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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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씨는 1185년경 이사 도모무네에 의해 창건된 일본의 씨족으로, 무쓰국 다테군에서 유래했다. 겐페이 전쟁에서의 공로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지원한 대가로 다테군을 하사받았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북쪽 가문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지를 받았으나, 도자마 다이묘로 분류되어 견제를 받았다. 다테 가문은 센다이 번을 중심으로 시코쿠의 우와지마 번, 이요 요시다 번 등을 분가로 두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서임되었다. 주요 가신으로는 소량천 씨, 유수 씨 등이 있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센다이의 상징인 세로 세 줄 쌍끌이 문장과 싸리 문장 등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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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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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성씨 | 다테 (伊達) |
로마자 표기 | Date |
니혼고 표기 | 伊達氏 (Date-shi) |
로마자 음차 | Date-shi |
한자 음독 | 이달씨 (伊達氏) |
가문 문양 | 왕대와 참새 (센다이 대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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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 | 후지와라 북가 야마카게 류 나카무라 씨 |
가조 | 다테 도모무네 |
종별 | 무가, 화족 |
작위 | 후작 - 우와지마 번 백작 - 종가 자작 - 이요 요시다 번 남작 - 무네아쓰 계통 남작 - 무네토모 계통 남작 - 와타리 다테 가문 남작 - 도베쓰 |
출신지 | 히타치 국 이사 군 추정 |
근거지 | 무쓰 국 다테 군 야나가와 정 무쓰 국 다테 군 고오리 정 데와 국 오키타마 군 요네자와 시 무쓰 국 미야기 군 센다이 시 이요 국 우와지마 시 도쿄 부 도쿄 시 |
창시 연도 | (대략 1189년) |
해체 연도 | 1871년, 폐번치현 |
통치 종료 | 1871년, 폐번치현 |
주요 인물 | 다테 마사무네(9대) 다테 시게무네 다테 다네무네 다테 하루무네 다테 데루무네 다테 마사무네(17대) 다테 시게자네 다테 쓰나무네 다테 무네카쓰 다테 요시무라 다테 무네타다 다테 무네나리 다테 요시쿠니 다테 구니나오 다테 구니시게 다테 준노스케 다테 미키오 다테 마사무네 다테 무네나리 다테 요시쿠니 다테 소우시로우 다테 모토나리 다테 히데무네 다테 무네타케 다테 무네즈미 다테 아키무네 다테 나리요시 다테 모치무네 다테 도모무네 다테 요시야스 다테 우지무네 다테 미치무네 다테 마사미치 다테 무네모토 다테 구니무네 다테 야스무네 다테 무네시게 |
본거지 | 무쓰 국 |
주요 봉행 | 오야마다 쓰네토모 오카 모토치카 와타리 사다쓰나 이시모리 요리하루 나카지마 무네마사 이노우에 고레마사 시라이시 무네자네 가타쿠라 가게쓰나 온코 소에몬 스즈키 모토노부 가와사키 시로베에 고토 가게모토 |
현재 당주 | 다테 야스무네 |
모체 | 이사 씨 |
주요 분가 | 다무라 씨 (복원) 우와지마 요시다 스루가 다테 씨 기슈 다테 씨 아키타 다테 가문 와타리 다테 가문 이와데야마 다테 가문 다데 씨 고오리 씨 오에다 씨 고야나가와 씨 무쓰 가문 (화족 백작 가문) |
기타 정보 | |
지류 | 다데 씨 고오리 씨 이이자카 씨 오오다테 씨 고야나가와 씨 아키타 다테 가문 기슈 다테 가문 무쓰 가문 |
2. 가문 이름의 유래
다테(伊達)라는 이름은 무쓰국 다테군에서 유래한 것이다. 伊達은 원래 '이다테', '이다치'라고 불렸으며, 랴쿠오 2년(1339년)의 문서에는 '이다테노 가몬노스케 다메카게'(いたてのかもんのすけ爲景)[13], 게이초 18년(1613년)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로마 교황에게 전달한 다테 마사무네의 서한에는 'Idate Masamune'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13] 다테 가문에서도 본래 지명의 발음에 따라 '이다테'라고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테 가문은 1185년부터 1333년까지의 초기 가마쿠라 시대에 히타치국(현 이바라키현) 이사 지방 출신으로 후지와라노 우오나의 16대 후손인 이사 도모무네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가문은 겐페이 전쟁에서의 공로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권력 투쟁 지원에 대한 보상으로 1189년 가마쿠라 쇼군 요리토모가 무쓰국 다테군(현 후쿠시마현 다테시)을 하사한 데서 이름을 따왔다.
