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월터 앨버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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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는 191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발명가이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레이더 기술 개발에 기여했다. 앨버레즈는 수소 거품 상자를 개발하여 소립자 연구에 기여했고, 196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아들 월터 앨버레즈와 함께 공룡 멸종의 원인으로 소행성 충돌 가설을 제시했다. 앨버레즈는 항공 분야에도 기여했으며, 1988년 식도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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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월터 앨버레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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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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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 |
출생일 | 1911년 6월 13일 |
출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
사망일 | 1988년 9월 1일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
국적 |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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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
출신 대학 | 시카고 대학교 (BS, MS, PhD) |
박사 지도교수 | 아서 콤프턴 |
경력 | |
근무 기관 |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
연구 분야 및 업적 | |
연구 분야 | 물리학 |
주요 업적 | 가속기 질량 분석법 알바레즈 가설 AN/CPS-1 전자 포획 폭발성 브릿지선 기폭 장치 지상 통제 접근 선형 입자 가속기 액체 수소 기포 상자 뮤온 촉매 융합 뮤온 단층 촬영 헬륨-3 분리 삼중수소 분리 중성자 자기 모멘트 측정 |
수상 | |
수상 내역 | 콜리어 트로피 (1945년) 메리트 훈장 (1947년) 존 스콧 메달 (1953년) 앨버트 아인슈타인 상 (1961년) 국가 과학 훈장 (1963년) 파이오니어 상 (1963년) 미켈슨-몰리 상 (1965년) 노벨 물리학상 (1968년) 엔리코 페르미 상 (1987년) |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연도 | 1968년 |
노벨 물리학상 수상 분야 | 수소 기포 상자를 사용한 소립자의 공명 상태 연구 |
사생활 | |
배우자 | 제럴딘 스미스윅 (1936년 결혼, 1957년 이혼) 재닛 L. 랜디스 (1958년 결혼)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샌프란시스코 출신으로, 시카고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여 1932년 학사, 1934년 석사, 193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27] 대학원 시절에는 아서 컴프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우주선 연구에 참여했고, 멕시코시티에서 진행한 우주선의 동서 효과 실험을 통해 초기 우주선 입자가 양(+)전하를 띤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이 연구 결과는 그의 이름이 첫 번째 저자로 실린 채 학술지 ''피지컬 리뷰''에 발표되었다. 앨버레즈는 아버지가 회중 교회의 집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지론자였다.[5][6]
2. 1. 출생 및 가계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는 1911년 6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로마 가톨릭 가정의 둘째 아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인 월터 C. 앨버레즈였고, 어머니는 해리엇 스미스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출신으로 쿠바를 거쳐 미국에 정착한 스페인 의사 루이스 F. 앨버레즈이다. 루이스 F. 앨버레즈는 반점 나병을 더 정확하게 진단하는 방법을 개발한 인물이다.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에게는 누나 글래디스, 남동생 밥, 여동생 버니스가 있었다. 그의 이모인 메이블 앨버레즈는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화가로, 특히 유화를 전문으로 그렸다.[3]앨버레즈는 1918년부터 1924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매디슨 스쿨을 다녔고, 이후 샌프란시스코 폴리테크닉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26년, 그의 아버지가 메이요 클리닉의 연구원이 되면서 가족은 미네소타주 로체스터로 이사했고, 앨버레즈는 로체스터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는 본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진학을 생각했지만, 로체스터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권유로 시카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1932년 학사 학위를, 1934년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36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7] 학부 시절에는 피 감마 델타 프라테르니티에 속했으며, 대학원생 시절에는 감마 알파 프라테르니티에서 활동했다.
1932년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생 시절, 앨버레즈는 물리학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브라함 미켈슨이 사용했던 실험 장비를 다룰 기회를 얻었다.[4] 그는 가이거 계수기를 이용하여 우주선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지도 교수인 아서 컴프턴의 지원 아래 멕시코시티에서 우주선의 동서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이 실험에서 서쪽 방향에서 오는 우주선이 더 많다는 것을 관측한 앨버레즈는, 우주선의 주된 입자가 양(+)전하를 띤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서 컴프턴은 이 연구 결과를 정리한 논문을 ''피지컬 리뷰''에 투고하면서 앨버레즈의 이름을 가장 먼저 기재해주었다.
앨버레즈의 아버지는 회중 교회의 집사였지만, 정작 앨버레즈 본인은 불가지론자였다.[5][6]
2. 2. 교육 과정
1918년부터 1924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매디슨 스쿨(Madison School)에 다녔고, 이후 샌프란시스코 폴리테크닉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26년 아버지가 메이요 클리닉 연구원이 되면서 가족이 미네소타주 로체스터로 이사했고, 앨버레즈는 로체스터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원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진학을 생각했지만, 로체스터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권유로 시카고 대학교에 입학했다.시카고 대학교에서 1932년 학사 학위를, 1934년 석사 학위를, 193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27] 학부생 시절에는 피 감마 델타 프라테르니티에 속했으며, 대학원생이 되어서는 감마 알파 프라테르니티로 옮겼다.
1932년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생 시절 물리학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며,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브라함 미켈슨이 사용했던 실험 장비를 다룰 기회를 얻었다.[4] 그는 가이거 계수기를 이용해 우주선 망원경을 만들었고, 지도 교수인 아서 컴프턴의 지원을 받아 멕시코시티에서 우주선의 동서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이 실험을 통해 서쪽에서 오는 우주선이 더 많다는 것을 관측하여, 우주선 입자가 주로 양(+)전하를 띤다는 결론을 내렸다. 컴프턴 교수는 이 연구 결과를 담은 논문을 ''피지컬 리뷰''에 발표하면서 앨버레즈의 이름을 가장 앞에 실어주었다.
앨버레즈는 아버지가 회중 교회의 집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가지론자였다.[5][6]
3. 초기 연구
1936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앨버레즈는 어니스트 로렌스와의 인연으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방사선 연구소에 합류하여 오랜 연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실험 물리학자로서 중요한 초기 연구들을 수행하며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주요 초기 연구 성과로는 이론적으로만 예측되었던 K-전자 포획 현상을 실험적으로 처음 관측한 것(1937),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하여 삼중수소가 불안정하고 헬륨-3가 안정하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하고 삼중수소의 수명을 측정한 것, 그리고 펠릭스 블로흐와 공동으로 중성자의 자기 모멘트를 이전보다 훨씬 정밀하게 측정한 것(1940) 등이 있다.[7][8][9][58] 이러한 연구들은 그가 입자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발판이 되었다.
3. 1. 버클리 방사선 연구소
앨버레즈의 누이 글래디스는 어니스트 로렌스 밑에서 파트타임 비서로 일했는데, 그 인연으로 앨버레즈는 로렌스를 만날 수 있었다. 로렌스는 앨버레즈를 시카고의 세기의 진보 박람회에 초대하기도 했다. 1936년 구두 시험을 마친 앨버레즈는 제럴딘 스미스윅과의 결혼을 앞두고 로렌스가 있는 방사선 연구소에 일자리가 있는지 누이를 통해 알아보았다. 곧 로렌스로부터 채용 제안이 담긴 전보를 받았고, 이는 앨버레즈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와 오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앨버레즈와 스미스윅은 시카고 대학교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월터 알바레즈와 딸 진(Jean)이 태어났으나, 1957년 이혼했다. 앨버레즈는 1958년 자넷 L. 랜디스와 재혼하여 두 자녀(도널드, 헬렌)를 더 두었다.
