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말레이족은 동남아시아 섬 지역과 말레이 반도에 주로 거주하며 오스트로네시아어를 사용하는 민족 집단이다. "Melayu"라는 단어는 수마트라의 강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15세기 말라카 왕국의 등장과 함께 다른 민족 집단과 구별되는 민족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말레이족은 다양한 기원과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윈난 설, 뉴기니/항해사 이론, 타이완 이론 등 여러 기원 설이 존재한다. 이슬람교의 전파와 말라카 왕국의 성장은 말레이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외세의 식민 지배를 겪으면서 말레이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 말레이어는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에서 공용어로 사용되며, 말레이 문학은 구전 문학에서 시작하여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말레이 문화는 언어, 문학, 종교, 건축, 시각 예술, 요리, 공연 예술, 전통 의상, 축제, 무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며, 여러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시아의 민족종교집단 - 후이족
후이족은 중국 정부가 조상을 기준으로 정의하는 민족으로, 중동,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출신 이민자 후손이며 중국 무슬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중국 전역에 분포하여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지만 종교 활동 탄압과 민족 간 긴장이라는 복잡한 문제도 안고 있다. - 아시아의 민족종교집단 - 발리인
발리인은 자바와 보르네오에서 온 원말레이계 이주민을 기원으로 하며, 자바로부터의 추가 이주와 마자파힛 제국 붕괴 후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되어, 발리 힌두교 중심의 독특한 문화와 예술, 명명 시스템, 사회 구조, 푸푸탄과 같은 역사, 수박 관개 시스템, 다양한 종교 축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 - 말레이족 - 아즐란 무히부딘 샤흐
아즐란 무히부딘 샤흐는 말레이시아의 법조인이자 페락 술탄, 말레이시아 국왕으로, 법조계에서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고 페락 주의 발전과 말레이시아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했으며, 말레이시아 하키 발전에 기여하여 "말레이시아 하키의 아버지"로 불린다. - 말레이족 - 시티 누르할리자
시티 누르할리자는 1979년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전통 말레이 음악과 서구 팝 음악을 융합한 독창적인 스타일로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얻은 가수이자 SimplySiti 화장품 브랜드를 론칭한 사업가이며, 활발한 자선 활동가이다. - 해양 동남아시아 - 브루나이
브루나이는 보르네오 섬에 위치한 동남아시아 국가로, 이슬람 술탄국으로 독립하여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을 기반으로 높은 국민 소득을 유지하며, 국왕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입헌 군주국이다. - 해양 동남아시아 - 필리핀
필리핀은 7,641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동남아시아의 섬나라 공화국으로,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 지배를 거쳐 1946년 독립하였으며,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말레이족 | |
---|---|
일반 정보 | |
![]() | |
토탈 인구 | 약 3천만 명 |
거주 지역 | 말레이 세계 |
국가별 인구 | |
말레이시아 | 17,600,000명 |
인도네시아 | 8,553,791명 |
태국 | 2,150,950명 |
싱가포르 | 545,498명 |
브루나이 | 314,560명 |
해외 거주 | 500,000명 |
남아프리카 공화국 | 330,000명 |
아랍 세계 | 약 50,000명 |
스리랑카 | 40,189명 |
오스트레일리아 | 33,183명 |
영국 | 약 33,000명 |
미국 | 29,431명 |
미얀마 | 27,000명 |
캄보디아 | 18,000명 |
캐나다 | 16,920명 |
일본 | 11,287명 |
언어 | |
사용 언어 | 말레이어 |
종교 | |
종교 | 주로 수니 이슬람 |
민족적 관계 | |
관련 민족 | 다른 오스트로네시아인 |
2. 어원
"Melayu"의 어원적 기원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있는 Sungai Melayums(말라유 강)라는 작은 강과 관련이 있다.[15] 이 강은 무시 강(Musi River)이 아닌 바탕하리 강(Batang Hari River)으로 흘러들어간다.[15] 이 용어는 말레이어(Malay language) 단어 ''melaju''에서 유래한 것으로, 동사 접두사 'me'와 어근 'laju'의 결합으로 "가속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강의 빠른 급류를 묘사한다.[15] 15세기 이전에는 "Melayu"와 비슷한 발음의 변형들이 말라카 해협 지역에 대한 오래된 지명으로 사용되었다.[15]
- '''말라야 드위파(Malaya Dwipa)'''는 바유 푸라나(Vayu Purana)에 나오는, 금과 은이 풍부한 지방 중 하나이다. 일부 학자들은 수마트라와 동일시하지만,[15] 여러 인도 학자들은 말레이 반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수마트라는 수바르나드위파(Suvarnadvipa)와 더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15]
- '''말레우-콜론(Maleu-kolon)'''은 프톨레마이오스(Ptolemy)의 저서 지리학(Geographia)에 나오는 금빛 헤르소네소스(Golden Chersonese)의 한 지역이다.[15]
- '''모-로-유(Mo-lo-yu)'''는 688년에서 695년 사이에 동남아시아를 방문한 당나라 승려 의정(I Ching, Yijing)이 언급했다. '모-로-유' 왕국은 스리보가(Srivijaya)의 수도 보가(Palembang)에서 배로 15일 거리에 있었으며, 카-차(Kedah)까지도 15일이 걸려 두 곳의 중간 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5] 일반적인 설은 '모-로-유'를 무아로잠비 사원 유적지(Muaro Jambi Temple Compounds)와 관련짓지만,[15] 잠비의 지리적 위치는 의정의 설명과 모순된다.[15]

후대 원나라(1271–1368)와 명나라(1368–1644) 시대에, "마-라-유(Ma-La-Yu)"는 중국 역사 기록에 남쪽 바다 근처의 국가를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등장했다. 사용된 용어 중에는 "Bôk-lá-yù", "Mók-là-yū" (木剌由), Má-lì-yù-er (麻里予兒), Oō-laì-yu (巫来由), 그리고 Wú-laī-yû (無来由)가 있다.[15]
- '''말라이유르(Malaiyur)'''는 말레이 세계의 타밀 비문(Tamil inscriptions in the Malay world) 중 탄자우르 비문(Tanjore inscription)에 언급되었다. 11세기 라젠드라 콜라 1세(Rajendra Chola I)의 원정에서 콜라 침략자들에게 함락된 "견고한 산을 성벽으로 삼은" 왕국으로 묘사되었다. 수마트라, 판나이(Pannai)와 스리비자야(Palembang) 사이, 무아로잠비(Muaro Jambi) 고고학 유적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16][17]
- '''부미 말라유(Bhūmi Mālayu)'''는 (말라유의 땅이라는 뜻) 1286년 서기의 파당 로코 비문(Padang Roco Inscription)에서 옮겨 적은 용어로, 다르마스라야(Dharmasraya) 왕국과 관련이 있다.[15]
- '''마-리-유-어(Ma-li-yu-er)'''는 원나라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으며, 람 캄행(Ram Khamhaeng) 치세 동안 수코타이 왕국(Sukhothai Kingdom)의 남쪽으로의 확장에 직면한 말레이 반도의 국가를 가리킨다.[18] 연대기에는 "...샴(Siam)과 마-리-유-어 사이에 적대감이 발생하여 서로 죽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8]
- '''말라우이르(Malauir)'''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기록에 말레이 반도에 위치한 왕국으로 언급되어 있다.[15]
- '''말라야푸라(Malayapura)'''는 (말라야의 도시 또는 말라야의 요새라는 뜻) 1347년 서기의 아모가파사 비문(Amoghapasa inscription)에 새겨져 있으며, 아디티야와르만(Adityawarman)이 다르마스라야(Dharmasraya)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용어이다.[15]
다른 의견으로는 자바어(Javanese language)의 'mlayu' 또는 말레이어의 'melaju'라는 단어가 있으며, 이는 말레이인들의 높은 이동성과 이동성을 나타낸다. 디 바로스(De Barros)는 이스칸다르 샤(Iskandar Shah)가 그의 아버지가 그의 나라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말라이오스'(Malaios, 말레이인)라고 이름 지었다고 언급했다. 알부케르케(Albuquerque)는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가 팔렘방(Palembang) 왕국에서 말라카로 도망쳤다(malayo)고 설명했다.
민족명(민족어)으로서의 "Melayu(말레이)"라는 단어는 15세기 말라카 왕국이 지역 강국으로 통합되면서 명확하게 다른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말라카 사람들의 사회적 특징을 같은 지역의 외국인들, 특히 자바인과 태국인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안토니오 피가페타는 16세기 초에 ''chiara Malaiu''('말레이식')라는 표현이 동남아시아 해양에서 ''al parlare de Malaea''(이탈리아어로 "말라카에 대해 말하다")를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언급했다.
