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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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청은행은 1894년 러불동맹 체결 이후 청나라가 일본에 지불해야 했던 배상금 마련을 위해 설립된 은행이다. 러시아와 프랑스 자본이 참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본점을 두고, 청나라와의 상거래 결제, 동청철도 건설 등을 지원했다. 1907년 공황과 러일 전쟁의 영향으로 경영 위기를 겪었으며, 이후 북방 은행과 합병하여 러아은행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국유화 과정을 거쳐 1926년 청산되었다. 러청은행의 역사는 제국주의 시대 경제 침탈의 사례를 보여주며, 자주적인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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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청은행 - [회사]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은행명 | 러중 은행 |
| 원어명 | langx: ru text: Русско-Китайский банк (루스스코-키타이스키이 방크) langx: fr text: Banque russo-chinoise (방크 루소-시노아즈) langx: zh text: 華俄銀行 (화어 은행) |
| 설립 | |
| 설립 연도 | 1895년 |
| 해산 | 1910년 |
| 본사 | |
| 위치 | 상트페테르부르크 |
| 주요 인물 | |
| 설립자 | 세르게이 비테 |
| 모기업 | |
| 모기업 |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 상업 은행 |
| 후신 | |
| 후신 | 북방은행 |
| 참고 | |
| 관련 링크 | lang: ru text: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 상업 은행 |
2. 설립 배경 및 초기 역사

1894년 러불동맹 체결 이후, 제1차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1895)에 따라 일본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배상금 마련을 위해 청나라가 러시아와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관련 금융 업무를 전담할 은행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러청은행이 설립되었다.[1][7] 은행 설립의 공식적인 목적은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상거래 결제 지원 및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중국 내 연장선 격인 동청철도 건설 자금 조달 등이었다.
은행 설립 결정은 1895년 말에 이루어졌으며,[1] 창업 자본금은 600만러시아 루블이었다.[15] 초기 자본은 프랑스계 은행 컨소시엄(파리-네덜란드 은행 주도)과 러시아계 자본이 공동으로 출자하는 형태였으나,[3][4][5][35] 은행 정관상 주요 업무에 러시아 재무장관의 승인이 필요하도록 규정되어 초기부터 러시아 정부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15][35] 이사회는 파리에 두었지만, 법적 본점 및 실제 운영 본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했다.[6]
러청은행은 1896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업을 시작하여[7] 곧이어 상하이에 지점을 개설하는 등 빠르게 활동을 개시했다.[8] 특히 1896년 9월 청나라와 동청철도 부설 협약을 맺고, 철도 건설 및 운영을 위한 자금 조달과 관리를 주도했다.[16][7] 이 과정에서 청나라 정부가 직접 자본을 출자하여 철도 경영에 참여한 것은 외국계 기업에 대한 이례적인 투자 사례였다.[7] 이후 러청은행은 러시아 제국 국립 은행의 증자 참여 등으로 러시아 측 지배력이 더욱 강화되었으며,[18][7] 프랑스계 자본이 후원하는 인도차이나 은행과 중국 시장에서 경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5]
일본에도 나가사키를 시작으로 요코하마, 고베에 지점을 개설했으나,[20]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내 모든 지점을 폐쇄했다.[21] 전쟁 후 요코하마와 고베 지점은 재개했지만, 나가사키 지점은 끝내 다시 열지 못했다.[22] 초기에는 빠른 성장세를 보였으나, 1903년 극동 지점의 방만 경영 문제가 드러나고,[22] 러일전쟁 중에도 높은 배당을 실시하는 등 불안정한 경영을 보이다가 1907년 공황을 맞아 경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2. 1. 시모노세키 조약과 청나라의 재정 위기
시모노세키 조약 (1895) 체결로 청나라는 제1차 청일 전쟁을 종결하면서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배상금 마련을 위해 청나라 정부는 차관 발행을 추진했고, 프랑스와 러시아가 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은 배상금 관련 대출을 전문적으로 처리할 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1][7]러청은행 설립 결정은 1895년 12월 5일 파리의 러시아 대사관에서 이루어졌으며,[1] 이는 러시아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와 프랑스 외교관 오귀스트 제라르의 공동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2] 은행의 초기 자본금은 600만러시아 루블이었다.[15] 이 중 5/8(약 62.5%)는 파리-네덜란드 은행(BNP 파리바의 전신 중 하나)이 주도하는 프랑스 자본이 차지했으며, 크레디 리요네, 파리 국립 할인 은행(Comptoir national d'escompte de Paris), 오탱거 은행 등도 출자에 참여했다.[3][4][5][15] 나머지 3/8(약 37.5%)은 러시아 측 주주들이 납입했다.[3][15] 이사회는 파리에서 열렸으나, 법적 본점 및 실제 운영 본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두었다.[6] 은행은 1896년 1월 2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식적으로 영업을 시작했으며,[7] 정관에 따라 은행 업무의 상당 부분은 러시아 재무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15]
