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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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기원전 64년에서 62년 사이 출생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필리피 전투, 악티움 해전 등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로마의 공공시설 건설에 기여하여 판테온, 퐁 뒤 가르 등을 건설했다. 아그리파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여러 인물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는 기원전 12년에 사망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기리는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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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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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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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기원전 년 |
출생 장소 | 불확실한 위치, 아마도 아르피노, 이스트리아 또는 아시시, 로마 공화국 |
사망일 | 기원전 12년 (50–51세) |
사망 장소 | 캄파니아, 로마 이탈리아, 로마 제국 |
안장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직업 | 군사 지휘관, 정치가 |
가문 | 빕사니아 가문 |
주요 작품 | 판테온 (원래) |
로마자 표기 | Marcus Vipsanius Agrippa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관직 | |
콘술 | 기원전 37년, 기원전 28–27년 |
군사 경력 | |
충성 |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
복무 기간 | 기원전 45–12년 |
참전 전투 | 카이사르 내전 문다 전투 무티나 전쟁 무티나 전투 해방자 내전 필리피 전투 페루시아 전쟁 시칠리아 전쟁 밀라이 해전 나울로쿠스 전투 일리리아 전역 악티움 전쟁 악티움 해전 알렉산드리아 전투 칸타브리아 전쟁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카이킬리아 아티카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마이오르 율리아 |
자녀 |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빕사니아 아티카 빕사니아 마르켈라 빕사니아 마르켈리나 가이우스 카이사르 율리아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피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
2. 어린 시절과 가문
아그리파의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기원전 64년에서 62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의 가문은 기사 계급(Equites, 에퀴테스)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을 배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루키우스 빕사니우스였고,[5] 형과 여동생의 이름은 각각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빕사니아 폴라였다. 대 플리니우스는 그의 코그노멘 "아그리파"가 둔위 분만으로 태어난 것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며,[6] 이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출산 중 사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7]
아그리파 가문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어린 시절 친구였는데, 훗날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아그리파의 형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로마 내전에서 소 카토 편에 서서 싸웠다. 카토가 패배한 후, 형은 감옥에 갇혔으나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중 풀려났다. 아그리파가 형과 함께 카토 밑에서 싸웠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문다 전투에는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부터 군무에 종사한 아그리파는 로마 내전 (기원전 49년-기원전 45년)에서 카이사르 편에 섰으며, 탑수스 전투에서 원로원파가 패배하자 그의 형은 포로가 되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동년배로서 비슷한 교육을 받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함께 그리스의 아폴로니아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
아그리파의 생년은 기원전 64년에서 62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와 형의 이름은 모두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 가문은 로마 공화정에서 중요한 위치는 아니었지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가까웠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어린 시절 친구였는데, 옥타비아누스는 훗날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아그리파의 형은 소 카토 밑에서 로마 내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으나,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에 풀려났다. 아그리파가 형과 함께 문다 전투에 참전했는지는 불확실하다.[3][4]아그리파는 기사 계급(Equites, 에퀴테스) 출신으로, 그의 가족은 부유했지만 원로원 의원을 배출할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은 없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아그리파"라는 코그노멘은 그가 둔위 분만으로 태어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6] 그의 여동생은 빕사니아 폴라였다.
