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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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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나텔로는 1386년경 피렌체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이다. 그는 15세기 피렌체 조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고대 조각의 부활을 이끌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대리석 '다비드', 청동 '다비드', '가타멜라타 기마상',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등이 있다. 도나텔로는 스티아치아토 기법을 개발하여 조각의 깊이를 더했으며,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 조각가뿐 아니라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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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텔로 - [인물]에 관한 문서
이미지
도나텔로, 미상의 16세기 화가가 상상하여 그린 초상화
도나텔로, 미상의 16세기 화가가 상상하여 그린 초상화
기본 정보
본명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
출생일1386년경
출생지피렌체 공화국
사망일1466년 12월 13일
사망지피렌체 공화국
국적피렌체
분야조각
사조초기 르네상스
주요 작품
작품성 게오르기우스
다비드
가타멜라타 기마상
일본어 정보
이름 (일본어)ドナテッロ
본명 (일본어)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
출생일 (일본어)1386년경
출생지 (일본어)이탈리아, 피렌체
사망일 (일본어)1466년 12월 13일
사망지 (일본어)이탈리아, 피렌체
국적 (일본어)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분야 (일본어)조각
사조 (일본어)초기 르네상스
작품 (일본어)『성 게오르기우스상』
『다비데상』
『가타멜라타 기마상』
한국어 정보
이름 (한국어)도나텔로
본명 (한국어)도나토 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
출생일 (한국어)1386년경
출생지 (한국어)피렌체 공화국
사망일 (한국어)1466년 12월 13일
사망지 (한국어)피렌체 공화국
국적 (한국어)피렌체
분야 (한국어)조각
사조 (한국어)초기 르네상스
작품 (한국어)『성 게오르기우스상』
『다비드상』
『가타멜라타 기마상』

2. 생애

도나텔로(Donato di Niccolò di Betto Bardiit)는 1386년경 피렌체에서 태어나 1466년 그곳에서 사망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조각가이다.[15] 그는 로렌초 기베르티의 공방에서 초기 예술 교육을 받았으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함께 로마로 가서 고대 미술을 연구하며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177]

피렌체로 돌아온 도나텔로는 피렌체 대성당과 오르산미켈레 교회 등 주요 건축물을 위한 조각상들을 제작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복음사가 성 요한상』, 『성 마르코상』, 『성 게오르기우스상』 등이 있으며, 특히 『성 게오르기우스상』 기단의 릴리프는 원근법을 조각에 적용한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178]

1420년대부터는 건축가 미켈로초와 협력하여 반교황 요한 23세의 영묘, 리날도 브란카치 추기경 영묘 등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178] 이 시기 시에나 산 조반니 세례당을 위한 『헤로데 왕의 향연』 릴리프도 제작했다.

1430년대는 메디치 가문, 특히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 아래 도나텔로의 예술적 전성기가 펼쳐진 시기이다. 고대 이후 최초의 독립된 남성 나체 조각상으로 평가받는 청동 『다비드상』과 피렌체 대성당의 『칸토리아』 등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178]

1443년부터 약 10년간은 파도바에서 활동하며 또 다른 걸작인 『가타멜라타 기마상』을 완성했다. 이는 고대 로마 이후 사라졌던 실물 크기 청동 기마상의 전통을 부활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184] 또한 파도바 성 안토니오 대성당의 제단 장식과 청동 십자가 등을 제작하며 파도바 예술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30]

말년에는 시에나에서 잠시 활동한 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산 로렌초 성당의 청동 설교단 부조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루어졌으며, 도나텔로 특유의 강렬한 감정 표현과 실험적인 공간 구성이 돋보인다.[144] 그는 1466년 피렌체에서 사망하여 산 로렌초 성당에 안장되었다. 도나텔로는 고전 조각의 부활과 혁신적인 표현 기법을 통해 르네상스 조각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1386년 ~ 1404년)

도나텔로는 1427년 7월 카타스토(catasto) 세금 신고서에 스스로 41세라고 진술한 기록을 바탕으로, 1386년경 피렌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15] 그의 아버지는 니콜로 디 베토 바르디(Niccolò di Betto Bardiit)로, 양모를 부드럽게 만드는 기술자(tiratore di lana)이자 피렌체 양모 직공 조합(Arte della Lana)의 회원이었다.[16]

도나텔로의 본래 성은 바르디(Bardi)였으나, 당대 유명했던 바르디 가문의 은행가들과의 연관성은,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매우 먼 관계였을 것으로 보인다.[17] 한편, 그의 아버지는 권력자 부오나코르소 피티(Buonaccorso Pittiit)와 관련이 있었는데, 피티의 일기에는 1380년 피사에서 니콜로가 싸움에 휘말려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힌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18]

바사리는 도나텔로가 마르텔리 가문의 집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 근거가 부족하며 후대의 후원 관계 때문에 제기된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19][177] 도나텔로가 금세공사의 공방에서 처음 예술 교육을 받았다는 설도 있으나, 초기 르네상스 피렌체의 대표적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의 공방에서 잠시 일했던 것은 확인된다.[177]

1404년부터 도나텔로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함께 로마로 가서 고대 미술을 연구하고 기술을 연마했다.[177]

2. 2. 로마 체류와 초기 경력 (1404년 ~ 1420년대)

도나텔로가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01년 1월, 약 15세 때 피스토이아에서 독일인을 몽둥이로 때려 상처를 입힌 혐의로 고소당한 사건이다.[20] 당시 그는 공무 수행 중이던 아버지를 따라 피스토이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21] 이곳에서 도나텔로는 10살 연상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친구가 되었고, 어쩌면 함께 일했을 수도 있다. 브루넬레스키는 당시 피스토이아 대성당 제단을 위한 은 조각상을 제작하고 있었다.[22]

1401년 초,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세례당 문 제작 경쟁에 참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로렌초 기베르티가 선정되었다.[24][25] 경쟁 결과가 발표된 후인 1402년 말 또는 1403년 초,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는 함께 로마로 떠나 최소 다음 해까지 머물며 고대 로마 유적을 연구하고 발굴하는 활동을 했다.[26][27] 이 시기 로마의 금세공인들을 위해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도나텔로에게 중요한 기술 훈련이 되었을 것이다.[28] 로마에서의 경험은 이후 두 사람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젊은 예언자, 1406년경,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


피렌체로 돌아온 도나텔로는 1404년부터 1407년까지 로렌초 기베르티의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 문 제작과 같은 주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29][30] 1406년부터는 피렌체 대성당 북쪽의 만돌라 문(Porta della Mandorla)을 위한 석조 조각 제작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406년 11월에는 이 문의 예언자상 중 하나(현재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 소장)에 대한 대금을 받았다.

피렌체 대성당 파사드를 위해 제작된 ''복음사가 성 요한상'' (1409–1411년). 현재 두오모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1409년부터 1411년까지는 피렌체 대성당 파사드를 장식할 대형 대리석상인 『복음사가 성 요한상』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후기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인물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인간적인 감정을 표현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조각이다.[178] 비슷한 시기인 1406년 이후에는 산타 크로체 성당을 위해 『그리스도 십자가형』 목조상을 제작했는데, 그리스도의 고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성 마르코상'' (1411년–1414년)


1411년부터 1413년까지 도나텔로는 아마포 직조 조합의 의뢰로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외부 벽감에 안치될 『성 마르코상』을 제작했다. 이어 1417년에는 같은 교회를 위해 갑옷 제작 조합의 의뢰로 『성 게오르기우스상』을 만들었다. 특히 『성 게오르기우스상』의 기단에 새겨진 릴리프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은 조각에 원근법을 도입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 1423년에는 오르산미켈레 교회를 위해 『툴루즈의 성 루이상』을 금박 청동으로 제작했다.

