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6년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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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6년 정변은 1873년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둘러싼 정한론을 둘러싸고 정부 내 세력 간 갈등이 심화되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 내에서 조선과의 외교 정책, 특히 정한론을 둘러싸고 대립하던 세력 간의 권력 다툼으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정한파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내치 우선파의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와쿠라 사절단 귀국 이후, 정한론을 주장하며 조선 파견을 요구하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임하고, 이타가키, 에토 등 정한파 인사들이 연이어 사임하면서 정부는 재편되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천황의 권위가 강화되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가 이끄는 정부가 구성되어 내치 우선 정책이 추진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이후 일본의 대외 정책과 헌법 제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과 일본은 조선 통신사와 일본 국왕사를 통해 교류해 왔으나, 임진왜란 이후 일본 국왕사는 폐지되었고 조선 통신사는 1811년(순조 11년) 이후 파견되지 않았다.[8] 1873년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 정책을 지속했고,[9]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쓰시마를 통해 조선과 통상을 추진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한 일본은 조선에 사절을 파견했지만, 국서 문제로 인해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다.
1873년 (메이지 6년), 예산 문제로 대장성과 다른 관청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1월 19일,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조기 귀국 명령이 내려졌다. 4월,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장성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고토 쇼지로 등 반대 세력이 참의로 임명되면서 실패했다. 이노우에와 그의 심복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대장성에서 사임했고, 오쿠마 시게노부는 유수정부에 접근했으며,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시적으로 실각했다.
2. 배경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일본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태정관 정치가 이루어졌다. 1871년(메이지 4년)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으로 태정관 주요 대신들이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사이고는 태정관 조직을 정원, 우원, 좌원의 삼원으로 개편하고 궐석인 상태로 공직 임명을 단행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메이지 정부는 청일수호조약을 체결하는 등 중국 및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으나,[15] 조선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은 난항을 겪었다. 1873년(메이지 6년) 초, 대장성은 예산 문제로 다른 관청들과 갈등을 빚었다.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조기 귀국했고,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장성 권한 강화를 시도했지만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고토 쇼지로 등 반대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대장성 수장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사임하고, 오쿠마 시게노부가 유수 정부에 접근하는 등 기도파를 중심으로 정부 혼란이 일어났다.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정한론을 주장하며 특사 파견을 제안하자, 찬반 양론이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
2. 1. 조선과 일본의 관계
조선과 일본은 조선 통신사와 일본 국왕사를 통해 교류해 왔으나, 임진왜란 이후 일본 국왕사는 폐지되었고 조선 통신사는 1811년(순조 11년) 이후 파견되지 않았다.[8] 1873년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 정책을 지속했고,[9]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쓰시마를 통해 조선과 통상을 추진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한 일본은 조선에 사절을 파견했지만, 국서 문제로 인해 양국 관계는 단절되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유교 부흥과 양이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 단절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2. 1. 1.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
조선과 일본은 오랫동안 조선 통신사와 일본 국왕사를 통해 교류해 왔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국왕사는 폐지되었고, 조선 통신사 역시 1811년(순조 11년) 이후 파견되지 않았다.[8] 1873년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고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 정책을 지속하고 있었고,[9]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쓰시마를 통해 조선과 통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쓰시마번은 근대 이전에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류에서 많은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양국이 평화롭게 교역하는 것이 이로웠다. 이 때문에 조선과 일본 사이를 오가는 국서는 쓰시마번에 의해 민감한 문맥과 낱말이 수정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일본을 하대하였고 일본 역시 조선에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문장을 썼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보냈다가는 국교가 단절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이후 들어선 일본의 새 정부는 대정봉환을 이유로 국서를 조선에 직접 보냈고, 이 국서에 일본이 스스로를 황제국으로 칭하고 조선에 보내는 국서를 신하국에 보내는 봉칙으로 표현하자 조선은 국서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일본 내각은 이를 매우 "무례"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10][11]
조선은 대마도 이외의 지역 출신 일본 상인의 무역을 여전히 금지하였고, 부산에서 밀무역하던 일본 상인이 적발되자 일본을 마음대로 법을 바꾸어 300년 외교 관례를 어기는 "무법지국"(無法之國)이라고 비난하였다.[12] 이를 보고받은 일본 태정관 내의 조선에 대한 태도는 매우 악화되었다. 일본의 새로운 정부를 조선이 인정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한론의 전개에 있어서도 찬반 양론은 필요성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시기 상조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대립하였다.[13]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한 일본은 메이지 원년(1868년) 쓰시마 번을 통해 조선에 그 뜻을 전하는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천황의 신하였던 에도 막부의 쇼군과 대등한 관계였던 조선 정부를 격하시키는 풍조가 있어, 이 국서에는 기존 에도 막부와의 국서에는 없었던 “칙(勅)”, “황(皇)”의 글자가 들어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 측은 이 국서를 받지 않았다. 이후 교환된 국서에서는 칙의 글자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메이지 4년(1871년) 조선의 종주국인 청과 대등한 관계인 일청수호조규를 체결함에 따라 다시 상하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천자(天子)”의 글자가 들어간 국서가 보내짐으로써 일조 관계는 단절 상태가 되었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유교의 부흥과 양이를 국시로 하는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일본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2. 2. 일본의 정치 변화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일본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태정관 정치가 이루어졌다. 1871년(메이지 4년)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으로 태정관 주요 대신들이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사이고는 태정관 조직을 정원, 우원, 좌원의 삼원으로 개편하고 궐석인 상태로 공직 임명을 단행하여 실권을 장악했다.
