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자-현대주의자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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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배경
- 3. 5개의 근본 교리 (1910)
- 4. "근본주의: 진리에 대한 증거"와 "근본으로 돌아가자" (1910-1915)
- 5. 에큐메니즘 운동 (1908-1921)
- 6.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 (1922)
- 7.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1923년 총회
- 8. 오번 선언 (1923-1924)
- 9. 1924-1925년 총회
- 10. 스코프스 재판 (1925)
- 11. 1925년 특별위원회와 1926년 총회
- 12. 프린스턴 신학교 분쟁 (1926-1929)
- 13. 해외 선교 논쟁 (1930-1936)
- 14. 독립 장로교 해외 선교 이사회 설립과 정통 장로교회 분립 (1936)
- 15. 결과 및 영향
- 참조
1. 개요
근본주의자-현대주의자 논쟁은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학적 갈등으로, 교회의 권위, 성경 해석, 기독교 교리의 본질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분열과 재통합을 겪으며 논쟁의 씨앗이 뿌려졌고, 19세기 말 고등 비평의 등장과 찰스 오거스터스 브릭스 사건을 거치면서 본격화되었다. 1910년 5개의 근본 교리가 선언되고, 1920년대에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다윈주의 비판, 해리 에머슨 포스딕의 설교를 둘러싼 논쟁, 스코프스 재판 등이 이어지며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결국, 미국 장로교회는 보수적인 근본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인 현대주의자들 간의 분열을 겪게 되었고, J. 그레샴 메이천 등의 보수주의자들은 교단을 떠나 정통 장로교회를 설립했다. 이 논쟁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개신교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개신교에도 큰 영향을 미쳐 보수 신학의 강화와 사회·정치적 갈등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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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자-현대주의자 논쟁 | |
---|---|
논쟁 개요 | |
주제 | 기독교 신학 내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대립 |
시기 |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
주요 쟁점 | 성경의 무오성 기독교의 핵심 교리 과학과 종교의 관계 사회 복음주의 |
주요 결과 | 교단 분열 신학적 스펙트럼의 형성 현대 기독교의 다양한 경향 |
주요 인물 | |
근본주의 진영 | 존 그레셤 메이첸 벤저민 워필드 클라렌스 맥카트니 |
현대주의 진영 | 해리 에머슨 포스딕 샤일러 매튜스 찰스 브리그스 |
배경 | |
사회적 변화 | 산업화와 도시화 과학 기술의 발전 사회 운동의 활성화 |
신학적 변화 | 자유주의 신학의 대두 고등 비평의 영향 진화론의 확산 |
주요 교단 | |
장로교 | 미국 장로교회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
침례교 | 미국 침례교회 |
감리교 | 미국 감리교회 |
핵심 쟁점 상세 | |
성경의 무오성 | 근본주의자: 성경은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는 하느님의 말씀 현대주의자: 성경은 인간적인 요소와 신화적 요소를 포함한 영감된 기록 |
핵심 교리 | 근본주의자: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 (예: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 부활)를 문자적으로 믿음 현대주의자: 전통적인 교리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 |
과학과 종교의 관계 | 근본주의자: 과학이 성경과 모순된다면 성경을 우선시 현대주의자: 과학과 종교는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과학적 발견을 받아들임 |
사회 복음주의 | 근본주의자: 사회 개혁보다 개인의 구원을 강조 현대주의자: 사회 정의와 개혁을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부분으로 강조 |
영향 | |
교단 분열 |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 간의 갈등으로 인해 여러 교단에서 분열 발생 |
신학적 스펙트럼 | 근본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등 현대 기독교 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 형성 |
현대 기독교의 양상 | 현재 기독교의 다양한 모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 |
관련 학자 | |
주요 학자 | 브래들리 J. 롱필드 D.G. 하트 톰 넬슨 |
2. 배경
2. 1. 초기 논쟁 (18세기-19세기)
미국 장로교는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의 중요한 전조였던 두 차례의 분열을 겪었다. 첫 번째는 대각성 기간 동안 발생한 구파-신파 논쟁으로, 1741년 장로교회가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었다가 1758년에 재통합되었다. 두 번째는 제2차 대각성 이후 발생한 구학파-신학파 논쟁으로, 1836년부터 1838년까지 장로교회가 두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1857년, 신학파 장로교인들은 미국의 노예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었고, 남부 신학파 장로교인들은 미국 장로교 연합 시노드를 구성했다. 1861년, 구학파 장로교인들도 분열되었고, 남부 장로교인들은 미국 장로교회(PCCSA)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864년, 연합 시노드는 PCCSA와 합병되었고, 남부 신학파 장로교인들은 구학파 교단에 흡수되었다. 1869년, 북부 신학파 장로교인들은 미국 장로교회로 복귀했다.
