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세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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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혈세잇키는 1873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로, 징병령, 지조개정, 학제, 해방령 등 메이지 정부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징병령에 사용된 '혈세'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와 과중한 세금, 흉작, 신분 차별 등이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주요 봉기로는 미사카 소요, 아이미군 봉기, 세이산 죽창 소동 등이 있으며, 봉기 세력은 정부 청사, 학교, 피차별 부락 등을 공격했다. 메이지 정부는 이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체포된 6만 명 중 15명만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혈세'는 프랑스어 "impôt du sang"을 번역한 것으로, 농민들은 이를 "피를 뽑힌다"는 의미로 오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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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세잇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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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기본 정보 | |
발생 시기 | 1873년 3월 ~ 1873년 6월 |
발생 장소 | 일본 전역의 여러 지역 |
원인 | |
주요 원인 | 징병 제도 시행 의무적인 아동 공립학교 제도 도입 정부가 강제로 사람들의 피를 뽑아갈 것이라는 소문 부라쿠민 해방에 대한 대중의 분노 |
목표 | |
목표 | 불명 |
방법 | |
방법 | 정부 재산 및 인력에 대한 공격 이전 피차별 계층에 대한 사적 제재 |
결과 | |
결과 | 정부 진압 |
교전 세력 | |
반란군 | 소작농 지방 사무라이 |
정부군 | 메이지 과두 정부 지방 정부 관리 경찰관 사무라이 용병 |
피해 규모 | |
사망자 | 오카야마현에서만 비폭도 24명 살해, 경찰과 용병에 의해 진압된 폭도 수백명 사망 |
체포 | 60,000명 이상 |
처형 | 15명 |
2. 배경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후, 일본은 급격한 근대화를 추진했다. 메이지 신정부는 중앙집권적 국가 건설을 목표로 1871년 부라쿠민 해방령, 1872년 학제 공포에 따른 의무 교육 시행, 1873년 징병령 제정 등 일련의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전통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하며 여러 계층의 불만을 샀다.
- 징병령: 농촌의 핵심 노동력인 젊은 남성들을 군대로 보내 농업 생산에 차질을 빚게 했고, 부유층의 병역 면제 조항은 가난한 농민들의 반발을 키웠다. '혈세(血税)'라는 명칭은 불길한 소문을 확산시켜 민심을 악화시켰다.
- 학제: 의무 교육은 농사일에 필요한 아동 노동력을 빼앗고, 학교 관련 비용 부담을 농민에게 지웠다.
- 해방령: 부라쿠민 해방은 기존 신분 질서에 대한 혼란과 함께, 생업에서의 경쟁 심화에 대한 농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 지조개정: 새로운 세금 제도는 흉작과 겹쳐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사무라이 계층 역시 징병령으로 군 복무 독점권을 잃고 생활 기반이 흔들리자 불만을 가졌으며, 일부는 농민들과 연대하기도 했다.
메이지 정부는 국민과의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였고, 이에 분노한 농민과 하급 사무라이들은 폭력 시위 외에는 불만을 표출할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여 1873년 3월부터 서일본을 중심으로 징병령 반대 등을 내건 격렬한 농민 봉기, 즉 혈세잇키가 연이어 발생하게 되었다.[1]
2. 1. 징병령
1873년 1월, 메이지 신정부는 징병령을 제정하여 사무라이와 비사무라이를 포함한 모든 남성 시민에게 20세가 되면 3년간의 의무 군 복무를 부과하고, 이후에는 국가 예비군으로 복무하도록 했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근대화 과정의 일환으로, 기존의 신분 제도를 해체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그러나 징병제 실시는 여러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농촌에서는 육체 노동력이 가장 왕성한 젊은 남성들을 군대로 보내야 했기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가난한 농민 가정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더욱이 징병령에는 부유한 시민들이 일정 금액을 내면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어, 병역의 부담이 가난한 계층에게 집중되는 불평등을 낳았다. 이는 농민들의 불만을 더욱 키우는 요인이 되었다.