한편, 야마시나 노리토키(山科敎言)의 일기 『노리토키쿄키(敎言卿記)』의 오에이 13년(1406년) 8월 4일조 기사에 '다테'(タテ)라는 표기가 보이는 등, 15세기에는 이미 '다테'라는 발음이 기나이에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도 시대에는 이러한 '다테'와 '이다테'라는 독음이 혼용되었으며,[14] '이다테'라는 발음은 메이지 유신 전 무렵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15]
"다테"라는 발음이 사용되게 된 것은 "이마다(いまだ) → 마다(まだ)", "이다쿠(いだく) → 다쿠(だく)", "이데하(いでは) → 데하(では)", "이바라(いばら) → 바라(ばら)"와 같은 "탈이(脱い)" 음운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15]
3. 역사
1330년대 남북조 시대에는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를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고다이고 천황이 기타바타케 아키에를 북방 방위의 정이대장군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센고쿠 시대에 막부의 권력이 변화하는 와중에 다테 가문은 다른 몇몇 강력한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성과 지역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다 노부나가, 우에스기 겐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과 같은 명성이나 권력을 얻지는 못했지만, 막부의 북쪽 침략을 저항했다. 다테 마사무네(1567~1636)는 특히 이러한 노력에 기여하여 북쪽 가문들을 주요 막부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통합했다. 1589년 마사무네는 아시나 가문의 전 사무라이 이나와시로 모리쿠니의 도움을 받아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아시나 가문의 아이즈 영지를 장악하고 구로카와 성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듬해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의 호조를 정복하자 마사무네에게 30만 석의 요네자와 번을 하사했다.[1]
마사무네는 궁극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함으로써 어느 정도 독립성을 얻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군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테 가문은 위협으로 여겨졌다. 에도 시대에 다테 가문은 도자마 다이묘로 분류되었는데,[2] 이는 도쿠가와 가문의 세습 봉신이나 동맹이었던 후다이 다이묘와 대조적이다.
1600년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싸우도록 명령했고, 모가미 요시테루의 지원을 받아 마사무네의 군대는 나오에 가네쓰구를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마사무네는 우에스기 가문이 소유했던 12개 지역의 영지를 받았다. 센다이(62만 석)에 자리를 잡았고, 1658년 우에스기 가문의 이와테자와에 있던 성을 센다이성으로 개명했다.[1] 봉건 다이묘는 때때로 장소나 성의 이름 앞에 "-공(公)"(공작, 땅의 통치자)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표기했는데, 예를 들어 센다이공은 다테 마사무네가 알려진 이름 중 하나였다.[3]
다테 쓰나무네 대에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1660년 쓰나무네는 에도에서 음주와 방탕으로 체포되었는데, 이 혐의는 사실로 여겨졌다. 쓰나무네는 쇼군의 에도성을 둘러싼 해자를 파는 형벌을 받았다. 방탕한 생활에 대한 혐의는 북쪽의 특정 봉신과 친족에 의해 크게 부추겨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들은 에도의 장로회에 쓰나무네가 통치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의 손자이자 마사무네의 증손자인 다테 쓰나무라가 다테 번의 다이묘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쓰나무라는 그의 삼촌인 다테 무네카쓰와 다테 무네요시의 후견 하에 다이묘가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북쪽에서는 폭력과 갈등이 이어졌고, 1671년 다테 가문의 강력한 친척인 아키 무네시게가 쇼군 정부에 영지 관리 부실을 불만으로 제기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 후 일어난 사건은 매우 복잡하고 극적이어서 "다테 소동"이라는 유명한 이야기이자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하라다 무네스케라는 가신은 쓰나무라와 그의 삼촌들을 지지했고 에도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어느 날 아키는 관리들과 만나려고 기다리는 하라다를 발견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칼이 뽑혔고 아키가 살해되었다. 하라다는 곧 관리나 그들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식적인 판결은 하라다가 먼저 칼을 뽑았다는 것이었고, 하라다 가문은 해체되었으며, 쓰나무라는 적법한 다이묘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삼촌들은 처벌을 받았다.