{{다중 이미지
| align = right
| total_width = 420
| image1 = Malays from the Malacca Sultanate Codice Casanatense.jpg
| alt1 = 말라카의 말레이인들
| caption1 = 1540년경, 코디세 카사나텐세에 실린 말라카 말레이 사람들을 묘사한 포르투갈 수채화
| image2 = A Malay couple RBSeite93.jpg
| alt2 = 말레이 부부
| caption2 = 1669년에서 1682년 사이에 출판된 ''바타비아 여행''에서 발췌한 말레이 부부 그림
| image3 = JogetUNISEL.jpg
| alt3 = 조겟 춤
| caption3 = 조겟 춤은 말라카 왕국에서 유래하였으며, 말레이 문화의 많은 측면이 말라카 궁정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고전 말레이 문학은 현대적 해석보다 좁은 의미로 말레이인을 묘사했다. ''히카야트 항 투아''는 말레이인을 말라카 왕국의 주민으로만 규정하고 있는데, 당시 브루나이는 말레이로 간주되지 않았다. ''히카야트 파타니''는 파타니와 브루나이를 말레이로 부르지 않고, 그 단어는 조호르에만 사용되었다. 케다 연대기/히카야트 메롱 마하왕사에서는 케다를 말레이로 포함하지 않았다. ''히카야트 아체''는 말레이 민족을 조호르와 연결시키지만, 아체나 델리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19][20]

3. 기원
프로토 말레이(Proto-Malay)는 오스트로네시아인 기원이며, 기원전 25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이주를 통해 말레이 제도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21][70] 오늘날 주목할 만한 원말레이인으로는 모켄족(Moken), 자군족(Jakun), 오랑 쿠알라족(Orang Kuala), 템완족(Temuan), 오랑 카낙족(Orang Kanaq)이 있다.[21]
''말레이시아 백과사전: 초기 역사''는 말레이인 기원에 대한 세 가지 이론을 제시했다.[21]
- 운남설(1889년 발표)은 약 4,000년에서 6,000년 전 운남에서 기원한 원말레이인에 대한 이론이다. R.H. 겔더른(R.H. Geldern)과 그의 연구팀은 메콩강에서 말레이 반도로의 이동을 주장하며 이 이론을 뒷받침했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로는 말레이 제도에서 발견된 석기가 중앙아시아의 도구와 유사하다는 점이며, 이는 말레이인과 아삼인의 관습의 유사성을 보여준다.[22]
- 뉴기니/항해사 이론(1965년 발표)은 뉴질랜드와 마다가스카르 사이의 섬에서 섬으로 이동한 강력한 해양 기술을 가진 항해사들의 이동에 대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당시 말레이인의 형태가 네그리토이드와 유사했다고 주장한다.[22]
- 타이완 이론(1997년 발표)은 6,000년 전 중국 남부에서 한 무리가 이주하여 일부는 타이완으로 이동했고(오늘날의 타이완 원주민은 그들의 후손이다), 그 후 필리핀으로, 나중에는 보르네오로 이동했다(약 4,500년 전)(오늘날의 다야크족 및 기타 집단). 이 고대 사람들은 일부는 술라웨시로, 다른 일부는 자바와 수마트라로 진출하여 오늘날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갈라졌다. 마지막 이주는 약 3,000년 전 말레이 반도로 이루어졌다. 보르네오의 한 하위 집단은 약 4,500년 전 베트남 중남부의 참파로 이동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온 동손 문화와 호아빈 문화의 흔적도 있다. 이 모든 집단은 오늘날 타이완 섬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DNA와 언어적 기원을 공유하며, 이 고대 사람들의 조상은 중국 남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71]

제2말레이인(Deutero-Malays)은 철기 시대 사람들로, 더 발전된 농업 기술과 금속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갖춘 후대의 오스트로네시아인들에게서 부분적으로 유래했다.[72][73][74] 제2말레이인 정착민들은 그들의 선조들과 달리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착하여 사회의 주요 단위인 캄풍(kampung)을 세웠다. 이러한 캄풍들은 일반적으로 강둑이나 해안 지역에 위치했으며, 식량과 기타 필수품을 자급자족했다.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이러한 캄풍들은 외부 세계와 어느 정도 무역을 시작했다.[75] 제2말레이인들은 오늘날 말레이인들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진다.[76]
최근 이론에 따르면 말레이 반도, 인접한 인도네시아 제도, 그리고 당시 노출되어 있던 대륙붕인 순다랜드(Sundaland)의 빙하기 시대 인구는 본토에서의 확장이 아니라 최초의 인류 정착민들로부터 현지에서 발전하여 본토로 확장되었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확장이 특히 타이완 모델보다 언어학적,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에 대한 훨씬 더 간결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인간 게놈 기구(Human Genome Organisation)의 최근 유전적 증거로부터 지지를 받는데, 이는 아시아의 주요 인구 형성이 동남아시아를 통한 단일 이동으로 발생했음을 시사한다. 이 경로는 현대 말레이 지역으로 여겨지며, 이 지역의 다양성은 본토로부터의 주요 이동 없이 주로 현지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확장 자체는 빙하기 말 해수면 상승에 의해 주도되었을 수 있다.
지지자인 스티븐 오펜하이머(Stephen Oppenheimer)는 빙하기 말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세 차례의 급속한 확장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이주가 사람들과 관련 문화, 신화, 기술을 본토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 근동 및 지중해까지 퍼뜨렸다고 이론화했다. 검토자들은 원래 정착과 분산에 대한 그의 제안이 추가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더욱 확산주의(diffusionist)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말레이인은 동남아시아섬 지역과 말레이 반도의 민족 집단으로, 오스트로네시아어를 사용한다.[23] 2015년 연구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반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스리랑카의 말레이인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17%–62%), 원말레이인(15%–31%), 동아시아인(4%–16%), 남아시아인(3%–34%) 등 4가지 주요 조상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다.[23] 그러나 말레이시아 반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말레이인들에게는 동아시아인과 남아시아인보다 오스트로네시아인과 동남아시아 원주민 구성 요소가 더 중요했다.[23]
2021년 연구는 현대 동아시아인, 동남아시아인, 폴리네시아인, 시베리아인의 조상인 기저 동아시아인 계통(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계통'''(ESEA))이 기원전 5만년경 본토 동남아시아에서 기원하여 확장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24][25]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관련 조상은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확장 이전에 해양 동남아시아로 퍼져 나갔다.[24][25] 오스트로네시아어 사용자들은 기원전 1만년에서 7천년 사이에 중국 남부 해안에서 타이완과 필리핀 북부에 도착하여 동남아시아 섬 지역 전체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24][25]
현대 말레이인의 유전자 연구는 말레이인이 복잡한 유전적 혼합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유전자 분석 결과, 말레이인은 유전적으로 다양하며, 집단 내부에서 상당한 변이가 있다. 이러한 변이는 장기간에 걸친 지리적 격리와 독립적인 혼합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말레이인 유전자를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는 오스트로네시아계 원주민과 프로토말레이에서 유래한 것이다.[80] 오스트로네시아인 구성 요소는 대만의 아미족과 아타얄족 사람들과 관련이 있으며, 동남아시아인의 오스트로네시아계 구성 요소 유전자 분석 결과 "대만 출신설"이 지지된다.[77][78] 프로토말레이는 윈난성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유전적으로 증명되었으며, 그 시기는 4000~6000년 전으로 추정된다.[79] 남아시아인(인도인)과의 혼합은 고대(인도네시아·말레이인의 일부는 2250년 전으로 추정)로 여겨진다. 반면 동아시아인(중국인)과의 혼합은 최근(100~200년 전)으로 여겨지지만, 자바에서는 일부가 15세기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79] 그 외에도 소수 구성 요소로 네그리토(말레이 반도 원주민), 중앙아시아인, 유럽인이 있으며, 이들과의 혼합은 175~1500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80]
말레이인 내에서도 말레이 반도 남부와 북부에서 유전적으로 클러스터가 다르다.[81]
말레이인의 Y염색체 하플로그룹은 다음과 같다:[82]
- 아프리카 이주 후 남쪽 경로[83] (오스트랄로이드 계통)
- *F(xK):7.7%
- *K(xN,O,P):7.7%
- 아프리카 이주 후 북쪽 경로[63] (몽골로이드 계통)
- *O1a:38.5%
- *O1b1a1a:7.7%
- *O2:23.1%
3. 1. 프로토 말레이 모델
프로토 말레이(Proto-Malay)는 오스트로네시아인 기원이며, 기원전 25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이주를 통해 말레이 제도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21][70] 오늘날 주목할 만한 원말레이인으로는 모켄족(Moken), 자군족(Jakun), 오랑 쿠알라족(Orang Kuala), 템완족(Temuan), 오랑 카낙족(Orang Kanaq)이 있다.[21]''말레이시아 백과사전: 초기 역사''는 말레이인 기원에 대한 세 가지 이론을 제시했다.[21]
- 운남설(1889년 발표)은 약 4,000년에서 6,000년 전 운남에서 기원한 원말레이인에 대한 이론이다. R.H. 겔더른(R.H. Geldern)과 그의 연구팀은 메콩강에서 말레이 반도로의 이동을 주장하며 이 이론을 뒷받침했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로는 말레이 제도에서 발견된 석기가 중앙아시아의 도구와 유사하다는 점이며, 이는 말레이인과 아쌈인의 관습의 유사성을 보여준다.[22]
- 뉴기니/항해사 이론(1965년 발표)은 뉴질랜드와 마다가스카르 사이의 섬에서 섬으로 이동한 강력한 해양 기술을 가진 항해사들의 이동에 대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당시 말레이인의 형태가 네그리토이드와 유사했다고 주장한다.[22]
- 타이완 이론(1997년 발표)은 6,000년 전 중국 남부에서 한 무리가 이주하여 일부는 타이완으로 이동했고(오늘날의 타이완 원주민은 그들의 후손이다), 그 후 필리핀으로, 나중에는 보르네오로 이동했다(약 4,500년 전)(오늘날의 다야크족 및 기타 집단). 이 고대 사람들은 일부는 술라웨시로, 다른 일부는 자바와 수마트라로 진출하여 오늘날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갈라졌다. 마지막 이주는 약 3,000년 전 말레이 반도로 이루어졌다. 보르네오의 한 하위 집단은 약 4,500년 전 베트남 중남부의 참파로 이동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온 동손 문화와 호아빈 문화의 흔적도 있다. 이 모든 집단은 오늘날 타이완 섬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DNA와 언어적 기원을 공유하며, 이 고대 사람들의 조상은 중국 남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71]
3. 2. 제2말레이인
제2말레이인(Deutero-Malays)은 철기 시대 사람들로, 더 발전된 농업 기술과 금속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갖춘 후대의 오스트로네시아인들에게서 부분적으로 유래했다.[72][73][74] 제2말레이인 정착민들은 그들의 선조들과 달리 유목민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착하여 사회의 주요 단위인 캄풍(kampung)을 세웠다. 이러한 캄풍들은 일반적으로 강둑이나 해안 지역에 위치했으며, 식량과 기타 필수품을 자급자족했다.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이러한 캄풍들은 외부 세계와 어느 정도 무역을 시작했다.[75] 제2말레이인들은 오늘날 말레이인들의 직계 조상으로 여겨진다.[76]
3. 3. 순다랜드 확장 모델
최근 이론에 따르면 말레이 반도, 인접한 인도네시아 제도, 그리고 당시 노출되어 있던 대륙붕인 순다랜드(Sundaland)의 빙하기 시대 인구는 본토에서의 확장이 아니라 최초의 인류 정착민들로부터 현지에서 발전하여 본토로 확장되었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확장이 특히 타이완 모델보다 언어학적, 고고학적, 인류학적 증거에 대한 훨씬 더 간결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이 이론은 인간 게놈 기구(Human Genome Organisation)의 최근 유전적 증거로부터 지지를 받는데, 이는 아시아의 주요 인구 형성이 동남아시아를 통한 단일 이동으로 발생했음을 시사한다. 이 경로는 현대 말레이 지역으로 여겨지며, 이 지역의 다양성은 본토로부터의 주요 이동 없이 주로 현지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확장 자체는 빙하기 말 해수면 상승에 의해 주도되었을 수 있다.
