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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공방전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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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타 공방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와 독일의 추축국이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몰타를 점령하기 위해 벌인 공방전이다. 몰타는 영국 해군과 공군의 중요한 기지였으며, 추축국의 북아프리카 병참선을 위협하는 위치에 있었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이탈리아는 몰타를 공격했으나, 영국군의 방어와 반격으로 실패했다. 1941년 독일 공군이 개입하면서 공습이 강화되었으나, 영국군은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투입하여 제공권을 확보하고, 잠수함과 해상 타격으로 추축국의 보급선을 공격했다. 1942년 11월 영국군의 반격과 증원, 그리고 추축국의 공세 실패로 몰타의 포위는 해제되었고, 연합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몰타 공방전은 추축국의 막대한 피해와 연합군의 승리로 이어졌으며,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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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공방전 (제2차 세계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몰타 공방전
일부제2차 세계 대전 중 지중해 전구
시기1940년 6월 11일 – 1942년 11월 20일 ()
장소몰타
결과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영국
몰타
}}



해군 지원
그리스
폴란드
노르웨이
미국
교전국 2이탈리아 왕국
나치 독일
지휘관 및 지도자
연합군 지휘관앤드루 커닝엄
윌리엄 도비
휴 로이드
키스 파크
추축군 지휘관프란체스코 프리콜로
리노 코르소 푸기에르
한스 가이슬러
알베르트 케셀링
병력 규모
연합군캠페인 과정에서 716대의 전투기
추축군캠페인 과정에서 약 2,000대의 항공기
피해 규모
연합군 피해전투기 369대 (공중)
전투기 64대 (지상)
전함 1척
항공 모함 2척
순양함 4척
구축함 19척
잠수함 38척
공군 2,301명 사망 또는 부상
건물 30,000채 파괴 또는 손상
민간인 1,300명 사망
추축군 피해독일 항공기 357대
이탈리아 항공기 175대
이탈리아 해군 수송 함대의 72% 손실
추축국 상선 함대의 23% 손실
상선 2,304척 침몰
해상에서 17,240명 사망
독일 유보트 약 50척 (전체 MTO)
이탈리아 잠수함 손실 약 16척

2. 배경

영국에게 몰타는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 사이의 중요한 육군 및 해군의 요충지였으며, 연합군의 물자 수송을 담당하고 있었다. 몰타는 영국령 홍콩 및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출발한 함선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알렉산드리아에 정박한 이후, 영국 본토와 지브롤터를 이어주기 위한 지중해의 경유 지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몰타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추축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 왕국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다.

1939년, 영국 공군은 이탈리아 왕국의 침공에 대비해 몰타에 있는 대공포와 전투기를 증강시켰다. 타란토 해전에서 이탈리아군을 격퇴시킨 이후 이탈리아군은 몰타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깨닫고 이에 대한 침공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섬을 차단하는 전략을 택했다.

2. 1. 지정학적 중요성

영국에게 몰타는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 사이의 중요한 육군 및 해군 요충지였다. 평시에는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와 극동으로 가는 영국 무역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이 노선이 폐쇄되면 몰타는 중부 지중해에서 추축국 선박 및 육상 목표에 대한 공격 작전을 위한 전진 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가까운 위치 때문에 영국은 1930년대 중반 영국 지중해 함대의 본부를 발레타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이전했다.[1]

몰타는 크기가 27×이며 면적은 250km2보다 약간 작다. 1940년 6월 인구는 약 250,000명이었으며, 대부분 그랜드 하버에서 약 6.44km 이내에 거주하여 인구 밀도가 섬 평균의 6배 이상이었다. 특히 발레타는 0.65km2 면적에 23,000명이, 세 도시에는 1.3km2 면적에 28,000명이 밀집해 있어 강력한 공습을 받았다.





몰타는 전쟁 전 방어 시설이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와 영국 해상 함대는 전력이 비슷했지만, 이탈리아는 더 많은 잠수함과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1939년 10월, 지중해 함대는 이집트로 이전되어 섬의 해군 방어력이 약화되었다. 몰타 정부는 섬 방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영국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섬을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섬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1939년 7월 몰타에 대공포와 전투기를 증강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5월, 프랑스 공방전 당시 프랑스 총리 폴 레이노가 몰타를 포함한 양보를 통해 베니토 무솔리니를 달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전시 내각을 설득하여 양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가 선전 포고를 했을 때, 몰타에는 단 6대의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복엽기만 배치되어 있었다. 1930년대 이탈리아는 지중해와 아프리카 확장을 시도했고, 1940년 5월~6월 프랑스에서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해군 및 공군력 균형이 이탈리아에 유리하게 기울어졌다.

무솔리니는 지중해 전역에서 공세를 펼치라고 명령했고, 몰타에 첫 폭탄이 투하되었다. 1941년 2월,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몰타의 영국 공군과 해군은 추축국의 북아프리카 보급선을 위협했고, 양측 모두 몰타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1940년, 이탈리아는 몰타 공격으로 중부 지중해에서 해군 및 제공권을 확보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타란토 해전에서 이탈리아 함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몰타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을 꺼리게 되었고, 섬을 차단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2. 2. 영국군의 방어 태세

몰타는 지브롤터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유일한 연합군 기지로, 군사적, 해군 요새였다. 평시에는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와 극동으로 가는 영국 무역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이 노선이 폐쇄되었을 때 몰타는 중부 지중해에서 추축국 선박 및 육상 목표에 대한 공격 작전을 위한 전진 기지로 남았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가까운 위치 때문에 영국은 1930년대 중반에 왕립 해군 지중해 함대의 본부를 몰타 발레타에서 1939년 10월 알렉산드리아로 이전했다.[1]

몰타는 27×이며 면적은 250km2보다 약간 작다. 1940년 6월 인구는 약 250,000명이었으며, 대부분이 몰타 원주민이었다. 1937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주민이 그랜드 하버에서 약 6.44km 이내에 거주했으며, 인구 밀도는 섬 평균의 6배 이상이었다. 특히 발레타는 약 0.65km2 면적에 23,000명이 거주하는, 가장 혼잡한 곳 중 하나였다.

전쟁 전, 몰타는 섬을 방어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방어 시설이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와 영국 해상 함대는 전력이 비슷했지만, 이탈리아는 훨씬 더 많은 잠수함과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성은 지중해 함대(앤드루 커닝햄)와 지브롤터를 H 기동 부대(제임스 서머빌)로 보호해야 했다. 1939년 10월, 지중해 함대는 이집트로 이전되어 섬의 해군 방어력이 약화되었다. HMS 테러 모니터와 몇 척의 영국 잠수함만 여전히 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939년 7월 몰타에 대공포와 전투기의 수를 늘리기로 결정했다. 1940년 5월, 프랑스 공방전 당시 프랑스 총리 폴 레이노가 몰타를 포함한 양보를 통해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를 달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전시 내각을 설득하여 어떠한 양보도 하지 말 것을 결정했다. 영국의 본토가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몰타의 방어는 우선순위가 아니었고, 가볍게 보호되었다.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을 때, 단 6대의 구식 글로스터 시 글래디에이터 복엽기가 섬에 배치되었고, 다른 6대는 상자에 담겨 있었다.

1940년 5월~6월 프랑스에서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프랑스 해군이 연합군 전투 서열에서 제외되었고, 해군 및 공군력의 균형이 이탈리아에 유리하게 기울어졌다. 선전 포고와 동시에 무솔리니는 지중해 전역에서 공세를 펼치라고 명령했고, 몇 시간 만에 몰타에 첫 폭탄이 투하되었다.

1940년, 이탈리아의 몰타 공격은 섬을 장악할 합리적인 기회를 가졌고, 이는 이탈리아에게 중부 지중해에서 해군 및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1940년 내내 이탈리아가 몰타에 직접적인 행동을 꺼린 것은 타란토 해전의 영향이 컸다. 이탈리아는 간접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하여 섬을 차단했다. 이탈리아인(그리고 나중에 독일인)에게 항공력은 몰타에 대한 주요 무기였다.

3. 이탈리아의 공격 (1940년 6월~12월)

이탈리아 왕립 공군(Regia Aeronautica|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it)은 1940년 6월 11일 몰타에 대한 첫 공습을 시작했다. 이탈리아군은 루카, 할파, 타 칼리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하고, 발레타를 공습하는 등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했지만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1] 당시 몰타의 방어 전투기는 구식인 글래스터 씨 글래디에이터였고, 이탈리아군은 함정 HMS 테러와 포함 알피스 및 레이디버드의 공격을 받았다.[1]

그랜드 하버에 대한 이탈리아의 폭격


영국은 이탈리아 공군의 제한적인 능력과 시민들의 끈기를 확인하고, 화이트홀은 몰타에 허리케인 전투기, 마틴 메릴랜드 폭격기, 비커스 웰링턴 폭격기 등 더 많은 항공기를 투입하도록 명령했다.[1] 웰링턴 폭격기는 1940년 10월 제148 비행대에서 도착했다.[1]

이탈리아 사보이아-마르케티 S.M.79 폭격기


한편,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은 실패했고, 영국의 반격 작전인 나침반 작전으로 키레나이카에서 이탈리아 군대가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 공군은 몰타에서 병력을 빼내 이집트와 리비아의 지상군을 지원해야 했다. 몰타에 대한 압박은 완화되었고, 영국은 공격 작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940년 11월, 영국 해군 항공대와 영국 해군은 타란토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을 공격하여 해상-항공력의 승리를 거두었다.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는 이탈리아 중(重) 함정을 무력화시켰고, 이탈리아 함대는 나폴리로 철수하여 영국에게 해상 우위를 넘겨주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의 주요 뇌격기 중 하나였던 페어리 소드피시. 타란토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함선을 격침시켰으며, 독일 군함 비스마르크 호를 침몰시키는데도 기여했다.


영국 해군의 잠수함도 공격 작전을 시작했다. 영국 U급 잠수함과 더 큰 잠수함들이 작전을 수행했지만, 큰 손실을 입고 철수했다. 이후 제10 잠수함 전대가 마노엘 섬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맥스 호턴 제독과 G.W.G. 심슨 사령관이 지휘했다. U급 잠수함이 부족하여 영국 T급 잠수함이 사용되었지만, 어뢰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1년 1월 14일, U급 잠수함이 도착하면서 잠수함 공격이 본격화되었다.[1]

영국 U급 잠수함


이탈리아 해군은 해전 경험 부족, 영국 공군에 대한 두려움, 석유 부족 등으로 공격을 지연시켰다. 1941년 이탈리아는 제한된 석유 공급으로 해상 전투 훈련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1]

이탈리아 전함 가 1940년 7월 9일 칼라브리아 해전에서 포격을 가하고 있다.