은행은 설립 직후인 1896년 2월 상하이에 지점을 개설하며 중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8] 같은 해 9월 8일[16], 청나라의 쉬징청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청 철도 부설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러청은행은 이 철도 회사에 자본금 500만러시아 루블 전액을 출자하여 철도 건설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에 청나라 정부도 철도 경영 참여를 위해 500만 쿠핑은(庫平銀)을 러청은행에 출자했고, 같은 해 말 전액 납입을 완료했다. 이는 청나라가 외국 기업의 자본에 직접 참여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된다.[7] 청나라의 출자 이후 은행의 자본금은 900만러시아 루블, 준비금은 28만러시아 루블, 총자산은 3882만러시아 루블로 증가했으며, 지점은 국내외 18개로 늘어났다.[17] 중국에서는 이 은행을 '화아도승은행'(華俄道勝銀行|화아도승은행중국어)이라고 불렀다.[9][8] 러청은행은 1898년 징한선(京漢線, 베이징-한커우) 건설 계약과 부설 차관에 관련된 벨기에 자본 및 채권을 예탁받는 등 청나라의 주요 금융 거래를 담당했다.[17]
1898년 6월, 은행은 1만 2000주의 증자를 결정했고, 이는 러시아 제국 국립 은행이 전량 인수했다.[18][7] 이로 인해 러시아 측의 지분이 강화되었고, 1900년 6월 기준으로 러시아 측이 40%, 프랑스 측이 20%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다.[19] 초기 프랑스 측 출자자였던 소시에테 제네랄과 크레디 리요네는 이 과정에서 이탈했으며, 대신 이홍장, 호프 상회(Hope & Co.), 디스콘토 게젤샤프트 등 독일계 개인 은행들이 새로운 주주로 참여했다.[19] 점차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프랑스 주주들은 소외되었고, 은행 경영은 러시아의 이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7][5] 초기에는 프랑스가 후원하는 인도차이나 은행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양쯔강 이북 지역에 활동을 집중했으나, 점차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다.[5] 1902년까지 러청은행은 중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으로 성장했으며,[8] 러시아 제국 전체에서는 다섯 번째 규모의 민간 은행이 되었다.[10]
2. 2. 러불동맹과 차관 제공
1894년 러불동맹이 체결된 후, 청나라는 제1차 청일 전쟁을 종결시킨 시모노세키 조약(1895)에 따라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1][7] 이 배상금 마련을 위해 청나라 정부가 차관 발행을 추진하자, 프랑스와 러시아는 이에 참여하여 차관을 인수했다.[1][7] 이 과정에서 해당 차관 업무를 전담할 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는 러청은행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7]
러청은행 설립 결정은 1895년 12월 5일 파리의 러시아 대사관에서 이루어졌으며,[1] 러시아 재무 장관 세르게이 비테와 프랑스 외교관 Auguste Gérard|오귀스트 제라르프랑스어가 공동으로 제안했다.[2] 은행 설립의 공식적인 목적은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상거래 결제 지원 및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자금 조달 등이었다. 창업 자본금은 600만러시아 루블으로 책정되었다. 초기 자본금 중 37.5%(3/8)는 러시아 주주들이 디스콘토 게젤샤프트(Disconto-Gesellschaft)를 통해 납입했고,[15] 나머지 62.5%(5/8)는 파리-네덜란드 은행(Banque de Paris et des Pays-Bas, 파리바)이 주도하는 프랑스 자본으로 충당되었다.[3][4][5] 프랑스 측 출자단에는 크레디 리오네(Crédit Lyonnais), 파리 국립 할인 은행(Comptoir national d'escompte de Paris), 오탱거 은행(Hottinguer & Cie) 등 주요 프랑스 은행들과[3][4][5] 벨기에의 소시에테 제네랄(Société Générale de Belgique)도 참여했다.[15][35]
은행의 이사회는 파리에서 열렸지만, 법적 본점과 실제 운영 본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두었다.[6] 또한 정관에 따라 은행 업무의 상당 부분이 러시아 재무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어,[15][35] 초기 자본 구조와 관계없이 실제 운영에서는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러청은행은 1896년 1월 2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식적으로 영업을 시작했으며,[7] 곧이어 같은 해 2월 상하이에 첫 지점을 열었다.[8] 중국에서는 이 은행을 '화아도승은행'(중국어 정체자: 華俄道勝銀行, Huá-É Dàoshèng Yínháng)이라고 불렀다.[9][8]