1415년부터 1426년 사이에는 피렌체 대성당조토의 종탑을 장식할 5점의 예언자상(『수염 없는 예언자』, 『수염 있는 예언자』, 『이삭의 희생』(아브라함과 이삭), 『예언자 하바쿡』, 『예언자 예레미야』)을 대리석으로 제작했다. 이 조각들은 고대 로마 조각상처럼 강렬하고 개성적인 인물 표현이 특징이다.

반교황 요한 23세의 무덤, 1423–1425년, 산 조반니 세례당


1425년부터 1427년까지는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와 협력하여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에 안치될 반교황 요한 23세의 영묘 제작에 참여했다. 이 영묘의 조각 중 누워있는 교황의 청동상은 도나텔로의 작품으로 확실시된다. 1427년에는 피사에서 나폴리의 산탄젤로 아 닐로 성당에 있는 리날도 브란카치 추기경 영묘(리날도 브란카치 추기경 영묘)에 사용할 대리석 장식 패널을 완성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시에나의 산 조반니 세례당(시에나 산 조반니 세례당)의 의뢰로 『헤로데 왕의 향연』 릴리프, 『신앙』과 『희망』의 조각도 제작했다.

2. 3. 미켈로초와의 협업 (1420년대 ~ 1430년대)

1423년, 도나텔로는 오르산미켈레 교회를 위해 『툴루즈의 성 루이상』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원래 도나텔로가 만든 타베르나클(천개가 있는 벽감)과 함께 있었으나, 나중에 타베르나클은 베로키오의 『성 토마스의 의심』을 안치하기 위해 옮겨졌다.

1425년부터 1427년까지 도나텔로는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로초와 협력하여 피렌체산 조반니 세례당에 대립 교황 요한 23세의 영묘를 제작했다. 이 영묘에서 도나텔로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부분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고인의 청동상이다.[178]

같은 시기, 1427년에는 나폴리의 산탄젤로 아 니로 성당에 안치될 리날도 브란카치 추기경 영묘(en:Tomb of Cardinal Rainaldo Brancacci)의 대리석 장식 패널을 피사에서 완성했다. 또한 시에나의 산 조반니 세례당을 위해 『헤로데 왕의 향연』 릴리프와 『신앙』, 『희망』 조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178]

1430년경, 피렌체의 강력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예술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자신의 저택인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도나텔로에게 청동으로 된 다비드상 제작을 의뢰했다. 현재 바르젤로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고대 이후 최초의 독립된 남성 나체 조각상으로 평가받으며, 도나텔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자 르네상스 조각의 중요한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여겨진다.[178]

『다비드상』(1440년경)
바르젤로 미술관(피렌체)


1433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을 때, 도나텔로는 로마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로마에서의 작업으로는 산타 마리아 인 아라첼리 교회의 『조반니 크리벨리의 영묘』와 고대 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치보리움』이 남아있다.[178]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로 복귀한 시기와 맞물려 도나텔로도 피렌체로 돌아왔다. 1434년 5월, 그는 프라토 대성당의 외부 설교단 제작 계약을 맺었는데, 이는 미켈로초와의 마지막 공동 작업이 되었다. 이 설교단은 도나텔로가 1433년부터 1438년까지 제작한 피렌체 대성당의 『칸토리아(합창석)』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며, 고대 석관이나 비잔틴 미술의 상아 장식함 등에서 영향을 받은 춤추는 푸토들의 활기찬 릴리프로 장식되어 있다.[178]

『칸토리아』(1433년-1438년)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 미술관(피렌체)


이 외에도 1430년대 도나텔로의 주요 작업으로는 산타 크로체 성당을 위한 『수태고지』 부조(1435년경), 산 로렌초 교회 구 성구실의 청동 문 장식(1437년-1443년), 베네치아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을 위한 목조 『세례자 요한상』(1438년 이후) 등이 있다. 또한 1440년경에는 고대 이후 최초의 독립된 흉상 중 하나로 평가받는 『카메오의 소년』(현재 바르젤로 미술관 소장)을 제작했다.[178]

2. 4. 청동 <다비드>와 전성기 (1430년대 ~ 1440년대)

도나텔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청동 다비드상은 현재 바르젤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고대 이후 제작된 최초의 알려진 자립형 누드 조각상으로 평가받으며, 어떤 건축적 배경 없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구상되었다.[86] 제작 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469년 새로 지어진 메디치 궁 안뜰 기둥 위에 놓여 있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87] 코시모 데 메디치가 1434년 망명에서 돌아온 후, 로마에서 돌아온 도나텔로에게 1430년대 후반에서 1440년대 초반 사이에 의뢰했을 가능성이 높다.[88]

뒤에서 본 청동 다비드의 세부 묘사


당시 다비드는 주변 강대국, 특히 밀라노 공국에 맞서 싸우는 피렌체 공화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89]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 역시 이러한 상징성을 담고 있지만, 이전의 다비드상들과 달리 거의 완전한 나체로 표현되었다. 머리에 쓴 모자와 발에 신은 부츠는 오히려 그의 젊은 육체를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준다.[91] 도나텔로는 성서 속 영웅 다비드를 마치 고대 그리스의 신처럼 묘사하며 혁신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92] 조각상은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한 발로 무심하게 밟고 서 있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골리앗 투구의 깃털 장식이 다비드의 허벅지 안쪽을 스치는 듯한 표현은 작품에 관능적인 분위기를 더한다.[93][94] 이러한 표현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이 작품이 도나텔로의 동성애적 성향을 반영한다고 보기도 한다.[94][179]

도나텔로의 동성애에 대한 소문은 당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문주의자 안젤로 폴리치아노는 도나텔로가 외모가 뛰어난 젊은 조수들을 곁에 두었으며, 그들과 관련된 일화들을 기록으로 남겼다.[96][97][98] 당시 피렌체 사회 분위기와 메디치 가문의 후광 아래 그의 성향이 어느 정도 용인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95] 하지만 이는 대부분 정황에 근거한 추측이며, 도나텔로의 사생활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나 동성애 행위에 대한 공식적인 고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99][100][181][182]

1430년대 초,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을 무렵 도나텔로는 로마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로마에서 제작된 작품으로는 산타 마리아 인 아라첼리 성당의 『조반니 크리벨리의 영묘』와 고대 로마 미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치보리움』 등이 있다.

1434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로 복귀하자 도나텔로도 돌아왔다. 같은 해 5월, 그는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프라토 대성당의 외부 설교단 제작 계약을 맺었다. 이는 두 사람의 마지막 공동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178] 이 설교단은 춤추는 푸토들의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도나텔로가 1433년부터 1438년까지 단독으로 제작한 피렌체 대성당의 『칸토리아』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준다. 칸토리아 역시 고대 로마의 석관이나 비잔틴 양식의 상아 장식함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활기찬 푸토 부조로 유명하다.