이탈리아 해군성(Supermarina|수페르마리나it)은 노후화된 영국 해군 전함을 알렉산드리아에 묶어둘 수 있다고 믿었고, 리비아 점령 중 대규모 유전을 발견하지 못해 원유가 부족했다. 독일루마니아에서 대부분의 석유를 가져갔고, 이탈리아는 지중해에서 대규모 작전을 수행할 자원이 거의 없었다. 1941년 초, 제한된 석유 비축량으로 7개월 분량의 연료만 확보할 수 있었다.[1]

앤드루 커닝엄은 이탈리아 해군의 소극적인 태도를 간파했다. 1940년 7월 9일, 칼라브리아 해전에서 양측 해군이 교전했지만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고, 이는 몰타인들에게 영국이 바다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2] 1941년 3월 마타판 곶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다시 확인되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그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증원 병력을 수송하는 영국 호송대를 요격하려 했다.[3]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이집트 침공을 막아내고 컴퍼스 작전을 통해 이탈리아군을 리비아로 몰아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이탈리아군을 저지한 영국군은 몰타 방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1940년 11월에는 타란토 해전을 통해 영국 공군의 위력을 과시했다. 영국군은 몰타 방어를 위해 U급 잠수함을 투입했으나 큰 손실을 입었고, 이후 T급 잠수함을 투입하여 1940년 9월 20일 작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잠수함과 공군은 37만 톤의 이탈리아 선박을 격침시켰고, 1941년 1월 14일부터는 U급 잠수함들이 몰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1]

3. 1. 초기 공습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11일 몰타에 첫 공격을 가했다. 55대의 폭격기와 21대의 전투기가 몰타 상공을 비행하며 루카, 할파, 타 칼리 비행장에 142개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후 이탈리아 SM.79 "스파비에로" 전투기 10대와 마치니 C.200 20대가 공중 공격 없이 몰타 상공을 날았다. 당시 몰타의 방어 전투기는 구식인 글래스터 씨 글래디에이터로 구성되어 있었고, 할파 전투 비행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약 6100m 상공을 비행했고, 함정 HMS 테러와 포함 알피스 및 레이디버드가 공격을 개시했다. 오후에는 38대의 폭격기와 12개의 전투기가 수도 발레타를 공습했다. 총 8번의 공습이 6월 11일에 있었다. 폭격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사상자의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1]

6월 19일 페어리 소드피시 12대가 할파의 비행장으로 날아가 프랑스령 튀니지로 날아갔으나 포위되어 후퇴했고, 6월 말에는 아우구스타 항의 시칠리아섬에 공습을 가해 함선과 정유소를 폭격했다.[1]

7월 초에 공수 부대원들이 아우구스투스를 공격했고, 8월 달에는 12개의 호커 허리케인 비행기들이 아우구스투스 항으로 날아갔다. 11월 17일, 영국 공군은 화이트 작전을 개시해 12대의 허리케인 비행기를 몰타에 투입시키려 했으나 2대의 허리케인이 격추되었고, 대부분의 비행기는 연료 부족과, 뒤늦은 도착으로 착륙에 실패했다. 8주 후 원래의 허리케인 비행기들은 여유 공간의 부족으로 착륙했다. 1940년의 남은 기간은 폭격기 23대 및 전투기 12대를 격추시키고 181대의 폭격기와 7개의 전투기에 피해를 입힌 이탈리아 공군의 활약이 있었다.[1]

영국은 이탈리아 공군의 능력이 제한적이고, 끈기 있는 시민들을 타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꾸준한 증원군이 도착했다. 기지의 잠재력을 깨달은 화이트홀은 허리케인 전투기, 마틴 메릴랜드 폭격기, 선더랜드 비행정, 비커스 웰링턴 폭격기, 더 많은 소드피쉬, 잠수함을 포함한 더 많은 항공기를 섬으로 투입하라고 명령했다.[1] 웰링턴 폭격기는 1940년 10월 제148 비행대에서 도착했다.[1]

한편,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영국의 반격 작전인 나침반 작전은 키레나이카에서 이탈리아 군대 여러 사단을 파괴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진 이 작전은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에서 이탈리아 공군 부대를 끌어들여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교전 중인 이탈리아 지상군을 지원하고 재앙에 대처하게 했다. 몰타에 대한 안도는 상당했는데, 이제 영국은 방어 작전 대신 공격 작전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0년 11월, 수개월 동안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이탈리아 공습 이후, 영국 해군 항공대와 영국 해군은 타란토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을 공격했는데, 이는 해상-항공력의 승리였으며 항공기가 항공 엄호 없이 해군 함정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는 전투 중 다수의 이탈리아 중(重) 함정을 무력화시켰다. 이탈리아 함대가 영국 항공기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나폴리로 철수한 것은 당분간 영국에게 해상 우위를 넘겨준 전략적 승리였다.[1]

영국 해군의 잠수함도 공격 작전을 시작했다. 영국 U급 잠수함은 6월 초부터 작전을 시작했다. 더 큰 잠수함도 작전을 시작했지만, 임무당 50%의 손실을 본 후 철수했다. U급 잠수함은 마노엘 섬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새로운 부대는 제10 잠수함 전대로 명명되었고 맥스 호턴 제독의 지휘를 받았으며, 그는 G.W.G. 심슨 사령관을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행정적으로 제10 전대는 알렉산드리아의 제1 잠수함 전대 아래에서 운영되었으며, 이 전대는 커닝햄의 지휘를 받았다. 실제로는 커닝햄이 심슨과 그의 부대에게 자유 재량권을 주었다. U급 잠수함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영국 T급 잠수함이 사용되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1940년 9월 20일 작전을 시작했을 때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어뢰 부족으로 인해 표적이 군함, 유조선 또는 기타 "중요한 함선"이 아닌 한 적함을 공격할 수 없었다.[1]

함대의 성과는 처음에는 엇갈렸다. 이들은 약 37593739.00kg의 이탈리아 선박을 격침시켰으며, 그 중 절반은 트루앤트 한 척이 격침시켰다. 이 잠수함은 이탈리아 잠수함 1척, 상선 9척, 모터 어뢰정 (MTB) 1척을 격침시켰다. 9척의 잠수함과 훈련된 승무원 및 지휘관의 손실은 심각했다. 손실의 대부분은 기뢰 때문이었다.[1] 1941년 1월 14일, U급 잠수함이 도착했고 잠수함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

3. 2. 이탈리아 해군의 소극적 태도

이탈리아 해군은 해전 경험 부족과 영국 공군에 대한 두려움, 석유 부족 등 여러 이유로 공격을 지연시켰다. 1941년 이탈리아는 제한된 양의 석유를 공급받아 해상 전투 훈련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1]

이탈리아 해군성(Supermarina|수페르마리나it)의 소극적인 태도에는 다른 요인도 있었다. 이탈리아는 노후화된 영국 해군 전함을 알렉산드리아에 묶어둘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리비아 점령 중 대규모 유전을 발견하지 못해 원유가 부족했다. 독일루마니아에서 대부분의 석유를 가져갔고, 이탈리아는 지중해에서 대규모 작전을 수행할 자원이 거의 없었다. 1941년 초, 제한된 석유 비축량으로 7개월 분량의 연료만 확보할 수 있었다.[1]

앤드루 커닝엄은 이탈리아 해군의 방어를 탐색하여 그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1940년 7월 9일, 칼라브리아 해전은 이탈리아 해군과 영국 해군(호주 해군 함정 포함) 주력이 서로 교전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전투는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고, 모두 가능한 한 빨리 기지로 돌아갔다. 이는 몰타인들에게 영국이 바다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2] 1941년 3월 마타판 곶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다시 확인되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그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증원 병력을 수송하는 영국 호송대를 요격하려 했다.[3]

3. 3. 영국의 반격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이집트 침공을 막아내고 컴퍼스 작전을 통해 이탈리아군을 리비아로 몰아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이탈리아군을 저지한 영국군은 몰타 방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1940년 11월에는 타란토 공습을 통해 영국 공군의 위력을 과시했다. 영국군은 몰타 방어를 위해 U급 잠수함을 투입했으나 큰 손실을 입었고, 이후 T급 잠수함을 투입하여 1940년 9월 20일 작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잠수함과 공군은 37만 톤의 이탈리아 선박을 격침시켰고, 1941년 1월 14일부터는 U급 잠수함들이 몰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1]

몰타에 대한 독일의 개입은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의 패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에르빈 롬멜 휘하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DAK)을 파견하여 추축국 전선을 확보하게 했다. 콜로서스 작전 이후 독일군은 해바라기 작전을 통해 영국군을 이집트로 몰아냈다. 추축군의 보급품은 대부분 해상을 통해 수송되었기 때문에 몰타는 중요한 위협이었다. 이에 ''공군 최고 사령부(OKL)''는 1941년 1월 제10 항공군단을 시칠리아에 파견하여 몰타 주변 해군과 영국 공군 기지를 공격했다.

영국 잠수함은 독일군 수송 선박 차단에 실패했고, 1941년 2월 9일에는 3척의 잠수함이 트리폴리로 향하는 호송선을 놓쳤다. 트리폴리 항구는 동쪽으로 1600km 떨어진 알렉산드리아 서쪽에서 최고의 시설이었다. 이탈리아군은 몰타 주변에 54,000개의 기뢰를 배치하여 영국 해군 잠수함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41년 1월부터 4월까지 추축국은 리비아로 321,259톤을 보냈고, 이 중 94%가 항구에 도착했다. 해상으로 파견된 73,991명의 병력 중 97%가 아프리카에 도착했다. 1940년 12월 10일, 한스 페르디난트 가이슬러의 ''제10 항공군단''은 지중해 연합군 선박 공격을 위해 시칠리아로 파견되었다. 1941년 1월 10일, 가이슬러는 255대의 항공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1941년 1월 2일, 융커스 Ju 87 ''슈투카'' 부대가 트라파니에 도착했다. 약 80대의 Ju 87기를 보유한 이들은 몰타에 대한 폭격을 강화했다. 카를 크리스트 대령은 항공모함을 주요 목표로 삼고, 일러스트리어스 격침을 명령했다.

4. 독일군의 개입 (1941년 1월~1941년 4월)

1941년 1월, 독일 공군(독일어: Luftwaffe, 루프트바페)이 몰타 공방전에 개입하면서 전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독일 공군은 Ju 87 급강하 폭격기를 동원하여 몰타와 영국 해군 함선을 공격했다.