지지자인 스티븐 오펜하이머(Stephen Oppenheimer)는 빙하기 말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세 차례의 급속한 확장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이주가 사람들과 관련 문화, 신화, 기술을 본토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 근동 및 지중해까지 퍼뜨렸다고 이론화했다. 검토자들은 원래 정착과 분산에 대한 그의 제안이 추가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더욱 확산주의적(diffusionist)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3. 4. 유전적 증거
말레이인은 동남아시아섬 지역과 말레이 반도의 민족 집단으로, 오스트로네시아어를 사용한다.[23] 2015년 연구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반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스리랑카의 말레이인들은 오스트로네시아인(17%–62%), 원말레이인(15%–31%), 동아시아인(4%–16%), 남아시아인(3%–34%) 등 4가지 주요 조상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다.[23] 그러나 말레이시아 반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말레이인들에게는 동아시아인과 남아시아인보다 오스트로네시아인과 동남아시아 원주민 구성 요소가 더 중요했다.[23]2021년 연구는 현대 동아시아인, 동남아시아인, 폴리네시아인, 시베리아인의 조상인 기저 동아시아인 계통( '''동아시아-동남아시아 계통'''(ESEA))이 기원전 5만년경 본토 동남아시아에서 기원하여 확장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24][25]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관련 조상은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확장 이전에 해양 동남아시아로 퍼져 나갔다.[24][25] 오스트로네시아어 사용자들은 기원전 1만년에서 7천년 사이에 중국 남부 해안에서 타이완과 필리핀 북부에 도착하여 동남아시아 섬 지역 전체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24][25]
현대 말레이인의 유전자 연구는 말레이인이 복잡한 유전적 혼합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유전자 분석 결과, 말레이인은 유전적으로 다양하며, 집단 내부에서 상당한 변이가 있다. 이러한 변이는 장기간에 걸친 지리적 격리와 독립적인 혼합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말레이인 유전자를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는 오스트로네시아계 원주민과 프로토말레이에서 유래한 것이다.[80] 오스트로네시아인 구성 요소는 대만의 아미족과 아타얄족 사람들과 관련이 있으며, 동남아시아인의 오스트로네시아계 구성 요소 유전자 분석 결과 "대만 출신설"이 지지된다.[77][78] 프로토말레이는 운남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유전적으로 증명되었으며, 그 시기는 4000~6000년 전으로 추정된다.[79] 남아시아인(인도인)과의 혼합은 고대(인도네시아·말레이인의 일부는 2250년 전으로 추정)로 여겨진다. 반면 동아시아인(중국인)과의 혼합은 최근(100~200년 전)으로 여겨지지만, 자바에서는 일부가 15세기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79] 그 외에도 소수 구성 요소로 네그리토(말레이 반도 원주민), 중앙아시아인, 유럽인이 있으며, 이들과의 혼합은 175~1500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80]
말레이인 내에서도 말레이 반도 남부와 북부에서 유전적으로 클러스터가 다르다.[81]
말레이인의 Y염색체 하플로그룹은 다음과 같다:[82]
4. 역사
4. 1. 인도 문화의 영향
최초의 인도인들이 언제 벵골 만을 횡단하여 말레이 해안에 도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2,000년 전에는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6] 2세기부터 남인도 타밀 나두의 타밀 왕국과 해상 무역로가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부장 계곡(Bujang Valley)에서 발견되었다.
인도와의 무역 증가는 해양 동남아시아 대부분 연안 지역 사람들이 힌두교와 불교와 접촉하게 했다.[26] 건축, 조각, 문자, 군주제, 종교, 철, 면화 등 인도의 여러 문화 요소들이 도입되었고, 인도의 종교, 문화 전통, 산스크리트어가 퍼져나가면서 지역 왕들은 자신을 "라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6]
서기 원년 초, 스리비자야, 나콘시탐마랏 왕국, 강가네가라, 랑카스카, 케다, 파항, 말라유 왕국, 치 투 등 말레이 국가들이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연안 지역에 등장했다.[27] 7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는 이들 중 많은 국가들이 만달라인 스리비자야의 일부가 되었다.[27]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를 중심으로 한 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였다. "말라유"(Malayu)라는 단어는 644년 중국 자료에서 처음 기록되었으며, 14세기 중반에는 유사한 유산, 관습,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적인 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인식되었다.[28]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의 모든 연안 지역, 서부 자바, 서부 보르네오, 그리고 나머지 말레이 제도로 영향력을 확대했다.[26] 인도와 중국의 후원을 받았던 스리비자야는 무역을 통해 부를 얻었으며, 전성기에는 구 말레이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산스크리트어를 대체하여 이 지역의 공용어가 되었다.[26] 스리비자야 시대는 말레이 문화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11세기 타밀 촐라 왕조의 습격으로 스리비자야가 쇠퇴한 후, 잠비에 있는 말라유 왕국이 가장 지배적인 말레이 국가가 되었다. 13세기 말, 수마트라에 남아 있던 말레이 제국의 잔재는 파말라유 원정에서 자바 침략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299년, 상 닐라 우타마(Sang Nila Utama)가 테마섹에 싱가푸라 왕국을 건설했다. 1400년, 그의 증조손 파라마스와라(Parameswara)는 말라카 술탄국을 건설했고, 새로운 왕국은 스리비자야의 영토와 전통을 계승했다.
12세기 탐브랄링가 왕국은 말레이 반도 대부분을 통합했고, 1247년에서 1258년 사이에는 스리랑카의 자프나 왕국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는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유일하게 국경 너머로 무장한 해상 원정을 한 사례이다.
말레이 정치 체제는 수마트라-반도 국경 너머로 확산되었으며, 말레이인들의 탐험과 이주로 스리비자야 영역을 넘어 왕국을 건설하는 시대였다. 태국 중부에 있는 라보 왕국, 세부 라자국, 탄중푸라 왕국 등이 건설되었으며, 이러한 확장은 아체인과 반자르 사람들의 민족 형성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4. 2. 이슬람화
12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이슬람이 전파되고 말레이 반도 남서부 해안에 말라카라는 중요한 항구 도시가 성장하면서 말레이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29] 이슬람 신앙은 12세기경부터 현재의 케다주, 페락주, 켈란탄주, 트랑가누주 지역 해안에 전파되었으며,[29] 말레이 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관련 고고학적 증거는 트랑가누 비석이다.15세기까지 말레이 제도 서부 대부분을 지배했던 말라카 왕국은 동남아시아 이슬람화의 중심지가 되었다.[30] 말라카의 국교였던 이슬람은 말라카 사회와 문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공통된 말레이 정체성 발전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말라카 시대는 이슬람이 말레이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말레이 정체성의 중요한 표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공통된 말레이 문화적 특징은 말레이화 과정을 통해 말레이 제도 대부분을 특징짓게 되었다. 무역과 다와를 통한 말라카의 영향력 확장은 고전 말레이어, 이슬람 신앙, 그리고 말레이 무슬림 문화, "케멜라유안"(Kemelayuan, 말레이성)의 세 가지 핵심 가치를 함께 가져왔다. 1511년, 말라카 수도는 포르투갈인 정복자들의 손에 넘어갔으나, 말라카는 조호르 왕국, 페락 왕국, 파항 왕국 등 후계 국가들을 위한 문화적 기준점으로 남았다.
14세기 남중국해 건너편에서는 브루나이 제국이 부상하여 보르네오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15세기 중반 브루나이는 말라카 왕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했다. 브루나이는 16세기 중반, 현재 사라왁의 쿠칭까지 남쪽, 필리핀 제도 북쪽까지 영토를 지배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이 제국은 톤도 왕국을 물리치고 현재 마닐라에 코타 셀루동을 건설하여 루손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브루나이는 또한 술루 술탄국과의 관계를 통해 민다나오(필리핀)에서 영향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카볼로안, 세부 라자국과 같은 국가들은 브루나이와 이슬람의 필리핀 전파에 저항했다.
다른 중요한 말레이 술탄국으로는 케다 술탄국, 켈란탄 술탄국, 파타니 술탄국 등이 있다.
4. 3. 외세의 식민 지배
1511년, 포르투갈 제국은 말라카 술탄국의 수도를 함락시켰지만(말라카 함락(1511)), 아 파모사 요새 너머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할 수 없었다. 술탄은 말라카 외부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고, 1528년에 조호르 술탄국을 건설했다. 포르투갈령 말라카는 1614년 조호르와 네덜란드 제국의 연합군이 포르투갈을 이 지역에서 몰아낼 때까지(말라카 전투(1641)) 조호르의 여러 차례 반격을 받았다. 1606년 조호르와의 합의에 따라 네덜란드는 나중에 말라카를 장악했다.
역사적으로 말레이 반도의 말레이 국가들은 시암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말라카 술탄국 자체는 시암과 두 차례 전쟁을 치렀고, 북부 말레이 국가들은 수세기 동안 간헐적으로 시암의 지배를 받았다. 1771년, 짜크리 왕조의 톤부리 왕국은 파타니 술탄국을 폐지하고 나중에 케다 왕국의 상당 부분을 병합했다. 이전에 아유타야 왕조 시대의 시암은 이미 탐브랄링가를 흡수하고 17세기에 싱고라 술탄국을 정복했다. 1808년부터 1813년 사이에 시암은 새로운 행정 구조를 도입하고 파타니, 사이부리, 농칙, 야링, 얄라, 레만, 랑가이와 같은 반독립적인 말레이 왕국들을 대파타니에서 만들었고, 유사하게 룬둥, 쿠파, 통카, 테랑을 얻었으며, 1839년에 케다 왕국에서 세툴, 랑구, 펄리스, 쿠방 파수를 분리했다. 1902년, 시암은 중앙 정부에 대한 독립을 위한 계획된 반란 이후 파타니의 7개 왕국 모두의 정치적 권력을 박탈했다. 결정타는 1906년 시암이 파타니 영토의 경계를 재조정하고 새로운 통치 및 행정 체계를 설치했을 때 가해졌다.

