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할 오 플란나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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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초기 생애와 교육
- 3. 미국에서의 기금 모금 활동 (1904-1910)
- 4. 신 페인(Sinn Féin)과 게일어 연맹(Gaelic League) 활동
- 5. 클리포니(Cliffoney) 시절 (1914-1915)
- 6. 크로스나(Crossna) 시절과 부활절 봉기 (1915-1916)
- 7. 신 페인(Sinn Féin) 부흥과 독립 전쟁 (1917-1921)
- 8. 공화주의 특사 (Republican Envoy) (1921-1925)
- 9. 아일랜드 귀환과 신 페인 분열 (1925-1927)
- 10. 발명과 학문 연구 (1927-1942)
- 11. 신 페인 대표와 스페인 내전 (1933-1939)
- 12. 사망과 장례 (1942)
- 13. 유산과 평가
- 참조
1. 개요
미할 오 플란나간(1876-1942)은 아일랜드의 사제이자 정치 운동가였다. 그는 로스커먼 주에서 태어나 사제로 서품받은 후, 아일랜드 문화와 언어 부흥 운동에 참여했다. 1910년에는 신 페인에 합류하여 부통령을 역임했으며, 1918년 총선에서 신 페인의 압승을 이끌었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 기간에는 제1차 다일의 채플린으로 활동하며, 독립 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그는 공화주의 특사로 미국과 호주에서 활동하며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스페인 공화국을 지지하며 프랑코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오 플라나간은 혁신적인 발명가이자 학자로서도 활동했으며, 1942년 더블린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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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할 오 플란나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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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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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미할 오 플란나간 |
로마자 표기 | Mícheál Ó Flannagáin |
별칭 | 신 페인 신부 |
국적 | 아일랜드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출생일 | 1876년 8월 13일 |
출생지 | 코넌플라워, 로스코먼 주, 아일랜드 |
사망일 | 1942년 8월 7일 |
사망지 | 더블린, 아일랜드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신 페인 |
신 페인 대표 | 시작: 1933년 종료: 1935년 이전: 브라이언 오히긴스 이후: 카할 오 무르차다 |
제1차 아일랜드 의회 의장 | 시작: 1919년 종료: 1921년 |
게일 리그 부회장 | 시작: 1920년 종료: 1921년 |
신 페인 부대표 | 시작: 1917년 종료: 1923년 |
신 페인 부대표 | 시작: 1930년 종료: 1931년 |
종교 경력 | |
직업 | 로마 가톨릭 사제 |
학문 분야 | 아일랜드 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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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와 교육
미할 오 플란나간은 1876년 8월 13일, 로스커먼주 캐슬리아 근처 킬키븐 교구의 클룬포어에서 에드워드 플란나간과 메리 크롤리 사이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35]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했으며, 그는 1879년 아일랜드 대기근과 토지 전쟁 시기의 격동 속에서 성장했다.[2][5] 가족은 피니언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어린 미할은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정치적 부침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4][5]
오 플란나간은 클론보니페의 지역 국립학교를 다녔고,[1] 1890년 슬리고의 서머힐 칼리지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이후 1894년 메이누스 성 패트릭 칼리지에 입학하여 신학, 성경, 교회법, 아일랜드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이며 여러 상을 받았다.[6]
1900년 8월 15일, 그는 슬리고 대성당에서 엘핀 로마 가톨릭 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받았다.[6] 이 시기부터 그는 자신의 성(姓)을 아일랜드어 형태인 '오 플란나간'(Ó Flannagáin)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2. 1. 가족 배경과 유년 시절
미할 오 플란나간은 1876년 8월 13일, 로스커먼주 캐슬리아 근처 킬키븐 교구의 클룬포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드워드 플란나간(1842년 출생)과 메리 크롤리(1847년 출생) 사이에서 태어난 8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 형제자매로는 마레, 루크, 패트릭, 미할, 브리짓, 에드먼드, 케이트, 조셉이 있었다.[35] 그의 부모는 모두 아일랜드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브레악' 또는 점이 있는 게일타흐트 지역의 작은 농장에서 생활했다.[81]
오 플란나간이 세 살 되던 해, 1879년 아일랜드 대기근이 아일랜드 서부 지역을 강타했다.[2] 비록 30년 전의 대기근만큼 파괴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전 기근 생존자들에게는 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1879년 녹의 성모 발현과 같은 종교적 열정으로 표출되기도 했다.[3] 플란나간 가족은 아일랜드 독립을 추구했던 피니언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4] 어린 시절 미할은 토지 전쟁 기간 동안 벌어진 강제 퇴거, 보이콧, 총격 사건 등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그의 부모는 토지 연맹의 회원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어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정치적 부침을 열성적으로 지켜보았다.[5]
오 플란나간은 클론보니페에 있는 지역 국립학교(일명 돈 학교)에 다녔으며, 마이클 오칼라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1] 1890년에는 슬리고에 위치한 서머힐 칼리지에서 중등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894년 가을 메이누스 성 패트릭 칼리지에 입학하여 신학, 성경, 교회법, 아일랜드어, 교육, 자연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상을 받았다.[6]
2. 2. 교육 과정
