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드 빌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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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미니크 드 빌팽은 1953년 모로코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외교관, 외무장관, 내무장관, 그리고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측근으로, 2003년 이라크 전쟁 반대 입장을 강력히 표명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총리 재임 중에는 청년 고용 대책인 '최초 고용 계약'을 추진했으나, 전국적인 시위와 파업으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2007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클리어스트림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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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드 빌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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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도미니크 마리 프랑수아 르네 갈루조 드 빌팽 |
로마자 표기 | Dominique Marie François René Galouzeau de Villepin |
출생일 | 1953년 11월 14일 |
출생지 | 프랑스령 모로코 라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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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직위 | 프랑스 공화국 총리 |
대통령 | 자크 시라크 |
임기 시작 | 2005년 5월 31일 |
임기 종료 | 2007년 5월 17일 |
이전 총리 | 장피에르 라파랭 |
다음 총리 | 프랑수아 피용 |
직위 2 | 내무부 장관 |
총리 2 | 장피에르 라파랭 |
임기 시작 2 | 2004년 3월 31일 |
임기 종료 2 | 2005년 5월 31일 |
이전 장관 | 니콜라 사르코지 |
다음 장관 | 니콜라 사르코지 |
직위 3 | 외무부 장관 |
총리 3 | 장피에르 라파랭 |
임기 시작 3 | 2002년 5월 7일 |
임기 종료 3 | 2004년 3월 31일 |
이전 장관 3 | 위베르 베드린 |
다음 장관 3 | 미셸 바르니에 |
직위 4 | 대통령 비서실장 |
대통령 4 | 자크 시라크 |
임기 시작 4 | 1995년 5월 17일 |
임기 종료 4 | 2002년 5월 6일 |
이전 비서실장 4 | 위베르 베드린 |
다음 비서실장 4 | 필리프 바스 |
개인 정보 | |
국적 | 프랑스 |
정당 | 공화국 연대 (2010년–현재) |
다른 정당 | 공화국을 위한 집회 (2002년 이전) 국민운동연합 (2002년–2010년) |
배우자 | 마리-로르 르 게 (1985년 결혼, 2011년 이혼) |
친척 | 그자비에 드 빌팽 (아버지) 필리프 르 게 (처남) |
자녀 | 3명 (마리 드 빌팽 포함) |
학력 | |
출신 학교 | 파리 정치 대학 국립행정학교 팡테옹-아사스 대학교 파리 제10대학교 |
직업 | 외교관, 공무원, 변호사, 작가 |
2. 생애
1953년 11월 14일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태어났다. 프랑스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고 1980년 프랑스 외무부에 들어가 워싱턴 D.C., 뉴델리 등에서 근무했다. 이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외교 분야 측근으로 활동하며 엘리제궁(대통령궁) 관방장관을 역임했다.
2002년 장피에르 라파랭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취임하여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비판에 "'프랑스는 낡은 나라이기 때문에 감히 반대한다'"라고 응수하며 드골주의 외교 노선을 견지했다. 이러한 행보는 국제적인 반전 여론과 맞물려 그를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부상시켰다.
2004년 내무장관을 거쳐 2005년 5월 31일 라파랭 총리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2005년 파리 교외 폭동, 초기 고용 계약(CPE) 논란, 클리어스트림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도미니크 드 빌팽은 1953년 11월 14일 모로코 라바트에서 태어났다.[6] 그의 가족은 베네수엘라에서 4년 동안 거주했으며, 이후 미국에서 살았다. 빌팽은 십대 시절 "'비트 세대' 운동과 히피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라고 회고했다.[6] 그는 잭 케루악 등 미국 시인들에게 영감을 받았다. 1971년 뉴욕 프랑스 학교를 졸업했다.[7]빌팽은 귀족 출신이 아니다. 그의 조상들은 가족 이름에 "드"라는 입자를 추가했다.[8] 그의 증조부는 프랑스 군대 대령이었고, 할아버지는 여러 회사 이사회 멤버였으며, 아버지 자비에르 드 빌팽은 외교관이자 상원 의원이었다. 빌팽은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빌팽은 마리(1986년생), 아서, 빅투아르(1989년생) 등 세 자녀를 두고 있다.