이러한 논쟁에는 여러 다른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교회 권위의 본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신학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엄격한 해석에 반대했다. 그들의 입장은 성경에 근거한 성령과의 경험을 통한 영적 갱신과 부흥에 기반을 두었다. 신학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는 성경의 권위와 회심 경험을 강조했으며, 성령을 통해 중재된 하나님과의 만남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들은 구학파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칼뱅주의를 숭배하는 형식주의자로 보았다.
구학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장로교회의 기본적인 헌법 문서이며, 신앙고백서는 단순히 성경 가르침의 요약이므로 교회는 목사들의 설교가 신앙고백서와 일치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들은 신학파가 교회의 순결에 대해 느슨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 유니테리언주의 및 기타 오류들이 장로교회에서 가르쳐지는 것을 허용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신학파의 부흥을 감정적으로 조작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비판했다.


다른 주요 분열은 다른 교파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있었다. 신학파는 복음 전파와 기독교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교회 밖 기관(파라처치)을 설립할 의향이 있었고, 비장로교인들과 협력할 의향이 있었다. 구학파는 복음 전파와 선교는 교단이 관리하는 기관을 통해 수행되어야 하며 외부인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그 이유는 교회의 신학적 특징이 희석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진영은 신학교 교수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구학파의 주요 기관인 프린스턴 신학교는 신조 가입을 요구했고, 그 신학(프린스턴 신학)의 상당 부분을 칼뱅주의 정통성 옹호에 할애했다. 반면 신학파의 유니온 신학교는 비장로교인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더 허용하고 학문적 결과물에서 더 개방적이었다.
2. 2. 고등 비평의 등장과 브릭스 사건 (1880-1893)
찰스 오거스터스 브리그스(Charles Augustus Briggs) (1841–1913)는 독일에서 고등 비평(역사 비판적 방법)을 연구하고 미국 장로교회 내 고등 비평의 주요 지지자였다.[4] 그는 1876년 유니온 신학교에서 히브리어 교수로 임명되었고, 1880년 ''프레스비테리안 리뷰''(The Presbyterian Review) 창간에 참여했다.[4] 초기에는 아치볼드 알렉산더 호지(Archibald Alexander Hodge)가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으나, 1889년 B. B. 워필드(B. B. Warfield)가 공동 편집자가 되면서 브리그스의 기사 게재를 거부하는 등 갈등이 심화되었다.[4]
1891년, 브리그스는 유니온 신학교의 최초의 성서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취임 연설 "성경의 권위"에서 고등 비평의 관점을 명확히 밝혔다.[4] 그는 모세가 토라를 쓰지 않았고, 에스라가 에스라서, 역대기 또는 느헤미야서를 쓰지 않았다는 등 구약 성경의 저자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부정했다.[4] 또한, 성경 전체에 오류가 있으며 성경 무오류설은 "아이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현대 복음주의의 유령"이라고 주장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오류 가능성을 지적했다.[4]
브리그스의 주장은 교단 내에서 큰 논쟁을 일으켰고, 프랜시스 랜디 패튼(Francis Landey Patton)을 중심으로 한 구교파 인사들의 반발을 샀다.[4] 1891년 디트로이트 총회에서 브리그스의 임명은 거부되었으나, 유니온 신학교는 학문의 자유를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교단에서 탈퇴했다.[4] 1892년 뉴욕 프레스비테리는 브리그스에 대한 이단 재판을 열었으나 무죄 판결을 내렸다.[4]
1892년 포틀랜드, 오레곤주 총회는 성경의 무오성을 확인하는 '''포틀랜드 선언'''을 발표했다.[4] 브리그스 사건은 뉴욕 프레스비테리로 환송되어 재심리가 이루어졌지만, 1893년 초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4] 그러나 워싱턴 D.C.에서 열린 1893년 총회는 브리그스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파면했다.[4] 그는 1899년 미국 성공회 뉴욕 성공회 교구의 헨리 C. 포터(Henry C. Potter) 주교에 의해 성공회 사제로 서품되었다.
