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관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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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관사림》은 당나라 허경종이 편찬한, 한(漢)에서 당 초기에 이르는 시문을 모은 중국의 한시문 총집이다. 현경 3년(658년)에 1000권으로 편찬되었으나, 오대 십국 시대를 거치며 거의 소실되었다. 청나라 말기에 일본에서 역수입되어 중국에 다시 알려졌고, 1969년에는 정지원 소장의 홍인 14년(823년) 초본을 중심으로 27권과 권수 불명의 잔권 3종을 영인한 《문관사림 영홍인본》이 간행되었다. 현재는 나국위가 정리한 권수 목록을 통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문관사림》은 당나라 고종 현경 3년(658년)에 허경종 등이 편찬하여 황제에게 바친 총 1000권 분량의 방대한 유서(類書)이다.[2] 편찬 당시에는 《문관사림책》 20권과 《문관사림문인전》 100권 같은 관련 저작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동아시아 문화 교류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신라 신문왕 6년(686년)에는 측천무후의 명으로 교훈이 될 만한 내용 50권을 발췌하여 신라에 보내주기도 했으며,[3] 일본에도 견당사를 통해 전해져 9세기 말에는 완질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2. 역사
현존하는 일부를 통해 볼 때, 《문관사림》은 《문선》의 체제를 따르면서 선진 시대부터 당나라 초기까지의 다양한 시문을 수록하여, 후대 송나라 때 편찬된 《문원영화》의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10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5대 10국 시대의 혼란 등으로 인해 원본은 일찍이 소실되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이미 대부분 흩어져 일부 잔권만이 기록에 남아 있을 뿐이었고, 심지어 고려에 송나라 황제가 직접 찾아봐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희귀해졌다.
오랫동안 잊혔던 《문관사림》은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일본에 남아있던 잔권들이 발견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1800년 林述齋|하야시 슛사이일본어가 일본 내 잔존 한적을 모아 펴낸 총서에 일부가 수록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楊守敬|양수경중국어 등이 일본에서 추가로 잔권을 발굴하여 중국에 소개하였다. 20세기 들어서도 일본 사찰 등지에 보관되어 있던 필사본들이 추가로 발견되었으며, 특히 弘仁|고닌일본어 연간에 필사된 고닌본은 현존하는 《문관사림》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발견과 연구를 통해 현재는 약 30권 정도의 분량이 전해지고 있다.
2. 1. 편찬 및 전래
《당회요》(唐會要)에 따르면, 현경 3년(658년) 10월 2일에 허경종이 편수한 《문관사림》 1천 권을 황제에게 바쳤다고 한다.[2] 이 책은 총 100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예문지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현위(崔玄暐)가 주석을 단 《문관사림책》(文館詞林策) 20권과 《문관사림문인전》(文館詞林文人傳) 100권도 별도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관사림》은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당회요》 및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수공 2년이자 신라 신문왕 6년인 686년에 신라가 당나라에 문장 자료를 요청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측천무후가 담당 관청에 명하여 《문관사림》에서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발췌하고 필사하여 총 50권으로 만들어 예기 1부와 함께 신라에 보내주었다.[3] 이는 당시 활발했던 한중 문화 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일본에는 견당사를 통해 전해졌으며, 간표 3년(891년)에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가 편찬한 일본 내 현존 서적 목록인 《일본국견재서목록》(日本國見在書目錄)에도 《문관사림》 전질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 일본에 완질이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문관사림》의 일부를 통해 그 체제를 살펴보면, 대체로 《문선》의 분류 방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권691 칙류편수(勅類篇首)에는 각 분류 앞에 편찬의 취지를 밝힌 소서(小序)를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록된 시문은 가장 오래된 것이 선진 시대의 작품부터 당나라 초기까지 아우르고 있어, 이후 송나라 시대에 편찬된 《문원영화》(文苑英華)의 선구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방대한 분량의 《문관사림》은 오대 십국 시대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송 시대의 서적 목록인 《숭문총목》에는 "《문관사림》 탄사 4권, 허경종 편"이라는 기록만 남아 있으며, 《송사》 예문지에도 허경종의 《문관사림》 시 1권만이 언급될 뿐이다. 이를 통해 송나라 시대에는 이미 원본 대부분이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소실된 《문관사림》의 일부는 일본에 남아 전해졌고, 이것이 다시 중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청나라 말기의 학자 임술재가 엮은 《일존총서》에 일본에서 전해지던 《문관사림》 잔권 4권이 포함되면서 중국 학계에 다시 소개되었다. 이후 양수경은 《일존총서》에 실리지 않은 잔권 14권을 추가로 일본에서 찾아내어 자신이 편찬한 《고일총서》에 수록했다. 1969년에는 《문관사림 영홍인본》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정지원(丁字元)이 소장하고 있던 홍인 14년(823년)의 필사본을 중심으로 총 27권과 권수가 확인되지 않은 잔권 3종을 영인한 것이다.