메이지 정부는 청일수호조약을 체결하는 등 중국 및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15] 그러나 조선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은 난항을 겪었다.
1873년(메이지 6년) 초, 대장성은 예산 문제로 다른 관청들과 갈등을 빚었다.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조기 귀국했고,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장성 권한 강화를 시도했지만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고토 쇼지로 등 반대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대장성 수장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사임하고, 오쿠마 시게노부가 유수 정부에 접근하는 등 기도파를 중심으로 정부 혼란이 일어났다.
유수정부 내 인사들은 반대장성이라는 것 외에 결집할 이유가 없어, 사이고가 요양을 간 동안에도 각자 행동했다. 오쿠보는 귀국 후에도 유수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참의 복귀를 미루고 이와쿠라의 귀국을 기다렸다.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정한론을 주장하며 특사 파견을 제안하자, 찬반 양론이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
2. 2. 1. 유수정부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일본의 정치는 태정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수장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1871년(메이지 4년)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주요 태정관 대신들이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사이고는 태정관 조직을 정원, 우원, 좌원의 삼원으로 개편하고, 유럽 순방 중인 인사들을 궐석으로 공직에 임명하였다. 이를 유수정부라고 한다.[14] 대신과 참의가 상당수 궐석인 상태의 정부 조직 개편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반대편에서는 견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는 여러 차례 개편되었다. 폐번치현 이후인 1871년(메이지 4년) 8월에는 태정관의 구성을 정원, 좌원, 우원으로 하는 삼원제도가 시작되었다.[14] 정원은 태정대신인 산조 사네토미가 천황을 보필하고, 참의가 이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때 참의가 된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 기토 다카요시, 이타가키 다이스케, 오쿠마 시게노부였으며, 오쿠보 도시미치는 대장성의 수장이었지만, 대장성 내부 관료들과 기토 등 유력자들과의 마찰을 겪고 있었다.[14] 같은 해 9월 12일, 기토파의 대장대보 이노우에 가오루가 오쿠보의 해외여행을 제안했고, 오쿠보뿐만 아니라 대납언 이와쿠라 도모미(해외여행 직전 대납언에서 우대신으로 승진)와 기토 등 유력자를 포함한 사절단 파견으로 이어졌다. 11월 7일, 기토 등과 섭정정부의 대표는 해외여행 중에 "대규모 내정 개혁을 하지 않는다" 등을 포함한 12개 조항의 약정을 맺었다.[14] 11월 9일 회의에서는 이타가키가 조선에 사절을 보내 개국을 촉구하고 응하지 않으면 전쟁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선 문제에는 손대지 않기로 합의되었다.[14] 이와쿠라를 대표로 기토, 오쿠보, 이토 히로부미 등이 참여한 사절단은 11월 11일에 출국했다.[14]
섭정정부는 큰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합의에도 불구하고, 각 부처는 각각 대규모 개혁을 주장하며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14] 학제, 치록처분 등의 대개혁은 섭정정부 시기에 결정된 것이다. 1871년 11월에는 미야코지마 주민 조난 사건이 발생하여 타이완 정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마침 사족의 신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사족으로 구성된 군대와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하는 사쓰마 번파도 정벌을 주장하고 있었다.[14] 기도파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을 중심으로 하는 대장성이 내치 우선을 주장하며 강하게 반대했기에 출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를 청나라에 파견하여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14]
3. 메이지 6년 정변의 경과
하지만 유수정부 내에서도 대장성 반대 외에는 결속력이 약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병으로 요양 중이었으며, 각 참의는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오쿠보는 5월 29일 귀국했지만, 유수정부에 불만을 품고 국내 시찰을 하며 이와쿠라 도모미의 귀국을 기다렸다.