HMS ''Illustrious''가 그랜드 하버에서 Ju 87의 공격을 받고 있다. 항공모함은 큰 크레인의 오른쪽에 있다


독일 공군 승무원들은 Ju 87 급강하 폭격기 4발이면 배를 침몰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시칠리아 해안 근처에서 훈련했다. 1941년 1월 10일, 영국 해군이 엑세스 작전(Operation Excess)을 개시하여 지중해에서 호송 작전을 펼치자, 독일 공군은 일러스트리어스 항공모함을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 이탈리아 SM 79 10대가 영국 페어리 풀마(Fairey Fulmar) 전투기를 유인하는 동안, Ju 87 약 10대가 항공모함을 공격했다. Ju 87은 6발의 명중탄을 기록하여 대포와 엘리베이터를 파괴하고 갑판 아래 항공기를 파괴하여 연료와 탄약의 폭발을 일으켰다. 다른 한 발은 장갑 갑판을 관통하여 배 깊숙한 곳에서 폭발했다. 추가 공격은 효과가 없었지만, 심하게 손상된 일러스트리어스는 주 엔진이 손상되지 않아 몰타로 향했다.[1] 공격은 6분 동안 지속되었고, 승무원 126명이 사망하고 91명이 부상을 입었다.[2] 몰타가 보이는 곳에서 이탈리아 어뢰 폭격기들도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3]

영국은 울트라 (암호 해독)를 통해 이미 1월 4일에 독일 공군 ''플리거코르프 X''가 시칠리아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해군성에 이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 만약 알았더라면 Ju 87의 사정거리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1] 당시 영국 공군은 단 16대의 허리케인과 몇 대의 글래디에이터 항공기만 작동 가능한 상태여서 독일의 주요 공습을 막을 수 없었다.[2]

1941년 1월 11일, Ju 87 10대가 ''일러스트리어스''를 공격하다가 경순양함 사우스햄튼과 글로스터를 공격했다. 두 함선에 명중탄이 기록되었고, ''사우스햄튼''은 심하게 손상되어 자침했다. 이후 12일 동안, 그랜드 하버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끈기 있는 공습 속에서 항공모함을 수리했다.

1941년 1월 13일, SC 1000 폭탄을 장착한 Ju 87은 명중탄을 기록하지 못했다. 1941년 1월 14일, Ju 87 44대가 후방 엘리베이터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1941년 1월 18일, 독일군은 제공권 확보를 위해 할 파와 루카의 비행장을 공격했다. 1941년 1월 20일, 두 발의 근접탄이 수면 아래 선체를 관통했다. 1941년 1월 23일, ''일러스트리어스''는 그랜드 하버를 빠져나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독일 공군은 항공모함을 침몰시키지 못했지만, 적은 손실로 영국 해군에게 지상 기반 공군의 효과를 각인시켰다. 영국 해군은 지중해 중부에서 함대의 중장비를 철수시키고 시칠리아 해협을 통과하는 순양함을 보내는 것 이상을 감수하지 않았다. 영국과 이탈리아 해군은 타란토와 몰타에서의 경험을 소화했다.[4]

4. 1. 이탈리아 지원

독일군은 서부 사막 전역에 개입하여 영국군을 이집트 일대로 몰아냈다. 1941년 1월, 독일군은 시칠리아섬에 OLK와 FC 10을 보냈고, 이탈리아 해군과 연합하기 위해 1941년 2월 9일 리비아트리폴리 항구에 잠수함 3척을 보냈다. 1941년 2월 10일, 이탈리아 공군은 콜로서스 작전을 개시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1941년 1월부터 4월까지 독일 상선 321,259톤 중 18,777톤만이 리비아에 도착하여, 영국군의 반격이 거셌음을 보여주었다. 1941년 1월 2일, 첫 독일군 분대가 시칠리아섬에 도착했고, 1월 10일부터 255개의 전투기가 소집되었다. 독일군은 JU-87 공군 대원에게 HMS 일러스트리어스를 격침시키라고 지시했다.

''Luftwaffe''(독일 공군) 승무원들은 직격탄 4발이면 배가 침몰할 것이라고 믿고 훈련했다. 1941년 1월 10일, 영국 엑세스 작전 중 Ju 87 43대가 투입되었다. 이탈리아 SM 79 10대가 영국 전투기를 유인하는 동안, Ju 87 약 10대가 항공모함을 공격했다. Ju 87은 6발의 명중탄을 기록, 대포와 엘리베이터를 파괴하고 갑판 아래 항공기를 파괴했다. 추가 공격은 실패했지만, 주 엔진은 손상되지 않아 몰타로 향했다.[1] 공격은 6분 동안 지속되었고, 승무원 126명이 사망하고 91명이 부상을 입었다.[2] 몰타가 보이는 곳에서 이탈리아 어뢰 폭격기들도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3]

영국은 울트라 (암호 해독)를 통해 ''플리거코르프 X''가 시칠리아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해군성에 전달하지 않았다. 1941년 1월 11일, Ju 87 10대가 ''일러스트리어스''를 공격하다 경순양함 와 를 공격했다. ''사우스햄튼''은 자침되었다. 이후 12일 동안 그랜드 하버 조선소에서 항공모함을 수리했다. 1월 13일, SC 1000 폭탄을 장착한 Ju 87은 실패했고, 1월 14일 Ju 87 44대가 후방 엘리베이터에 명중탄을 기록했다. 1월 18일, 독일군은 제공권 확보를 위해 비행장을 공격했다. 1월 20일, 두 발의 근접탄이 수면 아래 선체를 관통했다. 1월 23일, ''일러스트리어스''는 그랜드 하버를 떠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Luftwaffe''는 항공모함을 침몰시키지 못했지만, 지중해 중부에서 영국 함대를 철수시켰다. 영국과 이탈리아 해군은 타란토와 몰타에서의 경험을 소화했다.[4]

Messerschmitt Bf 109가 지중해 상공에서 Ju 87을 호위하고 있다.


2월, 요하임 뮌체베르크 상급 중위가 지휘하는 제7 전투 비행대 (JG 26)의 메서슈미트 Bf 109 E-7 전투기가 등장하면서 RAF의 손실이 증가했다. 몰타의 연합군 조종사들은 경험이 부족했고 호커 허리케인도 낡았다. JG 26은 4개월 동안 손실이 거의 없었다. 루프트바페는 42대의 항공기 격추를 주장했으며, 그 중 20대는 뮌체베르크의 공로였다. RAF 허리케인은 성능이 저하되었다. 3월 초 5대의 허리케인이 도착했고, 3월 18일에 6대가 더 도착했지만, 5대의 허리케인과 5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3월 1일, 루프트바페의 공격으로 웰링턴 폭격기가 파괴되었다. 왕립 해군 군함과 선더랜드 비행정은 섬을 사용할 수 없었고, 제261비행대와 제274비행대는 압박을 받았다. 2월에 107번, 3월에 105번의 추축국 공격이 있었고, Bf 109 전투기는 지상에서 모든 것을 기총 소사했다. 2월까지 약 14,600명이 자원했고, 배급이 시작되면서 사기가 저하되었으며, 16세부터 56세까지 모든 남성이 징집되었고, 왕립 몰타 포병대가 그랜드 하버를 경비했다.

연합군은 4월에 타리고 호송 전투에서 승리했다. 연합군 해상 세력은 주간에 단 하나의 작은 추축국 호송대를 격침시켰지만, 4월 15일/16일 밤 추축국 선박은 P. J. 맥 사령관의 제14 구축함 전대에 의해 요격되었다. 구축함은 ''Sabaudia''(1,500 톤), ''Aegina''(2,447 톤), ''Adana''(4,205 톤), ''Isetlhon''(3,704 톤) 및 ''Arta''를 격침시켰다. 이탈리아 구축함 ''Tarigo'', ''Lampo'' 및 ''Baleno''는 ''Mohawk''의 손실로 격침되었다.

1941년 4월 8일, 몰타 타격 부대가 결성되어 추축국 호송대를 가로막았다. 루이 마운트배튼 경의 제5 구축함 전대가 합류했다. 순양함 와 ''Gloucester''가 함대를 호위했다. 타격 부대는 성공적이었으나, 5월 21일 크레타 전투에 파견되었다.

이탈리아 폭격기가 시칠리아에서 몰타에 대한 다음 공격을 위해 연료를 보급받고 있다.


몰타 호송대는 추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지브롤터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긴급 보급 호송대(타이거 작전)는 지중해 함대에 대한 증원과 일치했다. SS ''Empire Song''이 기뢰에 맞아 10대의 허리케인과 57대의 전차를 잃었지만, 호송대 ''Tiger''는 295대의 마틸다 II 전차, 크루세이더 전차 및 24,000 톤의 석유를 수송했다. 5월 12일에 완료되었다. I., II., 및 III.; StG 1은 ''Tiger''와 몰타를 상대로 노력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추축국 공군은 제공권을 유지했다. 히틀러는 ''Fliegerkorps X''에 추축국 선박 보호, 연합군 선박 방해, 몰타 무력화를 명령했다. 약 180대의 독일 항공기와 300대의 이탈리아 항공기가 작전을 수행했으며, RAF는 어려움을 겪었다. 5월 중순까지 지중해 중앙은 다시 연합군 선박에 폐쇄되었고, 북아프리카의 DAK는 증원을 받았으며, 수송 물자의 3%만 손실되었다. 4월 11일부터 5월 10일까지 111번의 추축국 공습이 몰타의 군사 시설을 대상으로 수행되었다. 그랜드 하버의 중장비가 파괴되었고, 드라이 도크는 수동으로만 작동할 수 있었다. 대부분 작업장의 효율성은 25% – 50%로 감소했다.

독일의 첫 4개월 작전 동안, ''Luftwaffe''는 몰타에 2,500 톤의 고성능 폭약을 투하했다. 이탈리아 포위 기간 동안 300채만 파괴된 것에 비해 2,000채 이상의 민간 건물이 파괴되었다. HMS ''Illustrious'' 폭격 이후 대부분의 민간인은 시골로 이동했다. 1941년 5월까지 거의 60,000명이 도시를 떠났고, 약 11,000명이 발레타를 떠났다. 1941년 말까지 섬의 교회의 약 70%가 잔해로 변했다. 영국은 군사 목표물 보호에 집중했고 민간인을 위한 쉼터는 거의 없었다. 2,000명의 광부와 석공이 공공 쉼터를 건설하기 위해 모집되었지만, 급여가 낮아 파업 위협을 받았고, 군대 징집 위협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속도를 늦추어 작업 비용을 3배로 늘렸다.