2. 2. 소실과 재발견
《문관사림》은 총 10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으나, 사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당이 멸망한 뒤 5대 10국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송(宋) 초기에는 대부분 흩어져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북송 때 편찬된 《숭문총목》(崇文總目) 권5에는 허경종이 편찬한 《문관사림탄사》(文館詞林彈事) 4권만이 기록되어 있으며, 《송사》(宋史) 예문지 총집류에도 《문관사림시》(文館詞林詩) 1권만이 언급될 뿐이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기록에 따르면, 선종 8년(1091년)에 진봉사(進奉使)로 송나라에 갔던 이자(李資) 등이 귀국할 때, 북송 황제가 관반(館伴)을 통해 송나라에서 찾기 어려워진 서적들을 고려에서 찾아봐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목록에 《문관사림》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송나라에서도 《문관사림》이 이미 희귀해졌음을 보여준다. 이후 남송(南宋) 시대의 《중여관각서목》(中興館閣書目) 이후로는 공적인 기록이나 사적인 소장 목록에서 《문관사림》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문관사림》은 청(清) 말기에 이르러 일본에 남아있던 일부가 중국으로 다시 전해지면서 재발견되었다. 에도 시대인 간세이(寬政) 10년(1800년)에 林述齋|하야시 슛사이일본어는 중국에서는 사라졌지만 일본에는 남아있는 한적(漢籍)들을 모아 총서로 엮었는데, 이때 《문관사림》 4권(권662, 권664, 권668, 권695)이 佚存叢書|일존총서일본어에 수록되었다. 이 총서가 간행되면서 중국에도 《문관사림》의 일부가 일본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 절강순무(浙江巡撫)였던 阮元訪|완원방중국어은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지 않은 책들을 구해 궁중에 바치면서 별도로 소장하게 했는데, 이때 《문관사림》에 대한 고증 작업도 이루어져 그 결과가 《揅經室外集|연경원외집중국어》 권2에 실렸다. 이후 함풍(咸豐) 3년(1853년)에는 伍崇曜|오숭요중국어가 이를 참조하여 번각한 판본이 《粵雅堂叢書|월아당총서중국어》 제12집에 실리면서 《문관사림》은 중국 학계에 다시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광서(光緒) 10년(1880년)에는 주일공사였던 楊守敬|양수경중국어이 何如璋|하여장중국어의 명을 받아 일본에서 수집한 중국의 고서 26종 200권을 모아 《古逸叢書|고일총서중국어》를 간행했다. 여기에는 《일존총서》에 실리지 않았던 《문관사림》의 새로운 14권 (권156, 권157, 권158(전반부 누락), 권347(전반부 누락), 권452, 권453, 권457, 권459(일부 누락), 권665(중반부 누락), 권666(중, 후반부 누락), 권667, 권670(후반부 누락), 권691(일부 누락), 권699)이 포함되었다. 《고일총서》 간행 이후, 일본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의 서기관 町田久成|마치다 히사나리일본어가 아사쿠사 문고(淺草文庫) 소장본 중에서 《고일총서》에도 누락된 권152, 권346, 권414, 권669와 권665의 다른 부분을 찾아내 양수경에게 기증했다. 이 5권과 권158의 누락 부분 등은 양수경의 친척인 楊葆初|양보초중국어에 의해 광서 19년(1893년)에 간행되었다.
