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버리 브런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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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미국의 토목 공학자, 운동선수, 스포츠 행정가이자 아시아 미술품 수집가이다. 일리노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근대 5종과 10종 경기에 출전했다. 1928년 미국 아마추어운동연합 회장, 1952년부터 1972년까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아마추어리즘을 옹호하고 프로페셔널리즘 도입에 반대했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유대인 차별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아시아 미술품 수집가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그의 컬렉션은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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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버리 브런디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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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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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 | 제5대 |
임기 시작 | 1952년 8월 15일 |
임기 종료 | 1972년 9월 11일 |
이전 | 시그프리드 에스트룀 |
이후 | 킬라닌 남작 |
임기 시작 | 1972년 9월 11일 |
임기 종료 | 1975년 5월 8일 |
이전 | 공석, 마지막: 시그프리드 에스트룀 (1964년) |
이후 | 공석, 다음: 킬라닌 남작 (1980년) |
임기 시작 | 1946년 |
임기 종료 | 1952년 |
이전 | 시그프리드 에스트룀 (1942년부터 1946년까지 IOC 위원장 대행) |
이후 | 아르망 마사르 |
임기 시작 | 1945년 |
임기 종료 | 1946년 |
이전 | 신설 |
이후 | 공석, 다음: 버글리 경 (1954년) |
임기 시작 | 1936년 7월 30일 |
임기 종료 | 1972년 9월 11일 |
이전 | 어니스트 리 얀케 |
임기 시작 | 1928년 (미국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으로서) |
임기 종료 | 1953년 |
이전 | 더글러스 맥아더 |
이후 | 케네스 L. 윌슨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87년 9월 28일 |
출생지 |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
사망일 | 1975년 5월 8일 |
사망지 | 서독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
배우자 | 엘리자베스 던랩 (1927년 결혼, 1971년 사별) 마리안 샬로테 카타리나 스테파니, 로이스 공녀 (1973년 결혼) |
자녀 | 2명 |
안장지 | 로즈힐 공동묘지 |
모교 | 일리노이 대학교 |
직업 | 토목 기사 종합 건설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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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미국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1909년 졸업했다. 젊은 시절 뛰어난 운동선수로 1912년 하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출전하여 근대 5종 6위, 10종 경기 16위를 기록했으며, 미국 국내 대회에서도 여러 차례 우승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건설 사업가로 성공하는 동시에 스포츠 행정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28년 전미 아마추어 육상 연맹(AAU) 회장, 1929년 미국 올림픽 위원회(USOC) 회장, 1930년 국제 육상 경기 연맹(IAAF) 부회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며 미국 스포츠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차별 정책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올림픽 참가를 강행했으며, 보이콧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이 과정에서 보이콧을 주장한 어니스트 리 얀케가 IOC 위원에서 축출되자 그 후임으로 IOC 위원이 되었다. 그는 나치 체제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IOC 부회장을 거쳐, 1952년 시그프리드 에드스트룀의 뒤를 이어 제5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1972년까지 20년간 재임했다. 그는 IOC 역사상 유일한 미국인 위원장이다. 재임 기간 내내 그는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 원칙을 강력하게 고수하며 프로 선수들의 참여를 철저히 배격했다. 이러한 입장은 카를 슈란츠 선수 출전 금지(1972년 동계), 캐나다 아이스하키팀의 국제 대회 불참 선언 등 여러 논란을 낳았으며, 시대 변화에 뒤처진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재임 기간은 냉전과 탈식민지화 등 격동의 국제 정세 속에서 올림픽이 정치적 문제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미국 흑인 선수들의 '블랙 파워' 시위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여 선수들을 추방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행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종차별 정권의 로디지아의 올림픽 참가 문제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 국제적인 비판과 압력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검은 9월단에 의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이 살해당하는 뮌헨 참사가 발생했을 때, "게임은 계속되어야 한다(The Games must go on)"고 선언하며 올림픽 속행을 결정하여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다. 추모식 연설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언급 없이 올림픽의 강인함만을 강조한 그의 태도는 그의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올림픽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뮌헨 올림픽을 끝으로 IOC 위원장직에서 물러났으며, 1975년 서독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선수 경력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1887년 9월 28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석공인 찰스 브런디지와 미니 (로이드) 브런디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다섯 살 때 가족은 시카고로 이사했지만, 아버지는 곧 가족을 떠났고, 에이버리와 남동생 체스터는 주로 이모와 삼촌 손에서 자랐다. 1901년, 13세의 브런디지는 에세이 대회에서 1등을 하여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식에 참석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시카고의 셔우드 공립학교와 R. T. 크레인 수공업 학교를 다녔는데, 크레인 학교는 대중교통으로 약 11.27km나 되는 먼 거리였고, 그는 신문 배달을 마친 후에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학교에 운동 시설이 부족했음에도, 브런디지는 학교 작업장에서 직접 포환과 해머 같은 운동 장비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마지막 학년에는 학교 육상 스타로 신문에 소개될 정도였다. 스포츠 작가 윌리엄 오스카 존슨은 1980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에서 브런디지를 "호레이쇼 앨저가 그린 듯한 인물, 즉 가난을 딛고 일어나 왕과 백만장자들과 어울리며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으로 묘사하기도 했다.1905년 크레인 공업학교를 졸업한 브런디지는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 입학하여 토목 공학을 전공했고, 1909년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대학 시절 그는 다양한 교내 간행물에 글을 기고했으며, 농구와 육상 선수로 활동하는 등 스포츠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다. 특히 마지막 학년에는 일리노이 대학교 빅 텐 컨퍼런스 육상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아모스 알론조 스태그가 이끌던 강팀 시카고 대학교를 꺾고 팀 우승에 기여했다.