오 플라나간은 클론보니페에 있는 지역 국립학교(돈 학교라고도 알려짐)에 다녔다. 당시 그의 선생님은 마이클 오칼라한이었다.[1] 1890년에는 슬리고에 위치한 서머힐 칼리지에서 중등 교육을 시작했다.1894년 가을에는 메이누스 성 패트릭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신학, 성경, 교회법, 아일랜드어, 교육학, 자연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며, 뛰어난 성적으로 여러 상을 받았다.[6]
2. 3. 사제 서품과 초기 활동
오 플란나간은 1900년 8월 15일, 24세의 나이로 슬리고 대성당에서 엘핀 로마 가톨릭 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받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자신의 성(姓)을 아일랜드어 형태인 '오 플란나간'(Ó Flannagáin)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6]
슬리고에서 활동하는 동안 오 플란나간은 아일랜드 문화와 언어 부흥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슬리고 타운 홀에서 야간 아일랜드어 강좌를 열었으며, 슬리고 페이스(Feis, 아일랜드 전통 문화 축제)의 창립 멤버이자 비서로 활동했다. 1903년 처음 개최된 페이스에서는 패드릭 피어스를 초청하여 "국가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게 했다. 피어스와 더글러스 하이드는 1903년과 1904년에 열린 아일랜드어 경연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6]

1904년 8월, 게일어 연맹 회의에 참석한 후 오 플란나간은 연맹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미국 각지에 고국의 발전에 대해 듣고 싶어 하고, 모든 아일랜드 운동의 대표를 만나고 싶어 하는 아일랜드계 인구가 존재한다"고 보고하며 미국 내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의 높은 관심을 강조했다. 연맹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자, 상임위원회는 오 플란나간에게 피오난 맥콜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 활동을 벌여달라고 요청했다.[6] 오 플란나간은 더글러스 하이드의 조언에 따라 클랜시 주교에게 허가를 구했고, 클랜시 주교는 이를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오 플란나간의 특사 선정을 축하하는 편지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며 지지를 보냈다.[9] 오 플란나간과 맥콜럼은 1910년 10월 1일 미국에 도착하여 뉴욕 매디슨 애비뉴 624번지에 사무실을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존 밀링턴 싱의 희곡 "서부 세계의 플레이보이"를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미국 내 후원자들과 갈등을 겪었다. 특히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의 존 데보이는 해당 희곡이 아일랜드 문화를 왜곡한다며 게일어 연맹에 대한 지원 철회를 위협했다. 이에 오 플란나간은 더블린의 하이드와 상의한 후, 1911년 12월 4일 뉴욕 타임스에 게일어 연맹의 활동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레이디 그레고리, 애비 극장 등과는 관련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10]
1912년 아일랜드로 돌아온 오 플란나간은 로스커먼에서 클랜시 주교에 의해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9일 클랜시 주교가 사망하고, 후임으로 임명된 버나드 코인 주교는 보수적인 성향이었다. 코인 주교는 오 플란나간의 진보적인 사상과 독립적인 활동 방식에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6]
같은 해, 오 플란나간은 대림절 강연을 위해 로마로 초청받아 4주 동안 산 실베스트로 인 카피테 성당에서 객원 설교자로 활동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는 교황청 아일랜드 대학 학장이었던 친구 존 헤이건과 시간을 보냈다. 헤이건 문서 보관소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많은 편지가 소장되어 있으며, 오 플란나간은 편지에서 종종 "브로스나"(Brosna)라는 별칭으로 불렸다.[11]
1913년 3월 슬라이고 부두에서 장기간의 파업이 발생하자, 오 플란나간은 5월에 파업 노동자들을 방문하여 연대 의사를 표명하고 그들의 권리 주장을 지지하며 계속 투쟁할 것을 격려했다.[5] 이러한 그의 사회 참여적 행보는 보수적인 교구 당국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그가 슬라이고주의 외진 교구인 클리포니로 발령받는 한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5] 한편,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의 키팅 지부가 게일어 연맹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오 플란나간은 다시 2년 임기의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4] 1913년 8월 골웨이 타운 홀 밖에서 열린 게일어 연맹 회의에서 찍힌 사진에는 오 플란나간이 여러 진보적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남아있다.[12]
오 플란나간은 신 페인당의 재조직과 대중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14년 2월 22일, 크로스나에 머물면서 그는 당시 아일랜드 국립박물관 관장이었던 플렁킷 백작에게 편지를 보내 신 페인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편지에서 "조직 계획의 대략적인 개요를 동봉합니다... 제 목표는 우리가 맡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빨리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 페인 조직이 본부에서 강력하게 추진하면 이제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페인이 빠르게 확산되면 아일랜드 동맹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을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쓰며 신 페인 조직 확대의 시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했다.[13]
1914년, 오 플란나간은 사순절 강연을 위해 다시 로마로 초청받아 산 실베스트로 인 카피테 성당에서 6주 동안 설교했다. 강연을 마친 후 그는 교황 베네딕토 15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6] 그러나 로마를 떠날 준비를 하던 중, 그는 로스커먼 교구에서 해임되어 슬라이고주 클리포니로 이동하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14]
3. 미국에서의 기금 모금 활동 (1904-1910)
미할 오 플란나간은 농촌 개발과 아일랜드의 자급자족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4] 그는 1904년 존 조셉 클랜시 주교와 호레이스 플런켓의 초청을 받아 연설 및 기금 모금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4] 당시 게일 연맹 회장이던 더글러스 하이드는 오 플란나간의 미국행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7]
