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 리펜슈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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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니 리펜슈탈은 독일의 영화감독, 사진작가, 배우로, 무용가로 활동하다가 영화계로 전향하여 배우로 데뷔했다. 1930년대 나치 정권 하에서 선전 영화를 제작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대표작으로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담은 《의지의 승리》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올림피아》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협력 혐의로 비판받았지만,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재평가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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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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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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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헬레네 베르타 아말리에 리펜슈탈 |
출생일 | 1902년 8월 22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사망일 | 2003년 9월 8일 |
사망지 | 독일 페킹 |
국적 | 독일 수단 |
직업 | 영화 감독 프로듀서 영화 각본가 편집자 사진가 배우 |
활동 기간 | 1925년–2002년 |
배우자 | (1944년 결혼, 1946년 이혼) |
파트너 | (1968년부터) |
안장 장소 | 뮌헨 발트프리트호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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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 | |
영화 | 의지의 승리 올림피아 저지대 |
웹사이트 | http://leni-riefenstahl.de |
2. 초기 생애
레니 리펜슈탈은 베를린에서 태어나 무용가로 명성을 얻었으나, 공연 도중 부상을 입어 무용을 포기했다.[47] 이후 영화 연출을 배워 1932년 푸른 빛의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47]
1926년 위대한 산에서 배우로 데뷔한 후, 산악 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하며 영화 배우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다.[47]
다음은 리펜슈탈의 초기 생애와 관련된 주요 연표이다.
연도 | 사건 |
---|---|
1925 | 『성산』 촬영 시작 |
1926 | 『성산』 개봉 |
1930 | 『몽블랑의 폭풍』 개봉 |
1931 | 『백은의 란부』 촬영 시작, 『푸른 빛』 제작을 위해 레니 리펜슈탈 스튜디오 필름 회사 설립, 로케이션 헌팅 시작 |
1932 | 『푸른 빛』 개봉, 히틀러에게 편지를 쓰고 면회 |
2. 1. 탄생과 가족 배경
헬레네 베르타 아말리에 리펜슈탈은 1902년 8월 22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10] 그녀의 아버지는 난방 및 환기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했으며, 딸이 자신과 같은 사업가가 되기를 바랐다. 리펜슈탈은 수년간 외동딸이었기에, 아버지는 그녀가 가문의 이름을 이어가고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결혼 전 파트타임 재봉사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미래는 쇼 비즈니스에 있다고 생각했다. 리펜슈탈에게는 동생 하인츠가 있었는데, 그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벌인 전쟁인 동부 전선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7]리펜슈탈은 어린 시절 예술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11] 네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열두 살 때 닉세라는 체조 및 수영 클럽에 가입했다. 어머니는 딸이 예술 분야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아버지와는 달랐다. 1918년, 16세가 되었을 때, 백설공주 공연을 관람하고 깊은 인상을 받아 무용가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에게 더 품위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의 열정을 계속 지지했다. 남편 몰래 리펜슈탈을 베를린의 그림-라이터 댄스 학교(Grimm-Reiter Dance School)에 등록시켜 무용과 발레 수업을 듣게 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곧 스타 학생이 되었다.
2. 2. 예술적 성장과 무용
레니 리펜슈탈은 1902년 8월 22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10]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사랑을 키웠으며,[11] 네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11] 또한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 열두 살 때 닉세라는 체조 및 수영 클럽에 가입했다.1918년, 16세가 되었을 때 백설공주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했다.[47] 아버지 몰래 베를린의 그림-라이터 댄스 학교(Grimm-Reiter Dance School)에 등록하여 무용과 발레 수업을 들으며 스타 학생으로 성장했다.[47] 1923년에는 표현 댄스 무용가로 데뷔하여 독일 무용계를 대표하는 스타로 주목받았지만, 무대에서 무릎 부상을 입어 무용가의 길을 포기해야 했다.
다음은 그녀의 예술적 성장과 무용과 관련된 연표이다.