2. 3. 브릭스 사건의 여파 (1893-1900)
브릭스 사건 이후, 헨리 반 다이크(Henry van Dyke)가 작성한 '평화와 일을 위한 호소' 성명서에 서명한 87명의 목사들과 같이 고등 비평 추종자들을 색출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없었다. 이들은 이단 재판이 교회에 해롭고, 교회는 무오류성 이론보다 영적인 일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은 온건한 견해를 가지고 고등 비평이 제기하는 점에 공감하거나, 이단 재판으로 인한 분열과 논쟁을 피하고자 교회 내에서 고등 비평을 용인하려 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신학교의 이단 재판과 고백의 엄격한 강요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후 헨리 프레저브드 스미스(Henry Preserved Smith)와 아서 커시먼 맥기퍼트(Arthur Cushman McGiffert)에 대한 두 차례의 이단 재판이 더 있었지만, 이는 미국 장로교회 역사상 마지막 주요 이단 재판이 될 것이었다.

2.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개정 운동 (1900-1910)
헨리 밴 다이크는 1893년 브리그스를 지지했던 근대주의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개정하려는 운동을 이끌었다. 1889년부터 밴 다이크는 선택받은 유아만이 아닌, 죽는 모든 유아가 천국에 간다는 것과, 하나님이 선택받은 자만이 아닌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속죄하셨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신조 개정을 촉구했다. 1901년 밴 다이크는 25인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교회의 신앙에 대한 비구속적인 요약을 작성했다. 이 요약은 성경의 무오류나 천벌을 언급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으며,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했다. 요약은 1902년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1904년 교구에서 비준되었다.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아르미니우스주의 성향의 컴벌랜드 장로교회가 재통합을 청원했고, 1906년 1000명이 넘는 컴벌랜드 장로교 목사들이 미국 장로교회에 합류했다. 이는 교회 내 신학교파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3. 5개의 근본 교리 (1910)
1910년 미국 장로교 총회는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5가지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5][6][7]
- 성령에 의한 성경의 영감과 그 결과로서의 성경의 무오류.
-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속죄였다는 믿음.
- 그리스도의 육체적 그리스도의 부활.
- 그리스도의 기적의 역사적 실재.[24]
이 다섯 가지 명제는 역사적으로 "다섯 가지 기본 원리"로 알려졌으며, 1910년대 후반에는 이 다섯 가지 기본 원리에 결집한 신학적 보수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로 불렸다.
1909년, 뉴욕 장로교회 노회에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교리에 동의하지 않은 세 명의 남성을 안수할 것인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들은 교리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확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결국 다수는 이들을 안수했고, 소수는 총회에 항의했다. 1910년 총회는 세 남성에 대한 항의를 기각하고, 향후 안수를 규정하기 위한 성명서를 작성하도록 법안 및 건의 위원회에 지시하여 5개의 교리적 결정을 통과시켰다.

4. "근본주의: 진리에 대한 증거"와 "근본으로 돌아가자" (1910-1915)
1910년, 유니온 오일(Union Oil)의 공동 설립자인 라이먼 스튜어트(Lyman Stewart)는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근본주의: 진리에 대한 증거'''(1910–1915)라는 팸플릿 시리즈를 후원했다. 이 시리즈는 고등 비평을 비판하는 등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1910년부터 1915년까지 출판된 12권의 팸플릿에는 여러 교파의 64명의 저자가 쓴 90편의 에세이가 포함되었다.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는 이 팸플릿의 제목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이 용어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북부 침례교 편집자 커티스 리 로스(Curtis Lee Laws)의 기사였다.
