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리장드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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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멜리장드 (예루살렘)은 프랑크족 십자군과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예루살렘 왕국의 여왕이다. 1110년경 에데사에서 태어난 멜리장드는 아버지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선출되면서 왕위 계승자로 부상했다. 1129년 풀크 5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공동 통치했으며, 풀크 사망 후에는 단독으로 통치했다. 멜리장드는 제2차 십자군 기간 동안 에데사 함락과 다마스쿠스 공격 실패 등 어려움을 겪었고, 아들 보두앵 3세와의 갈등 끝에 권력을 분할했다. 1161년 뇌졸중으로 기억력을 잃고 사망했으며, 윌리엄 오브 타이어는 멜리장드를 현명하고 훌륭한 여왕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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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장드 (예루살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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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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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예루살렘 여왕 |
통치 기간 | 1131년–1152년 |
대관식 | 1131년 9월 14일 |
공동 통치자 | 풀크 (1131년–1143년) 보두앵 3세 (1143년–1152년) |
이전 통치자 | 보두앵 2세 |
다음 통치자 | 보두앵 3세 |
배우자 | 앙주 백작 풀크 5세 |
왕가 | 레텔 가 |
부친 | 보두앵 2세 |
모친 | 멜리테네의 모르피아 |
자녀 | 보두앵 3세 아모리 1세 |
출생 추정 년도 | 1110년경 |
사망일 | 1161년 9월 11일 |
매장지 | 여호사밧 골짜기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2. 유년 시절과 상속녀
멜리장드는 에데사 백국을 물려받은 부르크의 보두앵과 아르메니아 영주 가브리엘의 딸 멜리테네의 모르피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보두앵은 지역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모르피아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멜리장드는 아버지가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의 후계자로 선출된 13살 때까지 에데사에서 성장하였다. 보두앵 2세는 아들을 낳지 못해 모르피아와 이혼하고 젊은 새 아내를 맞이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
보두앵 2세의 장녀인 멜리장드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였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프랑스의 루이 6세는 앙주 백작 풀크 5세를 추천했다. 풀크의 아들 조프루아는 헨리 1세의 딸 마틸다 (잉글랜드)와 결혼했고, 그 아들은 훗날 헨리 2세가 되었다. 1130년 멜리장드는 풀크와의 사이에서 아들 보두앵 3세를 낳았고, 보두앵 2세 사후 남편과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2. 1. 배경
멜리장드는 에데사 백국을 물려받은 부르크의 보두앵과 아르메니아 영주 가브리엘의 딸 멜리테네의 모르피아 사이의 장녀였다. 보두앵은 지역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모르피아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멜리장드는 아버지가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의 후계자로 선출된 13살 때까지 에데사에서 성장하였다. 보두앵 2세는 아들을 낳지 못한 모르피아와 이혼하고 젊은 새 아내를 맞이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보두앵 2세의 장녀인 멜리장드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였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프랑스의 루이 6세는 앙주 백작 풀크 5세를 추천했다. 풀크의 아들 조프루아는 헨리 1세의 딸 마틸다 (잉글랜드)와 결혼했고, 그 아들은 훗날 헨리 2세가 되었다. 1130년 멜리장드는 풀크와의 사이에서 아들 보두앵 3세를 낳았고, 보두앵 2세 사후 남편과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레반트의 4개 십자군 국가(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국, 에데사 백국)는 1098-99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때 이 지역을 침략하여 무슬림 통치자들을 물리친 프랑크족(라틴 기독교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멜리장드는 부르크의 보두앵과 그리스 정교회 신자인 멜리테네의 모르피아의 장녀였다. 레반트의 기독교 원주민들은 민족적, 교리적으로 다양했으며,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시리아 정교회, 마론파, 콥트 정교회, 동시리아 교회, 조지아 정교회 신자들이 포함되었다.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폴다는 멜리장드의 혼혈이 이 지역의 민족 종교적 다양성을 반영한다고 언급한다.
역사학자 버나드 해밀턴에 따르면, 멜리장드의 부모는 1100년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폴다는 멜리장드의 출생을 1110년경 또는 그보다 약간 앞선 시기로 추정한다. 멜리장드와 두 여동생 안티오크의 앨리스, 트리폴리의 호디에르나는 보두앵 2세가 에데사 백작으로 있을 때 태어났다. 폴다는 멜리장드가 에데사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1118년 보두앵은 예루살렘으로 기독교 순례를 떠났고, 이 여행 중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사망하자 보두앵 2세가 그를 계승하도록 선출되었다. 1119년 보두앵 2세는 에데사로 돌아와 사촌 에데사의 조슬랭 1세를 새 백작으로 임명하고 아내와 딸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왔다. 멜리장드는 1119년 부모의 대관식 후 이오베타라는 여동생을 얻었다.