5월 31일, 부산의 일본공사관 대표는 조선 정부의 포고문에 일본을 모욕하는 내용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거류민 보호를 명분으로 파병을 주장했고, 사이고는 자신이 사절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등이 사이고의 주장에 찬성했다. 산조 사네토미는 사이고의 신변을 우려해 군대 동행을 제안했지만, 사이고는 거절했다. 결정은 소에지마 다네오미의 귀국을 기다려 하기로 했다. 소에지마는 사이고의 주장에 찬성했지만 자신이 사절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7월 23일, 기도 다카요시가 귀국했지만, 유수정부의 현실에 격분하여 오쿠보와 마찬가지로 정부 복귀를 거부하고 정부 타도를 목표로 은밀히 활동했다. 기도는 정한론에 대해 "조선이 우리의 외교 문서를 받지 않는 무례한 고집은 병력을 동원하여 벌하여야" 하나 먼저 "힘을 기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7월 말부터 사이고는 산조에게 사절 파견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산조는 사이고가 살해될 것을 우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이고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이 사절로 가면 조선이 "폭거"를 저지를 것이고, 이는 "쳐야 할 명분"이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이 사절을 죽이면 천하 사람들이 조선의 죄를 알게 되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언급하며, 자신이 살해될 가능성까지 고려했다.[2] [3] 사이고가 사절 파견을 강력히 주장한 이유에 대해, 사이고 자신은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국가를 일으키는 원대한 전략"이라고 말했다.
한편, 다카시마 토모노스케는 "사이고를 죽일 정도로 조선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는 없다"라고 회고한 것처럼, 조선 문제가 그렇게 큰 문제로 여겨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조선과의 전쟁은 종주국인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이어질 위험도 있었지만, 사이고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
8월 16일, 사이고는 산조에게 이와쿠라 귀국 전에 사절 파견을 승인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다음 날인 8월 17일 각의에서 사이고의 사절 파견이 결정되었지만, 산조는 메이지 천황에게 보고했고, 천황은 이와쿠라 귀국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라는 회답을 내렸다.
이후의 전개는 '산조의 발병과 이와쿠라의 태정대신 권한대행 취임' 섹션과 '사이고의 사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3. 1. 사이고의 조선 사절 파견안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 7월 말부터 산조 사네토미에게 자신의 조선 파견안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산조는 사이고가 조선에서 살해될 것을 우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19] 사이고는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이 사절로 가면 조선이 "폭거"를 저지를 것이고, 이는 "쳐야 할 명분"이 된다고 주장했다.[2] 또한 조선이 사절을 죽이면 천하 사람들이 조선의 죄를 알게 되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언급하며, 자신이 살해될 가능성까지 고려했다.[3]
사이고는 자신의 조선 파견 이유를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국가를 일으키는 원대한 전략"이라고 밝혔다.[16] 오쿠마 시게노부는 사이고가 정치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옛 주군 시마즈 히사미쓰의 질책을 받아 낙담한 상태에서, 조선 궁정에서 살해되는 것을 마지막 영광으로 여겼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했다.[16] 당시 사이고는 건강이 좋지 않아 스스로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7]
다카시마 토모노스케는 훗날 회상에서 조선과의 전쟁은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고, 미야코섬 조난 사건이나 사할린섬 점령 등 다른 문제도 겹쳐 일본의 군사적 여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17] 사이고의 측근인 사쓰마파 내부에서도 거물인 사이고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사절 파견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다.[17]
8월 16일, 사이고는 산조에게 이와쿠라 귀국 전에 사절 파견을 승인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고, 다음 날인 8월 17일 각의에서 사이고의 사절 파견이 결정되었다.[19] 그러나 산조는 메이지 천황에게 보고했고, 천황은 이와쿠라 귀국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라는 회답을 내렸다.[19]
3. 1. 1. 정한론 대두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일본 정치는 태정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수장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1871년(메이지 4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사이고는 태정관을 개편하고, 자리를 비운 인사들을 대신해 공직에 임명하였다. 이를 유수정부라고 한다.[14]
메이지 정부는 중국 및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을 추진했고, 조선과의 국교 수립이 난항을 겪자 1871년 청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15] 이후에도 조선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은 메이지 정부의 주요 과제였다.
1873년(메이지 6년) 초, 대장성은 예산 문제로 다른 관청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 갈등이 해결되지 않자 정부는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조기 귀국 명령을 내렸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장성의 권한 강화를 시도했지만,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고토 쇼지로 등 대장성 권한 강화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요직에 임명되면서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정한론을 주장하며 자신이 특사로 조선을 방문하겠다고 제안하면서, 정국은 정한론 찬반 논쟁으로 흘러갔다.
1873년 5월 31일, 부산의 일본공관 대표 히로츠 히로노부는 조선 정부가 일본인의 밀무역을 감독하는 포고를 내면서 일본에 대해 무례한 어휘를 사용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파병을 주장하였고, 사이고는 자신이 사절로서 조선에 가겠다고 주장하였다.