미국에서의 주요 임무는 레이스 산업을 포함한 아일랜드 산업을 홍보하고, 아일랜드 서부 지역의 농업 및 산업 프로젝트를 위한 투자 유치와 기부금 모금이었다. 또한 로스코먼주 로흐글린 지역 엘핀 교구의 사업 관련 부채 상환도 그의 목표 중 하나였다.[6] 오 플란나간은 전통적인 기부 요청 방식보다는 실용적이고 혁신적인 접근을 통해 기금을 모으는 것을 선호했으며,[6] 이를 위해 순회 산업 및 문화 전시회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35] 그는 뛰어난 홍보 능력을 바탕으로 지역 신문 광고, 인터뷰, 강연 등을 통해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회 내에서 폭넓은 지지 기반과 인맥을 구축했다.[5]
오 플란나간은 1905년과 1908년에 잠시 아일랜드로 돌아온 것을 제외하고는 1910년 아일랜드로 소환될 때까지 미국에 머물며 활동을 이어갔다.[6]
3. 1. 혁신적인 기금 모금 방식
오 플란나간은 단순히 기부를 요청하는 방식보다는 실용적인 방법을 통해 기금을 모으는 것을 선호했다.[6] 그는 1904년 존 조셉 클랜시 주교와 호레이스 플런켓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아일랜드 산업, 특히 아일랜드 레이스를 홍보하고 아일랜드 서부 지역의 농업 및 산업 프로젝트를 위한 투자 유치와 기부금 모금을 목표로 활동했다.[4][6]1905년 아일랜드로 잠시 돌아온 그는 레이스 및 수공예 장인인 메리 오 플란나간, 로즈 이건, 케이트 다보렌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순회 산업 및 문화 전시회를 열었다. 이들은 미국 전역 51개 도시를 96주 동안 순회하며 전시회를 개최했다.[35] 전시회에서 장인들은 대중에게 직접 레이스 제작을 시연하고 다양한 지역 스타일의 아일랜드 레이스 샘플을 선보였으며, 오 플란나간은 전시 기획과 함께 강연 및 인터뷰를 진행했다.[35]
그의 혁신적인 기금 모금 방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 플란나간은 아일랜드의 모든 군에서 흙을 가져와 전시회장에 아일랜드 지도 모양으로 배열했다. 방문객들은 자신의 고향 군 흙을 밟아보는 대가로 1USD를 기부했다.[81] 오 플란나간은 뛰어난 홍보 감각을 발휘하여 지역 신문에 전시회 광고를 싣고, 수많은 신문 인터뷰와 공개 강연을 통해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회 내에서 폭넓은 지지 기반과 인맥을 구축했다.[5]
3. 2. 아일랜드계 미국인 커뮤니티와의 관계
1904년, 존 조셉 클랜시 주교와 호레이스 플런켓의 초청으로 오 플란나간은 연설 및 기금 모금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4] 당시 게일 연맹의 회장이었던 더글러스 하이드는 그의 미국행을 아쉬워하며 그의 아일랜드 음성학 저서에 대한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7]오 플란나간의 주요 임무는 아일랜드 산업, 특히 레이스 산업을 홍보하고 아일랜드 서부 지역의 농업 및 산업 프로젝트를 위한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었다. 또한, 로스코먼주 로흐글린 지역의 딜런 영지 매입 및 낙농업 설립과 관련된 엘핀 교구의 미결제 부채 상환도 그의 임무 중 하나였다.[6]
그는 단순히 기부를 요청하기보다 실용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혁신적인 기금 모금가였다. 1905년 아일랜드로 잠시 돌아와 레이스 및 수공예 장인인 메리 오 플란나간, 로즈 이건, 케이트 다보렌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 순회 산업 및 문화 전시회를 열었다. 이들은 미국 전역 51개 도시를 96주 동안 순회하며 아일랜드 레이스 제작 시연과 샘플 전시를 진행했고, 오 플란나간은 전시 기획과 함께 강연 및 인터뷰를 맡았다.[35]
그의 독창적인 기금 모금 방식 중 하나는 아일랜드 모든 군(county)에서 가져온 흙덩어리를 아일랜드 지도 모양으로 배열하고, 사람들이 1USD를 내고 자신의 고향 군 흙을 밟게 한 것이었다.[81] 오 플란나간은 뛰어난 홍보 감각으로 지역 신문에 전시회 광고를 싣고, 수많은 신문 인터뷰와 공개 강연을 통해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회 내에서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5]
1905년과 1908년 잠시 아일랜드로 돌아간 것을 제외하면, 그는 1910년 아일랜드로 소환될 때까지 미국에 머물며 활동했다.[6]
4. 신 페인(Sinn Féin)과 게일어 연맹(Gaelic League) 활동
1910년 6월 아일랜드로 돌아온 오 플란나간은 신 페인에 합류하여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당시 아서 그리피스의 초기 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당의 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38][8][81]
1912년 로스커먼에서 사제로 서품받았으나,[6] 같은 해 10월 클랜시 주교가 사망한 후 새로 부임한 버나드 코인 주교는 보수적인 인물로, 오 플란나간의 근대주의적 성향과 독립성에 불만을 품어 둘 사이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6] 그해 오 플란나간은 로마로 초청받아 4주 동안 산 실베스트로에서 대림절 강연을 하기도 했다.[11]
1913년 3월 슬라이고 부두에서 장기 파업이 발생하자, 5월에 오 플란나간은 파업 현장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에게 연대감을 표시하고 권리를 계속 주장할 것을 독려했다.[5] 이러한 그의 사회주의적인 행보는 그가 이후 클리포니로 발령받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5] 한편, 진보적 민족주의 단체인 키팅 지부가 게일어 연맹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오 플란나간은 연맹 상임위원회에 선출되어 2년 동안 활동했다.[4] 1913년 8월 골웨이에서 열린 게일어 연맹 회의에 다른 진보적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참석한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남아있다.[12]
오 플란나간은 신 페인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대중적 기반을 넓히기 위해 노력했다. 1914년 2월 22일, 그는 플렁킷 백작에게 편지를 보내 신 페인에 합류할 것을 설득하며 조직 확장 계획의 개요를 설명하고 조속한 자금 확보와 조직 방법론 검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3]
조직 계획의 대략적인 개요를 동봉합니다. 세부 사항에 대해 많은 비판이 필요할 것입니다. 제 목표는 우리가 맡은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빨리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채택하기 전에 조직 방법론을 연구한 사람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저는 신 페인 조직이 본부에서 강력하게 추진하면 이제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페인 집행부에 북부 로스커먼의 지역 위원회 주요 인사들에게 규칙 사본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신 페인이 빠르게 확산되면 아일랜드 동맹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을 시간이 없습니다.[13]
같은 해 오 플란나간은 다시 로마로 초청받아 산 실베스트로에서 6주간 사순절 강연을 했으며, 강연을 마친 후 베네딕토 15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6] 로마를 떠날 준비를 하던 중, 그는 로스커먼 교구에서 해임되어 슬라이고주의 클리포니로 발령받았다는 통보를 받았다.[14]
4. 1. 신 페인 초기 활동 (1910-1914)