연도 | 사건 |
---|---|
1914 | 소녀가 차에 치이는 사고를 목격.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인생을 긍정하며 살아가자"라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확립. |
1917 | 동화 소설에 몰두 |
1918 | 고등 여학교 졸업, 무용 학교 입학 |
1919 | 탈레의 기숙 학교 입학 |
1921 | 가출 후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러시아 발레 교사에게 제자가 됨 |
1923 | 아버지의 자금 지원으로 베를린 공연. 거의 만석으로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져 유럽 각 도시에서 공연. 본가에서 나와 아파트를 얻음. 약혼 |
레니 리펜슈탈은 1902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무용가로 명성을 얻었으나, 공연 중 부상으로 무용을 포기하고 영화 연출을 배웠다.[47] 1932년 《푸른 빛》으로 감독과 주연을 맡았고,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와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인 2부작 《올림피아》를 감독했다.[47] 이 다큐멘터리들은 뛰어난 촬영 및 편집 기술로 현대 기록 영화 연출의 교과서로 불린다.[47]
3. 영화 경력
전쟁 이후, 리펜슈탈은 나치 협력자로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으며, 1954년 《저지》를 발표했으나 주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했다.[47] 2002년에는 해저 상태를 그린 다큐멘터리 《바다속의 인생》을 발표했고, 2003년 101세 생일 때 고흐의 삶을 다루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17일 후 사망했다.[47]
그녀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3. 1. 배우로서의 시작
리펜슈탈은 무용 아카데미에 다니며 독자적인 스타일의 표현 무용으로 명성을 얻었다. 유대인 제작자 해리 소칼의 지원을 받아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유럽 전역을 순회하기도 했다.[12] 공연마다 700Reichsmark를 벌었고, 영화 제작에는 관심이 없었다.[12] 그러나 발 부상이 이어져 무릎 수술을 받았고, 이는 무용 경력에 위협이 되었다. 병원 진료를 받으러 가는 길에 1924년 영화 ''운명의 산'' 포스터를 보고 영화 제작에 영감을 얻어 영화관을 방문하거나 영화 상영회에 참석했다.
모험 중 ''운명의 산''에 출연했던 배우 루이스 트렌커를 만났고, 친구 귄터 란의 주선으로 산악 영화 장르의 선구자인 아르놀트 팡크 감독을 만났다. 리펜슈탈은 팡크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존경심과 연기 실력을 어필하며 영화 출연을 설득했다. 1926년, 팡크는 리펜슈탈에게 ''성산''의 대본을 주었고, 이후 팡크와 함께 여러 영화를 제작하며 연기 및 영화 편집 기술을 배웠다. 1929년 G. W. 파브스트가 공동 연출한 ''피츠 팔루의 백색 지옥''은 리펜슈탈을 세상에 알린 작품 중 하나이다.[12]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작은 눈사태에 휩쓸리고, 산속 호수와 얼음물에 뛰어드는 등, 현대적 기준에서는 비윤리적일 수 있는 여러 신체적 도전을 겪었다.[12] 이러한 노력으로 그녀의 명성은 독일 밖으로 퍼져나갔다.
연도 | 제목 | 감독 | 비고 |
---|---|---|---|
1925 | 힘과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Wege zu Kraft und Schönheit) | 무용수 | |
1926 | 성스러운 산(Der heilige Berg) | 아르놀트 팡크 | 디오티마 역 |
1927 | 거대한 도약(Der große Sprung) | 아르놀트 팡크 | 기타 역 |
1928 | 합스부르크 왕가의 운명(Das Schicksal derer von Habsburg) | 루돌프 라페 | 마리아 베체라 역 |
1929 | 피츠 팔루의 하얀 지옥(Die weiße Hölle vom Piz Palü) | 아르놀트 팡크, 게오르크 빌헬름 파브스트 | 마리아 마이오니 역 |
1930 | 몽블랑의 폭풍(Stürme über dem Mont Blanc) | 아르놀트 팡크 | 헬라 암스트롱 역 |
1931 | 하얀 황홀경(Der weiße Rausch) | 아르놀트 팡크 | 레니 역 |
1933 | S.O.S. 아이스버그(S.O.S. Eisberg) | 아르놀트 팡크 (미국판에서는 테이 가넷과 공동 감독) | 헬라 역, 북극 탐험 지도자 카를 로렌츠의 아내 |
3. 2. 감독 데뷔와 초기 작품
1932년, 리펜슈탈은 처음으로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푸른 빛》을 발표했다. 이 영화는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리펜슈탈은 독특한 영상 스타일로 영화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47]1933년에는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신념의 승리》를 감독했다.