십자군 국가는 거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였으며, 그 방어는 남성들의 몫이었다. 보두앵 2세는 자녀를 둔 최초의 예루살렘 프랑크족 통치자였지만, 그의 자녀는 모두 딸이었고 십자군 국가에는 여성 계승에 대한 관례가 아직 발전하지 않았다. 멜리장드의 부모의 결혼은 왕국에 남성 상속자가 없었음에도 행복했다. 모르피아는 국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보두앵 1세의 아내인 아르메니아의 아르다와 아델라이드 델 바스토도 마찬가지였다.
2. 2. 왕위 계승자
보두앵 1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 2세의 장녀 멜리장드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였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강력한 귀족과의 결혼을 원했다.프랑스의 루이 6세는 앙주 백작 풀크 5세를 멜리장드의 배우자로 추천했다. 풀크는 1120년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었고, 100명의 기사 부대를 1년 동안 개인적으로 제공하여 좋은 인상을 남긴 경험 많은 통치자였다. 그의 아들 조프루아는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했고, 그 아들은 훗날 영국의 왕(헨리 2세)이 되었다.
1127년 말 또는 1128년 초, 갈릴리 공작 부르의 윌리엄 1세와 귀족 브리세바르의 기 1세가 이끄는 사절단이 멜리장드의 결혼을 주선하기 위해 프랑스 왕국으로 떠났다.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협의 후, 사절단은 1128년 초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궁정에 도착했다.
보두앵 2세는 사절단이 유럽에 있는 동안 공식 문서에서 멜리장드를 "왕의 딸이자 왕국의 상속자"로 명시하며 왕위 계승자로 공표했다.(1129년 3월)
앙주 백작령과 메인 백작령을 아들 제프리에게 넘겨준 풀크는 1129년 5월 사절단과 함께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했다. 멜리장드와 풀크의 결혼은 1129년 6월 2일 전에 치러졌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의 지참금으로 아크레와 티레를 하사했다. 1130년 전반기에 멜리장드는 아들 보두앵을 낳았다.
3. 통치
멜리장드는 아버지 보두앵 2세가 사망한 후 남편 풀크와 함께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풀크는 왕국의 기존 귀족들을 앙주 출신 인사들로 교체하려 했고, 이에 멜리장드의 사촌이자 봉신인 야파 백작 휴 2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풀크는 멜리장드와 휴 2세 사이에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풀크는 휴 2세를 제거하고 멜리장드의 권한을 약화시키려 했으나, 멜리장드는 이에 격분하여 풀크와 대립했다.
결국 궁정의 중재로 풀크와 멜리장드는 화해했고, 이후 풀크는 멜리장드의 동의 없이 왕국 관련 칙령을 발포하지 않았다. 1136년에는 둘째 아들 아모리가 태어났다. 멜리장드는 베다니에 성 라자로 수녀원을 건설하는 등 종교 기관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시리아 교회와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1144년 에데사 백국이 장기에게 함락되자, 멜리장드는 교황에게 특사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이는 제2차 십자군 원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148년 다마스쿠스 포위는 십자군의 패배로 끝났다.
1152년 성년이 된 아들 보두앵 3세가 정치에 직접 참여하려 하자, 멜리장드는 이에 반대하며 갈등이 발생했다. 보두앵 3세는 왕국 분할을 요구했고,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멜리장드는 다윗의 탑에 갇혔으나, 결국 협상을 통해 나블루스와 인접한 땅을 평생 동안 얻는 조건으로 물러났다.
3. 1. 보두앵 2세의 사망과 공동 통치 시작

1130년, 멜리장드의 여동생 알릭스의 남편인 안티오크의 보에몽 2세가 사망했다. 보에몽 2세와 알릭스 사이에는 콘스탄스라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보에몽 2세가 죽었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두 살이었다. 알릭스는 권력을 잡으려 했지만, 보두앵 2세는 안티오크로 진군하여 그녀를 막았다. 보두앵 2세는 콘스탄스의 결혼이 성사될 때까지 에데사의 조슬랭 1세에게 공국을 맡겼다.