메이지 시대 이후, 다테씨에서는 후작 1가문, 백작 1가문, 자작 1가문, 남작 4가문 등 총 7가문의 화족 가문이 나왔다.[1]
3. 1. 가마쿠라 시대 이전
무쓰국 다테군에서 유래한 다테(伊達)라는 이름은 원래 '이다테', '이다치'라고 불렸다. 랴쿠오 2년(1339년) 문서에는 '이다테노 가몬노스케 다메카게'(いたてのかもんのすけ爲景)라고 표기되어 있고, 게이초 18년(1613년)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로마 교황에게 전달한 다테 마사무네의 서한에는 'Idate Masamune'라고 적혀 있어, 다테 가문에서도 본래 지명의 발음에 따라 '이다테'라고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야마시나 노리토키의 일기 『노리토키쿄키(敎言卿記)』 오에이 13년(1406년) 8월 4일조 기사에는 '다테'(タテ)라는 표기가 보이는 등, 15세기에는 이미 '다테'라는 발음이 중앙에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도 시대에는 '다테'와 '이다테'라는 독음이 혼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테 가문은 우오나류 후지와라 산카게의 자손이라고 자칭했다. 초대 당주 아사토모(朝宗)는 넨사이 (常陸入道念西)라고도 불렸으며, 히타치노스케가 되어 히타치국 마카베군 이사쇼 나카무라에 거주하며 이사씨 또는 나카무라씨를 칭했다.[7] 분지 5년(1189년) 오슈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따라 네 명의 아들과 함께 이시나자카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7] 넨사이는 이 공으로 다테군의 지토직을 받고, 같은 해 겨울부터 겐큐 원년(1190년) 사이에 다테군에 들어가 '''이다테'''를 성으로 삼았다.[7]
하지만, 이다테씨의 기원이 후지와라 북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칭이라는 설도 있다. 오타 료는 “산카게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확실한 증거도 없고, 또한 세대가 길어져서 잃어버렸다”라고 지적하며, 간무 헤이시 히타치 다이죠 다이라노 이에모토(다이라노 시게모리의 아들)의 아들 다메카타의 후손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시모쓰케노씨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겐로쿠 15년(1702년)에 완성된 『번한보』에서 히타치뉴도 넨사이와 이다테 아사무네는 다른 인물이며, 넨사이는 아사무네의 아들 소무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사토모의 장남 이사 다메무네는 히타치국 이사의 본령을 계승하고, 아사토모의 차남 다테 무네무라는 다테군의 소령을 계승하여 다테군 구와오리 촌 다카고오카에 거주했다.[7] 무네무라는 후에 다지마국 쇼쿠노로 옮겨 운다 다테씨의 시조가 되었다.[7] 다테군의 땅은 무네무라의 아들 다테 요시히로가 계승했다.[7]
3. 2. 남북조 시대 ~ 무로마치 시대
랴쿠오 2년(1339년) 문서에는 '이다테노 가몬노스케 다메카게'(いたてのかもんのすけ爲景)로, 게이초 18년(1613년)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로마 교황에게 전달한 다테 마사무네의 서한에는 'Idate Masamune'이라고 적혀 있어, 다테 가문에서도 본래 지명의 발음에 따라 '이다테'라고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야마시나 노리토키의 일기 『노리토키쿄키』 오에이 13년(1406년) 8월 4일조 기사에 '다테'(タテ)라는 표기가 보이는 등, 15세기에는 이미 '다테'라는 발음이 중앙에 퍼져 있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다테'와 '이다테'라는 독음이 혼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막부는 무쓰에 오슈탄다이직을 두고 수호는 두지 않겠다는 방침이었지만, 이타테 타네무네는 무쓰 수호를 희망하여 보임되었다. 타네무네는 오슈탄다이를 세습하는 오사키 씨의 내분에 개입하여 차남 오사키 요리노부를 오사키 씨의 양자로 보내고, 우슈탄다이인 모가미 씨도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덴몬 5년(1536년), 분고쿠호인 진케이슈를 제정하는 등 가중 통제 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타네무네의 전제를 달가워하지 않는 가신단 일부는 타네무네의 아들 이타테 사네모토를 에치고 국 수호 우에스기 씨에 입적시키려는 계획에 반대한 적장자 이타테 하루무네를 옹립, 타네무네의 추방을 도모했다. 타네무네와 하루무네 부자 사이에 덴몬의 난이 발발, 이 싸움은 인척 관계를 맺은 오슈의 여러 다이묘들을 끌어들이는 대란으로 발전했다. 난은 하루무네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장기간의 내전으로 이타테 가는 피폐해지고 여러 다이묘들의 독립을 허용하게 되었다.