고토 쇼지로와 에토 신페이는 사이고의 주장에 찬성하였고, 산조 사네토미는 사이고가 단독으로 파견될 경우 신변에 위험이 있을 것이라며 병사 대동을 제안하였으나, 사이고는 이를 거절하였다.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사이고의 주장에 찬성했지만 자신이 사절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도 다카요시는 정한론에 대해 "조선이 우리의 외교 문서를 받지 않는 무례한 고집은 병력을 동원하여 벌하여야" 하나 먼저 "힘을 기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사이고는 1873년 8월 17일 이타가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조선에 파견된 사절이 폭살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천하의 인심이 조선을 토벌하자는 것에 집중되어 유신정부에 대한 국내 사족과 농민의 반감을 밖으로 돌릴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이라고 밝히면서[16] 자신이 살해 당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다카시마 토모노스케는 당시를 회상하며 조선과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사이고가 죽게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고, 조선과 전쟁을 하게 되면 종주국인 청나라와도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위험이 정한론 철회의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1873년 8월 17일, 태정관 각의는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산조는 메이지 천황에게 이와쿠라 사절단 귀국 때까지 중대 결정은 연기할 것이라는 회답을 받았다.
3. 2. 이와쿠라 사절단 귀국 이후의 상황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일본의 정치는 태정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수장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1871년(메이지 4년) 주요 태정관 대신들이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사이고는 태정관 조직을 정원, 우원, 좌원의 삼원으로 개편하고 궐석인 자리에 인사를 임명하였다. 이를 유수정부(留守政府)라고 한다.[14] 대신과 참의가 상당수 궐석인 상태의 정부 조직 개편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반대편에서는 견제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새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중국 및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이 절실하였고, 조선과의 국교 수립이 난항을 겪자 1871년 청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15] 이후로도 조선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은 메이지 정부의 숙원 과제였다.
1873년(메이지 6년) 초, 대장성은 다른 관청들과 예산 배정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이 갈등이 해결되지 않자 정부는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조기 귀국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4월,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장성의 권한 강화를 시도했지만, 참의들은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고토 쇼지로 등 대장성 권한 강화에 반대하는 인물로 채워지고 각 성의 권한을 정원으로 이첩하여 대장성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대장성 수장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사임하였고, 오쿠마 시게노부가 유수 정부에 접근해 오는 한편, 육군에서 기도파를 대표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시적으로 실각하는 등 정부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수정부 내 인사들은 반대장성이라는 것 외에 달리 결집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병이 든 사이고가 요양을 하는 동안에도 참의들은 각자 독자적인 행동을 하였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5월 29일 귀국하였지만, 유수정부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국내 시찰을 핑계로 참의에 복귀하지 않고 이와쿠라 도모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정한론을 주장하며 자신이 특사로 조선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이를 계기로 찬반 양론이 정치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5월 31일 부산의 일본공관 대표 히로츠 히로노부는 조선 정부가 일본인의 밀무역을 감독하는 포고를 내면서 일본에 대해 무례한 어휘를 사용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참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파병과 사절 파견을 주장하였다. 사이고는 파병에 반대하며 자신이 사절로 가겠다고 주장하였다.
고토 쇼지로와 에토 신페이는 사이고의 주장에 찬성하였고,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는 사이고가 단독으로 파견될 경우 신변에 위험이 있을 것이라며 병사 대동을 주장하였으나, 사이고는 이를 거절하였다. 다만 결정은 청나라에 출장 중인 소에지마 다네오미가 돌아오면 하기로 합의하였다. 소에지마는 사이고의 주장에 찬성했지만, 사절은 자신이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월 23일 귀국한 기도 다카요시는 유수정부의 현황에 격노하고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정부 복귀를 보이콧하고 뒤에서 현 정부의 타도를 목표로 활동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정한론에 대해 기도는 "조선이 우리의 외교 문서를 받지 않는 무례한 고집은 병력을 동원하여 벌하여야" 하나 먼저 "힘을 기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7월 말, 사이고는 산조에게 자신의 안을 수용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고, 산조는 사이고가 파견될 경우 반드시 살해될 것으로 보고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편 사이고는 8월 17일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조선에 파견된 사절이 폭살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천하의 인심이 조선을 토벌하자는 것에 집중되어 유신정부에 대한 국내 사족과 농민의 반감을 밖으로 돌릴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이라고 밝히면서[16] 자신이 살해당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역사학자 모리 토시히코(毛利敏彦)는 정한파의 이러한 언동이 실제 죽음을 각오했다기보다는 산조를 설득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본다.[17] 사이고는 이 편지에서 사절 파견을 강변하는 이유로 "국내의 어지러운 상황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일으키려는 것"이라고 썼다. 당시 사이고는 대사질환으로 몹시 비만해져 메이지 천황이 어의였던 독일 의사 데오도르 호프만에게 진료를 지시할 정도였다. 외출을 하거나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이고 스스로는 불치의 병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훗날 육군대신에 오르게 되는 다카시마 토모노스케는 당시를 회상하며 조선과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사이고가 죽게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고, 조선과 전쟁을 하게 되면 종주국인 청나라와도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위험이 정한론 철회의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 정부는 미야코섬 조난 사건이나 사할린섬 점령 등에도 군대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여력이 없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치 거물인 사이고가 주장하는 조선 사절 파견은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사쓰마파 안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있었다.