4. 2. 익세스 작전과 HMS 일러스트리어스 폭격

1941년 1월, 영국군은 이탈리아군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익세스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의 일환으로 영국 해군 함선들은 지브롤터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하여 몰타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호위했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해군과 공군의 공격이 있었으나, 영국군은 이를 격퇴하고 수송선단을 몰타에 무사히 도착시켰다.[1]

한편, 독일 공군(독일어: Luftwaffe, 루프트바페)은 일러스트리어스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해 Ju 87 급강하 폭격기를 동원했다. 1941년 1월 10일, Ju 87은 일러스트리어스에 6발의 폭탄을 명중시켜 큰 피해를 입혔다. 특히 갑판 아래의 항공기를 파괴하여 연료와 탄약이 폭발했다. 하지만 주 엔진은 손상되지 않아 일러스트리어스는 몰타로 피신할 수 있었다.[2] 이 공격으로 승무원 126명이 사망하고 91명이 부상을 입었다.[2]

영국 해군은 암호 해독을 통해 독일 공군의 시칠리아 배치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보를 해군성에 전달하지 않아 Ju 87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2] 1941년 1월 11일, 독일 공군은 일러스트리어스를 격침시키기 위해 다시 공격을 시도했으나, 사우스햄튼과 글로스터 경순양함을 공격하여 사우스햄튼을 자침시켰다. 일러스트리어스는 이후 12일 동안 몰타의 그랜드 하버에서 수리를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이동하여 1년 동안 작전에서 제외되었다.[2]

독일 공군은 항공모함을 침몰시키지는 못했지만, 영국 해군에게 지상 기반 공군의 위력을 각인시켰다. 영국 해군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지중해에서의 함대 운용 전략을 수정하게 되었다.[2]

5.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의 제공권 장악 (1941년 2월~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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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합군의 반격 및 증원 (1941년 4월~1941년 10월)

1941년 중반, 몰타 방어군은 허리케인 Mk IIC 전투기를 지원받았다. 해군 항공모함은 4월과 5월에 총 81대의 전투기를 추가로 투입했다. 5월 12일까지 섬에는 50대의 허리케인이 있었고, 5월 21일에는 제249 비행대 RAF가 도착하여 제261 비행대를 인계받았다. 제46 비행대는 6월에 도착하여 제126 비행대로 재편성되었다.[4] 5월에는 47대의 허리케인이 섬으로 투입되었다. 5월부터 12월까지 최초의 브리스톨 블레넘 부대(제113 비행대 RAF 및 제115 비행대)와 브리스톨 보파이터 부대(제252 비행대 및 제272 비행대)가 도착했다.[4]

몰타는 이집트를 지원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717대의 RAF 전투기가 몰타를 통과했으며, 이 중 514대가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8월 초, 몰타는 75대의 전투기와 230문의 대공포를 보유했으며, 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도 방어군에 합류하여 공격 작전을 시작했다.

로이드는 공격 작전 준비 및 영국 공군(RAF) 강화를 위해 수천 명의 몰타인과 3,000명의 영국 육군 병사를 투입하여 비행장 보호를 강화했다. 분산 활주로가 건설되었고, 수리 공장은 조선소와 비행장에서 지하로 이동했다. 루프트바페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으로 지하 대피소도 만들어졌다.

7월 26일, 이탈리아의 정예 부대인 ''데치마 플로틸리아 MAS''의 고속 공격정이 야간 공격을 감행했으나, 영국 레이더 시설에 의해 일찍 감지되었고, 세인트 엘모 요새의 해안 포병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 공격으로 15명이 사망하고 18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부분의 보트가 손실되었다. 공격 도중 세인트 엘모 다리가 붕괴되었으나, 2011년에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면서 복구되었다.

6. 1. 휴 로이드의 부임

1941년 6월 1일, 몰타의 항공 사령관이었던 포스터 메이너드 공군 소장이 휴 로이드 준장으로 교체되었다.[1] 로이드는 몰타에 도착했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세적인 태도를 취할 의지를 보였다. 그는 라스카리스의 지하 본부 사무실 밖에 "싸움 속 개 크기는 개 속 싸움 크기에 달려있다"라는 표지판을 걸었다.[2]

몇 시간 안에 로이드는 비행장과 칼라프라나의 주요 작업장을 시찰했다. 섬의 상황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독일 공군의 활동이 둔화되면서 항공기 수는 증가했지만, 영국 공군은 여전히 60대 미만의 모든 종류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정비는 어려웠다. 예비 부품이나 교체 부품은 거의 구할 수 없었고, 잔해를 뒤지거나 손상되지 않은 항공기를 분해해서 예비 부품을 확보해야 했다. 게다가 비행장은 너무 작았고, 사용할 중장비도 없었으며, 망치나 렌치와 같은 가장 흔한 종류의 도구조차도 거의 구하기가 불가능했다. 모든 연료 보급은 개별 드럼에서 수동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방공호도 부적절하여 장비에 대한 보호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항공기는 노출된 활주로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매력적인 표적이 되었다. 칼라프라나에서는 모든 건물이 서로 가깝게 지어졌고 지상에 위치해 있었다. 몰타의 유일한 엔진 수리 시설은 유일한 시험대 바로 옆에 있었다. 로이드 자신은 "1941년 여름에 칼라프라나에 몇 발의 폭탄이 떨어졌다면 몰타가 공군을 운영할 수 있는 희망은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3]

일반적으로 섬의 방공 시설과 해군 자산 보호가 우선시되었을 것이다. 더 많은 물자를 들여오는 것이 공격을 감행하고 그로 인해 적의 분노를 사는 것보다 더 큰 전략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다사다난했다. 북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군단(DAK)이 이동하고 있었고, 롬멜은 그의 군대를 수에즈 운하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밀고 있었다. 몰타의 영국 공군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롬멜의 보급선을 공격함으로써 롬멜의 진격을 막거나 늦출 수 있었다. 몰타는 영국 공격기가 공격을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기지였다. 로이드의 폭격기와 소규모 함대의 잠수함만이 가을까지 롬멜의 보급선을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이었다. 영국 해군의 수상함대가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몰타로 복귀한 것은 그 이후였다.[4]

6. 2. 연합군 증원

1941년 중반, 제185 비행대와 제126 비행대가 새로 편성되었고, 몰타 방어군은 최초로 캐논으로 무장한 허리케인 Mk IIC를 받았다. 해군 항공모함은 4~5월에 총 81대의 전투기를 추가로 투입했다. 5월 12일까지 섬에는 50대의 허리케인이 있었다. 5월 21일, 제249 비행대 RAF가 도착하여 제261 비행대를 인계받았다. 제46 비행대는 6월에 도착하여 제126 비행대로 재편성되었다.[4] 1941년 5월, 47대의 허리케인이 섬으로 투입되었다. 5월부터 12월까지 최초의 브리스톨 블레넘 부대(제113 비행대 RAF 및 제115 비행대)가 도착하기 시작했고, 브리스톨 보파이터 부대인 제252 비행대와 제272 비행대도 도착했다.[4] 몰타는 이제 이집트를 지원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717대의 RAF 전투기가 몰타를 통과했으며 514대가 북아프리카로 떠났다. 8월 초까지 몰타는 75대의 전투기와 230문의 대공포를 보유했다. 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도 방어군에 합류하여 공격 작전을 시작했다.

섬에서 공격 작전을 준비하고 영국 공군(RAF)을 강화하는 것 외에도 로이드는 많은 문제점을 수정했다. 수천 명의 몰타인과 3,000명의 영국 육군 병사가 비행장을 더 잘 보호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심지어 기술 직원, 사무원 및 비행 승무원도 필요할 때 도왔다. 분산 활주로가 건설되었고, 수리 공장은 조선소와 비행장에서 지하로 이동했다. 곧 루프트바페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하 대피소도 만들어졌다. 7월 26일, 이탈리아의 정예 부대인 ''데치마 플로틸리아 MAS''의 고속 공격정이 야간 공격을 감행했다. 이 부대는 영국 레이더 시설에 의해 일찍 감지되었고, 세인트 엘모 요새의 해안 포병이 이탈리아에 사격을 가했다. 공격으로 15명이 사망하고 18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부분의 보트가 손실되었다. MT 보트가 세인트 엘모 다리를 강타하여 다리가 붕괴되었다. 이 다리는 복구되지 않았고, 2011년에야 새로운 다리가 그 자리에 건설되었다.

7. 연합군 공세 (1941년 6월~1941년 12월)

1941년 여름과 가을, 몰타에서 작전하는 연합군 항공기의 행동 반경과 추축국 해상 수송로


1941년 6월부터 12월까지 연합군은 몰타를 거점으로 공세를 펼쳤다. 독일 공군(Luftwaffe)은 1941년 12월에 다시 대규모로 돌아와 집중 폭격을 재개했고, ''해군''(Kriegsmarine)은 대서양에서 작전하는 독일 U보트의 거의 절반을 몰타 지원을 위해 지중해로 보냈다.

영국 공군(RAF) 방어군은 1940년 6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199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영국 공군의 손실은 공중전에서 최소 90대의 호커 허리케인, 3대의 페어리 풀마, 1대의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였고, 사고로 10대의 허리케인과 1대의 글래디에이터가 더 파괴되었으며, 지상에서 더 많은 수가 파괴되었다. 8대의 마틴 메릴랜드, 2대의 기타 항공기, 3대의 브리스톨 보파이터, 1대의 브리스톨 블레넘 전투기 및 많은 폭격기도 손실되었다. 제185비행대대는 11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가운데 18대를 파괴하고 7대를 격추 가능하며 21대를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손실 중에는 비행대장 피터 "보이" 몰드도 있었다. 실제 추축국 손실은 135대의 폭격기(독일 80대)와 56대의 전투기, 그리고 다수의 기타 항공기였다.

7. 1. 추축국 보급선 공격

연합군은 몰타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1941년 하반기에 추축국 선박의 약 60%를 격침시켰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DAK)은 매달 필요한 약 45359250.00kg의 물자를 받지 못해 십자군 작전에서 영국군의 반격에 저항하기 어려웠다.[1]

1941년 7월, 추축국은 62,276톤의 물자를 상륙시켰는데, 이는 6월의 절반에 불과했다.[2] 9월에는 제830 해군 항공대대가 ''안드레아 그리티''(6,338톤)와 ''피에트로 바르바로''(6,330톤)를 격침시키거나 손상시켰다. 울트라 감청 결과, 3,500톤의 항공 폭탄, 4,000톤의 탄약, 5,000톤의 식량, 탱크 정비소 전체, 25대의 Bf 109 엔진, 엔진용 글리콜 냉각제 25상자가 손실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3] 이달 말 추가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선박의 대공포화로 인한 영국군의 피해는 컸다.[4] 막대한 손실의 원인 중 하나는 정확한 폭격의 어려움이었다. 로이드는 폭격기에게 마스트 높이에서 공격하도록 지시하여 정확도를 높였지만, 이는 이탈리아 대공 방어의 쉬운 표적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손실은 평균 12%였다. 제38비행대대, 제40비행대대, 제104비행대대는 웰링턴 폭격기로 트리폴리의 추축국 호송대를 공격했다. 왕립 해군 잠수함과 협력하여 RAF와 FAA는 6월에서 9월 사이에 108척의 추축국 선박(300,000 grt)을 격침시켰다. 9월에는 파견된 96,000톤의 물자 중 33%가 영국 잠수함과 공중 공격으로 손실되었다.