1915년, 보수적인 잡지 '''장로교인'''(The Presbyterian)은 "근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Fundamentals)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자유주의적인 장로교 잡지들은 보수주의자들이 싸움을 원한다면 교회 법정에서 이단 고발을 제기하거나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답했지만, 어떤 고발도 제기되지 않았다.
5. 에큐메니즘 운동 (1908-1921)
로버트 E. 스피어를 비롯한 몇몇 저명한 장로교 목사들은 1908년 미국 교회 연합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단체는 존 D. 록펠러 주니어에게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사회복음과 진보주의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교회의 사회 신조는 1910년 장로교회에서 채택되었지만, 총회의 보수파는 금주법과 안식일 법규를 요구하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구체적인 제안을 지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 교회 연합회는 전쟁과 관련된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프로그램의 업무를 조정하고 육군성과 긴밀히 협력하기 위해 전시 총괄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스피어와 자유주의적 유니온 신학교 교수 윌리엄 아담스 브라운이 의장을 맡았다. 전쟁 후, 장로교 해외 선교부는 개신교 지도자들의 회의를 소집했고, 1919년 초 교회 세계 운동(IWM)이 존 맷을 의장으로 설립되었다. IWM이 재정적으로 붕괴되었을 때, 교단은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다.
1919년 총회는 교회 연합을 제안한 전국 에큐메니칼 협의회에 대표단을 파견했고, 1920년 총회는 다른 17개 교파와의 "유기적 연합"을 포함한 권고안을 승인했다. 미국 그리스도 연합 교회로 알려질 새로운 조직은 회원 교회를 위한 일종의 "연방 정부"가 될 것이었다. 장로교 정치 체제에 따라, 이 조치는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 교구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교회 연합 계획은 구교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진에 의해 전면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1920년 프린스턴 교수 J. 그레샴 매컨은 교회 연합이 장로교의 독특성을 파괴하고, 근대주의자들에게 교파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양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린스턴 교수진의 방어에도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찰스 어드먼과 신학교 학장 윌리엄 로빈슨은 연합에 찬성했다.
결국, 교구들은 1921년 150대 100의 투표로 교회 연합을 거부했다.
6.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 (1922)
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1922년 5월 21일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를 통해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이 설교에서 근본주의자들을 불관용적인 보수주의자들로 묘사하고, 관용과 자유를 통해 다양한 관점이 교회 내에서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스딕은 많은 사람들이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속죄 교리, 예수의 문자 그대로의 재림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포스딕의 설교는 "새로운 지식과 기독교 신앙"으로 재포장되어 세 개의 종교 잡지에 게재된 후, 전국의 모든 개신교 성직자들에게 소책자 형태로 배포되었다.