1896년 9월 8일, 러청은행은 청나라 대표 쉬징청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청 철도 부설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16] 이 협약에 따라 러청은행은 자본금 500만러시아 루블을 전액 출자하여 동청 철도 회사를 설립하고 건설을 주관하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 정부 역시 철도 경영에 참여하기 위해 500만 고평은(庫平銀)을 러청은행에 출자하여 같은 해 말까지 전액 납입했다.[17] 이는 외국 기업의 자본에 청나라가 직접 참여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된다.[7] 청나라의 참여 이후 러청은행의 자본금은 900만러시아 루블으로 증가했다.[17]
2. 3. 동청철도 건설과 러청은행의 역할
1894년 러불동맹이 체결되고, 제1차 청일전쟁 패배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른 배상금 지불 문제로 청나라가 차관을 모색하자 러시아-프랑스 은행단이 이를 인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상거래 결제 및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계될 동청철도 건설 지원 등을 목적으로 러청은행이 설립되었다.[1][7]
러청은행 설립은 1895년 12월 파리에서 결정되었으며,[1] 초기 자본금은 600만 루블이었다. 이 중 프랑스계 은행(파리-네덜란드 은행, 크레디 리오네, 파리 국립 할부 은행, 오탱거 은행 등)과 벨기에 소시에테 제네랄 등이 5/8을, 러시아계 은행(디스콩트 게젤샤프트를 통해)이 3/8을 출자했다.[35][3][4][5] 그러나 출자 비율과 관계없이 은행 정관은 주요 업무 수행 시 러시아 재무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하여, 초기부터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15] 법적 소재지와 집행 경영 본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두었다.[6]
동청철도 건설은 러청은행의 핵심 사업 중 하나였다. 1896년 9월 8일, 청나라 대표 허경징(쉬징청)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측과 동청철도 부설 및 운영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16] 이 협약에 따라 러청은행은 자본금 500만 루블을 전액 출자하여 '중국 동부 철도 회사'를 설립하고 철도 건설 및 경영을 주관하게 되었다.[7] 한편, 청나라는 철도 경영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500만 庫平銀(쿠핑 인, Kuping tael)을 러청은행에 출자했으며, 이는 외국 기업 자본에 청나라 정부가 직접 참여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된다.[7] 이 자금 납입 후 러청은행의 자본금은 증대되었다.
러시아는 러청은행을 통해 동청철도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1898년 6월, 1만 2000주의 증자를 단행했을 때 러시아 제국 국립 은행이 이를 전량 인수했다.[18][7] 이로써 1900년 6월 기준 러시아 측 지분은 40%에 달하며 프랑스 측(20%)을 압도하게 되었다.[19] 이러한 러시아의 주도 하에 러청은행은 프랑스 자본 중심의 인도차이나 은행과 중국 시장을 분할하며 경쟁하는 한편, 초기에는 양쯔강 이북 지역에 집중했던 활동 범위를 점차 남쪽으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5]
또한 러청은행은 1898년 경광선 부설 차관 계약과 관련하여 벨기에 자본 및 채권을 관리하는 등, 동청철도 외에도 청나라의 주요 금융 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러시아의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3. 러청은행의 발전과 경영 위기
러불동맹(1894년) 체결 이후, 청나라가 시모노세키 조약의 배상금 지불을 위해 차관을 모집하자 러시아-프랑스 은행단이 이를 인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설립된 러청은행은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상거래 결제 지원 및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 지원 등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600만러시아 루블이었다. 이 중 5/8은 프랑스의 오탕게르 은행 등과 벨기에의 소시에테 제네랄이 출자했고, 나머지 3/8은 디스콩트 게젤샤프트를 통해 러시아계 은행들이 납부했다.[15][35] 파리바와 크레디 리요네 역시 프랑스 측 출자단에 참여했다. 출자 비율과 관계없이, 은행 정관에 따라 주요 업무 수행 시 러시아 재무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1896년 9월 8일, 러청은행은 쉬징청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청철도 부설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16] 러청은행은 이 철도 회사에 자본금 500만러시아 루블을 전액 출자하여 건설을 주도했으며, 청나라 역시 철도 경영 참여를 위해 500만 냥(庫平銀)을 출자했다.[17] 청나라의 참여 이후 자본금은 900만러시아 루블으로 증가하고 국내외 지점은 18개로 늘어났다. 1898년에는 경광선 부설과 관련된 벨기에 자본 및 채권을 예탁받아 청나라의 금융 거래를 대행하기도 했다.