징병령 자체의 용어도 문제를 일으켰다. 징병령의 내용은 서구, 특히 프랑스의 제도를 참고했는데, 이때 의무 군 복무를 뜻하는 프랑스어 'impôt du sang'를 직역하여 '혈세(血税)'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문자 그대로 '피의 세금'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농민들 사이에서 "정부가 백성의 피를 뽑아 외국인에게 팔아 약을 만든다"는 헛소문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정부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조장하며 민심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한편, 사무라이 계층 역시 징병령에 불만을 가졌다. 평민도 군 복무를 할 수 있게 되면서 군 복무에 대한 사무라이의 전통적인 독점적 지위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일부 시골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생활 방식이 위협받는다고 느껴, 징병령에 반대하며 농민들과 연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메이지 정부는 국민과의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분노한 농민들과 하급 사무라이들은 폭력 시위 외에는 불만을 표출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혈세잇키는 1873년 3월 와타라이현 무로군에서 시작되어, 1874년 12월 고치현 하타군에서의 봉기까지 16건 (혹은 19건[1], 14건이라고도 함) 서일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특히 서일본에서 봉기가 집중된 이유는 다른 지역에 비해 징병 면제자의 비율이 낮아 징병제의 부담이 더 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는 징병제가 혈세잇키 발발의 중요한 배경이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미마사카 소요[2], 돗토리현 아이미군 봉기, 세이산 죽창 소동 등 주요 봉기에서 농민들은 "징병령 반대"를 핵심 요구 사항으로 내걸었다.
2. 2. 지조개정
메이지 정부는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위해 토지 소유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지조개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조개정에 따른 과중한 세금 부과와 흉작 등이 겹치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커져 봉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봉기 당시 농민들이 내건 요구 중 제1조가 "5개년 동안 공미(貢米) 차감의 일"이었는데, 이는 지조개정으로 인한 세금 부담이 당시 농민들에게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2. 3. 학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1872년 학제가 공포되어 의무 교육이 시작되었다.[2] 이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교육 시스템을 대체하고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였다.그러나 새로운 초등학교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은 지역 주민, 특히 농민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3] 세이산 죽창 소동 당시 기록에 따르면, 마루가메나 타도츠 지역에서는 가장 가난한 계층이라도 1년에 25전의 학교 경비를 부담해야 했는데, 이는 당시 농민들에게 상당한 경제적 압박이었다.
또한, 의무 교육 제도는 농촌 사회의 현실과 맞지 않는 측면이 있었다. 농번기인 파종기와 수확기에 자녀들의 노동력은 농가에 필수적이었으나, 의무 교육으로 인해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만 했다. 이는 가뜩이나 어려운 농민들의 생계를 더욱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며 큰 불만을 샀다.
이러한 학제에 대한 불만은 혈세잇키 과정에서 격렬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 1873년 오카야마현에서 발생한 미사카 소요에서는 봉기 세력이 "학교 입비 반대"를 주요 요구 사항 중 하나로 내걸었으며, 초등학교 건물을 파괴 대상으로 삼았다.[1][2]
- 같은 해 돗토리현 아이미군에서 일어난 봉기(아이미군 일규)에서도 "소학교 폐지"를 요구하며 학교 시설을 공격했다. 양복을 입은 소학교 교원이 "피를 뽑는 사람"으로 오인되어 습격당하는 사건이 봉기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 가가와현 일대에서 발생한 세이산 죽창 소동에서는 "학제 반대"가 명확히 요구되었으며, 봉기 과정에서 파괴된 건물 599곳 중 48곳이 초등학교일 정도로 학교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
잇키 진압 후, 메이지 정부는 "신속하게 학교를 일으켜야 한다는 통달"이라는 통지를 내려 파괴된 초등학교의 복구를 서둘렀다. 이는 학제 시행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교육을 통한 국민 통제와 근대화 정책을 지속하려는 목적을 드러낸 것이었다.