보수적인 클라렌스 E. 매카트니는 "불신앙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설교로 포스딕에게 반박했다. 그는 자유주의가 점진적으로 교회를 "세속화"시켜 "예배도,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없는 기독교"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매카트니의 주도로 필라델피아 노회는 총회에 뉴욕 노회가 뉴욕시 제1장로교회의 가르침과 설교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부합하도록 조치할 것을 요청했고, 이는 장로교회 내에서 10년 이상의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7.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1923년 총회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아르미니우스파 컴벌랜드 장로교회에서 자란 전직 변호사이자 장로교 장로였다.[13] 1890년에 의회에 선출되었고, 이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세 번의 대선에서 실패했다.[13] 1900년 대선 패배 이후, 자신의 삶을 재검토하여 정치에 대한 열정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가렸다는 결론을 내리고 쇼토쿠아 순회 강연을 시작했다.[13] 그의 연설은 종교적 및 정치적 주제를 모두 포함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25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쇼토쿠아 강사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며 수십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연설했다.[13]
브라이언은 다윈주의와 고등 비평의 현대성이 교회 내에서 자유주의를 증진시키고 기독교의 기초를 훼손한다고 믿었다. 그는 다윈주의가 "강자가 약자를 몰아내고 죽이는 무자비한 법칙"으로 도덕의 기초를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13]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군국주의가 다윈주의의 영향이라고 주장하며, 니체의 철학이 다윈주의의 해석을 나타낸다고 보았다.[10]
1921년, 브라이언은 버지니아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다윈주의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는 "다윈주의는 전혀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엮어 놓은 추측의 끈이다"라고 주장하며, 성경에 다윈 전체보다 더 많은 과학이 있다고 말했다.[14][15] 이 강좌는 출판되어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4][15]
1923년 인디애나폴리스(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총회에서 브라이언은 총회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찰스 F. 위샤트에게 패배했다.[13] 그는 총회에서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제안했지만, 존 그레섬 메이천조차 설득하지 못했고, 총회는 유물론적 진화 철학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승인했다.[13]
1923년 총회에서는 헨리 에머슨 포스딕의 설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을 선언하고, 5대 근본 원칙을 재확인했다.[13] 헨리 슬론 코핀은 5대 기본 원칙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8. 오번 선언 (1923-1924)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확증하면서도, 미국 장로교 내에 성경과 신앙고백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전통이 오랫동안 존재해왔다고 주장했다. 1923년 총회가 발표한 5대 기본 원리(Five Fundamentals)는 이러한 전통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모든 교리적 변화는 장로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장로교회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오번 신학교의 역사 교수 로버트 헤이스팅스 니콜스(Robert Hastings Nichols)는 1870년 구교파-신교파 재결합과 1906년 컴벌랜드 장로교회와의 합병으로 교리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교회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배포했다. 1923년 총회 2주 후, 36명의 성직자들은 뉴욕주 시러큐스에 모여 니콜스의 논문을 기초로 오번 선언을 발표했다. 교회 일부 구성원들은 5대 기본 원리를 성경과 신앙고백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으로 간주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기에, 장로회는 성경과 신앙고백을 해석하는 데 있어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론이든 자유롭게 고수할 수 있어야 했다. 오번 선언은 1923년 11월부터 배포되어 최종적으로 174명의 성직자들이 서명했고, 1924년 1월에는 150명의 서명자 명단과 함께 언론에 공개되었다.
9. 1924-1925년 총회
1924년 총회는 오번 선언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총회에서는 해리 에머슨 포스딕 문제에 관하여, 그의 신학보다는 교회 정치 문제에 대한 논의로 방향을 돌렸다. 포스딕이 침례교도였기 때문에, 총회는 뉴욕 제1장로교회에 포스딕에게 장로교회에 가입할 것을 요청하고, 만약 거부할 경우 그를 해임하라고 지시했다. 포스딕은 장로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고, 10월에 제1장로교회의 직책에서 사임했다.
1925년 총회는 모든 목회 후보자들이 동정녀 탄생을 확인하도록 요구했고,이 문제는 뉴욕 노회로 이관되었다.
10. 스코프스 재판 (1925)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장로교회 내에서 다윈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한편, 여러 주 의원들에게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촉구했다. 1925년 3월 테네시주가 그러한 법을 통과시키는 등 여러 주가 이에 응했다. ACLU은 이러한 반진화론 법률에 도전하기 위한 시험 사례로 테네시주 데이턴의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친 혐의로 기소된 존 스코프스 재판을 주목했다. ACLU는 스코프스를 변호하기 위해 변호사 존 랜돌프 닐 주니어를 파견했다.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협회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침례교 목사 윌리엄 벨 라일리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에게 자문 역할을 맡도록 설득했다. 브라이언이 재판에 참석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변호사이자 불가지론자인 클라렌스 다로가 스코프스의 변호팀에 합류했다.
