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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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숙은 후한 말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동성현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인재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얻었다. 주유에게 군량을 지원하고, 원술의 초빙을 거절한 뒤 손책을 따라 강동으로 이주했다. 손권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제시하고, 적벽대전에서 유비와의 동맹을 주도하여 조조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주유 사후 오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형주 문제에 유비와 협상하며 동맹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46세에 사망했으며, 손권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제갈량도 추도식을 거행했다. 노숙은 유비와의 동맹을 중시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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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숙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루쑤 |
| 본명 | 魯肅 (루쑤) |
| 자 | 자징 (子敬) |
| 출생 | |
| 출생일 | 172년 |
| 출생지 | 안후이성 딩위안현 |
| 사망 | |
| 사망일 | 217년 (45세) |
| 가족 | |
| 자녀 | 루수 |
| 관직 | |
| 한창태수 (漢昌太守) | 알 수 없음 |
| 편장군 (偏將軍) | 알 수 없음 |
| 분무교위 (奮武校尉) | 210년 ~ 알 수 없음 |
| 찬군교위 (贊軍校尉) | 208년 ~ 210년 |
| 횡강장군 (橫江將軍) | 214년 ~ 217년 |
| 기타 정보 | |
| 소속 세력 | 원술 → 손책 → 손권 |
| 직업 | 장군, 관료 |
2. 생애
노숙은 유복한 호족 집안 출신으로, 베풀기를 좋아하여 가산을 털어 빈민을 구제하고 명사들과 교류했다. 체구가 늠름하고 훌륭했으며, 젊어서부터 장사의 절개를 지니고 기이한 계책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난세에 검술과 기사 등을 배우고 사병을 모아 군사 훈련에 힘썼다.
주유가 거소 현장이었을 때 노숙을 찾아 자금과 식량 지원을 요청했고, 노숙은 창고 하나를 통째로 주었다. 주유는 노숙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친교를 맺었다.
원술에게 초빙되어 동성현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원술의 행정에 환멸을 느껴 일족과 젊은이들을 이끌고 주유에게 의탁했다. 주유와 함께 장강을 건너 손책을 알현하고 존중받았다.
할머니가 사망하여 동성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고, 친구 유엽이 정보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노숙은 이에 찬동하여 취아로 돌아가 어머니를 맞이하려 했으나,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었고 주유는 노숙의 어머니를 오로 옮겨 놓았다. 주유는 손권의 자질과 강남의 천운을 들어 노숙을 설득했고, 노숙은 주유의 설득을 받아들여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손권에게 등용되었다.[62]
208년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이기고 유종의 형주를 점령하며 강동을 노리자, 손권의 신하들은 항복을 주장했으나 노숙은 유비와의 결탁 및 항전을 주장했다. 노숙은 당양에서 유비와 동맹을 맺었고, 적벽대전에서 주유의 활약으로 조조는 대패했다. 210년 노숙은 주유의 뒤를 이어 강동의 군권을 거느리게 되었고, 217년 여몽을 후임으로 선정하고 병사했다. 노숙은 손권에게 천하삼분지계를 건의했으며, 온화한 성품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강동으로의 이주
노숙은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모와 함께 살았다.[62] 집안이 부유하여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돈을 풀어 가난한 자를 구휼하고 인재들과 교제를 쌓아 고을의 환심을 샀다.[62]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며, 가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하여 매우 관대했다는 기록이 있다.[2] 위소의 《오서》(吳書)는 노숙을 강인하고 비범한 외모를 지닌 인물로 묘사하며, 그는 어릴 때부터 큰 야망을 품었고 전략을 매우 좋아했다고 전한다.[3]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폭정으로 중국 전역에 혼란이 발생했을 때, 노숙은 가문의 토지와 재산을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그는 또한 다른 평판이 좋고 재능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4]