2. 4. 해방령
1871년 메이지 정부는 에도 시대의 신분 제도를 철폐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부라쿠민 해방령을 공포했다. 이는 법적으로 부라쿠민과 같은 피차별 신분을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그러나 수 세기 동안 비인(非人) 등으로 불리며 격리되었던 피차별자들이 해방령을 통해 '신평민'(新平民)이라는 지위를 얻고 다른 계층과 동등하게 교류할 수 있게 되자, 기존 신분 질서에 익숙했던 농민층을 중심으로 큰 혼란과 반발이 일어났다. 이는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사회적 차별 의식과 더불어, 피차별자들이 해방됨으로써 농업이나 기타 생업 분야에서 경쟁이 심화되고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2]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불만은 1873년 미사카 소요와 같은 농민 봉기에서 "에타히닌의 칭호 폐지 반대"라는 구체적인 요구 사항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2. 5. 기타
징병령 자체는 서구 모델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징병령의 텍스트는 의무 군 복무에 대한 프랑스어 용어인 impôt du sang|임포 뒤 상fra을 직접 번역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피세"를 의미했다. 이 부적절한 구절의 사용을 악용하여, 정부 관리들이 농민으로부터 실제로 피를 뽑아 외국인에게 판매하여 약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시골에 퍼져 대중의 분노에 더욱 불을 지폈다.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고, 메이지 유신 정부는 일반 대중과의 어떠한 상의도 없이 모든 결정을 내렸다. 이 때문에 분노한 농민들과 하급 시골 사무라이들은 폭력 시위 외에는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꼈다.
당시 농민들이 새 정부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지조개정에 따른 과중한 세금, 흉작 등으로 인한 울분이 있었고, 거기에 징병령으로 귀중한 일꾼인 차남, 삼남들을 빼앗겼다. 이러한 요인들이 농민들로 하여금 봉기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미작 봉기에서 필보 등이 쓴 탄원서, 10개 조 요구의 제1조가 "5개년 동안 공미(貢米) 차감의 일"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혈세 봉기에는 1871년에 시행된 차별을 받던 부라쿠민의 해방령에 대한 반대도 포함되었다. 이는 차별받던 사람들이 해방됨으로써 농업, 기타 생업이 에타(穢多)·히닌(非人)과 공유화되어 압박받는다는 공포감도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주요 봉기
혈세잇키는 1873년 3월 당시 미에현에 속했던 와타라이현무로군에서 처음 시작되어, 1874년 12월 고치현하타군에서의 봉기까지 약 1년 9개월 동안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서일본을 중심으로 최소 10개 현 이상에서 14건에서 19건[1]에 달하는 봉기가 발생했다. 서일본 지역에서 봉기가 집중된 것은 징병 면제자의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낮았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봉기가 발생한 주요 현은 다음과 같다.
현 | 비고 |
---|---|
교토 | |
오카야마 | 당시 호조현. 미사카 소요 발생. |
후쿠이 | |
미에 | 당시 와타라이현. 최초 봉기 발생지. |
돗토리 | 아이미군 봉기 발생. |
히로시마 | |
시마네 | |
가가와 | 당시 메이토현. 세이산 죽창 소동 발생. |
에히메 | |
고치 | 마지막 봉기 발생지. |
봉기 참가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추진된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징병제, 새로운 학제 도입, 단발령과 같은 전통적 생활 방식의 변화, 태양력 도입, 신분제 폐지(특히 부라쿠민 해방) 등에 반발했다. 봉기 과정에서 농민들은 대나무 창, 총, 칼 등으로 무장하고 지방 관청 건물과 관리들의 집, 새로 설립된 초등학교, 경찰서, 정부 정책에 협조했던 불교 사찰, 그리고 해방된 부라쿠민 거주지 등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아 파괴와 방화를 일삼았다.
폭력적인 시위 외에도 농민들은 지방 당국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요구 사항을 전달하기도 했다. 주요 요구 사항으로는 징병령 폐지, 공립학교 폐지, 전통적인 상투 머리 스타일 금지 철회, 태음력 복귀 등이 있었다.
이러한 봉기들 중 호조현 (미마사카)의 미사카 소요, 돗토리현 (호키) 아이미군의 아이미군 봉기, 메이토현 (사누키)의 세이산 죽창 소동 등은 특히 규모가 크고 격렬했다.
3. 1. 미사카 소요 (오카야마 현)
'미사카 소요'[2] 또는 '미사카 소요 사건'[3]이라고도 불린다. 1873년 5월 26일부터 6월 1일까지[1] 당시 호조현(현재의 오카야마현 북동부)[1]에서 발생한 농민 봉기이다. 혈세잇키 중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봉기는 호조현 니시사이조군 오노 촌(현 쓰야마시)에서 "원괴"로 불리던 붓포 우타로를 중심으로 시작되어[2] 도마다군, 구메군, 아이다군, 가쓰타군, 마니와군 등 현내 넓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참가 농민은 3만 명[1] 이상에 달했다.