1910년 6월 아일랜드로 돌아온 오 플란나간은 신 페인에 합류하여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38] 신 페인은 1905년 아서 그리피스가 결성한 국민 협의회라는 민족주의 단체에서 발전한 정당이었다. 오 플란나간이 합류했을 당시, 신 페인은 그리피스의 구상에 따라 '군주주의' 단계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피스는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모델을 바탕으로 아일랜드가 주권을 되찾고 영연방 내에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 방안을 제시했다.[38]그리피스는 아일랜드 출신 영국 의회 의원들이 웨스트민스터 의회를 보이콧하고, 대신 더블린에 아일랜드 자체 의회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존 레드먼드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회당이 영국 총선에서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며 자치 정부 문제를 주요 의제로 부각시키자, 신 페인의 이러한 정책은 점차 현실적인 영향력을 잃어갔다.[8]
4. 2. 게일어 연맹 특사 (1910-1912)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해당 섹션의 내용을 뒷받침할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5. 클리포니(Cliffoney) 시절 (1914-1915)
1914년 7월 말, 버나드 코인 주교는 오 플란나간을 슬라이고주 북부 아함리시 교구의 작은 마을인 클리포니(Cliffoney)로 전근시켰다. 주교는 그에게 병든 사제를 돕고, 클리포니의 부진한 레이스 산업을 지원하며, 마을 회관으로 사용할 토지나 건물을 찾으라는 임무를 주었다. 오 플란나간은 처음에는 멀라모어에 있는 로지를 임대해 지내다가, 이후 클리포니로 이사하여 해넌 부인으로부터 코티지를 빌려 거주했다.[14]
클리포니에 머무는 동안 오 플란나간은 제1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영국군의 징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의 설교는 교회 옆 병영에 주둔하던 RIC에 의해 면밀히 감시되었고, 경찰관들은 종종 공책을 들고 교회 앞자리에 앉아 그의 말을 기록했다.[14] 그는 서머힐 출신의 옛 제자인 알렉 맥케이브와 협력하여, 존 레먼드의 국민 지원군과의 분열 이후 클리포니 지역에서 아일랜드 의용군을 재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6]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의용군 대원은 "당시 우리는 가톨릭 교구 사제인 고 마이클 오 플라나간 신부님을 모셨는데, 그는 훌륭한 아일랜드인이자 공화국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교구의 젊은이들에게 아일랜드 의용군에 입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모두 40명의 남자가 클리포니 부대에 입대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15] 오 플란나간은 젊은 아일랜드인들이 영국군에 강제로 징집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14]
또한 오 플란나간은 지역의 식량 자원이 외부로 수출되는 것을 비판하고, 토탄 채취권이 지역 주민들에게 공정하고 적절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문 기고를 통해, 당시 아일랜드 여론 주도층이 독일의 벨기에 침공 및 학살에는 분노하면서도 영국의 지속적인 아일랜드 통치 문제에는 무관심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했다.[16]
1915년 6월 23일 일요일, 오 플란나간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슬라이고 자유 시민(Freedom of Sligo) 칭호를 받았다. 그는 슬라이고 타운 홀 계단에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했으며,[47] RIC는 그의 연설 내용을 기록하고 참석 인원을 최소 2,000명으로 추산했다.[36]
5. 1. 클루너코 늪지 전투 (The Cloonerco Bog Fight)

클리포니에 살면서 오 플라나간은 마을 사람들이 혼잡 지구 위원회(토지 재분배를 담당하는 공공 기관)로부터 지역 늪지에 대한 접근을 거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혼잡 지구 위원회와 지루하고 성과 없는 서신 교환 끝에, 그는 결국 직접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행동을 개시한 날은 오도노반 로사가 뉴욕에서 사망한 날이었다.[17]
1915년 6월 30일, 오 플라나간은 약 200명의 교구 신자들을 이끌고 클루너코 늪지로 가서 토탄을 자르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은 "클루너코 늪지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18] 행렬을 따라 늪지까지 온 RIC 경찰들이 개입하여 토탄을 자르는 사람을 체포하겠다고 위협하자, 오 플라나간이 직접 나서서 토탄을 자르기 시작했다.[81] 경찰의 방해와 토탄 절단자 6명에 대한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많은 양의 토탄을 수확하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토탄은 오 플라나간 신부 홀 밖에, RIC 병영 맞은편에 쌓아두었다. 토탄 더미 위에는 삼색기가 걸렸고, 오 플라나간이 직접 쓴 "Ár Moin Féin"(우리 자신의 토탄)이라는 문구가 적힌 배너가 붙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러한 저항은 1915년 여름 내내 계속되었고, 결국 클리포니의 지역 주민들은 늪지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8]
5. 2. 오 플라나간 신부 회관 (The Father O'Flanagan Hall)
클리포니 마을에는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회 강당이나 집회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회의는 주로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 병영 밖 교차로의 길거리에서 열렸다. 마침 오 플라나간 신부가 클리포니에 도착한 직후 새로운 국립 학교가 문을 열게 되면서[19] 기존의 옛 학교 건물이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오 플라나간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옛 학교 건물의 소유주였던 클래시번 성의 애슐리 대령에게 편지를 보내 건물을 마을 사람들에게 기증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애슐리 대령은 이 요청을 수락하여, 1824년 팜스턴 경이 세운 건물을 마을에 넘겨주었다.[20]
마을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새 강당의 이름을 '오 플라나간 신부 회관'(Father O'Flanagan Hall)으로 지었다. 이 회관은 곧 클리포니 신 페인 클럽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지역 사회 활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클루너코 습지 시위가 벌어졌을 때는 아일랜드 삼색기를 꽂은 많은 양의 토탄 더미가 회관 밖에 세워지기도 했다.[18]
오 플라나간 신부 회관은 클리포니의 아일랜드 의용군이 훈련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춤, 콘서트, 연극 등 다양한 문화 및 사교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1920년 10월 말, 인근 머니골드에서 발생한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매복 공격에 대한 보복 조치로 영국 보조군에 의해 불태워져 소실되었다.[48]