1898년 6월, 1만 2000주의 증자를 결정했고, 이는 러시아 제국 국립 은행이 전량 인수했다.[18] 이로 인해 러시아 측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1900년 6월에는 러시아 측 지분이 40%에 달했고, 프랑스 측 지분은 20%로 감소했다.[19] 이 과정에서 기존 프랑스 출자자였던 소시에테 제네랄과 크레디 리요네는 이탈했으며, 대신 이홍장, 호프 앤 컴퍼니, 디스콩트 게젤샤프트 등 독일 개인 은행들이 새로운 주주로 참여했다. 러시아 측의 주도 하에 러청은행은 같은 파리바 계열의 인도차이나 은행과 중국 시장에서 경쟁을 벌였다.
사업 확장의 일환으로 러청은행은 일본의 나가사키에 이어 요코하마와 고베에도 지점을 개설했다.[20]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1903년 극동 지점의 방만한 경영 실태가 드러나는 등 내부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러일전쟁 중에도 높은 배당을 실시했지만, 1907년 공황이 닥치자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3. 1. 사업 확장과 지점 개설
러청은행은 1896년 2월 상하이에 지점을 열며 사업 확장을 본격화했다.[8] 같은 해 8월 28일에는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여 동청철도 건설 지원 계약을 체결했으며, 러시아 제국 정부로부터 프로젝트 자금을 조달하고 청나라 당국으로부터 자본 투자를 유치했다. 이는 청나라가 외국 기업의 자본에 직접 참여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었다.[7] 이러한 활동을 통해 러청은행은 중국 내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키워 나갔으며, 1902년에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으로 성장했다.[8] 중국에서는 이 은행을 '화아도승은행'(중국어 정체자: 華俄道勝銀行)이라고 불렀다.[9][8]러청은행의 확장은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에 처음 지점을 개설한 후 요코하마와 고베에도 지점을 열었다. 당시 지점 자본금은 나가사키가 5만엔, 요코하마와 고베는 각각 20만엔이었다.[20]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내 모든 지점을 폐쇄했다.[21] 전쟁이 끝난 후인 1905년 12월 요코하마 지점을 재개했고, 1920년에는 고베 지점도 재개했다. 하지만 나가사키 지점은 끝내 재개하지 못하고, 현지 상업 회사인 홈 링거 상회(Holme Ringer and Co.)에 대리점 업무를 위탁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22]
일본 외에도 1904년 2월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유일한 지점을 개설했지만, 이 지점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11] 러일전쟁 종결(1905년) 이후, 은행은 중국 본토에서의 사업 규모를 축소하고, 주로 북부 만주, 중앙아시아,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의 활동에 집중했다.[2] 일본이 관동주를 점령하면서 다롄의 중산 광장에 위치한 지점을 폐쇄해야 했다.[12]
1907년까지 러청은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본점 외에 전 세계적으로 47개의 지점을 운영했다.[13] 당시 주요 지점은 다음과 같다.