이 시기 도나텔로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1435년에는 산타 크로체 성당을 위해 『수태고지』 조각을 제작했고,[178] 1437년부터 1443년까지는 산 로렌초 교회의 구 성구실(Sacrestia Vecchia) 문에 성인들을 묘사한 청동 부조 장식을 만들었다.[178] 1438년 이후에는 베네치아로 가서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의 의뢰로 목조 『세례자 요한상』을 제작했으며,[178] 1440년경에는 고대 이후 초기 흉상 중 하나로 평가받는 『카메오의 소년』(바르젤로 미술관 소장)을 만들었다.[178]

이 시기 도나텔로는 피렌체 최고의 조각가로서 명성을 누렸지만, 사업적인 수완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4] 그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의뢰를 받았고, 이로 인해 작업이 지연되거나 조수에게 마무리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디치 가문과 같은 강력한 후원자들의 꾸준한 지원 속에서 그의 예술적 전성기는 계속되었다.[5]

2. 5. 파도바 시절 (1443년 ~ 1453년)

1443년, 도나텔로는 그 해 사망한 유명한 콘도티에로(용병대장) 에라스모 다 나르니(별명 가타멜라타)의 상속인들로부터 파도바로 초청받았다.[120] 당시 가타멜라타는 베네치아 군대의 총사령관을 지낸 인물이었다.[183] 파도바는 베네치아의 통치 아래 번영하고 있었으며, 메디치 가문에 우호적인 대학이 있는 도시였다. 코시모 역시 도나텔로의 파도바행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크다.[121]

도나텔로는 파도바에서 가타멜라타를 기리는 기념물 제작을 의뢰받았는데, 이 위촉 배경은 다소 흥미롭다. 가타멜라타의 유언에는 자신이 묻힐 교회 안에 비교적 소박한 묘비를 세워달라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22] 베네치아 정부가 활동 기간이나 성과가 다소 엇갈리는 장군을 위해 왜 이토록 거대한 공공 기념물 제작을 지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22] 막대한 제작 비용은 베네치아 정부와 가타멜라타 가문이 나누어 부담했지만, 정확한 분담 비율은 알려지지 않았다.[123] 한편, 인근 페라라에서는 니콜로 3세 데스테 후작의 기마상 제작이 진행 중이었는데, 이 경쟁적인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이 기마상은 도나텔로의 제자를 포함한 피렌체 조각가들이 제작했다.[124]

'''가타멜라타 기마상''', 1453


『가타멜라타 기마상』(1453년)
산탄토니오 다 파도바 성당 앞 산토 광장(파도바)


도나텔로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타멜라타 기마상'''은 1443년 또는 1444년에 설계가 시작되어, 1447년경 주조를 거쳐 1450년에 청동 작업이 완료되었고, 1453년 최종적으로 받침대 위에 설치되었다.[120] 크기는 340cm x 390cm이며, 대좌(받침대) 크기는 780cm x 410cm에 달한다.[183] 이 작품은 고대 로마 이후 사라졌던 실물 크기의 청동 기마상을 부활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84] 이전 시대의 기마상들은 대부분 청동이 아니거나, 독립된 기념물이 아닌 묘지의 일부로 만들어졌다. 가타멜라타 기마상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제작된 수많은 영웅적 기마상의 원형이 되었다.[183]

도나텔로는 로스트 왁스 기법을 사용하여 이 기마상을 제작했다. 그는 고대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처럼 대상을 실제보다 크게 만들어 위엄을 강조하는 대신, 실물 크기로 제작하면서 인물의 자세, 감정 표현, 상징 등을 통해 가타멜라타의 위대함을 섬세하게 묘사하고자 했다.[183] 가타멜라타를 이상화하기보다는 현실적인 모습 그대로의 힘과 권위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작품 전반에는 고전주의 양식이 두드러지는데, 갑옷과 안장에는 로마 시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127](가까이서 보기는 어려움), 말의 형상은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고대 청동 말 조각상인 산 마르코의 말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27] 도나텔로는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파괴되기 전 라벤나에 있던 또 다른 로마 시대 기마상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127]

기마상은 당시 묘지로 사용되던 파도바 성 안토니오 대성당(현지에서는 '일 산토'(Il Santo)라고 불림) 앞 광장에 세워졌다.[125] 도나텔로는 피렌체 밖에서 제작한 다른 작품들처럼 이 기마상에도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126] 받침대에는 두 개의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지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상징하며 기마상에 묘비와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한쪽 부조에는 두 명의 푸토가 가타멜라타 가문의 문장을 들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갑옷을 입은 천사가 묘사되어 있다.[183] 청동 주조 작업은 파도바의 금속 세공 장인 안드레아 델 칼디에레가 이끄는 팀이 주도했다.[127]

도나텔로는 약 10년간 파도바에 머물렀으며, 가타멜라타 기마상이 완성된 1453년 피렌체로 돌아갔다.[128] 그는 산토 성당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여러 조수들과 함께 일했다.[129] 그의 활동은 파도바가 이후 소형 청동상 제작의 중심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자극제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130] 파도바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어서, 중간에 피렌체를 방문한 기록이 있으며, 1450년에는 만토바모데나를 방문하여 의뢰를 받았으나 성사되지 못했고, 1451년에는 페라라 주교의 의뢰를 받았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131]

''회개한 아들의 기적'', 성 안토니오의 일대기 중 한 장면


산토 성당 제단을 위한 ''슬픔에 잠긴 예수'' 부조, 1449~1450년


파도바 체류 기간 동안 도나텔로는 산토 성당을 위해서도 여러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 '''청동 십자가''' (1444년~1449년 제작): 원래 성당의 신랑(nave, 중앙 통로) 아래쪽에 걸려 있었으나, 1895년 이탈리아 건축가 카밀로 보이토가 성당을 개축하면서 현재 위치인 제단 위로 옮겨졌다.[132][183]
  • '''제단 장식''' (1446년 시작, 1450년 6월경 거의 완성): 청동으로 만든 앉아 있는 성모자상과 6명의 성인상(성스러운 대화 형식)을 중심으로, 총 21개의 청동 부조와 1개의 대리석 부조(''예수의 매장'')로 구성된다. 일부 조각상은 미완성이거나 조수들이 작업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금색으로 강조된 성 안토니오의 생애를 묘사한 4개의 부조는 매우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133][134] 1582년 처음 위치가 바뀐 이후 여러 차례 재배치되어 원래의 정확한 배치는 알 수 없지만, 현재보다 성상들이 더 가까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35]
  • '''왕좌에 앉은 성모자상''' (1448년경 제작): 성모 마리아가 왕관을 쓰고 아기 예수를 신자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묘사한다. 성모는 단순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막 일어서려는 듯한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양옆에는 파도바의 안토니오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이 자리하고 있다. 왕좌 기둥 아래에는 지식을 상징하는 스핑크스가 조각되어 있으며, 왕좌 뒷면에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 장면을 묘사한 부조가 있다.[136]

2. 6. 시에나와 피렌체에서의 말년 (1457년 ~ 1466년)

1457년부터 1461년까지 도나텔로는 시에나에서 활동했다. 당시 이미 고령이었기에, 주로 디자인과 modelli|모델리it 제작에 기여하고 돌 조각 작업은 많이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37] 1457년 시에나로부터 세 개의 대형 작품 의뢰를 받았으나, 실제로 시에나에 도착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첫 의뢰는 시에나 대성당을 위한 청동문이었는데, 현재는 그중 한 패널의 시험 주조품으로 여겨지는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모습'만이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 남아있다.[137] 시에나 측에서 비용 문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138]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모습'', 시에나 대성당 문을 위한 가능성 있는 시험 주조품.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시에나에 머무는 동안 그는 청동상 『세례자 요한』을 제작하여 시에나 대성당에 남겼다.[139] 또한 주변에 파란색 유리 상감이 있는 대형 부조 Madonna delle Grazie|마돈나 델레 그라치에it 의뢰를 받아 1459년에 완성했는데, 대부분의 작업은 다른 조각가, 아마도 도나텔로가 의뢰를 받을 수 있도록 밀려난 현지인 Urbano da Cortona|우르바노 다 코르토나it가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140]

