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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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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는 4세기에서 5세기 초 중국의 서진 왕조 멸망 후 화북과 쓰촨 분지에서 건국된 여러 비한족 국가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남송 시대에 처음 등장했으며, 흉노, 갈, 선비, 저, 강 등의 민족을 지칭했다. 오호는 다양한 기원을 가진 혼합된 집단으로, 흉노, 갈, 선비, 저, 강 등 5개의 주요 민족 외에도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포함되었다. 오호의 등장과 함께 중국 북부에는 오호십육국 시대가 열렸고, 이 시기 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 이동과 융합이 이루어졌으며, 불교가 확산되는 등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반도 국가들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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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개요
용어오호(五胡)
로마자 표기Wu Hu
관련 시대위진남북조시대
관련 민족흉노
선비족
갈족
저족
강족
상세 내용
정의중국 역사에서 서진 말기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 중국 북방에 거주하던 다섯 유목민족
구성흉노
선비족
갈족
저족
강족
관련 사건영가의 난
오호십육국시대
특징이민족의 중국 지배
한족의 강남 이주 및 동진 건국
영향중국 문화의 다양성 증가 및 북방 민족 문화 발전

2. 오호(五胡)의 정의와 기원

오호의 이주 패턴


'오호(五胡)'는 중국 서진 말기부터 5호 16국 시대에 걸쳐 중국 북부에서 활동했던 여러 비(非)한족 민족 집단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6세기 초에 쓰인 ''16국춘추''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다섯 부족을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11] 일부 현대 학자들은 초기의 '오호'가 특정 민족을 가리키기보다는 오행 사상과 관련된 상징적인 표현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12]

이후 남송 시대에 이르러 흉노, , 선비, 저, 강의 다섯 부족을 오호로 정의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오호'로 불린 집단은 이 다섯 부족에 국한되지 않으며, 원시 몽골족, 튀르크족, 티베트족, 예니세이족 등 다양한 계통의 부족들이 혼재되어 있었다.[13][14][15][16] 따라서 오늘날 '오호'는 특정 다섯 민족만을 의미하기보다는, 해당 시기 중국 북부와 서부에 거주하며 활동했던 여러 이민족 집단을 포괄하는 용어로 이해된다.

이들 오호 민족은 대, 특히 후한 시대부터 점차 중국 내륙으로 이주하여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이들은 유목 또는 반농반목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중국 왕조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때로는 중국 내부의 전쟁이나 권력 다툼에 군사력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서진 시대에는 이들 이민족을 다시 변방으로 이주시키자는 논의(사융론)도 있었으나, 팔왕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란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서진의 황족과 제후들이 권력 투쟁 과정에서 이민족의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오호를 비롯한 여러 이민족 세력이 독자적인 힘을 키울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는 결국 서진의 멸망과 5호 16국 시대라는 북방 이민족 왕조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1. 오호의 정의



"오호(五胡)"라는 용어가 처음 기록된 것은 501년에서 522년 사이에 쓰여진 ''16국춘추''이다. 이 책에는 전진의 군주 부견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서 '오호'가 언급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다섯 부족을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11] 천인극이나 주이량 같은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당시 '오호'가 특정 민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중국 왕조들이 통치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오행 사상과 관련된 이론적인 개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2]

'오호'라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남송 시대인 12세기이다. 당시 관료였던 홍매가 자신의 저서 ''용재수필''에 "오호란화(五胡亂華)", 즉 "오호가 중원을 어지럽히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부터이다. 하지만 홍매 역시 이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가 언급한 일곱 명의 군주는 흉노, , 선비, 저의 네 부족에 속했을 뿐이다. 이후 같은 남송 시대의 관료 왕응린은 오호를 "유연의 흉노, 석륵의 갈, 모용-선비, 부홍의 저, 요장의 강"으로 구체적으로 정의했다. 호삼성자치통감에 주석을 달면서 왕응린의 견해를 받아들여 오호를 흉노, 갈, 선비, 저, 강의 다섯 부족으로 설명했고, 이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오호는 원시 몽골족, 튀르크족, 티베트족, 예니세이족 등 다양한 계통의 부족들이 섞인 집단이었다.[13][14] 일부 학자들은 이들을 두 개의 튀르크계 부족, 한 개의 퉁구스계 부족, 두 개의 티베트계 부족으로 분류하기도 하고,[15] 또 다른 학자들은 티베트계와 알타이계 (원시 몽골족 및 초기 튀르크족)로 나누기도 한다.[16] 후대의 연구를 통해 실제로는 다섯 부족 이상이 존재했음이 밝혀졌지만, 오늘날 '오호'는 진나라 시대와 5호 16국 시대에 중국 북부와 서부 지역에 살았던 비(非)한족 집단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2. 2. 오호의 기원



"오호(五胡)"라는 용어가 처음 기록된 것은 501년에서 522년 사이에 편찬된 ''16국춘추''이다. 이 책에서는 전진의 군주 부견의 말을 인용하며 '오호'를 언급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다섯 부족을 지칭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11] 천인극이나 주이량과 같은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당시의 '오호'가 특정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중국 왕조들이 통치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자주 사용했던 오행 사상과 관련된 상징적인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12]