1941년 11월, Duisburg 호송대 전투에서 모든 선박을 격침시켜 리비아 항구를 봉쇄한 왕립 해군의 K부대가 도착하면서 상황이 더욱 유리해졌다. K부대는 AjaxNeptune 경순양함, K급 구축함 ''Kimberley''와 ''Kingston''으로 구성된 B부대에 의해 증원되었다. RAF와의 합동 작전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11월 동안 추축국의 연료 손실은 79,208톤 중 49,365톤에 달했다. 추축국 선박 격침에 기여한 부대는 제828해군 항공대, 제830해군 항공대, 영국 제10해군 함대, 제69비행대대였으며, 이들은 메릴랜드 항공기로 호송대를 감시했다. 공대 해상(ASV) 레이더를 장착한 RAF 웰링턴의 특별 비행은 K부대 작전에 중요했으며, 울트라 정보는 추축국 호송대 이동에 대한 정보를 몰타에 전달했다. RAF 몰타 사령부는 ASV-웰링턴을 파견하여 바다를 휩쓸고 영국 해군에게 호송대를 지시했다.

11월 13일, 항공모함 HMS ''Ark Royal''이 U보트에 의해 격침되었다. 12일 후, 전함 이 U보트에 의해 격침되었고, 12월 15일에는 경순양함 가 격침되었다. 12월 19일, 이탈리아 호송대를 추격하던 중 순양함 이 기뢰에 의해 격침되었고, 순양함 가 손상되었다. 구축함 도 기뢰에 걸려 에 의해 자침되었다. 이 재앙과 추축국의 몰타 공중 폭격 재개로 1942년 1월에 수상함이 지중해 중부에서 철수했다.

이탈리아의 폭격이 영국군에게 성공적인 것으로 입증되는 동안, 독일 공군(Luftwaffe)은 1941년 12월에 다시 대규모로 돌아와 집중 폭격을 재개했다. ''해군''(Kriegsmarine)은 대서양에서 작전하는 독일 U보트의 거의 절반을 몰타 지원을 위해 지중해로 보냈다. RAF 방어군은 1940년 6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199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제185비행대대는 18대를 파괴하고 7대를 격추 가능하며 21대를 손상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손실 중에는 비행대장 피터 "보이" 몰드도 있었다. 실제 추축국 손실은 135대의 폭격기(독일 80대)와 56대의 전투기, 그리고 다수의 기타 항공기였다.

7. 2. K 부대의 활약

1941년 11월, Duisburg 호송대 전투에서 모든 선박을 격침시켜 리비아 항구를 사실상 봉쇄한 왕립 해군의 K부대가 몰타에 도착하면서 연합군은 유리한 결과를 얻었다. 그 직후 K부대는 AjaxNeptune 경순양함, K급 구축함인 ''Kimberley''와 ''Kingston''이 11월 27일에 몰타에 도착하면서 B부대로 증원되었다. RAF와의 합동 작전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1941년 11월 동안 추축국의 연료 손실은 79,208 톤 중 49,365 톤에 달했다.

추축국 선박 격침에 기여한 부대 중에는 제828해군 항공대, 제830해군 항공대, 영국 제10해군 함대, 제69비행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메릴랜드 항공기로 호송대를 감시했다. 공대 해상(ASV) 레이더를 장착한 RAF 웰링턴의 특별 비행은 K부대 작전에 중요했으며, 울트라 정보는 추축국 호송대 이동에 대한 정보를 몰타에 전달했다. 그런 다음 RAF 몰타 사령부는 ASV-웰링턴을 파견하여 바다를 휩쓸고 영국 해군에게 호송대를 지시했다.

11월 13일, 항공기를 몰타로 수송한 후 지브롤터로 돌아가던 항공모함 HMS ''Ark Royal''이 U보트에 의해 격침되었다. 12일 후, 전함 Barham이 U보트에 의해 격침되었고, 12월 15일에는 경순양함 Galatea가 격침되었다. 12월 19일, 양 부대의 선박들은 이탈리아 호송대를 추격하던 중 기뢰밭에 들어갔다. 기뢰로 인한 피해로 순양함 ''Neptune''이 격침되었고 순양함 Aurora가 손상되었다. 구축함 Kandahar도 ''Neptune''을 지원하려다 기뢰에 걸렸다. ''Kandahar''는 다음 날 구축함 Jaguar에 의해 자침되었다. 이 재앙 이후와 추축국의 몰타 공중 폭격이 재개되면서 1942년 1월에 수상함이 지중해 중부에서 철수했다.

8. 추축국의 재공세와 연합군의 저항 (1941년 12월~1942년 8월)

1941년 12월 1일, 알베르트 케셀링이 최고사령관 남부(''OB Süd'') 직을 맡았고, 1942년 1월에는 제2 항공군단(브루노 뢰르처)이 시칠리아에 도착하면서 독일 공군(Luftwaffe)의 전력이 강화되었다.[2]

북아프리카의 스핏파이어 Vc (trop). 스핏파이어는 1942년 3월 몰타에 도착하여 영국 공군(RAF)의 주요 전투기가 되었다.


윌리엄 도비 중장을 비롯한 영국군 지휘관들은 스핏파이어와 같은 신형 전투기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1942년 3월부터 클럽 런 작전을 통해 항공모함에서 스핏파이어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았다. 1942년 4월 13일 작전 캘린더를 통해 47대의 스핏파이어가 추가로 도착했지만, 독일 공군의 공격으로 많은 수가 파괴되어 4월 5일에는 단 한 대의 스핏파이어만이 섬을 방어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캐나다 출신 전투기 에이스인 조지 버링, "몰타의 기사"로 알려진 그는 1942년 여름 몰타 상공에서 불과 14일 만에 27대의 추축국 항공기를 격추했다.


1942년 3월~4월, 독일 공군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맹렬한 폭격을 가했으며, 이탈리아 공군도 정확한 폭격으로 영국군에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5월 9일 작전 바우어리를 통해 64대의 스핏파이어가 추가로 인도되면서, 영국 공군은 5개 스핏파이어 비행대대를 갖추게 되었다. 5월 10일, 대규모 공중전에서 영국 공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고, 호커 허리케인은 저고도에서, 스핏파이어는 고고도에서 적기를 상대하며 제공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1942년 봄, 몰타에 배치된 추축국 공군은 최대 전력이었지만, 영국 공군의 전력 강화로 5월 말에는 83대로 축소되었다.

7월, 키스 파크가 몰타 주둔 영국 공군 지휘관으로 부임하면서 적기를 요격하여 섬에 도착하기 전에 격파하는 "전진 요격 계획"을 실행했다. 이 전술은 추축국이 주간 공습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Ju 87은 몰타 상공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한편, 몰타는 심각한 물자 부족에 직면했다. 1942년 6월, 영국 해군은 작전 하푼과 작전 비고러스를 통해 몰타에 보급품을 전달하려 했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4] 8월, 작전 페데스탈 호송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절실히 필요한 물자를 몰타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잠수함 또한 몰타에 물자를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8. 1. 케셀링의 부임

1941년 6월까지, 가이슬러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 아프리카 군단(DAK)을 지원하기 위해 리비아로 이동했다. 지중해와 몰타에서 연합군은 전력을 회복했고, 북아프리카의 DAK에 물자를 수송하는 추축국 선박에 대한 공격 작전을 시작했다. 늘어나는 선박 물자 손실은 에르빈 롬멜과 그의 부대를 지원하는 가이슬러의 능력을 저하시켰고, 이는 국방군과 루프트바페 사이에 긴장을 야기했다. 가이슬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은 공군 전력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이탈리아의 항의로 물러섰다. 10월 6일 가이슬러는 손실을 줄이기 위해 트리폴리-나폴리 해상 항로까지 자신의 공군 관할 구역을 확장했다.[2]

10월 2일, 헤르만 괴링 루프트바페 총사령관은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의 프란체스코 프리콜로와 만나 증원군에 대해 논의했다. 괴링의 참모총장 한스 예쇼넥은 Luftflotte 2와 그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을 동부 전선에서 시칠리아로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괴링은 동의했고, 동부에서의 소련 붕괴를 예상하여 16개 그루펜을 시칠리아로 보낼 의향이 있었다. Fliegerkorps II(브루노 뢰르처)는 1942년 1월에 도착했으며, 케셀링은 1941년 12월 1일부터 최고사령관 남부(''OB Süd'')를 맡았다.[2] 한편, 프리콜로는 추축국 호송대를 방어하고 대선 작전을 수행하는 데 실패한 후 11월 14일, ''공군 준장'' 리노 코르소 푸기에로 교체되었다.[2]

8. 2. 스핏파이어의 도착과 제공권 확보



몰타의 총독이자 최고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도비 중장과 영국 해군 및 공군 사령관들은 스핏파이어와 같은 현대적인 항공기를 몰타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동 공군 사령관 아서 테더는 그룹 캡틴 바실 엠브리를 몰타에 보내 상황을 평가하게 했다. 조종사들은 엠브리에게 허리케인은 쓸모없고 스핏파이어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독일군이 고의적으로 Bf 109F를 타고 허리케인 앞에서 비행하여 자국 전투기의 성능 우위를 과시한다고 주장했다. 비행대 대장들은 자국 항공기의 열등함이 사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엠브리는 동의했고 스핏파이어를 보낼 것을 권고했으며, 1942년 3월에 해당 기종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스핏파이어가 도착하기 전, 손실을 줄이기 위한 다른 시도가 있었다. 1942년 2월, 스탠 터너 비행대대장이 249 비행대대를 인수하기 위해 도착했다. 로이드는 매우 경험이 풍부한 전투 지휘관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터너는 유럽 상공에서 더글러스 바더와 함께 비행한 경험으로 부대를 이끌 자격을 갖추었다. 그는 기술적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더 유연한 전술을 도입하여 RAF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느슨한 핑거 포메이션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구식 허리케인은 제132 전투비행단''(JG 53)의 최신형 Bf 109F와 이탈리아 마키 C.202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융커스 Ju 88 폭격기 또한 까다로운 적임이 드러났다. 허리케인은 Bf 109F를 상대로 가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942년 2월의 한 공격에서 3대가 50대의 Bf 109로 구성된 공습을 격파했다.