5. 3. 오도노반 로사 장례식 (O'Donovan Rossa funeral)

1915년 7월 말, 오 플란나간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제레마이어 오도노반 로사의 부인인 메리 제인 오도노반 로사로부터 남편의 장례식에서 연설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21] 오 플란나간은 이전에 미국을 여행하던 중 오도노반 로사 가족을 방문한 인연이 있었다.[5]
장례식 관련 행사 중 오 플란나간은 메리 제인과 딸 에일린 오도노반 로사, 그리고 장례식과 이후 부활절 봉기의 주요 조직자였던 톰 클라크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톰 클라크는 평소 사진 찍기를 꺼리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22] 오 플란나간은 더블린 시청에 안치된 오도노반 로사의 유해 앞에서 아일랜드 의용군과 민족주의자들이 모인 가운데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23] 이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마르키에비츠 백작 부인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다음 날, 오 플란나간은 글래스네빈 묘지에서 오도노반 로사 가족과 함께 패트릭 피어스 옆에 서서 아일랜드어로 마지막 기도를 낭독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패트릭 피어스는 아일랜드 독립 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그의 상징적인 연설을 했다.[17]
5. 4. 클리포니 반란 (The Cliffoney Rebellion)
1915년 10월 9일, 오 플라나간은 슬리고 법원에서 열린 "경작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전쟁 지원을 위한 경작 증대를 논의하는 자리였으며, 농무부 장관 T. W. 러셀이 관련 동의안을 제안했다. 오 플라나간은 이에 반대하며, 급진적인 토지 개혁 없이는 동의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전쟁과 징병을 비판하는 반대 동의안을 제출했다.[14] 그는 아일랜드인들이 자신들이 일으키지 않은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고국에서 더 많은 작물을 재배하여 가난한 동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동의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의 연설 내용은 지역 신문에 보도되었고, 다음 날 아침 RIC는 코인 주교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며칠 지나지 않아 오 플라나간은 로스커먼주의 크로스나로 전근 명령을 받았다. 클리포니 주민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전근 조치에 강력히 반발하여 교회를 폐쇄하는 방식으로 저항했는데, 이 사건은 "클리포니 반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15년 10월 17일 아침, 성구실 열쇠가 사라졌고 교회 문은 안쪽에서 못으로 잠겼으며, 새로 부임한 C. 맥휴 신부의 교회 출입이 거부되었다.[18]
마을 사람들은 오 플라나간 신부의 복귀를 기원하며 매일 저녁 교회 문 밖에 무릎을 꿇고 묵주 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주교를 만나기 위해 슬리고까지 행진했으나 주교는 자리를 비웠고, 교황에게 보낸 탄원서 역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코인 주교는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거나 마을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러한 대치 상황은 1915년 가을 내내 지속되었다.[6]
교회 폐쇄는 10주 동안 이어졌다. 결국 오 플라나간 자신이 직접 나서서 마을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자신에게 교회를 열어달라고 호소했고, 그의 요청에 따라 191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회 문이 다시 열리면서 반란은 막을 내렸다.[14]
6. 크로스나(Crossna) 시절과 부활절 봉기 (1915-1916)
1915년은 오 플라나간이 클리포니에서 활동하며 지역 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나선 중요한 시기였다. 특히 그는 아일랜드 혼잡 지구 위원회가 지역 주민들의 늪지 접근을 막자, 1915년 6월 30일 약 200명의 교구 신자들을 이끌고 직접 토탄을 채취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클루너코 늪지 전투"로 알려졌으며, RIC의 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민들의 토탄 채취권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7][18][81]
이 시기 오 플라나간은 영국군의 징병에 반대하는 설교와 연설을 이어갔으며, 이는 보수적인 코인 주교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4][24][25] 1916년 초, 코크에서 열린 대규모 반징병 집회 연설 이후 그는 주교로부터 설교 및 교구 밖 미사 집전 금지라는 제재를 받게 된다.[25][6]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활절 봉기 직전까지 민족주의 운동에 관여했으며[26], 봉기 이후에는 처형된 지도자들을 추모하고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29][30]
6. 1. 반징병 운동과 주교와의 갈등
1914년 7월 말, 버나드 코인 주교는 오 플라나간을 북부 슬라이고주 아함리시 교구의 작은 마을인 클리포니로 전근시켰다. 그는 주교로부터 병든 사제를 돕고, 클리포니의 부진한 레이스 산업을 지원하며, 마을 회관 건립을 위한 부지를 물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멀라모어에 있는 숙소를 빌려 지내다가 클리포니로 이사하여 해넌 부인으로부터 작은 집을 임대했다.[14]
클리포니에 머물면서 오 플라나간은 영국군의 징병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의 설교는 교회 옆 병영에 주둔하던 왕립 아일랜드 경찰(RIC)의 감시 대상이 되었으며, 경찰들은 종종 공책을 들고 교회 앞자리에 앉아 그의 말을 기록했다.[14] 오 플라나간은 서머힐 시절 제자였던 알렉 맥케이브와 함께, 존 레드먼드의 국민 지원군과의 분열 이후 클리포니 지역에서 아일랜드 의용군을 재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6]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의용군 대원은 "그때 우리에게는 가톨릭 교구 사제이신 고 마이클 오 플라나간 신부님이 계셨는데, 그는 훌륭한 아일랜드인이자 공화국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교구의 젊은이들에게 아일랜드 의용군에 입대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모두 40명의 남자가 클리포니 부대에 입대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15] 오 플라나간은 젊은 아일랜드인들이 영국군에 강제로 징집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14] 그는 또한 이 지역에서 생산된 식량이 외부로 수출되는 것을 비판하고, 토탄 채취권이 공정하고 적절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문 기고를 통해 아일랜드 여론 주도층이 독일의 벨기에 침공 당시 만행에는 분노하면서도, 영국의 지속적인 아일랜드 통치 방식에는 무관심한 이중적인 태도를 지적했다.[16]