어릴 때부터 군무에 종사한 아그리파는 로마 내전 (기원전 49년-기원전 45년)에서 카이사르 편에 서서 원로원파와 싸웠다. 탑수스 전투에서 원로원파가 패배하면서 그의 형은 포로가 되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아그리파는 문다 전투 등에 참가하며 카이사르의 눈에 띄었고, 기원전 45년에 옥타비아누스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함께 그리스의 아폴로니아로 유학을 떠났으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2. 2. 가문 배경
아그리파는 [3][4] 불확실한 장소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빕사니우스였다.[5]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대 플리니우스는 그의 코그노멘 "아그리파"가 둔위 분만으로 태어난 것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6] 따라서 어머니가 출산 중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7] 플리니우스는 또한 아그리파가 어릴 때 절름발이였다고 기록했다.[8] 그는 루키우스 빕사니우스라는 형과 빕사니아 폴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 시골 출신으로, 로마 귀족 가문들보다 평민적이고 낮은 출신이었다. 로마 공공 생활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일반적인 로마 가족과 비교하면 매우 부유했다.[9] 빅토르 가르트하우젠, R. E. A. 팔머, 데이비드 리지웨이를 포함한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아그리파의 가족은 원래 에트루리아의 피사 출신이었다.[10][11]아그리파의 가족은 기원전 87년에 일어난 사회 전쟁 이후 로마 시민권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다른 많은 이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종결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이동의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로마로 이주했다.[12][13][14]
3. 권력을 향하여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를 도와 권력을 향해 나아갔다. 옥타비아누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던 안토니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옥타비아누스의 권력 강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기원전 39년 또는 38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를 알프스 이북의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38년에는 아키타니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또한 게르만족과 싸웠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라인강을 건넌 로마 장군이 되었다.[27]
기원전 37년,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해전에서 패배한 후, 전쟁 준비를 감독하기 위해 아그리파를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아그리파는 포르투스 율리우스라는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고, 함선과 전투 기술을 개선하여 훗날 밀라에와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승리하는 기반을 마련했다.[33]
3. 1.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귀환한 후,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군단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가 캄파니아에서 군대를 징집하는 것을 도왔다.[19] 옥타비아누스는 군단을 갖춘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협정을 맺었고, 기원전 43년에 법적으로 제2차 삼두정치로 확립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집정관 동료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카이사르 암살범들을 부재중 재판에 회부했고, 아그리파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 대한 사건을 맡았다.[20]기원전 42년, 아그리파는 필리피 전투에 참전했다.[22] 로마로 귀환한 뒤에는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 안토니아와,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 기원전 41년에 시작한 전쟁은 기원전 40년에 페루시아의 함락으로 끝이 난다. 이후 시칠리아섬을 점거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에게 이탈리아반도의 방비를 맡긴다. 아그리파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고,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본토 공격을 포기한다.[67] 기원전 40년 8월, 안토니우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를 공격하려 하였다. 아그리파는 시폰툼(Sipontum)을 탈환하여 안토니우스가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간다.[68]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에서 중개를 맡았다.[26]
그 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여 국방장관 격으로 활약했고, 기원전 21년에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대(大) 율리아와 재혼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얻었고, 기원전 12년에 죽은 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얻었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훗날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동갑이었으며, 둘은 함께 교육을 받았고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아그리파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연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은 기원전 40년대의 내전에서 다른 편을 선택하여 소 카토 휘하에서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아프리카에서 싸웠다. 카토의 군대가 패배했을 때, 아그리파의 형은 포로로 잡혔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위해 중재한 후 풀려났다.[15]
아그리파가 아프리카에서 형과 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아마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에 대항한 기원전 46년부터 45년까지의 카이사르의 원정에 참전했으며, 이는 문다 전투로 절정에 달했다.[16] 카이사르는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하여, 그를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기원전 45년에 아폴로니아 (일리리아 해안)로 보내 마케도니아 군단과 함께 공부하게 했으며,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17] 아폴로니아에 머문 지 4개월째 되던 해, 기원전 44년 3월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졌다. 아그리파와 또 다른 친구인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마케도니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할 것을 권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소규모 수행원과 함께 이탈리아로 항해하기로 결정했다. 도착 후 그는 카이사르가 자신을 법적 상속자로 입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8]