버클리 방사선 연구소에서 앨버레즈는 로렌스의 실험팀에 합류했으며, 이 팀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이론 물리학 그룹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베타 붕괴 이론에서 예측했지만 아직 관측되지 않았던 K-전자 포획 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실험을 설계했다. 이를 위해 방사성 원소에서 나오는 양전자와 전자를 자석으로 걸러내고, 오직 K-전자 포획 과정에서 발생하는 약한 X선만을 검출할 수 있는 특수 가이거 계수기를 만들었다. 이 연구 결과는 1937년 ''피지컬 리뷰''에 발표되었다.[7]
또한 앨버레즈는 중수소(2H) 핵 두 개가 충돌하여 삼중수소(3H)와 양성자(p) 또는 헬륨-3(3He)와 중성자(n)를 생성하는 핵융합 반응(2H + 2H → 3H + p 또는 3He + n)에 주목했다. 당시 한스 베테를 비롯한 이론물리학자들은 삼중수소가 안정하고 헬륨-3는 불안정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앨버레즈는 60인치 사이클로트론을 이용해 이와 반대임을 증명했다. 그는 사이클로트론을 일종의 거대 질량 분석기처럼 사용하여 이중으로 이온화된 헬륨-3 원자핵 빔을 성공적으로 가속시켰다. 이 헬륨은 수백만 년 된 심해 가스전에서 추출한 것이었으므로, 헬륨-3가 안정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사이클로트론과 2H + 2H 반응을 이용해 방사성 동위원소인 삼중수소를 생성하고 그 수명을 측정했다.[8]
1938년, 앨버레즈는 사이클로트론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단일 에너지의 열중성자 빔을 생성하는 시간 비행(time-of-flight) 기법을 개발했다. 이를 활용하여 그는 펠릭스 블로흐와 함께 중성자의 자기 모멘트를 측정하는 일련의 실험을 수행했다. 1940년에 발표된[58] 그들의 측정값 μ0 = 1.93 ± 0.02 μN[9]는 이전의 측정 결과보다 훨씬 정밀한 값이었다.
3. 2. K-전자 포획 관측
앨버레즈는 누이 글래디스를 통해 어니스트 로렌스를 알게 되었고, 1936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로렌스가 이끄는 방사선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로렌스의 실험팀에 합류했으며, 이 팀은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이론 물리학자 그룹의 지원을 받았다.
방사선 연구소에서 알바레즈는 베타 붕괴 이론이 예측했지만 당시까지 실험적으로 관측되지 않았던 K-전자 포획 현상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설계했다. K-전자 포획은 원자핵이 가장 안쪽 전자 껍질(K껍질)의 전자를 흡수하여 양성자가 중성자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그는 방사성 핵에서 방출되는 양전자와 전자를 자기장을 이용해 걸러내고, 오직 K-전자 포획 과정에서 나오는 저에너지 X선만을 탐지할 수 있는 특수 가이거 계수기를 개발했다. 이 실험을 통해 K-전자 포획 현상을 성공적으로 관측했으며, 1937년 학술지 ''피지컬 리뷰''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7]
3. 3. 중수소 핵반응 및 삼중수소/헬륨-3 연구
중수소(수소-2) 두 개가 충돌하면 핵융합 반응을 통해 삼중수소(수소-3)와 양성자가 만들어지거나, 헬륨-3와 중성자가 생성된다(2H + 2H → 3H + p 또는 3He + n). 이 반응은 가장 기본적인 핵융합 반응 중 하나로, 열핵무기 개발과 현재 진행 중인 제어 열핵융합 연구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당시에는 이 반응으로 생성되는 삼중수소와 헬륨-3의 안정성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물리학자 한스 베테는 기존 이론에 근거하여 삼중수소는 안정적이고 헬륨-3는 불안정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앨버레즈는 60인치 사이클로트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베테의 예측이 틀렸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앨버레즈는 사이클로트론을 조정하여 이중으로 이온화된 헬륨-3 원자핵을 가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가속된 이온 빔을 얻었는데, 이는 사이클로트론을 거대한 질량 분석기처럼 활용한 독창적인 방법이었다. 실험에 사용된 헬륨은 수백만 년 동안 심해 가스전에 존재했던 것이므로, 그 안에 포함된 헬륨-3는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앨버레즈는 사이클로트론과 2H + 2H 반응을 이용하여 방사성을 띠는 삼중수소를 인공적으로 생성하고 그 반감기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8]
3. 4. 중성자 자기 모멘트 측정
1938년, 알바레즈는 사이클로트론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현재 시간-비행 기법으로 알려진 방법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단일 에너지 열중성자 빔을 만들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이론 물리학자 펠릭스 블로흐(Felix Bloch)와 협력하여 중성자의 자기 모멘트를 측정하는 실험을 시작했다.[58] 1940년에 발표된 그들의 측정 결과, μ0 = 1.93 ± 0.02 μN,는 이전의 연구 결과들보다 훨씬 정밀한 값이었다.[9]4. 제2차 세계 대전과 레이더 개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앨버레즈는 군사 관련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1940년 영국의 티자드 미션(Tizard Mission)을 통해 미국은 공동 마그네트론(cavity magnetron) 기술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마이크로파 레이더 개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 직속의 국방 연구 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방사선 연구소(Radiation Laboratory)를 설립하여 마이크로파 레이더 연구를 주도하도록 했다. 어니스트 로런스의 추천으로 앨버레즈는 1940년 11월 이 연구소에 합류했다.
앨버레즈는 방사선 연구소에서 여러 핵심적인 레이더 프로젝트에 기여했다. 초기에는 피아식별장치(Identification Friend or Foe, IFF) 레이더 비컨(현재의 트랜스폰더) 개선 작업에 참여했으며, 적 잠수함이 레이더 탐지를 회피하기 어렵게 만드는 VIXEN 시스템 개발에도 기여했다. 또한, 마이크로파 조기 경보(Microwave Early Warning, MEW) 시스템 연구 중에는 기계적 조작 없이 전자적으로 전파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위상 배열 안테나를 발명했다. 이 기술은 이후 Eagle 정밀 폭격 레이더 개발에 적용되어, 악천후 속에서도 B-29 폭격기의 정밀 폭격을 가능하게 했다. Eagle 레이더는 전쟁 후반에 도입되어 성능을 입증했지만, 전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앨버레즈의 레이더 관련 업적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지상 접근 관제(Ground Controlled Approach, GCA) 시스템이다. GCA는 지상 관제사가 레이더를 이용해 악천후 속에서도 조종사에게 착륙 유도 지시를 내릴 수 있게 하는 시스템으로, 특히 전후 베를린 공수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스템의 개발 공로를 인정받아 앨버레즈는 1945년 미국 항공 협회(National Aeronautic Association)로부터 콜리어 트로피를 수상했다.[12][13] GCA 시스템은 그 효율성과 안정성 덕분에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1943년 여름, 앨버레즈는 GCA 시스템 테스트와 영국 공군(RAF) 교육을 위해 영국에 머물렀다. 이때 젊은 레이더 기술자였던 아서 C. 클라크를 만나 교류했으며, 이는 클라크의 소설 《활주로》(Glide Path) 집필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후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갔다.