《오서》에는 혼란스러운 시기 동안 노숙의 삶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그는 검술, 승마, 궁술을 연마하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가신으로 고용하여 그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제공했다. 그들은 종종 언덕에 가서 사냥하고 군사 기술을 연마했다. 종족의 어른들은 "우리가 이 거친 아이를 얻었으니, 노씨 가문이 쇠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5]
196년경, 주유가 군벌 원술 휘하의 거초 현장(長중국어)으로 형식적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원술을 떠나 동쪽 강남 (또는 오) 지역으로 가서 강동에서 영토를 정복한 손책에게 합류하고 싶어 했다. 도중에 주유와 그의 수백 명의 민병대는 노숙이 있던 여강을 방문하여 물품을 요청했다. 당시 여강은 각각 3,000 ''호''의 곡물을 저장할 수 있는 두 개의 큰 창고를 소유하고 있었다. 노숙은 창고 하나를 가리키며 주유에게 주었다.[62] 주유는 노숙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6] 누군가에게 관대하게 원조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는 중국어 관용구 "창고를 가리키며 증정하다"는 이 일화에서 유래했다.[7]
원술은 노숙의 명성을 듣고 그를 채용하여 동성현(東城縣; 현재의 장쑤성, 수녕현) 현장으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노숙은 원술의 행정이 규율이 없고, 원술이 결국 몰락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중앙 정부가 붕괴되었다. 강도와 산적이 만연하다. 회와 사 강 주변 지역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강동의 땅은 비옥하고 인구가 번성하며 강력한 군대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피난할 수 있다. 그 낙원으로 함께 가서 중원의 안정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따르기로 동의했다.[8]
노숙은 추종자들과 일부 민간인들을 이끌고 주유와 합류하기 위해 남쪽의 거초현으로 갔다. 그는 건장한 청년들에게 후방을 지키도록 명령하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전진했다. 지방 당국은 노숙과 그의 추종자들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장한 기병들을 보냈다. 기병들이 그들을 따라잡자 노숙은 몸을 돌려 말했다. "여러분 모두 유능한 사람이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제국은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노력해도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고(우리를 막아도), 우리를 막는 데 실패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우리와 싸우고 싶습니까?" 그런 다음 그는 땅에 방패를 세우고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방패를 꿰뚫었다. 기병들은 노숙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하고 떠났다. 노숙과 그의 추종자들은 주유와 함께 양쯔강을 건너 강동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손책을 만났는데, 손책 역시 노숙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9]
3. 손권 진영에서의 활약
주유가 거소현의 현장으로 있을 때 노숙에게 군량을 요청하자, 노숙은 3천 곡의 곡식이 있는 창고 둘 중 하나를 통째로 내주며 주유와 깊은 친분을 쌓았다.[62] 원술이 노숙을 동성현의 현장으로 임명했으나, 노숙은 원술의 통치에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 주유가 있는 거소로 갔다.[62] 주유가 동쪽으로 떠날 때 함께 했으나, 조모의 사망으로 고향에 돌아갔다.[62] 이후 노숙은 친구 유엽의 권유로 정보에게 가려 했으나, 주유는 손권을 후한 왕실을 대신할 인물이라 칭송하며 노숙을 만류했고, 노숙은 이를 받아들여 주유의 추천으로 손권을 섬기게 되었다.[62]
노숙은 손권에게 처음으로 천하삼분지계를 제시하여 훗날 오나라의 기본적인 전략 방향을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 1. 천하삼분지계 제시
손권은 노숙을 처음 만나 매우 기뻐했다. 다른 손님들이 돌아간 후에도 노숙을 불러 술을 나누며 사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손권이 "한나라는 쇠퇴하고 사방이 혼란스러운데, 저는 아버지와 형님의 사업을 물려받아 제 환공과 진 문공과 같은 업적을 이루고자 합니다. 저는 당신의 고귀한 후원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묻자,[14] 노숙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노숙은 손권에게 한나라 부흥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조조를 제거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신 강동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양쯔강을 완전히 장악하여 천하를 도모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15] 이는 훗날 오나라의 핵심 전략이 되었다.