3. 2. 초기 군사 경력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귀환한 후,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군단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가 캄파니아에서 군대를 징집하는 것을 도왔다.[19] 옥타비아누스는 군단을 갖춘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협정을 맺었고, 기원전 43년에 법적으로 제2차 삼두정치로 확립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집정관 동료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카이사르 암살범들을 부재중 재판에 회부했고, 아그리파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 대한 사건을 맡았다.[20] 아그리파가 그의 정치 경력을 시작한 것은 같은 해였을 수 있는데, 그가 민중 트리뷴의 지위를 맡았고, 이는 그에게 로마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21]기원전 42년, 아그리파는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와 함께 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22] 그들이 로마로 돌아온 후, 그는 기원전 41년에 시작하여 기원전 40년에 페루시아 점령으로 끝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살비디에누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주된 장군으로 남아 있었다.[23] 페루시아 전쟁 후,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로 떠났고, 아그리파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로부터 이탈리아를 방어하라는 지시와 함께 로마의 도시 프라에토르로 남겨두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당시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삼두정치에 반대하고 있었다. 기원전 40년 7월, 아그리파가 프라에토르의 책임인 아폴리나리스 경기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섹스투스는 남부 이탈리아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아그리파는 그를 공격하여 철수하게 만들었다.[24] 그러나 삼두정치는 불안정했고, 기원전 40년 8월에 섹스투스와 안토니우스 모두 이탈리아를 침공했다(그러나 조직적인 동맹은 아니었다). 안토니우스로부터 시폰툼을 되찾은 아그리파의 성공은 갈등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25]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평화에 합의하는 데 중개인 역할을 했다. 논의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살비디에누스가 그를 안토니우스에게 배신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살비디에누스는 기소되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아그리파는 이제 옥타비아누스의 주요 장군이 되었다.[26]
기원전 39년 또는 38년에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를 알프스 이북의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38년에는 아키타니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또한 게르만족과 싸웠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라인강을 건넌 다음 로마 장군이 되었다.[27] 그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기원전 37년 집정관직을 맡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 그는 일반적인 최소 연령인 43세보다 훨씬 어렸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해전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고, 그의 친구에게 추가적인 전쟁 준비를 감독할 필요가 있었다. 아그리파는 갈리아에서의 그의 업적에 대한 개선 제안을 거절했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어려움이 있는 시기에 축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8]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 해안에서 해상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그리파의 첫 번째 과제는 옥타비아누스의 함선을 위한 안전한 항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루크리누스 호수와 바다를 분리하는 토지를 잘라 외항을 형성하고, 아베르누스 호수를 루크리누스 호수에 연결하여 내항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과제를 수행했다.[29] 새로운 항구 단지는 옥타비아누스를 기려 포르투스 율리우스로 명명되었다.[30] 아그리파는 더 큰 배와 개선된 형태의 갈고리를 포함한 기술적 개선도 담당했다.[31] 이때 그는 키케로의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의 딸인 카에킬리아 폼포니아 아티카와 결혼했다.[32]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섹스투스에 맞서 출항했다. 함대는 폭풍으로 심하게 손상되어 철수해야 했고, 아그리파는 두 번째 시도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우수한 기술과 훈련 덕분에 아그리파와 그의 부대는 밀라에와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섹스투스의 배 17척을 제외한 모든 배를 파괴하고 그의 군대 대부분을 항복시켰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이 강화되자 삼두정치 레피두스를 은퇴시키고 개선하여 로마에 입성했다.[33] 아그리파는 배의 부리로 장식된 전례 없는 영예인 코로나 나발리스를 받았다. 디오의 말처럼, 이것은 "그 이전이나 이후에 아무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훈장"이었다.[34]
3. 3. 집정관 선출과 폼페이우스와의 전쟁
옥타비아누스와 그 일행은 로마로 돌아온 뒤에야 군단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캄파니아에서 군대를 소집하였다.[65] 옥타비아누스가 자신만의 군대를 가지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하였다.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동료였던 퀸투스 페디우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이들을 기소하기로 하였고, 아그리파는 카시우스와의 소송을 맡았다.[66]기원전 42년, 아그리파는 필리피 전투에 참전했다. 로마로 귀환한 뒤에는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 안토니아와,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기원전 41년에 시작한 전쟁은 기원전 40년에 페루자 함락으로 끝이 났다. 이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섬을 점거하여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에게 이탈리아반도의 방비를 맡겼다. 아그리파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고,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본토 공격을 포기한다.[67] 기원전 40년 8월, 안토니우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아그리파가 시폰툼(Sipontum)을 탈환하여 안토니우스가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68]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평화협정에서 중개인 역할을 했다.