4. 1. MIT 방사능 연구소
1940년 티자드 미션(Tizard Mission)을 통해 미국 과학자들은 영국의 공동 마그네트론(cavity magnetron) 기술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단파장 펄스 레이더 개발의 핵심 기술이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국방 연구 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 NDRC)는 마이크로웨이브 레이더의 군사적 응용을 위해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중앙 연구소 설립을 결정했다. 어니스트 로런스는 자신의 연구팀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이 새로운 연구소로 보냈는데, 앨버레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앨버레즈는 1940년 11월 11일, 방사선 연구소(Radiation Laboratory, Rad Lab)에 합류했다.앨버레즈는 여러 레이더 프로젝트에 기여했다. 초기에는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는 피아식별장치(Identification Friend or Foe, IFF) 레이더 비컨(현재는 트랜스폰더라고 불림) 개선 작업에 참여했다. 또한 VIXEN 시스템 개발에도 참여했는데, 이는 적 잠수함이 새로운 공중 마이크로웨이브 레이더 탐지를 회피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었다. 기존 레이더는 항공기가 접근할수록 신호가 강해져 잠수함이 이를 감지하고 잠수하여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VIXEN은 잠수함까지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하는 강도로 신호를 보내, 항공기가 접근할수록 잠수함이 수신하는 신호는 오히려 약해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잠수함은 항공기가 멀어지고 있다고 착각하여 잠수하지 않았다.[10][11]
초기 프로젝트 중 하나는 영국의 장파 레이더를 공동 마그네트론 기반의 새로운 마이크로웨이브 센티미터 대역 레이더로 전환하는 장비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마이크로웨이브 조기 경보 시스템(Microwave Early Warning, MEW) 연구 중, 앨버레즈는 위상 배열 안테나(phased array antenna)를 발명했다. 이 안테나는 원치 않는 측엽(side lobe) 신호를 억제하고, 기계적 스캔 없이 전자적으로 방향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는 최초의 마이크로웨이브 위상 배열 안테나였으며, 앨버레즈는 MEW 외에도 두 개의 다른 레이더 시스템에 이 기술을 적용했다. 이 안테나 기술은 이글(Eagle) 정밀 폭격 레이더 개발로 이어졌다. 이글 레이더는 악천후나 구름 속에서도 정밀 폭격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 후반기에 완성되어 많은 B-29 폭격기에 장착되었고 성능은 우수했으나,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게 도입되었다.
앨버레즈가 개발한 시스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지상 유도 접근(Ground Controlled Approach, GCA)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항공 분야, 특히 전후 베를린 공수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GCA는 앨버레즈가 개발한 다이폴 안테나를 사용하여 매우 높은 각도 분해능(angular resolution)을 구현했다. 지상 관제사는 정밀 디스플레이를 보면서 조종사에게 음성으로 지시를 내려 항공기를 활주로까지 안전하게 유도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간단하고 효과적이어서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조종사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GCA 시스템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미군은 전쟁 후에도 오랫동안 사용했으며, 1980년대까지 일부 국가에서 운용되었다. 앨버레즈는 "모든 기상 및 교통 상황에서 항공기의 안전한 착륙을 위한 지상 관제 접근 시스템의 개념과 개발에 대한 눈에 띄는 뛰어난 주도성"을 인정받아 1945년 미국 항공 협회(National Aeronautic Association)로부터 콜리어 트로피를 수상했다.[12][13]
1943년 여름, 앨버레즈는 영국에서 GCA 시스템을 시험하고, 악천후 속에서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항공기들을 착륙시키는 시연을 했으며, 영국 측에 시스템 사용법을 교육했다. 이때 영국 공군(RAF)의 레이더 기술자였던 젊은 아서 C. 클라크를 만났다. 클라크는 이후 자신의 소설 《활주로》(Glide Path)에서 방사선 연구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앨버레즈를 모델로 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앨버레즈와 클라크는 이후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갔다.
4. 2. IFF 트랜스폰더 및 VIXEN 시스템
1940년 영국의 티자드 미션(Tizard Mission)은 미국의 주요 과학자들에게 단파장 펄스 레이더(radar)를 생성하는 공동 마그네트론(cavity magnetron)의 성공적인 적용을 보여주었다. 몇 달 전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이 설립한 국방 연구 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는 마이크로웨이브 레이더의 군사적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에 중앙 국가 연구소를 설립했다. 로렌스는 앨버레즈를 포함한 그의 최고 연구진들을 즉시 영입했고, 앨버레즈는 1940년 11월 11일 방사선 연구소(Radiation Laboratory)로 알려진 이 새로운 연구소에 합류했다. 앨버레즈는 초기의 식별 아군 식별(Identification Friend or Foe, IFF) 레이더 비컨(현재 트랜스폰더(transponders)라고 함) 개선에서부터, 적군 잠수함이 새로운 공중 마이크로웨이브 레이더에 의해 탐지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VIXEN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여러 레이더 프로젝트에 기여했다.VIXEN 시스템은 적군 잠수함이 레이더 신호가 강해지는 것을 감지하고 잠수하여 공격을 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 시스템은 잠수함까지의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하는 강도의 레이더 신호를 전송했다. 이로 인해 레이더를 탑재한 항공기가 잠수함에 접근할수록 잠수함이 수신하는 신호는 오히려 약해졌고, 잠수함은 항공기가 멀어지고 있다고 착각하여 잠수하지 않게 되었다.[10][11]
4. 3. 마이크로파 조기 경보 시스템(MEW) 및 위상 배열 안테나
1940년 영국의 티자드 미션(Tizard Mission)은 미국의 주요 과학자들에게 단파장 펄스 레이더(radar)를 생성하는 공동 마그네트론(cavity magnetron)의 성공적인 적용을 보여주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국방 연구 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는 마이크로파 레이더의 군사적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중앙 국가 연구소를 설립했다. 로렌스는 앨버레즈를 포함한 그의 최고 연구진들을 즉시 영입했고, 앨버레즈는 1940년 11월 11일에 방사선 연구소(Radiation Laboratory)로 알려진 이 새로운 연구소에 합류했다. 앨버레즈는 초기의 피아식별장치(Identification Friend or Foe, IFF) 레이더 비컨(현재 트랜스폰더(transponders)라고 함) 개선에서부터, 적군 잠수함이 새로운 공중 마이크로웨이브 레이더에 의해 탐지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VIXEN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여러 레이더 프로젝트에 기여했다. 적군 잠수함은 레이더 신호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수하여 공격을 피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VIXEN 시스템은 잠수함까지의 거리 세제곱에 비례하는 강도의 레이더 신호를 전송하여, 잠수함에 접근할수록 오히려 잠수함이 감지하는 신호는 약해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잠수함은 레이더를 탑재한 비행기가 멀어지고 있다고 착각하여 잠수하지 않았다.[10][11]앨버레즈가 참여한 초기 프로젝트 중 하나는 영국의 장파 레이더를 공동 마그네트론으로 가능해진 새로운 마이크로웨이브 센티미터 대역 레이더로 전환하기 위한 장비를 만드는 것이었다. 마이크로파 조기 경보 시스템(Microwave Early Warning, MEW) 개발 과정에서 앨버레즈는 원치 않는 측엽(side lobe)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기계적 스캐닝 없이 전자적으로 스캔할 수 있는 위상 배열 안테나(phased array)/선형 다이폴 배열 안테나(linear dipole array antenna)를 발명했다. 이는 최초의 마이크로웨이브 위상 배열 안테나였으며, 앨버레즈는 이를 MEW뿐만 아니라 두 개의 다른 레이더 시스템에도 적용했다. 이 안테나 기술을 활용한 이글(Eagle) 정밀 폭격 레이더는 악천후나 구름 속에서도 정밀 폭격을 가능하게 했다. 이글 레이더는 전쟁 후반기에 완성되어 많은 B-29 폭격기에 장착되었고 성능은 우수했지만, 전쟁의 판도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게 도입되었다.
앨버레즈가 개발한 레이더 시스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지상 접근 관제(Ground Controlled Approach, GCA)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항공 분야, 특히 전후 베를린 공수(Berlin airlift)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GCA는 매우 높은 각도 분해능(angular resolution)을 달성하기 위해 앨버레즈의 다이폴 안테나를 사용했으며, 지상 기반 레이더 운영자가 특수 정밀 디스플레이를 보면서 조종사에게 음성 명령을 전달하여 착륙하는 비행기를 활주로까지 안전하게 유도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시스템은 간단하고 직접적이며, 특별한 훈련을 받지 않은 조종사에게도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GCA 시스템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군대는 전쟁 후에도 수년간 계속 사용했으며, 1980년대에도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운용되었다. 앨버레즈는 "모든 기상 및 교통 상황에서 항공기의 안전한 착륙을 위한 지상 관제 접근 시스템의 개념과 개발에 대한 뛰어난 주도성"을 인정받아 1945년 미국 항공 협회(National Aeronautic Association)의 콜리어 트로피(Collier Trophy)를 수상했다.[12][13]
앨버레즈는 1943년 여름 영국에서 GCA 시스템을 테스트하고, 악천후 속에서 전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들을 착륙시키는 시연을 했으며, 시스템 사용법을 영국군에게 교육했다. 이때 그는 영국 공군(RAF)의 레이더 기술자였던 젊은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를 만났다. 클라크는 이후 레이더 연구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활주로》(Glide Path)를 썼는데, 이 소설에는 앨버레즈를 모델로 한 인물이 등장한다. 클라크와 앨버레즈는 이후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갔다.