손권은 "지금 저는 한나라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16]
장소는 노숙이 겸손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주 노숙을 헐뜯었다. 장소는 노숙이 너무 어리고 부주의하다면서 손권에게 노숙에게 중요한 책임을 맡기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손권은 장소를 무시하고 노숙을 계속 존경하며 높이 평가했다. 그는 노숙의 어머니에게 새 옷과 휘장을 선물하고, 노숙의 가문을 부유했던 이전의 지위로 복원했다.[17]
3. 2. 적벽대전과 손-유 동맹
208년, 조조가 유종의 형주를 점령하고 강동을 위협하자, 노숙은 유비와의 동맹을 강력히 주장했다.[18][19] 당양에서 유비를 만나 동맹을 맺고, 제갈량과도 친교를 맺었다.[20] 적벽대전에서 주유를 보좌하며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27][28]노숙은 손권에게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유비와의 동맹을 제안했다.[18] 손권은 노숙을 형주로 파견하여 유비와 동맹을 논의하게 했다.[19] 노숙은 하구에서 조조의 형주 진격 소식을 듣고 남군으로 급히 이동, 장판에서 유비를 만나 손권의 의도를 전달하고 강남의 안정됨을 강조했다. 유비는 이에 기뻐하며 제갈량을 노숙과 함께 손권에게 보내 동맹을 논의하게 했다.[20]
배송지는 노숙이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손-유 동맹을 처음 제안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촉한과 동오의 역사가들이 이 부분에 대해 상반된 기록을 남긴 것은 각자 자기 나라의 공으로 돌리려 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20]
당시 주유는 파양현에 있었는데, 노숙은 손권에게 주유를 불러 조조의 침략에 대처할 계획을 논의하도록 건의했다. 주유 또한 손권에게 조조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고, 손권은 조조와의 전쟁을 결심했다. 손권은 주유에게 군대 지휘를 맡기고, 노숙을 찬군교위(贊軍校尉|찬군교위중국어)로 임명하여 주유의 전투 계획 수립을 도왔다.[27]
208년 겨울, 적벽 전투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조조의 군대를 격파했다. 전투 후 노숙이 돌아오자 손권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 환영했다.[28]
4. 주유 사후 오나라의 지도자
208년 조조가 형주를 점령하고 강동을 노리자, 노숙은 유비와의 동맹을 주장하며 적벽대전 승리에 기여했다. 210년 주유가 사망하자, 노숙은 그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군권을 계승했다.[34] 주유는 노숙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손권에게 그를 후임으로 추천하는 유언을 남겼다.[32][33] 노숙은 분무교위, 한창태수, 편장군 등을 역임하며 군사력을 증강했고, 214년에는 횡강장군으로 승진했다.[35]
4. 1. 형주 문제와 유비와의 관계
210년, 유비는 손권을 만나 형주의 자사를 요청하기 위해 형(京; 현재의 장쑤성, 전장시)으로 갔다. 노숙은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는 것이 낫다고 손권에게 조언했다.[29] 당시 여범은 유비를 인질로 잡아 형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노숙은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주어 조조에게 더 많은 적을 만들고 아군에게는 적을 덜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반박했다. 손권은 노숙의 의견에 동의했다.[30] 조조는 손권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줬다는 소식을 듣고 붓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31]주유는 사망하기 전, 감녕 등과 함께 손권에게 익주를 빼앗을 것을 권했다. 그러나 주유는 익주 침공을 준비하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 손권이 유비에게 의견을 묻자, 유비는 익주를 차지할 속셈을 숨기고 거짓으로 손권에게 유장에게 관대함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유비는 유장을 공격하여 익주를 점령하면서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냈고, 관우를 남겨 형주를 지키게 했다. 손권은 유비의 익주 점령 소식에 분노하며 유비를 비난했다.[36]
형주에서 손-유 국경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자, 노숙은 유비 측에 우호적으로 대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후, 손권은 유비에게 형주 남부의 세 개 군( 장사군(長沙중국어), 영릉군 (零陵; 현재의 후난성 융저우시 일대), 계양군 (桂陽; 현재의 후난성 천저우시 일대))을 반환할 것을 요청했으나 유비는 거절했다. 손권은 여몽에게 군대를 이끌고 세 군을 무력으로 점령하라고 명령했고, 유비는 공안현으로 돌아가 관우를 보내 여몽을 막도록 했다.[37]
이양에서 노숙은 관우를 초대하여 분쟁에 대한 회담을 가졌다. 양측은 회담 장소에서 100보 이상 떨어진 곳에 군사를 주둔시켰고, 회담에 참석한 장교들은 칼 한 자루만 무장했다. 노숙은 관우에게 "원래 저희 주군은 패배하여 기반이 없을 때 귀하의 주군에게 이 땅을 '빌려'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익주를 얻었으니 그 땅을 '돌려주려' 하지 않습니다. 단지 세 개의 군만을 요구하는데, 귀하는 여전히 거절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38][39] 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익명의 사람이 "그 땅을 다스릴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땅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끼어들자, 노숙은 단호하고 엄한 어조로 그 사람을 꾸짖었다. 관우는 칼을 뽑아 들고 일어나 "이것은 국가적인 문제이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40]
위소의 《오서(吳書)》에 따르면, 회담에 앞서 육손의 부하들은 관우가 육손을 해칠까 봐 회담에 참석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육손은 평화적인 해결을 강조하며, 관우가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41] 육손은 관우를 만나 "우리 주군은 적벽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동안 편히 쉬지도 못했소. 그는 자신의 힘에 의존하여 적을 물리쳤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찌 한 조각의 땅도 얻지 못할 수 있겠소? 그런데 이제 당신이 와서 그에게서 땅을 빼앗으려 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42]
육손은 "아니오. 내가 처음 당신의 주군을 장판 전투에서 만났을 때 그의 병력은 군단을 구성하기에도 너무 적었고 당시 상황은 지금보다 매우 열악했소. 우리 주군은 당신의 주군이 정착할 곳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여 당신의 주군에게 보호와 안식처를 제공했소. 그러나 당신의 주군은 우리에게 정직하지 않았고, 스스로 행동했소. 그것이 바로 우리의 관계가 악화된 이유요. 이제 익주를 차지한 후에도 형주를 독차지하려 하는가? 이것은 합리적인 사람이 할 일이 아니며, 하물며 지도자가 할 일이 아니오! 나는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해 도덕적 원칙을 저버리는 자는 멸망할 것이라고 들었소. 당신은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지만, 문제를 처리하는 데 현명함이 부족하며, 도덕 교육에 의존해야 하지만, 대신 힘을 사용하는 데 의존하오. 만약 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옳다면, 어찌 성공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겠소?"라고 답했다.[43] 관우는 육손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44]