『유딧과 홀로페르네스』(1453년-1457년)
베키오 궁전(피렌체)


그의 후기 주요 작품 중 하나인 청동상 『유딧과 홀로페르네스』는 1455년에서 1460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원래 시에나 대성당의 의뢰로 시작되었으나, 후에 메디치 가문이 매입하여 가문의 소장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 유딧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두 번째 타격을 가하려는 순간을 날카롭게 묘사한다. 삼각형 받침대의 부조에는 살해 전의 술 취한 향연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도나텔로는 일부 모델링에 실제 천을 사용하고 홀로페르네스의 다리는 실제 모델을 본떠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받침대 모서리에 분수구가 있어 분수로 계획되었을 수도 있지만, 현재 내부 배관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141] 1494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되자, 이 작품은 청동 『다비드』와 함께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로 옮겨졌다.[141]

1461년 시에나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온 도나텔로는 1466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바사리는 그가 사망하기 전 불확실한 기간 동안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지만, 정확한 시기는 언급하지 않았다.[142] 그럼에도 그는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메디치 가문의 매장지인 산 로렌초 성당의 청동 설교단 두 개를 위한 대규모 부조 작업에 착수했다. 이 설교단은 원래 다른 용도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의 형태로 조립된 것은 다음 세기에 이르러서였다. 패널 크기도 다양하다.[143]

부활 장면 세부, 산로렌초 성당 설교단


설교단 부조 대부분의 디자인과 상당 부분의 모델링은 도나텔로 자신이 한 것으로 여겨지나, 정확한 귀속은 여전히 논의 중이다. 그는 제자인 Bartolomeo Bellano|바르톨로메오 벨라노it와 Bertoldo di Giovanni|베르톨도 디 조반니it와 함께 작업했다. 도나텔로는 전체 디자인을 담당하고,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와 『십자가에서 내림』 부조를 직접 제작했으며, 벨라노와 함께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와 『카야파 앞의 그리스도』를 공동 제작했다. 일부 패널은 미완성된 modelli|모델리it에서 주조된 것으로 보이며, 패널 간, 때로는 같은 패널 내에서도 상당한 스타일 차이가 나타난다. 특히 장면이 설정된 공간의 처리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실험적인데, 이는 "감정과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절대적으로 타협 없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이 작품들의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144]

도나텔로는 1466년 피렌체에서 사망했으며, 산 로렌초 성당의 코시모 데 메디치 묘 옆에 안장되었다.

3. 주요 작품 및 양식

도나텔로는 르네상스 초기 피렌체를 대표하는 조각가로, 그의 작품은 혁신적인 기법과 깊이 있는 인간 표현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전통적인 조각 기법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르네상스 조각의 지평을 넓혔다.

그는 특히 얕은 돋을새김 기법인 스티아치아토(Schiacciato)를 개발하여 부조 조각에 회화적인 공간감과 섬세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기베르티와 같은 동시대 조각가들의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도나텔로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대리석과 청동 같은 전통적인 재료 외에도 목조, 테라코타, 석고, 심지어 유리와 같은 다양한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각 재료의 특성을 살린 독특한 질감과 효과를 창출했다. 특히 목조 작품에서는 채색과 금박을 통해 표현력을 높였으며, 테라코타로는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섬세한 성모자 부조 등을 제작하여 대중화에 기여했다.

도나텔로 작품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묘사이다. 그는 고전 고대의 조각을 연구하면서도 당대의 해부학 지식과 인간 관찰을 통해 인물의 자세, 표정, 감정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초기작인 『복음사가 성 요한상』에서부터 후기의 『청동 다비드상』,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인간 내면의 고뇌와 신앙심, 영웅적인 기상 등을 사실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표현하여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조각 예술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피렌체 대성당조토의 종탑을 위한 예언자상들, 오르산미켈레의 길드 수호성인상들(『성 마르코』, 『성 조르조』 등), 고대 이후 최초의 독립된 실물 크기 남성 누드 조각상으로 평가받는 『청동 다비드상』, 르네상스 최초의 대형 기마상인 『가타멜라타 기마상』, 그리고 말년의 걸작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서양 미술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3. 1. 스티아치아토(Schiacciato) 기법

''성녀 조르주 공주 구출'', 오르산미켈레를 위한 그의 ''성 조르주''의 바닥 부분, 바르젤로 미술관


도나텔로는 그의 부조 작품들, 특히 모든 부분을 매우 낮거나 얕게 표현하는 스티아치아토(Schiacciato, 문자 그대로 "납작하게 만들어진") 기법의 개발로 유명해졌다. 이는 같은 작품 안에 매우 높고 낮은 부조를 함께 사용했던 다른 조각가들의 기법과는 대조적인데, 피렌체 세례당의 기베르티가 제작한 "낙원의 문"(1424-1451)이 대표적인 예이다.[56]

''헤로데의 향연'' (1423–1427), 세례대, 시에나 세례당


''승천과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 1428–32,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Inv. 7629-1861)


스티아치아토 기법에서 도나텔로의 첫 중요한 작품은 오르산미켈레를 위해 제작한 ''성 조르주'' 조각상의 바닥 부분에 있는 대리석 부조 ''성녀 조르주 공주 구출''(1416-17)이다. 이 작품에서 인물들은 약간만 돌출되어 있지만, "능숙한 겹침을 통해 깊지만 무한하지 않은 공간을 암시하는, 표면 부조에서 거의 깨지지 않는 팽팽하게 뻗은 통합된 피부 평면으로 표현된다".[57] 이 부조는 "완전히 일관된 원근법 시스템"을 보여주지는 않지만(당시 이탈리아 작품 대부분이 그랬다), 오른쪽의 아케이드 홀은 부분적인 원근법 계획을 나타낸다.[58]

이후 도나텔로는 비교적 새로운 재료였던 청동을 사용하여 스티아치아토 기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시에나 세례당의 세례대 프로젝트(1417년 시작)는 원래 기베르티가 주도했으며, 대리석 대신 6개의 청동 부조를 설치하는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조 제작은 기베르티, 자코포 델라 케르차, 그리고 지역 장인들에게 할당되었다. 그러나 1423년까지 기베르티가 작업을 시작하지 않자, 세례자 요한의 삶을 다룬 부조 중 하나인 ''헤로데의 향연'' 제작이 도나텔로에게 맡겨졌다.[59]

''헤로데의 향연''(1423–1427)은 세례대 하단, 보는 사람의 무릎 높이 정도에 낮게 설치되어 스티아치아토 기법에 적합했다. 작품은 건축물로 구분된 세 개의 후퇴하는 공간에 인물들을 배치했다. 왼쪽에는 헤로데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가 담긴 접시를 보고 공포에 질려 움츠러들고, 중앙 오른쪽에서는 살로메가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뒤쪽 공간에서는 악사들이 연주하고 있으며, 그 너머로 요한의 머리가 두 인물(아마도 헤로디아스)에게 전달된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소실점을 사용하여 완전한 1점 투시도를 구현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보는 사람에게 긴장감과 불협화음의 느낌을 주어 작품의 끔찍한 주제를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60]

다른 스티아치아토 부조 작품으로는 나폴리 산탄젤로 아 닐로 성당의 벽면 묘비에 있는 ''성모 승천''(1426-1428), 가정용 작품인 ''구름 속의 마돈나''와 ''파치 마돈나''(둘 다 1425−1430년경), ''승천과 성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1428–1430, 원래 제작 장소는 불명확하나 세기 말에는 메디치 가문 소유), 그리고 작은 ''성모자'' (1426년경, 도나텔로의 작업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 등이 있다.[62]

도나텔로와 그의 작업실은 스티아치아토 기법 외에도 다양한 깊이와 크기,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방식의 부조 작품들도 꾸준히 제작했다.[63]

3. 2. 다양한 재료의 활용

도나텔로는 전통적인 조각 재료 외에도 다양한 재료를 실험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모색했다.