전국의 기자들이 몰려들면서 이 재판은 미디어 서커스가 되었다. 스코프스에 대한 기소는 성공했지만, 특히 다로가 브라이언을 증인석에 세우고 브라이언이 성경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대로 변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후, 이 재판은 미국에서 근본주의 운동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중요한 순간으로 널리 여겨진다. 언론 매체 중에서 브라이언에 대한 가장 큰 비판자는 H. L. 멘켄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칼럼에서 이 재판에 대해 보도하고 근본주의를 비이성적이고 후퇴적이며 불관용적인 것으로 규탄했다.
11. 1925년 특별위원회와 1926년 총회
1925년 총회에서 임명된 특별위원회는 주로 온건파로 구성되어 존 그레섬 메이천, 맥카트니(Macartney), 코핀(Coffin)의 진술을 받았다.
1926년 총회에서는 온건파인 W. O. 톰슨(Thompson)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특별위원회는 5월 28일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장로교회 불안의 주요 원인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소위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포함한 일반적인 지적 움직임, 자연주의적 세계관, 신의 본성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그리고 언어의 변화, 2) 구교(Old School)-신교(New School) 분열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차이, 3) 특히 총회의 역할과 교회 내 여성의 대표성 부족 등 교회 정치에 대한 의견 차이, 4) 신학적 변화, 5) 오해였다. 보고서는 장로교 시스템이 전통적으로 진리의 핵심이 동일할 때 다양한 견해를 허용해왔으며, 교회가 영의 연합에 초점을 맞출 때 번영했다고 결론지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해석하는 방법을 포함하여 교리적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장려해야 했다. 이 보고서는 본질적으로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의 견해를 확인했다. 위원회는 총회가 장로회의 허락 없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할 수 없지만,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사법적 판결을 내릴 수 있으며, 이는 장로회에 구속력이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 예수의 대속[24],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재림,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같은 5대 기본 원칙(Five Fundamentals)은 구속력이 없었다.
클라렌스 맥카트니(Clarence Macartney)가 총회에서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회의 보고서는 채택되었다.
12. 프린스턴 신학교 분쟁 (1926-1929)
1870년 구학파와 신학파의 통합 이후,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 장로교회 내 구학파 사상의 보루로 남아 있었다. 1920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 장로교회 내에서 유일하게 남은 구학파 기관이었다.
1920년 당시 교수진 대다수는 J. 그레샴 메이천과 게르하르두스 보스를 포함하여 여전히 구학파 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실천 신학 교육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찰스 어드먼과 1920년 신학교 학장이었던 J. 로스 스티븐슨을 포함한 몇몇 온건한 신학교 신학자들이 초빙되었다. 구학파 신학자들과 온건파 사이의 긴장은 1920년 제안된 교회 연합에 대한 논쟁, 해리 반 다이크와의 공개적 불화로 이어진 메이천의 반자유주의 설교, 어드먼의 복음주의 학생 연맹 접근 방식에 대한 논란, 그리고 교회 내 분열에 대한 대처 방식을 둘러싼 갈등에서 드러났다.
1925년에는 구학파 신학자들의 교수진 내 다수파 지위가 위협받았지만, 떠나는 변증학 교수 윌리엄 그린을 대체할 클라렌스 매카트니의 선출은 교수진 내 구학파 신학자들의 다수파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매카트니가 그 직책을 거절하자 메이천에게 제안되었다.
그러나 메이천이 수락하거나 거절하기 전에 총회가 개입하여, 1926년 총회에서 온건파는 프린스턴의 양측을 화해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1927년 총회에서 온건파인 로버트 E. 스피어가 의장으로 선출된 가운데, 위원회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프린스턴에서의 어려움의 원인이 프린스턴 교수진 일부(즉, 메이천)가 교단 전체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대신 교회 내 특정 당파를 위해 프린스턴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신학교의 재편성을 권고했다. 총회는 위원회의 임무를 갱신하고 신학교 재편성 방법을 연구하도록 명령했다.