기원전 37년,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일반적인 최소 연령인 43세보다 훨씬 어렸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해전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고, 아그리파에게 추가적인 전쟁 준비를 감독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아그리파는 갈리아에서의 업적에 대한 개선 제안을 거절했는데,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가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축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8]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 해안에서 해상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그리파의 첫 번째 과제는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위한 안전한 항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루크리누스 호수와 바다를 분리하는 토지를 잘라 외항을 형성하고, 아베르누스 호수를 루크리누스 호수에 연결하여 내항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과제를 수행했다.[29] 새로운 항구 단지는 옥타비아누스를 기려 포르투스 율리우스로 명명되었다.[30] 아그리파는 더 큰 배와 개선된 형태의 갈고리를 포함한 기술적 개선도 담당했다.[31] 이때 그는 키케로의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의 딸인 카에킬리아 폼포니아 아티카와 결혼했다.[32]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섹스투스에 맞서 출항했다. 함대는 폭풍으로 심하게 손상되어 철수해야 했고, 아그리파는 두 번째 시도를 책임지게 되었다. 우수한 기술과 훈련 덕분에 아그리파와 그의 부대는 밀라에와 나울로쿠스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섹스투스의 배 17척을 제외한 모든 배를 파괴하고 그의 군대 대부분을 항복시켰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이 강화되자 레피두스를 은퇴시키고 개선하여 로마에 입성했다.[33] 아그리파는 배의 부리로 장식된 전례 없는 영예인 ''코로나 나발리스''를 받았다. 디오의 말처럼, 이것은 "그 이전이나 이후에 아무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훈장"이었다.[34]
4. 공공사업과 행정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군사적 조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통치 기간 동안 공공시설물 건립 등 다양한 행정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로마와 로마 제국 전역에서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하고 도시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그리파가 추진한 주요 공공사업과 행정 업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분야 | 주요 내용 |
---|---|
로마 도시 개선 | 아쿠아 마르키아를 포함한 수도교 보수 및 건설, 클로아카 막시마 확장 및 청소, 거리 정비, 하수도 청소, 호화로운 대중 행사 개최, 목욕탕과 주랑 건설, 정원 조성, 예술 작품 공개 전시 장려[35][36][37] |
주요 건축물 | 판테온, 퐁 뒤 가르, 포르투스 율리우스(이리우스 항구), 아그리파 목욕탕 건설[38] |
4. 1. 로마의 도시 개선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기원전 34년 가을 로마로 돌아와 공공 시설 수리 및 개선 사업을 빠르게 시작하였다.[35] 그는 아쿠아 마르키아로 알려진 수도교를 보수하고, 수도관을 확장하여 도시의 더 넓은 지역에 물을 공급하였다. 기원전 33년에는 로마 최초의 큐라토르 아쿠아룸이 되었다.[36]기원전 33년, 아그리파는 아이딜(로마의 건물과 축제를 담당하는 관리)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37] 그는 거리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호화로운 대중 행사를 개최하는 등 로마 시를 대대적으로 개선하여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다. 수도교를 복원 및 건설하고, 클로아카 막시마를 확장 및 청소했으며, 목욕탕과 주랑을 건설하고 정원을 조성했다. 또한 예술 작품의 공개 전시를 장려했다. 전직 집정관이 하위 직위인 ''아이딜''을 맡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38] 아그리파는 이러한 관례를 깨고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다. 훗날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는 벽돌로 된 도시를 발견했지만 대리석으로 된 도시로 만들었다"고 자랑했는데, 이는 아그리파가 그의 통치 아래에서 로마에 훌륭한 봉사를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4. 2. 판테온 건설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에 아그리파는 공공시설물 건립에 힘썼다. 그가 건설한 판테온은 '모든 신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pantheion"이 어원이라 전해진다. 현재 판테온은 둥근 돔으로 유명하지만, 아그리파 시절의 판테온은 T자 모양이었다고 한다. 로마 대화재 때 불타 없어지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했다.[1]4. 3. 기타 공공사업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기원전 34년 가을 로마로 돌아와 공공 시설 수리와 개선에 착수했다.[35] 아쿠아 마르키아 수도교를 보수하고 수도관을 확장하여 도시의 더 넓은 지역에 물을 공급했다. 기원전 33년에는 로마 최초의 큐라토르 아쿠아룸이 되었다.[36]같은 해 아이딜(로마의 건물과 축제를 담당하는 관리)로 선출된 후에는 거리를 수리하고 하수도를 청소했으며, 호화로운 대중 행사를 개최했다.[37] 아그리파는 로마 시에 대대적인 개선을 가져왔다. 수도교를 복원 및 건설하고, 클로아카 막시마를 확장 및 청소했으며, 목욕탕과 주랑을 건설하고 정원을 조성했다. 또한 예술 작품의 공개 전시를 장려했다. 전직 집정관이 하위 직위인 ''아이딜''을 맡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38] 아그리파의 성공은 그러한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훗날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그는 벽돌로 된 도시를 발견했지만 대리석으로 된 도시로 만들었다"고 자랑했는데, 이는 아그리파의 업적을 칭송한 것이다.