농민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롭게 도입된 정책들에 강한 불만을 품고 봉기했다. 이들은 "징병령 반대, 학교 설립 및 비용 부담 반대, 에타·히닌 등 신분제 폐지 반대" 등을 주요 구호로 내걸었다.[2] 주동자 붓포 우타로는 체포 후 고문 과정에서 징병, 지권 발행, 학교 설립, 참발, 부라쿠민 해방령 등 신정부 정책 전반의 철폐가 목적이었다고 진술했다.[2]
봉기군은 대나무 창, 총, 칼 등으로 무장하고 현 내 각지를 휩쓸며 파괴와 방화를 일삼았다. 주요 공격 대상은 지방 관청 건물과 관리들의 저택, 구 호장·부호장 등 기존 유지들의 집, 새로 설립된 초등학교, 그리고 신분 해방령으로 해방된 피차별 부락(부라쿠민) 등이었다.[2] 쓰야마에서는 5월 27일 봉기군이 도달했고, 5월 30일에는 쓰야마성 아래까지 진격하여 돌입을 시도했으나 현 관리 측의 저항으로 실패했다.[2]
이 봉기로 인해 총 432채의 건물이 피해를 입었으며[2], 여기에는 공립 초등학교 46개, 불교 사찰 2개, 지방 관리 거주지 52채, 그리고 부라쿠민 소유 가옥 300채 이상이 포함되었다. 인명 피해도 상당하여, 특히 피차별 부락민들에 대한 공격이 집중되어 쇼쿠군 등 피차별 부락에서 주민 29명이 살상되는 사태가 벌어졌다.[2]
봉기는 6월 1일, 오사카 진대에서 파견된 정부군 병력이 호조현에 도착하면서 진압되었다.[2] 사건 이후 대규모 검거와 처벌이 이루어져, 총 26,907명(다른 기록에는 2,700여 명이라고도 함)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중 64명은 징역형에 처해졌고, 주동자 붓포 우타로를 포함한 15명은 사형(참수)을 선고받았다.[2]
3. 2. 아이미군 봉기 (돗토리 현)
돗토리현 아이미군会見郡|아이미군일본어에서는 1873년 6월 19일부터 6월 26일(또는 6월 23일)까지 봉기가 발생했다. 이 봉기는 "죽창 소동" 또는 "아이미군 징병 반대 일규(잇키)"라고도 불린다. 봉기 세력은 징병령 반대, 태양력 및 소학교 폐지 등을 요구하며 격렬한 파괴 활동을 벌였다.봉기의 발단은 6월 19일, 아이미군 야가와촌(谷川村)에서 양복을 입은 소학교 교원과 후루이치촌(古市村)에서 순찰 중이던 나졸이 당시 퍼져 있던 "피를 뽑는 사람"이라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 오해를 받아 습격당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봉기는 20일 아이미군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지의 호장(戸長, 지방 관리) 집과 새로 설립된 소학교 등을 파괴했다.
6월 21일, 봉기 세력은 히노강(日野川) 강변에 모여 요나고정(米子町)에 위치한 현 요나고 지청에 요구 사항을 담은 탄원서를 제출한 뒤 일단 해산했다. 요나고 지청은 오사카 진대(鎮台, 군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봉기가 진정된 후, 현 당국은 대대적인 검거와 처벌에 나섰다. 이 사건으로 총 11,907명이 처분을 받았으며, 그중 한 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부과된 벌금 총액은 2.48만엔에 달했다.
3. 3. 세이산 죽창 소동 (가가와 현)
'''세이산 죽창 소동'''(세이산 농민 소동)은 1873년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당시 메이토현(현 가가와현)의 도요다군, 미노군, 타도군, 나카군, 아노군, 우타리군, 가가와군 7개 군에 걸쳐 일어난 농민 봉기이다. 봉기에는 약 2만 명의 농민이 참여했다.봉기의 발단은 미노군 시모타카노 마을에서 저녁 무렵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여자가 두 아이를 안고 죽창을 든 채 뛰어갔다'는 사건과 함께, "아이 뺏는 할멈"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당시 "징병 검사는 무서운 것이다. 젊은 아이를 빼앗아 생피를 뽑아간다"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것도 봉기 확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호장이 이 소문을 조사하려 하자, 이에 불복한 자들이 호장을 폭행했고, 이를 계기로 군중이 흥분하여 점차 수가 늘어났다.