1942년 3월 7일, 16대의 스핏파이어 Mk V가 작전 스포터의 일환으로 항공모함에서 몰타로 날아갔다. ''이글''의 추가적인 작전으로 9대의 스핏파이어가 인도되었다. 클럽 런 (항공모함을 통한 몰타로의 항공기 인도)은 1942년 동안 더 빈번해졌다. 1942년 4월 13일에는 47대의 항공기 (작전 캘린더)를 추가로 파견하여 한 대를 제외한 모든 항공기가 섬에 도착했다. 스핏파이어가 추축국 항공기에 필적했지만, 3월과 4월에 인도된 항공기 중 다수가 지상과 공중에서 파괴되었고, 그곳에서는 수적으로 열세했다. 4월 5일 동안 섬을 방어할 수 있는 스핏파이어는 단 한 대였고, 이틀 동안은 단 한 대도 없었다. 독일군은 그들의 인도를 지켜보고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1942년 4월 21일까지 27대의 스핏파이어만 여전히 비행 가능했고, 저녁에는 17대로 줄었다. 압도적인 추축국의 폭격은 몰타의 공격적인 해군 및 공군 능력을 실질적으로 약화시켰다. 1942년 3월~4월 무렵에는 ''루프트바페''가 어느 정도의 제공권을 확보했음이 분명했다.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 또한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종종 3~5대의 이탈리아 폭격기가 목표물 위로 매우 낮게 비행하여 RAF의 공격과 지상 포화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폭탄을 투하했다.

연합군은 섬에 스핏파이어 수를 늘리려 했다. 5월 9일, 64대의 스핏파이어를 추가로 인도했다 (작전 바우어리). 몰타는 이제 126 비행대대, 185 비행대대, 249 비행대대, 601 비행대대, 603 비행대대의 5개 스핏파이어 비행대대를 갖추게 되었다. 스핏파이어의 영향이 분명했다. 5월 9일, 이탈리아는 37대의 추축국 손실을 발표했다. 5월 10일, 추축국은 섬 상공에서 벌어진 대규모 공중전에서 65대의 항공기를 파괴하거나 손상시켰다. 허리케인은 낮은 고도에서 추축국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에 집중할 수 있었고, 스핏파이어는 더 높은 상승률로 더 높은 고도에서 적 항공기와 교전했다.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76대의 스핏파이어를 몰타로 수송하는 3차례의 작전을 수행했다. 이러한 전력이 구축되면서, RAF는 어떤 추축국의 공격에도 대처할 수 있는 화력을 갖게 되었다.

1942년 봄 무렵, 섬을 상대로 배치된 추축국 공군은 최대 전력에 도달했다. 방어자들의 주요 적은 제132 전투비행단과 제2/JG 3 '우데트'의 137대의 Bf 109F와 제4 및 제51 ''스토르모''의 80대의 마키 C.202였다. 폭격 부대는 II./''제1 훈련비행단''의 199대 Ju 88, II 및 III./''제77 전투비행단'', I./''제54 전투비행단'', 및 32~40대의 Ju 87를 포함했다. 5월에 RAF 방어의 수적, 기술적 개선은 ''루프트바페''로부터 제공권을 되찾아왔다. 1942년 5월 말까지, 케셀링의 부대는 단지 13대의 사용 가능한 정찰기, 6대의 Bf 110, 30대의 Bf 109 및 34대의 폭격기(대부분 Ju 88)로 축소되었다. 이는 두 달 전 수백 대였던 항공기 총 83대였다.

8. 3. 추축국의 몰타 침공 계획 (헤라클레스 작전)

1938년 무솔리니는 4만 명의 병력으로 몰타를 점령하는 DG10/42 계획을 구상했다. 이탈리아군 상륙용으로 특별 제작된 해상 수송선 80척은 대부분 손실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섬 중앙의 빅토리아 선 공격과 함께 북쪽에서 상륙할 예정이었다. 고조 섬과 코미노 섬에도 2차 상륙이 계획되었다. 이탈리아 해군 전체와 항공기 500대가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보급 부족으로 계획은 실행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1940년 5월~6월 프랑스 전투에서 독일의 성공 이후, 이 계획은 전차를 추가하여 2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프랑스에서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이탈리아에게 몰타 점령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탈리아 정보는 몰타 방어를 과대평가했고 무솔리니는 영국이 평화 협정을 맺으면 침공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솔리니는 또한 프랑코 스페인이 추축국에 가담하여 지브롤터를 점령하고 지중해를 서쪽에서 영국으로부터 봉쇄할 것으로 예상했다.[1]

1942년 4월 29일~30일, 베르히테스가덴 회의에서 아돌프 히틀러베니토 무솔리니는 몰타 섬 침공 계획을 승인했다. 독일군 1개 공수사단과 이탈리아군 1개 공수사단이 독일 장군 쿠르트 슈투덴트의 지휘 하에 공중 강습을 하고, 이어서 ''레지아 마리나''의 호위를 받으며 2~3개 사단이 해상 상륙을 하는 계획이었다. 이탈리아는 케셀링과 합의하여 몰타 침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히틀러는 최종 승인을 내리지 못했다. 첫 번째는 에르빈 롬멜이었다. 케셀링의 맹폭으로 북아프리카 보급선이 확보되면서 롬멜은 다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는 몰타 침공이 필요하지만, 몰타가 아니라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 정복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는 히틀러 자신이었다. 1941년 5월~6월 크레타 전투 이후, 히틀러는 공수 부대의 막대한 손실 때문에 공수 부대를 사용한 섬 침공에 대해 불안해하며 결정을 미뤘다. 케셀링은 불만을 토로했고, 히틀러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는 몇 달 안에 이집트 국경에 다시 도달하면(당시 전투는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보름달이 상륙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할 1942년 7월 또는 8월에 추축국이 침공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케셀링은 좌절했지만, 작전이 폐기되는 대신 연기된 것처럼 보여 안도했다.[2]

8. 4. 호송 작전의 어려움

5월과 6월의 전투 이후, 8월과 9월에는 공습이 대폭 감소했다.[1] 영국 공군(RAF)이 제공권을 되찾았지만, 독일의 압박으로 추축국 호송대가 아프리카 기갑군에 재보급할 수 있었다. 몰타는 추축국에게 호송대에 대한 위협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롬멜은 이제 북아프리카에서 ''루프트바페''의 지원을 받으며 공격 작전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는 가잘라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비르 하케임 전투에서는 덜 성공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싸우기 위해 이집트로 돌아갔다.

몰타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중 압박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섬의 상황은 심각했다. 폭격으로 펌프와 배관이 파괴되어 식량과 물을 비롯한 모든 필수품이 바닥났다. 의류도 구하기 어려웠다. 모든 가축은 도살되었고, 가죽 부족으로 사람들은 커튼과 폐타이어를 사용하여 의류와 신발 밑창을 대체해야 했다. 민간인들은 견디고 있었지만, 기아의 위협은 매우 현실적이었다.[2] 영양 부족과 위생 불량은 질병 확산을 초래했다. 군인의 식량 배급량도 하루 4,000칼로리에서 2,000칼로리로 줄었으며, 영국은 두 차례의 호송 작전을 통해 섬에 물자를 공급할 준비를 했다.[3]

6월, 영국 해군은 작전 하푼을 지브롤터에서, 작전 비고러스를 하이파포트사이드에서 몰타로 보냈다. 이 작전은 개입하려는 추축국 해군을 분산시키기 위해 설계되었다.[4] 로이드 제독은 제601 비행대를 호송대 호위 임무에 투입하려 했다. 그는 이러한 전환을 감당할 수 있었지만, 호송대에 고정된 4대의 스핏파이어만 유지할 수 있었다. 추축국 항공기가 철수하는 동안 공격하면 그들은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조종사 연료가 떨어지면 몰타에 착륙하는 것 외에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조종사들은 함선이 자신들을 구조해주기를 바래야 했다. 서부 호송대는 이탈리아 순양함 Raimondo Montecuccoliit와 Eugenio di Savoiait의 공격을 받은 후 구축함 1척, 상선 3척, 유조선 1척을 잃었고, 다수의 구축함과 추축국 항공기의 지원을 받았다. 폴란드 구축함 Kujawiakpl는 몰타 근처에서 기뢰에 의해 침몰했고, 다른 상선 1척은 손상되었다. 동부 호송대는 영국 함선이 탄약의 20%를 남겨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해상 및 공중 전투 후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함대가 여전히 그 지역에 있었고 요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몰타까지 호송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호송대의 손실은 컸다. 영국 측의 손실에는 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상선 11척이 있었다. 몰타는 브리스톨 보퍼트기를 보내 호송대를 공격하는 이탈리아 함대와 독일 유보트를 공격했다. 그들은 중순양함 Trentoit에 어뢰를 발사하여 침몰시키고 전함 Littorioit에 손상을 입혔다. 서부 호송대의 화물선 2척이 몰타에 도착하여 물자를 전달했고, 총 17척의 선박 중 25,000톤의 물자를 전달한 유일한 선박이 되었다. 또한 16명의 몰타 주둔 조종사가 이 작전에서 사망했다.

8월, 작전 페데스탈 호송대는 포위된 섬에 중요한 구호를 가져왔지만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이 작전은 해상과 공중에서 공격을 받았다. 약 146대의 Ju 88, 72대의 Bf 109, 16대의 Ju 87, 232대의 이탈리아 전투기, 139대의 이탈리아 폭격기(그 중 많은 수가 매우 효과적인 SM.79 어뢰 폭격기였다)가 호송대를 상대로 작전에 참여했다. 보내진 상선 14척 중 9척이 침몰했다. 또한 항공모함 HMS ''이글'', 순양함 1척, 구축함 3척이 이탈리아 해군, ''크리그스마리네'', ''루프트바페''의 합동 공격으로 침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은 생명과 선박에 대한 손실이 컸지만, 절실히 필요한 군수 물자와 물자를 가져오는 데 필수적이었다. 영국 구축함은 ''이글'' 승무원 950명을 구조했다.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는 호송대에 대한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로, 사드코비치 등은 몰타에 대한 공중 공격이 순전히 독일의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사드코비치에 따르면,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이탈리아는 섬에 대해 35,724회, 독일은 37,432회의 출격을 수행했지만, ''루프트바페''의 임무 중 31,391회가 1942년에 완료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몰타에서 영국 전투기 575대를 파괴하고 섬으로 보내진 상선 82척 중 23척을 침몰시킨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영국 공군은 이탈리아가 섬에 대한 더 많은 전투 임무를 수행했고, 1942년 11월에 시칠리아에 독일군 전체 지중해 병력(252대)보다 거의 많은 수의 전투기(184대)를 보유했으며, 더 나은 조종사였던 것으로 보였으며, 63회의 출격당 1대의 항공기를 잃은 반면, 독일 손실률은 42회의 출격당 1대였다.