하루무네는 거성을 요네자와 성으로 옮겨 체제 정비에 착수하고, 막부에 오슈탄다이로의 보임을 요구했다. 덴몬 15년(1546년) 오사키 요시나오가 탄다이로 보임되었지만, 하루무네는 무쓰 수호직과 오슈탄다이직은 동일하며 타네무네가 수호직을 얻은 시점에서 이타테 씨가 탄다이직에 보임될 권리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3. 3. 센고쿠 시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등과 같은 명성이나 권력을 얻지는 못했지만, 센고쿠 시대에 막부의 북쪽 침략에 저항했다.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1567~1636)는 특히 이러한 노력에 기여하여 북쪽 가문들을 주요 막부에 대항하는 동맹으로 통합했다. 1589년 마사무네는 아시나 가문의 전 사무라이 이나와시로 모리쿠니(猪苗代盛国)의 도움을 받아 스리아게하라 전투(摺上原の戦い)에서 아시나 가문의 아이즈 영지를 장악하고 구로카와 성에 자리 잡았다.[1] 그러나 이듬해 히데요시가 오다와라의 호조를 정복하자 마사무네에게 30만 석의 요네자와 번을 하사했다.[1]
덴쇼 12년, 17대 당주가 된 다테 마사무네는 강경한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하여, 덴쇼 17년 아즈마시나 전투에서 아이즈의 아시나 요시히로(蘆名義広)를 무찌르고 아시나 씨를 멸망시켜 아이즈 10여 군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 무쓰국 남쪽 절반과 신발다 시게이에와 공동으로 싸워 빼앗은 에치고국 동쪽 가마하라[21]까지 지배하게 되어(114만 석), 같은 해 아시나 씨의 거성이었던 구로카와성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이는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표한 총무사령(惣無事令)을 어기는 무력 행사였기 때문에, 덴쇼 18년 히데요시가 복속시킨 후의 오슈 시치쿠(奥州仕置)에 의해 아이즈, 이와세, 아즈마 등이 몰수되었다(동쪽 가마하라는 도요토미 직할령, 가모우를 거쳐 우에스기 영지(쓰가와 성주는 후지타 노부요시)가 됨). 그리고 아다치군 중 니혼마쓰와 시오마쓰, 다테 씨의 옛 영지였던 시부군, 다테군, 가리타군, 시바타군, 이구군, 와타리군, 나토리군, 미야기군, 구로카와군 등 여러 군과 시다군 중 우치마쓰야마, 도오군 중 우치후카야, 데와국 오키타마군이 주어졌고, 우타군도 병합하여 72만 석을 얻었다. 거성도 요네자와성으로 돌아왔다. 덴쇼 19년에는 하시바씨의 성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에 발생한 가사이 오사키 이키(葛西大崎一揆)를 마사무네가 선동했던 것이 드러나자, 이듬해 덴쇼 19년 이키 진압 후 국개(国替)를 명령받았다. 다테, 시부, 니혼마쓰, 다무라, 시오마쓰, 카리타 등이 몰수되었고, 본령 중 쿠로카와, 미야기, 나토리, 시바타, 이구, 와타리, 우타, 마쓰야마, 후카야 등에 카사이, 오사키를 더하여 58만 석 이상이 다시 주어졌다. 그리고 곧 오미국 가모군에도 5000석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같은 해 이와데야마성(현: 미야기현 오사키시 이와데야마)으로 이전했다. 그 후 마사무네는 분로쿠・게이쵸의 역에 종군했다.