청소년 시절에는 아프리카, 뉴욕, 카라카스에서 보냈고, 귀국 후 툴루즈에 있는 예수회 계열 사립 리세에 다녔다. 바칼로레아 합격 후, 파리 10대학교, 파리 2대학교(파리대학교) 법학과를 거쳐, 1978년 파리정치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국립행정학교(ENA)에 입학했다.
2. 2. 외교관 경력
빌팽은 파리 정치대학(Institut d'Études Politiques de Paris)에서 공부한 후 프랑스의 최고 선발 공무원 양성 고등 교육기관인 국립행정학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에 진학했다. 파리 제2대학교(Panthéon-Assas)와 파리 제10대학교(Paris X Nanterre)에서 민법과 프랑스 문학 학위를 받았다. 학업을 마친 후 클레망소 항공모함에서 해군 장교로 복무한 후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주요 임무는 다음과 같다.기간 | 직책 | 근무지 |
---|---|---|
1980년–1984년 | 아프리카 문제 자문위원회 | 프랑스 |
1984년–1989년 | 1등 서기관(~1987년), 2등 서기관(1987년~) | 주미 프랑스 대사관 |
1989년–1992년 | 2등 서기관(~1990년), 1등 서기관(1990년~) | 주인도 프랑스 대사관 |
1992년–1993년 | 외무부 아프리카 담당 최고 자문관 | 프랑스 |
2005년 5월 31일, 유럽 헌법 비준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과반수를 넘어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가 사임하자, 도미니크 드 빌팽은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48]
3. 정치 경력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빌팽은 2005년 파리 교외 폭동 진압에 힘썼으나, 폭동의 발단이 된 프랑스 이민자 유족에게 사건 조사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동을 완전히 진압하지는 못했다. 2006년에는 청년 고용 대책인 「초기 고용 계약(CPE)」을 강행 처리하려 했으나, 이는 청년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전국적인 시위와 파업으로 이어졌다. 결국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이 법안을 사실상 철회하면서 빌팽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48]
클리어스트림 사건 연루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빌팽이 프랑스 외무장관 시절, 니콜라 사르코지의 스캔들(나중에 허위로 밝혀짐)을 정보 기관에 조사하도록 지시했다는 의혹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빌팽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었고, 2006년 4월 조사에서는 제5공화정 총리 중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다.[48]
결국 빌팽은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사르코지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48]
3. 1. 시라크와의 만남과 정치 입문
빌팽은 1980년대 초 자크 시라크를 만나 그의 외교 정책 자문관이 되었다. 1993년에는 에두아르 발라뒤르 내각의 외무장관이었던 알랭 쥐페의 비서실장이 되었는데, 쥐페는 시라크의 정치적 후계자였다.[1]
이후 빌팽은 시라크의 1995년 대통령 선거 성공에 기여하여 시라크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1995~2002) 동안 엘리제 궁의 사무총장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그는 대통령에게 1997년 조기 총선을 치를 것을 건의했는데, 당시 프랑스 국회는 대통령의 당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위험한 도박이었고, 시라크의 당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빌팽은 이후 시라크에게 사퇴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선거에 대한 빌팽의 잘못된 조언은 많은 우파 정치인들 사이에서 그가 기층 정치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가 없고, 시라크의 눈에 든 덕분에 부러울 만한 지위를 얻었다는 인식을 강화시켰다.[1]
빌팽은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는 과거 자신의 당 의원들에 대해 여러 차례 모욕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게다가 빌팽과 집권 여당인 인민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 사이의 상호 반감은 잘 알려져 있다.[1]
3. 2. 외무장관 시절 (2002-2004)
그는 2002년 시라크의 두 번째 임기 초에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 내각에서 시라크에 의해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2004년 아이티 쿠데타 당시 빌팽은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를 축출하려는 그의 시도에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의 지지를 얻었다.
빌팽이 시라크의 외무장관으로서 가장 유명한 업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프랑스가 침공에 반대한 독일, 벨기에, 러시아, 중국과 같은 국가들의 그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했다.[10] 그가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한 무력 사용을 허용하는 두 번째 결의안을 막기 위해 유엔에서 행한 연설은 큰 박수를 받았다.