보두앵 2세는 안티오크에서 돌아온 후 심각한 병에 걸렸다. 1131년 8월,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의 집으로 옮겨져 예루살렘 성묘 교회 근처에서 죽기를 바랐다. 그곳에서 멜리장드, 풀크, 그리고 그들의 어린 아들 보두앵을 소환하여 그들에게 왕국을 수여했다. 보두앵 2세는 1131년 8월 21일에 사망했다. 풀크와 멜리장드는 1131년 9월 14일 성 십자가 축일에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 왕과 여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 대관식을 치른 최초의 군주였다.
조슬랭 1세는 보두앵 2세 사망 직후 사망했고, 알릭스는 다시 안티오크에서 권력을 잡을 기회를 잡았다. 풀크는 안티오크 귀족들의 초청으로 침략하여 공국에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3. 2. 풀크와의 권력 투쟁
1134년 멜리장드의 사촌이자 봉신인 야파 백작 휴 2세가 풀크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풀크가 왕국의 기존 귀족들을 앙주 출신의 신참들로 교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결론도 있다. 귀족들은 멜리장드가 아버지 보두앵 2세에게서 받았던 정부 내 지위를 회복하면 왕의 음모로부터 여왕을 보호받을 수 있다고 기대했을 수도 있다. 멜리장드가 반란에 연루된 것은 분명하지만, 자세한 역할은 알려지지 않았다.젊고 잘생긴 휴 백작과 멜리장드가 부정한 관계를 맺어 왕의 분노를 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 여왕은 항상 궁정 구성원들에게 시중을 받았기 때문에 비밀 연인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성직자들을 필두로 한 여론이 멜리장드가 간통을 저질렀다면 풀크의 편을 들었을 것이기에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풀크가 휴를 제거하고 멜리장드를 수도원에 가두어 보두앵 2세의 유언을 무시하기 위해 이러한 소문을 퍼뜨렸을 수도 있다.
휴의 의붓아들인 가이사리아의 영주 발터 1세 그르니에가 법정에서 그를 반역죄로 공개 고발했다. 휴는 혐의를 부인하고 결투 재판을 신청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왕은 휴의 야파 백국을 몰수할 법적 근거를 얻었다. 풀크는 야파를 포위했지만, 총대주교가 개입하여 평화를 중재했다. 휴는 야파를 왕에게 양도하고 3년간 유배 생활을 한 후 다시 받기로 했다. 그가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기사가 거리에서 휴를 찔렀고, 회복 후 그는 유배지로 가서 죽었다. 이 암살 시도는 풀크 왕이 사주한 것으로 널리 의심받았지만, 풀크의 연루는 결코 입증되지 않아 그의 평판만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멜리장드는 풀크의 휴에 대한 대우와 자신의 명예가 모욕당한 것에 격분했다. 풀크의 신하들은 감히 그녀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여왕은 풀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예루살렘 부총독 로하르 원로에게 분노를 쏟았다. 풀크 자신도 아내의 지지자들 주변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궁정은 제3자가 왕과 여왕 사이를 중재할 때까지 혼란스러웠다. 끈질긴 시도 끝에 풀크는 로하르와 다른 지지자들에 대한 멜리장드의 용서를 얻어냈고, 그들은 다시 궁정에 나타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풀크는 "사소한 일조차도 그녀의 동의 없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화해 후 풀크는 멜리장드의 동의 없이는 예루살렘 왕국 관련 칙령을 발포하지 않았다. 그러나 멜리장드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는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멜리장드의 조카인 안티오키아의 콘스탄스의 섭정을 공국 남작들의 결정에 근거했고, 멜리장드는 이에 대한 권리가 없었다. 멜리장드가 권력을 되찾은 후 풀크와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멜리장드에게 이익이 되지 않았다. 멜리장드는 아들 하나에게만 의존했던 자신의 계승을 강화해야 했고, 언니 앨리스가 다시 권력을 잡은 안티오키아에서 풀크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 했다. 멜리장드는 앨리스의 행동에 풀크가 간섭하지 않도록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1135년 말 안티오키아에서 돌아온 왕실 부부는 또 다른 아이를 가졌고, 1136년 아들 아말릭이 태어났다. 그는 멜리장드가 가장 아끼는 아이가 되었다.