대학 졸업 후, 브런디지는 유명 건축 회사인 홀라비드 & 로체에서 건설 감독관으로 3년간 일하며 당시 시카고 전체 건설 물량의 3%에 해당하는 750만달러 상당의 건물 건설을 감독했다. 그는 당시 시카고 건설업계의 부패를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삼촌 에드워드 J. 브런디지는 당시 시카고 북부 지역의 유력한 공화당 인사였고 후에 일리노이 주 검찰총장이 되었지만, 브런디지가 삼촌의 영향력을 이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일리노이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두각을 나타낸 브런디지는 1910년, 시카고 육상 협회(CAA) 소속으로 전미 아마추어 육상 연맹(AAU)이 주최한 전국 종합 선수권 대회(10종 경기의 전신)에서 3위를 차지하며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했다.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그는 5종 경기 6위, 10종 경기 16위를 기록했다.[1] 10종 경기에서는 8개 종목을 마친 후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지자 기권했는데, 그는 평생 이 결정을 후회했다고 한다. 당시 두 종목에서 모두 우승했던 미국의 짐 소프가 세미프로 야구 선수 경력이 드러나 아마추어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브런디지의 순위는 한 계단씩 올라갔다. 훗날 IOC 위원장이 된 브런디지는 소프의 메달 복권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했으며, 이 때문에 스톡홀름에서의 패배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소프의 메달은 브런디지와 소프가 모두 사망한 후인 1982년에야 복권되었다.
올림픽 이후 시카고로 돌아온 브런디지는 존 그리피스 앤 선스 건설 회사에서 건설 감독관으로 일하며 쿡 카운티 병원, 모리슨 호텔, 몬로 빌딩 등의 건설에 참여했다. 1915년에는 자신의 건설 회사인 에이버리 브런디지 컴퍼니를 설립했으며, 그의 삼촌 에드워드가 이사로 참여했다. 그는 건설업을 하면서도 선수 생활을 계속하여 1914년, 1916년, 1918년에 미국 종합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육상 선수에서 은퇴한 후에는 아메리칸 핸드볼 선수로 활동했는데, 젊은 시절 미국 상위 10위 안에 들었으며, 1934년 46세의 나이에도 당시 미국 챔피언이었던 안젤로 트리울리오를 상대로 승리하는 등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2. 2. 스포츠 행정가 경력
1928년, 브런디지는 전미 아마추어 육상 연맹(AAU) 회장이 되었고, 이듬해인 1929년에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USOC) 회장에 취임했다.[13] 또한 1930년에는 국제 육상 경기 연맹(IAAF)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13]===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논란 ===

1931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1936년 올림픽 개최지로 독일을 선정했다. 동계 올림픽은 바이에른에서, 하계 올림픽은 수도인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독일 정권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나치 정권은 초기에는 국제 스포츠에 무관심했으나, 곧 올림픽의 선전 효과를 인지했다.
나치 정권의 노골적인 유대인 혐오와 박해가 드러나면서, 1936년 올림픽을 독일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보이콧해야 한다는 국제적인 요구가 거세졌다. 미국 올림픽 운동의 수장이었던 브런디지는 이러한 요구에 직면했다. 미국의 올림픽 챔피언 릴리안 코플랜드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브런디지가 나치 독일의 실상을 외면한다고 비판하며 보이콧을 주장했지만[2][3], 브런디지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했다.[13]
당시 IOC 회장이었던 앙리 드 바이에-라투르 역시 보이콧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브런디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개인적으로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브런디지의 정치적 관점은 공산주의를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었으며, 히틀러가 독일에 질서를 가져왔다고 평가하고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보였다는 분석도 있다.