1915년 10월 9일, 오 플라나간은 슬라이고 법원에서 열린 "경작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당시 엘핀 주교였던 캐논 둘리가 의장을 맡았고, 슬라이고의 왕실 검사 T. H. 윌리엄스, RIC 지역 조사관 오설리반 등 정부 측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6] 회의의 목적은 전쟁 지원을 위해 경작지를 늘리자는 캠페인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주요 연설자로 나선 농무부 장관 T. W. 러셀이 관련 동의안을 제안하자, 오 플라나간은 급진적인 토지 개혁 없이는 동의안을 거부해야 한다는 반대 동의안을 제출하며 전쟁과 징병을 강하게 비판했다.[14] 그는 아일랜드인들이 자신들이 일으키지도 않은 전쟁에 참여할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더 많은 작물을 재배하여 가난한 자국민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의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의 연설 내용은 지역 신문에 보도되었다. 다음 날 아침, RIC는 세인트 메리 성당에 있는 코인 주교의 거처를 방문하여 이 사실을 보고했다.

1915년 11월 25일, 오 플라나간은 맨체스터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식에서 벨파스트의 성 메리 홀 청중들 앞에서 "신이 아일랜드를 구원하소서"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16년 1월, 그는 코크로 이동하여 반징병 집회에서 연설했다. 이 집회는 나중에 영국 치안군에 의해 암살된 토마스 맥커틴이 사회를 맡았고, 1920년 74일간의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 테렌스 맥스위니가 경호를 담당했으며, 수많은 군중이 모였다.[24]
오 플라나간의 열정적인 연설은 왕립 아일랜드 경찰(RIC)에 의해 상세히 기록되었고, 전국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다. 크로스나로 돌아온 그는 코인 주교로부터 제재를 받았다. 코인 주교는 1916년 1월 14일 오 플라나간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
나는 종교, 교회 규율, 그리고 질서 유지를 위해, 당신이 앞으로 이 교구에서 설교하는 것을 금지하며, 또한 나의 서면 허가 없이는 아드카른 교구 밖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금지하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25]편지는 "당신의 슬픔에 잠긴 고통받는 주교 버나드 코인"이라는 말로 끝맺었다.[6]
던도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의용군 집회에 연설자로 초청받았으나, 오 플라나간은 주교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초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주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부활절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인 1916년 4월 6일 목요일, 그는 더블린의 링젠드와 도니브룩에서 열린 집회를 주재했다. 이 집회는 어니스트 블라이스와 리암 멜로스의 추방에 항의하기 위해 열렸으며, 연사로는 오라힐리와 토마스 맥도나가 참여했다. 이 집회를 통해 약 100명의 신병이 아일랜드 의용군에 등록했다.[26]
오 플라나간은 1916년 여름을 북 로스코먼에서 보냈으며, 주교의 지시를 가능한 한 따르려 노력했다. 크로스나에 머무는 동안 그는 패트릭 모란과 친분을 쌓았다. 이 지역에 의용군 부대가 결성되자, 의용군 대원이었던 모란은 더블린에서 캐릭온섀넌으로 오 플라나간을 통해 16정의 소총을 운반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27]
그는 신문과 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했으며, 1916년 6월에는 ''프리먼스 저널''에 편지를 보내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제안한 1914년 아일랜드 자치법을 6개 카운티를 제외한 지역에 시행하겠다는 계획의 의미를 분석하며 민족주의 진영의 반발을 샀다.[28] 이 편지로 인해 그는 동료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수년에 걸쳐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신 페인의 또 다른 부회장이었던 마틴 맥기네스는 훗날 1998년에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28]
6. 2. 부활절 봉기에 대한 입장
오 플라나간은 봉기 직전인 1916년 4월 6일, 더블린의 링젠드와 도니브룩에서 열린 집회를 주재했다. 이 집회는 어니스트 블라이스와 리암 멜로스의 추방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연사로는 오라힐리와 토마스 맥도나가 참여했고 약 100명의 신병이 아일랜드 의용군으로 등록했다.[26]
그는 부활절 봉기 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과 친구였으며, 제레미아 오도노반 로사의 장례식에서 톰 클라크와 패트릭 피어스와 함께 사진을 찍는 등 여러 차례 만났다. 그는 1916년 4월 23일 일요일 골웨이 카운티의 아테네리에서 열릴 의용군 퍼레이드를 검토하도록 초대받았으나, 주교의 징계(정직 처분)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크로스나에 머물렀다.[14] 이로 인해 그는 부활절 주간의 사건들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의 친구들 중 다수가 아일랜드 의용군과 게일 연맹 출신으로 더블린에서 무장 봉기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봉기 이후, 오 플라나간은 처형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활용하여 정치적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9] 그는 1916년 7월 로저 카스먼트 경의 사면을 위한 청원에 서명을 모으며 "부활절 주간의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7월 30일 앨리스 스톱포드 그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우리 중 일부는 (청원서의) 네 번째 단락에서 암시된 아일랜드 의용군 지도자들의 처형에 대한 유사한 사과를 좋아하지 않지만, 로저 카스먼트를 위해 우리 역할을 다하기 위해 그 점을 기꺼이 포기할 의향이 있다. 더블린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우리에게 순교자이자 영웅이며, 그들의 처형을 명령한 정부는 큰 범죄를 저질렀다.[30]
7. 신 페인(Sinn Féin) 부흥과 독립 전쟁 (1917-1921)
1917년 북로스코먼 보궐선거에서 조지 노블 플런켓 백작의 당선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오 플라나간은 침체되었던 신 페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31][6][35] 이 선거는 혹독한 날씨 때문에 '눈의 선거'로 알려졌으며, 오 플라나간은 주교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선거 운동을 주도하였다.[35][36] 이 승리는 이후 신 페인의 연이은 선거 승리의 발판이 되었다.