1935년에는 또 다른 나치 전당대회 기록 영화인 《의지의 승리》를 감독했다. 이 영화는 뛰어난 촬영과 편집 기술로 선전 영화의 백미(白眉)로 꼽힌다.[47]
1938년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2부작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를 감독했다. 1부 《민족의 제전》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외국 영화 최고상(무솔리니 컵)을 수상했다. 2부 《미의 제전》과 함께 이 다큐멘터리는 현대 기록 영화 연출의 교과서로 불린다.[47] 《올림피아》는 올림픽이 추구하는 인간의 강인한 신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고 게르만 민족의 인종적 우월함도 잘 표현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3. 나치 시대의 활동
레니 리펜슈탈은 1932년 나치당(NSDAP)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그의 연설가로서의 재능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거의 종말론적인 환상을 보았다. 마치 지구 표면이 내 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았고, 갑자기 가운데가 갈라져 거대한 물줄기를 뿜어내 하늘에 닿아 지구를 흔들었다"고 썼다.[13]히틀러는 리펜슈탈의 작품, 특히 그녀가 주연을 맡은 ''푸른 빛''에 매료되었다. 그는 그녀를 아리아인 여성의 이상으로 여겼다.[13] 1933년 히틀러는 리펜슈탈에게 호르스트 베셀에 관한 영화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14] 대신 1933년 제5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다룬 1시간짜리 선전 영화 ''신념의 승리''를 연출했다.[14] 이 기회는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가 아닌 히틀러가 직접 리펜슈탈에게 제안한 것이었다.[14] 리펜슈탈과 히틀러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14] 이 영화는 전적으로 NSDAP의 자금으로 제작되었다.[14]
''신념의 승리''에서 히틀러는 돌격대(SA) 지도자 에른스트 룀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룀은 장검의 밤 사건으로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히틀러는 이 영화의 모든 사본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지만, 리펜슈탈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주장했다.[15]

히틀러는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다룬 새로운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 촬영을 요청했다.[16] 100만 명 이상의 독일인이 이 전당대회에 참여했다.[16] 리펜슈탈은 처음에 ''저지대''를 연출하고 싶어했지만, 히틀러의 설득으로 ''의지의 승리''를 촬영하게 되었다.[17] 이 영화는 혁신적인 선전 영화 제작의 걸작으로 인정받았으며,[17] 리펜슈탈의 경력을 국제적으로 끌어올렸다.[17]
1993년 다큐멘터리 ''레니 리펜슈탈의 멋지고 끔찍한 삶''에서 리펜슈탈은 나치 선전을 의도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부인하고, ''의지의 승리''가 그렇게 사용된 것에 혐오감을 느꼈다고 말했다.[19] 그러나 2024년 다큐멘터리에 인용된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의 선전 효과에 대해 "독일 선전으로서 영화의 영향은 상상 이상이며, 나의 총통, 당신의 모습은 항상 환호를 받습니다."라고 열광했다.[19]
나치당 관련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고 했음에도, 리펜슈탈은 1935년 독일군에 관한 28분짜리 영화 ''자유의 날: 우리 국방군''을 만들었다.[20] 이 영화는 ''신념의 승리''와 ''의지의 승리''처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촬영되었다.[20] 리펜슈탈은 이 영화가 ''의지의 승리''에서 잘 표현되지 않았다고 느낀 독일군을 달래기 위해 추가되었다고 말했다.[20]