'오호'라는 개념이 구체화된 것은 12세기 남송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관료였던 홍매는 자신의 저서 ''용재수필''에 "오호란화(五胡亂華)", 즉 "오호가 중원을 어지럽히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하지만 그가 언급한 일곱 명의 군주는 흉노, , 선비, 저의 네 부족에 속했을 뿐이어서, 여전히 오호의 정의는 모호했다. 이후 남송의 다른 관료인 왕응린이 오호를 "유연의 흉노, 석륵의 갈, 모용씨의 선비, 부홍의 저, 요장의 강"으로 명확히 정의했다. 원대의 역사가 호삼성자치통감의 주석에서 왕응린의 정의를 따르면서, 오호는 흉노, , 선비, 저, 강의 다섯 이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들 오호는 민족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원시 몽골족, 튀르크족, 티베트족, 예니세이족 등 여러 계통의 부족들이 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3][14] 일부 학자들은 튀르크계 2개 부족, 퉁구스계 1개 부족, 티베트계 2개 부족으로 분류하기도 하고,[15] 또 다른 학자들은 티베트계와 알타이계(원시 몽골족 및 초기 튀르크족)로 나누기도 한다.[16] 실제로는 다섯 부족 이상이 존재했지만, '오호'는 점차 서진 시대와 5호 16국 시대에 중국 북부와 서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다양한 비(非)한족 유목 민족 집단을 통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한나라 시대 이전의 중국에서는 주로 농민들이 성곽 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나 후한 시대부터 흉노를 비롯한 여러 유목 민족들이 점차 중국 영토 안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이들은 독자적인 부족 공동체를 유지하며 목축이나 반농반목 생활을 했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지도자인 선우 등을 따랐다. 이들 유목 민족 집단은 중국 왕조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뛰어난 기마술과 전투력을 바탕으로 중국 내부의 전쟁이나 권력 다툼에 용병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잦았다.

서진 시대에는 이러한 이민족들을 다시 국경 밖으로 이주시켜야 한다는 주장(사융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팔왕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전이 발발하자, 서진의 황족과 제후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이들 이민족의 군사력을 이용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오호를 비롯한 여러 이민족 세력이 독자적인 힘을 키워 중국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는 5호 16국 시대를 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3. 오호의 주요 민족

후한 말기 이후, 화북 지방에는 북쪽과 서쪽에서 이주해 온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되어 농업에 종사하거나 군대에 복무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고유한 부족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양한 수준의 한화(漢化)를 겪었다. 서진 시대에 이르러 이들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자, 일부 관리들 사이에서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재상 강통(江統)은 ''사융론''(徙戎論)에서 이들 비한족계 민족들을 변경 밖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팔왕의 난으로 서진의 중앙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자, '오호'(五胡)라 불리는 여러 민족들이 한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거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물론 초기에는 서진을 도와 싸운 세력도 있었다. 4세기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이들 오호 민족들은 화북과 쓰촨 분지에 여러 나라를 세웠는데, 이 시기를 오호 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

'오호'는 특정 다섯 민족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화북 지역에서 활동했던 여러 비한족계 민족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다음의 다섯 민족을 주요 세력으로 꼽는다.


  • 흉노: 북방 유목 민족으로, 남흉노가 화북으로 이주하여 한(漢)(전조) 등을 세웠다.
  • : 흉노에 복속되었던 유목 민족으로 추정되며, 석륵후조를 건국했다.
  • 선비: 동호의 후예로 알려진 민족으로, 모용부, 탁발부 등이 전연, 북위 등 다수의 국가를 세웠다.
  • : 티베트계 민족으로 추정되며, 전진, 성한, 후량 등을 건국했다.
  • : 저족과 함께 티베트계 민족으로 추정되며, 후진 등을 세웠다.


이 외에도 월지의 후예로 추정되는 루수이후(盧水胡)와 같이 다양한 민족 집단이 이 시기 역사에 관여했다. 북량(北涼)을 세운 거씨(沮渠氏)가 루수이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3. 1. 흉노 (匈奴)

흉노 제국은 동아시아 초원을 지배하며 한나라의 강력한 적수였으나, 서기 1세기경 한나라와의 전쟁 패배, 내부 권력 투쟁, 자연재해 등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서기 50년경 제국이 분열되면서 남흉노 지파는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선우의 조정은 병주서하군으로 옮겨졌고, 남흉노 부족들은 만리장성 안쪽의 변경 군현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나라의 북쪽 국경 수비를 돕고, 경쟁 관계였던 북흉노를 멸망시키는 데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한나라에 의존하고 정치적으로 간섭받는 상황 속에서 남흉노는 자주 국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다.[17]