아그리파는 로마 제국 내에 많은 공공 건물을 건설했다.
5. 악티움 해전과 그 이후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와 제국을 장악하게 된 것은 주로 아그리파의 공헌 덕분이었다.[43]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8년에 자신의 조카 클라우디아 마르첼라 마요르를 아그리파에게 하사했고, 같은 해에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두 번째 집정관을 역임했다.[44] 기원전 27년에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세 번째 집정관을 역임했으며,[44] 같은 해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아그리파는 악티움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서기 80년에 파괴되기 전의 로마 판테온 건물을 짓고 헌납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아그리파의 설계를 사용하여 현재 로마에 남아있는 판테온을 지었다. 후기 건물의 비문에는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을 역임했을 때의 비문이 보존되어 있다. 세 번째 집정관 임기를 마친 후, 아그리파는 갈리아에서 지방 행정 및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효율적인 도로 시스템과 수도교를 건설했다.[45]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우정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질투로 인해 흐려진 것으로 보인다.[46] 이 때문에 아그리파는 로마를 떠나 명목상 동부 속주의 총독직을 맡았는데, 이는 일종의 명예로운 유배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레가테를 시리아로 보냈고, 자신은 레스보스 섬에 머물면서 대리 통치를 했다.[46] 그는 파르티아인들과 로마 군단의 기치 반환에 대해 협상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다.[47] 마르켈루스가 유배된 지 1년 안에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를 사위로 삼아 그를 더욱 밀접하게 연결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50] 기원전 21년,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에게 마르켈라와 이혼하고 자신의 딸인 율리아 (대)와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율리아는 마르켈루스의 미망인이었다.[51] 기원전 19년, 아그리파는 히스파니아에서 칸타브리족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기용되었다.[46]
기원전 17년, 아그리파는 두 번째로 동부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공정하고 신중한 행정은 특히 유대 주민을 포함한 속주민들의 존경과 호감을 얻었다.[46] 또한 킴메르 해안(크림 반도)에 대한 로마의 통제권을 회복했다.
5. 1. 악티움 해전의 영웅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함대 지휘를 맡았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남서부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메토네를 점령하고, 북쪽으로 항해하며 그리스 해안을 약탈하고 코르키라를 점령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키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해군 기지로 삼았다.[39] 안토니우스는 악티움에 함선과 병력을 배치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만나러 이동했다. 그동안 아그리파는 파트레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의 지지자인 퀸투스 나시디우스를 격파했다.[40] 디오에 따르면, 아그리파가 악티움 근처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합류하려 할 때, 안토니우스의 부관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소시우스를 만났는데,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지지자인 루키우스 타리우스의 함대에 기습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때 아그리파가 예상치 못하게 등장하면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41]디오에 따르면, 결정적인 전투가 다가오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해상 봉쇄를 뚫고 탈출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처음에는 그는 기함들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자신의 더 가벼운 배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으며, 다른 적선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비겁함을 보고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그리파는 반대하며, 안토니우스의 배는 더 크지만 돛을 올리면 옥타비아누스의 배보다 빠를 수 있으며,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폭풍에 의해 막 손상되었기 때문에 지금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다.[42]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다. 이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여 로마와 제국을 장악하게 된 것은 주로 아그리파의 공헌 덕분이었다.[43]
5. 2. 아우구스투스의 동반자
옥타비아누스와 그 일행은 로마로 돌아온 뒤에야 군단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캄파니아에서 군대를 소집하였다.[65] 옥타비아누스가 자신만의 군대를 가지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동료였던 퀸투스 페디우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이들을 기소하기로 했다. 아그리파는 카시우스와의 소송을 맡았다.[66]기원전 42년, 아그리파는 필리피 전투에 참전했다. 로마로 귀환한 뒤에는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풀비아 안토니아와,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다. 기원전 41년에 시작한 전쟁은 기원전 40년에 페루자 함락으로 끝이 난다. 이후 시칠리아섬을 점거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에게 이탈리아반도의 방비를 맡긴다. 아그리파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고,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본토 공격을 포기한다.[67] 기원전 40년 8월, 안토니우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를 공격하려 하였다. 아그리파는 시폰툼(Sipontum)을 탈환하여 안토니우스가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간다.[68]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체결된 평화협정에서 중개를 맡았다.