2003년 중반 빌팽은 콜롬비아에서 FARC 반군에 의해 억류되었던 그의 제자인 잉그리드 베탕쿠르를 구출하려는 7월 14일 작전(Opération 14 juillet)을 조직했다. 이 작전은 실패했고, 그가 콜롬비아, 브라질 또는 시라크 대통령에게 임무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스캔들이 발생했다.
3. 3. 내무장관 시절 (2004-2005)
2004년 3월 31일, 니콜라 사르코지가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임명되는 내각 개편에서 빌팽은 그의 후임으로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1]
그의 급진적 이슬람에 대한 조치에는 무슬림 성직자들을 위한 의무 강좌, 특히 프랑스어(성직자들의 3분의 1이 프랑스어에 유창하지 못할 수 있다는 징후가 있었기 때문), 온건한 무슬림 신학, 프랑스 세속주의(''라이시테''), 공화주의 원칙 및 법률 등이 포함되었다.[1] 사르코지가 정교회가 지배하는 공식 기구인 프랑스 무슬림 신앙 협의회를 설립한 반면, 빌팽은 모스크 기반 대표자들이 세속적 무슬림들과 균형을 이루는 "무슬림 재단"을 선호했을 것이다.[1]
그는 또한 급진적인 무슬림 성직자들을 단속했는데, 고대 이슬람 경전에 따르면 간음한 사람들은 채찍질을 당하거나 돌에 맞아 죽을 수 있다고 언론에 말했다고 주장되는 이맘인 아브델카데르 부지안을 추방하려고 시도했을 때 소동을 일으켰다.[1] 리옹마그의 언론 보도가 편향되었다고 판단되어 법원이 그를 추방하기로 한 결정을 뒤집자, 빌팽은 의회를 통해 법률 개정을 추진했고 부지안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1]
3. 4. 프랑스 총리 (2005-2007)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경우 빌팽을 후계자로 고려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니콜라 사르코지가 중도우파 집권여당인 UMP의 대표로 선택되었다.
2005년 5월 31일, 유럽 헌법 비준 국민투표에서 반대표가 과반을 넘어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가 사임하자 빌팽이 후임 총리가 되었다.
빌팽은 외교 경험과 총리직에 따른 명성을 바탕으로 유럽 연합과 새로운 조약을 협상하고, 사르코지가 국내 정치를 담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다. 빌팽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고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상승했으며, 2007년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니콜라 사르코지는 대선에 대한 관심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빌팽과 사르코지는 초기에는 공개적인 갈등을 피했다.
2006년 9월 12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슬람 비판 발언으로 비난받은 후, 프랑스 작가 로베르 르데케르가 교황을 옹호하다 사망 위협을 받고 잠적했다. 빌팽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권리가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한에서"라고 말하며,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완전히 존중하도록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가"라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밝혔다.[11]
3. 4. 1. 주요 정책 및 사건
2005년 5월 29일, 프랑스 유권자들은 국민투표에서 유럽헌법을 큰 차이로 거부했다. 이틀 후 라파랭 총리는 사임했고,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빌팽을 프랑스 총리로 임명했다.[11] 시라크 대통령은 전국 연설에서 새 내각의 최우선 과제는 10%를 웃도는 실업률 억제이며, 이를 위해 "국가적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빌팽 내각은 구성원이 적고 계층적 통일성을 특징으로 했다. 모든 구성원이 장관급이었고, 가장 낮은 내각 직급인 국무장관은 없었다. 이는 내각이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긴밀하고 효율적인 팀을 구성하기 위함이었다.
빌팽 총리는 국민의 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내각 임명 후 100일 이내에 이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제는 부진하게 성장했고 실업률은 크게 감소하지 않았다. 또 다른 문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국민투표로 부결된 유럽 헌법이었다.