결국 유비는 형주를 상강을 따라 분할하는 데 동의했고, 양측은 군대를 철수시켰다.[45]
214년(건안 19년), 노숙은 완성 전투에 참가했고, 횡강장군으로 전임되었다. 215년(건안 20년)에 유비가 익주를 병탄하자 손권은 형주의 장사, 계양, 영릉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여몽에게 명하여 세 군을 평정하게 했고, 손권은 직접 육구에 포진하고 노숙은 1만 군을 이끌고 파구로 진군했다. 유비도 공안에 출진하고 관우가 3만 군을 이끌고 익양에 포진했다. 여몽이 장사, 계양을 항복시켰고, 노숙은 익양에 성을 쌓아 관우를 견제했다.[57] 관우는 정예 5천 명을 선발하여 강의 상류에서 강을 건너려 했으나, 감녕이 밤 사이에 강 건너편에 포진하자 강을 건너지 않았다. 그 땅은 관우의 여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노숙은 관우를 불러 회견하여, 각자 병마는 백 보 뒤에 물러서게 하고, 오직 장군만이 칼 한 자루를 차고 회담에 임하도록 요청했다. 노숙은 "형주의 땅은 유비가 패배하여 멀리 왔고, 거처할 곳이 없었기에 빌려준 것이고, 지금 익주를 얻었음에도 반환할 뜻이 없고, 단지 세 군을 요구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라며 관우를 책망했다. 회담에 있던 한 사람이 "땅은 덕이 있는 자가 소유하는 것이니, 어찌 소유하는 바가 정해져 있겠는가"라고 외치자, 노숙은 이를 찡그리며 꾸짖었다. 관우는 "국가의 일이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알겠는가"라며 눈짓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노숙은 유비에게 정을 꾸미고 덕에 어긋났기에 호의가 깨졌다고 비난했고, 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58]
조조가 한중을 영유하자, 유비는 익주를 잃을까 두려워 손권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요구했던 세 군의 영유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상수를 경계선으로 나누어 손권은 영릉과 학보를 유비에게 반환했다. 유비는 손권에게 장사·계양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자신은 영릉·무릉·남군을 영유하게 되어 정전했다.
5. 죽음과 평가
노숙은 217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손권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식에 참석했고, 제갈량 또한 노숙을 위한 추도식을 열었다.[63]
《오서(吳書)》에 따르면, 노숙은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군대에 있을 때도 책을 읽는 등 학문에 힘썼다. 또한, 뛰어난 판단력과 통찰력을 갖춘 인물로 주유 다음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았다.[49]
손권은 노숙이 왕조를 세우는 계획을 제시하고, 적벽대전 직전에 조조에 대항하여 유비와 동맹을 맺도록 도운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전국 시대의 전략가 장의와 소진에 비해 외교 관계를 관리하는 데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노숙의 공헌이 이러한 단점을 가릴 만큼 충분하다고 여겼다.[50]
229년, 손권이 황제를 칭하고 동오를 건국했을 때, 신하들에게 "예전에 노자경(노숙)이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과연, 그는 훌륭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하며 노숙의 통찰력을 칭송했다.[51]
손권은 유수가 등우의 권유로 황제가 될 뜻을 키워 후한을 세운 것처럼, 자신도 노숙의 제안으로 제왕이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노숙이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군율을 엄격하게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동진의 원굉은 "삼국명신서찬"에서 노숙을 명신 중 한 명으로 칭송했다.[60][61]
5. 1. 가계
노숙은 노숙의 아들로 유복자로 태어났다. 장승은 노숙이 훗날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47] 노숙은 손휴 재위 기간(258년~264년) 동안 소무장군, 무창 도독을 역임하고 도정후에 봉해졌다. 손호 재위 기간(269년~271년)에는 하구 도독으로 재임했다. 그는 규율이 바르고 임무 수행 능력이 뛰어났으며, 274년에 사망했다.[47]노숙의 아들 노목(魯睦)은 아버지의 후작 작위와 군직을 물려받았다.[48]
6. 대중문화 속의 노숙

노숙은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삼국 시대 이전과 기간 동안의 역사적 사건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인물이다. 소설에서 노숙은 제갈량과 주유의 지략을 돋보이게 하는 대비 역할로, 역사적 사실보다 비중이 축소되어 묘사된다. 특히 적벽 대전으로 이어지는 사건에서 제갈량과 주유 사이의 경쟁에 코믹 릴리프를 더하는 역할로, 종종 속고 이용당하는 정직하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려져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 손권 간의 영토 분쟁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노숙은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 여덟 번째 작품과 ''무쌍 오로치 4''에서 처음으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했으며, 코에이의 전략 게임 시리즈인 ''삼국지''에도 등장한다.[1]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노숙은 외교에 친유파 문관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다. 소설에서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제갈량에게 휘둘리고 주유에게 핀잔을 듣는 등 손해를 보는 역할을 맡는다. 유비를 감싸기만 하다가 유비와의 교섭에 완전히 실패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그의 죽음은 관로가 조조 앞에서 예언했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3]
《삼국지평화》에서 묘사되는 유명한 관우와의 "단도회"에서 노숙은 관우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회식 때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고의로 중국의 음계인 "궁·상·각·치·우" 중에서 "우"의 음을 빼고, "관우를 살해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4]
7. 유적
악양루는 노숙이 수군 훈련을 할 때 열병식을 거행했던 누각이라고 한다. 황학루, 등왕각과 함께 강남 3대 명루 중 하나로 꼽힌다.
노숙의 묘소는 후난성 웨양시, 장쑤성 전장시, 후베이성 우한시 등지에 남아있다.
| 위치 | 묘소 설명 |
|---|---|
| 후난성 웨양시 | 1889년에 묘비와 정자가 정비되었지만, 문화 대혁명으로 파괴되었다. 1986년에 재건되었으며, 비문에는 "오한창 태수 노숙 묘"라고 적혀 있다. 성(省)급 중점 문물 보호 단위이다. |