| 지역 | 주요 지점 도시 |
|---|---|
| 러시아 제국 (유럽) | 모스크바, 바투미 |
| 러시아령 투르케스탄 | 아시가바트, 부하라, 코칸트, 마르길란,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베르니(알마티) |
| 시베리아 및 러시아 극동 | 비스크, 블라고베시첸스크, 보다이보, 치타, 이르쿠츠크, 하바롭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캬흐타, 니콜라예프스크, 스레텐스크, 베르흐네우딘스크(울란우데), 블라디보스토크, 제야 |
| 몽골 | 울리아스타이, 우르가(울란바토르) |
| 중국령 투르케스탄 (신장) | 추구차크(타청), 굴자(이닝), 카슈가르 |
| 내몽골 | 하이라얼, 장자커우 |
| 만주 | 하얼빈, 지린, 관청(창춘시 일부), 치치하얼 |
| 중국 본토 | 베이징, 옌타이, 한커우(우한 일부), 홍콩, 잉커우, 상하이, 톈진 |
| 일본 | 하코다테, 고베, 요코하마 |
| 기타 | 캘커타, 런던, 파리, 샌프란시스코 |


3. 2. 경영 위기와 합병 시도
오리엔탈 뱅크를 연상시키는 경영 확장을 보이던 러청 은행은 1903년 극동 지점의 방만한 경영 실태가 시찰을 통해 드러나는 등 내부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러일 전쟁 중에도 10%에 가까운 배당을 실시할 정도로 외형적인 이익을 기록했지만, 1907년 공황의 여파로 결국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자체적인 위기 극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러청 은행은 다른 은행과의 합병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도는 시베리아 상업은행과의 합병이었다. 1909년 당시 시베리아 상업은행의 은행장은 은행 창설자의 아들이면서 과거 러청 은행에서 회계 담당자로 근무했던 인물이었기에, 러청 은행은 이러한 인맥을 활용하고자 했다.[24] 시베리아 상업은행은 1872년 6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자본금 240만러시아 루블으로 설립되었으며, 꾸준한 증자를 통해 1909년 1월에는 자본금 1000만러시아 루블, 적립금 500만러시아 루블, 특별 적립금 130만러시아 루블 규모의 건실한 은행으로 성장해 있었다.[23] 주요 주주로는 도이치 은행이 있었고, 의결권은 독일계 유대 자본이 상당 부분 확보하고 있었다.[24] 그러나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는지, 1909년 10월 시베리아 상업은행과의 합병 논의는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시베리아 상업은행과의 합병이 무산된 직후인 다음 달부터는 북방은행(Banque de Nord, Северный банкru)과의 합병 논의가 시작되었다. 북방은행은 프랑스의 주요 은행인 소시에테 제네랄의 러시아 자회사 격으로, 1901년 9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본금 500만러시아 루블으로 설립되었다.[26] 파리바와 파리 연합 은행의 지원을 받아 1906년에는 자본금을 두 배로 증자했으며, 러시아 웨스팅하우스가 수주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전철 부설 사업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09년까지 러시아 제국 내 주요 도시와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광범위한 지역에 49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다.[27][28]
결국 1910년 8월, 러청 은행은 북방은행과의 합병에 성공하여 새로운 은행인 러아시아 은행(Русско-Азиатский банкru)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29]
4. 러아은행으로의 재탄생
경영 위기에 직면한 러청은행은 자력 회생이 어려워지자 다른 은행과의 합병을 모색했다. 처음 시도했던 시베리아 상업은행과의 합병은 무산되었으나[24], 이후 프랑스계 은행인 북방은행과의 합병을 추진하여 1910년 8월 러아은행(Русско-Азиатский банк|루스코-아지아츠키 반크ru)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25][26][29]
새롭게 탄생한 러아은행은 형식적으로 러시아와 프랑스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형태였으나, 실질적인 경영권은 프랑스 자본, 특히 소시에테 제네랄이 장악하였다.[25][29] 러아은행은 프랑스 자본의 영향력 아래 러시아 군수 산업[30] 및 자원 개발 분야[31]에서 사업을 확장하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1917년 말 국유화되었으며,[32] 이후 혼란한 정세 속에서 프랑스 자본은 권익 보호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동청철도 경영권 문제[33] 등으로 인한 재정 악화와 뱅크런 사태를 겪은 끝에 1926년 최종적으로 청산되었다.[34]
4. 1. 북방은행과의 합병