2006년 노동 쟁의는 빌팽 내각에게 큰 시련이었다. 빌팽 총리는 2005년 8월 중소기업을 위한 새로운 유형의 근로 계약(CNE)을 설정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2006년 1월에는 젊은이들(26세 미만)을 위한 최초 고용 계약(CPE)을 발표했고, 의회는 2월에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이는 학생들의 시위를 불러왔고, 결국 정부는 CPE의 핵심 내용을 폐지하는 새로운 법적 조치를 시작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빌팽 총리는 완고하고 오만한 것으로 인식되어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고, 2007년 대선 후보로 더 이상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2005년 파리 교외 폭동에서 빌팽 내각은 폭동 진압을 위해 노력했으나, 폭동의 발단이 된 경찰의 감전사로 사망한 프랑스 이민자 유족에게 사건 조사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폭동 진압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6년 6월 20일, 국회에서 빌팽 총리는 사회당 대표 프랑수아 올랑드를 비겁하다고 비난했다.[14] 올랑드는 총리에게 항공우주 회사 EADS와 경영진 노엘 포르자르가 연루된 "내부자 거래" 스캔들에 대해 질문했고, 이는 국회에서 큰 사건으로 이어졌다. 올랑드는 사과와 총리의 사퇴를 요구했고,[15] 다음 날 빌팽 총리는 사과했다. 이 사건은 UMP 내에서도 비판을 불러왔으며, 일부 UMP 의원들은 시라크 대통령이 다른 총리를 임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6]
클리어스트림 사건은 빌팽 총리에게 또 다른 타격을 입혔다. 프랑스 외무장관 시절 니콜라 사르코지의 스캔들(후에 허위로 판명)을 정보 기관에 조사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궁지에 몰렸다.
빌팽 총리는 한때 사르코지와 함께 우파 세력의 유력한 시라크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총리 재임 중 두 차례나 대규모 폭동을 초래하면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고, 2006년 4월 조사에서는 제5공화정 총리 중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다.[48] 결국 2007년 3월, 빌팽은 사르코지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3. 4. 2. 총리직 사임
2006년,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는 청년 고용 대책인 '초기 고용 계약(CPE)'을 강행 처리했지만, 이는 청년들의 거센 반발과 전국적인 시위 및 파업으로 이어졌다. 이 법안은 26세 이하 청년을 고용 후 2년 안에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고용 불안을 심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국민운동연합 당수가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빌팽 총리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4월 10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초기 고용 계약을 사실상 철회하면서 빌팽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3]
클리어스트림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빌팽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이 사건은 빌팽이 프랑스 외무장관 시절, 사르코지의 스캔들(나중에 허위로 밝혀짐)을 정보 기관에 조사하도록 지시했다는 의혹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빌팽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되었고, 2006년 4월 조사에서는 제5공화정 총리 중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다.[48] 결국 2007년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사르코지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3. 5. 총리 퇴임 이후
2007년 5월 15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날, 빌팽은 총리직 사임을 제출했고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21] 이틀 후 프랑수아 피용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2007년 7월, 사르코지 정권 출범 이후 "클리어스트림 사건"으로 기소되어 2009년 9월부터 공판이 진행되었다. 같은 해 10월, 검찰로부터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벌금 45000EUR를 구형받았으나, 2010년 1월 28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49]
2010년 6월,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를 목표로 중도우파 신당 "공화국 연대"를 창당했으나, 입후보에 필요한 추천인을 모으지 못해 출마를 포기했다.[50]
4. 논란 및 비판
도미니크 드 빌팽은 여러 논란 및 비판에 직면해 왔다. 주요 논란으로는 클리어스트림 사건과 엘리트주의 및 기득권 비판 등이 있다.