그 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여 국방장관 격으로 활약했고, 기원전 21년에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해서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얻었고, 기원전 12년에 죽은 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얻었다.
그는 생전 2번이나 집정관 자리에 올랐는데, 특히 로마 시를 아름답게 꾸미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로마 제국을 널리 측량하고 지리 서적을 발간하였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함대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남서부에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 메토네를 점령한 후 북쪽으로 항해하여 그리스 해안을 약탈하고 코르키라(현대 코르푸)를 점령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코르키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해군 기지로 삼았다.[39] 안토니우스는 악티움에 함선과 병력을 배치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만나러 이동했다. 그동안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의 지지자 퀸투스 나시디우스를 파트레 해전에서 격파했다.[40] 디오에 따르면, 아그리파가 악티움 근처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합류하려 할 때, 안토니우스의 부관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소시우스를 만났는데,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지지자인 루키우스 타리우스의 함대에 기습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아그리파의 예상치 못한 등장은 전투의 흐름을 뒤바꿨다.[41]
디오에 따르면, 결정적인 전투가 다가오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해상 봉쇄를 뚫고 탈출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처음에는 그는 기함들이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자신의 더 가벼운 배로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으며, 다른 적선들은 그들의 지도자의 비겁함을 보고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그리파는 반대하며, 안토니우스의 배는 더 크지만 돛을 올리면 옥타비아누스의 배보다 빠를 수 있으며,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폭풍에 의해 막 손상되었기 때문에 지금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다.[42]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다. 로마와 제국을 장악하게 된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주로 아그리파의 덕분이었다.[43]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8년에 그의 조카 클라우디아 마르첼라 마요르를 아그리파에게 하사했다. 그는 또한 그 해에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두 번째 집정관을 역임했다.[44] 기원전 27년에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세 번째 집정관을 역임했고,[44] 그 해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황제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를 수여했다.
악티움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아그리파는 서기 80년에 파괴되기 전의 로마 판테온 건물로 사용된 건물을 짓고 헌납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아그리파의 설계를 사용하여 로마에 현존하는 자신의 판테온을 지었다. 후기 건물의 비문에는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을 역임했을 때의 비문이 보존되어 있다. 세 번째 집정관을 역임한 후 아그리파는 갈리아에서 지방 행정 및 세금 제도를 개혁하는 데 보냈으며, 효율적인 도로 시스템과 수도교를 건설했다.[45]
아그리파와 아우구스투스의 우정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질투로 인해 흐려진 것으로 보인다.[46] 전통적으로 이러한 질투의 결과로 아그리파는 로마를 떠나 명목상 동부 속주의 총독직을 맡았는데, 일종의 명예로운 유배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레가테를 시리아로 보냈고, 자신은 레스보스 섬에 머물면서 대리 통치를 했다.[46] 그는 파르티아인들과 로마 군단의 기치 반환에 대해 협상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다.[47] 마르켈루스가 유배된 지 1년 안에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했는데, 이는 그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23년의 위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상당한 반대에 직면하고 정치적으로 양보하려는 찰나에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군대의 가장 큰 부대를 책임질 사람을 유배 보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아그리파의 '유배'는 사실상 기원전 23년의 정착 계획이 실패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군사적 지원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하여 충성스러운 부관을 상당한 군대를 지휘하도록 신중하게 배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48]