후한 말기인 216년, 군벌 조조선우 제도를 폐지하고 남흉노를 태원군 일대에 다섯 부족(오부, 五部)으로 나누어 통제력을 강화했다.[18][19][20] 이 시기부터 흉노는 점차 단일한 민족 정체성을 잃어갔다. 오부는 추거(屠各) 지파가 주로 지배했으며, 그 외의 흉노인들은 다른 민족과 섞이면서 ''호''(胡) 등 비한족을 통칭하는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병주 지역의 이들 부족은 점차 한화(漢化)되었다. 특히 오부의 많은 이들은 조상 대에 ''화친'' 정책을 통해 한나라 공주와 혼인했다는 점을 내세워 유(劉)씨 성을 사용했으며, 귀족들은 서진 왕조에서 관직을 얻기도 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낮은 신분과 차별 대우로 인해 지배 왕조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서진 시대에는 한족과 혼합되고 농경을 받아들여 정착화되면서 남흉노의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4세기 초, 팔왕의 난으로 서진의 중앙 권력이 약화되자 304년, 남흉노 오부의 유연이 한왕(漢王)을 칭하며 독립을 선언하고 한조(漢趙, 훗날 전조)를 건국했다. 유연은 자신이 남흉노 선우의 직계 후손이자 한나라 공주의 후손임을 내세워, 자신의 국가가 한나라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한조는 서진을 멸망시키고 오호 십육국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한편, 남흉노 황실의 후예를 자처하는 철불부(鐵弗部)는 선비족과 섞여 살다가 병주에서 하타오 지역으로 밀려났다. 407년, 철불부의 혁련발발은 하(夏)나라를 세우면서, 흉노가 전통적으로 조상으로 여겼던 고대 하나라의 후예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흉노 혈통을 내세웠다.

3. 2. 갈 (羯)

갈족(羯族)은 한나라 시대에 흉노에 복속되었던 북서부의 유목민으로, 정치·문화적으로 흉노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병주에 거주하던 다양한 ''오랑캐'' 부족 중 하나였다. 갈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월지, 강거와 유사한 토하라계 민족, 동이란계 민족, 또는 예니세이족에서 유래했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학계의 통일된 견해는 없다. 기록에 따르면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높으며 수염이 짙은 외모를 가졌으며, 이로 인해 서방계 종족과의 혼혈로 추정되기도 한다.

303년 병주에 큰 기근이 들자 많은 갈족과 다른 ''오랑캐''들이 고향을 떠났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는 관리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나가 허베이와 산둥 등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갈족 출신인 석륵이 등장했다. 석륵은 남흉노 羌渠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력을 키워 전조를 멸망시키고 319년 후조를 건국했다. 후조는 351년까지 화북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며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후조가 쇠퇴하면서 갈족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349년 한족 출신 부장 염민이 후조에 반기를 들고 갈족에 대한 대량 학살을 명령했으며, 이 사건과 후조 멸망 이후 이어진 혼란 속에서 갈족은 큰 타격을 입고 역사 기록에서 점차 사라졌다. 이후 역사 기록에서 일부 인물들이 갈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3. 3. 선비 (鮮卑)

선비(鮮卑)는 몽골계 민족으로 추정되며, 본래 만주 서부와 내몽골 동부 지역에서 반농반목 생활을 하던 동호의 한 갈래였다. 기원전 3세기, 흉노 제국이 동호를 격파하면서 동호는 선비와 오환으로 분열되었다. 후한이 북흉노를 몰아낸 후, 선비는 서기 93년경부터 세력을 키워 몽골 고원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180년경 추장 단석괴의 지도 아래 선비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고, 후한의 북쪽 국경을 끊임없이 공격하며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하지만 단석괴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들이 부족장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강력했던 연맹은 다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었다.

분열된 선비 부족들은 후한 말기와 삼국 시대 위나라의 회유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통일된 세력 없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활동했는데, 대표적으로 요서 지역의 우문부, 단부, 모용부, 음산 북쪽의 탁발부가 있었으며, 서쪽 하서와 농서 지역에도 여러 소규모 부족들이 흩어져 살았다. 일부 부족은 중국의 봉신이 되어 만리장성 안쪽에 거주하기도 했는데,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오환이 패배한 후 모용과 탁발 부족 등이 그 예이다. 모용부의 한 갈래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칭하이 지역의 강족을 복속시키고 토욕혼을 세우기도 했다.

서진 말기 팔왕의 난으로 중원이 극심한 혼란에 빠지자, 선비족은 이 시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유주의 감찰사 왕준은 단부 선비 등과 동맹을 맺어 내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흉노유연전조를 세워 서진으로부터 독립하자, 탁발부는 서진 편에 서서 싸웠고 그 공으로 대군 지역에 공작위를 받았다. 한편, 요동반도에 근거지를 둔 모용부모용외 대에 요서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고, 중원의 혼란을 피해 온 중국 관료와 백성들을 받아들이며 힘을 길렀다. 서진 세력이 화북에서 밀려나자 선비 부족들은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오호 십육국 시대 동안 선비족은 화북과 서북 지역에 여러 국가를 세우며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선비족이 건국한 주요 국가
부족건국 국가주요 활동 지역비고
모용부전연, 후연, 서연, 남연화북 동부, 요서모용외가 기반을 닦고 모용황이 전연 건국. 후연에서 북연이 나왔으나 건국자는 고구려인 모용운.
탁발부대, 북위산서 북부, 화북 전역대에서 북위로 국호 변경 후 화북 통일, 남북조 시대 개막.
기복부서진감숙 서남부 (농서)하서 지역에서 활동한 서부 선비의 일파.
독발부남량감숙 서부, 칭하이 동부하서 지역에서 활동한 서부 선비의 일파.
단부-요서모용부에 의해 멸망.
우문부-요서모용부에 의해 멸망했으나, 후손이 남북조 시대북주 건국.



