 28일, 대법원은 국철 민영화 이후 수십 년 동안 제기된 소송과 노동 위원회 사건에 대해 근로자와 일본 철도 건설, 운수 및 기술 지원 기구(JRTT) 사이의 분쟁을 해결했다.[1] JRTT는 일본국유철도 청산 사업단의 승계 기관이다.[1] JRTT는 904명의 원고에게 200억엔, 근로자 1인당 약 2200만엔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1] 그러나 근로자들이 복직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완전한 합의는 아니었다.[1]3. 조직 내 의원
- 나카무라 준조 (전 참의원 의원, 일본 사회당)
- 메구로 케사지로 (전 참의원 의원, 사회민주당 고문)
참조
[1]
서적
Labor Law and Practice in Japan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1970
[2]
뉴스
Union official arrested over coercion November 2, 2002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2002-11-02
[3]
서적
Teachers' Unions and the Politics of Education in Japa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1
[4]
서적
Gewerkschaften in der japanischen Politik von 1970 bis 1990
VS Verlag für Sozialwissenschaften
[5]
뉴스
Millions Stalled as Japanese Radicals Sabotage Government-Owned Rail Lines
https://www.latimes.[...]
The LA Times
1985-11-29
[6]
간행물
Japan: Paralysis on the Tracks
https://web.archive.[...]
Time magazine
2012-08-15
[7]
뉴스
'Unfair' '87 dismissal of JNR unionists slammed March 4, 2010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201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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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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