히틀러는 리펜슈탈에게 1936년 하계 올림픽 촬영을 제안했고, 리펜슈탈은 이 영화가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의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18] 그녀는 1936년 하계 올림픽 성화 봉송 경로와 올림피아의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그리스를 방문했다.[18] 이 자료는 ''올림피아''가 되었고, 기술적, 미학적 업적으로 널리 알려졌다.[18] ''올림피아''는 나치에 의해 비밀리에 자금이 지원되었다.[18] 리펜슈탈은 트래킹 숏을 사용한 최초의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었고,[19] 슬로우 모션, 수중 촬영, 극단적인 앵글, 파노라마 항공 숏 등 다양한 촬영 기법을 사용했다.[19] 그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제시 오언스를 포함한 모든 인종의 경쟁자를 촬영했다.[20]

''올림피아''는 1938년 히틀러의 49번째 생일에 초연되었다. 리펜슈탈은 미국 홍보 투어에 나섰고, 디트로이트 뉴스 기자에게 "저에게 히틀러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21] 1938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베니토 무솔리니 컵을 수상했다.[19] 크리스탈의 밤 5일 전 뉴욕시에 도착한 리펜슈탈은 공개적으로 히틀러를 옹호했다.[21] 헨리 포드, 에이버리 브런디지, 루이 B. 메이어, 월트 디즈니 등과 만났다.[21]
괴벨스 일기에 따르면, 리펜슈탈은 요제프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친했고, 함께 오페라에 가거나 파티에 참석했다.[21] 리펜슈탈은 괴벨스가 그녀를 질투하고 위협으로 여겼다고 주장했지만, 괴벨스는 리펜슈탈의 영화 제작을 높이 평가했다.[21]
《의지의 승리》에서 톰 손더스는 히틀러가 카메라 시선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며, 깃발과 배너의 표현을 통해 남성성과 국가적 자부심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고 분석했다.[21] 레니 리펜슈탈은 《의지의 승리》에서 디에제틱 사운드를 왜곡하여 독일 예술 영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22]

독일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리펜슈탈은 군복을 입고 권총을 찬 채 독일 군인들과 함께 폴란드에서 사진을 찍었다.[23] 그녀는 Końskie 마을에서 민간인 30명이 처형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23] 그녀는 희생자들이 유대인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23] 1939년 10월, 리펜슈탈은 점령된 폴란드로 돌아와 히틀러의 바르샤바 승전 행진을 촬영했다.[23] 그 후, 그녀는 폴란드를 떠났고 더 이상 나치 관련 영화를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23]

1940년 파리가 점령되자, 리펜슈탈은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를 표했다.[23] 그녀는 나중에 "모두가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그런 정신으로 전보를 보냈다"고 설명했다.[23] 리펜슈탈은 히틀러와 12년 동안 친구였지만,[23] 1944년 그녀의 형제가 사망한 후 관계가 악화되었다.[23]
뉘른베르크 집회 3부작과 《올림피아》 이후, 리펜슈탈은 《깊은 땅(Tiefland)》 작업을 시작했다.[24]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 정부는 그녀에게 700만 마르크를 지원했다.[24] 1940년부터 촬영을 시작했으며, 잘츠부르크-막스글란과 마르잔 수용소에서 온 로마인들을 엑스트라로 강제 동원했다.[24] 리펜슈탈은 모든 엑스트라가 생존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은 촬영 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24] 리펜슈탈은 이 사실을 부인하며 영화 제작자 니나 글라디츠를 고소했지만, 법원은 글라디츠의 손을 들어주었다.[24]

2002년, 리펜슈탈은 로마 단체에 의해 나치가 로마인을 학살한 것을 부인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24] 그녀는 사과하며 "신티와 로마인들이 국가 사회주의 시대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24]
1944년, 《깊은 땅》 제작은 프라하의 바란도프 스튜디오로 옮겨졌다.[24] 이 영화는 1954년에 개봉되었다.[24]
리펜슈탈이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44년 3월이었다.[24]
3. 4. 전후 활동과 논란