나치 정권은 스포츠에서 차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유대인 선수들을 스포츠 클럽에서 추방하는 등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1934년 9월, 브런디지는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했다. 그는 독일 정부 관계자들을 만났지만 유대인 스포츠 지도자들과의 개별 면담은 허용되지 않았다. 귀국 후 브런디지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없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을 받았다"고 보고하며, 1934년 9월 26일 USOC는 브런디지의 보고를 바탕으로 미국의 베를린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다. 이 결정은 뉴욕의 에마누엘 셀러 하원의원 등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브런디지는 독일이 IOC에 차별 금지를 약속했고 IOC가 이를 수용했으므로 미국 올림픽 당국은 이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독일팀에 유대인 선수가 포함되지 않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보이콧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계속되었고, 1935년 새로 AAU 회장이 된 제레마이어 T. 마호니 판사는 보이콧 지지자로 돌아섰다. IOC 위원 중에서도 어니스트 리 얀케는 보이콧을 지지했다. 그러나 브런디지는 IOC의 요청에 따라 보이콧 반대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주도했고, 1935년 12월 AAU 총회에서 결국 미국의 올림픽 참가를 관철시켰다. 그는 승리 후 관용을 보이지 않고 반대파들의 사임을 요구했고, 마호니는 실제로 사임했다.
브런디지는 보이콧 논란을 오히려 자금 모금에 이용하려 했다. 그는 유대인 광고계 거물 앨버트 라스커에게 편지를 보내 유대인들이 올림픽 참가를 지지함으로써 미국 내 반유대주의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라스커는 이를 "협박"이라며 거절하고 브런디지가 유대인과 다른 많은 미국인들을 모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400m 릴레이 경기에서는 당일 아침, 미국 대표팀의 유대인 선수였던 마티 글리크만과 샘 스트롤러가 갑자기 제외되고 제시 오언스와 랄프 메트칼프로 교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글리크만은 후에 이 결정이 브런디지의 압력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13] 또한 보이콧을 주장했던 IOC 위원 어니스트 리 얀케가 축출되자 브런디지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IOC 위원이 되었다.[13] 브런디지는 이후에도 나치 체제를 칭찬하는 발언을 하여 미국 우선 위원회에서 제명되기도 했다.[13]
=== 아마추어리즘 원칙 고수 ===

브런디지는 스포츠 행정가로서 경력 내내 아마추어 스포츠의 이상을 확고하게 신봉했다. 그는 존 골즈워디의 말을 인용하며 스포츠 정신과 페어플레이가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아마추어리즘이란 운동선수가 "보상이나 어떤 종류의 지급에 대한 생각 없이 게임 자체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경쟁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프로 선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러나 '아마추어'의 정의는 스포츠마다 달랐고, 브런디지는 운동선수가 아마추어 자격을 유지하면서 어떤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에 자주 휘말렸다. 그는 아마추어 규정 위반을 이유로 여러 차례 선수들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위협했다. 1932년에는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는 혐의로 파보 누르미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실격시킨 IAAF 특별 위원회에 참여했다. 1948년 동계 올림픽에서는 서로 다른 단체의 후원을 받는 두 개의 미국 아이스하키팀 문제로 논란이 일자, 브런디지가 지지하는 AAU 팀은 개막식에만 참가하고, 그가 반대한 AHAUS 팀은 경기에는 출전하되 메달 자격은 얻지 못하는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는 상업 활동을 이유로 오스트리아 스키 선수 카를 슈란츠를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 부르며 퇴출시켰다.
브런디지는 특히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국가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실상의 '전업 아마추어' 선수들을 출전시키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이들 국가는 선수들에게 훈련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급여를 지급하지 않아 아마추어 규정을 교묘히 피해갔다. 이는 자비로 훈련하는 서방 국가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7][8]
1960년대 말, 캐나다 아마추어 하키 협회(CAHA)는 아마추어 선수만으로는 동구권의 전업 선수들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프로 선수들의 참가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했다. 1969년 국제 아이스하키 연맹(IIHF)은 캐나다가 1970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9명의 비NHL 프로 선수를 포함시키는 것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9] 그러나 브런디지는 아마추어와 프로 선수가 함께 경쟁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며, 이 결정이 유지될 경우 아이스하키의 올림픽 종목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9] 결국 IIHF는 결정을 번복했고, 이에 캐나다는 국제 아이스하키 대회 참가를 중단했고, '오픈 경쟁'이 도입될 때까지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9][11] 캐나다는 브런디지가 IOC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인 1976년에야 '오픈 경쟁'이 허용되면서 국제 무대에 복귀했다.[12]
IOC 회장으로서 브런디지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견해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선수들은 상업화되는 스포츠 환경 속에서 아마추어 규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1962년 IOC는 브런디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운동선수가 훈련이나 대회 참가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한 시간에 대해 '중단된 시간'(broken time)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했다. 단, 이는 부양가족이 있는 경우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브런디지는 1972년 뮌헨 IOC 총회 연설에서도 "올림픽 영광은 아마추어를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상업주의가 만연하다는 이유로 알파인 스키를 비판하며 1976년 이후 동계 올림픽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 IOC 운영과 리더십 ===