8월 16일 사이고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을 기다릴 것 없이 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자고 다시 한 번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튿날인 8월 17일 태정관 각의는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산조는 내각의 결정을 메이지 천황에게 보고하며 천황으로부터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할 때까지 중대 결정은 연기할 것이라는 회답을 받았다.
이후의 전개는 '산조의 발병과 이와쿠라의 태정대신 권한대행 취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와쿠라 도모미는 9월 13일 귀국하여 내치 우선을 주장하며 사이고의 사절 파견에 반대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10월 12일 참의에 복귀하여 재정 문제를 이유로 정한론에 반대했다. 10월 14일 이와쿠라는 각의에서 사절 파견 연기를 주장했고, 15일 각의에서는 정한파가 사이고를 지지하며 즉시 파견을 요구했다. 산조는 사이고 파견 자체는 승인했지만, 군비 부족을 구실로 파견을 늦추려 했고, 이에 이와쿠라, 오쿠보, 기도 다카요시가 반발했다.
사진 | 이름 | 신분 | 출신 |
---|---|---|---|
![]() | 사이고 다카모리 | 참의, 육군대장 | 사쓰마번 |
![]() | 에토 신페이 | 참의, 사법경 | 사가번 |
![]() | 이타가키 다이스케 | 참의 | 도사번 |
![]() | 고토 쇼지로 | 참의, 좌원 의장 | 도사번 |
![]() | 소에지마 다네오미 | 참의, 외무경 | 사가번 |
사진 | 이름 | 신분 | 출신 |
---|---|---|---|
산조 사네토미 | 태정대신 | 교토 | |
![]() | 이와쿠라 도모미 | 우대신 | 교토 |
![]() | 기도 다카요시 | 참의 | 조슈번 |
![]() | 오쿠보 도시미치 | 참의, 대장경 | 사쓰마번 |
오쿠마 시게노부 | 참의 | 사가번 | |
![]() | 오키 다카토 | 참의, 문부경 | 사가번 |
3. 2. 1. 산조의 발병과 이와쿠라의 태정대신 권한대행 취임
1873년 8월 17일 태정관 각의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조선 파견이 결정되었으나, 산조 사네토미는 메이지 천황에게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할 때까지 중대 결정을 연기하겠다는 회답을 받았다.[17]9월 13일 귀국한 이와쿠라 도모미는 산조와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정부 복귀를 요청했다.[18] 이와쿠라는 귀국 직후 "오로지 국정을 가다듬고 민력을 두텁게 하여야 한다"고 답하여 내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고,[19] 사이고의 사절 파견에 대해서는 즉시 이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였다.[19]
조선 문제 논의는 기도와 오쿠보의 복귀 문제 해결이 우선이었기에, 이와쿠라는 귀국 후에도 사절 파견 논의를 진행하지 않았다.[20] 사이고는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자살을 암시하며 산조를 압박하였고,[21][22] 산조는 가쓰 가이슈의 군비 부족 의견을 들어 이와쿠라 등과 사절 파견 연기 방침에 합의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노력으로 오쿠보는 10월 12일 참의에 복귀했고, 기도도 각의에 복귀하였다. 오쿠보는 재정 상황이 어려운 상황에서 전쟁은 어렵기에 우선 국력을 충실히 해야 한다고 발언하여 사이고와 대결할 것을 결심하고 유서를 남겼다. 같은 날 정한파인 소에지마 다네오미도 참의에 복귀하였다.
10월 14일 이와쿠라는 각의에서 사절 연기를 주장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고토 쇼지로, 소에지마는 사절 파견 연기에 동의했지만, 사이고는 즉각 파견을 주장했다. 15일 각의에서 이타가키, 에토, 고토, 소에지마는 사이고를 지지하며 즉시 사절 파견을 요구했다. 각의 결정은 태정대신 산조와 우대신 이와쿠라에게 일임되었는데, 산조는 사이고 파견 자체는 승인하는 결정을 했다. 하지만 산조는 군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군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구실로 사이고 파견을 늦출 생각이었고, 이를 들은 이와쿠라, 오쿠보, 기도는 반발하였다.