특히 탁발부는 대를 거쳐 북위를 건국하고 439년 화북을 통일함으로써 오호 십육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중국을 남북조 시대로 이끌었다.

3. 4. 저 (氐)

저족은 본래 티베트족 계통의 유목 민족으로, 간쑤성, 산시성, 쓰촨성 서부 지역에 거주했다. 전한 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농경 생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11년, 전한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저족의 주요 거주지에 무도군을 설치하자, 일부 저족은 화북과 화서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저족은 한족의 신하가 되었고, 후한 시대에는 안무 정책으로 인해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삼국 시대에 들어 저족은 정벌과 강제 이주의 대상이 되었다. 219년, 군벌 조조는 남쪽의 경쟁자인 유비와 저족이 동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 5만 명의 저족을 무도군에서 톈수이와 부풍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저족은 와 촉 양 정권에 편입되기도 했다.

서북 지역의 저족은 서진 시대에도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296년부터 299년까지 저족 추장 기만년이 다양한 비한족 집단을 이끌고 일으킨 반란은 관중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이 시기 혼란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중 분지와 쓰촨 분지로 간 저족 세력은 성한을 건국했다. 성한을 세운 이씨 왕조는 특히 파저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편, 북쪽에 남아있던 저족의 일파인 부씨 세력은 처음에는 후조를 섬겼다. 그러나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부홍이 독립하여 전진을 건국했다. 전진은 3대 군주인 부견 시대에 최성기를 맞이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잠시 화북을 통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비수 전투에서 전진이 동진에게 대패하면서 국력이 급격히 쇠퇴했다. 이때 서역 평정을 위해 파견되었던 저족 출신 장수 여광은 전진의 패배 소식을 듣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간쑤성 지역에 후량을 세웠다.

3. 5. 강 (羌)

강족은 저족과 함께 오호를 구성한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로 여겨지며, 같은 티베트계로 서부의 간쑤성, 산시성, 쓰촨성칭하이성 일대에 거주했던 반유목 민족이었다. 전한 시대에는 분산과 연합을 반복하며 흉노와 연계하기도 했으나, 흉노 세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한나라에 귀순했다.

후한 시대에 강족은 관중 지역과 웨이강 및 징강 유역 등 화북 각지에 흩어져 정착하여 한족과 함께 농업에 종사하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강족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기도 했다. 또한, 한나라 지방 관리들의 억압에 직면하면서 후한 말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화가 진행됨에 따라 빈번하게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의 군사력과 경제에 부담을 주었다. 한편, 강족은 한나라 군대의 일원으로 복무하기도 했으며, 이후 삼국 시대에는 조위나 촉한의 군인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서진 시대에도 강족은 서북부 지역에서 반란을 지속했다. 팔왕의 난 이후 전진이 와해되자, 강족 출신의 요장이 독립하여 384년 후진을 건국하며 오호 십육국 시대에 참여했다. 후진은 강족이 세운 유일한 십육국이다. 2대 군주인 요흥 대에 후진은 최성기를 맞이하여 화북 서부 지역을 지배했다. 요흥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국교로 삼았으며, 유명한 불교 승려이자 번역가인 구마라집을 후원하여 불교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이 외에도 강족은 당창국이나 덩즈와 같은 소규모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4. 기타 소수 민족