3. 4.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89년 다테 마사무네는 아시나(蘆名) 가문의 전 사무라이 이나와시로 모리쿠니(猪苗代盛国)의 도움을 받아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아시나 가문의 아이즈 번(会津藩)을 장악하고 와카마쓰 국(若松国) 구로카와 성(黒川城)에 자리 잡았다.[1] 그러나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에서 호조 가문을 정복하자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에게 30만 석의 요네자와 번(米沢藩)을 하사했다.[1]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여 어느 정도 독립성을 얻었다. 이에야스는 다테 가문에게 북쪽 지역 대부분을 주었지만, 다테 가문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군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테 가문은 위협으로 여겨졌다.[1]
1600년 이에야스는 다테 가문에게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싸우도록 명령했고, 모가미 요시테루(最上義光)의 지원을 받아 마사무네의 군대는 나오에 가네쓰구를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마사무네는 우에스기 가문이 소유했던 12개 지역의 영지를 받았다. 다테 가문은 센다이(仙台, 62만 석)에 자리를 잡았다. 1658년 마사무네는 우에스기 가문의 이와테자와(岩出沢)에 있던 성을 센다이 성으로 개명했다.[1] 봉건 영주(다이묘)는 때때로 장소나 성의 이름 앞에 "-공(公)"(공작, 땅의 통치자)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표기했는데, 예를 들어 센다이공은 다테 마사무네가 알려진 이름 중 하나였다.[3]
1600년(세키가하라 전투)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이에야스로부터 시로이시 성(白石城)이 있는 가리타 군(刈田郡) 2만 석을 받아 60만 석이 되었다. 1603년 센다이 성으로 거성을 옮겼다. 1606년 히타치국 류가사키(龍ケ崎) 및 시다 군(信太郡) 츠쿠바 군(筑波郡) 가와치 군(河内郡) 삼군 중 1만 석을 받았다. 1613년 마사무네는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로마에 파견했다. 1634년 오미국 가모(蒲生) 야스(安) 양군 내에서 5000석이 증가되어 62만 석이 되었다.
3. 5. 에도 시대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테 마사무네에게 우에스기 가게카츠와 싸우도록 명령했고, 모가미 요시테루(最上義光)의 지원을 받아 마사무네의 군대는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續)를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인정받아 마사무네는 그때까지 우에스기 가문이 소유했던 12개 지역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마사무네는 센다이(62만 석)에 자리를 잡았다. 1658년 마사무네는 우에스기 가문의 이와테자와(岩出沢)에 있던 성을 센다이성(仙台城)으로 개명했다.[1] 봉건 영주(다이묘)는 때때로 장소나 성의 이름 앞에 "-공(公)"(공작, 땅의 통치자)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표기했는데, 예를 들어 센다이공은 다테 마사무네가 알려진 이름 중 하나였다.[3]
다테 쓰나무네(伊達綱宗) 대에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마사무네의 직계 후손이 여러 명 있었고, 인근에 거주하는 다테 가문의 많은 친족과 세습 봉신들이 적어도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660년 쓰나무네는 에도에서 음주와 방탕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러한 혐의는 일반적으로 사실로 여겨졌다. 쓰나무네는 쇼군의 에도성을 둘러싼 해자를 파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메가네바시(眼鏡橋)에서 우시고메문(牛込門)까지 이어지는 북동쪽 해자를 개선하는 것을 감독하고 비용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초기의 방탕한 생활에 대한 혐의는 북쪽의 특정 봉신과 친족에 의해 크게 부추겨진 것으로 현재는 믿어지고 있다. 이 봉신과 친족들은 에도의 장로회에 쓰나무네가 통치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의 손자이자 마사무네의 증손자인 다테 쓰나무라(伊達綱村)가 다테 번(藩)의 다이묘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따라서 쓰나무라는 그의 삼촌인 다테 무네카쓰(伊達宗勝)와 다테 무네요시(伊達宗良)의 후견 하에 다이묘가 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북쪽에서는 폭력과 갈등이 이어졌고, 1671년 다테 가문의 강력한 친척인 아키 무네시게(阿部宗茂)가 쇼군 정부에 쓰나무라와 그의 삼촌들 치하에서의 영지 관리 부실을 불만으로 제기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 후 일어난 사건은 매우 복잡하고 극적이어서 "다테 소동(伊達騒動, 다테 소란)"이라는 유명한 이야기이자 연극으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아키는 여러 위원회와 관리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에도로 소환되어 여러 심문, 조사, 회의에 참여했고, 다테 가문의 다른 여러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하라다 무네스케(原田宗助)라는 가신은 쓰나무라와 그의 삼촌들을 지지했고 에도에서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어느 날 아키는 관리들과 만나려고 기다리는 하라다를 발견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칼이 뽑혔고 아키가 살해되었다. 하라다는 곧 관리나 그들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식적인 판결은 하라다가 먼저 칼을 뽑았다는 것이었고, 하라다 가문은 해체되었으며, 쓰나무라는 적법한 다이묘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삼촌들은 처벌을 받았다.