4. 1. 클리어스트림 사건
2004년, 프랑스 판사들은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명단을 받았다. 이 명단에는 1991년 대만으로의 무기 판매에서 나온 뒷돈을 룩셈부르크의 사설 은행인 클리어스트림의 비밀 계좌에 예치했다고 주장된 정치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명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당시 집권 여당인 UMP 내에서 빌팽의 라이벌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였다. 이 명단은 나중에 위조된 것으로 드러났고, 빌팽은 두 사람이 당내 지배력을 놓고 경쟁하던 시기에 15개월 동안 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았다.[17] 한편, 명단의 출처는 나중에 빌팽의 오랜 측근이자 EADS의 임원인 장-루이 제르고랭으로 밝혀졌다. 비평가들은 빌팽이 당시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의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는 가운데 라이벌을 중상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사르코지는 클리어스트림 명단 작성 배후에 있는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빌팽은 결국 2010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18]2007년 7월, 사르코지 정권 출범 이후 앞서 언급된 "클리어스트림 사건"으로 기소되어 2009년 9월부터 공판이 진행되었다. 같은 해 10월, 검찰로부터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벌금 45000EUR를 구형받았으나, 2010년 1월 28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49]
4. 2. 엘리트주의 및 기득권 비판
빌팽은 선출직 공직을 역임한 적이 없다. 프랑스 헌법은 대통령이 비선출직 장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는 그에게 정치적 약점이 되는데, 그는 정기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선출된 공직자들을 멸시하며, 국회의원들을 "connards"(멍청이들)라고 부른다고 알려져 있다. 빌팽은 비선출직 총리가 된 첫 번째 인물이 아니다. 비교적 짧은 프랑스 제5공화국 역사에서도 그러하다. 주목할 만한 전임자로는 취임 전 은행가였던 조르주 퐁피두와, 이전에 교수 및 임명직 공무원으로 일했고 총리직 이후에야 선출직 경력을 시작한 레이몽 바르가 있다.5. 저서
- 2001년: 《백일 전쟁, 희생의 정신》(Cent jours ou l'Esprit de sacrifice|백일 전쟁, 희생의 정신프랑스어) (Librairie Académique Perrin, 2001 – Le Grand livre du mois, 2001 – Perrin, 2002 – Éditions France loisirs, 2003). 엘바 섬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1세와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 사이의 백일에 관한 책이다. 나폴레옹 재단의 그랑프리 디스투아르(2001)와 쁘리 데 암바사되르(2001)를 수상했다.
- 2002년: 《가고일의 외침》(Le Cri de la gargouille|가고일의 외침프랑스어) (Éditions Albin Michel, 2002. Librairie générale française, 2003). 프랑스 정치에 대한 "명상"으로, 프랑스 정치적 성격의 다양한 측면을 분석했다.
- 2003년: 《불의 도둑 찬사》(Éloge des voleurs de feu|불의 도둑 찬사프랑스어) (NRF-Gallimard, 2003). 영어 제목은 ''On Poetry''이며, 시에 대한 몇 가지 반성을 담고 있다. 빌팽은 프랑스가 2003년 이라크 전쟁의 승인을 성공적으로 막은 유엔 회의 중에 최종 초고를 작업했다고 한다.
- 2003년: 《다른 세상》(Un autre monde|다른 세상프랑스어) (l'Herne, 2003). 스탠리 호프만 서문. 번역 제목은 ''Toward a new world: speeches, essays, and interviews on the war in Iraq, the UN, and the changing face of Europe'' (Melville House Publishing, c2004)이다. 외무장관으로서의 빌팽의 연설을 선정하여 수전 손탁, 카를로스 푸엔테스, 노먼 메일러, 레지 드브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등의 해설을 곁들였다.
- 2003년: 《모험가들의 세계 1866–1914: 초기 사진가 시대의 위대한 프랑스 탐험가들》(L'Homme européen|유럽인프랑스어) (L'Iconoclaste, 2003) 서문, 공동 저술.
- 2004년: 《파쇼다에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의 안탄트 코르디알: 외무부 기록 보관소에서》(L'Entente cordiale de Fachoda à la Grande Guerre : Dans les archives du Quai d'Orsay|파쇼다에서 제1차 세계 대전까지의 안탄트 코르디알: 외무부 기록 보관소에서프랑스어) (Éditions Complexe, 2004) 모리스 바이스 저, 서문.
- 2004년: 잭 스트로와 함께 《세기의 안탄트 코르디알》(Le Centenaire de l'Entente cordiale|세기의 안탄트 코르디알프랑스어) (Odile Jacob, 2004)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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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메디 콧비: 글쓰기의 여정》(Mehdi Qotbi : parcours d'écriture|메디 콧비: 글쓰기의 여정프랑스어) (파리: Somogy, 2004 – 파리: Somogy, 2005) 서문. "프랑스 북부 연구소와 아티자리와파 은행이 공동으로 주최한 전시회를 기념하여 출판, 탕헤르 프랑스 북부 연구소의 델라크루아 갤러리에서 2004년 6월 25일부터 9월 5일까지, 카사블랑카 아티자리와파 은행의 에스파스 다르 악투아에서 2004년 10월~12월 전시" 되었다. 빌팽은 마그레브와 제3세계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다.