레니 리펜슈탈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과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으나, 비나치화 재판에서 "나치 동조자이나,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47] 그녀는 탈나치화를 위해 전후 당국에 의해 네 번 재판을 받았으며 결국 나치를 동정하는 "동조자"(''Mitläufer'')로 판결받았다.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정권 하의 나치 독일에서 제작된 리펜슈탈의 영화 작품, 특히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 영화인 『올림피아』와 1934년 나치 당 대회의 기록 영화인 『의지의 승리』가 나치에 의한 독재를 정당화하고 국위를 선양하는 선전 영화로 기능했다는 이유로, 전후에는 나치의 협력자로서 오랫동안 비난과 묵살을 받았다.[47] 그녀는 나치당의 공식 회원은 아니었지만, 나치 독일에서 제작한 선전 영화 때문에 항상 연관되어 보였다.[25]
버드 슐버그는 존 포드의 다큐멘터리 부대에 배속되어 미국 해군에서 OSS 첩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쟁 직후 연합군이 점령한 독일 영화 필름에서 나치 전범을 식별하도록 하기 위해 키츠뷔엘에 있는 리펜슈탈의 별장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리펜슈탈은 수용소의 성격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슐버그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하던 변명을 늘어놓았어요. '물론, 아시다시피, 저는 정말 오해를 많이 받고 있어요. 저는 정치적이지 않아요.'"라고 진술했다.
리펜슈탈은 나치에 매료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순진했고, 어떤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고 주장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그녀는 독일 전역의 다양한 연합군 통제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일정 기간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수년에 걸쳐 그녀는 나치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50건이 넘는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25]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는 히틀러를 만난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재앙이었어요. 죽는 날까지 사람들은 '레니는 나치다'라고 말할 것이고, 저는 계속 '하지만 그녀가 뭘 했는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녀가 50건에 달하는 명예 훼손 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생전에 나치당과의 관계에 대한 세부 사항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이후에도 서독 국내외의 저널리즘으로부터 나치즘 동조에 대한 비판을 계속 받았지만, 그때마다 재판을 제기하여 결과적으로 그 모든 재판에서 승소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니 리펜슈탈의 거짓과 진실』(스티븐 백 저)에 따르면, 그것은 그녀가 회상록 등에서 만들어낸 전설에 불과하며, 패소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전쟁 전부터 준비해왔던 극영화 『저지대』는 영화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와 시인 장 콕토로부터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엑스트라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롬인들을 기용한 것도 비난받았다). 이후에도 리펜슈탈을 감독으로 내세운 영화 기획이 몇 번이나 제기되었지만, 그때마다 비판을 받아 영화 배급사로부터 기피되어 모두 무산되었다. 이후에도 정치적인 비판과 더불어 "히틀러(괴벨스)의 연인"이라는 유언비어까지 떠돌아다니며, 나치 협력자라는 낙인과 그에 따른 비난에 시달리며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1962년, 여행지인 수단에서 누바족을 만나 10년간의 취재를 계속하여 1973년에 10개국에서 사진집 『누바』를 출판, 사진작가로서 센세이션한 재기를 이룬다. 197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누바족을 촬영한 사진집과 수중 촬영 사진집으로, 전전의 감독 작품을 포함하여 재평가의 움직임도 강해졌지만, 나치 협력자의 이미지는 끝까지 불식되지 않았다.[47] 같은 해, 나이를 젊게 신청하여 실제로는 71세에 스쿠버 다이빙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수중 사진에 도전하여 2권의 사진집을 만들었다. 그런데, 『누바』에서 그 촬영 수법이 나치와 관련되어 있다는 비판도 다시 제기되었다.