IOC 회장직은 무보수였으며, 브런디지는 활동 경비조차 지원받지 못해 때로는 연간 5만달러에 달하는 개인 비용을 지출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IOC는 재정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브런디지와 IOC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때부터 TV 중계권 수입의 잠재력을 인지했지만 대응이 늦어, 1960년 로마 올림픽 중계권은 조직위원회에 넘어갔다. IOC는 중계권료 6만달러 중 5%만을 받았다. 로마 조직위원회는 올림픽 개최로 손실을 보았다고 보고했고, IOC는 당초 예상했던 이익 배분금을 받지 못해 각 국제 연맹에 수익금을 배분할 수 없었다. 이후 TV 중계권은 IOC의 주요 수입원으로 부상하여 1968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1000만달러에 달했고, 그가 사망한 후인 200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12억달러까지 증가했다. 브런디지는 수입 증대에 대해 우려하며 1967년 IOC 위원들에게 "우리가 돈을 다루는 순간, 심지어
2. 3. IOC 회장 재임 (1952-1972)
지크프리드 에드스트룀의 뒤를 이어 1952년 IOC 회장으로 선출되어 1972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올림픽에 직업 선수가 참여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며 아마추어리즘을 옹호했지만, 이러한 입장은 점차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판에 직면했다.아마추어리즘 옹호와 논란브런디지는 운동선수가 "보상이나 어떤 종류의 지급에 대한 생각 없이 게임 자체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경쟁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동구권 국가들의 국가 주도 '전업 아마추어' 선수 육성 방식[7][8]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운동 장학금 등을 이유로 들며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아 비판받았다.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는 오스트리아 스키 선수 카를 슈란츠가 스폰서로부터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 비난하며 출전을 금지시켰다. 또한 캐나다가 아이스하키 대표팀에 프로 선수 기용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여 캐나다가 국제 대회에서 철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9][11] 그의 완고한 아마추어리즘 원칙은 시대 변화에 뒤처진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1962년에는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IOC가 선수들의 '중단된 시간'(missed time from work)에 대한 보상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수정하기도 했다.
주요 사건 및 논란
-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블랙 파워 경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200미터 시상식에서 미국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칼로스가 인종 차별에 항의하며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들어 올리는 '블랙 파워' 경례를 했다. 브런디지는 이를 올림픽의 비정치적 성격에 어긋나는 국내 정치적 행위로 간주하고, 미국 올림픽 위원회(USOC)에 압력을 넣어 두 선수를 선수촌에서 추방하고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다.[14] USOC가 거부하자 미국 육상팀 전체를 퇴출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브런디지는 이 사건을 "흑인들의 미국 국기에 대한 불쾌한 시위"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공격하여 11명이 사망하는 뮌헨 참사가 발생했다. 참사 이후 브런디지는 "게임은 계속되어야 한다(The Games must go on)"고 선언하며 올림픽을 속행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열린 추모식 연설에서 그는 올림픽 운동의 강인함을 강조했지만, 희생된 이스라엘 선수들에 대한 애도나 언급이 부족했고, 이 사건을 로디지아의 올림픽 참가 배제 문제와 연결시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의 레드 스미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과 관계자들은 그의 결정을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했다.
정치와 올림픽브런디지는 올림픽을 정치와 분리하려 했으나, 그의 재임 기간은 냉전과 탈식민지화 등 국제 정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로디지아 문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행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종차별적인 소수 백인 정권이 통치하던 로디지아 (현 짐바브웨)의 올림픽 참가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비판을 받았다. 그는 초기에는 이들 국가의 참가를 옹호하거나 조치를 꺼렸으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강력한 반발과 보이콧 위협에 직면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결국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참가가 금지되었고, 1971년에는 IOC에서 퇴출되었다. 로디지아 역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참가가 거부되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참가 허용 결정이 번복되어 최종적으로 배제되었다. 브런디지는 특히 로디지아 배제 결정에 대해 IOC가 정치적 협박에 굴복했다며 격분했다.
- 독일 분단 문제: 서독과 동독의 분단 상황에서, 브런디지는 단일팀 참가를 추진하여 1956년, 1960년, 1964년 올림픽에서 이를 성사시켰다. 그는 이를 정치적 분열을 극복한 올림픽 정신의 성과로 여겼으나, 결국 1968년부터는 동독의 분리 참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 참가 문제: 그의 반공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의 보편성을 위해 소련의 참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타이완)의 참가 문제는 재임 기간 내내 복잡한 문제로 남았으며, 양측의 대립 속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1958년 IOC를 탈퇴했고, 타이완은 '포모사' 또는 '중화민국' 등의 이름으로 참가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란을 겪었다.