- 2004년: 《상어와 갈매기》(Le requin et la mouette|상어와 갈매기프랑스어) (Plon: A. Michel, 2004), 에세이.
- 2005년: 장-클로드 알랭, 프랑수아즈 오트랑, 뤼시앵 벨리와 함께 《프랑스 외교사》(Histoire de la diplomatie française|프랑스 외교사프랑스어) (Perrin, 2005).
- 2005년: 호르헤 셈프룬과 함께 《유럽인》(L'Homme européen|유럽인프랑스어) (Plon, 2005 – Perrin, 2005년 10월). 유럽 헌법 조약을 지지하는 소책자.
- 2005년: 《시의 긴급 상황》(Urgence de la poésie|시의 긴급 상황프랑스어) (카사블랑카: 모로코 시 문학관, 2005년 7월) 모하메드 베니스 아랍어 번역, 메디 콧비 삽화. 빌팽 자신의 세 편의 시 "야만인의 만가", "장자의 권리", "분리" 포함.
- 2006년: 참고문헌[43] ''The Globalist'', 2006년 3월 3일.
- 2016년: 《전시를 위한 평화의 기억》(Mémoire de paix pour temps de guerre|전시를 위한 평화의 기억프랑스어) (파리: 그라세).
6. 사생활
빌팽은 모로코의 라바트에서 태어났으며, 가족과 함께 4년 동안 베네수엘라에서 거주했다. 이후 미국에서 생활하며 "미국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십대 시절에는 "'비트 세대' 운동과 히피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으며, 잭 케루악 등 미국 시인들에게 영감을 받았다.[6] 1971년 뉴욕 프랑스 학교를 졸업했다.[7] 슬하에 마리(1986년생), 아서, 빅투아르(1989년생) 세 자녀를 두고 있다.
빌팽은 귀족 출신이 아니다. 그의 조상들이 가족 이름에 "드"라는 입자를 추가했다.[8] 그의 증조부는 프랑스 군대의 대령이었고, 할아버지는 여러 회사의 이사회 멤버였으며, 아버지 자비에르 드 빌팽은 외교관이자 상원 의원이었다. 빌팽은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2010년 영국의 ''인디펜던트''지는 빌팽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프랑스어의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음조로 가득 찬" 조사를 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어머니의 프랑스의 위대함과 운명에 대한 열정적인 믿음과, 암묵적으로, 그의 아들의 위대함과 운명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한 조문객은 그가 "프랑스와 자신이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9]
빌팽은 미국 여행을 즐기며, 66번 국도는 미국의 "광활한 공간"을 보여주며 "꿈과 기회"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감의 원천이라고 덧붙였다.[6]
2022년부터 빌팽은 파리 에투알 광장 근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미술품 소장품에는 안젤름 키퍼, 미켈 바르셀로, 자오 우키, 얀 페이밍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37]
2006년 10월, 장녀 마리(Marie, 마리)가 본명을 숨기고 지방시(Givenchy)의 신작 향수 오디션에 합격해 화제가 되었다. 도미니크는 딸의 모델 활동을 크게 반대했으며, 현재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51]
7. 어록
- "전쟁이라는 선택지는 우선 가장 빠른 방법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평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라크 관련 프랑스 연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2003년 2월 14일, 미국 주도 이라크 침공 직전)[38]
-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더불어 어두운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환영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라크에서 평화를 건설해야 하며, 프랑스에게 있어 이는 유엔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지역 전체에서 평화를 건설해야 하며, 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을 위한 단호한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39]
- "첫 번째 진실을 선언할 용기를 갖읍시다. 국제법은 점령할 권리, 더 나아가 학살할 권리를 보장하는 안보 권리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평화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는 모든 국민에게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이 오늘날 추구하는 안보는 평화와 팔레스타인 국민에 반하는 것입니다."[40]
8.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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