사진 | 이름 | 신분 | 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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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다카모리 | 참의, 육군대장 | 사쓰마번 | |
에토 신페이 | 참의, 사법경 | 사가번 | |
이타가키 다이스케 | 참의 | 도사번 | |
고토 쇼지로 | 참의, 좌원 의장 | 도사번 | |
소에지마 다네오미 | 참의, 외무경 | 사가번 |
사진 | 이름 | 신분 | 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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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 사네토미 | 태정대신 | 교토 | |
이와쿠라 도모미 | 우대신 | 교토 | |
기도 다카요시 | 참의 | 조슈번 | |
오쿠보 도시미치 | 참의, 대장경 | 사쓰마번 | |
오쿠마 시게노부 | 참의 | 사가번 | |
오키 다카토 | 참의, 문부경 | 사가번 |
10월 16일 이와쿠라는 산조를 방문하여 결정 번복을 요청했지만, 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과의 전쟁이 예상되는 이상 다시 각의를 통해 결정하기로 합의하고 10월 17일 각의를 소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0월 17일 이와쿠라, 오쿠보, 기도가 사표를 제출하여 각의는 무산되었다. 산조는 오키 다카토에게 이와쿠라를 만나 10월 18일 각의에 출석하도록 설득하라고 했지만, 이와쿠라는 거절했다. 그날 밤 산조는 사이고를 불러 결정 번복을 암시했지만, 사이고는 반발하였다.
10월 18일 산조는 병이 났다. 가슴 통증을 호소한 것으로 보아 협심증이나 심근 경색, 또는 각기병과 같은 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조는 이와쿠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랏일을 잘못 운영하게 이르렀고" "(이 죄는) 죽음으로도 다 갚지 못할 것"이라며 사의를 밝혔다.
10월 19일 소에지마, 에토, 고토, 기도 4명은 시종장 도쿠다이지 사네쓰네를 통해 메이지 천황에게 이와쿠라를 태정대신 권한대행으로 임명하기를 요청하였다. 또한 정한론 반대파를 배려하여 다시 각의를 소집하였다. 소에지마 등이 이와쿠라를 태정대신 권한대행으로 요청한 것은 사절 파견 결정을 조속히 실행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쿠보는 각의 결정을 철회시킬 "비책"을 준비 중이었다. 구로다 기요타카를 통해 국내성 소보 요시이 도모자네를 압박하여 이와쿠라가 태정대신 권한대행에 임명되기 전에 산조 시기 각의 결정을 무효화하도록 한 것이다. 10월 20일 메이지 천황은 이와쿠라의 자택을 방문하여 태정대신 권한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역사학자 사사키 스크루는 천황이 직접 이와쿠라의 집을 방문한 것은 산조가 병으로 쓰러진 상황에서 사이고를 사절로 파견할 경우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몹시 걱정하였기 때문에 이와쿠라의 의중을 직접 듣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와쿠라는 천황의 개인적 의견을 듣게 된다.
10월 22일 사이고, 이타가키, 소에지마, 에토 등 4명의 참의가 이와쿠라의 자택을 방문하여 다음 날로 사절을 임명해 줄 것을 주장했지만, 이와쿠라는 이제 자신이 권한대행이므로 산조의 의견이 아닌 자신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겠다며 거절한다. 4명의 참의는 "지연술책"이라고 비난하고 집을 나왔다.
3. 3. 사이고의 사임
사이고는 1873년 정한론을 주장하며 자신이 직접 조선에 특사로 가겠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와쿠라, 오쿠보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10월 23일, 이와쿠라가 사절 파견 연기를 결정하고 사이고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사이고는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6],[17]사이고는 8월 17일 이타가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조선에 파견된 사절이 폭살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천하의 인심이 조선을 토벌하자는 것에 집중되어 유신정부에 대한 국내 사족과 농민의 반감을 밖으로 돌릴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이라고 밝히며[16] 자신이 살해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10월 24일, 이와쿠라는 사이고의 사표를 수리하였지만, 육군 대장 지위는 그대로 유지시켰고, 오쿠보와 기도의 사표는 반려하였다.[17] 같은 날 이타가키, 에토, 고토, 소에지마 역시 사표를 제출하였고, 25일에 수리되었다.[17] 이로써 정한파는 모두 각의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측근이었던 관료와 군인 역시 사직하였다. 특히 근위병이 대거 이탈하여 사실상 해체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사직한 사이고파 장교는 100여 명에 이르렀고, 도사 번 출신의 장교 40여 명도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에지마 미츠는 이날의 일을 "5년 전 사이고가 도쿄를 떠난 날, 오쿠보는 남아서 곤욕을 치렀다. 오쿠보에게 따로 이야기된 것은 없는지 물으니 그런 것은 없지만 딱히 싸울 것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어찌 되어도 좋다'라고 하였다"고 회상하였다.[18]
4. 정변의 영향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일본의 정치는 태정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수장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1871년 주요 대신들이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사이고는 태정관 조직을 개편하고, 궐석인 자리에 인사를 임명하여 유수정부를 이끌며 실권을 장악했다.[14]