리펜슈탈은 만년에도 아프리카를 여러 번 방문했지만, 2000년, 98세 때 방문한 내전 중의 수단에서, 탑승했던 헬리콥터가 공격을 받아 추락하는 사건을 겪었다. 리펜슈탈은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100세를 맞이한 2002년에는, 『원더 언더 워터 원색의 바다』로 현역 영화감독으로 복귀했고, 이것이 생애 마지막 영화 작품이 되었다(세계 최고령 다이버 기록이기도 하다).[47] 그 다음 해인 2003년, 리펜슈탈은 오랫동안 조수를 맡았던 호르스트 케트너와 결혼했고, 마지막은 그에게 간병받으며 101세로 사망했다. 케트너의 담화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심장이 멈추는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리펜슈탈의 영화인으로서의 솜씨는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의지의 승리』, 『올림피아』에서 구사된 영상 기술은 이후의 영화 촬영에 영향을 주었다.
2024년 10월, 안드레스 바이엘과 산드라 마이슈베르거는 리펜슈탈의 유산 문서 컬렉션 700개 보관함을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발표했는데, 이 다큐멘터리에는 나치 만행에 대한 리펜슈탈의 초기 지식이 명확하게 문서화되어 있다. 그러나 1948년까지 리펜슈탈은 일관되게 모든 지식을 부인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로 제시했다.[26]
4. 주요 작품
레니 리펜슈탈은 영화와 사진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932년 《푸른 빛》을 시작으로, 《신념의 승리》(1933), 《의지의 승리》(1935), 《자유의 날》(1935) 등 나치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다. 특히 《의지의 승리》는 선전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47] 1938년에는 베를린 올림픽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올림피아》를 제작했다. 1954년에는 극영화 《저지》를 발표했으며, 2002년에는 해저 다큐멘터리 《원더 언더 워터 원색의 바다》를 공개했다.[47]
사진 분야에서는 1970년대부터 아프리카 누바족의 삶을 담은 사진집 《마지막 누바족》(1973), 《카오의 사람들》(1976) 등을 출간했다. 1978년에는 수중 사진집 《산호 정원》을, 1990년에는 《물속의 경이》를 발표했다.
4. 1. 영화
레니 리펜슈탈은 무용가로 명성을 얻은 후 1926년 영화 《위대한 산》에서 배우로 데뷔하였다. 공연 중 부상을 입어 영화 연출로 전향, 1932년 《푸른 빛》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47]1933년, 아돌프 히틀러는 리펜슈탈에게 나치당 전당대회 선전 영화 《신념의 승리》 연출을 제안했다. 히틀러는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리펜슈탈에게 제작을 맡겼다.[14] 리펜슈탈은 전당대회 며칠 전에야 이 사실을 알았지만, 영화 연출에 동의했다.[14]
1934년, 히틀러는 리펜슈탈에게 또 다른 전당대회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 촬영을 요청했다. 리펜슈탈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히틀러는 그녀에게 더 이상 당을 위한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조건으로 설득했다.[16] 《의지의 승리》는 혁신적인 선전 영화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리펜슈탈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16]
1935년, 리펜슈탈은 독일군에 관한 영화 《자유의 날: 우리 국방군》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신념의 승리》의 하위 세트처럼 여겨지며, 《의지의 승리》에서 잘 표현되지 않았던 독일군을 달래기 위해 추가되었다.[15]