중화민국 초기, 일본 교토(京都)에 거주하던 董康|동강중국어은 大覺寺|다이가쿠지일본어에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문관사림》의 초본을 추가로 발견하여 중국으로 가져왔다. 이 초본은 1916년 張鈞衡|장균형중국어이 하야시 슛사이, 양수경, 마치다 히사나리 등이 찾아낸 판본들과 합쳐 새롭게 간행되었다. 이 합본에는 새로 발견된 권160, 권348(일부분만 남은 권), 권664(후반부만), 권158의 잔시(殘詩) 4수, 그리고 권수가 확실하지 않은 잔권 2권이 더해져 총 25권과 잔권 4권의 규모가 되었다. 동강은 1926년에서 1927년 사이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고야 산(高野山)의 正智院|정지원일본어이라는 사찰에 소장되어 있던 고닌(弘仁) 시대의 사본(고닌본) 19권을 발견하여 영인본을 간행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고닌본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49년, 일본 궁내청(宮內廳)의 서릉부(書陵部)에서 권668의 전반부를 영인하여 간행했다. 이후 일본고전연구회(日本古典研究會)에서 1969년에 다시 출판했는데, 이는 일본 각지의 문고와 사찰 등에 소장된 고닌본 영인본과 모사본 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판본들을 선별한 것이다. 총 27권에 권수가 분명하지 않은 잔권 3권을 합쳐 모두 3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현재 전하는 《문관사림》 판본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판본은 해외 유통에 제한이 있었으나, 중국의 학자 羅國威|나국위중국어가 이 고닌본 영인본을 바탕으로 여러 판본을 비교 검토하고 교감하여 《日藏弘仁本文館詞林校證|일본 소장 고닌본 문관사림 교증중국어》(전 30권)이라는 제목으로 2001년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간행하였다.
아래는 《문관사림》 잔권의 주요 발견 및 간행 과정을 정리한 표이다.
발견/간행자 | 시기 | 발견/수록 내용 | 비고 (수록 총서 등) |
---|---|---|---|
林述齋|하야시 슛사이일본어 | 1800년 (간세이 10년) | 권662, 권664, 권668, 권695 (4권) | 佚存叢書|일존총서일본어 |
伍崇曜|오숭요중국어 | 1853년 (함풍 3년) | 하야시 슛사이 발견본 번각 | 粵雅堂叢書|월아당총서중국어 제12집 |
楊守敬|양수경중국어 | 1880년 (광서 10년) | 권156, 권157, 권158(전반부 X), 권347(전반부 X), 권452, 권453, 권457, 권459(일부 X), 권665(중반부 X), 권666(중, 후반부 X), 권667, 권670(후반부 X), 권691(일부 X), 권699 (14권) | 古逸叢書|고일총서중국어 |
町田久成|마치다 히사나리일본어 / 楊葆初|양보초중국어 | 1893년 (광서 19년) | 권152, 권346, 권414, 권669, 권665 (5권) + 권158 (보충) | 마치다 히사나리가 아사쿠사 문고에서 발견, 양수경에게 기증 후 양보초가 간행 |
董康|동강중국어 / 張鈞衡|장균형중국어 | 1916년 | 권160, 권348(잔권), 권664(후반부), 권158의 잔시(殘詩) 4수, 권수 불명 2권 (기존 발견본과 합본) | 동강이 교토 다이가쿠지에서 발견, 장균형이 합본 간행 (총 25권 + 잔권 4권) |
董康|동강중국어 | 1926년-1927년 | 고야 산 정지원 소장 고닌본 19권 발견 및 영인 | 영인본은 널리 퍼지지 못함 |
일본 궁내청 서릉부 | 1949년 | 고닌본 권668 (전반부) 영인 | |
일본고전연구회 | 1969년 | 고닌본 선별 영인 (27권 + 권수 불명 3권 = 총 30권) | 현존 최고 판본으로 평가 |
羅國威|나국위중국어 | 2001년 | 일본 소장 고닌본 교감 및 정리 (총 30권) | 日藏弘仁本文館詞林校證|일본 소장 고닌본 문관사림 교증중국어 (중화서국 간행) |
2. 3. 현대의 판본
《문관사림》은 본래 10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으나, 당나라 멸망 이후의 혼란과 5대 10국 시대의 전란을 거치면서 원본과 사본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송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북송 시대의 서목인 《숭문총목》(崇文總目) 권제5에는 허경종이 편찬한 《문관사림탄사》(文館詞林彈事) 4권만이 기재되어 있고, 《송사》(宋史) 예문지 총집류에는 《문관사림시》(文館詞林詩) 1권만이 보일 뿐이다. 고려에서는 1091년(선종 8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이자(李資) 등이 송 황제의 칙명을 받아 고려에서 《문관사림》을 찾으려 했으나 이미 송나라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남송 시대의 《중여관각서목》(中興館閣書目) 이후로는 공사 기록에서 소장 기록을 찾을 수 없다.소실되었던 《문관사림》은 청 말기에 일본에 남아있던 일부 판본이 중국으로 역수입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에도 시대인 1800년(간세이 10년), 일본의 학자 林述齋|하야시 슛사이일본어가 중국에서는 사라졌지만 일본에 남아있던 한적(漢籍)을 모아 총서를 편찬했는데, 이때 《문관사림》 4권(권662, 권664, 권668, 권695)이 수록되었다. 이 총서는 逸存叢書|일존총서일본어로 추정되며, 무역상을 통해 중국에도 알려졌다. 당시 절강순무(浙江巡撫)였던 阮元訪|완원방중국어은 이 책을 구해 궁중에 바치고 고증하였으며, 그 내용은 《揅經室外集|연경원외집중국어》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이후 1853년(함풍 3년)에는 伍崇曜|오숭요중국어가 이를 참조하여 번각한 판본을 《粵雅堂叢書|월아당총서중국어》 제12집에 실으면서 《문관사림》이 중국에 다시 소개될 수 있었다.