산타 크로체 십자가, 1407–1408년 제작, 움직일 수 있는 팔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상부, 목재, 1440~1442년경, 피렌체 두오모 미술관

목재는 가벼움 때문에 십자가 제작에 여전히 사용되었다. 또한 값이 싸고 종교 행렬에 휴대하기에 편리했다. 도나텔로가 산타 크로체 성당을 위해 초기 제작한 십자가는 이러한 목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팔을 가지고 있다. 목조 조각상은 거의 항상 칠해지고 부분적으로 금박을 입혔다 (테라코타, 심지어 대리석과 청동도 마찬가지였다).

피렌체의 수도회베네치아에 있는 프라리 성당에 여전히 있는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상을 의뢰했을 때, 목재가 선택되었다. 이 조각상은 아마도 도나텔로의 베네치아 유일의 작품일 것이다. 그는 피렌체 외 지역을 위한 몇몇 위촉 작품을 제외하고는 보통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지 않았다.[101] 세례자 요한상에는 1438년이라는 서명과 연대가 적혀 있다. 보존 작업에서 이것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도나텔로의 작품이 점점 더 표현력이 풍부해졌다는 생각에 따라 파두아 체류 이후의 시기로 추정되었다.

'세례자 요한'의 재연대는 훨씬 더 유명한 목조상인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피렌체 세례당(현재 피렌체 두오모 미술관)에 있었으며, 조각 스타일이 유사하다. 이 작품은 도나텔로의 말년에 나타나는 단순한 스타일로 "매우 표현력이 풍부하다"고 평가되며, 다른 조각상의 연대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1456년경으로 추정되었다.[102] 현재는 일반적으로 1430년대 후반 또는 도나텔로가 파두아로 가기 전으로 추정된다.[103]

케네스 클라크에 따르면, 이 작품은 "사막을 가로질러 응시하는 작고 움푹 들어간 눈을 가진 여성 수행자로, 그녀는 하나님의 환영을 보았다. 그녀의 몸은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104]

2020년 피렌체 교외 레냐이아에 있는 산탄젤로 교회의 칠해진 목조 십자가가 피렌체 교구에 의해 도나텔로의 작품으로 추정되었고, 1460년대로 연대가 추정되었다. 이 작품은 더 단순한 스타일이다.[105][106][107][108]

주로 가정집을 위해 제작된 성모자 이미지는 오랫동안 이탈리아 화가들의 주요 작품이었으며, 소득 수준이 낮은 계층에서도 점점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조각가들은 다양한 재료로 부조 형태로 이러한 이미지를 제작했으며, 저렴한 테라코타석고로 만든 작품은 종종 채색되었다. 이러한 이미지의 다수를 특정 작가의 작품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종종 어려운데, 특히 도나텔로와 기베르티 같은 동시대 작가들의 양식이 오랫동안 사용되었기 때문이다.[68]

첼리니 마돈나의 주형으로 만든 현대 유리 조각


도나텔로의 창의성과 새로운 효과를 추구하는 모습은 유럽 조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재료인 유리를 다양하고 대부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한 데서 드러난다. 그는 1434년경 피렌체 대성당을 위한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을 의뢰받았는데, 이는 전통적인 작업이었지만 조각가가 아닌 화가에게 주어지는 일이었습니다.[145] 그는 프라토 강단과 칸토리아 부조의 배경에 테세라 형태의 유리를 사용했는데,[146] 이는 오래된 스타일이었지만, 테라코타 피오트 마돈나(루브르 박물관, 1440년경 또는 그 이후)의 배경에 유리로 덮인 밀랍과 금 상감 세공으로 이루어진 원형 장식의 네트워크는 독창적이다.[147]

그의 첼리니 마돈나(1450년경,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는 지름 28.5cm의 둥근 청동 부조로, 두께가 균일하게 주조되어 뒷면에는 앞면의 볼록한 부조와 일치하는 움푹 들어간(오목한) 이미지가 있다. 이것은 용융 유리와 아마도 다른 재료의 주형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도나텔로는 1456년에 이 작품을 그의 의사이자 친구인 조반니 첼리니에게 주었지만, 그 당시에는 새 작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148]

3. 3. 인체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 미술관(피렌체)]]

도나텔로는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의 초기작인 『복음사가 성 요한상(산 조반니상)』(1409년-1411년경)은 피렌체 대성당 파사드를 위해 제작된 대형 좌상이다. 이 작품은 이전 시대의 후기 고딕 양식과는 확연히 구분되며, 인물 조각상에서 자연주의를 추구하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새로운 경지를 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78] 얼굴, 어깨, 가슴 등 상체는 다소 이상화된 고딕적 표현이 남아있지만, 손의 표현이나 옷 주름, 다리 등 하체는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인물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그리스도 십자가형』(1406년 이후) 역시 인체의 고통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반쯤 감긴 눈과 벌어진 입은 극심한 고통을 나타내며, 십자가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자세는 보는 이로 하여금 고통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1411년부터 1413년 사이에는 아마포 직조 조합의 의뢰로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벽감에 『성 마르코상』을 제작했다. 이 조각상은 인체의 무게중심과 옷 주름 등을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어 1417년에는 갑옷 제작 조합을 위해 『성 게오르기우스상』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의 기단에 새겨진 릴리프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은 원근법을 조각에 성공적으로 도입한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 1423년에는 『툴루즈의 성 루이상』을 제작했으며, 이 작품은 현재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피렌체 대성당조토의 종탑을 위해 1415년부터 1426년까지 제작한 5점의 예언자상(『수염 없는 예언자』, 『수염 있는 예언자』, 『이삭의 희생』, 『예언자 아박쿡』, 『예언자 예레미야』) 역시 인물들의 개성과 감정을 생생하게 포착한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특히 『예언자 아박쿡』과 『예언자 예레미야』는 고대 로마의 연설가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니콜로 다 우차노(Niccolò da Uzzano) 흉상, 1430년대?, 도나텔로 추정


도나텔로 시대에는 피렌체의 유력 가문인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사실적인 흉상 초상화 제작이 유행했다.[152] 도나텔로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채색 테라코타 흉상 『니콜로 다 우차노』는 이러한 초기 흉상 초상화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니콜로 다 우차노는 메디치 가문과 정치적으로 중요한 관계를 맺었던 은행가이자 인문주의자로 1431년에 사망했다.[153] 이 흉상은 그의 생전 모습이나 죽음의 가면을 바탕으로 사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 로마식 토가를 입고 "타협 없는 사실주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현명한 힘과 고귀함"을 풍기는 표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실제로 도나텔로의 것인지, 제작 연대, 그리고 작품의 질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154] 무덤 조각을 제외하면, 도나텔로가 특정 개인을 모델로 하여 초상화로 제작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작품은 드물다.[149] 예를 들어 유명한 가타멜라타 기마상의 경우, 도나텔로가 실제 인물을 직접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으며[150], 특정 인물의 외모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잔혹한 힘의 이상화된 초상"으로 표현되었다.[151]