후기 한나라 이후 화북 지방에는 북방과 서방에서 온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되어 농경에 종사하거나 군대에 복무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고유한 부족 정체성을 유지하며 다양한 수준의 한화를 겪었다. 서진 시대에 이르러 이들 민족의 인구가 증가하자 일부 관리들 사이에서는 우려가 커졌고, 재상 강통은 그의 논문 ''사융론''(徙戎論)에서 이들을 국경 밖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팔왕의 난으로 서진 중앙 정부의 권위가 무너지자, 오호(五胡)라 불리는 여러 민족들은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거나 기존 왕조에 맞서 봉기하며 오호 십육국 시대를 열었다.
흉노한때 동아시아 초원의 강자였던 흉노한나라와의 오랜 대립과 내부 분열, 자연재해 등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서기 50년경 남흉노는 한나라에 복속하여 병주서하군만리장성 안쪽 변경 군현으로 이주했으며, 한나라의 북방 방위를 돕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한나라 조정의 간섭과 경제적 종속은 잦은 긴장과 반란을 유발했다.[17] 216년, 군벌 조조는 남흉노의 선우(單于) 직책을 폐지하고 이들을 태원군 주변의 오부(五部)로 나누어 통제력을 강화했다.[18][19][20] 이후 흉노는 점차 통합된 정체성을 상실해갔으며, 오부의 지배층인 추거 씨족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른 민족과 섞여 ''호''(胡)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부의 귀족 중 일부는 한화되어 성씨를 유(劉)씨로 바꾸고(화친을 통한 한나라 황실과의 혈연관계를 주장) 서진 조정에서 관직을 얻기도 했으나[21], 여전히 차별적인 지위 때문에 지배 왕조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4세기 초, 팔왕의 난이 극에 달하자 오부 출신의 유연은 흉노의 부흥과 한나라의 계승을 내세우며 한조를 건국했다. 또한, 선비족과 섞여 하타오 지역으로 밀려났던 철불(鐵弗) 부족 출신의 혁련발발은 407년에 하(혁련)를 세우고, 흉노가 전통적으로 조상으로 여겼던 하나라의 후예임을 주장하며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기타 민족흉노 외에도 정령, 파저, 노수호, 고구려, 오환 등 다양한 민족들이 이 시기 화북과 쓰촨 분지 등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정령은 본래 몽골 고원 북쪽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유목 민족으로, 일부는 남하하여 중국 내지에 정착했으며, 오호 십육국 시대에는 적위라는 독자적인 세력을 잠시 세우기도 했다.
  • 파저는 위수 상류 략양군 일대에 거주하던 저족 계열의 바족으로 추정된다. 296년의 혼란기에 이특의 지도 아래 대규모 유민 집단이 남하하여 쓰촨 분지성한을 건국했다.
  • 노수호는 오늘날 간쑤성 지역에 분포했던 민족 집단으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흉노의 정치·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397년 북량을 건국한 저거몽손이 노수호 출신이다.
  •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의 강국이었으나, 244년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으로 일부 주민이 영양군 등 중원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기도 했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는 화북의 여러 정권과 경쟁하거나 때로는 복속하는 관계를 맺었으며, 북연의 건국자인 모용운(고운)은 전연과의 전쟁 때 포로로 잡혀갔던 고구려 왕족의 후예였다.
  • 오환동호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으로, 한나라 시기 동북부 군현에 정착했다.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한 후 세력이 약화되어 한족선비족에 동화되었으나, 오호 십육국 시대까지 그 이름이 유지되며 일부 세력이 활동했다.


이들 다양한 민족들의 활동은 오호 십육국 시대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4. 1. 정령 (丁零)

정령(丁零)은 원래 바이칼 호 남쪽, 즉 몽골 고원 북쪽을 고향으로 삼았던 튀르크계 유목 민족이다. 이들은 본래 흉노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강거에 정착해 서정령(西丁零)으로 불렸고, 이후 중국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선비족의 단석괴 사후 그 세력이 약화되자, 정령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삼국 시대에는 중국 내지에서 전투력을 제공하는 등 부분적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오호 십육국 시대에 들어서, 화북 국가들에 복속되어 있던 정령의 적(翟)씨 세력은 비수 전투 이후 전진의 세력이 약화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후연으로부터 독립하여 388년에 적위(翟魏)를 건국했으나 오래가지 못했고, 이는 십육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한편, 북쪽 초원에 남아 있던 정령 부족들은 이후 칠륵(敕勒), 고차(高車), 철륵(鐵勒)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4. 2. 파저 (巴氐)

파저(巴氐)는 후한 말기 이후, 위수 상류의 략양 지역에 거주하던 저족 계열의 바족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원래 고향은 동부 쓰촨성의 바 지역으로, 반둔인이라고도 불렸다. 세금을 '총'(賨)이라는 형태로 납부했기 때문에 총족(賨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많은 총족이 북쪽 한중 분지로 이주하여 오두미도의 신자가 되었으나, 215년 조조가 이 지역을 정복한 후, 이들을 더 북쪽인 략양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략양으로 이주한 바족은 그곳의 저족과 섞여 살면서 '파저'라고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파'(巴)는 그들의 조상 고향인 바 지역을 의미한다.

서진 시대인 296년, 저족 추장 제만년이 일으킨 반란과 관중 지역의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이때 파저의 지도자였던 이특은 이 유민들을 이끌고 남쪽 한중을 거쳐 원래 고향인 쓰촨 분지로 돌아갔다. 304년, 이특의 아들 이웅서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성한을 건국하고 쓰촨 지역에 세력을 확립했다. 이후 320년에는 또 다른 바족의 추장인 구취지가 관중에서 바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을 이끌고 한조에 맞서기도 했다.

4. 3. 노수호 (盧水胡)

노수호(盧水胡)는 오늘날 간쑤성 장예산시성 중부에 분포했던 민족 집단이다.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의견이 있으며, 월지의 후손이 강족과 섞여 형성되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북량을 건국한 거취(沮渠) 씨족은 노수호 출신이었다. 397년 북량을 세운 저거몽손 역시 노수호 출신이다. 거취 씨족의 조상이 과거 흉노 제국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기 때문에, 최근의 역사서에서는 오호 십육국 시대의 용어 구분에 따라 이들을 "흉노"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한 노수호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흉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4. 4. 고구려 (高句麗)

고구려는 삼국 시대의 주요 국가 중 하나였다. 전한 시기 농경 사회의 영향을 받아 성장했으며, 1세기에는 허베이·산시 지방까지 진출하며 후한 조정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후한 말기에는 요동 지역에 기반을 둔 공손씨 세력과 연계하여 영향력을 넓히려 했으나, 공손씨가 위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위나라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244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공으로 수도 환도가 함락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일부 고구려 주민들이 싱양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서진에 복속하기도 했다. 강통의 《사융론》(徙戎論)에 따르면, 이 고구려-위 전쟁 이후 조위 시대부터 싱양에는 고구려계 주민들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호 십육국 시대 동안 고구려는 화북 지역의 여러 정권에 복속하는 한편, 특히 선비족의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후연과 경쟁하며 여러 차례 충돌했다. 342년에는 전연의 침공을 받아 고구려 왕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청산(현재의 진저우)으로 끌려갔다.