4. 4. 지상 유도 진입 방식(GCA)
앨버레즈가 개발한 레이더 시스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지상 유도 접근(Ground Controlled Approach, GCA)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항공 분야,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를린 공수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GCA는 앨버레즈가 마이크로웨이브 조기 경보 시스템(Microwave Early Warning, MEW) 연구 중 발명한 다이폴 안테나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높은 각도 분해능(angular resolution)을 구현했다. 지상에 있는 레이더 운영자는 특수한 정밀 디스플레이를 통해 비행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조종사에게 무선 통신으로 착륙 지침을 전달하여 악천후 속에서도 안전하게 비행기를 활주로로 유도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사용법이 간단하고 직관적이어서, 별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조종사들도 쉽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GCA 시스템의 성공은 매우 커서, 미군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십 년간 이 시스템을 운용했으며, 1980년대까지도 일부 국가에서는 GCA를 사용했다. 앨버레즈는 "모든 기상 및 교통 상황에서 항공기의 안전한 착륙을 위한 지상 관제 접근 시스템의 개념과 개발에 대한 눈에 띄는 뛰어난 주도성"을 인정받아, 1945년 미국 항공 협회(National Aeronautic Association)로부터 콜리어 트로피(Collier Trophy)를 수상했다.[12][13]
앨버레즈는 1943년 여름, 영국에서 GCA 시스템을 직접 테스트하고, 악천후 속에서 전투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비행기들을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영국 공군(RAF) 관계자들에게 시스템 사용법을 교육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시 젊은 영국 공군 레이더 기술자였던 아서 C. 클라크를 만났다. 클라크는 훗날 레이더 연구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활주로』(Glide Path영어)를 집필했으며, 이 소설에는 앨버레즈를 모델로 한 인물이 등장한다. 앨버레즈와 클라크는 이후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갔다.
5. 맨해튼 계획
1943년 가을,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제안으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의 원자로 탐지 방법을 연구했으나, 1944년 봄 로스앨러모스에 합류한 뒤에는 플루토늄 폭탄 "팻 맨" 개발에 집중했다.
플루토늄 폭탄의 핵심 과제는 내폭 방식에 필요한 정밀한 동시 폭발 기술 확보였다. 앨버레즈는 대학원생 로렌스 H. 존스턴과 함께 기존의 뇌관 대신 폭발 브리지와이어 신관(EBW)을 개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 EBW 신관은 내폭형 핵무기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관련 RaLa 실험 감독도 맡았다.
또한, 원자폭탄의 폭발력을 측정하기 위한 항공 투하용 측정 장비(라디오존데) 개발을 이끌었다. 미국 육군 중령으로 임관하여 트리니티 핵실험을 B-29 관측기에서 직접 목격했으며, 히로시마 원폭 투하 시에는 관측기 ''더 그레이트 아티스트''에 탑승하여 폭발력을 측정했다. 나가사키 때는 측정 장비에 당시 도쿄 제국대학 교수였던 일본의 물리학자 사가네 료키치에게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투하시켰다.[59][61]
5. 1.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합류

1943년 가을,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제안으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오펜하이머는 그가 로스앨러모스에 합류하기 전 몇 달간 시카고 대학교에서 엔리코 페르미와 함께 연구할 것을 제안했다. 이 시기,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알바레즈에게 독일의 원자로 가동 여부와 위치를 파악할 방법을 모색하도록 요청했다. 알바레즈는 비행기에 원자로에서 방출되는 방사성 기체, 특히 크세논-133을 탐지하는 시스템을 탑재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 장비는 독일 상공을 비행했지만, 독일이 연쇄 반응이 가능한 원자로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방사성 크세논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는 핵분열 생성물을 정보 수집에 활용한 최초의 시도였으며, 전후 중요한 기술이 되었다.[58]
레이더 연구와 페르미와의 협업을 마친 알바레즈는 1944년 봄,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했다. 당시 "리틀 보이"(우라늄 폭탄) 개발은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기에, 그는 "팻 맨"(플루토늄 폭탄) 설계에 투입되었다. 우라늄 폭탄에 사용된 총형 방식은 플루토늄에 적용하기 어려웠다. 플루토늄은 자발 중성자 방출률이 높아, 두 개의 임계 질량 이하 덩어리가 합쳐지기도 전에 핵분열이 시작되어 폭발력이 약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임계 상태의 플루토늄 구체를 폭약으로 압축하여 훨씬 작고 밀도 높은 핵심을 만드는 내폭 방식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는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내폭 방식의 핵심은 플루토늄 구체 주위에 설치된 32개의 폭약을 마이크로초 단위의 오차 내에서 동시에 터뜨려 대칭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뇌관 방식으로는 필요한 동시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알바레즈는 대학원생 로렌스 H. 존스턴과 함께 대형 축전기를 이용해 각 폭약 렌즈에 고전압을 직접 가하고, 뇌관을 폭발 브리지와이어 신관으로 대체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이 새로운 방식은 32개의 폭약을 100만 분의 몇 초 이내의 오차로 동시에 폭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내폭형 핵무기 개발의 결정적인 돌파구가 되었다. 그는 RaLa 실험의 감독도 맡았다. 알바레즈는 훗날 우라늄 폭탄과 플루토늄 폭탄의 제작 난이도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대의 무기급 우라늄의 경우 배경 중성자 비율이 매우 낮아서 테러리스트들이 그러한 물질을 가지고 있다면 단순히 한쪽 물질을 다른 쪽 물질 위에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고수율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리된 U-235가 있다면 핵폭발을 일으키는 것이 간단한 작업이지만, 플루토늄만 있다면 폭발시키는 것이 내가 아는 가장 어려운 기술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맨해튼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알바레즈와 존스턴은 원자 폭탄의 폭발력을 측정하는 장비를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항공기에서 낙하산으로 투하되는 교정된 마이크로폰과 송신기 세트를 개발하여 폭발 시 발생하는 충격파의 강도를 측정하고, 이를 통해 폭탄의 에너지를 계산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육군 중령으로 임관한 알바레즈는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핵실험을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관측기)에 탑승하여 관찰했다. 이 비행기에는 알베르타 계획 동료인 해롤드 애그뉴와 디크 파슨스(각각 대위 계급)도 함께 있었다. 당시의 관측 기록과 스케치가 남아 있다.[http://www.dannen.com/decision/alvarez.html]
1945년 8월 6일, 알바레즈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관측기인 ''더 그레이트 아티스트'' B-29 슈퍼포트리스에 존스턴과 함께 탑승하여 리틀 보이의 폭발 효과를 측정했다. 티니안 기지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당시 네 살이던 아들 월터에게 원폭 투하에 관한 편지를 쓰기도 했다.[https://www.docsteach.org/documents/document/letter-from-luis-alvarez-to-his-son]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시에는 직접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지만, 존스턴이 ''더 그레이트 아티스트''를 타고 나가사키 상공에서 같은 장비로 폭발력을 측정했다. 이때 투하된 라디오존데에는 알바레즈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방사선 연구소 동료이자 당시 도쿄 제국대학 교수였던 사가네 료키치에게 보내는 편지가 동봉되었다. 편지에는 핵무기의 위력을 잘 아는 사가네가 일본 정부에 항복을 권고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59][60][61][62]
5. 2. 독일 원자로 탐색
1943년 가을, 앨버레즈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로부터 로스앨러모스에서 진행 중이던 맨해튼 계획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오펜하이머는 그가 로스앨러모스로 합류하기 전에 몇 달간 시카고 대학교에서 엔리코 페르미와 함께 연구하기를 제안했다. 이 시기에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앨버레즈에게 나치 독일이 원자로를 가동하고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그 위치를 파악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앨버레즈는 항공기에 특수 탐지 시스템을 탑재하여, 원자로 가동 시 발생하는 방사성 기체, 특히 크세논-133을 탐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에 따라 장비를 실은 비행기가 독일 영공을 비행했지만, 당시 독일은 연쇄 반응이 가능한 수준의 원자로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사성 크세논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는 핵분열 생성물을 정보 수집 목적으로 활용하려 한 최초의 시도였으며, 이 개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5. 3. 팻 맨 개발과 기폭 장치
1943년 가을, 알바레즈는 로버트 오펜하이머로부터 로스앨러모스의 맨해튼 계획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오펜하이머는 그가 로스앨러모스에 합류하기 전에 몇 달간 시카고 대학교에서 엔리코 페르미와 함께 연구할 것을 제안했다. 이 시기 동안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알바레즈에게 독일의 원자로 가동 여부와 위치를 파악할 방법을 모색하도록 요청했다. 알바레즈는 항공기에 원자로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기체, 특히 크세논-133을 탐지하는 시스템을 탑재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장비는 독일 상공을 비행했지만, 당시 독일은 연쇄 반응이 가능한 원자로를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사성 크세논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는 핵분열 생성물을 정보 수집에 활용하려는 최초의 시도였으며, 전후 중요한 기술로 발전하게 된다.