IOC 운영 및 재정브런디지는 IOC 회장직을 무보수로 수행했으며, 사비를 들여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텔레비전 중계권 판매가 시작되었고 이는 IOC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지만, 브런디지는 이러한 상업화가 올림픽 정신을 훼손할 것을 우려했다. 또한 각국 올림픽 위원회(NOC)와의 관계에서는 다소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며, NOC들의 독자적인 연합체 구성 시도(PGA-NOC)에 반대하는 등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는 1952년 8년 임기로 선출된 후 1960년, 1964년, 1968년에 재선되었으며, 1972년 뮌헨 올림픽을 끝으로 킬라닌 경에게 회장직을 넘겨주고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브런디지는 1972년 하계 올림픽 이후 IOC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은퇴 당시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상반된 증언이 존재한다. IOC 이사였던 베를리유는 브런디지가 은퇴 후에도 IOC 업무에 관여하려 했으며, 때로는 외로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고 회상했다. 반면, 그의 오랜 조수였던 프레데릭 루에그세거는 브런디지가 평온하게 은퇴 생활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1971년, 거의 반세기 동안 함께한 아내 엘리자베스가 사망했다. 2년 후인 1973년 6월, 브런디지는 85세의 나이로 독일의 마리안 샤를로테 카타리나 스테파니 폰 로이스(1936–2003) 공주와 재혼했다. 당시 37세였던 마리안 공주는 뮌헨 올림픽에서 통역사로 일했으며, 19세였던 1955년에 브런디지를 처음 만났다고 밝혔다. 48세의 나이 차이에 대한 질문에 브런디지는 자신은 나이에 비해 젊고 아내는 성숙하다며, 나이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루에그세거는 이 결혼 이후 부부가 브런디지의 재산을 상당 부분 탕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74년 1월, 브런디지는 백내장과 녹내장 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훗날 IOC 회장)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에서 수술받을 예정이었으나, 계획을 변경하여 1936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였던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근처 뮌헨에서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시력 개선 여부에 대해서도 아내 마리안과 루에그세거의 의견이 엇갈렸다. 같은 해 말, 쇠약해진 몸으로 아내와 함께 마지막 극동 여행을 떠났으나, 그가 수집한 예술품의 주요 출처였던 중국 본토로부터는 초청받지 못했다.
1975년 4월, 브런디지는 독감과 심한 기침 증세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병원에 입원했다. 결국 1975년 5월 8일, 심부전으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미국 시카고의 로즈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언을 통해 브런디지는 아내 마리안과 조수 루에그세거에게 유산을 남겼으며, 일부 자선 단체에도 기부했다. 그의 개인 서류와 기념품은 일리노이 대학교에 기증되었고, 운동 장학금을 받지 않는 스포츠 유망주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35만달러를 기부했다.
브런디지는 IOC 회장을 역임한 유일한 미국인이다. 한편,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개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삿포로시의 모이와야마 신사에 제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4. 개인사
1927년, 40세의 브런디지는 시카고 은행가의 딸인 엘리자베스 던랩과 결혼했다. 그녀는 훈련된 소프라노였으며 클래식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브런디지는 이러한 관심을 완전히 공유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1971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브런디지와 사별했다.
브런디지는 두 아내와의 사이에서 공식적인 자녀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첫 번째 결혼 기간 중 핀란드 출신의 여성 릴리안 드레스덴과의 사이에서 혼외 아들 둘(1951년, 1952년 출생)을 두었다. 이 시기는 브런디지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회장으로 고려되던 때와 겹친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친자 관계를 인정했지만, 자신의 선출 가능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아이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고, 출생 증명서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도록 요청했다. 1950년대에는 두 아들을 가끔 방문했으나, 1960년대에는 전화 통화로 줄어들었고 말년에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의 교육과 사회생활 시작을 위해 신탁 기금을 마련했지만, 그의 사후 유언장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다. 결국 두 아들은 소송을 제기하여 그의 1900만달러 상당의 재산에서 각각 62500USD의 비교적 소액의 합의금을 받았다.
1973년 6월, 브런디지는 85세의 나이로 독일 로이스 가문의 하인리히 37세의 딸인 마리안 샤를로테 카타리나 스테파니 폰 로이스 공주(1936–2003)와 재혼했다. 마리안 공주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통역사로 일했으며, 1955년 19세 때 브런디지를 처음 만났다고 밝혔다. 48세의 나이 차이에 대한 질문에 브런디지는 자신은 나이에 비해 젊고 그녀는 성숙하다며, 나이 차이를 85세 대 37세가 아닌 55세 대 46세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1972년 IOC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그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엇갈린다. 1974년 1월, 뮌헨에서 백내장과 녹내장 수술을 받았다. 수술 결과 시력이 개선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아내 마리안과 오랜 조력자 프레데릭 루에그세거의 진술이 달랐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극동 지역을 여행했지만, 그가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던 중국 본토로부터는 초청받지 못했다. 1975년 4월, 독감과 심한 기침 증세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병원에 입원했으며, 같은 해 5월 8일 심부전으로 8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시카고의 로즈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언을 통해 브런디지는 아내 마리안과 조력자 루에그세거에게 유산을 남겼고, 몇몇 자선 단체에도 기부했다. 또한 자신의 문서와 기념품은 모교인 일리노이 대학교에 기증했으며, 운동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스포츠 관심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35만달러를 기부했다.