1938년, 리펜슈탈은 1936년 하계 올림픽을 기록한 영화 《올림피아》를 감독했다. 이 영화는 트래킹 숏과 슬로우 모션 등 혁신적인 촬영 기법을 사용했으며, 현대 스포츠 사진에 큰 영향을 미쳤다.[18]
리펜슈탈은 나치 협력자로 비판받았지만, 뛰어난 촬영 기술과 편집 기술은 현대 기록 영화 연출의 교과서로 불린다.[47] 그녀는 2002년 100세 생일을 앞두고 해저 다큐멘터리 《수중 인상》을 발표하며 늦은 나이까지 활동을 이어갔다.[47]
연도 | 제목 | 감독 | 각본 | 프로듀서 | 편집 | 비고 |
---|---|---|---|---|---|---|
1932 | 푸른 빛 | 극영화 | ||||
1933 | 신념의 승리 | 나치당을 위한 선전 다큐멘터리 영화 | ||||
1935 | 의지의 승리 | |||||
자유의 날: 우리 국방군 | 1970년까지 유실된 것으로 여겨졌던 나치당을 위한 선전 다큐멘터리 중편 영화 | |||||
1938 | 올림피아 1부: 민족 축제 | 1936년 올림픽 경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 ||||
올림피아 2부: 축제의 아름다움 | ||||||
1954 | 깊은 땅 | 극영화 | ||||
2002 | 수중 인상 | 바다 밑바닥에 관한 다큐멘터리 중편 영화 공동 촬영 감독 및 마지막 작품. |
4. 2. 사진집
리펜슈탈은 누바족의 의례적인 레슬링 경기를 기념하는 조지 로저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25] 1974년에 출판되었고 1976년에 재출판된 리펜슈탈의 누바족 사진집은 ''Die Nuba''(번역: "마지막 누바족")와 ''Die Nuba von Kau''(번역: "카오의 누바족")였다. 이 사진집들은 수전 손택으로부터 "파시스트 미학"을 지속적으로 고수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28] 힐튼 크레이머는 이 비평을 "미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28] 손택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누바족은 아리아인이 아닌 흑인이지만, 리펜슈탈의 누바족 초상화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더 큰 주제들과 일치한다. 즉, 깨끗함과 불순함, 부패하지 않음과 더럽혀짐, 육체와 정신, 즐거움과 비판 사이의 대조이다. [...] 고귀한 야만인에 대한 오래된 생각의 파시스트적 버전의 특징은 반성적이고 비판적이며 다원적인 모든 것에 대한 경멸이다. [...] 신체적 기술과 용기의 전시, 그리고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를 이기는 것이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 공동체 문화의 통일된 상징이 되었고, 싸움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주요 열망"이 되는 사회를 기념함으로써, 리펜슈탈은 자신의 나치 영화의 아이디어를 수정했을 뿐인 것 같다.[28]
1974년 12월, 유도라 웰티는 ''Die Nuba''를 ''뉴욕 타임스''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그녀는 빛을 의도적으로 사용한다. 즉, 피부의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검은색을 볼 수 있게 하는 충만하고 눈부신 밝음, 둥근 집의 출입구인 벽의 높은 곳에 있는 작은 구멍에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빛줄기는 얼마나 은밀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준다. 젊은이들이 살기 위해 가는 잠자는 캠프에서 송아지의 얼굴에 첫 새벽 빛이 비치면서 그들의 고립된 세계를 암시한다. 모든 사진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즉, 부끄러움을 타고 장난기 넘치는 얼굴을 가진 어린 소녀는 영구적인 시나몬 방울처럼 아랫입술에 구슬을 꿰맸고, 레슬러는 경기를 준비하면서 삭발한 머리를 돌려 거대한 어깨를 보는데, 온 피부색은 재를 발라 없앴다.[29]
독일 미술 감독 클럽은 1975년 최고의 사진 성과에 대해 리펜슈탈에게 금메달을 수여했다. 그녀는 또한 일부 사진을 독일 잡지에 팔았다.