1786년, 페낭 섬은 케다 술탄국이 시암에 대한 군사 지원과 교환으로 동인도 회사에 임대되었다. 1819년, 동인도 회사는 조호르 제국으로부터 싱가포르를, 1824년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네덜란드령 말라카를, 1874년에는 페락으로부터 딘딩스와 프로빈스 웰즐리를, 마지막으로 1886년에는 브루나이로부터 라부안을 획득했다. 이러한 무역항들은 1826년에 공식적으로 해협 식민지로 알려졌고 1867년에 영국 제국의 왕립 식민지가 되었다. 또한 해협 식민지는 1886년에 크리스마스 섬과 코코스 제도를 포함하게 되었다. 말레이 국가들의 문제에 대한 영국의 개입은 1895년 말레이 지배자들이 행정부에 영국 거주민을 받아들였고 연방 말레이 주가 형성되었을 때 공식화되었다. 1909년, 케다, 켈란탄, 트렝가누, 펄리스는 시암으로부터 영국에 넘겨졌다(1909년 영국-시암 조약). 이들 국가는 조호르와 함께 나중에 비연방 말레이 주로 알려지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령 말레이아로 알려진 이러한 영국의 영토와 보호령은 일본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광대한 브루나이 제국의 몰락은 멕시코에서 필리핀에 도착한 스페인 정복자들과의 카스티야 전쟁 동안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오늘날 필리핀 제도에서 제국의 지배가 끝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몰락은 19세기에 절정에 달했는데, 술탄국은 사라왁의 백인 라자, 북보르네오 특허 회사,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게 남은 보르네오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브루나이는 1888년부터 1984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북쪽을 영국 구역으로, 남쪽을 네덜란드 구역으로 나눈 182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 이후 수마트라와 남부 보르네오의 모든 말레이 술탄국은 네덜란드 동인도의 일부가 되었다. 일부 말레이 술탄들은 네덜란드 통치하에서 권력을 유지했지만, 팔렘방 술탄국(1823년), 잠비 술탄국(1906년), 리아우 술탄국(1911년)은 식민 통치에 대한 보복 혐의로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19세기 후반, 독일은 시암으로부터 임대를 요청하여 랑카위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는 제국 해군 대장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의 비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섬을 세계적인 해저 케이블 네트워크의 허브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깊은 천연 항구를 가진 랑카위는 중국과 태평양의 독일 영토 사이에 전략적으로 위치하여 군함 보급을 용이하게 하고 독일 투자자들의 상업적 이익을 증진시켰다. 1899년 10월, Behn, Meyer & Co는 케다의 왕세자에게 50년 동안 섬을 임대하려고 접근했지만, 1897년 비밀 시암 조약에 따라 영국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시암의 거부로 인해 계획은 실패했다. 1900년에 풀라우 론타르를 획득하려는 후속 시도도 마찬가지로 기각되었고, 이는 지역에서의 잠재적인 독일 확장과 그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지배에 대한 영국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독일의 반도 북부 합병 가능성과 태국 운하 또는 크라 지협을 가로지르는 상업 운하 또는 철도망에 대한 독일의 개입 가능성은 지역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지배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영국과 시암은 1909년 영국-시암 조약을 체결하여 반도를 영국과 시암의 관할권으로 분할했다.

영국-시암 조약은 시암이 반도의 상부 지역을 통제하고 하부 지역은 영국 지배하에 있음을 증명했다. 영국은 원래 레만, 레게, 세툴 왕국을 북부 말레이 주들과 함께 영토에 포함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합의에 따라 케다, 켈란탄, 트렝가누, 펄리스만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 조약은 또한 케다 주가 가장 많이 축소되는 것을 목격했는데, 타루타오, 부탕 제도, 센다와, 랑구, 세툴 공국은 모두 시암의 손에 넘어갔고, 켈란탄 북동부 해안에서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는데, 타발 지구, 수응아이 골록, 수응아이 파디를 포함한 권리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펄리스는 푸조 지구를 잃었다. 당시 영국이 통제하던 연방 말레이 주 페락은 레만의 남부 지역이 이 주로 이관되면서 토지 면적이 확장되었고, 켈란탄은 레게(1902년부터 시암 관할하에 있었음)로부터 젤리를 받았다. 시암은 1916년 시암 영토에 남은 유일한 말레이 왕국인 세툴 맘방 세가라 왕국의 툰쿠 바하루딘을 폐위시켰다. 그러나 이 조약은 케다, 켈란탄, 트렝가누, 펄리스의 말레이 주들이 영국 식민 정부하에서 어느 정도 주권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오늘날 말레이시아 행정 시스템에서 볼 수 있는 유산이다.
나중에 일본이 네덜란드 동인도, 영국령 말레이아, 영국령 보르네오를 점령하는 동안 일본은 술탄과 다른 말레이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술탄에게 충성하는 말레이 대중의 신뢰를 얻기 위한 부분적인 구성이었다. 그러나 폰티아낙 사건으로 알려진 일련의 학살에서 일본은 서칼리만탄의 모든 말레이 술탄들과 많은 수의 말레이 지식인들을 암살했는데, 그들은 일본에 대한 반란과 쿠데타를 계획했다는 거짓 혐의를 받았다. 서칼리만탄은 지역의 말레이 지배 계급의 거의 완전한 붕괴로부터 회복하는 데 2세대가 걸린 것으로 여겨진다.
4. 4. 말레이 민족주의의 대두

말레이 인구가 말레이 제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말레이 민족주의는 20세기 초 영국령 말레이아, 즉 말레이 반도에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 초국가적 민족주의, 소위 "인도네시아 민족 각성 운동"으로 특징지어졌는데, 이 운동은 네덜란드 식민지의 여러 지역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국가 의식을 발전시켰다. 브루나이는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말레이 정치 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민족 중심의 민족주의의 역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국에서는 파타니 분리주의가 태국 통치에 대한 반란으로서,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말레이 반도 민족주의의 넓은 범위의 일부로 간주된다. 유사한 분리 독립 운동은 현대 인도네시아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데, 리아우와 리아우 제도의 토착 말레이 지역 모두가 리아우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추구했다.
말레이 민족 각성의 가장 초기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수단은 정기 간행물이었는데, 이는 식민주의와 비말레이시아인의 이민에 직면한 말레이시아인의 입장을 정치화했다. 영국 식민 정부가 강압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1876년부터 1941년 사이에 말레이아에서 147개 이상의 저널과 신문이 발행되었다. 주목할 만한 정기 간행물에는 ''Al-Imam''(1906), ''Pengasuh''(1920), ''Majlis''(1935), 그리고 ''우투산 멜라유''(1939)가 있다. 말레이 민족주의의 부상은 크게 세 개의 민족주의 파벌, 즉 보수 엘리트에 반대하는 말레이 좌파와 이슬람 그룹으로 구분되는 급진파에 의해 주도되었다.[32]

말레이 좌파는 1938년 주로 술탄 이드리스 사범대학에서 교육받은 말레이 지식인 그룹에 의해 설립된 케사투안 멜라유 무다가 대표했다. 이들의 이상은 ''대 인도네시아''였다. 1945년, 그들은 말레이시아 말레이 국민당(PKMM)이라는 정당으로 재편되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원래 중동에서 교육받은 범이슬람주의 정서를 가진 학자들로 구성된 ''카움 무다''가 대표했다. 최초의 이슬람 정당은 1948년 3월에 결성된 ''말레이시아 무슬림당''(히즈불 무슬리민)이었으며, 나중에 1951년 말레이시아 이슬람당이 계승했다. 세 번째 그룹은 보수파였는데, 주로 말레이 칼리지 쿠알라 간사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은 서구화된 엘리트들, 즉 관료와 왕족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전국 여러 지역에서 말레이인들의 이익을 증진하고 보호한다는 주요 목표를 가진 ''페르사투안 멜라유''('말레이 협회')라는 자발적인 단체들을 결성했다. 1946년 3월, 이러한 말레이 협회 41개가 말레이시아에 대한 말레이시아의 지배를 주장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통일민족기구(UMNO)를 결성했다.[32]
말레이인과 말레이 특성은 말레이시아의 말레이 이데올로기와 말레이 민족주의의 기본 토대가 되어왔다. 세 개의 말레이 민족주의 파벌 모두 ''방사 멜라유''('말레이 민족')와 말레이어의 위치에 대한 생각을 공유했지만, 이슬람과 말레이 통치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보수파는 말레이어, 이슬람 및 말레이 군주제가 말레이 특성의 핵심 기둥을 구성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슬람의 정치적 역할을 제한하는 세속 국가 내에서였다. 좌파는 세속 국가에 동의했지만 봉건주의를 종식시키고자 했고, 이슬람 그룹은 왕족을 종식시키는 것을 선호했지만 이슬람의 역할을 훨씬 더 크게 하고자 했다.
1950년 단일 국가인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인도네시아의 모든 전통적인 말레이 군주국은 폐지되었고, 술탄의 지위는 명예직 또는 왕위 계승자로 축소되었다. 1946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주도한 "사회 혁명" 중에 델리, 랑카트, 세르당, 아사한 등 동수마트라의 말레이 공국들이 폭력적으로 몰락하면서, 이는 말레이시아의 동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PKMM의 대 인도네시아 이상과 이슬람주의자들의 이슬람 공화국 비전에 맞서 싸우도록 정치적으로 자극했다.
1946년 3월, UMNO는 통치자 회의의 말레이 술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등장했다. 새로운 운동은 전례 없는 통치자와 백성 간의 긴밀한 정치적 유대를 형성했다. 이는 비말레이시아인들의 놀라운 정치적 무관심과 함께 흥분된 말레이 여론을 불러일으켜 영국이 급진적인 말레이 연합 계획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7월까지 UMNO는 새로운 헌법에 대한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 영국과 합의를 이끌어냈다. 8월부터 11월까지 한편으로는 영국 관리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술탄의 대표들과 UMNO 사이에 협상이 계속되었다.
2년 후, 준독립 말레이 연방이 탄생했다. 새로운 헌법 체제는 전쟁 전 식민 통치의 기본 패턴으로 대부분 복귀했고, 개별 말레이 주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했다. 말레이인들의 권리와 특권은 보호되었다. 전통적인 말레이 통치자들은 따라서 그들의 특권을 유지했고, 그들의 영국식 교육을 받은 후손들은 점진적으로 식민지배가 해제되는 중앙 정부의 권위 있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7년 8월, 동남아시아에서 서구의 마지막 주요 의존국이었던 말레이 연방은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통해 독립을 달성했다. 이 연방은 1963년 싱가포르(1965년 분리), 사바 및 사라왁이 추가되면서 말레이시아로 재편되었다.