수상 호송대는 몰타로 가는 유일한 보급선이 아니었다. 영국 잠수함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잠수함 는 수중 보급선으로 개조되었다. 그녀는 T급과 U급 타입만큼 깊이 잠수하거나 빠르게 잠수할 수는 없었지만, 몰타까지 9번의 보급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는 동급의 다른 어떤 선박보다 더 많았다. 잠수함이 대량의 물품을 운반할 수 있는 능력은 포위 작전을 해제하는 데 큰 가치를 발휘했다.

8. 5. 키스 파크의 부임과 전술 변화

스탠 터너 비행대대장은 1942년 2월, 제249 비행대대를 인수하기 위해 몰타에 도착했다. 그는 유럽 상공에서 더글러스 바더와 함께 비행한 경험이 있는 유능한 지휘관이었다.[1] 터너는 기술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핑거 포메이션과 같이 보다 유연한 전술을 도입하여 영국 공군의 손실을 줄이고자 했다.[2] 그러나 당시 구형 호커 허리케인은 제132 전투비행단(JG 53)의 최신형 Bf 109F나 이탈리아의 마키 C.202에 비해 성능이 부족했고, 융커스 Ju 88 폭격기 또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었다.[2]

1942년 3월 7일, 작전 스포터의 일환으로 16대의 스핏파이어 Mk V가 항공모함 HMS 이글에서 몰타로 이동했다.[3] 이후 클럽 런 (항공모함을 통한 몰타로의 항공기 수송)이 더 자주 이루어졌고, 1942년 4월 13일에는 USS 와스프가 작전 캘린더를 통해 47대의 항공기를 추가로 파견했다.[4] 그러나 이 스핏파이어들은 지상과 공중에서 많은 수가 파괴되었고, 4월 5일에는 단 한 대의 스핏파이어만이 섬을 방어할 수 있었으며, 이틀 동안은 한 대도 없었다. 4월 21일까지 27대의 스핏파이어만이 비행 가능했고, 저녁에는 17대로 줄었다.

독일군은 스핏파이어의 도착을 감시하고 맹렬한 공격을 가했으며, 1942년 3월~4월 무렵에는 루프트바페가 제공권을 확보했다.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 또한 맹렬한 공격을 가했으며, 종종 3~5대의 이탈리아 폭격기가 매우 낮게 비행하여 정확하게 폭탄을 투하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군은 영국 잠수함 기지를 공격했고, 기뢰 부설로 인해 잠수함 손실이 증가했다. 1942년 3월 말까지 19척의 잠수함이 손실되었다. 4월에 이탈리아에서 북아프리카로 보내진 150,578톤의 보급품 중 150,389톤이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몰타를 봉쇄하려는 히틀러의 전략이 효과를 보는 듯했다. 알베르트 케셀링은 독일 고위 사령부에 "폭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보고했다. 1942년 3월 20일부터 4월 28일까지 독일군은 섬을 상대로 11,819회의 출격을 했고 6,557톤의 폭탄(발레타에 3,150톤)을 투하했으며, 173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연합군은 스핏파이어 수를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5월 9일, 와스프와 이글은 작전 바우어리를 통해 64대의 스핏파이어를 추가로 인도했다. 몰타는 5개의 스핏파이어 비행대대(126, 185, 249, 601, 603)를 갖추게 되었다. 5월 10일, 추축국은 대규모 공중전에서 6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호커 허리케인은 낮은 고도에서 추축국 폭격기와 급강하 폭격기에 집중하고, 스핏파이어는 더 높은 고도에서 적기와 교전했다.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 이글은 76대의 스핏파이어를 몰타로 수송했다.

1942년 봄, 몰타에 배치된 추축국 공군은 최대 전력이었다. 주요 적은 제132 전투비행단과 제2/JG 3 '우데트'의 137대 Bf 109F와 제4 및 제51 ''스토르모''의 80대 마키 C.202였다. 폭격 부대는 II./제1 훈련비행단의 199대 Ju 88, II 및 III./제77 전투비행단, I./제54 전투비행단, 및 32~40대의 Ju 87을 포함했다. 5월에 영국 공군의 수적, 기술적 개선으로 제공권을 되찾았다. 1942년 5월 말, 케셀링의 부대는 83대로 축소되었다.

7월, 몰타 주둔 영국 공군 지휘관 로이드가 해임되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케셀링과 맞붙었던 키스 파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파크는 적을 요격하여 폭격기가 섬에 도착하기 전에 격파하려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3개 비행대대를 활용하여 첫 번째 비행대대는 호위 전투기를, 두 번째 비행대대는 근접 호위 또는 폭격기를, 세 번째 비행대대는 폭격기를 정면으로 공격하게 했다. 1942년 7월 25일에 공식적으로 발효된 파크의 "전진 요격 계획"은 추축국이 6일 이내에 주간 공습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Ju 87은 몰타 상공에서의 작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케셀링은 전투기 공세를 더 높은 고도로 보냈고, 파크는 전투기에게 약 1859.28m 이상 상승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Bf 109가 스핏파이어에 더 적합한 고도로 강하하도록 유도했다.

9. 연합군의 승리 (1942년 10월~11월)

1942년, 영국 공군(RAF)과 영국 해군은 방어뿐만 아니라 공격 작전도 활발히 수행했다. 이탈리아 상선의 3분의 2가 침몰했는데, 이 중 25%는 영국 잠수함, 37%는 연합군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에게는 보급품의 약 절반과 석유의 3분의 2가 차단되었다.[1]

조지 심슨의 제10 잠수함 기지는 알베르트 케셀링이 기지에 상당한 공격을 가했던 1942년 5월~7월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순찰했다. 몰타에서 작전을 수행한 이안 맥고치(HMS 스플렌디드 함장),[2] 휴 "루퍼스" 매켄지, 데이비드 웽클린[3] 사령관 등이 특히 성공적이었다. 레녹스 네이피어 중령은 독일 유조선 ''빌헬름스부르크''(7,020톤)를 격침시켰는데, 이 배의 손실로 아돌프 히틀러카를 되니츠에게 직접 불만을 제기하며, ''크리그스마린''(독일 해군)을 영국 해군과 비교하며 비판했다.[4]

영국 잠수함은 추축군 호송대와 싸울 때 강력한 무기 중 하나임이 입증되었다. 영국 U급 잠수함만 침몰시킨 톤수는 650,000톤으로 추정되며, 400,000톤이 추가로 손상되었다. 제10 기지가 발사한 어뢰는 1,289발이었으며 명중률은 30%였다. DAK의 참모총장 프리츠 바이에를라인은 "잠수함의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에 도달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패트릭 깁스 공군 소령과 제39 비행대는 보퍼트기를 이용하여 수송선을 공격했고, 9월에는 롬멜의 보급선을 공격하여 압박을 가중시켰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를 앞두고 롬멜은 OKW에 공격 작전을 위한 탄약과 연료가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울트라는 추축군 통신을 가로챘고, 깁스의 보퍼트기는 선박 2척을 침몰시켰고, 심슨의 잠수함은 세 번째 선박을 침몰시켰다. 롬멜은 또 다른 유조선 ''산 안드레아스''가 알람 엘 할파 전투에 필요한 3198ton의 연료를 공급해 주기를 바랐으나, 깁스가 이끄는 공격으로 이 배는 침몰했다. 파견된 9척의 배 중 5척이 몰타 군에 의해 침몰했다. 9월 1일에 롬멜은 후퇴했다. 케셀링은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연료를 넘겨주었지만, 이는 독일 공군 부대가 지상군을 보호할 수단을 빼앗아 영국군의 제공권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8월, 몰타의 공격 부대는 이집트 진격을 강행하려는 추축군의 어려움에 기여했다. 그 달에 보급품의 33%와 연료의 41%가 손실되었다. 1942년 9월, 롬멜은 공세 작전을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50,000톤의 보급품 중 24%만 받았다. 9월 동안 연합군은 해상에서 33,939톤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식량과 물 부족은 추축군 병사들 사이에서 10%의 발병률을 야기했다. 1942년 10월 첫째 주, 영국 공중-잠수함 공격으로 북아프리카로 연료가 도착하지 못했다. 연료 수송선 2척이 침몰했고, 다른 한 척은 승무원이 배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물을 잃었다. 10월 23일,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울트라 정보는 절박한 추축군의 연료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10월 25일, 연료와 탄약을 싣고 가는 유조선 3척과 화물선 1척이 강력한 공중 및 해상 호위를 받으며 파견되었고, 롬멜이 엘 알라메인에 있는 동안 그에게 도달할 마지막 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울트라 정보는 계획된 호송 경로를 가로챘고, 몰타의 공군 부대에 경고했다. 세 척의 연료 수송선은 10월 28일까지 침몰했다. 영국군은 보우파이터 1대, 보퍼트 2대, 블레넘 3대(6대 중), 웰링턴 1대를 잃었다. 롬멜은 9월에 손실된 20%에서 급증한 10월에 보급품의 44%를 잃었다.

1942년 8월까지 몰타를 방어하기 위해 163대의 스핏파이어가 준비되었으며 이 중 120대가 운용 가능했다.[1] 8월 11일과 17일, 그리고 10월 24일에 각각 작전 벨로우스, 작전 바리톤, 작전 트레인을 통해 HMS ''Furious''는 스핏파이어 85대를 추가로 몰타에 수송했다.[2]

연합군 호송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달은 폭격과 식량 부족이 겹쳤다. 몰타가 추축국 보급선에 위협을 가하자, 루프트바페(Luftwaffe)는 1942년 10월에 몰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북아프리카에서 결정적인 전투(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한 케셀링시칠리아에 ''Fliegerkorps II''를 조직하여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다.[3] 10월 11일, 방어군은 스핏파이어 Mk VB/C로 대량 무장했다. 17일 동안 ''Luftwaffe''는 Ju 88 34대와 Bf 109 12대가 파괴되고 18대가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다. 영국 공군의 손실은 스핏파이어 23대가 격추되고 20대가 불시착했다. 영국군은 조종사 12명이 사망했다.[4] 10월 16일, 케셀링은 방어군이 너무 강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공세를 중단했다. 북아프리카의 상황은 독일 공군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10월 공세는 ''Luftwaffe''가 몰타를 상대로 벌인 마지막 주요 작전이었다.