레이더 연구와 페르미와의 협업을 거친 알바레즈는 1944년 봄, 다른 동료들보다 다소 늦게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했다. 당시 "리틀 보이"(우라늄 폭탄) 개발은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기에, 그는 "팻 맨"(플루토늄 폭탄) 설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라늄 폭탄에 사용된 총형 방식(두 개의 임계 질량 이하 물질을 합치는 방식)은 플루토늄에는 적용하기 어려웠다. 플루토늄은 자발 중성자 방출률이 높아, 두 부분이 접근하는 순간 핵분열이 시작되어 충분한 에너지가 방출되기 전에 열과 팽창으로 분리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의 임계 상태의 플루토늄 구체를 폭약으로 압축하여 훨씬 작고 밀도 높은 핵심을 만드는 내폭 방식이 채택되었으나, 이는 당시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플루토늄 핵심을 필요한 밀도로 압축하기 위해서는 구형 핵심 주위에 배치된 32개의 폭약을 동시에 폭발시켜 대칭적인 충격파를 만들어야 했다. 뇌관을 이용한 기존의 폭파 기술로는 마이크로초 단위의 정밀한 동시 폭발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알바레즈는 대학원생이었던 로렌스 H. 존스턴에게 대형 축전기를 사용하여 각 폭약 렌즈에 고전압을 직접 공급하고, 뇌관 대신 폭발 브리지와이어 신관(EBW)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이 EBW 신관은 32개의 폭약을 10분의 수 마이크로초 이내의 오차로 동시에 폭발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내폭형 핵무기 개발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또한 RaLa 실험의 감독도 맡았다. 알바레즈는 훗날 다음과 같이 썼다.
:현대의 무기급 우라늄의 경우 배경 중성자 비율이 매우 낮아서 테러리스트들이 그러한 물질을 가지고 있다면 단순히 한쪽 물질을 다른 쪽 물질 위에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고수율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리된 U-235가 있다면 핵폭발을 일으키는 것이 간단한 작업이지만, 플루토늄만 있다면 폭발시키는 것이 내가 아는 가장 어려운 기술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존스턴과 다시 협력하여 알바레즈는 맨해튼 계획의 마지막 임무 중 하나로, 원자 폭발 시 발생하는 충격파의 강도를 측정하기 위한 장비 개발을 이끌었다. 이는 항공기에서 낙하산으로 투하되는 일련의 보정된 마이크로폰/송신기(라디오존데)로 구성되었으며, 과학자들이 폭탄의 에너지를 계산하는 데 사용되었다. 미국 육군 중령으로 임관한 그는 트리니티 핵실험 당시 B-29 슈퍼포트리스 관측기에 탑승하여 폭발을 직접 목격했다. 이 비행기에는 동료 알베르타 계획 멤버인 해롤드 애그뉴와 디크 파슨스(각각 대위 계급)도 함께 있었다.
1945년 8월 6일, 알바레즈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에놀라 게이를 뒤따르던 관측기 ''더 그레이트 아티스트''에 존스턴과 함께 탑승하여 리틀 보이 폭탄의 폭발 효과를 측정했다. 티니안 기지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당시 네 살이던 아들 월터에게 원폭 투하에 관한 편지를 쓰기도 했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알바레즈는 직접 탑승하지 않았지만, 관측을 위해 투하된 라디오존데 3개에는 그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방사선 연구소 시절 동료이자 당시 도쿄 제국대학 교수였던 사가네 료키치에게 보내는 편지가 동봉되었다. 핵무기의 위력을 잘 이해하는 물리학자인 사가네가 일본 정부에 항복을 권유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이었다.[59] 마스코 켄조[60]는 나가사키에 투하된 라디오존데의 뚜껑을 열고 이 손편지를 발견한 인물이다.[61] 사가네 료키치 박사에게 보낸 사인이 있는 이 "원폭 편지"는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 기증되어 2023년 "원폭 자료관 수장 자료 전"에 전시되었다.[62]
5. 4. 폭발력 측정 및 일본 원폭 투하 관측
앨버레즈는 1944년 봄,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로스앨러모스에 합류했다. 당시 "리틀 보이"(우라늄 폭탄) 개발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팻 맨"(플루토늄 폭탄) 설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플루토늄은 우라늄과 달리 총형 방식으로는 핵폭탄을 만들기 어려웠다. 플루토늄 자체의 높은 자발 핵분열 비율 때문에, 두 개의 임계 질량 이하 덩어리가 합쳐지기도 전에 너무 일찍 핵분열 반응이 시작되어 폭탄이 제대로 터지지 않고 분해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플루토늄 폭탄은 플루토늄 구체 주변에 설치된 폭약을 터뜨려 플루토늄을 순간적으로 압축시켜 임계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내폭 방식으로 개발 방향이 정해졌다. 하지만 구형 플루토늄 핵심을 균일하게 압축하려면 32개의 폭약을 거의 동시에 터뜨려야 했는데, 이는 당시 기술로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기존의 뇌관 방식으로는 마이크로초(백만분의 1초) 단위의 정밀한 동시 폭발 제어가 힘들었다.
앨버레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원생이었던 로렌스 H. 존스턴에게 새로운 방식을 지시했다. 각 폭약 렌즈에 대형 축전기를 이용해 고전압을 직접 전달하고, 기존 뇌관 대신 폭발 브리지와이어 신관(exploding-bridgewire detonator)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 새로운 신관 덕분에 32개의 폭약을 10분의 수 마이크로초라는 극히 짧은 시간 오차 내에서 동시에 폭발시킬 수 있었다. 이 기술은 내폭형 핵무기 개발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또한 RaLa 실험을 감독했다. 앨버레즈는 나중에 "현대의 무기급 우라늄의 경우 배경 중성자 비율이 매우 낮아서 테러리스트들이 그러한 물질을 가지고 있다면 단순히 한쪽 물질을 다른 쪽 물질 위에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도 고수율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리된 U-235가 있다면 핵폭발을 일으키는 것이 간단한 작업이지만, 플루토늄만 있다면 폭발시키는 것이 내가 아는 가장 어려운 기술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고 썼다.