이로 인해 메이천은 1927년 총회가 "복음주의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회의였다"고 선언했다. 메이천은 "프린스턴 신학교에 대한 공격: 공정한 경쟁을 위한 호소"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하여 교단에 배포했다. 그는 프린스턴이 영어권 세계의 오래된 신학교들 중 정통 신학을 계속해서 옹호하는 유일한 신학교라고 주장했다.
1928년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열린 총회에서 위원회는 신학교 학장의 권한을 강화하고 두 개의 통치 기구를 하나의 통합된 기구로 대체하는 신학교 재편성을 권고했다. 이에 클라렌스 매카트니는 자신들의 당파가 이를 막기 위해 법적 조치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응답했다. 총회는 우려하여 단순히 문제를 계속 연구할 위원회를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1929년 총회에 보고했다. 메이천은 총회장에서 열정적인 연설을 했지만, 신학교 재편성에 대한 총회의 투표를 막을 수는 없었다.
위협했던 대로 법정에서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 메이천은 이제 보수적인 사상의 보루가 될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관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충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명명됨)가 되었고, 메이천, 코넬리우스 반 틸, 로버트 딕 윌슨, 오스왈드 톰슨 앨리스를 포함한 프린스턴 교수진의 몇몇 보수파는 프린스턴을 떠나 웨스트민스터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클라렌스 매카트니는 처음에는 웨스트민스터 설립에 반대하며, 보수파는 정통적인 목소리를 계속 제공할 수 있는 프린스턴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이천은 프린스턴이 배교 상태에 있으며 배교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매카트니는 결국 메이천의 편에 서게 되었다.
13. 해외 선교 논쟁 (1930-1936)
1930년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재정 지원으로 침례교 평신도들은 해외 선교의 효과에 대한 재평가를 진행했다.[16] 감리교회, 북부침례교회, 미국 개혁교회 등 7개 주요 교단이 참여한 "평신도 해외 선교 조사"는 인도, 버마, 중국, 일본의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의뢰했고, 윌리엄 어니스트 호킹을 의장으로 하는 별도 조사를 통해 1932년 "해외 선교 재고: 100년 후 평신도 조사"를 출판했다.[17] 이 보고서는 세속주의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종교와 동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는 보고서와 거리를 두며 복음주의적 기반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주님이자 구세주라는 헌신을 재확인했다. 펄 S. 벅은 보고서를 옹호하며, 크리스천 센추리에 기고한 논평에서 "모든 관찰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고 모든 결론이 옳다고 생각되는 유일한 책"이라고 칭찬했다.[17] 애스터 호텔 연설과 '''하퍼스''' 기고문[18]에서 벅은 선교의 성공을 교회 회원 수로 측정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도주의적 노력을 옹호했다.[19] '''코스모폴리탄''' 기사에서 벅은 원죄 교리를 거부하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의 성육신에 대한 믿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필수 조건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8][19][20][21]
찰스 어드먼 회장은 펄 S. 벅의 논평은 유감이지만, 그녀가 선교 사업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답했고, 벅은 5월에 장로교 선교사직에서 사임했다.
J. 그레샴 메이천은 외국 선교 이사회가 충분히 복음주의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며, 특히 사무총장 로버트 E. 스피어가 선교사들에게 5대 근본 신앙에 가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메이천은 뉴브런즈윅 장로회에 확고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만 외국 선교 이사회에 임명되도록 요구하는 제안을 제출했으나, 장로회는 스피어의 주장(갈등과 분열은 교회에 해롭다)을 받아들여 거부했다.
클라렌스 맥카트니는 필라델피아 장로회를 통해 유사한 동의안을 통과시켰고, 1933년 총회에서 외국 선교 상임위원회의 다수 보고서는 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고수와 스피어 및 이사회의 확신을 확인하고 "해외 선교 재고"를 부인했다. 소수 보고서는 이사회가 정통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다수 보고서가 압도적으로 통과되었다.
총회가 이사회에 새로운 보수파 인사들을 임명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J. 그레샴 메이컨은 H. 맥앨리스터 그리피스와 함께 독립 장로교 해외 선교 이사회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맥카트니는 메이컨과 함께 하기를 거부했다.