9. 1. 연합군의 공세 강화

영국 해군 잠수함 HMS 스플렌디드. 1942년 8월 18일 취역 10일 후 촬영.


1942년, 영국 공군(RAF)과 영국 해군은 방어 작전뿐만 아니라 공격 작전도 활발히 수행했다. 이탈리아 상선의 3분의 2가 침몰했는데, 이 중 25%는 영국 잠수함, 37%는 연합군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추축군에게는 보급품의 약 절반과 석유의 3분의 2가 차단되었다.[1]

조지 심슨의 제10 잠수함 기지는 1942년 5월~7월을 제외하고는 끊임없이 순찰했다. 이 기간 동안 알베르트 케셀링은 기지에 상당한 공격을 가했다. 대부분의 잠수함이 느린 U급이었지만, S급 및 T급 함정의 지원을 받아 기뢰를 투하하며 활약했다. 몰타에서 작전을 수행한 영국 잠수함 지휘관들은 에이스가 되었다. 이안 맥고치 (HMS 스플렌디드 함장),[2] 휴 "루퍼스" 매켄지, 데이비드 웽클린[3] 사령관이 특히 성공적이었다. 레녹스 네이피어 중령은 독일 유조선 ''빌헬름스부르크''(7,020톤)를 격침시켰다. 이 유조선은 루마니아에서 석유를 수출하는 몇 안 되는 독일 유조선 중 하나였다. 이 배의 손실로 아돌프 히틀러카를 되니츠에게 직접 불만을 제기하며, ''크리그스마린''(독일 해군)을 영국 해군과 비교하며 비판했다. 되니츠는 호송대를 보호할 자원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 배의 호위는 연합군이 대서양에서 대규모 호송대에 제공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컸다.[4]

잠수함은 추축군 호송대와 싸울 때 영국 군수품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임이 입증되었다. 심슨과 1943년 1월 23일 그를 대신한 조지 필립스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 U급 잠수함만 침몰시킨 톤수는 650,000톤으로 추정되며, 400,000톤이 추가로 손상되었다. HMS ''탈보트'' 기지는 당시 1,790발의 어뢰를 공급했다. 제10 기지가 발사한 어뢰는 1,289발이었으며 명중률은 30%였다. DAK의 참모총장 프리츠 바이에를라인은 "잠수함의 활약이 없었다면 우리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에 도달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패트릭 깁스 공군 소령과 제39 비행대는 보퍼트기를 이용하여 수송선을 공격했고, 9월에는 롬멜의 보급선을 공격하여 압박을 가중시켰다. 롬멜의 입장은 위태로웠다. 북아프리카의 군대는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는 반면, 영국군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를 앞두고 이집트의 방어선을 강화했다. 롬멜은 OKW에 공격 작전을 위한 탄약과 연료가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추축군은 호송대를 조직하여 어려움을 덜고자 했다. 울트라는 추축군 통신을 가로챘고, 제69 비행대의 웰링턴기는 추축군 작전이 실제임을 확인했다. 깁스의 보퍼트기는 선박 2척을 침몰시켰고, 심슨의 잠수함은 세 번째 선박을 침몰시켰다. 롬멜은 또 다른 유조선 ''산 안드레아스''가 알람 엘 할파 전투에 필요한 3198ton의 연료를 공급해 주기를 바랐으나, 깁스가 이끄는 공격으로 이 배는 침몰했다. 파견된 9척의 배 중 5척이 몰타 군에 의해 침몰했다. 보퍼트기는 이제 거의 다 소진된 추축군 연료 공급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9월 1일에 롬멜은 후퇴를 강요당했다. 케셀링은 ''루프트바페''(독일 공군) 연료를 넘겨주었지만, 이는 단순히 독일 공군 부대가 지상군을 보호할 수단을 빼앗아 영국군의 제공권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8월, 몰타의 공격 부대는 이집트 진격을 강행하려는 추축군의 어려움에 기여했다. 그 달에 보급품의 33%와 연료의 41%가 손실되었다. 1942년 9월, 롬멜은 공세 작전을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50,000톤의 보급품 중 24%만 받았다. 9월 동안 연합군은 해상에서 33,939톤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이러한 보급품의 대부분은 전선에서 수 킬로미터 뒤에 있는 트리폴리를 통해 운송되어야 했다. 식량과 물의 부족은 추축군 병사들 사이에서 10%의 발병률을 야기했다. 영국 공중-잠수함 공격으로 1942년 10월 첫째 주에 북아프리카로 연료가 도착하지 못했다. 연료 수송선 2척이 침몰했고, 다른 한 척은 승무원이 배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물을 잃었다. 1942년 10월 23일에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울트라 정보는 절박한 추축군의 연료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10월 25일, 연료와 탄약을 싣고 가는 유조선 3척과 화물선 1척이 강력한 공중 및 해상 호위를 받으며 파견되었고, 롬멜이 엘 알라메인에 있는 동안 그에게 도달할 마지막 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울트라 정보는 계획된 호송 경로를 가로챘고, 몰타의 공군 부대에 경고했다. 세 척의 연료 수송선은 10월 28일까지 침몰했다. 영국군은 보우파이터 1대, 보퍼트 2대, 블레넘 3대(6대 중), 웰링턴 1대를 잃었다. 롬멜은 9월에 손실된 20%에서 급증한 10월에 보급품의 44%를 잃었다.

9. 2. 포위 해제

1942년 8월까지 몰타를 방어하기 위해 163대의 스핏파이어가 준비되었으며 이 중 120대가 운용 가능했다.[1] 1942년 8월 11일과 17일, 그리고 10월 24일에 각각 작전 벨로우스, 작전 바리톤, 작전 트레인을 통해 HMS ''Furious''는 스핏파이어 85대를 추가로 몰타에 수송했다.[2] 스핏파이어는 종종 5시간 30분 비행을 해야 했는데, 170갤런 페리 탱크를 사용하여 이를 달성했다. 페리 탱크는 동체 후방의 29갤런 탱크와 결합되어 총 탱크 용량을 284갤런으로 늘렸다.[2]

연합군 호송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달은 다른 달만큼이나 끔찍했고, 폭격과 식량 부족이 겹쳤다. 몰타가 추축국 보급선에 위협을 가하자, 루프트바페(Luftwaffe)는 1942년 10월에 몰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북아프리카에서 결정적인 전투(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한 케셀링시칠리아에 ''Fliegerkorps II''를 조직하여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다.[3] 10월 11일, 방어군은 스핏파이어 Mk VB/C로 대량 무장했다. 17일 동안 ''Luftwaffe''는 Ju 88 34대와 Bf 109 12대가 파괴되고 18대가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다. 영국 공군의 손실은 스핏파이어 23대가 격추되고 20대가 불시착했다. 영국군은 조종사 12명이 사망했다.[4] 10월 16일, 케셀링은 방어군이 너무 강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공세를 중단했다. 북아프리카의 상황은 독일 공군의 지원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10월 공세는 ''Luftwaffe''가 몰타를 상대로 벌인 마지막 주요 작전이었다.

10. 결과 및 영향

추축국 공군은 막대한 손실로 인해 전력이 고갈되었다. 그들은 전선에 필요한 항공 지원을 제공할 수 없었다. 11월까지 섬의 상황은 여전히 긴박했지만, 파크(Park)의 공중전 승리 후 곧 전선에서 주요 성공 소식이 뒤따랐다. 북아프리카의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군은 육상에서 돌파구를 마련했고, 11월 5일까지 서쪽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11월 8일에는 비시 프랑스모로코알제리에 연합군이 상륙한 횃불 작전 소식이 몰타에 전해졌다. 약 11일 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소련의 반격 소식은 사기를 더욱 높였다. 11월 20일, 알렉산드리아에서 몰타로 향하는 호송대(스톤에이지 작전)가 거의 피해 없이 도착하면서 북아프리카에서의 성공이 몰타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분명해졌다. 이 호송대는 2년간의 몰타 포위전이 종결되었음을 알렸다. 12월 6일, 또 다른 보급 호송대인 포트컬리스 작전이 어떠한 손실도 없이 몰타에 도착했다. 그 후, 선박들은 호송대에 합류하지 않고 몰타로 항해했다. 북아프리카 비행장 점령과 섬까지의 전 구간에서 제공되는 항공 보호 덕분에 선박들은 35000ton의 물품을 전달할 수 있었다. 12월 초에는 55000ton이 추가로 도착했다. 몰타에 대한 마지막 공습은 1943년 7월 20일에 발생했으며, 이는 1940년 6월 11일 이후 3,340번째 경보였다.

11. 대중 문화


  • 1942년 영국 정부는 몰타 국민들의 끈기와 조지 십자 훈장 수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쟁 선전 단편 영화 ''몰타 G.C.''(Malta G.C.)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이 영화에는 폭격 장면과 그 참상이 담겨있다.
  • 1953년 영국 영화 ''몰타 스토리''(Malta Story)는 포위 공격 기간 동안 몰타에 있던 사진 정찰 RAF 조종사의 가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실제 영상과 실제 항공기를 사용한 재현 장면이 등장한다.
  • 니컬러스 몬사라트(Nicholas Monsarrat)의 소설 《몰타의 카피란》(The Kappillan of Malta, 1973)에서는 가상의 가톨릭 사제 살바토레 신부의 경험을 통해 1940년 6월부터 1942년 8월까지의 몰타 공방전을 묘사하였다.[4] 이 소설에는 몰타 역사의 다른 시대의 짧은 이야기들이 삽입되어 있다.
  • 토마스 핀천(Thomas Pynchon)의 1963년 데뷔 소설 《V.》에는 몰타 공방전 당시의 삶을 다룬 챕터가 있다.
  • 크리스 클리브(Chris Cleave)는 2016년 소설 《모두가 용감하면 용서받는다》(Everyone Brave is Forgiven)에서 왕립 포병대에 복무한 그의 할아버지 데이비드 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 장교들의 시선으로 공방전의 비참함과 공포를 그렸다.

참조

[1] 웹사이트 HMS Coral https://uboat.net/al[...]
[2] 서적 The Axis Air Battle for Mediterranean Supremacy Bloomsbury Publishing 2018
[3] 뉴스 War Damage Commission decision deemed unjust https://timesofmalta[...] 2003-10-16
[4] 간행물 The Kappillan of Malta https://www.kirkusre[...] Kirkus Reviews 197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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