5. 아시아 미술 수집
브런디지가 아시아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 이후 런던의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중국 미술 전시회를 방문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 경험에 대해 "우리(그의 첫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와 자신)는 전시회에서 일주일을 보냈는데, 중국 미술에 너무 매료되어 그 이후로 계속 돈이 없었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수집은 1939년 4월, 브런디지 부부가 요코하마, 교토, 오사카, 나라일본어, 닛코일본어 등 일본의 여러 도시를 방문한 후 시작되었다. 그들은 일본에 이어 상하이와 홍콩을 방문했지만, 당시 일본과 중국 간의 전쟁으로 인해 중국 본토를 더 탐험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1939년 6월 런던에서 열린 IOC 회의 후 미국으로 돌아온 브런디지는 체계적으로 아시아 미술의 주요 수집가가 되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는 부유한 중국인들이 가보를 팔게 만들었고, 이는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수집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는 아시아 미술 관련 서적을 다수 구매하며 지식을 쌓았고, 인터뷰에서 "주요 서재는 필수적인 도구"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참전하면서 미국 내 일본인 딜러들이 소유했던 미술품들이 압수되었고, 브런디지는 이 기회를 통해 최고의 작품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딜러들은 그가 돈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거래에 능하다고 평가했다. 브런디지는 위조품에 속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설령 위조품을 샀다 하더라도, 아시아 미술에서는 가짜 작품조차 천 년의 역사를 지닌 경우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크게 개의치 않았다. 1948년 라이프지는 그의 컬렉션이 "이 나라에서 개인 소장품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컬렉션 중 하나로 여겨진다"고 언급했다.
브런디지는 자신의 컬렉션을 관리하고 작품 구매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가르치던 프랑스 학자 르네-이본 르페브르 다르장세프랑스어를 전임 큐레이터로 고용하고, 작품 구입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두 사람은 서로 동의하는 작품만 구매하기로 합의하며 협력했다. 그들은 신석기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옥 컬렉션을 구축했으며, 수백 점의 중국, 일본, 한국 청동상, 특히 불상과 보살상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브런디지가 가장 존경했던 화가는 송나라의 12세기 중국 황제인 휘종중국어이었지만, 그의 작품을 얻을 수는 없었다. 브런디지는 때때로 원래 출처에서 밀반출된 작품을 구입하여 해당 지역에 복원하기도 했다. 브런디지가 작품을 판매하는 이유는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예술적으로 더 이상 선호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1954년 재무제표에 따르면 그의 컬렉션 가치는 100만달러 이상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1960년 뉴요커에 실린 브런디지에 대한 로버트 셰이플런의 기사에서 브런디지는 IOC 회장으로 여행하는 동안 항상 미술 딜러를 방문할 시간을 가졌으며, 컬렉션 가치가 1500만달러로 평가되었다고 언급했다.
1950년대 후반, 브런디지는 방대해진 컬렉션의 거취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카고와 캘리포니아에 있는 그의 집은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차 귀중한 유물이 침대 밑 신발 상자에 보관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아시아로 향하는 창구가 될 서부 해안의 미술관에 기증하는 것을 고려했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와 스탠퍼드 대학교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컬렉션 규모가 너무 커서 무산되었다. 결국 1959년, 브런디지는 자신의 컬렉션 일부를 샌프란시스코시에 기증하기로 합의했다. 이듬해 시 유권자들은 기증을 수용하기 위해 272.5만달러의 채권 발행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이 설립되었으며, 1966년 골든 게이트 파크 내 M. H. 드 영 기념 박물관 부속 건물로 개관했다가 2003년 시빅 센터 근처에 자체 시설로 이전했다. 브런디지는 1969년에 또 다른 주요 기증을 했고(1964년 산타바바라 근처 캘리포니아 자택 "라 피네타"에서 화재로 많은 작품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언으로 그의 컬렉션 나머지를 박물관에 남겼다. 오늘날, 박물관은 컬렉션을 구성하는 17,000점이 넘는 물건 중 브런디지가 기증한 7,700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의 일본 회화 컬렉션은 특정 분야, 특정 화가에게 작품이 집중되는 경향이 다소 부족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어떤 특정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브런디지 자신이 신중하게 골라낸 수작들이 갖춰져 있다.