봉기는 6월 26일 도요다군 하기와라 마을(현 간온지시 오노하라초하기와라)로 향하며 시작되었고, 다음 날인 27일에는 미노, 도요다, 타도 3개 군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더욱 동쪽으로 퍼져나갔다. 농민들은 대나무 막대기 등으로 무장하고 북을 치며 행진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새로운 정책, 특히 징병령과 학제 실시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농민들은 "징병령 반대, 학제 반대"를 외쳤으며, 육식 허용 이후 소 값이 폭등하여 농업 경영이 어려워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학제 시행으로 마루가메, 타도츠 지역에서는 주민들에게 연간 최소 25전의 학교 경비가 부과되어 경제적 부담이 컸다고 한다.
봉기 과정에서 농민들은 지방 관청, 초등학교, 호장(지방 관리) 자택, 경찰 초소(라졸 출장소), 불교 사찰 등 신정부 정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건물들을 공격하고 파괴했다. 약 130개 마을이 방화 피해를 입었으며, 파괴된 건물은 총 599곳에 달했다. 이 중에는 지방 관청 34곳, 불교 사찰 5곳, 지방 관리(호장) 자택 300곳, 경찰서 및 초소 7곳, 초등학교 48곳이 포함되었다. 특히 초등학교에 대한 파괴가 심했는데, 이는 학제에 대한 반감이 컸음을 보여준다.
6월 28일, 메이토현 다카마쓰 지청은 다카마쓰 주둔 병력(다카마쓰 영소)을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다. 관군은 6월 29일 경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여 7월 6일까지 봉기를 거의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 측 사망자 50명, 관군 측 사망자 2명이 발생했다.
봉기 진압 후, 약 282명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7명이 사형, 50명(또는 51명)이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총 16,839명(다른 기록에는 16,606명 또는 16,654명)이 처벌을 받았다. 메이토현 당국은 봉기 진압 후 "신속하게 학교를 일으켜야 한다"는 통지를 내려 파괴된 초등학교의 복구를 서둘렀다.
4. 진압
메이지 정부는 시위대의 어떠한 요구에도 굴하지 않고 혈세잇키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정부는 시위대에 무자비하게 '사살' 방식을 취했다. 지역 경찰력만으로는 폭력 사태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정부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사무라이 용병들을 고용했다. 총 6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오카야마현에서만 2만 9천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주동자로 확인된 시위자 15명만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으며, 수천 명의 다른 시위자들은 경미한 형을 받거나 기소 없이 석방되었다.
5. "혈세"의 의미
'혈세'(血税)는 프랑스어 impôt du sang|임포 뒤 상fra(impôt=세금, sang=피)을 직역한 용어이다. 1872년 11월 공포된 '''징병 고유'''(徴兵告諭)에서 국민이 국가를 위해 병역 의무를 다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당시 농민들은 이 말을 글자 그대로 "피를 뽑아간다"는 의미로 오해했고, 이것이 혈세잇키 봉기 확산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4]
5. 1. 당시의 오해를 보여주는 기록
'혈세'는 프랑스어 impôt du sang|임포 뒤 상fra(impôt=세금, sang=피)을 그대로 번역한 단어이다. 1872년 11월에 발표된 '''징병 고유'''(徴兵告諭)의 한 구절에 이 '혈세'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당시 농민들이 글자 그대로 "피를 뽑힌다"고 오해하여 봉기가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징병 고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무릇 천지 간에 한 가지 일, 한 물건으로서 세금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로써 국용에 충당한다. 그러하면 곧 사람 된 자는 진실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국가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 사람들이 이를 칭하여 혈세라고 이르니, 그 생혈로서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이 설에 따르면, 당시 농민들은 서양인들이 사람의 생피를 탐내어 정부를 통해 얻으려 한다고 오해했다.