5. 문화
5. 1. 언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말레이어는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에서 공용어로 사용되며, 남부 태국, 코코스 제도, 크리스마스 섬, 스리랑카에서도 사용된다. 말레이 제도 전역에서 약 3천 3백만 명이 모어로 사용하며, 약 2억 2천만 명이 제2언어로 사용한다.가장 오래된 형태의 말레이어는 원말레이폴리네시아어에서 유래했으며, 이후 인도 문화와 종교의 영향으로 고대 말레이어로 발전했다. 고대 말레이어에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어휘도 있지만, 현대 말레이어 화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 1303년에 쓰인 테렝가누 비석의 언어는 현대 말레이어와 상당 부분 유사성을 보인다. 말레이어는 이슬람 전파와 함께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어휘가 유입되면서 고전 말레이어로 발전했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15세기 말라카 술탄국 시대에는 자위 문자가 채택되고 이슬람 관련 용어가 대거 수용되면서, 말레이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이슬람 교육과 전파의 언어가 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 작가들은 말레이어를 "유럽의 라틴어처럼 모든 인도의 학자들의 언어"라고 묘사했다. 조호르 술탄국의 방언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인들 사이에서 표준어가 되었고, 표준화된 인도네시아어의 기초가 되었다.[33]
말레이어는 역사적으로 팔라바 문자, 카비 문자, 렌콩 문자로 쓰였다. 이슬람이 들어온 후 아랍 문자 기반의 자위 문자가 채택되어 오늘날 브루나이에서는 두 가지 공식 문자 중 하나로, 말레이시아에서는 대체 문자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34] 17세기부터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화의 결과로 자위 문자는 점차 라틴 알파벳 기반의 루미 문자로 대체되었고,[35] 결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에서 말레이어의 공식적인 현대 문자가 되었으며, 브루나이에서는 공용 문자로 사용된다.
5. 2. 문학
말레이 사람들의 풍부한 구전 및 고전 문학은 하인부터 장관, 판사에 이르기까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는 말레이 사람들의 무형적인 정체성을 형성한다. 운율과 리듬에 쉽게 적용되는 말레이어의 부드럽고 유려한 특성을 고려할 때, 말레이 문학의 독창성과 아름다움은 시적 요소에서 평가될 수 있다. 말레이 문학의 시 형태에는 판툰(Pantun), 샤이르(Syair), 구린담(Gurindam) 등이 있다.말레이 문학의 가장 초기 형태는 구전 문학이며, 주요 주제는 자연, 동물, 사람과 관련된 전통적인 민속이다. 고전 말레이 민속은 전통 노래와 음악, 영웅 서사시, 동물 우화, 귀신 이야기, 과거 사건, 동화, 상징적인 전승, 신화, 음유시인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각 이야기는 등장인물, 정신, 배경, 이야기 전개 측면에서 고유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주로 행복, 지도, 교육, 추억, 설명 등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민속은 기억되어 이야기꾼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졌다. 이러한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은 펭리푸르 라라(penglipur lara, 이야기꾼)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예를 들어 말림 데와 이야기(Hikayat Malim Dewa), 히카야트 말림 데만(Hikayat Malim Deman), 히카야트 라자 도난(Hikayat Raja Donan), 히카야트 안군 치크 퉁갈(Hikayat Anggun Cik Tunggal), 아왕 술룽 메라 무다 이야기(Hikayat Awang Sulung Merah Muda) 등이 있다.

약 2000년 전 인도의 영향이 말레이 제도에 미치기 시작하면서 말레이 문학은 인도 요소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문학은 대부분 산스크리트 문학과 로맨스의 번역이거나, 적어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작품이며, 힌두 신화에 대한 언급이 가득하다. 아마도 이 초기 시대에 세리 라마 이야기(Hikayat Seri Rama, 라마야나(Ramayana)의 자유로운 번역), 바얀 부디만 이야기(Hikayat Bayan Budiman, 수카삽타티(Śukasaptati)의 각색), 판차 탄데란 이야기(Hikayat Panca Tanderan, 히토파데샤(Hitopadesha)의 각색)와 같은 작품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36]

고전 말레이 문학 시대는 이슬람의 도래와 자위 문자(Jawi script, 아랍어 기반 말레이 문자)의 발명 이후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이슬람 신앙과 개념이 말레이 문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3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트랑가누 비석(Terengganu Inscription Stone)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서술적인 말레이어 필사본이다. 이 비석에는 자위 문자로 역사, 법률 및 로맨스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37] 전성기 말라카 술탄국(Malacca Sultanate)은 이슬람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문학을 포함한 말레이 문화 표현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 시대에 주목할 만한 중동 문학 작품이 번역되었고, 종교 서적이 말레이어로 쓰였다. 유명한 번역 작품으로는 무함마드 하나피아 이야기(Hikayat Muhammad Hanafiah)와 아미르 함자 이야기(Hikayat Amir Hamzah)가 있다. 이 시대 말레이 문학의 부흥은 중동의 신비로운 수피즘(Sufi)으로 채색된 다른 국내 문학 작품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함자 팬수리(Hamzah Fansuri)의 주목할 만한 작품인 아스라르 알-아리핀(Asrar al-Arifin, 현자의 비밀, Rahsia Orang yang Bijaksana), 샤랍 알-아시킨(Sharab al-Asyikin, 모든 열정적인 사람들의 음료, Minuman Segala Orang yang Berahi), 지나트 알-무와히딘(Zinat al-Muwahidin, 모든 헌신적인 사람들의 장식, Perhiasan Sekalian Orang yang Mengesakan)은 이 시대의 걸작(magna opera)으로 여겨진다.
말레이 문학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은 아마도 유명한 말레이 연대기(Malay Annals) 또는 술랄라투스 살라틴(Sulalatus Salatin)일 것이다. 이는 말레이 연구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 명인 리처드 올라프 윈스테드 경(Sir Richard O. Winstedt)에 의해 "가장 유명하고 독특하며 최고의 말레이 문학 작품"으로 불렸다. 그 작품의 정확한 저술 연대와 원 저자의 신원은 불확실하지만, 1612년 조호르(Johor)의 알라우딘 리야앗 샤 3세(Sultan Alauddin Riaayat Shah III)의 명령에 따라 툰 스리 라낭(Tun Sri Lanang)이 말레이 연대기의 편집 및 편찬 과정을 감독했다.
19세기에는 키타브 일무 베딜(Kitab Ilmu Bedil, 전통 무기 책)을 포함하여 주목할 만한 추가 작품을 받았다. 이 시대에는 키타브 티브(Kitab Tib)로 알려진 말레이 의학 저널의 사용이 더욱 광범위해졌다.[38] 19세기의 다른 말레이 텍스트는 수마트라에서 쓰여졌는데, 여기에는 라자 알리 하지(Raja Ali Haji)의 키타브 페응에타후안 바하사(Kitab Pengetahuan Bahasa, 언어 지식 책)와 라자 하지 압둘라 빈 라자 하산(Raja Haji Abdullah bin Raja Hassan)의 아내인 카티자 테룽(Khatijah Terung)의 페르힘푸난 구나완 바기 라키-라키 단 페르푸안(Perhimpunan Gunawan bagi Laki-Laki dan Perempuan, 남녀를 위한 부적 모음)이 포함된다.[39]
같은 세기에 싱가포르 출신의 유명한 말라카(Malacca) 태생 훈시(munshi, 서기)인 압둘라 빈 압둘 카디르(Abdullah bin Abdul Kadir)의 저술을 통해 말레이 문학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36] 압둘라는 글을 쓴 가장 교양 있는 말레이 사람으로 여겨지며,[36] 말레이 문학의 가장 위대한 혁신가 중 한 명[33]이자 현대 말레이 문학의 아버지[37]로 여겨진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압둘라 이야기(Hikayat Abdullah, 자서전), 압둘라의 켈란탄 항해 이야기(Kisah Pelayaran Abdullah ke Kelantan, 정부를 위해 켈란탄으로 여행한 기록), 압둘라의 메카 순례 이야기(Kisah Pelayaran Abdullah ke Mekah, 1854년 메카로의 순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작품은 미래 세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고전 말레이 문학에서 현대 말레이 문학으로의 전환의 초기 단계를 나타낸다.[33]
5. 3. 종교
초기 말레이 사회는 대부분 모든 것에 '세망앗'(정령)이 존재한다고 믿는 정령숭배 신앙을 갖고 있었다.[26] 기원전후, 남아시아 상인들에 의해 힌두교와 불교가 말레이 제도에 전파되어 13세기까지 번영했는데, 이는 아랍, 남아시아, 중국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 이슬람이 전파되기 직전이었다.15세기, 말라카 술탄국 하에서 정통 수니파 이슬람이 말레이 세계에서 번영했다. 이슬람은 인구의 일상생활에 완전히 통합되었으며,[40] 이 시대 이후, 말레이인들은 민족종교 집단으로 여겨지며 전통적으로 이슬람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고, 그 이후로 종교를 바꾸지 않았다.[40]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을 ''마숙 멜라유''(말레이인이 되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 정체성은 매우 강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뿌리를 가진 초기 신앙들은 이슬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 왔고, 실제로 수피즘 신비주의는 말레이인들 사이에서 초기 정령숭배 세계의 정령들과 일부 힌두교 요소들과 얽혀 있다. 1970년대 이후,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이슬람 르네상스(다시 이슬람화라고도 함)가 일어나면서, 이슬람 가르침에 위배되고 쉬르크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많은 전통들이 말레이시아 말레이인들에 의해 버려졌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전통들이 미신적이거나 쉬르크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현대 말레이 민족의 대다수는 수니파 이슬람 신자이며,[41] 가장 중요한 말레이 축제는 이슬람 기원의 축제—''하리 라야 아이딜피트리'', ''하리 라야 아이딜아드하'', ''아왈 무하람'', 그리고 ''마울리두르 라술''이다.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에서는 이슬람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배교로 간주한다.
5. 4. 건축
다양한 문화적 영향, 특히 중국, 인도, 유럽의 영향이 말레이 건축 양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2] 최근까지 목재는 모든 말레이 전통 건축물에 사용되는 주요 재료였다. 그러나 특히 스리비자야 시대와 고대 지협 말레이 왕국의 종교 건축물에서는 수많은 석조 건축물이 발견되었다.무아라 타쿠스 사원과 무아로잠비 사원(수마트라)는 스리비자야 제국의 건축 요소와 관련된 예 중 하나이다. 그러나 스리비자야 건축은 주로 말레이 반도의 차야(현재 태국의 한 주)에 나타나는데, 이곳은 스리비자야 시대에 중요한 중심지였다. 이러한 건축물은 불상을 모시는 격실로 구성되며, 구조물의 정상은 연속적으로 겹쳐진 계단식 형태의 ''스투파''로 세워졌는데, 차야의 ''왓 프라 보롬 탓''이 가장 좋은 예이다.