브런디지는 예술과 아마추어 스포츠의 세계를 자신의 생각 속에서 연결했다. 1958년 도쿄에서 열린 IOC 회의에서 그는 일본 남성이 물건을 고정하는 데 사용했던 넷케일본어, 일반적으로 기모노 허리띠에 매달린 인로일본어 지갑에 대해 논의했다. 브런디지는 수천 개의 넷케일본어를 소유했으며, 연설할 때 두 개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회원들에게 넷케일본어는 한때 그것을 착용한 사람이 신중하게 조각하여 "자신의 일부를 디자인에 담아" 만든 것이며, 나중에 더 기술적으로 능숙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전문 넷케일본어 제작자 계급이 생겨났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차갑고, 뻣뻣하며, 상상력이 없었다. ... 아마추어 조각가의 요소가 없었으며, 이로 인해 수집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조각된 상업적 제품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브런디지는 나중에 자신의 연설에 대해 "여기 넷케일본어에 아마추어리즘과 전문성의 차이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었다"라고 말했다.
6. 논란 및 비판
짐 소프는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5종 경기와 10종 경기에서 우승했지만, 과거 세미프로 야구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메달을 박탈당했다. 이는 소프가 올림픽 참가 자격인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 선수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브런디지는 IOC 회장 재임 기간 동안 소프 지지자들의 복권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메달 반환을 거부했다. IOC는 브런디지와 소프가 모두 사망한 후인 1982년에야 메달을 복권했다. 브런디지의 이러한 태도는 스톡홀름 올림픽 당시 소프에게 패배했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앙심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
1936년 올림픽 개최지로 독일 베를린이 선정된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에 미국 내에서는 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미국 올림픽 위원회(AOC) 회장이었던 브런디지는 이러한 보이콧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 차별 금지를 약속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올림픽 참가를 강행하려 했다. 1934년 직접 독일을 방문한 후, 그는 유대인 스포츠 지도자들과의 개별 면담은 거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없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을 받았다"고 보고하며 나치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브런디지는 보이콧을 주장하는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특히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던 아마추어 육상 연맹(AAU) 회장 제레마이어 T. 마호니와의 대립 끝에 AAU 총회에서 참가 결정을 관철시켰고, 이후 마호니를 비롯한 반대파 인사들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는 보이콧 논란을 오히려 자금 모금 기회로 삼으려 했으며, 유대인 광고 거물 앨버트 라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많은 오도된 유대인들이 여전히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려고 고집하고 있다"거나, 유대인들이 올림픽 참가를 지지해야 미국 내 반유대주의를 줄일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여 그의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미국 400미터 릴레이 팀에서 유일한 유대인 선수였던 마티 글리크만과 샘 스트롤러가 경기 당일 갑자기 제외되고 제시 오언스와 랄프 메트칼프로 교체된 사건이 발생했다. 글리크만은 훗날 이 결정에 브런디지의 압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브런디지는 나치 체제를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미국 우선 위원회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브런디지는 IOC 회장 재임 기간 내내 아마추어리즘을 광적으로 옹호하며 올림픽에 어떤 형태의 프로페셔널리즘이 도입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운동선수는 "보상이나 어떤 종류의 지급에 대한 생각 없이 게임 자체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여러 논란을 낳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에서 오스트리아의 유명 스키 선수 카를 슈란츠가 스키 용품 회사로부터 스폰서 비용을 받았다는 이유로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 비난하며 올림픽에서 추방한 사건이 있다.
반면, 국가가 선수를 직접 지원하고 육성하는 동구권 국가들의 '전업 아마추어' 선수 문제에 대해서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들 국가의 선수들은 사실상 직업 선수와 다름없었지만, 브런디지는 서방 국가들의 운동 장학금 제도를 거론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를 외면했다. 이는 아마추어리즘 원칙을 선별적으로 적용한다는 비판을 받았다.[7][8]
또한, 캐나다가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과 경쟁하기 위해 일부 프로 선수들의 참가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브런디지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결국 캐나다는 이에 항의하여 1970년부터 한동안 국제 아이스하키 대회 참가를 중단하기도 했다.[9][11]
시대가 변하면서 상업주의가 스포츠계에 깊숙이 침투했음에도 브런디지는 아마추어리즘 원칙을 고수했고, 이는 점차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1972년 IOC 총회 마지막 연설에서도 "올림픽 영광은 아마추어를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브런디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해서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초기에는 남아공 스포츠계의 주장을 받아들여 인종 차별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렸으나, 샤프빌 학살 이후 국제적인 비난 여론과 아프리카 국가들의 보이콧 움직임이 거세지자 입장을 바꿨다. 결국 IOC는 1963년 남아공 정부가 차별 금지 정책을 채택하지 않으면 올림픽 참가를 정지시키기로 결정했고, 남아공은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참가하지 못했다. 1971년에는 남아공 NOC의 승인이 취소되었다. 브런디지는 남아공을 올림픽 운동에 참여시키고 싶어 했지만, 결국 추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강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로디지아(현 짐바브웨) 문제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로디지아는 백인 소수 정부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유엔은 회원국들에게 로디지아 여권 불인정을 권고했다. 브런디지는 로디지아의 스포츠 시설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참가를 지지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의 보이콧 위협과 개최국 멕시코의 유엔 결의 준수로 인해 무산되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로디지아 선수들이 영국 시민 자격으로 참가하는 방안이 결정되었으나, 또다시 아프리카 국가들의 보이콧 위협에 직면하자 IOC는 투표를 통해 로디지아의 참가를 배제했다. 브런디지는 IOC가 협박에 굴복했다며 이 결정에 격분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당시 미국 사회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등으로 인종 갈등이 극심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0미터 달리기 시상식에서 금메달리스트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들어 올리는 블랙 파워 경례를 했다.