[4] 실제로 당시 퍼져 있던 오해와 사회적 혼란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873년 7월 2일, 요코하마의 언론인 기시다 은차(岸田吟香)가 용무차 비젠 국 고지마 군 다노우라(田ノ浦)를 배로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가 상륙하자 많은 사람이 모여 소란을 피웠는데, 산기슭 작은 신사에 깃발을 세우고 흑인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몽둥이나 죽창을 든 사람도 있었으며, 기시다를 죽이려 했다. 그는 황급히 용무를 볼 곳으로 도망쳐 숨었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데리고 산이나 배 안으로 숨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기시다가 사정을 들어보니, 그해 봄부터 "천황이 당인(외국인)에게 속아 일본인의 씨를 말리려 한다. 남자는 18세에서 20세까지 피를 뽑아 약하게 만들고, 여자는 15세 이상을 외국으로 보내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돌고 있었다. 심지어 오쿠 군에서는 이미 상당수 사람이 피를 뽑혔다는 소문과 함께 피를 뽑는 방법과 모습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퍼지고 있었다. 또한 "삿슈(미사카)에서는 밤중에 관리들이 외국인을 데려와 집집마다 명부를 확인하고 이름을 바꾸며, 딸이 있으면 데려간다"는 등의 이야기도 돌았다.
학교에 대한 유언비어도 있었다. "학교에 아이들을 모아 표식 깃발을 세우면, 그것을 본 외국인이 와서 아이들을 한꺼번에 목 졸라 죽이고 산 채로 피를 뽑아간다"는 소문 때문에 열흘 전부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사에 대한 오해도 퍼져 있었다. "외국인은 씨족 신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아이를 데려갈 수 없으므로, 외국인의 앞잡이가 된 현청 관리가 신체(神體)를 가지러 온다. 어떤 마을에서는 이미 신사가 파괴되었고, 이 마을의 신사도 파괴하러 올 것이다"라는 소문이었다. 이 때문에 다노우라, 오바타 등의 마을에서는 열흘 넘게 어업과 농업을 멈추고 주민들이 죽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다노우라 명신(明神)에 모여 술을 마시며, 현의 관리나 외국인이 나타나면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시다가 상륙한 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당시 변두리 지역의 주민들이 정부에 대해 품고 있던 불신감과, 한자어가 많아 이해하기 어려웠던 정부의 포고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 때문에 쉽게 퍼져나갔다.
6. 평가 및 영향
당시 농민들이 제기한 요구 내용을 보면, 새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컸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조개정에 따른 과중한 세금 부담과 흉작으로 인한 생활고가 겹친 상황에서, 징병령 시행으로 농가의 귀중한 노동력인 차남, 삼남을 군대로 보내야 하는 현실은 농민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농민 봉기로 이어졌다. 미작 봉기 당시 제출된 탄원서의 10개 요구 조항 중 첫 번째가 "향후 5년간 공미(貢米, 정부에 바치는 쌀)를 감면해 줄 것"이었던 점에서도 당시 농민들이 처한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혈세 봉기에는 1871년(메이지 4년)에 단행된 부락민 해방령에 대한 반대 움직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에타(穢多)·히닌(非人) 등으로 불리며 차별받던 부락민들이 해방될 경우, 농업을 비롯한 여러 생업 분야에서 기존 농민들과의 경쟁이 심화되어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농민들의 불안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참조
[1]
간행물
血税一揆
Kotobank
2021-07-18
[2]
웹사이트
連載●シリーズ「抗う人」⑩ 被差別部落民18人殺害、美作騒擾140年の沈黙に抗う~頭士 倫典
http://gendainoriron[...]
2021-07-18
[3]
웹사이트
研修 (1)(67)
https://iss.ndl.go.j[...]
2021-07-18
[4]
문서
日本では長い間仏教などの影響から動物の乳である牛乳を忌避し、受容されたのは明治の頃であった。例としてはフィリップ・フランツ・フォン・シーボルト|シーボルト「日本人は牛肉は食用に供せず、その乳は白き血と称して忌み嫌い」イエズス会士{{仮リンク|ジャン・クラッセ|fr|Jean Crasset}}「日本人は牛乳を飲むことは生血を吸うようだといって用いない」
http://milk.asm.n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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