제라이 산과 무다 강 계곡 사이 남쪽 케다 주변에는 힌두교 사원 또는 ''찬디''의 증거도 있다. 이 지역은 부장 계곡으로 알려져 있으며, 약 350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초기 역사 시대의 종교 유적 87곳이 보고되었고, 산 정상에 위치한 12개의 ''찬디''가 있는데, 이는 고지대의 신성함에 대한 선사 시대 말레이 신앙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말레이 반도의 말레이 건축에 대한 초기 언급은 여러 중국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7세기 중국 기록에는 불교 순례자들이 랑카수카에 들른 이야기가 있으며, 도시가 탑이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이중 문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말레이 반도의 적토왕국에 파견된 특별 중국 사절의 또 다른 7세기 기록에는 수도에 100보 이상 떨어진 세 개의 문이 있으며, 불교 주제와 여신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레이 건축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설명은 만수르 샤(재위 1458~1477)의 거대한 목조 ''이스타나''에 대한 것이다.[42]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이 건물은 목재 기둥 위에 7칸짜리 구조물을 올리고, 구리 기와로 된 7층 지붕을 얹었으며, 금박을 입힌 첨탑과 중국산 유리 거울로 장식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말레이 주택은 간단한 목골조 구조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경사진 지붕, 정면의 현관, 높은 천장, 환기(건축)를 위한 벽면의 많은 개구부[43]가 있으며, 종종 정교한 목조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말레이 목조 조각의 아름다움과 질은 소유자의 사회적 계급과 지위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수십 년 동안 전통 말레이 건축은 남쪽의 부기스와 자바, 북쪽의 시아메스, 영국, 아랍, 인도, 서쪽의 포르투갈, 네덜란드, 아체, 미낭카바우, 동쪽의 남중국의 영향을 받았다.[44]
5. 5. 시각 예술
목각은 말레이 전통 시각 예술의 한 부분이다. 말레이인들은 전통적으로 기념물, 배, 무기, 무덤, 악기 및 도구를 식물, 서예, 기하학적 형태 및 우주적 특징을 모티브로 장식했다. 예술은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나무를 부분적으로 제거하고 특정 패턴, 구성 및 순서를 따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키르(ukir)'로 알려진 이 예술 형식은 장인이 창조주에게 헌신하는 행위이자 동료 인간에게 주는 선물로 칭송받는다.
이 예술 형식은 주로 말레이 제도(Malay Archipelago)에 풍부한 목재와 목각 장인들의 숙련된 기술 덕분에 말레이인들이 목각을 공예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동식물이 풍부한 열대 자연 환경은 추상적이거나 양식화된 형태로 목재 판에 묘사되는 모티브에 영감을 주었다. 이슬람의 도래와 함께 기하학적 형태와 이슬람 서예(Islamic calligraphy)가 목각에 도입되었다. 사용되는 목재는 일반적으로 내구성이 뛰어나고 곰팡이, 해충 및 흰개미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열대 활엽수이다.
전형적인 말레이 전통 가옥이나 마스지드는 20개 이상의 조각 부품으로 장식되었을 것이다. 벽과 패널의 조각은 건물 안팎으로 공기가 효과적으로 순환되도록 하고 햇빛이 구조물 내부를 비추도록 한다. 동시에 패널에 의해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모티브를 기반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바닥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따라서 조각 부품은 기능적 및 미적 목적 모두를 수행한다.
5. 6. 요리
말레이시아의 여러 지역은 각자 독특하고 대표적인 요리로 유명하다. 파타니(파타니)·트랑가누·켈란탄은 ''나시 다강'', ''나시 크라부'', ''크로폭 레코르''로, 파항과 페락은 두리안 기반 요리인 ''굴라이 템포약''으로, 케다와 페낭은 북부식 ''아삼 락사''와 ''로작''(로작)으로, 사툰과 펄리스는 ''붕가 쿠다'' 디저트로, 네게리슴빌란은 ''르막'' 기반 요리로, 말라카는 매콤한 ''친찰록''으로, 싱가포르는 ''로작 반둥''과 ''로티 프라타''로, 리아우는 ''이칸 파틴''(''팡가시우스속'' 물고기) 요리인 ''굴라이 이칸 파틴''과 ''아삼 페다스 이칸 파틴''으로, 리아우 제도는 ''수프 이칸''으로, 북수마트라의 델리 말레이인들은 ''나시 고렝 테리 메단''과 ''굴라이 케탐''(게 굴라이)으로, 잠비는 ''이칸 마스 팡강''과 ''템포약''으로, 남수마트라의 팔렘방 말레이인들은 ''펨펙'', ''미 첼로르''(미 첼로르), ''나시 미냐크''로, 방카 벨리퉁은 ''시풋 꽁꽁''과 ''테랑 불란''으로, 서칼리만탄과 사라왁은 ''부부르 페다스''와 ''아얌 판수''로, 브루나이는 나시 카톡과 독특한 ''암부야트'' 요리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 말레이인들은 ''보보티'', ''보에버'', ''쿠에시스터''로 각각 유명하다.
전통 말레이시아 요리의 주요 특징은 풍부한 향신료 사용이다. 코코넛 밀크는 말레이시아 요리에 풍부하고 크리미한 특징을 부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다른 기본 재료는 ''벨라칸''(새우 페이스트)으로, 벨라칸, 고추(칠리)(고추), 양파, 마늘로 만든 풍부한 소스 또는 조미료인 ''삼발''의 기본 재료로 사용된다. 말레이시아 요리는 또한 레몬그라스와 갈랑갈을 듬뿍 사용한다.
거의 모든 말레이시아 식사에는 쌀이 제공되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다른 많은 문화권에서 주식이다. 말레이시아 식사에는 다양한 종류의 요리가 있지만, 코스로 나뉘어 제공되지 않고 한꺼번에 제공된다. 음식은 오른손 손가락으로 정갈하게 먹고, 개인 위생에 사용하는 왼손으로는 먹지 않으며,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식기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무슬림이기 때문에, 말레이시아 요리는 이슬람 할랄 식단법을 엄격하게 따른다. 단백질 섭취는 소고기, 물소고기, 염소고기, 양고기와 닭고기, 생선에서 주로 얻으며, 돼지고기와 기타 비할랄 고기, 알코올은 금지되어 말레이시아인의 일상 식단에는 없다.
코코넛 밀크에 밥을 지은 ''나시 레막''은 아마도 말레이시아의 도시와 마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요리일 것이다. 나시 레막은 말레이시아의 국민 요리로 여겨진다.[47] 기름과 향신료로 구운 ''나시 미냐크''와 ''나시 후잔 파나스''는 특히 전통 말레이시아 결혼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를 위한 의례적인 요리로 여겨진다.
또 다른 예로, 야자잎에 싼 압축 찹쌀밥인 케투팟 또는 ''나시 힘핏''은 특히 이드 알피트르 또는 하리 라야(이드 알피트르) 기간에 인기가 있다. 다양한 고기와 채소를 ''굴라이'' 또는 ''카리''(카리)로 만들 수 있는데, 이는 향신료 혼합의 변형이 있는 일종의 카레 요리로, 고대부터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채택해 온 인도의 영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말레이시아와 페라나칸 중국 요리의 혼합체인 락사도 인기 있는 요리이다. 말레이시아 요리는 또한 가장 가까운 이웃 국가의 요리 전통에서 눈에 띄는 영향을 받았는데, 서수마트라(파가루융)의 미낭카바우족(미낭카바우족)으로부터 전래된 렌당과 자바로부터 전래된 사테가 그 예이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맛과 조리법을 개발했다.
5. 7. 공연 예술
말레이시아에는 다양한 종류의 음악과 무용이 있으며, 이는 여러 문화적 영향이 융합된 것이다. 전형적인 장르는 전통 말레이 민속 무용극인 막 용부터 아랍의 영향을 받은 자핀 무용까지 다양하다. 안무 또한 디키르 바랏의 간단한 스텝과 곡조부터 조겟 가믈란의 복잡한 동작까지 다양하다.
전통 말레이 음악은 기본적으로 타악기 음악이다. 다양한 종류의 꽹과리가 많은 춤의 비트를 제공한다. 또한 중요한 행사에 사용되는 큰 ''레바나 우비''부터 종교 의식에서 성가의 반주로 사용되는 작은 ''징글드-레바나''(프레임 드럼)까지 다양한 크기의 북도 있다.
노바트 음악은 12세기 이슬람의 도래 이후 말레이 왕궁의 왕실 의식용품의 일부가 되었으며, 중요한 궁중 의식에서만 연주되었다. 그 오케스트라에는 ''네하라''(솥북]), ''겐당''(양면 북), ''나피리''(나팔), ''세루나이''(
5. 8. 전통 의상

말레이 전통 의복과 직물은 고대부터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역사적으로 고대 말레이인들은 다양한 천연 재료를 직물, 의류 및 복장의 중요한 원천으로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공통 시대에 동서양 상인들이 말레이 제도의 항구에 일찍 도착하면서 고급 면과 비단을 포함한 새로운 사치품을 가져왔다. 그 결과 의류는 말레이시아 고급 패션의 원천이 되었고, 특히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보르네오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제도 내에서 통합된 정체성으로서 문화적 역할을 획득했다.
말레이 문화에서 의류와 직물은 아름다움, 권력 및 지위의 상징으로 존중된다. 말레이 히카야트의 수많은 기록은 직물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치를 강조했다. 말레이 수작업 직조 산업의 기원은 13세기 송나라 시대 동방 무역로가 번성했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과 아랍의 여러 기록에서 현지에서 생산된 직물과 말레이 반도에서의 직조의 두드러짐이 언급되었다. 잘 알려진 말레이 직물로는 송켓, 바틱, ''텔레포크'', ''리마르'', ''테눈'', ''켈링캄'', ''친다이'', ''펠랑이'' 및 ''테카드''가 있다.
고전적인 말레이 의상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현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전통 의상은 여성용 바주 쿠룽(Baju Kurung)과 남성용 바주 멜라유(Baju Melayu)이며, 이는 모두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의 국가 의상으로 인정되며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미얀마 및 태국의 말레이 공동체에서도 착용된다.