메이지 정부는 청일수호조약을 체결하는 등[15] 외교 관계 수립에 힘썼지만, 조선과의 국교 수립은 난항을 겪었다. 1873년 대장성과 다른 관청들 간의 예산 갈등이 심화되자,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조기 귀국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대장성의 권한 강화를 시도했지만,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고토 쇼지로 등 반대 세력에 의해 좌절되었고, 대장성 수장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사임했다. 오쿠마 시게노부가 유수 정부에 접근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일시 실각하는 등 기도파를 중심으로 정부 혼란이 일어났다.[14]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장하며 특사 파견을 제안하자,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와쿠라와 오쿠보의 방해로 사이고 등 정한파는 참의에서 발언권을 잃었고, 사이고는 사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와쿠라는 사절 파견 연기를 결정하고 사이고의 사표를 수리했지만, 육군대장 지위는 유지했다. 이타가키, 에조, 고토, 소에지마 역시 사직하여 정한파는 각의를 떠났고, 이들의 측근 관료와 군인도 대거 사직했다. 특히 근위병이 대거 이탈하여 사실상 해체 수준에 이르렀다.[18]
메이지 시기 관료였던 마에지마 히소카는 이날의 일을 회상하며, 오쿠보가 내전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쓰마에서는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정변으로 정부 결정에 대한 최종 권한이 천황에게 있다는 점이 공식화되었다.[22] 조선에 대한 사절 파견, 정부 각료의 사임 및 취임 등 모든 사안에서 천황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이는 천황을 개인적으로 장악한 자가 정책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1. 오쿠보 정부의 구성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참의(参議) 과반수가 사직하자, 오쿠보 도시미치는 정부 재편을 추진했다. 1873년 10월 24일, 오쿠보는 각 성의 경(卿)이 참의를 겸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음 날인 10월 25일 외무경 데라시마 무네노리, 공부경 이토 히로부미, 해군경 가쓰 가이슈가 참의가 되었다. 오키 다카토는 사법경을 겸임하게 되었다.[14] 이는 오쿠보의 건의를 이와쿠라 도모미가 수용하여 성사된 것이다.[14]기도 다카요시는 이와쿠라 도모미의 재무경 겸임 요청을 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14] 산조 사네토미는 요양 후 복귀를 요구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12월 25일 제출한 사표가 반려되어 태정대신으로 복귀하였다.[14]
오쿠보는 《입헌정체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여 정부 구상을 밝혔다. 또한 강력한 권한을 가진 내무성을 설치하고 스스로 내무경에 취임하여 정부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한편, 기도 다카요시는 병세가 악화되어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이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정계의 차세대 주자로 떠올랐다.[14]
기도 다카요시가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까웠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참의 취임에 난색을 표하자, 오쿠보 도시미치가 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참의로 임명하였다. 군대의 혼란을 진정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점차 기도 다카요시의 영향에서 벗어나 오쿠보 도시미치와 가까워졌고, 이로써 오쿠보가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전제적인 정치를 확립하게 되었다.[14]
1874년 타이완 출병에 반대한 기도 다카요시는 정부를 떠났다. 1875년 오사카 회의에서 기도 다카요시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참의 복귀가 합의되었으나 곧 결렬되었고, 1878년 기오이자카의 변까지 오쿠보 주도의 정치가 계속되었다.
오쿠보와 사이고의 결별은 번벌의 분열을 가져왔다. 정변에서 패배한 사이고 다카모리와 에토 신페이는 후에 사족 반란을 일으켰고,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일시 복귀했지만 자유민권운동을 기반으로 정부에 맞섰다.
4. 2. 구월협정
1873년 일본은 타이완 침략을 벌였고,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여 정세가 변화하였다. 이에 일본은 외교를 통한 국교 회복을 추진,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조선에 파견하여 협상을 진행하였다. 1874년 9월, 양측은 실무 차원에서 국교 회복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고, 추후 공식적인 국교 회복 협상을 진행한다는 기본 방침에 합의했는데, 이를 "구월협정"이라 한다. 이 협정은 동래부 훈도 현석윤이 모리야마와 협상하였고[19], 조선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협정 내용은 일본이 스스로를 황제로 표현해도 조선이 문제 삼지 않고, 조선 국왕 칭호는 상황에 맞게 정리한다는 것이었다.[20]그러나 일본 내 사가의 난 발생으로 협상 문제는 뒤로 밀렸고, 그 사이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시도와 고종 간의 권력 다툼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1875년 2월, 모리야마는 일본 국서를 지니고 부산에 도착했으나, 국서가 일본어로 작성된 점이 문제가 되어 조선은 국서 접수를 거부하였고, 결국 구월협정은 파기되었다.[20]
일본 내에서는 입헌제 개헌 논의 등으로 정한론 주장이 즉각 힘을 얻지 못했으나, 외교 교섭을 통한 국교 수립이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21]
4. 3.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메이지 유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를 수장으로 하는 태정관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에 난항을 겪자 1871년 청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15] 이후에도 조선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은 메이지 정부의 숙원 과제였다.사이고 다카모리가 조선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자신이 특사로 조선을 방문하겠다는 정한론을 주장하며 정국의 주요 쟁점이 되었으나, 이와쿠라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들은 사절 파견 연기를 결정하고 사이고의 사표를 수리하였지만, 육군 대장 지위는 유지시켰다.[18] 이 과정에서 이타가키, 에조, 고토, 소에지마 등이 사직하여 정한파는 각의를 떠나게 되었다.