1880년(광서 10년), 당시 주일공사였던 楊守敬|양수경중국어은 何如璋|하여장중국어의 명으로 일본에서 모은 중국 서적 26종 200권을 《古逸叢書|고일총서중국어》로 간행했다. 여기에는 《문관사림》의 잔권 14권(권156, 권157, 권158(전반부 빠짐), 권347(전반부 빠짐), 권452, 권453, 권457, 권459(빠진 부분 있음), 권665(중반부 빠짐), 권666(중, 후반부 빠짐), 권667, 권670(후반부 빠짐), 권691(빠진 부분 있음), 권699)이 수록되었다. 《고일총서》 간행 이후, 일본 帝室博物館|제실박물관일본어의 서기관 町田久成|마치다 히사나리일본어가 淺草文庫|아사쿠사 문고일본어에 소장되어 있던 《고일총서》에도 누락된 권152, 권346, 권414, 권669와 권665를 찾아내 양수경에게 기증했다. 이 5권과 권158은 1893년(광서 19년) 양수경의 친척 楊葆初|양보초중국어에 의해 간행되었다.
중화민국 초기, 교토에 거주하던 董康|동강중국어이 大覺寺|다이가쿠지일본어에서 소장하고 있던, 기존 총서들에도 실리지 않은 《문관사림》 초본을 추가로 발견하여 중국으로 가져왔다. 1916년, 張鈞衡|장균형중국어은 앞서 하야시 슛사이, 양수경, 마치다 히사나리가 정리한 간본들과 동강이 발견한 초본을 합쳐 간행했다. 이 과정에서 권160, 권348(잔권), 권664(후반부만), 권158의 잔시(殘詩) 4수, 그리고 권수가 확실하지 않은 잔권 2권이 더해져, 총 25권과 잔권 4권 규모가 되었다. 동강은 1926년에서 1927년 사이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고야 산의 正智院|정지원일본어에 소장되어 있던 고닌(弘仁) 시대 사본(고닌본) 19권을 얻어 영인본을 펴냈으나,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고닌본은 현존하는 《문관사림》 판본 중 가장 중요하다. 일본 패전 후인 1949년,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고닌본 권668(전반부)을 영인하여 펴냈으며(해설: 간다 키이치로), 1969년에는 日本古典研究會|일본고전연구회일본어에서 정지원 소장의 홍인 14년(823년) 초본을 중심으로 일본 각지의 문고와 사원에 소장된 고닌본 영인본과 모사본 중 상태가 좋은 것을 가려 총 30권(정식 권 27권 및 권수 불명 잔권 3종)으로 영인하여 출판했다(해제: 아베 류이치, 오자키 야스시). 이 판본은 현존하는 가장 좋은 판본으로 인정받는다. 중국의 학자 羅國威|뤄궈웨이중국어는 이 영인본을 참조하여 여러 판본을 점검하고 교감하여 《日藏弘仁本文館詞林校證|일장홍인본 문관사림교증중국어》(전 30권)이라는 제목으로 2001년 中華書局|중화서국중국어에서 간행하였다(ISBN 7-101-02413-0).