플런켓 백작의 승리 이후, 다양한 민족주의 세력들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이어졌으며, 오 플라나간은 이 과정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신 페인의 재조직에 기여하였다.[32][38] 1917년 10월 신 페인 전당대회에서는 아서 그리피스의 기존 조직과 부활절 봉기 참전 용사 등 여러 그룹이 통합되었고, 에몬 데 발레라가 대통령으로, 그리피스와 오 플라나간이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43][38] 이로써 오 플라나간은 당의 핵심 지도부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뛰어난 조직가로서 역량을 발휘하였다.[40]
1918년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에 징병제를 강행하려 하자, 오 플라나간은 반징병 운동의 선두에 섰다.[31][41] 영국 정부가 이른바 독일 음모를 구실로 신 페인 지도부를 대거 투옥하였을 때, 사제 신분으로 체포를 면한 오 플라나간은 당의 임시 대표 역할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42][43] 그는 투옥된 그리피스를 대신하여 이스트 카반 보궐 선거 운동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당의 저력을 보여주었다.[35][43]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치러진 1918년 총선에서 오 플라나간은 신 페인의 가장 인기 있는 연설가 중 한 명으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압도적인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15][6] 신 페인은 아일랜드 의석 105석 중 73석을 확보하며 기존 아일랜드 의회당을 제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였다.[38] 선거 후 오 플라나간은 "국민들은 신 페인을 선택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 페인이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38]
신 페인 당선자들은 영국 의회 등원을 거부하고 1919년 1월 21일 더블린에서 독자적인 아일랜드 의회인 제1차 다일을 개최하였다.[48] 오 플라나간은 제1차 다일의 채플린으로 임명되어 개회 기도를 집전하는 영예를 안았다.[81] 이는 아일랜드 독립을 향한 투쟁에서 그의 중요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제1차 다일 개회 당일, 티퍼레리주에서 IRA 단원들이 경찰관 2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48]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특히 데 발레라가 미국에 가고 그리피스가 투옥되는 등 지도부 공백 상황에서 오 플라나간은 다시 임시 대표 역할을 수행하였다.[43] 1920년 말, 그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와 공개적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6] 이는 독자적인 행동이었기에 당내 일부 인사들, 특히 비밀 협상을 진행 중이던 마이클 콜린스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42][5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의 종식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후 드 발레라의 지시에 따라 비공식적인 협상 채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59][60]
7. 1. 눈의 선거 (The Election of the Snows)
1916년 12월, 북로스코먼 지역구의 아일랜드 의회당 의원이었던 오랜 페니언 제임스 오'켈리가 사망하면서 의석이 공석이 되었다.[31] 이에 따라 1917년 2월 보궐 선거가 예정되었고, 당시 북로스코먼을 벗어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오 플라나간은 이 상황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31]오 플라나간은 존 J. 오'켈리 및 P. T. 케오한과 협력하여, 1916년 부활절 봉기 당시 처형된 지도자 중 한 명인 조지프 플렁킷의 아버지 조지 노블 플런켓 백작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는 플런켓 백작을 "당시 상황에 대한 여권"과 같은 존재로 여겼으며,[6] 옥스퍼드에서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백작에게 북로스코먼 의석 출마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32]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한 코인 주교는 1917년 1월 21일 오 플라나간에게 서한을 보내 경고했다. 서한은 "국가의 일부 지역에서 현재 정치적 불안을 고려하여, 미래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저는 당신에게 메이누스 국립 시노드의 다음 법규(121페이지, 379호)에 주의를 환기하고자 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라틴어로 된 4개의 교회법 조항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이 법규의 조건에 대한 불이행은 당신의 경우, '자동적(ipso facto)' 정직 및 교구의 일반적인 권한 박탈을 의미합니다. 저는 B. 코인입니다."[33]