이때 끌려간 고구려 왕족 출신인 고운(모용운)은 이후 후연에서 관직에 올라 세력을 키웠고, 결국 모용씨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역사학자들은 고운을 후연의 마지막 군주 또는 북연의 첫 군주로 간주한다. 북연의 후계자들은 한족인 풍씨 가문이었다. 이처럼 고운은 전연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고구려 왕족의 후예로서 북연 건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4. 5. 오환 (烏桓)

선비족과 마찬가지로, 오환(烏桓)은 동호에서 분열된 또 다른 집단이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한나라는 오환의 군사적 봉사를 조건으로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동군, 요서군 등 동북쪽 군현에 정착하도록 허용했다. 한나라가 멸망할 무렵, 오환은 자체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으나,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조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 패배 이후 많은 오환인들이 중국 남부로 이주되었고, 한족선비족에게 동화되면서 점차 그들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잃어갔다. 오환이라는 이름은 진나라오호 십육국 시대에도 계속 등장했지만, 점차 동호 출신의 ''''(胡) 부족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들은 팔왕의 난오호 십육국 시대 동안 진나라의 지원군으로 싸웠으며, 후연 시대에는 오환이 이끄는 여러 개의 요새화된 정착지(塢堡|wubao중국어)가 북중국에 존재했다.

5. 오호십육국 시대의 전개

팔왕의 난으로 서진 왕조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자, 화북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비한족계 민족(오호)들은 자립하거나 한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4세기 초부터 화북과 쓰촨 분지 등지에서 여러 국가가 난립하는 오호 십육국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이민족들은 이전부터 중국 왕조에 복속되어 군사력으로 동원되기도 했으나[2], 팔왕의 난을 계기로 스스로 왕조를 세우는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다[3].

5. 1. 오호십육국 시대의 시작

후기 한나라 이후, 화북 지방은 북쪽과 서쪽에서 온 다양한 민족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이들은 한나라의 백성이 되어 농업에 종사하고 군대에 복무했다. 많은 이들이 고유한 부족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다양한 정도로 한화되기도 했다.

서진 시대에 이르러 이들의 인구가 상당히 증가하자, 일부 관리들 사이에서는 반란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재상 강통은 그의 논문 ''사융론''(徙戎論, 융족 이주에 대한 논의)에서 이들 부족을 국경 밖으로 이주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팔왕의 난으로 중앙 정부의 권위가 무너지자, 많은 "오호"들이 오호 십육국 시대한족 동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초기에는 진나라 편에서 싸운 이들도 있었다. 4세기와 5세기 초에 걸쳐, "오호"들은 화북과 쓰촨 분지에 여러 국가를 세웠으며, 이를 통틀어 오호 십육국이라고 한다.

갈족병주에 거주하던 다양한 ''오랑캐'' 부족 중 하나였다. 가장 유명한 갈족 인물인 석륵은 남흉노의 羌渠의 후손이었다. 갈족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토하라 또는 소그디아의 동이란계 민족, 예니세이족에서 기원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 명확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303년 병주에 큰 기근이 발생하자 많은 갈족과 다른 ''오랑캐''들이 고향을 떠났고, 이후 현 관찰사에 의해 노예로 잡혀 팔려나가면서 허베이와 산둥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비록 인구는 많지 않았지만, 갈족은 319년 후조를 건국한 석륵에 의해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후조는 351년에 멸망하기 전까지 중국 북부를 지배했다. 염민의 학살 명령과 후조 붕괴 이후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갈족은 역사 기록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이후 역사에서 몇몇 주요 인물들이 갈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대 이전의 중국에서는 농민이 성 안에 거주하며 농사를 지었으나, 주로 후한 시대부터 중국으로 이주한 흉노 등의 유목 민족은 집락을 이루어 방목이나 반농반목 생활을 하며 독자적인 천자선우의 자손을 지도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 집단은 중국 왕조에 복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종 군사력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대에는 이민족을 국외로 이주시키자는 사융론과 같은 논의도 있었지만,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여러 제후들이 권력 다툼을 위해 이민족의 군사력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중국 북부를 중심으로 오호를 비롯한 이민족 왕조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5. 2. 국가들의 흥망성쇠