정변 이후에도 조선과의 국교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였다. 이지치 마사하루와 같이 정부에 잔류한 정한파도 있었고, 천황의 칙서는 사절 파견을 연기한다고 하였을 뿐 명시적으로 중지한다고 언급하지 않았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사할린섬과 쿠릴 열도에 대한 러시아와의 국경 협상이 마무리되자 정부 내 정한파는 다시 조선으로 사절을 파견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1874년 9월 모리야마 시게루를 통해 조선과 다시 협상이 진행되어 실무 차원에서 국교 회복을 위한 "구월협정"이 맺어졌다.[19] 그러나 사가의 난 등으로 협상이 지연되는 사이,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시도와 고종 사이의 암투로 어지러운 정국을 보내고 있었다. 1875년 2월 모리야마는 일본의 국서를 지니고 부산에 당도했지만, 국서가 일본어로 작성된 점이 문제가 되어 조선은 국서 접수를 거부했고, 구월협정은 파탄났다.[20]
일본 내에서는 입헌제 개헌 등의 논쟁으로 정한파의 주장이 즉각적인 힘을 얻지 못했지만, 외교 교섭으로 국교 수립이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21]
4. 4. 천황과 정부의 관계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일본의 정치는 태정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1871년 주요 대신들이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유수정부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대장성을 중심으로 한 정부 내 갈등과 정한론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귀국 후 정한파가 대거 사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14]이 정변의 결과, 정부 결정에 대한 최종 권한은 천황에게 있다는 점이 공식화되었다.[22] 조선에 대한 사절 파견, 정부 각료의 사임 및 취임 등 모든 사안에서 천황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이는 천황에게 아부하는 자가 천황의 이름을 빌려 실정에 맞지 않는 법령을 내놓아도 그대로 시행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천황을 개인적으로 장악한 자가 정책을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이난 전쟁 이후 궁중 보수파가 천황과의 인적 관계를 독점하면서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등은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하면서 천황 신격화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법제상 천황에게만 책임이 주어지는 군부를 민간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훗날 일본이 군국주의로 빠져드는 원인이 되었다.[22]
5. 연구사
메이지 6년 정변의 원인에 대한 기존의 견해는 유수정부 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대표로 하는 정한파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대표로 하는 내치 우선파 사이의 갈등을 중요한 동기로 보는 것이었다.[1]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모리 도시히코(毛利敏彦)는 정한론에 대한 입장은 명분일 뿐, 실상은 조슈파와 오쿠보파가 연합하여 에토 신페이 등을 축출하고자 한 것이 주요 목적이라는 해석을 내놓아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1][2] 강범석(히로시마 시립대학교)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자살 욕망이 있었다고는 하나, 삿초 세력(사쓰마번, 조슈번)과 사토번(사가번)의 대립이 주요 원인이었다고 본다.[2] 다무라 사다오(田村貞雄)는 모리의 정쟁설에 반대하여 사이고 다카모리가 내세운 정한론의 본질은 조선과의 관계 문제라고 생각한다.[2] 이에치카 요시키(家近良樹)는 다카하시 히데나오(高橋秀直)와 가츠다 마사하루(勝田政治)의 연구를 통해 정변의 기본 과정에 관한 사실은 거의 해명되었다고 하며, 일본 사학계에서 모리의 주장은 소수 의견이라고 말한다.[3]
참조
[1]
문서
明治六年の政変
[2]
저널
「征韓論」再考
http://id.nii.ac.jp/[...]
[3]
문서
明治6年の征韓論争
[4]
문서
岩倉は使節団派遣決定時に右大臣に就任している。
[5]
문서
木戸は明治6年政変時の閣議には出席してい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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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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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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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과 일본의 조선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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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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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海大学文学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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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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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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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守政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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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6) - 日 요청으로 체결된 청일수호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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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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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明治6年の征韓論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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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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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운양호 사건 직전 1874년. 조선과 일본 ‘동상이몽’
http://www.1gan.co.k[...]
일간경기
2018-09-04
[20]
저널
1875년 朝日交涉의 실패 요인
https://www.dbpia.co[...]
공군사관학교
2013-08
[21]
백과사전
강화도 조약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2]
저널
예외적 예외로서의 천황 ―근대일본의 헌법과 주권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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