바주 쿠룽은 이슬람의 겸손, 예의 및 겸허의 원칙에 따라 맞춰져 있다. 사적인 신체 부위를 과시하는 것은 이슬람에서 금지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말레이식 의복과 문화적 관점에 흡수되었으며, 15세기 말라카의 만수르 샤 통치 시대에 그 흔적을 강하게 볼 수 있다. 술탄은 여성 무슬림 신민들이 대중 앞에서 가슴 아래로만 사롱을 입는 것을 금지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말레이 바주 쿠룽은 현재의 형태를 취하기 전에 여러 번 변형되었다. 말레이 제도 내 다양한 말레이 왕국의 광대함으로 인해 벤쿨루, 케다, 잠비, 조호르-리아우, 파항, 팔렘방을 포함한 지역에서 바주 쿠룽 디자인 패턴의 지역적이고 독특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남성용 바주 쿠룽에 해당하는 의상은 바주 멜라유로 알려져 있다. 의류의 상단 부분은 바주 쿠룽과 거의 유사한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만들어졌으며, 일반적으로 사롱으로 알려진 짠 천과 함께 착용된다. 사롱의 패턴은 사람의 결혼 상태 또는 고전적인 말레이 사회의 계급을 나타낼 수 있다.
남성을 위한 다른 일반적인 고전 말레이 의상에는 ''바주''(셔츠) 또는 ''테쿠아''(긴소매 셔츠의 일종), ''바주 롬피''(조끼), ''칸칭''(단추), 작은 다리 ''첼라나''(바지), 허리에 두르는 사롱, ''카팔''(샌들), 그리고 ''탄작'' 또는 ''텐골록''(두건)이 포함된다. 귀족의 경우 ''바주 시캅'' 또는 ''바주 라양''(코트의 일종)과 ''펜딩''(장식용 벨트 버클)도 공식 의상으로 착용하는 것과 동의어이다. ''펜데카르''(말레이 전사)가 사롱의 앞 주름에 크리스를 꽂는 것도 흔했다.
의식용 의상으로만 계속 착용되는 바주 멜라유와는 대조적으로 바주 쿠룽은 대다수의 말레이 여성들이 일년 내내 매일 착용한다.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에서는 여성 공무원, 전문직 종사자 및 학생들이 바주 쿠룽을 착용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5. 9. 축제 및 기념행사
15세기 무렵 이슬람의 확산은 민족 정체성을 재정의하여 말레이 정체성(Malayness|Malay identity)을 새롭게 만들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말레이 축제와 기념행사는 이슬람력과 병행하지만, 강한 말레이 특징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말레이 사회 전반에서 반년에 한 번씩 열리는 아이드 알피트르(Aildifitri)와 아이드 알아드하(Aidiladha)의 하리 라야(Hari Raya, "대축일")는 위대한 기념행사로 여겨진다. 이 두 가지 축일은 이슬람 가르침과 신념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과 철학을 기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자는 단식과 라마단(Ramadan)의 인내 후 무슬림으로서의 승리를 의미하고, 후자는 이브라힘(아브라함)이 알라(Allah)의 이름으로 행한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다.
라야(Raya) 축일은 보통 축제 며칠 전에 시작되는 귀향 행사인 발릭 캄풍(Balik Kampung) 또는 발릭 라야(Balik Raya)와 함께 시작된다. 하리 라야 기간 동안 말레이 사람들은 이드 기도를 올리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친구, 친척, 이웃을 방문하며 축하한다. 존경, 사랑, 명예의 표시로 고인이 된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말레이 사람들이 기념하는 다른 주요 종교 의식에는 라마단(Ramadhan), 낮 동안 단식과 다양한 종교 활동을 하는 한 달간의 성월; 무함마드(Muhammad)의 탄생을 기념하는 특별한 대규모 행렬인 마울리드 알라술(Maulidur Rasul); 무하람(Muharram)을 기억하며 말레이 사람들이 부부르 아수라(Bubur Ashura)라는 특별한 요리를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아슈라(Ashura); 중간 샤반(Sha'ban)을 기념하는 용서를 위한 특별한 단식일인 니스푸 샤반(Nisfu Syaaban); 꾸란(Quran)의 첫 계시인 누줄 꾸란(Nuzul Quran); 무함마드의 승천인 이스라크 단 믹라즈(Israk dan Mikraj); 이슬람 새해인 아왈 무하람(Awal Muharram) 등이 있다. 후자 세 가지 기념행사는 보통 특별한 수낫(sunat) 기도, 종교 강의, 모스크에서의 이슬람 토론을 통해 기념된다.

다양한 말레이권에서 많은 국내 지역 문화 축제와 사회 행사가 열린다. 해안 지역은 역사적으로 이슬람력(Islamic calendar|Islamic month) 사파르(Safar) 기간 동안 정화 목욕을 하는 만디 사파르(Mandi Safar) 또는 푸자 판타이(Puja Pantai) 의식을 지켜왔는데, 이는 라마단 전 벨리마우(Belimau) 전통과 유사하게 이슬람 이전의 고대 말레이 신성한 정화 의식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리고 내륙과 농촌 말레이 공동체는 전통 게임, 연극, 조겟(Joget)과 다른 종류의 춤 연극을 통해 수확제(harvest festival)인 페스타 메누아이(Pesta Menuai)를 기념한다. 그러나 20세기 말레이 사회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혁명으로 인해 두 관습 모두 점차 사라지고 있다. 또한 많은 말레이 사람들은 각 왕국의 왕실을 기리기 위해 제국 기념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적 특징은 개인적 차원에서 말레이 축제에 강하게 자수처럼 새겨져 있으며, 무슬림으로서의 영적인 통과의례와 결합되어 있다. 말레이 사람들은 보통 켄두리(kenduri), 즉 종교 의식 만찬을 열어 행사를 축하하거나 축복을 구한다. 도아 셀라마트(Doa Selamat, 신의 은총과 보호를 구함), 케슈쿠란(Kesyukuran, 감사), 멜렝강 페룻(Melenggang Perut, 첫 아이를 임신한 어머니를 위한 의식적인 마사지), 아키카(Aqiqah)와 꾸쿠르 잠불(Cukur Jambul, 새로운 삶을 축하하는 신생아 의식), 벹틴딕(Bertindik, 여자아이의 첫 귀뚫기 의식), 카탐(Khatam, 아이가 꾸란(Quran)을 처음으로 완전히 읽은 후 졸업식), 카탄(Khatan, 할례), 카윈(Kahwin, 결혼식), 아르와(Arwah) 또는 타힐(Tahlil, 고인을 위한 기도) 등 몇 가지 철학적 변형이 있다. 이 행사는 보통 가족이 주최하며, 전통적으로 레왕(Rewang) 또는 고통로용(Gotong-royong)으로 알려진 사회 모임에서 지역 사회의 도움을 받았다. 이 의식 동안 온 가족은 이웃과 친척의 도움을 받아 음식 준비, 장소 관리, 물류 조립 및 기타 기술적 통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위임받는다. 그러나 현대 말레이 사회에서 도시화가 확산됨에 따라 레왕/고통로용의 관행은 가족의 고용된 케이터링 서비스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
5. 10. 무술

실랏과 그 변형들은 말레이 반도(싱가포르 포함), 리아우 제도, 수마트라, 그리고 보르네오 해안 지역을 포함한 말레이 세계 전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6세기까지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에서 체계화된 전투 기술이 연습되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초기 형태의 실랏은 랑카수카(2세기)와 스리비자야(7세기)의 고대 말레이 왕국의 군대에서 개발 및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말라카, 조호르 술탄국, 파타니 왕국, 브루나이 술탄국과 같은 말레이 술탄국의 영향은 말레이 제도에 이 무술을 전파하는데 기여했다. 해협과 강의 복잡한 모세혈관망을 통해 지역 전역의 교류와 무역이 촉진되었고, 실랏은 울창한 열대우림과 산악 지대로 전파되었다. 항 투아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페실랏(실랏 수련자) 중 한 명이며, 일부에서는 말레이 실랏의 아버지로 여기기도 한다. 고전 시대 이후, 실랏 멜라유는 큰 다양화를 거쳐 오늘날 인도네시아 펜칵 실랏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형태의 실랏의 기원으로 전통적으로 인식되는 것을 형성했다.
실랏 외에도, 토모이는 주로 말레이 반도 북부 지역에서 말레이인들에 의해 실시된다. 이것은 푸난 제국(68년) 시대 이후 동남아시아 본토에 퍼진 것으로 여겨지는 인도차이나식 킥복싱의 변형이다.
5. 11. 금속 세공
17세기 무렵, 금, 은, 철, 황동은 모두 완벽하게 주조되어 말레이 사회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시대에는 금속 공예가 왕실의 중요한 후원을 받았다.[50][51] 철로 만든 특유의 말레이 단검인 크리스(Keris)부터 금과 은으로 만든 정교한 보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말레이 금속 공예품이 이 시대의 증거로 나타난다. 이 시대 말레이 귀족들에게는 보석으로 장식된 장식용 벨트 버클인 팬딩(pending), 크롱상(keronsang, 브로치), 추쿡 상굴(cucuk sanggul, 머리핀)이 가장 인기 있는 패션 아이템이었다.[50][51]
말레이 은제품은 정교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르푸세, 필리그리, 니엘로 기법으로 제작된다.[50] 은으로 만든 일반적인 전통 말레이 제품으로는 베개 끝, 벨트 버클, 매트 모서리, 물병 마개, 크리스 칼집, 담배갑 등이 있다.[50] '아완 라랏'(Awan Larat, 구름 무늬)과 '크라왕'(Kerawang, 식물 무늬)은 말레이 장식용 은 베개 끝과 담배갑에 사용되는 인기 있는 디자인이다.[50]
황동 제품의 사용은 귀족과 평민을 포함한 다양한 전통 말레이 사회 계층에 걸쳐 있다. 황동 제품의 인기는 내구성, 품질, 그리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가격 때문이다. 황동 제품은 기능성 제품에는 노란색 황동을, 장식용에는 흰색 황동을 사용하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50][51] 종종 정교하게 두들겨서 종교적인 무늬나 꽃 무늬 등 다양한 장식 디자인으로 조각한다. 그러나 황동은 빈랑을 담는 의식용 접시인 테팍 시리(Tepak Sireh)와 전통 말레이 가믈란 오케스트라의 꽹과리(Gong)와 같은 특정 악기 제작에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다른 주요 전통 말레이 제품으로는 꽃병, 향수병, 쟁반, 냄비, 주전자, 향로 등이 있다.[50][51]
5. 12. 전통 놀이
전통 말레이 게임은 일반적으로 공예 기술과 손재주가 필요하며 말라카 술탄국 시대 이후로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말레이 연대기』에는 세팍타크로와 연 날리기가 말레이 술탄국의 귀족들과 왕족들이 즐겼던 전통 놀이로 언급되어 있다.세팍타크로는 가장 인기 있는 말레이 게임 중 하나이며 수 세기 동안 즐겨왔다. 전통적으로 세팍타크로는 원 안에서 팔과 손을 제외한 신체의 어떤 부위를 사용하여 라탄 공을 차서 공중에 띄워 놓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말레이시아의 국민 스포츠로 인정받아 아시안 게임과 동남아시아 게임과 같은 국제 스포츠 행사에서도 펼쳐진다.