브런디지는 이를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정치적 행위로 간주하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두 선수를 미국 대표팀에서 제명하고 올림픽 선수촌에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미국 올림픽 위원회가 이를 거부하자, 브런디지는 미국 육상팀 전체를 실격시키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올림픽에서 추방되었다.[14] 브런디지는 이 사건을 "흑인들의 미국 국기에 대한 불쾌한 시위"라고 폄하했으며, 공식 기록 영화에서 이 장면을 삭제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강경하고 억압적인 대응은 인종 문제에 대한 그의 보수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비판받는다.
브런디지의 임기 마지막 해인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는 검은 9월단 소속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하여 선수 11명을 살해하는 뮌헨 올림픽 참사가 발생했다. 참사 이후 브런디지는 올림픽 중단을 거부하고 "게임은 계속되어야 한다(The Games must go on)"고 선언했다.
다음 날 열린 추도식에서 브런디지는 연설을 통해 희생된 이스라엘 선수들에 대한 애도보다는 올림픽 운동의 강인함을 강조하는 데 집중했다. 더욱 논란이 된 것은 그가 이 연설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의 보이콧 위협으로 로디지아 선수단의 참가가 무산된 사건을 언급하며, 이를 테러 행위와 같은 맥락에서 비판한 점이다. 그는 "우리는 노골적인 정치적 협박에 맞서 로디지아와의 싸움에서 졌습니다"라고 발언하며 참사의 비극과 정치적 문제를 동일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연설은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뉴욕 타임스의 스포츠 기자 레드 스미스는 "마치 응원 행사 같았다"고 혹평했다. 브런디지는 이후에도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주장하며 "원칙이 관련되어 있었고 비록 몇몇 생명이 희생된 끔찍한 일이었지만, 원칙은 인간의 생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해 논란을 더욱 키웠다. 그의 이러한 발언과 태도는 올림픽 이상에 대한 집착이 현실의 비극과 인간의 존엄성보다 우선시될 수 있다는 위험한 인식을 보여준다는 비판을 받았다.
7. 유산
브런디지는 국제 올림픽 위원회 (IOC) 회장을 역임한 유일한 미국인이자 비유럽인으로서[20][21] 엇갈린 유산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그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올림픽 운동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전 IOC 위원 딕 파운드는 브런디지를 피에르 드 쿠베르탱,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와 함께 IOC의 중요한 회장 중 한 명으로 꼽으면서도, 임기 말에는 스포츠계의 변화와 동떨어져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브런디지는 상당한 규모의 아시아 미술품 컬렉션을 기증하여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한때 미술관 로비에는 이를 기념하는 그의 흉상이 있었다.[18] 일본 삿포로시에서는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 개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모이와야마 신사에 제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그러나 브런디지에 대한 비판 역시 상당하다. 특히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나치 독일 정권의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올림픽 참가를 강행하고 보이콧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행적은 큰 논란거리다. 그는 나치 정권의 차별 금지 약속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보이콧 운동을 "유대인들이 우리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자금 모금을 하려 하는 등 반유대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인종차별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견해는 2021년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미술관이 그의 흉상을 철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18]
또한 브런디지는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완고한 입장을 고수하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프로 선수들을 경멸하고 운동선수들이 어떤 종류의 금전적 보상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짐 소프의 메달 복권을 거부했으며,[1] 1972년 동계 올림픽에서는 오스트리아 스키 선수 카를 슈란츠를 상업 활동을 이유로 추방하기도 했다. 동구권 국가들의 국가 주도형 '아마추어' 선수 육성에 대해서도 사실상 묵인하여 서방 국가 선수들에게 불리함을 안겼다는 비판도 있다.[7][8] 그의 이러한 태도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받으며, 알프레드 E. 센과 같은 학자들은 브런디지가 IOC 회장직에 너무 오래 머물렀으며, 말년에는 변화하는 올림픽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센은 "뮌헨 이후, 브런디지는 올림픽을 떠났는데, 올림픽은 그의 이해력을 넘어섰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섰다... 올림픽계에서 그의 퇴장을 슬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평가했다.
현대에 와서 브런디지는 "독재적"[17]이며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가 잘 기록된"[18] 인물, "나치 동조자"[19]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 데이비드 밀러는 그를 "독재적"이라고 묘사했으며,[17] The Nation지는 그의 논란 많은 행적을 지적하며 "명예와 존경의 자리를 잃었다"고 평가했다.[19] 그의 유산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며, 올림픽 역사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복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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