3. 6.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 이후, 다테(伊達)씨에서는 후작(侯爵) 1가문, 백작(伯爵) 1가문, 자작(子爵) 1가문, 남작(男爵) 4가문 등 총 7가문의 화족(華族) 가문이 나왔다.[1]
마지막 우와지마 번주 다테 무네토쿠(伊達宗徳)는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版籍奉還)으로 우와지마 번 지사(知事)가 됨과 동시에 화족이 되었고,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廃藩置県)까지 지사를 역임하였다. 판적봉환 당시 가록(家祿)은 현미(現米) 5242석이었다. 1876년 금록공채증서발행조례에 따라 가록 대신 지급된 금록공채(金祿公債) 액수는 165267.813JPY였다. 1881년 당시 무네토쿠의 주거지는 도쿄부(東京府) 혼조구(本所区) 혼조고이즈미초(本所小泉町)에 있었다.
무네토쿠의 양부인 전 당주 다테 무네시로(伊達宗城)는 왕정복고(王政復古) 후 신정부에서 의정(議定), 외국사무총독, 외국관지사 등에 취임하여 정부 발족 초기부터 외교 책임자로 활약했으며, 1869년 민부경(民部卿) 겸 대장경(大蔵卿)(이듬해 1870년 민부대장 분리 후 대장경 전임), 1871년 흠차전권대신(欽差全権大臣)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일청수호조규(日清修好条規) 체결에 힘썼다.
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華族令)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五爵制)가 되자, 구 중번(舊中藩) 지사로서 무네토쿠에게 백작(伯爵)위가 수여되었고, 1891년(메이지 24년) 4월 23일 무네시로의 유신(維新) 공으로 후작(侯爵)으로 승작되었다.
무네토쿠가 1905년(메이지 38년) 11월 사망한 후, 장남 다테 무네타다(伊達宗陳)가 후작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식부관(式部官)과 궁중고문관(宮中顧問官)을 역임하였다. 무네타다의 부인 노리코(納子)는 아리마 요리카네(有馬頼咸)의 칠녀였다.
무네타다가 1923년(다이쇼 12년) 2월 사망한 후, 작위를 계승한 양자 다테 무네아키(伊達宗彰) 후작(다테 기노리(伊達紀範)의 삼남)은 대장성(大蔵省) 관료가 되어 세무서장과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내각의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일본부동산은행(日本不動産銀行) 상무이사와 시미즈 건설(清水建設) 고문을 역임하였다. 무네아키의 부인 미치코(美智子)는 마쓰다이라 요시타미(松平慶民) 자작(子爵)의 장녀였다. 쇼와 전기 우와지마 다테 후작가의 저택은 도쿄부(東京府) 시바구(芝区) 시라카네산코마치(白金三光町)에 있었다.
참고로 우와지마 다테 후작가에서는 다테 무네미치(伊達宗倫)가 1892년에 분가하여 남작(男爵)위를 받았다.