경영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기 어려웠던 러청은행은 다른 은행과의 합병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처음에는 시베리아 상업은행과의 합병이 검토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1909년 당시 시베리아 상업은행장은 은행 설립자의 아들이었지만, 과거 러청은행에서 재무를 담당했던 인연이 있었다.[24] 러청은행은 이러한 인맥을 통해 합병을 추진하려 했다. 시베리아 상업은행은 1872년 6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자본금 240만 루블로 설립되었고, 여러 차례 증자를 거쳐 1909년 1월에는 자본금이 1000만 루블에 달했다. 신주 발행 시 발생한 프리미엄으로 조성된 적립금도 500만 루블이 있었으며, 별도의 특별 적립금도 130만 루블이나 보유하고 있었다.[23] 주요 주주는 도이치 은행이었고, 의결권은 독일계 유대인 자본이 장악하고 있었다.[24] 그러나 1909년 10월, 시베리아 상업은행과의 합병 논의는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이에 러청은행은 다음 달인 11월부터 북방은행(Banque de Nord, 러시아어: Северный банк|세베르니 반크ru)과의 합병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북방은행은 프랑스의 주요 은행인 소시에테 제네랄의 러시아 자회사였다. 설립 초기 경영위원회에는 러시아인이 다수 참여했지만, 이사회는 소시에테 제네랄의 통제하에 있었다.[25] 북방은행은 1901년 9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본금 500만 루블로 설립되었으며[26], 파리바와 프랑스의 파리 연합 은행의 도움을 받아 1906년에는 자본금을 두 배로 늘렸다. 같은 해에는 러시아 웨스팅하우스가 진행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차 부설 사업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09년까지 북방은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변 지역을 포함하여 남쪽의 현재 우즈베키스탄[28],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광범위한 지역에 49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다.[27]
1910년 8월, 러청은행은 북방은행과 성공적으로 합병하여 러아은행(Русско-Азиатский банк|루스코-아지아츠키 반크ru)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합병 은행의 임원직은 러시아와 프랑스 측이 거의 절반씩 나누어 맡았지만, 실질적인 주요 직책은 프랑스 측 인사들이 차지했다.[29] 러아은행은 합병 이후 러시아 군수 산업의 핵심 기업들을 차례로 지배하에 두었으며[30], 바쿠 유전의 석유 회사, 시베리아의 금광 회사 등을 주요 고객으로 확보하며 사업 영역을 넓혀나갔다. 1911년에는 렌스키 금광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고, 기존에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긴츠부르크 상회와 신디케이트를 구성하여 주식을 나누어 가졌다. 이후 러아은행은 페테르부르크 국제은행과 함께 렌스키 금광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31]
4. 2. 합병 이후의 변화
1910년 8월, 북방은행과 합병하여 러아은행(Русско-Азиатский банк|루스코-아지아츠키 반크ru)이 되었다. 임원은 자리를 러시아와 프랑스 측이 거의 절반씩 나누어 가졌지만, 중요한 자리는 프랑스 세력이 차지했다.[29] 합병 이후 러아은행은 러시아 군사 산업의 핵심 부분을 차례차례 지배하에 두었으며,[30] 고객으로 바쿠 유전의 석유 회사나 시베리아의 금광 회사 등을 확보하며 폭넓은 영업을 전개했다. 1911년에는 렌스키 금광 회사의 주식을 구입하고, 기존 경영에 참여하던 긴츠부르크 상회와 신디케이트를 결성하여 주식을 분할했다. 이후 러아은행은 페테르부르크 국제은행과 함께 렌스키 금광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했다.[31]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은행의 지점들은 정리 통합되었다. 1917년 12월 법령에 따라 러아은행은 약 2개월에 걸쳐 국유화되어 국립 은행에 편입되었다. 이는 페테르부르크 국제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러아은행 자본금의 3/4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 자본은 큰 타격을 입고 자산 보호에 필사적이 되었다. 프랑스 측은 먼저 의화단 사건 배상금이 볼셰비키 정부에 넘어가지 않도록 중화민국에 변제를 요청했다. 또한, 중국 관세 수입을 홍콩 상하이 은행과 1:2 비율로 분배하는 협정[32], 1916년에 계약한 하얼빈-블라고베셴스크 간 철도 부설 및 경영 차관 인수 등의 권익을 지키려 노력했다. 시베리아 출병 시기에는 은행 경영이 분열되었고, 결과적으로 파리 지점이 본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24년 9월 22일, 장쭤린이 소련과 협정을 체결하면서 동청철도의 경영진이 러아은행 측 인사에서 소련 정부가 파견한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 지역 지점에서 뱅크런이 발생했고, 다음 해 초에는 자금이 고갈되는 사태에 이르렀다.[33] 프랑스 자본으로 은행을 회생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프랑스인 임원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결국 1926년 9월 26일, 파리 외환 시장에서 500만파운드 상당의 손실을 기록한 후[34] 이틀 뒤 러아은행은 청산되었다.