기원전 23년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헌법 개정'으로 알려진 계획의 일환으로, 아그리파의 헌법적 권한은 크게 증가하여 아우구스투스가 고질적인 건강 악화나 암살로 굴복할 경우 정치적 후계자나 대체자를 제공함으로써 아우구스투스 원수정에 더 큰 헌법적 안정을 제공했다. 그 해 동안, 아그리파에게 5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권한과 유사한 집정관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 권한 부여의 정확한 성격은 불확실하지만, 아마도 원로원의 속주에 대한 권한은 제외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동서부 황제 속주를 포함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질투심에 의해 지켜졌던 ''호민관 권한'', 즉 평민 호민관의 권한도 주어졌다.[49] 이러한 막대한 국가 권력은 일반적으로 이전의 유배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를 사위로 삼아 그를 더욱 밀접하게 연결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50] 기원전 21년, 그는 아그리파에게 마르켈라와 이혼하고 그의 딸인 율리아 (대)와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그녀는 미모, 능력,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사치로 유명한 마르켈루스의 미망인이었다.[51] 기원전 19년, 아그리파는 히스파니아에서 칸타브리족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기용되었다.[46]
기원전 18년, 아그리파의 권한은 아우구스투스의 권한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더욱 증가했다. 그 해 그의 집정관 권한은 원로원 속주까지 확대되었고, ''호민관 권한'', 즉 평민 호민관의 권한이 부여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그리파의 호민관 권한은 그가 공직을 수행하지 않아도 주어졌다.[52] 이 권한은 상당했는데, 원로원 또는 다른 행정 기관의 행위에 대한 거부권, 다른 호민관의 행위 포함, 그리고 민중의 승인을 받기 위한 법안 제시 권한을 부여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호민관의 신성함이었는데, 이는 정치적 행위를 포함하여 그들을 해치거나 그들의 행동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살해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53] 이러한 권한이 부여된 후 아그리파는 서류상으로는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동등한 권력을 갖게 되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17년에 두 번째로 동부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공정하고 신중한 행정은 특히 유대 주민을 포함한 속주민들의 존경과 호감을 얻었다.[46] 아그리파는 또한 킴메르 해안(크림 반도)에 대한 로마의 통제권을 회복했다.
5. 3. 말년과 죽음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우정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의 질투로 인해 흐려진 것으로 보인다.[46] 이러한 질투 때문에 아그리파는 로마를 떠나 명목상 동부 속주의 총독직을 맡았는데, 이는 일종의 명예로운 유배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레가테를 시리아로 보냈고, 자신은 레스보스 섬에 머물면서 대리 통치를 했다.[46] 그는 파르티아인들과 로마 군단의 기치 반환에 대해 협상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다.[47] 마르켈루스가 유배된 지 1년 안에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했는데, 이는 그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23년의 위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상당한 반대에 직면하고 정치적으로 양보하려는 찰나에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군대의 가장 큰 부대를 책임질 사람을 유배 보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아그리파의 '유배'는 사실상 기원전 23년의 정착 계획이 실패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군사적 지원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하여 충성스러운 부관을 상당한 군대를 지휘하도록 신중하게 배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48]기원전 23년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헌법 개정''으로 알려진 계획의 일환으로, 아그리파의 헌법적 권한은 크게 증가하여 아우구스투스가 고질적인 건강 악화나 암살로 굴복할 경우 정치적 후계자나 대체자를 제공함으로써 아우구스투스 원수정에 더 큰 헌법적 안정을 제공했다. 그 해 동안, 아그리파에게 5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권한과 유사한 집정관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 권한 부여의 정확한 성격은 불확실하지만, 아마도 원로원의 속주에 대한 권한은 제외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동서부 황제 속주를 포함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질투심에 의해 지켜졌던 ''호민관 권한'', 즉 평민 호민관의 권한도 주어졌다.[49]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아그리파를 사위로 삼아 그를 더욱 밀접하게 연결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50] 기원전 21년, 그는 아그리파에게 마르켈라와 이혼하고 그의 딸인 율리아 (대)와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그녀는 마르켈루스의 미망인이었다.[51] 기원전 19년, 아그리파는 히스파니아에서 칸타브리족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기용되었다.[46]
기원전 18년, 아그리파의 권한은 아우구스투스의 권한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더욱 증가했다. 그 해 그의 집정관 권한은 원로원 속주까지 확대되었고, ''호민관 권한''이 부여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그리파의 호민관 권한은 그가 공직을 수행하지 않아도 주어졌다.[52] 이 권한은 상당했는데, 원로원 또는 다른 행정 기관의 행위에 대한 거부권, 다른 호민관의 행위 포함, 그리고 민중의 승인을 받기 위한 법안 제시 권한을 부여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호민관의 신성함이었는데, 이는 정치적 행위를 포함하여 그들을 해치거나 그들의 행동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살해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53]
아그리파는 기원전 17년에 두 번째로 동부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공정하고 신중한 행정은 특히 유대 주민을 포함한 속주민들의 존경과 호감을 얻었다.[46] 아그리파는 또한 킴메르 해안(크림 반도)에 대한 로마의 통제권을 회복했다.