멜리장드와 풀크의 화해를 보여주는 가시적인 결과는 호화로운 멜리장드 시편이다. 이 시편은 1135년경 의뢰된 개인 기도서로, 풀크가 멜리장드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열정적으로 시도한 것의 일부로 해석된다. 이 시편은 십자군 국가에서 서양, 그리스, 아르메니아 문화의 융합을 반영한다.

3. 3. 화해와 공동 통치 강화
폴다는 1130년대 초 멜리장드가 자매 요베타가 살았던 성 안나 수녀원의 개축에 기여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멜리장드의 후원에 대한 유일한 서술은 베다니에 수녀원을 건설한 것이었는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여왕이 연락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1138년 2월 멜리장드와 풀크는 총대주교와 성묘 교회의 교구 참사회를 설득하여 베다니의 교회와 그 부속 마을들을 양도하여 새로운 수도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도록 했다. 성 라자로 수녀원으로 알려지게 된 이 수녀원은 6년 동안 건설되었다. 멜리장드는 수녀원에 토지, 보석이 박힌 금과 은의 성물, 비단, 성직자 복을 매우 후하게 기증하여 왕국 내 다른 어떤 수도원이나 교회보다 더 부유하게 만들었다. 멜리장드는 처음에는 나이 많은 원장을 임명했다. 그 원장이 사망하자 요베타가 멜리장드의 의도대로 뒤를 이었고, 멜리장드는 책, 장식품, 성배를 추가로 보냈다. 해밀턴은 베다니 수녀원의 건설과 기증을 멜리장드의 후원 권력에 대한 "놀라운" 사례로 본다.1138년에 왕과 여왕은 장남 발두윈을 그들의 행위에 참여시키기 시작했다. 풀크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터키의 모술 아타베그인 젠기에 대항하여 왕국의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동안 멜리장드는 교회를 굳건히 통제했다. 1130년대 후반부터 멜리장드는 사마리아의 주님의 성전에 광대한 토지를 기증하는 것을 포함하여 종교 기관의 추가 확장을 감독했다. 멜리장드는 성묘 교회에 여러 토지를 기증했고, 예호사팟 계곡의 성 마리아 수도원, 성 요한 기사단, 성 라자로 나병 환자 병원, 나비 삼윌의 성 사무엘 교회의 프레몽트레 수도회에 기증했다. 바버는 1137년에 성전의 수도원장인 제프리를 원장으로 승진시킨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멜리장드는 시리아 교회를 일관되게 지원했고, 프랑크족의 정복으로 잃었던 재산을 회복하도록 보장했다. 멜리장드는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했으며, 그 지도자인 전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1140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라틴 교회의 종교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스 정교회의 성 사바스 수도원 역시 멜리장드로부터 기증을 받았다. 멜리장드의 호화로운 선물은 전설이 되었고 그녀를 독실한 종교심을 가진 여성으로 명성을 얻게 했지만, 마이어는 그녀가 본질적으로 약삭빠른 정치가였으며, 기부를 통해 교회의 정치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3. 4. 제2차 십자군과 에데사 함락
1144년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 세력인 이마드 앗 딘 장기에게 함락되자, 멜리장드는 교황에게 특사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멜리장드는 에데사 함락 소식을 듣고 즉시 안티오크를 통해 교황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했다. 에데사 함락은 유럽 전역에 충격을 안겨주었고,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는 십자군 소집을 결정했다.
1146년 9월, 장기가 암살되었다. 에데사의 요슬랭 2세는 잃어버린 도시를 되찾고자 했고, 발두인 왕은 하우란을 공격했지만, 두 사람 모두 장기의 아들 누르 알딘에게 패배했다.

1148년 6월 24일, 십자군은 아크레 인근에서 멜리장드 여왕, 발두인 왕, 풀처르 총대주교를 비롯한 예루살렘 왕국의 주요 인사들과 회동했다. 이는 라틴 동방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고위급 회의였다. 다마스쿠스 공격 결정은 이미 그해 4월 발두인, 콘라드, 풀처르 간의 소규모 회의에서 결정되었으며, 멜리장드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마스쿠스는 강력한 이슬람 도시였고, 그곳을 함락시키는 것이 멀리 떨어진 에데사를 점령하는 것보다 예루살렘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 포위는 십자군의 참담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3. 5. 보두앵 3세와의 갈등과 내전
1152년 성년이 된 보두앵 3세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려 하였지만 멜리장드를 따르는 귀족들의 반대를 받았다. 보두앵은 어머니와 대립하여 단독 대관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왕국의 귀족회의에 왕국 분할을 요구했다. 멜리장드가 받은 영지는 예루살렘을 비롯해 사마리아, 나블루스 등 보두앵이 받은 영지보다 더 부유한 편이어서 보두앵은 결정에 승복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진격했고, 결국 왕국의 전권을 얻게 되었다. 1153년 모자는 화해하였고 멜리장드가 정치적 조언을 맡기도 했다.