후기 한(漢) 이후, 화북 지방에는 북쪽과 서쪽에서 온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되어 농업에 종사하거나 군대에 복무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고유한 부족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동시에 다양한 수준의 한화(漢化)를 경험했다. 서진 시대에 이르러 이들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자, 일부 관리들 사이에서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재상 강통은 그의 논문 ''사융론''(徙戎論, 융족 이주에 대한 논의)에서 이들 부족을 국경 밖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팔왕의 난으로 진나라 중앙 정부의 권위가 무너지자, 많은 "오호" 민족들은 오호 십육국 시대에 한족과 함께 반란에 가담했다. 물론 초기에는 진나라 편에서 싸운 이들도 있었다.[1] 4세기와 5세기 초에 걸쳐, "오호"로 불린 민족들은 화북과 쓰촨 분지에 여러 국가를 세웠는데, 이를 통틀어 오호 십육국 시대라고 부른다.[1]

=== 갈족(羯族) ===

갈족(羯族)은 병주(幷州) 지역에 살던 여러 이민족 부족 중 하나였다. 갈족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석륵인데, 그는 남흉노 선우였던 강거(羌渠)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1] 갈족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토하라인, 소그드인과 같은 동이란족 계통이라는 설, 예니세이족에서 기원했다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아직 명확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 303년 병주에 큰 기근이 들자 많은 갈족과 다른 이민족들이 고향을 떠났고, 이후 현지 관리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나가 허베이산둥 등지로 흩어지게 되었다.[1]

비록 인구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갈족은 석륵이 319년 후조(後趙)를 세우면서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후조는 351년 멸망하기 전까지 중국 북부 지역을 지배했다.[1] 하지만 염민이 내린 학살 명령과 후조 붕괴 이후 이어진 혼란 속에서 갈족은 역사 기록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다만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이 갈족의 후예일 가능성은 남아있다.[1]

=== 선비족(鮮卑族) ===

기원전 3세기경, 흉노 제국에게 패배한 동호(東胡)는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으로 나뉘었다.[1] 후한이 북흉노를 북서쪽으로 몰아낸 후, 선비족은 서기 93년경부터 몽골 고원을 차지하기 시작했다.[1] 2세기 중반, 추장 단석괴(檀石槐)는 선비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한나라의 북쪽 국경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그러나 단석괴 사후, 그의 후계자들은 부족장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연맹은 다시 와해되었다.[1] 한편, 북동쪽 국경 근처에 살던 일부 선비 부족들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 위나라의 번국이 되었다.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오환이 크게 패배한 이후, 모용씨(慕容氏)나 탁발씨(拓跋氏) 같은 부족들은 만리장성 안쪽으로 이주하여 살도록 허락받기도 했다.[1] 다른 일부 부족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하서 회랑 지역에 자리를 잡았으며, 모용씨의 한 갈래는 칭하이 지역의 강족(羌族)을 복속시키고 토욕혼(吐谷渾)을 세우기도 했다.[1]

팔왕의 난이 극에 달했을 때, 유주(幽州)의 자사였던 왕준(王浚)은 지역의 선비족 및 오환족과 동맹을 맺었는데, 특히 단부(段部) 선비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요서군(遼西郡)의 공작(公爵) 지위를 받았다.[1] 선비족은 이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조(前趙)가 진(晉)나라로부터 독립하자 탁발부는 진나라 편에 서서 싸웠고, 그 대가로 (代) 지역의 공작위를 받았다.[1] 반면, 요동반도에 있던 모용부는 중원의 혼란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었고, 화북에서 도망쳐 온 한족 관료와 농민들을 받아들이며 세력을 키웠다.[1] 진나라가 북중국에서 밀려나자, 선비족은 점차 진나라와의 관계를 멀리하고 자신들의 영역에서 완전한 자치를 확립해 나갔다.[1]

선비족은 오호 십육국 시대 동안 여러 국가를 세웠다.

  • 모용부: 전연(前燕), 후연(後燕), 서연(西燕), 남연(南燕)을 차례로 세우며 한때 중원 지역을 장악했다.[1]
  • 하서 지역: 비수 전투 이후, 걸복부(乞伏部)는 서진(西秦)을, 독발부(禿髮部)는 남량(南涼)을 세워 서로 경쟁하며 지역 패권을 다투었다.[1]
  • 탁발부: (代)를 기반으로 성장하여 훗날 북위(北魏)를 건국했고, 439년 마침내 화북을 통일하며 중국을 남북조 시대로 이끌었다. 이는 선비족이 세운 국가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례이다.[1]


=== 저족(氐族) ===

저족(氐族)은 간쑤성, 산시성, 쓰촨성 서부 지역에 거주하던 반(半)유목 민족이었다.[1] 기원전 111년, 전한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저족이 주로 살던 지역에 무도군(武都郡)을 설치했고, 이로 인해 저족은 화북과 화서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1] 저족은 한족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한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양측의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나, 이후 저족은 점차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1] 219년, 군벌 조조는 남쪽의 경쟁자였던 유비와 저족이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도군에 살던 약 5만 명의 저족을 톈수이(天水)와 부풍군(扶風郡)으로 강제 이주시켰다.[1]