5. 러아은행의 청산과 그 유산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러청은행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17년 12월, 볼셰비키 정부는 법령을 통해 러시아 내 은행들의 국유화를 단행했고, 러청은행 역시 약 2개월에 걸쳐 국립 은행으로 편입되었다.[32] 이는 은행 지분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 자본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이들은 의화단 사건 배상금이나 중국에서의 각종 이권 등 기존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32] 시베리아 출병과 같은 혼란 속에서 은행의 경영 체계는 분열되었고, 본국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파리 지점이 실질적인 본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행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1924년 장쭤린과 소련 간의 협정으로 동청철도의 경영권이 소련 측으로 넘어가면서[33] 은행의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는 만주 지역 지점에서의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뱅크런)를 촉발했고, 은행은 심각한 자금난에 직면했다.[33] 결국 1926년 9월, 파리 외환 시장에서 500만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은[34] 러청은행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틀 뒤 청산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동아시아 금융에 큰 영향을 미쳤던 러청은행의 역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5. 1. 러시아 혁명과 국유화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지점이 정리 통합되었다. 1917년 12월 법령으로 러청은행은 약 2개월에 걸쳐 국립 은행에 편입되었다. 페테르부르크 국제은행도 마찬가지였다.[32] 러청은행 자본금의 3/4를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 자본은 큰 타격을 입고 필사적으로 대응했다. 먼저 의화단 사건의 배상금이 볼셰비키 정부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중화민국에 변제를 요청했다. 또한, 중국의 관세 수입을 협정에 따라 홍콩 상하이 은행과 1:2 비율로 나누는 권리, 1916년에 계약한 하얼빈-블라고베셴스크 간 철도 부설 경영 차관 인수 등 기존의 권익을 지키려 노력했다.[32] 시베리아 출병과 맞물려 은행 경영이 분열되었고, 그 결과 파리 지점이 사실상 본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1924년 9월 22일, 장쭤린이 소련과 협정을 맺으면서 러청은행이 결정했던 동청철도 경영진이 소련 정부가 파견한 인사들로 완전히 교체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주 지점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이 발생했고, 다음 해 초에는 자금이 고갈되었다.[33] 더 이상 프랑스 자본으로 은행을 되돌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프랑스인 임원들은 러시아인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1926년 9월 26일, 파리 외환 시장에서 500만파운드 상당의 손실을 입었고[34], 이틀 뒤 러청은행은 결국 청산되었다.
5. 2. 프랑스 자본의 대응과 청산
러시아 혁명 발발 이후 러아은행의 지점들은 정리 통합 과정을 거쳤다. 1917년 12월 법령에 따라 러아은행은 페테르부르크 국제은행과 함께 약 2개월에 걸쳐 국립 은행으로 편입되었다. 자본금의 4분의 3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 자본은 큰 타격을 입고 자산 보호에 필사적이 되었다.프랑스 자본 측은 우선 의화단 사건 배상금이 볼셰비키 정부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중화민국 측에 직접 변제를 요구했다.[32] 또한, 중국 관세 수입을 HSBC와 1:2 비율로 분배하는 협정 및 1916년 계약된 하얼빈-블라고베셴스크 간 철도 부설 관련 차관 인수 권리 등 기존의 권익을 지키려 노력했다. 시베리아 출병 시기에는 은행 경영이 분열되었고, 그 결과 파리 지점이 실질적인 본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4년 9월 22일, 장쭤린이 소련과 협정을 체결하면서 동청철도의 경영진이 러아은행 측 인사 대신 소련 정부가 파견한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만주 지역 지점들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을 촉발했고, 다음 해 초 은행 자금은 고갈 상태에 이르렀다.[33] 프랑스 자본으로 은행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프랑스인 임원들은 결국 러시아인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1926년 9월 26일, 파리 외환 시장에서 500만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34], 이틀 뒤 러아은행은 최종적으로 청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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