맨해튼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앨버레즈는 존스턴과 함께 원자 폭탄의 폭발력을 측정하는 장비를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장비는 폭발 지점 근처 상공에서 비행기가 낙하산으로 투하하는 일련의 마이크로폰과 송신기(라디오존데)로 구성되었으며, 폭발 시 발생하는 폭풍파의 압력을 측정하여 폭탄의 에너지를 계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육군 중령으로 임관된 그는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핵실험을 B-29 슈퍼포트리스 관측기에서 직접 지켜보았다. 이 비행기에는 동료 알베르타 계획 멤버인 해롤드 애그뉴와 디크 파슨스도 함께 탑승했다. 당시의 스케치 두 장을 포함한 보고서가 남아 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당시, 앨버레즈는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 ''더 그레이트 아티스트''에 존스턴과 함께 탑승하여 리틀 보이의 폭발 위력을 측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티니안 기지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당시 네 살이던 아들 월터에게 원폭 투하에 관한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흘 뒤인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앨버레즈는 관측기에 탑승하지 않았지만, 그가 개발한 측정 장비(라디오존데)는 존스턴에 의해 ''더 그레이트 아티스트''에서 투하되어 폭발력을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특히 나가사키에 투하된 라디오존데에는 앨버레즈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시절 동료이자 당시 도쿄 제국대학 교수였던 일본의 물리학자 사가네 료키치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가 동봉되었다. 편지 내용은 핵무기의 파괴력을 잘 아는 사가네 교수가 일본 정부에 조속한 항복을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59][61] 이 편지는 실제로 나가사키에서 발견되어 사가네 교수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60][62]
6. 전후 연구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로 돌아온 앨버레즈는 전쟁 중 얻은 레이더 기술 경험을 바탕으로 입자 가속기 개선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이는 싱크로사이클로트론과 베바트론 건설로 이어졌고, 입자 물리학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도널드 글레이저의 거품 상자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액체 수소 거품 상자를 개발하고 이를 이용한 연구로 새로운 소립자와 공명 상태를 다수 발견하여 196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14]
1964년에는 고고도 입자 물리학 실험(HAPPE)을 제안했는데, 초기에는 초고에너지 입자 연구를 위한 초전도 자석 활용을 목표로 했으나 점차 우주론과 초기 우주 연구로 초점이 옮겨갔다.[15] 이는 훗날 우주 배경 복사를 연구한 COBE 위성 실험의 선구적인 연구로 평가받는다.[15]
또한 1965년에는 우주선의 뮤온을 이용해 이집트 피라미드 내부를 투시하여 숨겨진 방을 찾는 뮤온 단층 촬영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실행했다.[16] 비록 새로운 방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이는 물리학 기술을 고고학에 접목한 혁신적인 시도였다.
더불어 1966년 공개된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의 자프루더 필름을 광학 및 사진 분석 기법으로 면밀히 조사하여, 대통령의 움직임이 뒤에서 총격을 받았다는 사실과 일치함을 밝히는 등 사건 분석에 기여했다.
6. 1. 수소 거품 상자 개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정교수로 돌아온 앨버레즈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이더 기술 개발 경험을 살려 입자 가속기를 개선할 여러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일부는 실현되었지만, 당시 가장 중요한 진전은 에드윈 맥밀런이 제시한 위상 안정성 개념을 바탕으로 개발된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이었다. 어니스트 로렌스가 이끌던 연구팀은 이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1954년에 베바트론을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양성자 가속기였다. 베바트론은 많은 새로운 입자를 생성할 수 있었지만, 생성된 입자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감지하고 분석하는 기술은 아직 부족했다.
도널드 글레이저가 개발한 거품 상자는 입자의 궤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장치였다. 앨버레즈는 이 장치를 액체 수소로 작동시킬 수 있다면 입자 연구에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소의 원자핵인 양성자는 베바트론에서 생성된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연구하기에 가장 단순하고 이상적인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은 크기의 액체 수소 거품 상자를 만드는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로렌스에게 이 장치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글레이저가 처음 만든 거품 상자는 디에틸 에테르를 채운 1 cm × 2 cm 크기의 작은 유리 원통이었다. 내부 압력을 갑자기 낮추면 액체는 일시적으로 과열된 상태가 되고, 이 상태에서 입자가 통과하면 그 경로를 따라 액체가 끓어오르며 궤적이 나타났다. 글레이저는 자발적인 끓음이 일어나기 전까지 몇 초 동안 과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앨버레즈의 연구팀은 이를 발전시켜 1.5인치, 2.5인치, 4인치, 10인치, 15인치 등 점차 크기를 키운 액체 수소 거품 상자를 만들었다. 이 거품 상자들은 금속으로 제작되었고, 입자 궤적을 사진으로 촬영할 수 있도록 유리창이 달려 있었다. 또한, 가속기에서 입자 빔이 나오는 순간과 동기화되어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사진을 찍은 후 다음 빔이 오기 전에 빠르게 압력을 다시 높여 재사용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최종적으로 약 약 2.13m 길이에 달하는 거대한 액체 수소 거품 상자가 제작되었다. 이 연구에는 수십 명의 물리학자와 대학원생, 수백 명의 엔지니어와 기술자가 참여했다. 연구팀은 수백만 장의 입자 상호작용 사진을 촬영하고, 이 사진들을 측정하고 분석하기 위한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과정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입자들과 공명 상태를 다수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앨버레즈는 196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이유는 "수소 거품 상자와 데이터 분석 기술 개발을 통해 가능해진, 특히 다수의 공명 상태 발견을 포함한, 소립자 물리학에 대한 결정적인 공헌"이었다.[14]
6. 2. 우주선 연구 및 피라미드 투시
1964년, 앨버레즈는 고고도 입자 물리학 실험(HAPPE, High Altitude Particle Physics Experiment)을 제안했다. 이는 원래 초고에너지 입자 상호작용 연구를 위해 고고도로 운반되는 대형 초전도 자석을 사용하는 구상이었으나,[15] 시간이 지나면서 실험의 초점은 우주론과 초기 우주에서의 입자 및 방사선 역할 연구로 바뀌었다. 이 연구는 고고도 기구와 U-2 항공기를 이용해 검출기를 고고도로 운반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으며, 우주 배경 복사 연구를 위한 COBE 위성 실험의 초기 형태로 평가받는다. COBE 실험은 훗날 조지 스무트와 존 매더에게 20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주었다.[15]
앨버레즈는 1965년, 이집트 피라미드 내부에 숨겨진 방을 찾기 위해 뮤온 단층 촬영 기법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우주선(cosmic rays)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당시 고에너지 입자 물리학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되던 스파크 상자를 카프레 피라미드 내부의 알려진 방 아래에 설치하는 계획이었다. 여러 방향에서 들어오는 우주선의 수를 측정하여, 상부 암석 구조 내부에 빈 공간(방)이 있는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16]
앨버레즈는 미국과 이집트의 물리학자 및 고고학자들로 팀을 구성하여 기록 장비를 제작하고 실험을 시작했다. 그러나 1967년 발발한 6일 전쟁으로 인해 실험은 일시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실험은 재개되었고, 1969년까지 우주선 투과 데이터를 기록하고 분석했다. 분석 결과, 피라미드 전체 부피의 19%를 조사했으나 해당 영역 내에서는 새로운 방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미국 물리학회에 보고했다.
6. 3.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조사
1966년 11월, ''라이프'' 잡지는 1963년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당시 촬영된 자프루더 필름의 사진들을 공개했다. 이 필름은 암살 사건의 가장 중요한 영상 기록으로 여겨진다. 광학과 사진 분석 전문가였던 앨버레즈는 이 사진들에 흥미를 느끼고 필름 분석에 착수했다.앨버레즈는 대통령의 머리가 총격 후 뒤로 젖혀지는 현상이 뒤에서 총을 맞았다는 사실과 물리적으로 일치한다고 이론과 실험을 통해 입증했는데, 이는 '제트 효과(jet effect)' 이론으로 알려졌다. 이 이론은 이후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개선되고 뒷받침되었다.[17][18]
또한 앨버레즈는 총격 시점, 카메라를 흔들리게 한 충격파, 카메라의 촬영 속도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그는 FBI 사진 분석가들이 간과하거나 잘못 파악한 여러 세부 사항을 지적하기도 했다. 앨버레즈는 자신의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는 다른 물리학자들을 위해 비공식적인 조언과 설명을 담은 논문을 작성했다.