| 장쑤성 전장시 | 묘비가 있으며, 비문에는 "오 횡강 장군 노숙의 묘"라고 적혀 있다. |
| 후베이성 우한시 | 1867년에 묘비가 정비되었지만, 우한 창장 대교 건설과 함께 1955년에 철거되어 산기슭으로 옮겨졌다. 비문에는 "오한창 태수 노숙 묘"라고 적혀 있다. |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4
[2]
서적
Sanguozhi vol. 54
[3]
서적
Sanguozhi vol. 54
[4]
서적
Sanguozhi vol. 54
[5]
서적
Sanguozhi vol. 54
[6]
서적
Sanguozhi vol. 54
[7]
웹사이트
Dictionary definition of 指囷相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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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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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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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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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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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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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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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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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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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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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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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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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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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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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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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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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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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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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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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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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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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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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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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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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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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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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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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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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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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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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三国志では西晋に下邳郡を分割して建置された臨淮郡とな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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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なお、孫権にわざと降伏を勧めて挑発し、孫権が自らを斬ろうとしたことを喝破したという逸話もある(『魏書』『九州春秋』)。東晋の史家孫盛は『呉書』および『江表伝』には、魯粛が初めて孫権と会見したとき、すでに曹公を防ぐべきと説いて帝王の計略を論じており、劉表が死ぬと、またも使者を立てて情勢を観察するよう要請したとあり、今さら意見を変えて曹公の出迎えを勧めて挑発することなどありえないのである。しかも、このとき出迎えを勧める者は数多くいたのに、そのくせ魯粛一人を斬ろうとしたなどと言うのは、その論理に合わぬことであるという見解を述べている。
[54]
서적
周瑜伝
漢晋春秋
[55]
문서
周瑜伝
[56]
서적
魯粛伝
資治通鑑
[57]
서적
輿地志
元和郡県志
[58]
문서
魯粛伝
[59]
서적
走馬長沙呉簡
紹熙長沙志
[60]
문서
名臣20選
[61]
문서
魯粛は「昂昂子敬 抜跡草萊 荷檐吐奇 乃構雲臺」と謳われている
[62]
논문
삼국지
[63]
서적
Sanguozhi vol.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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