멜리장드는 자신의 재상 랄프를 티레 주교로 임명하는 문제로 교회와 분쟁을 겪었고, 이는 1149년까지 최고조에 달해 멜리장드와 발두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교회를 동맹으로 유지하기 위해 멜리장드는 랄프를 재상직에서 해임하거나 사임을 강요했다. 그러나 공동 통치자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재상을 임명할 수 없었고, 따라서 재상직은 붕괴되었다. 이후 어머니와 아들은 각자 별도의 필사를 고용하여 공동 통치의 공개적인 단절은 피했지만, 왕권의 전례 없는 분열을 초래했다.
1149년경, 신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신인 갈릴리의 왕자 엘리난드의 죽음은 멜리장드에게 큰 타격이었다. 1150년 에데사 백작이 붙잡힌 후, 발두인은 영주들을 소집하여 그와 함께 안티오크로 진군하려 했지만, 멜리장드에게 충성하는 자들은 거부했다. 마이어는 이것이 발두인이 어떠한 군사적 성공도 거두지 못하도록 하려는 여왕의 시도였으며, 특히 예루살렘 왕들이 북부 십자군 국가들을 보호하는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발두인은 어쨌든 소집할 수 있는 적은 병력으로 길을 떠났다.
마이어는 현존하는 헌장을 통해 1150년부터 멜리장드가 발두인과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멜리장드는 자체 행정 기구를 설치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영주들을 모았다. 1150년 멜리장드는 사촌이자 치안 판사인 마나세스에게 자신의 지지자 이벨린의 바리산의 미망인인 람라의 헬비스의 손을 쥐게 했다. 이로 인해 바리산의 아들들인 이벨린의 휴, 이벨린의 발두인, 이벨린의 발리안은 람라의 땅을 잃게 되어 분노했다. 발두인은 마나세스가 어머니와의 불화를 초래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멜리장드는 1151년 막내 아들 아말리크를 야파 백작으로 임명하면서 발두인에 대한 입지를 더욱 굳건히 했다. 그는 교회를 제외하고 그녀의 가장 중요한 추종자가 되었다.
발두인은 1152년 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두인은 멜리장드를 대관하지 않고 부활절에 총대주교가 자신을 대관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그때부터 발두인이 유일한 통치자가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총대주교 풀처는 이를 거부했는데, 교회는 멜리장드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부활절 월요일에 발두인은 예루살렘에서 엄숙한 행렬을 벌였는데, 그곳은 멜리장드의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왕관 대신 월계수 화환을 썼다. 그 후 예루살렘 고등 법원을 소환하여 왕국을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서 분할할 것을 요청했다. 해밀턴은 이 요청이 왕국이 분할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작았기 때문에 "형사적으로 무책임하다"고 주장했지만 마이어는 멜리장드가 이전 2년 동안 ''사실상'' 왕국을 분할했다고 주장한다. 회의에서 멜리장드는 왕국 전체가 상속권에 의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발두인이 자신의 권리를 찬탈한 것이라고 암시했지만 분할에는 동의했다. 여왕은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유지했고 발두인은 아크레와 티레를 차지했다.