또 다른 인기 있는 게임은 수확기 이후에 주로 하는 ''가싱'' 팽이치기이다. 가장 경쟁력 있는 ''가싱''(팽이)을 만들려면 뛰어난 장인 정신이 필요하며, 어떤 팽이는 한 번에 두 시간 동안 회전하기도 한다.
아마도 가장 인기 있는 말레이 게임은 말레이 반도 동부 해안에서 유래한 독특한 종류의 연인 ''와우'' 혹은 연 날리기일 것이다. 와우 날리기 대회에서는 심사위원들이 장인 정신(와우는 대나무 골격에 아름답고 다채로운 물체가 장식되어 있다), 소리(모든 말레이시아 연은 바람에 날릴 때 특정한 소리를 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고도를 기준으로 점수를 매긴다.
말레이시아에는 만칼라 보드 게임의 변형인 콩칵이라는 게임도 있다. 이 게임은 돌, 구슬, 혹은 조개를 12개 이상의 구멍으로 이루어진 나무판 위에서 옮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만칼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게임으로 인정받으며, 고대 이집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원을 가지고 있다. 이 게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각 문화권은 말레이시아를 포함하여 자신만의 변형을 만들어냈다.
6. 하위 집단
말레이족은 인도네시아 제도 밖으로 말레이 반도에 거주하며, 말레이시아 반도에서는 주요 민족 집단을, 싱가포르, 태국, 미얀마 남부에서는 중요한 소수 민족을 형성한다.[56][57][58] 보르네오 말레이 지역은 남서부 사바에서 시작하여 브루나이를 거쳐 해안 사라와크까지 이어지고 칼리만탄까지 계속된다.
민족 집단 | 역사적 영역 | 주요 인구 지역 |
---|---|---|
방카 벨리퉁 말레이인 | ||
방콕 말레이인[84][85] | ||
벵쿨루 말레이인 | ||
베라우 말레이인 | ||
브루나이 말레이인[86][87][88][89] | ||
부기스-말레이인[90] | ||
미얀마 말레이인 | ||
잠비 말레이인 (수마트라 동부 말레이인) | ||
자바 말레이인[90][91] 자바인 출신 말레이인 집단 | ||
조호르 말레이인[87][88][89] | ||
케다 말레이인[87][88][89][92] | ||
켈란탄 말레이인[87][88][89] | ||
롤로안 말레이인 | ||
말라카 말레이인[87][88][89] | ||
미낭카바우 말레이인[90][91] 미낭카바우인 출신 말레이인 집단 | ||
수마트라 북동부 말레이인 | ||
파항 말레이인[87][88][89] | ||
파타니 말레이인[87][88][89] | ||
페락 말레이인[87][88][89] | ||
리아우 말레이인 | ||
사라왁 말레이인 | ||
셀랑고르 말레이인 | ||
싱가포르 말레이인 | ||
타미앙 말레이인 | ||
트르엉가누 말레이인[87][88][89] | ||
서칼리만탄 말레이인 |
참조
[1]
웹사이트
Minister: Census shows Malaysia's oldest man and woman aged 120 and 118; preliminary census findings to be released in Feb 2022
https://www.malaymai[...]
Malaymail
2022-01-17
[2]
웹사이트
Ethnic Group (eng)
https://web.archive.[...]
Indonesian Information Portal
2020-12-29
[3]
웹사이트
Thailand
http://worldpopulati[...]
2015-05-05
[4]
웹사이트
Census of Population 2020Population
https://www.singstat[...]
[5]
문서
CIA (B)
[6]
웹사이트
Malay, Cape in South Africa
https://joshuaprojec[...]
2022-03-21
[7]
웹사이트
Jejak Melayu di bumi anbiya
https://web.archive.[...]
2018-06-01
[8]
웹사이트
Jabal Ajyad perkampungan komuniti Melayu di Mekah
https://web.archive.[...]
2018-06-01
[9]
간행물
A2: Population by ethnic group according to districts, 2012
Department of Census & Statistics, Sri Lanka
[10]
웹사이트
Australia – Ancestry
http://profile.id.co[...]
2015-12-28
[11]
웹사이트
Data Access Dissemination Systems (DADS): Results
https://www.census.g[...]
2018-12-02
[12]
웹사이트
Malay in Cambodia
https://joshuaprojec[...]
Joshua Project
2024-12-10
[13]
웹사이트
Census Profile, 2016 Census
http://www12.statcan[...]
Statistics Canada
2017-02-08
[14]
웹사이트
在留外国人統計(旧登録外国人統計) 結果の概要 | 出入国在留管理庁
https://www.moj.go.j[...]
[15]
논문
Understanding Melayu (Malay) as a Source of Diverse Modern Identities
2001-10
[16]
서적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17]
서적
Singapore and the Silk Road of the Sea, 1300-1800
NUS Press
[18]
웹사이트
Chronicle of Mongol Yuan
http://www.guoxue.co[...]
2010-07-25
[19]
서적
The Malays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2022-09-08
[20]
웹사이트
Malay Concordance Project
https://mcp.anu.edu.[...]
[21]
웹사이트
Orang Asli Population Statistics
https://web.archive.[...]
Center for Orang Asli Concerns
[22]
논문
Perspective on Ancestral Lineages and Genetic Markers of Malay Population in Peninsular Malaysia
http://journalarticl[...]
2023-03-19
[23]
논문
Dissecting the genetic structure and admixture of four geographical Malay populations
https://www.nature.c[...]
2015
[24]
논문
Multiple migrations to the Philippines during the last 50,000 years
2021-03-30
[25]
논문
A genetic history of migration, diversification, and admixture in Asia
http://www.pivotscip[...]
2022-04-15
[26]
참고자료
Zaki Ragman, 2003, pp. 1–6
[27]
웹사이트
Early Malay kingdoms
http://www.sabrizain[...]
2010-06-21
[28]
서적
Islam in Malaysia: An Entwined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9]
참고자료
Marshall Cavendish, 2007, p. 1174
[30]
참고자료
Harper, 2001, p. 15
[31]
웹사이트
CIA World Factbook
https://www.cia.gov/[...]
2014-02-28
[32]
참고자료
Suryadinata, 2000, pp. 133–136
[33]
참고자료
Sneddon, 2003, p. 59
[34]
웹사이트
Kedah MB defends use of Jawi on signboards
https://web.archive.[...]
[35]
웹사이트
Malay (Bahasa Melayu / بهاس ملايو)
http://www.omniglot.[...]
2010-06-22
[36]
서적
[37]
서적
[38]
웹사이트
Kitab Ilmu Bedil – Book of Malay Traditional Weaponry (2016)
http://www.mowcapune[...]
2017-12-03
[39]
학술지
Transcripts of Gender, Intimacy, and Islam in Southeast Asia: The "Outrageous" Texts of Raja Ali Haji and Khatijah Terung
[40]
서적
[41]
웹사이트
The Malay of Malaysia
http://kcm.co.kr/bet[...]
Bethany World Prayer Center
2014-02-28
[42]
서적
[43]
웹사이트
Malay Vernacular Architecture
http://www.hbp.usm.m[...]
2010-06-24
[44]
Youtube
For Sale – CountryHeights
https://www.youtube.[...]
2011-03-22
[45]
웹사이트
Malaysian Handicraft – Pottery
http://go2travelmala[...]
2017-11-22
[46]
서적
[47]
웹사이트
Nasi Lemak
http://www.malaysia.[...]
2020-08-24
[48]
웹사이트
Seni Bermukun Semakin Malap
http://www.mysarawak[...]
2009-04-20
[49]
서적
[50]
웹사이트
Malaysia Handicrafts ~ Gold Silver & Brass
http://go2travelmala[...]
2018-05-31
[51]
웹사이트
Metal Work
http://www.karyaneka[...]
Syarikat Pemasaran Karyaneka Sdn. Bhd.
2018-05-31
[52]
뉴스
Kris, more than just a simple dagger
http://www.thejakart[...]
2002-04-18
[53]
서적
[54]
문서
7 Kelas Senjata Alam Melayu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서적
[59]
서적
[60]
서적
[61]
웹사이트
Mempawah Sultanate
http://melayuonline.[...]
2016-03-26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Brunei
[65]
서적
[66]
문서
Figure obtained based on the percentage of Malays in 2000 census and the total Indonesian population in 2010 census
[67]
서적
Thailand
[68]
서적
[69]
서적
Singapore
[70]
서적
[71]
harvard
2004
[72]
harvard
1969
[73]
웹사이트
https://books.google[...]
[74]
웹사이트
Suku Batin - A Proto-Malay People? Evidence from Historical Linguistics
http://email.eva.mpg[...]
2002-08-03
[75]
harvard
2002
[76]
harvard
1999
[77]
저널
Early Austronesians: into and out of Taiwan
2014-03-06
[78]
저널
Resolving the ancestry of Austronesian-speaking populations
https://link.springe[...]
2016
[79]
저널
Population Genetic Structure of Peninsular Malaysia Malay Sub-Ethnic Groups
2011-04-05
[80]
저널
Dissecting the genetic structure and admixture of four geographical Malay populations
https://www.nature.c[...]
2015-09-03
[81]
저널
Fine-scale population structure of Malays in Peninsular Malaysia and Singapore and implications for association studies
2015-07-22
[82]
저널
Paternal genetic affinity between western Austronesians and Daic populations
https://www.ncbi.nlm[...]
2008
[83]
서적
DNA・考古・言語の学際研究が示す新・日本列島史
勉誠出版
2009
[84]
harvard
2003
[85]
harvard
2007
[86]
harvard
2007
[87]
harvard
1973
[88]
harvard
1983
[89]
harvard
2007
[90]
harvard
1990
[91]
harvard
2006
[92]
harvard
198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