7. 공룡 멸종 가설
1980년, 앨버레즈는 아들인 지질학자 월터 알바레즈와 핵화학자 프랭크 아사로, 헬렌 미셸과 함께 공룡을 포함한 생물의 대량 멸종 원인에 대한 혁신적인 가설을 제시했다.[2][19] 이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업적 중 하나로, 흔히 알바레즈 가설이라고 불린다.
이 연구는 1970년대 월터 앨버레즈가 이탈리아 구비오에서 백악기-팔레오기 경계(K-Pg 경계, 당시 K-T 경계)를 나타내는 얇은 점토층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2] 루이스 앨버레즈는 이 점토층 샘플을 중성자 방사화 분석 기법으로 분석하여, 지구 표면에는 드물지만 운석에는 풍부한 원소인 이리듐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농도로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냈다.[19][63]
이를 근거로 앨버레즈 연구팀은 약 6,600만 년 전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으며, 이 충돌로 발생한 급격한 환경 변화가 백악기-팔레오기 멸종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19] 이 가설은 발표 초기 지질학계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이후 점토층에서 충격파의 증거인 석영 결정, 미세 다이아몬드 등이 추가로 발견되고,[14] 결정적으로 1990년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거대한 칙술루브 충돌구가 발견되면서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20] 현재 소행성 충돌설은 데칸 트랩의 화산 활동 등 다른 요인들과 함께 거론되기도 하지만, 백악기 말 대량 멸종의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인정받고 있다.[20]
7. 1. K-T 경계층 발견과 이리듐 농도 분석
1980년, 앨버레즈는 아들인 지질학자 월터 알바레즈 및 핵화학자 프랭크 아사로, 헬렌 미셸과 함께 지구 역사상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평가받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2]
연구의 시작은 1970년대 이탈리아 중부에서 지질학 연구를 하던 월터 앨버레즈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구비오 지역의 한 협곡 벽에서 백악기-팔레오기 경계(K-Pg 경계, 당시에는 백악기-제3기 경계 또는 K-T 경계로 불림)를 사이에 둔 석회암 노두를 발견했다. 이 경계 바로 위에는 얇은 점토층이 있었는데, 이 층은 공룡을 포함한 수많은 생물이 멸종한 시기와 일치했다. 월터는 이 점토층의 정체와 형성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임을 아버지 루이스에게 알렸고, 함께 이 문제를 풀기로 했다.[2]
루이스 앨버레즈는 로렌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의 핵화학자들과 협력할 수 있었다. 그는 프랭크 아사로, 헬렌 미셸과 함께 중성자 방사화 분석 기법을 이용해 점토층의 성분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해당 점토층에서 비정상적으로 높은 농도의 이리듐이 검출되었다. 이리듐은 지구 표면에는 드물지만 운석에는 풍부하게 존재하는 원소이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앨버레즈 부자와 아사로, 미셸은 백악기-팔레오기 멸종 사건(당시 백악기-제3기 멸종)의 원인이 거대한 운석 충돌과 같은 외계적 사건일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19][63] 이 가설은 후에 알바레즈 가설로 알려지게 된다. 논문 발표 이후 몇 년간의 추가 연구를 통해, 해당 점토층에서는 이리듐 외에도 그을음, 유리질 구체, 충격받은 석영 결정, 미세 다이아몬드, 그리고 고온 고압 환경에서만 생성되는 희귀 광물들이 발견되어 운석 충돌설을 뒷받침했다.[14]
앨버레즈 가설은 발표 초기 지질학계로부터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고, 때로는 격렬한 과학적 논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10년 후인 1990년대 초, 멕시코 유카탄 반도 앞바다에서 거대한 칙술루브 충돌구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가설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확보되었다. 이후 연구들은 공룡 멸종이 과거에 생각했던 수백만 년이 아닌, 지질학적으로 매우 짧은 시간(수천 년 이내)에 걸쳐 빠르게 일어났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데칸 트랩의 대규모 화산 활동 등 다른 멸종 원인 가설들도 존재하지만, 운석 충돌설은 현재 관련 학계에서 주요 가설로 인정받고 있다.[20]
7. 2. 소행성 충돌설 제기
1980년, 알바레즈는 아들인 지질학자 월터 알바레즈 및 핵화학자 프랭크 아사로, 헬렌 미셸과 함께 지구 역사상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평가받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2] 이들은 백악기-팔레오기 경계(K-Pg 경계, 당시에는 K-T 경계로 불림) 점토층에서 높은 농도의 이리듐을 발견하고, 이것이 운석 충돌의 증거이며 이 충돌이 백악기-팔레오기 대량절멸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63][19]
이 연구는 1970년대 월터 알바레즈가 이탈리아 중부에서 수행한 지질학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구비오 지역 협곡 벽에서 백악기와 팔레오기 지층 사이의 K-Pg 경계에 해당하는 얇은 점토층을 발견했다. 월터는 이 점토층이 공룡을 포함한 수많은 생물이 멸종한 시기와 일치하지만, 그 원인과 점토의 성분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을 아버지 루이스에게 알렸다.[2]
루이스 알바레즈는 로렌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의 핵화학자 프랭크 아사로와 헬렌 미셸에게 연락하여 중성자 방사화 분석 기법으로 점토층 샘플 분석을 의뢰했다.[2][19] 분석 결과, 전 세계 여러 지역의 K-Pg 경계 점토층에서 공통적으로 이리듐이 매우 높은 농도로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리듐은 지각에는 드물지만 소행성이나 혜성에는 풍부한 원소이다.