1978년, 리펜슈탈은 ''Korallengärten''(번역: "산호 정원")을, 1990년에는 ''Wunder unter Wasser''(번역: "물속의 경이")를 출판했다. 2002년 8월 22일, 100번째 생일에 해양 생물을 이상적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 영화 ''Impressionen unter Wasser''(번역: "수중 인상")을 개봉했는데, 이는 25년 만에 그녀가 만든 첫 번째 영화였다. 리펜슈탈은 8년 동안 그린피스 회원이었다. ''수중 인상'' 촬영 당시, 스쿠버 다이빙 자격을 얻기 위해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25]
연도 | 제목 | 번역 | 비고 |
---|---|---|---|
1973 | Die Nuba | 마지막 누바족 | |
1976 | Die Nuba von Kau | 카오의 누바족 | |
1978 | Korallengärten | 산호 정원 | |
1982 | Mein Afrika | 사라져가는 아프리카 | |
1990 | Wunder unter Wasser | 물속의 경이 |
5. 평가와 유산
레니 리펜슈탈은 뛰어난 영화감독이자 배우, 무용가였지만, 나치 정권과의 협력으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녀의 작품은 예술적 성취와 정치적 선전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오늘날까지도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리펜슈탈은 1902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무용가로 활동하다가 1926년 영화 《위대한 산》으로 배우 데뷔를 했다. 무용 중 부상으로 영화 연출로 전향하여 《푸른 빛》(1932)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아돌프 히틀러의 눈에 띄어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1935)와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 《올림피아》(1938)를 감독했다. 이 작품들은 뛰어난 촬영 및 편집 기술로 현대 기록 영화 연출의 교과서로 불리지만, 나치 선전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47]
《의지의 승리》는 알베르트 슈페어가 연출하고 히틀러와 당 간부들의 연설을 담아 뉘른베르크 당대회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히틀러의 출연 시간은 영상의 3분의 1, 음성으로는 5분의 1을 차지했다.[45] 선전성은 이 영화를 '국민의 영화'로 인정하고, 시민과 당원에게 관람을 장려했다.[45]
리펜슈탈은 나치에 매료되었지만 정치적으로 순진했고, 어떤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고 주장했다.[25]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연합군 통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탈나치화 재판에서 "동조자"(''Mitläufer'')로 판결받았다.[25] 그녀는 나치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50건이 넘는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25] 히틀러를 만난 것을 인생에서 가장 큰 재앙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묻고, 《의지의 승리》를 만든 것과 그 시대에 살았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46] 또한 원자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고, 누구도 배척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46]
1993년 다큐멘터리 영화 《레니 리펜슈탈의 놀랍고 끔찍한 삶》에서 리펜슈탈은 자신의 영화 제작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나치 선전을 의도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부인하며 《의지의 승리》가 그런 식으로 사용된 것에 혐오감을 느꼈다고 말했다.[38] 2024년 안드레스 바이엘과 산드라 마이슈베르거는 리펜슈탈의 유산 문서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발표했는데, 이 다큐멘터리에는 나치 만행에 대한 리펜슈탈의 초기 지식이 명확하게 문서화되어 있다. 그러나 1948년까지 리펜슈탈은 일관되게 모든 지식을 부인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로 제시했다.[26]
현재 독일에서도 리펜슈탈에 대한 평가는 크게 갈리고 있다. "경솔하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하지만, 나치와 그 지도자들을 자신의 경력을 위해 이용했다" 등 찬반양론이 존재한다.
5. 1. 한국에서의 평가
레니 리펜슈탈에 대한 한국 내 평가는 특별히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녀의 작품과 생애는 국제적인 논쟁의 대상이었다. 1993년 레이 뮐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레니 리펜슈탈의 놀랍고 끔찍한 삶''은 그녀의 영화 제작 경력과 나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졌으며,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38]2000년 조디 포스터가 리펜슈탈의 전기 영화 제작을 계획했을 때, 사이먼 비젠탈 센터는 리펜슈탈을 미화하는 수정주의적 시각을 경고하며 항의했다.[38] 2011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도 전기 영화 제작을 고려했으나 상업적 전망에 대한 우려로 포기했다.[38] 2024년 안드레스 바일 감독의 전기 영화 ''리펜슈탈''이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초연되었다.[39][19]
리펜슈탈의 저서로는 사진집 『NUBA 누바』, 『누바 머나먼 별의 사람들』, 자서전 『회상』, 사진집 『Leni Riefenstahl life 레니 리펜슈탈 라이프』 등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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