4. 역대 당주
대수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1 | 다테 도모무네 | 1129년 ~ 1199년 | |
2 | 다테 무네무라 | 1173년 ~ 1251년 | |
3 | 다테 요시히로 | 1185년 ~ 1256년 | |
4 | 다테 마사요리 | 1227년 ~ 1301년 | |
5 | 다테 무네쓰나 | 1254년 ~ 1317년 | |
6 | 다테 모토무네 | ? ~ 1335년 | |
7 | 다테 유키토모 | 1291년 ~ 1348년 | |
8 | 다테 무네토 | 1324년 ~ 1385년 | |
9 | 다테 마사무네 | 1353년 ~ 1405년 | |
10 | 다테 우지무네 | 1371년 ~ 1412년 | |
11 | 다테 모치무네 | 1393년 ~ 1469년 | |
12 | 다테 시게무네 | 1435년 ~ 1487년 | |
13 | 다테 히사무네 | 1453년 ~ 1514년 | |
14 | 다테 타네무네 | 1488년 ~ 1565년 | |
15 | 다테 하루무네 | 1519년 ~ 1578년 | |
16 | 다테 테루무네 | 1544년 ~ 1585년 | |
17 | 다테 마사무네 | 1567년 ~ 1636년 | 최초의 센다이 번주 |
18 | 다테 다다무네 | 1600년 ~ 1658년 | |
19 | 다테 쓰나무네 | 1640년 ~ 1711년 | |
20 | 다테 쓰나무라 | 1659년 ~ 1719년 | |
21 | 다테 요시무라 | 1680년 ~ 1752년 | |
22 | 다테 무네무라 | 1718년 ~ 1756년 | |
23 | 다테 시게무라 | 1742년 ~ 1796년 | |
24 | 다테 나리무라 | 1775년 ~ 1796년 | |
25 | 다테 지카무네 | 1796년 ~ 1812년 | |
26 | 다테 나리무네 | 1796년 ~ 1819년 | |
27 | 다테 나리요시 | 1798년 ~ 1828년 | |
28 | 다테 나리쿠니 | 1817년 ~ 1841년 | |
29 | 다테 요시쿠니 | 1825년 ~ 1874년 | |
30 | 다테 무네모토 | 1866년 ~ 1917년 | 마지막 센다이 번주, 초대 번주. 메이지 3년에 가독은 무네모토 그대로 무네아쓰가 2대 번주에 취임. |
31 | 다테 구니무네 | 1870년 ~ 1923년 | |
32 | 다테 오키무네 | 1906년 ~ 1947년 | |
33 | 다테 사다무네 | 1937년 ~ 1981년 | |
34 | 다테 야스무네 | 1959년 ~ |
5. 분가
- 다테 씨(Date clan)의 본가는 12세기부터 무쓰국의 다테(Date)에서 다이묘(大名)였으며, 1601년에 센다이(Sendai)로 영지를 옮겼다. 17세기 초부터 1868년까지 센다이 번(仙台藩)(62만 석)을 지배했다.[2] 이 본가의 당주는 메이지 시대에 세습 "백작"으로 서임되었다.[1]
- 다테 다다무네(伊達忠宗, 1599~1658)의 둘째 아들 무네요시(Muneyoshi)는 다테 마사무네가 포기했던 무쓰(Mutsu) 가문의 이름인 타무라(Tamura)를 부활시켰다. 다테 무네요시(伊達宗利)[4] 또는 타무라 무네요시(田村宗利)(1637~1678)는 이치노세키 번(一関藩)(3만 석)에 정착했고, 그의 후손들은 1868년까지 그곳에 거주했다. 이 가문의 당주는 메이지 시대에 세습 "자작"으로 서임되었다.[1]
- 1614년 이요국의 우와지마 번(宇和島藩)(10만 석)에 분가가 설립되었다.[2] 다테 무네키(伊達宗城, 1817~1882)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가문의 당주는 메이지 시대에 세습 "후작"으로 서임되었다.[1]