왕국의 분할은 오래가지 못했다. 발두인은 자신이 할당받은 땅이 왕으로서 재정적으로 자신을 지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아들의 의도를 깨달은 멜리장드는 요새화되지 않은 나블루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발두인은 미라벨에서 마나세를 격파하고 추방한 후, 즉시 나블루스를 점령하고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멜리장드의 영토에 있던 몇몇 영주들이 그녀를 배신했다. 마지막까지 충성을 유지한 자들 중에는 그녀의 아들 아말릭, 밀리의 필립, 그리고 로하드 장로가 있었다. 맏아들의 진격을 들은 멜리장드는 가신들과 함께 성채인 다윗의 탑으로 물러났다. 이 시점에서 총대주교 풀처는 여왕에 대한 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다. 그는 성직자들과 함께 왕을 훈계하기 위해 나섰지만, 발두인이 그를 거부한 후 분노에 차서 돌아왔다. 왕은 도시 외곽에 진영을 쳤고, 그 후 시민들은 그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발두인은 공성 무기로 탑을 포격했지만, 포위된 자들이 용감하게 방어했기 때문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강력한 요새화와 충분한 비축 물자에도 불구하고 탑은 무한정 저항할 수 없었고, 멜리장드는 이길 가망이 없었다. 며칠 후, 아마도 성직자들에 의해 협상이 이루어졌다. 멜리장드는 베다니의 수녀원으로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해밀턴은 멜리장드가 더 나은 조건을 얻기 위해 버텼을 것이라고 가정하며, 나블루스와 인접한 땅을 평생 동안 얻었고 아들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한다. 나블루스는 상당한 수입을 제공했지만, 요새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력의 중심지로 바뀔 수 없었다. 해밀턴은 이러한 조건에서,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멜리장드가 강력한 동맹국을 유지했다는 증거를 본다. 마이어는 멜리장드가 정치에서 물러나고, 여왕이 아닌 도시 영주로서 나블루스를 통치하며, 왕의 동의하에만 행동하기로 동의했다고 주장한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8년간의 갈등은 1152년 4월 20일에 끝났고 멜리장드의 16년간의 권위도 마찬가지였다.
4. 은퇴와 죽음
1161년 멜리장드는 뇌졸중 증세를 보여 기억력 장애가 생겼고, 더는 국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녀의 동생들인 트리폴리 백작 부인과 베다니의 수녀원장이 그녀를 간호했다. 멜리장드는 1161년 9월 11일에 사망하여 어머니 모르피아 옆에 묻혔다.
말년의 멜리장드는 종교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은퇴 전처럼 교회를 계속 후원했고, 1157년에는 의붓딸 시빌라 백작 부인이 베다니 수녀원에 들어갔다. 같은 해, 풀처 대주교가 사망하자 멜리장드는 시빌라, 호디에르나와 함께 아말릭을 다음 대주교로 임명하는데 개입하였다.
5. 평가
멜리장드 여왕에 대한 주요 정보는 티레의 대주교 윌리엄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윌리엄은 멜리장드와 아들 발두인 3세 사이의 갈등에서 여왕의 편을 들었다. 마이어는 윌리엄이 멜리장드의 편을 든 이유로 윌리엄이 멜리장드의 교회 지원에 영향을 받았고, 발두인 3세를 계승한 아들 아말릭 왕의 궁정 역사가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윌리엄은 멜리장드를 "매우 현명한 여성이었고, 거의 모든 국정 분야에서 완벽한 경험을 쌓았으며, 성별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었다"고 묘사했다.
바버는 윌리엄이 멜리장드를 "여성에게 정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현명하고 신중하다"고 묘사한 것이 현대 독자에게는 다소 위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대주교가 일반적으로 여성의 정치 참여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해밀턴은 윌리엄의 "최고의 군주들의 영광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녀는 그 점에서 이전의 군주들과 동등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훌륭하게 왕국을 통치했다"는 판단에 동의하며, 멜리장드를 "진정으로 놀라운 여성"이라고 평가했다.
바버는 윌리엄의 의견이 보편적으로 공유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멜리장드의 통치 기간 동안 레반트에서 프랑크족이 겪은 가장 큰 재앙 두 가지(1144년 에데사 함락과 1148년 다마스쿠스 정복 실패)에 대해 멜리장드의 책임 정도를 결정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바버는 이 좋지 않은 기록과 멜리장드가 폐위된 지 1년 후 발두인 3세가 아스칼론을 정복한 것을 대조한다. 해밀턴은 멜리장드가 교양 있고 독실했다고 결론 내리고, 폴다는 그녀를 12세기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위대한 예술 후원자라고 부른다.
마이어는 멜리장드가 발두인 3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퇴위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며 "그녀의 권력에 대한 갈망은 그녀의 지혜보다 더 컸다"고 주장한다. 그는 "티레의 윌리엄이 멜리장드의 능력에 대해 칭찬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들이 통치에 더 적합했다고 주장한다. 해밀턴은 멜리장드가 "경험 없는" 아들에게 권력을 사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녀는 섭정이 아니라 훌륭하게 통치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공인된 공동 통치자였다고 주장한다. 마이어는 멜리장드가 "중세 시대 여왕 중 가장 정력적인 여성 중 한 명"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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