1430년경, 코시모 데 메디치의 의뢰로 제작된 청동 『다비드상』은 도나텔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자, 르네상스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품은 고대 이후 서양 미술사에서 실물 크기의 독립된 남성 나체 조각상으로는 거의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왼발로 베어낸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오른손에 칼을 든 다윗의 모습은 이전 시대의 조각과는 완전히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인체의 아름다움과 영웅적인 정신을 사실적이면서도 이상적으로 결합시킨 이 작품은 르네상스 조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작품에 나타난 표현을 근거로 도나텔로의 개인적인 성향을 추측하기도 하지만[179][180],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역사적 자료는 부족하다.[181][182]

1433년부터 1438년까지 제작된 피렌체 대성당의 『칸토리아(합창석)』 역시 도나텔로의 사실주의적 인체 묘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대 석관이나 비잔틴 양식의 상아 장식함 등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작품에는 춤추고 노래하는 풋토(아기 천사)들이 매우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외에도 산타 크로체 성당의 『수태고지』(1435년), 산 로렌초 교회의 성구실 문 장식 릴리프(1437년-1443년), 베네치아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을 위해 제작한 목조 『세례자 요한상』(1438년 이후), 고대 이후 초기 흉상으로 평가받는 『카메오의 소년』(1440년경) 등에서도 인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실적인 표현력을 확인할 수 있다.

도나텔로는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움직임, 그리고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이를 조각으로 생생하게 구현해냈다. 그의 이러한 사실주의적 접근은 르네상스 조각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3. 4. 주요 작품



1408년 초, 도나텔로는 피렌체 대성당을 위한 실물 크기의 예언자상 제작 의뢰를 받을 만큼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은 동시대 조각가 난니 디 반코의 작품과 짝을 이루도록 기획되었으나,[32] 최종적으로 의도된 위치에 설치되지 못하고 현재는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33]

이후 그는 주요 공공장소를 위한 실물 크기 조각상 제작 의뢰를 잇달아 받았다. 그의 대리석 다비드는 이 시기 또는 1412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34] 1416년, 성당은 이 작품을 피렌체 공화국에 넘겼고, 공화국은 정부 청사인 베키오 궁전에 배치했다.[37] 이 작품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청년으로 묘사되었으며, "기념비적 조각 예술의 초기 사례 중 하나"이자 "고딕과 르네상스 세계 사이를 오가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36]

1409년부터 1411년까지 그는 거대한 앉은 자세의 ''요한 복음사가'' 상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1588년까지 옛 성당 외벽의 벽감을 차지하고 있다가 현재는 두오모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약 3m 높이에 설치될 것을 고려하여 제작되었으며, 2015년부터는 다른 성당 조각상들과 함께 원래 높이에 맞춰 전시되고 있다.[37] 이 작품은 자연주의와 인간 감정 표현을 추구하는 후기 고딕 양식에서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며,[178] 얼굴, 어깨, 가슴은 이상화되어 있지만 손과 다리 위의 옷 주름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1415년 성당 당국은 조토의 종탑 상층부 벽감에 실물 크기 대리석 조각상 8개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이 조각상들은 매우 높은 곳에 설치되어 멀리서 올려다보게 되므로, 도나텔로는 이러한 시각적 효과를 고려하여 작품을 구성했다.[39] 모든 원본 조각상은 1940년에 제거되어 복제품으로 대체되었고, 원본은 두오모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2015년부터 박물관에서는 이 조각상들을 원래 의도된 높이에 맞춰 전시하고 있다.

도나텔로는 종탑 조각상 8개 중 6개를 제작했는데, 두 작품은 난니 디 바르톨로와 협력했다. 작업은 1414년부터 1435년까지 이어졌으며,[40] 가장 유명한 작품은 ''주코네''("대머리" 또는 "호박 머리", 아마도 아박쿡이나 예레미야를 묘사)로, 도나텔로 자신이 가장 아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41] 다른 종탑 조각상으로는 ''수염 없는 예언자''와 ''수염 있는 예언자''(둘 다 1414-1420), ''이삭의 희생''(난니 디 바톨로와 함께, 1421), 예언자 ''일 포풀라노''(1435년 완성) 등이 있다.[42]

오르산미켈레, 도나텔로의 ''성 조르조''는 모퉁이 왼쪽에 있다.


피렌체의 또 다른 대규모 조각 프로젝트는 오르산미켈레 외부 벽감에 조각상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길드가 소유한 이 건물은 곡물 시장에서 교회와 사무실로 용도가 변경되는 중이었고, 14개의 벽감은 주요 길드들이 각각 맡아 수호성인을 조각했다. 이곳의 벽감은 대성당보다 낮아 조각상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44]

''성 조르조'', 오르산미켈레를 위해 제작되었으며, 현재 바르젤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나텔로의 오르산미켈레 첫 작품은 아마포 직조 길드를 위한 대리석 ''성 마르코''(1411–1413)였다. 바사리에 따르면, 완성된 조각상을 지면에서 본 길드원들이 만족하지 못하자 도나텔로는 잠시 가려두었다가 아무런 수정 없이 다시 보여주었고, 그제야 길드원들이 만족했다고 한다.[45] 이 조각상은 무게를 지탱하는 다리 쪽 옷 주름이 도리아식 기둥처럼 수직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46]

1415년경부터 1417년까지 그는 무기 제작자 길드를 위해 대리석 ''성 조르조''를 완성했다. 기단의 부조는 조금 후에 제작되었다.[47] 벽감의 깊이가 얕았지만, 도나텔로는 이를 활용하여 인물을 앞으로 내밀었고, 얼굴의 불안한 표정은 경계심, 즉 '프론테자'(prontezza)를 나타낸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에 높이 평가받던 자질이었다. 손과 머리의 구멍으로 보아 원래는 투구나 화환을 쓰고 창이나 칼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8] 기단에 장식된 릴리프 ''성 조르조와 용''은 조각에 원근법을 도입한 초기 사례로 평가받는다.

금박을 입힌 청동 ''툴루즈의 성 루이''는 1423년에서 1425년 사이에 제작되었다. 현재 산타 크로체 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원래 자리에는 1460년 베로키오의 청동 ''성 토마스의 불신''이 대신 설치되었다. 이 작품은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주조한 뒤 금박을 입힌 기술적 특징을 지닌다. 미켈로초와의 협업이 이때 시작되었을 수 있으며,[49] 1423년은 도나텔로가 ''성 루이'', 성 로쏘레 성물함 흉상, 시에나 세례당 부조 등 청동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이다.[50] 청동 작업 경험이 풍부했던 미켈로초가 기술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며, 도나텔로는 빠르게 청동 매체에 적응했다.[51]

1418년 피렌체 시뇨리아는 교황의 방문을 기념하여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교황 숙소 입구에 피렌체의 상징인 사자 조각상 마르초코 제작을 의뢰했으나, 방문 전까지 완성하지는 못했다.[52] 이후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되었고, 현재 원본은 바르젤로 미술관에 있으며 광장에는 복제품이 놓여 있다.