아그리파의 마지막 공공 봉사는 기원전 13년에 로마의 판노니아 속주가 될 상부 다뉴브 강 지역의 정복을 시작한 것이었다.[54] 그는 기원전 12년 캄파니아에서 50세 또는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태어난 아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성대한 장례식으로 그의 기억을 기렸고 한 달 이상을 애도하며 보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자녀 교육을 감독했다. 아그리파는 자신을 위한 무덤을 지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의 유해를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했다.[55]
6. 유산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유능한 부하 지휘관이자 가장 가까운 동료였으며, 30년 이상 충실하게 그를 섬겼다. 역사가 글렌 보워삭은 아그리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쏟은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로마는 수도교, 하수도 및 목욕탕을 관리하는 그의 관대함을 기억할 것이다.[56]
아그리파는 지리학 분야의 작가이기도 했다.[46] 그의 감독 하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꿈꾸던 제국 전체의 측량이 수행되었다. 아그리파는 원형 차트를 만들었고, 나중에 아우구스투스가 대리석에 새겨 그의 여동생 폴라가 지은 열주에 배치했다.[46] 그의 저술 중에는 현재는 유실된 자서전이 언급되어 있다.[46]
아그리파는 기원전 29년에 로마 피트의 표준을 정립했으며, 보폭을 5피트로 정의했다. 제국 로마 마일은 5,000 로마 피트를 나타낸다. 비아 아그리파라는 용어는 아그리파가 건설한 갈리아의 도로 네트워크 전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며,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길이나 고속도로로 존재한다.
로마 부족인 아그리피아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57]
7. 결혼과 자녀
- 케킬리아 폼포니아 아티카와 기원전 37년에 결혼하여 기원전 28년 이전에 이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다.
-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티베리우스의 첫 번째 아내였다.[59]
- 빕사니아 아티카: 웅변가 퀸투스 하테리우스와 결혼했다.[60]
- 클라우디아 마르셀라 마요르:[44] 옥타비아 미노르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였다. 기원전 28년에 결혼하여 기원전 21년에 이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적어도 두 딸을 두었다.
- 빕사니아 마르셀라: 장군 푸블리우스 킨크틸리우스 바루스와 결혼했다.[62]
- 빕사니아 마르셀리나: 기원후 6년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와 결혼했다.[63]
- 율리아:[51] 아우구스투스의 딸이다. 기원전 21년에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64]
-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후계자로 입양되었지만 요절했다.
- 율리아: 기원후 1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결혼했다.
-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후계자로 입양되었지만 요절했다.
-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마요르: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결혼했으며 황제 칼리굴라의 어머니이자 네로의 할머니였다.
-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아버지의 사후에 태어났으며, 아우구스투스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되었다.
그의 수많은 자녀들을 통해 아그리파는 그가 지위를 얻도록 도왔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많은 후손들과 다른 많은 저명한 로마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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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nhold, p. 9; Jean-Michel Roddaz, p.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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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Reinhold, pp. 2–4; Roddaz, pp.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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