1934년 총회는 독립 이사회가 장로교 헌법을 위반했다고 선언하고, 자금 모금을 중단하도록 명령했으며, 모든 장로교 목사와 평신도에게 이사회와의 관계를 끊거나 징계 조치를 받을 것을 명령했다. 뉴브런즈윅 노회는 메이컨에게 답변을 요청했고, 메이컨은 총회의 조치가 불법이며 독립 이사회를 폐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노회는 메이컨을 기소했고, 1935년 3월 메이컨은 유죄 판결을 받고 목회직에서 정직되었다.
1935년 6월, 메이컨은 장로교 헌법 성약 연합을 설립했다. 10월, 맥카트니와 메이컨 사이의 분열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확산되었고, 메이컨이 이끄는 교수진은 이사회에 독립 해외 선교 이사회와 성약 연합에 대한 지지를 발표할 것을 촉구했지만, 맥카트니를 포함한 13명의 이사는 거부하고 1936년 사임했다.
1936년 총회에서 메이컨을 포함한 8명의 목사가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 목회직에서 제명되었다. 그 후 메이컨은 장로교 헌법 성약 연합을 이끌고 새로운 교단인 미국 장로교회를 설립했으며, 1939년 정통 장로교회로 이름을 변경했다.
14. 독립 장로교 해외 선교 이사회 설립과 정통 장로교회 분립 (1936)
J. 그레샴 메이컨은 H. 맥앨리스터 그리피스와 함께 성경적이고 장로교적인 사역을 진정으로 증진하기 위한 독립 장로교 해외 선교 이사회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1934년 총회는 독립 이사회가 장로교 헌법을 위반했다고 선언하고, 이사회가 교회 내에서 자금을 모금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명령했으며, 모든 장로교 목사와 평신도에게 이사회와의 관계를 끊거나 징계 조치를 받을 것을 명령했다. 뉴브런즈윅 노회는 메이컨에게 답변을 요청했고, 메이컨은 총회의 조치가 불법이며 독립 이사회를 폐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 결과 노회는 서약 위반과 교회 권위 거부를 포함한 혐의로 메이컨을 기소했고 1935년 3월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목회직에서 정직되었다.
1935년 6월, 그는 장로교 헌법 성약 연합을 설립했다. 메이컨을 포함한 8명의 목사가 1936년 총회에서 재판을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고 목회직에서 제명되었다. 그 후 메이컨은 장로교 헌법 성약 연합을 이끌고 새로운 교단인 미국 장로교회를 설립했으며, 나중에 1939년 정통 장로교회로 이름을 변경해야 했다.
15. 결과 및 영향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 간의 논쟁은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초래했다. J. 그레샴 메이천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은 교단을 떠나 정통 장로교회를 설립했고, 미국 장로교회는 현대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교단으로 변화했다. 미국 장로교회(PCUSA)는 1958년에 북미합동장로교회와 합병하여 미합중국합동장로교회를 설립했고, 1983년에는 미합중국합동장로교회가 미국 장로교회(남부 장로교회)와 합병하여 현재의 미국장로교회(PCUSA)를 형성하였다.
이 논쟁은 거의 모든 기독교 교파에서 벌어졌으며,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남침례교, 미주리 시노드 루터교회등이 주요 격전지였다. 메이천과 다른 보수주의자들의 탈퇴 이후, 남침례교와 미주리 시노드는 정통 개신교도들이 교파 내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유일한 대규모 전국 교파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20세기 대부분 동안 두 교회를 흔들었고, 루터교회의 세미넥스 분열과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남침례교단 보수 부흥이 있기 전까지는 정통 개신교의 승리는 확실하지 않았다.
이 논쟁은 한국 장로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 개신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의 보수 개신교는 미국의 근본주의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성경의 권위와 전통적 교리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종교, 정치, 문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운동과 연관되어 독립운동에 기여했지만,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운동과 연계되어 보수적인 정치 세력과 갈등을 빚었다. 반면, 보수주의 신학은 친미, 반공주의적 성향을 띠며 한국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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