서북 지역의 저족은 서진 시대에도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296년부터 299년까지 저족 추장 기만년(齊萬年)은 여러 비(非)한족 집단을 이끌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관중 지역을 크게 황폐화시켰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1] 남쪽으로 이주하여 한중 분지와 쓰촨 분지에 정착한 저족들은 저지(氐池)와 성한(成漢)과 같은 정권을 세웠다. 특히 성한을 세운 이씨(李氏) 일족은 파저(巴氐)라고 불리기도 했다.[1] 한편, 북쪽에 남아있던 부씨(苻氏) 일족은 훗날 전진(前秦)을 건국했으며, 부견(苻堅) 황제 때 잠시 화북을 통일하는 등 강력한 세력을 떨쳤다.[1] 그러나 비수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전진이 급격히 쇠퇴하자, 저족 출신 장군이었던 여광(呂光)은 간쑤성 지역에서 후량(後涼)을 세워 독립했다.[1]

5. 3. 북위의 통일

기원전 3세기 흉노에게 패배한 동호선비오환으로 나뉘었다. 선비족은 서기 93년경부터 몽골 고원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2세기 중반 단석괴가 잠시 통일하기도 했으나 그의 사후 다시 분열되었다. 모용이나 탁발과 같은 일부 선비 부족은 중국의 봉신이 되기도 했다.

팔왕의 난으로 서진 왕조가 혼란에 빠지자, 여러 선비 부족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산서성 북부의 대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탁발 부족은 서진과 협력하여 전조에 맞섰으며, 이후 대나라 건국의 기반을 다졌다. 요동반도의 모용 부족 역시 중원의 혼란을 피해 망명해 온 한족 관료와 유민을 받아들이며 세력을 키웠다.

십육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선비족은 여러 국가를 세웠다. 모용씨는 전연, 후연, 서연, 남연 등을 세우며 한때 화북 지역의 강자로 떠올랐다. 하서 회랑 지역에서는 기복씨가 서진을, 독발씨가 남량을 세웠다.

이러한 여러 선비족 국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력은 탁발 부족이 세운 대나라였다. 대나라는 이후 북위로 발전하였고, 마침내 439년에 화북 지역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북방을 통일했다. 이로써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이 끝나고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6. 오호십육국 시대의 의의와 영향

후한 시대 이후 화북 지방으로 이주한 여러 북방 민족들은 서진 시대에 이르러 그 세력이 커졌으나, 강통의 사융론과 같이 이들을 경계하고 국경 밖으로 이주시키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서진 말기 팔왕의 난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민족의 군사력은 각 세력에게 중요하게 활용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이민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국가를 세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화북과 쓰촨 분지 등지에서 여러 국가가 세워지는 오호 십육국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중국 북부 역사에서 이민족 왕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6. 1. 민족 이동과 융합

후기 한나라 이후, 화북 지방은 북쪽과 서쪽에서 온 다양한 민족들의 고향이 되었다. 이들은 한나라의 백성이 되어 농업에 종사하고 군대에 복무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각자의 부족 정체성을 유지했지만, 동시에 다양한 정도의 한화를 겪었다. 대 이전 중국에서는 농민이 성 안에 거주하며 농경을 했던 것과 달리, 주로 후한대부터 중국으로 이주한 흉노 등의 유목 민족은 집락을 형성하여 방목 혹은 반농반목 생활을 하면서 독자적인 천자나 선우의 자손을 추대했다. 그러나 이들은 집단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에 신속(臣屬)했기 때문에, 전투력을 인정받아 빈번하게 군사력으로 동원되었다.

서진 시대에 이르러 이들 이민족의 인구는 상당히 증가하여, 일부 관리들 사이에서는 이들의 반란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재상 강통은 그의 논문 ''사융론''(徙戎論, 융족 이주에 대한 논의)에서 이들 부족을 국경 밖으로 이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팔왕의 난으로 인해 중앙 정부의 권위가 붕괴되자, 많은 "오호"들이 오호 십육국 시대에 한족 동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물론 초기에는 진나라 편에서 싸운 이들도 있었다. 팔왕의 난 당시 제후들이 권력을 다투면서 이민족을 군사력으로 이용한 것은 중국 북부를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한 오호를 비롯한 이민족 왕조가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4세기와 5세기 초에 걸쳐, "오호"들에 의해 화북과 쓰촨 분지에 여러 국가들이 세워졌으며, 이를 통틀어 오호 십육국이라고 한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Chinese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2] 서적 Medieval Chinese Society and the Local "communit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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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Governing China: 150-1850 https://books.google[...] Hackett Publishing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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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학술지 A Comparative Analysis of Chinese Historical Sources and y-dna Studies with Regard to the Early and Medieval Turkic Peoples https://brill.com/vi[...] 201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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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간행물 Shiliuguo Chunqiu
[12] 웹사이트 “五胡”新释 http://www.xja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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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Renditions, Issues 15-18 https://books.google[...] Centre for Translation Projects,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1981
[15] 서적 Chin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970
[16] 서적 China: A Macro Histo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
[17] 문서 2004
[18] 역사서 Book of Later Han
[19] 문서 Collection of information on peoples in Central Asia in ancient times Sankt Petersburg 1851
[20] 문서 Materials on Sünnu history Science, Moscow 1973
[21] 문서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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