1410년경 이전에는 현재 산타 크로체 성당에 있는 ''채색 목조 십자가''를 제작했다.[53] 이 작품은 바사리의 유명한 일화에 등장한다. 고통의 순간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리스도는 눈과 입이 약간 벌어져 있고 몸은 경직된 자세를 하고 있다. 바사리에 따르면, 도나텔로가 이 작품을 브루넬레스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자, 브루넬레스키는 그리스도가 농부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54] 이에 도나텔로가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보라고 도전했고, 그 결과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의 십자가를 제작했다. 당시에는 브루넬레스키의 고전적인 작품이 더 높이 평가받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는 도나텔로의 사실적인 표현을 더 선호할 수도 있다.[55]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 상은 현재 바르젤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자 고대 이후 최초로 알려진 자립형 누드 조각상이다. 이 작품은 건축적 배경 없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구상되었으며, 거의 실물 크기이다.[86]

정확한 제작 의뢰 기록은 없지만, 이 조각상은 1469년 새로 지어진 메디치 궁 안뜰 기둥 위에 놓여 있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87] 하지만 궁전 건축 시작(1444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1434년에서 1440년 사이, 도나텔로가 로마에서 돌아오고 코시모 데 메디치가 망명에서 돌아온 후, 같은 거리에 있던 옛 메디치 궁을 위해 코시모가 의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8]

다비드는 주변 강대국, 특히 당시 위협적이었던 밀라노 공국에 맞서 승리한 피렌체 공화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 조각상은 이러한 정치적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독창적이고 관능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89] 도나텔로가 이전에 제작한 대리석 다비드상(1408-1409년경) 등 당시의 다른 다비드상들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90] 청동 다비드는 모자와 부츠만 착용하고 있어 그의 나체를 더욱 강조한다.[91]

도나텔로의 혁신은 이스라엘의 왕을 젊은 그리스 신처럼 변형시킨 데 있으며,[92]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혁신적인 작품으로, 당시 예술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예상할 수 없게 만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인물은 실제 소년의 신체를 보여주며, 허리를 중심으로 몸의 다른 모든 평면이 뻗어나가는 구성은 르네상스 누드 조각의 표준이 되었다.[93]

한 발은 골리앗의 잘린 머리 위에 무심하게 얹혀 있으며, 이는 인물에게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부여한다. 골리앗 투구의 깃털이 다비드의 허벅지 안쪽을 스치는 묘사는 관능적인 느낌을 더한다. ''다비드''와 ''아모르-아티스''는 도나텔로의 성적 취향에 대한 당시의 소문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94]

도나텔로의 동성애 성향이 널리 알려졌고 메디치 가문 등에게 용인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95] 주요 근거 중 하나는 1480년경 안젤로 폴리치아노가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데티 피아체볼리''에 나오는 일화이다. 메디치 가문의 내부자였던 폴리치아노는 도나텔로가 "잘생긴 조수들"을 곁에 두었으며, 작업실에서 도망친 조수를 찾아다녔다고 기록했다.[96][97] 또한 도나텔로가 아름다운 소년 조수들을 고용하여 다른 이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하도록 "얼룩을 묻혔다"거나, 조수와 다툰 뒤 서로 "웃었다"(성관계를 의미하는 속어)는 이야기도 전해진다.[98] 그러나 그의 사생활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없으며, 산드로 보티첼리 등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피렌체 기록 보관소에 소도미 관련 고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기록 자체가 불완전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99][100]

1425년부터 1427년까지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와 공동으로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에서 대립 교황 요한 23세의 영묘 제작에 참여했다. 이 영묘의 조각 중 도나텔로의 작품으로 확실시되는 것은 누워 있는 고인의 청동상이다. 1427년에는 나폴리 산탄젤로 아 닐로 성당의 리날도 브란카치 추기경 영묘에 사용될 대리석 장식 패널(''수태고지'' 부조)을 피사에서 완성했다. 같은 시기 시에나 산 조반니 세례당의 의뢰로 세례반을 위한 ''헤롯의 향연'' 릴리프와 ''신앙'', ''희망'' 조각상도 제작했다.

1430년대 초 로마에 머물면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치보리움』(성합 안치 감실, 1432-1433년경)과 산타 마리아 인 아라체리 교회의 『조반니 크리벨리의 영묘』 등을 제작하며 고대 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1433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로 복귀하자 도나텔로도 피렌체로 돌아왔다. 1433년부터 1438년까지 피렌체 대성당을 위한 설교단, 즉 ''칸토리아''를 제작했다. 고부조로 장식된 이 설교단은 고대 석관이나 비잔틴 상아 장식 상자의 영향을 보여준다. 1434년에는 미켈로초와 함께 프라토 대성당의 외부 설교단 제작 계약을 맺고 1438년까지 작업했다. 이 설교단의 부조는 칸토리아와 유사한 양식을 보인다.

1434년부터 1443년까지는 산 로렌초 성당의 구 성구실 장식을 맡아 청동 문, 루네트, 톤도 등을 제작했다. 1435년경에는 산타 크로체 성당을 위해 피에트라 세레나와 테라코타로 만든 고부조 ''카발칸티 수태고지''를 제작했다. 1438년에는 베네치아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을 위해 목조 ''세례자 요한'' 상을 제작했다. 1440년경에는 고대 이후 최초의 흉상 중 하나로 여겨지는 청동 ''아모르-아티스''를, 1440년에서 1442년 사이에는 나무와 스투코로 제작된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들었다.

1443년, 도나텔로는 용병대장 가타멜라타의 유족의 초청으로 파도바로 가서 그의 기마상을 제작했다. 1445년부터 1450년 사이에 완성된 청동 ''가타멜라타 기마상''은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대형 기마상이자 고대 이후 사라졌던 기마상 전통을 부활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184] 이 작품은 이후 군사적 영웅을 기리는 기마상의 전형이 되었다.[183]

로스트 왁스 기법으로 제작된 이 기마상은 실물 크기로 제작되었다. 도나텔로는 고대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처럼 대상을 실제보다 크게 만드는 대신, 실물 크기 안에서 인물의 감정, 자세, 상징 등을 통해 위엄을 표현하고자 했다.[183] 대좌에는 지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상징하는 두 개의 릴리프가 새겨져 있어 묘비와 같은 인상을 준다.[183]

파도바의 산탄토니오 성당에는 도나텔로의 다른 주요 작품들도 남아있다. 1444년부터 1447년 사이에 제작된 청동 십자가상, 그리고 1446년부터 1450년까지 제작된 주제단의 청동 조각들(성모자상, 6명의 성인상,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다룬 4점의 릴리프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1895년 성당 개축 과정에서 일부 배치가 변경되기도 했다.

1453년 도나텔로는 파도바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왔다. 1457년부터 1461년까지는 시에나에서 활동하며 주로 디자인과 모델 제작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137] 1457년 시에나 대성당을 위한 청동문 제작을 의뢰받았으나, 비용 문제로 실제 제작된 것은 시험 주조품으로 추정되는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모습'' 패널(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 소장)뿐이다.[138]

시에나 시기 또는 그 직후 제작된 중요한 후기 작품으로는 청동 ''유딧과 홀로페르네스''가 있다. 이 작품은 원래 시에나 대성당을 위해 제작이 시작되었을 수 있으나, 후에 메디치 가문이 구입하여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정원에 설치했다. 유딧이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극적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으며, 삼각형 받침대의 부조는 살해 전의 연회 장면을 보여준다. 일부 질감 표현을 위해 실제 천을 사용했고, 홀로페르네스의 다리는 실제 모델을 본떴을 가능성이 있다. 받침대에 분수구가 있어 분수로 계획되었을 수도 있지만, 현재 내부 배관은 없다.[141] 1494년 메디치 가문 추방 후, 이 작품과 청동 ''다비드''는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로 옮겨져 폭정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시에나 시기에는 시에나 대성당을 위한 청동 ''세례자 요한'' 상(1455-1457년경)도 제작했다.[139]

피렌체로 돌아온 후 마지막 주요 작업은 산 로렌초 성당의 청동 설교단 제작이었다. 그는 제자 바르톨로메오 벨라노와 베르톨도 디 조반니와 함께 이 작업에 참여하여 전체 디자인을 구상하고 일부 릴리프 제작을 직접 담당했다.