- 1657년 이요국의 요시다 성(吉田城)(3만 석)에 또 다른 분가가 설치되었다.[2] 이 가문의 당주는 메이지 시대에 세습 "자작"으로 서임되었다.[1]
- 다테 씨 출신이지만 명목상 다른 가문에 입적된 경우:
- * 타무라 무네요시(田村宗良, 1637–1678)[8]
- * 타무라 타케아키(田村武顕, 1656–1708) - 이치노세키 번(一関藩)의 초대 타무라 다이묘(大名)[8]
- * 타무라 아키히로(田村昭弘, 1659–1696)
- * 타무라 아키나오(田村昭直, 1662–1706)
- * 타무라 아키노리(田村昭則, 1664–1733)
- * 타무라 하루치요(田村治千代, 1686–1693)
- * 타무라 노부아키(田村信顕, 1703–1725)
- * 타무라 무라노부(田村村信, 1723–1777)
- * 시라이시 고로키치(白石五郎吉, 1638–1644)
- * 우에스기 요시후사(上杉吉房, 1720–1742)
- * 우에스기 요시토키(上杉義時, 1742–1784)
- * 우에스기 요시나가(上杉義長)
- * 우에스기 요시타츠(上杉義達)
- * 우에스기 요시마사(上杉義昌)
- * 우에스기 요시토요(上杉義豊)
- 이요요시다 번의 마지막 번주 무네타카는 1869년 판적봉환으로 요시다 번 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금록공채 액수는 5만 625엔(화족 수급자 중 124위)이었다. 무네타카 사후, 쓰루와카(무네사다)가 가독을 이었다. 1884년, 무네사다는 자작에 서임되었다. 무네사다의 장남 다테 무네오키가 작위를 계승하였고, 무네오키 사후에는 동생 사다무네가 작위를 계승하였다.
- 다테 무네시게(伊達宗城)의 일곱째 아들 다테 무네토시(경마루, 経丸)는 1892년 남작에 서임되었다. 무네토시 사후, 무네시게의 열째 아들 다테 무네요시(伊達宗曜)가 남작위를 계승했다. 무네요시의 장남 다테 무네미츠(伊達宗光)가 남작위를 계승했고, 무네미츠의 장남 다테 무네카츠(伊達宗克)가 남작위를 계승했다.
- 와타리 다테가(亘理伊達家)의 다테 쿠니나리는 보신 전쟁(戊辰戦争) 이후 홋카이도(北海道)로 이주하여 다테무라(伊達村) 개척에 힘썼다. 1892년 남작에 서임되었다. 쿠니나리 사후, 장남 다테 모토가 남작위를 계승했고, 모토 사후에는 장남 다테 시게이쿠가 남작위를 계승했다. 시게이쿠 사후, 다테 렌푸가 양자로서 남작위를 계승했다.
- 이와데야마 다테가(岩出山伊達家)의 다테 쿠니나오(伊達邦直)는 보신 전쟁(戊辰戦争) 이후 홋카이도(北海道) 이시카리 군(石狩郡) 도베쓰 정(当別町)으로 이주하여 개척에 힘썼다. 쿠니나오 사후, 손자 다테 마사토(伊達正人)가 1892년 남작에 서임되었다.
- 무쓰 국내 분가:
- * 이치노세키 다테가(一関伊達家)
- * 나카쓰야마 번(中津山藩)
- * 와타리 다테가(亘理伊達家) (남작)
- * 미즈사와 다테가(水沢伊達家)
- * 와쿠야 다테가(涌谷伊達家)
- * 도메 다테가(登米伊達家)
- * 이와야도 다테가(岩谷堂伊達家)
- * 이와데야마 다테가(岩出山伊達家)
- ** 도베쓰 다테가(当別伊達家) (남작)
- * 미야토코 다테가(宮床伊達家)
- * 다테 무네아쓰(伊達宗敦)가 (남작)
- 무쓰 국외 분가:
- * 스루가 다테 씨(駿河伊達氏)
- ** 키슈 다테가(紀州伊達家)
- * 이즈모 다테 씨(出雲伊達氏)
- * 다지마 다테 씨(但馬伊達氏)
- * 우와지마 번(宇和島藩) (후작)
- * 이요요시다 번(伊予吉田藩) (자작)
- * 다테 무네토시(伊達宗倫)가 (남작)
- * 다테 노리타카(伊達紀隆)가
- * 아키타 다테가(秋田伊達家)
- * 오와다 다테가(大和田伊達家)
6. 주요 가신
(명목상 다른 가문 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