3. 내용 및 구성
《당회요》(唐會要)에 따르면, 당 고종 현경 3년 10월 2일(659년)에 허경종이 편찬한 《문관사림》 1천 권을 황제에게 바쳤다고 한다.[2] 이 책은 총 100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구당서》와 《신당서》의 예문지에도 《문관사림》 1천 권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현위(崔玄暐)가 주석을 단 《문관사림책》(文館詞林策) 20권과 《문관사림문인전》(文館詞林文人傳) 100권도 별도로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관사림》은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당회요》 및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수공 2년(686년, 신라 신문왕 6년)에 신라가 예기(禮記) 1부와 함께 문장(文章)을 요청하자, 측천무후는 담당 관청에 명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 및 《문관사림》에서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발췌하여 필사하게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50권의 책을 신라에 보내주었다.[3] 일본에는 견당사를 통해 전해졌으며, 간표 3년(891년)에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가 편찬한 《일본국견재서목록》(日本國見在書目錄)에도 《문관사림》 전질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 일본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문관사림》의 분류 체제는 대체로 《문선》(文選)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권691 칙류편수(勅類篇首)를 통해 각 분류 앞에 편찬의 취지를 밝힌 소서(小序)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록된 시문은 가장 오래된 것이 선진(先秦) 시대의 것이며, 당 초기까지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 내용은 한에서 당 초기에 이르는 시문을 모은 것으로, 《문선》에 이어 중국의 가장 오래된 한시문 총집(総集)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는 송나라 시대에 편찬된 《문원영화》(文苑英華)의 선구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3. 1. 권수 목록 (나국위 정리)
`문관사림`은 한나라부터 당나라 초기까지의 시와 산문을 모은 책으로, 문선에 이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문 총집 중 하나이다. 나국위의 정리에 따르면, 고닌본에는 시 86편과 산문 346편이 실려 있다. 시대별로는 선진 시대 1편, 한대 9편, 후한 13편, 조위 22편, 서진 100편, 유송 39편, 남제 27편, 양 87편, 후량(後梁) 3편, 진 8편, 북위 20편, 북제 26편, 북주 14편, 수나라 26편, 당 35편이며, 연대가 불확실한 작품도 2편 포함되어 있다.나국위가 정리한 권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권수 | 분류 | 세부 내용 |
---|---|---|
권152 | 시(詩)12 - 인부(人部)9 증답(贈答)1 | 친속증답(親屬贈答), 부부증답(夫婦贈答) |
권156 | 시16 - 인부13 증답5 | 잡증답(雜贈答)2 |
권157 | 시17 - 인부14 증답6 | 잡증답3 |
권158 | 시18 - 인부15 증답7 | 잡증답4 |
권160 | 시20 - 예부(禮部)2 석전(釋奠) 하(下) | |
권346 | 송(頌)16 - 예부5 순행(巡幸) | |
권347 | 송17 - 무부(武部) 상(上) | 후반부 해당. 제목 빠진 것 1수, 조비의 벌촉송(伐蜀頌) 1수, 고윤(高允)의 북벌송(北伐頌) 1수만 있음. |
권348 | 송18 - 무부 하 | 장재평오송(張載平吳頌) 전반부 해당. 나머지 3수는 목록만 있음. |
권414 | 7 - 4 | |
권452 | 비(碑)32 - 백관(百官)22 장군(將軍)2 | |
권453 | 비33 - 백관23 장군3 | |
권455 | 비35 - 백관25 장군5 | 찬자가 확실하지 않은 잔편만 1수 있음. |
권457 | 비37 - 백관27 도독(都督)1 | |
권459 | 비39 - 백관29 도독3 | |
권507 | 후주무제벌북제조(後周武帝伐北齊詔)는 후반부만 존재. 《주서》 권6 무제기(武帝紀)하를 참고하여 전문 수록. 권662와 중복됨. | |
권613 | 당 태종의 시행유교경칙(施行遺教經勅) 1수만 있음. | |
권662 | 조(詔)32 - 정벌(征伐) 상 | |
권664 | 조34 - 무변(撫邊) | |
권665 | 조35 - 사유(赦宥)1 | |
권666 | 조36 - 사유2 | |
권667 | 조37 - 사유3 | |
권668 | 조38 - 사유4 | 권말 해당. 수나라 시대의 조(詔)만 3수 있으나 목록만 있고 글은 없음. |
권669 | 조39 - 사유5 | |
권670 | 조40 - 사유6 | |
권691 | 칙(勅)상 | 계칙(誡勅), 공거(貢舉), 제수(除授), 출면(黜免) |
권695 | 령(令)하 | 이도(移都), 훼폐(毀廢), 제사(祭祀), 숭학(崇學), 전농(田農), 정사(政事), 거사(舉士), 상벌(賞罰), 군령(軍令), 사령(赦令), 잡령(雜令) |
권699 | 교(教)4 | 휼망(恤亡), 포현(褒賢), 현절(顯節), 종복(終復), 훼폐, 도사(禱祀), 숭법(崇法) |
권수 불명 1 | 칙(勅) | 찬자가 불확실하고 제목도 없는 것만 2수 있음. |
권수 불명 2 | 표(表) | 후량 시대의 표만 3수 있음. |
권수 불명 3 | 찬자가 불확실한 잔편만 1수 있음. 나국위는 이를 후한 시대의 글로 추정. |
참조
[1]
간행물
국보일람
http://www.pref.waka[...]
和歌山県教育委員会
[2]
서적
당회요
[3]
서적
당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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