도나텔로는 1466년 피렌체에서 사망하여 산 로렌초 성당의 코시모 데 메디치 묘 옆에 묻혔다.

[[File:Sala dei gigli, giuditta e oloferne 01.JPG|width=160px||||유딧과 홀로페르네스 (도

4. 영향

도나텔로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소묘 중 하나인 《무고한 자들의 학살》(1446~1450년)의 일부. 현재 미술관 소장.


조르조 바사리가 1540년대에 집필한 『화가들의 생애』 속 도나텔로의 전기는 실제 사건 발생 약 1세기 후에 쓰여, 사실과 다른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바사리는 도나텔로를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하며 많은 작품을 나열했지만, 파도바와 시에나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술했을 가능성이 있다.[155] 예를 들어, 바사리는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상상력"을 칭찬했지만, 이것이 도나텔로의 파도바 교회 부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160] 또한, 그는 도나텔로의 출생 연도를 1403년으로 기록했는데,[157] 이는 1401년 폭행 기록[158]과 1406년 작업 대금 지불 기록[159]을 근거로 하는 현대 학자들의 연구 결과보다 17년 늦은 것이다.

열렬한 피렌체 애국자였던 바사리는 도나텔로를 르네상스 조각에서 피렌체의 우위를 확립한 인물로 보고, 그와 미켈란젤로 사이의 계보를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도나텔로의 제자이자 미켈란젤로의 스승 격이었던 베르톨도 디 조반니(1491년 사망)를 연결고리로 삼았는데, 이는 다소 작위적인 해석으로 여겨진다. 바사리는 도나텔로와 메디치 가문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했는데, 이는 실제로 중요했지만, 미켈란젤로와 바사리 자신이 누렸던 후원 관계를 투영한 측면도 있다.[160]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기단의 부조와 서명, 1453~57년, 베키오 궁전, 피렌체


도나텔로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고 독창적이어서 그의 영향력은 15세기 피렌체 조각 전반과 그 외 지역까지 미쳤다. 그는 고전 형식과 양식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의 뛰어난 조각가들인 기베르티, 자코포 델라 케르차, 루카 델라 로비아 등과 공유하는 특징이기도 했다. 많은 젊은 조각가들이 그를 도왔지만, 그의 작업실 운영 방식이나 제자 관계는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며, 현대 연구는 바사리를 포함한 과거의 주장들, 즉 특정 조각가들을 도나텔로의 "제자"로 단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161] 도나텔로 말년의 주요 조수로는 파도바 출신의 바르톨로메오 벨라노와 베르톨도 디 조반니가 있었다.[162]

도나텔로가 사망할 당시 피렌체 조각계에서는 그가 초기에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던 부드럽고 우아한 "달콤한 스타일"이 유행했다. 반면 그의 말년 작품들은 대담한 상상력과 표현력으로 동시대 조각가들을 압도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모방하기 힘든 것으로 여겨졌다.[163]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베로키오와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같은 예술가들이 도나텔로 후기 양식과 유사한 표현적 효과를 탐구하기 시작했다.[164]

도나텔로가 활동했던 파도바시에나에는 숙련된 청동 주조 장인과 조각가들이 남게 되었고, 이 도시들, 특히 파도바는 중요한 예술 중심지로 성장했다.[165] 파도바에서 그의 존재는 지역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66] 바르톨로메오 벨라노는 1469년 파도바로 돌아와 주요 조각가로 활동했으며, 이후 그의 제자인 안드레아 리치오(약 1470~1532년)가 그 자리를 계승했다.[167]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는 도나텔로의 젊은 동료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도나텔로처럼 얕은 부조(rilievo schiacciato|릴리에보 스키아차토it) 기법에 능숙했던 주요 조각가였다. 그는 1464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유망했던 경력을 마감했다.[168] 얕은 부조 기법은 다른 조각가들이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인 '''계단의 마돈나'''(약 1490년)는 이 기법을 시도한 예이다.[169]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다비드 상(1501년)은 도나텔로의 작품에 대한 경의이자 도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70]

5. 유산



조르조 바사리가 1540년대에 집필한 『화가들의 생애』 속 도나텔로의 전기는 사건 발생 약 1세기 후에 쓰여 사실과 다른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바사리는 도나텔로의 출생 연도를 1403년으로 기록했지만,[157] 현대 연구는 1401년 폭행 기록[158]과 1406년 작업 대금 지불 기록[159]을 근거로 이보다 17년 앞선 시기로 본다. 또한 바사리는 파도바와 시에나에 있는 도나텔로의 작품에 대해 불확실한 지식을 보이며 다른 이의 이야기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있다.[155] 바사리는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상상력"(bel capriccioit)을 칭찬했지만, 이것이 도나텔로의 파도바 교회 부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60]

바사리는 열렬한 피렌체 애국자로서 도나텔로를 르네상스 조각에서 피렌체의 우위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했으며,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 사이의 계보를 연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도나텔로의 제자이자 미켈란젤로의 스승 격이었던 베르톨도 디 조반니(1491년 사망)를 거쳤는데, 이는 다소 의심스러운 연결고리이다. 또한 바사리는 도나텔로와 메디치 가문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했는데, 이는 도나텔로 생애에서 중요했지만, 미켈란젤로와 바사리 자신이 누렸던 후원 관계와 유사하게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160]

도나텔로의 작품은 매우 다양하고 독창적이어서 그의 영향력은 15세기 피렌체 조각 전반과 그 너머까지 미쳤다. 그는 고전 형식과 양식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의 뛰어난 조각가들인 기베르티, 자코포 델라 케르차, 루카 델라 로비아 등과 공유하는 특징이기도 했다. 많은 젊은 조각가들이 그를 도왔지만, 그의 작업실 운영 방식이나 제자 관계는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으며, 현대 연구는 바사리를 포함한 19세기 주장들, 즉 특정 조각가들을 도나텔로의 "제자"로 규정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161] 도나텔로 말년의 정규 조수로는 파도바 출신의 바르톨로메오 벨라노와 베르톨도 디 조반니가 있었다.[162]

도나텔로가 사망했을 당시 피렌체 조각계에서는 그가 수십 년 전에 발전시킨 "달콤한 양식"(Stile dolceit)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들은 상상력과 표현의 대담함으로 동시대 조각가들을 압도했으며, 당대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접근하기 힘든 것으로 여겨졌다.[163] 수년이 지나서야 베로키오와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같은 조각가들이 도나텔로 후기 양식과 유사한 표현 효과를 탐구하기 시작했다.[164]

도나텔로가 활동했던 파도바와 시에나는 숙련된 청동 주조가와 조각가들을 배출하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파도바에서는 그의 존재가 지역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66] 그의 조수였던 바르톨로메오 벨라노는 1469년 파도바로 돌아와 주요 조각가로 활동했으며, 이후 그의 제자인 안드레아 리치오(약 1470~1532년)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167]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는 도나텔로의 젊은 동료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도나텔로와 비견될 만한 얕은 부조 기법을 구사한 주요 조각가였다. 그는 1464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여 유망한 경력을 마감했다.[168] 얕은 부조 기법은 다른 조각가들이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미켈란젤로의 초기 작품인 '''계단의 마돈나'''(약 1490년)는 이 기법을 시도한 예이다.[169]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인 ''다비드'' (1501년)는 "도나텔로에 대한 경의이자 도전"으로 평가받는다.[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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