1980년 발표된 논문에서 알바레즈 연구팀은 이 이리듐이 거대한 소행성 충돌의 결과이며, 이 충돌로 발생한 먼지 구름이 햇빛을 차단하여 지구 기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식물의 광합성을 방해함으로써 공룡을 포함한 당시 생물들의 대량 멸종을 초래했다는 가설을 제안했다.[19] 논문 발표 이후, 추가 연구를 통해 해당 점토층에서 그을음, 유리질 구체, 충격받은 석영 결정, 미세 다이아몬드 등 고온·고압 환경에서만 생성되는 희귀 광물들이 발견되어 소행성 충돌설을 뒷받침했다.[14]
알바레즈 가설은 발표 초기 지질학계로부터 비판을 받으며 격렬한 과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0년 후 알바레즈가 사망한 뒤, 멕시코 유카탄 반도 해안에서 거대한 칙술루브 충돌구의 증거가 발견되면서 이 가설은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20] 이후 다른 연구들을 통해 공룡 멸종이 기존에 생각했던 수백만 년이 아닌, 지질학적으로 짧은 시간인 수천 년에 걸쳐 빠르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데칸 트랩의 화산 활동 증가 등 다른 멸종 원인 가설도 존재하지만, 소행성 충돌설은 여전히 학계에서 가장 유력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0]
7. 3. 칙술루브 충돌구 발견과 가설 입증
1980년, 알바레즈는 아들인 지질학자 월터 알바레즈 및 핵화학자 프랭크 아사로, 헬렌 미셸과 함께 "지구를 문자 그대로 뒤흔든 재앙을 발견했는데, 이는 지구 역사에 관한 위대한 발견 중 하나이다."[2]라고 평가받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1970년대 월터 알바레즈가 이탈리아 중부 구비오에서 지질학 연구를 수행하던 중 시작되었다. 그는 한 협곡 벽에서 백악기-팔레오기 경계(K-Pg 경계, 당시에는 백악기-제3기 경계 또는 K-T 경계로 불림)를 사이에 두고 위아래로 놓인 석회암 노두를 발견했다. 경계 바로 위에는 얇은 점토층이 있었는데, 월터는 아버지에게 이 층이 공룡을 포함한 수많은 생물이 멸종한 시기를 나타내지만, 아무도 그 이유나 점토의 성분을 알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큰 미스터리였고, 그는 이를 풀기로 결심했다.[2]
루이스 알바레즈는 로렌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의 핵화학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프랭크 아사로와 헬렌 미셸과 함께 중성자 방사화 분석 기법을 사용하여 점토층을 연구했다. 1980년, 알바레즈 부자와 아사로, 미셸은 백악기-팔레오기 멸종의 원인이 외계에서 기원했다는, 즉 거대 운석 또는 소행성 충돌이라는 가설을 제기하는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19][63] 이 논문 발표 후 몇 년 동안, 해당 점토층에는 이리듐 외에도 그을음, 유리질 구체, 충격받은 석영 결정, 미세 다이아몬드, 그리고 높은 온도와 압력 조건에서만 형성되는 희귀 광물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14]
1980년 논문의 발표는 지질학계의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종종 신랄한 과학적 논쟁이 뒤따랐다.[20] 그러나 10년 후, 알바레즈가 사망한 뒤 멕시코 유카탄 반도 해안에서 대규모 칙술루브 충돌구의 증거가 발견되면서 이 이론은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다른 연구자들은 나중에 공룡의 백악기-팔레오기 멸종 사건이 이전에 추정되었던 수백만 년이 아니라, 지질학적으로 수천 년에 걸쳐 빠르게 발생했을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데칸 트랩에서의 화산 활동 증가를 포함한 다른 멸종 이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운석 충돌설은 관련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주류 이론으로 남아 있다.[20]
8. 항공 분야 기여
앨버레즈는 과학자로서의 경력 외에도 항공 분야에 깊이 관여하며 중요한 기여를 남겼다. 그는 비행 자체를 즐겼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지상 유도 접근 방식(GCA) 개발과 같은 기술 혁신을 이끌었고, 전후에는 항공 정책 자문에도 참여했다. 그의 항공 관련 활동에는 다양한 군용기 조종 경험과 비행 중 겪었던 특별한 일화들도 포함된다.
8. 1. 레이더 기술과 항공 안전
앨버레즈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과학과 항공이라는 두 개의 별개의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며, 두 분야 모두 거의 동등하게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비행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이러한 경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33년에 비행을 배우기 시작하여 계기 비행 및 다중 엔진 자격까지 취득했고, 이후 50년 동안 1,000시간 이상 비행했으며 대부분 기장으로 비행했다. 그는 "승객들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닌 기장으로서의 역할만큼 만족스러운 활동은 거의 없었다"고 회고했다.앨버레즈는 항공 분야에 여러 중요한 기술적 기여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여러 항공 관련 기술 개발을 이끌었는데, 특히 지상 유도 접근 방식(GCA) 개발은 1945년 콜리어 트로피 수상으로 이어졌다. 또한 레이더 트랜스폰더의 기본 특허를 보유했으며, 이 권리를 미국 정부에 단 1USD에 양도했다.
전쟁 후에도 앨버레즈는 민간 및 군사 항공과 관련된 여러 고위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여기에는 미래 항공 항법 및 항공 교통 관제 시스템을 다루는 미국 연방 항공청 태스크 그룹, 대통령 과학 자문위원회의 군용 항공기 패널, 그리고 과학계가 비핵 전쟁 수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연구하는 위원회 등이 포함된다.
그의 항공 관련 업무는 다양한 경험으로 이어졌다. GCA 시스템 개발 중에는 조종석 외부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저고도 접근 비행을 한 최초의 민간인이 되었다. 또한 B-29 슈퍼포트리스와 록히드 F-104 스타파이터 등 여러 군용 항공기를 부조종사로 조종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마일즈 마스터에 탑승했다가 추락 사고를 겪었지만 생존했다.
8. 2. 군용 항공기 조종 경험
앨버레즈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과학과 항공이라는 두 개의 별개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며, 두 분야 모두 거의 동등하게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비행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이러한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33년부터 비행을 배우기 시작해 계기 비행 및 다중 엔진 자격까지 취득했다. 이후 50년간 1,000시간 이상 비행했으며, 대부분 기장으로 조종했다. 그는 기장으로서 승객의 생명을 책임지는 역할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고 술회했다.앨버레즈는 항공 분야에도 여러 전문적인 기여를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여러 항공 관련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그가 개발을 주도한 지상 유도 접근 방식(GCA)은 1945년 콜리어 트로피를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레이더 트랜스폰더의 기본 특허를 보유했고, 이를 미국 정부에 단 1USD에 양도했다.
전쟁 이후에는 민간 및 군사 항공 관련 여러 고위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여기에는 미래 항공 항법 및 항공 교통 관제 시스템에 관한 미국 연방 항공청 태스크 그룹, 대통령 과학 자문위원회 군용 항공기 패널, 그리고 비핵 전쟁 수행 능력 향상을 위한 과학계의 기여 방안을 연구하는 위원회 등이 포함된다.
앨버레즈의 항공 관련 활동은 여러 흥미로운 경험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GCA 시스템 개발 중에는 조종석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저고도 접근 비행을 한 최초의 민간인이 되었다. 또한 B-29 슈퍼포트리스와 록히드 F-104 스타파이터 등 다수의 군용 항공기를 부조종사로서 조종한 경험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마일즈 마스터 항공기 추락 사고에서 생존하기도 했다.
9. 기타 활동 및 사망
앨버레즈는 JASON 국방 자문 그룹과 보헤미안 클럽의 회원이었다.
1980년, 지질학자인 아들 월터 알바레즈와 함께 백악기와 제3기 경계(K-T 경계)의 점토층에서 높은 농도의 이리듐을 발견하고, 운석 충돌설에 의한 대량절멸 가설을 발표했다.[63] 이 외에도 우주선과 방전 상자를 이용한 피라미드 투시 연구,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한 분석 등 광범위한 분야에 호기심을 보였다.
앨버레즈는 1988년 9월 1일, 식도암 수술 후 발생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21]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몬터레이 만에 뿌려졌으며,[22] 관련 연구 자료들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반크로프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23]
10. 수상 및 영예
- 1939년: 미국 물리학회(American Physical Society) 펠로우
- 1946년: 전국항공협회(National Aeronautics Association) 콜리어 트로피(Collier Trophy) [25]
- 1947년: 미국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s) 회원 [26]
- 1947년: 공훈훈장(Medal for Merit) [27]
- 1952년: 존 스콧상(John Scott Award)
- 1953년: 미국철학회(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펠로우 [28]
- 1958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펠로우 [29]
- 1960년: 캘리포니아 올해의 과학자 [30]
- 1961년: 알버트 아인슈타인 상(Albert Einstein Award) [27]
- 1961년: 업적 아카데미(Academy of Achievement) 골든 플레이트 상(Golden Plate Award) [31]
- 1963년: 미국 과학 메달(National Medal of Science) [32]
- 1965년: 마이켈슨 상(Michelson Award) [33]
- 1968년: 노벨 물리학상 [27]
- 1969년: 미국 물리학회 회장
- 1969년: 미국 공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Engineering) 회원 [34]
- 1978년: 시카고 대학교 동문 메달 [35]
- 1978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 [36]
- 1987년: 미국 에너지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Energy) 엔리코 페르미 상(Enrico Fermi award) [37]
- 1988년: IEEE 명예 회원(IEEE Honorary Membership) [38]
- 2012년: 미국 보이스카우트(The Boy Scouts of America)는 컵스카우트 초신성(SUPERNOVA) 상을 알바레즈를 기념하여 명명함 (사후) [39]
- 소행성 3581 알바레즈(3581 Alvarez)는 그와 그의 아들 월터 알바레즈(Walter Alvarez)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 (사후)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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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발견되지 않은 방을 찾기 위한 X-레이 투과 실험 결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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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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