하지만 오 플라나간은 선거 운동을 조직하고 조정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캐슬레아의 친구 존 실크에게 "가능한 한 많은 돈을 구해서 플런켓 백작을 대신하여 보안관에게 예치하도록 보내주세요. 금요일 25일 오후 2시 전에 보일의 보안관에게 예치해야 합니다."라고 편지를 썼다.[29] 1월 27일에는 옥스퍼드와 더블린으로 편지 카드를 보내 플런켓 백작이 보일과 발라데린에서 연설할 수 있도록 일정을 조율했다. "옥스퍼드에서 브로드스톤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보일로 와서 거기서 연설하고 다음날 발라데린 박람회에서 연설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옥스퍼드를 떠났을 수도 있으므로 이 편지를 더블린에도 보냅니다."[34] 그는 또한 선거에서 가톨릭 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음 날 약 25개 교회에서 회의를 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극심한 폭설이 내려 도로가 최대 약 3.05m 높이의 눈으로 막히는 등 악천후가 이어졌기 때문에, 이 선거는 훗날 눈의 선거(The Election of the Snows)로 알려지게 되었다.[35] 오 플라나간은 교구 경계 밖에서 연설하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이 투표소로 갈 수 있도록 도로의 눈을 치우는 작업을 조직하는 등 플런켓 백작의 선거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36] 플런켓 백작 본인은 선거일 이틀 전에야 선거구에 도착했다.[29] 오 플라나간은 데리 출신의 세이머스 오도허티(Seamus O'Doherty)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는 백작의 선거 운동 책임자가 되었다.[27] 또한 웨스트미스 출신의 반항적인 무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로렌스 기넬이 플런켓의 선거 대리인 역할을 맡았다.[35] 더블린 등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선거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합류했는데, 여기에는 마이클 콜린스, 아서 그리피스, 래리 뉴전트(Larry Nugent), 로리 오코너, 다렐 피기스, 윌리엄 오브라이언, 케빈 오시엘(Kevin O'Shiel), 조셉 맥그라스(Joseph McGrath), 그리고 플런켓 백작의 딸 제랄딘(Geraldine)과 사위 토마스 딜론(Thomas Dillon) 등이 포함되었다.[6]
선거 후, 아이리시 타임스는 오 플라나간의 열정적인 활동에 대해 "그는 12일 밤낮으로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선거구를 오가며 모든 마을, 길모퉁이, 교차로에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에게 연설했다"고 평가했다.[27]
선거 결과, 플런켓 백작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득표 결과는 플런켓 3,022표, 아일랜드 의회당의 토마스 데빈(Thomas Devine) 1,708표, 재스퍼 툴리(Jasper Tully) 687표였다.[37] 플런켓 백작과 오 플라나간은 법원에서 열린 축하 행사에서 환호를 받았으며, 이 자리에서 플런켓 백작은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참여하지 않고 기권하겠다고 발표하여 청중을 놀라게 했다. 이는 영국 의회를 거부하는 신 페인의 노선을 따른 것이었다.[35]
7. 2. 맨션 하우스 위원회 (Count Plunkett's Convention)
1917년 4월 19일, 플랑켓 백작은 북 로스코먼 선거 승리 이후 공동 기반을 모색하기 위해 더블린의 맨션 하우스에서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의 회의를 주재했다.[32] 이 회의에서는 운동의 형태와 방향, 그리고 주도권을 누가 가질 것인지를 두고 플랑켓 백작과 아서 그리피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38] 플랑켓 백작은 전국적인 자유 클럽(Liberty Clubs) 지부 설립을 구상했으나, 다른 참석자 다수는 기존의 신 페인(Sinn Féin) 명칭과 조직을 활용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라고 판단했다.[35] 이견으로 인해 운동이 분열될 가능성이 엿보였다.이러한 상황에서 로버트 풀러턴은 오 플라나간 신부가 두 그룹 사이를 중재하여 분열을 막을 것을 제안했다. 오 플라나간은 아서 그리피스와 성공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내 회의를 계속 진행시켰다. 하지만 그날 저녁, 플랑켓 백작의 거처에서 열린 회의 후 모임에서는 마이클 콜린스와 아서 그리피스 사이에 물리적 다툼이 벌어졌고, 오 플라나간이 이를 말려야 했다.[38]
논의 끝에, 다양한 세력을 아우르는 대표들로 구성된 소위 "무지개 위원회"(Rainbow Committee)가 결성되었다. 위원회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 공화주의 진영: 플랑켓 백작, 오 플라나간, 캐럴 브루하, 토마스 딜런
- 신 페인: 아서 그리피스, 숀 밀로이
- 노동 운동: 토마스 켈리, 윌리엄 오브라이언
- 아일랜드 국민 연맹: 스티븐 오마라
오 플라나간은 아일랜드 여성들을 대표하여 플랑켓 백작 부인을 위원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이 위원회는 이후 맨션 하우스 위원회(Mansion House Committee)로 알려지게 되었다.[6]
한편, 오 플라나간의 이러한 활발한 정치적 활동은 교회와 국가 당국의 우려를 샀으며, 왕립 아일랜드 경찰(RIC)은 그의 행적과 연설 내용을 면밀히 감시하고 기록했다.
7. 3. 신 페인 부대표 (Vice-President of Sinn Féin)
1917년 10월 말, 신 페인 전당대회에서 부활절 봉기 참전 용사들과 다른 지원 단체들이 아서 그리피스의 기존 조직과 통합되었다.[43] 분열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리피스와 플렁킷 백작이 물러나고 에몬 데 발레라가 대통령으로, 그리피스와 오 플라나간이 3년 임기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38] 그리피스의 오랜 동료들이 여전히 당의 선거 책임자였지만, 당의 주요 조직자 역할은 오 플라나간과 같은 새로운 인물들에게 더 많이 주어졌다.[40] 그는 매우 효과적인 조직자이자 당 관리자로 인정받았다.영국 정부가 아일랜드에 징병제를 도입하려 하자,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과 아일랜드 의회당(IPP)을 포함한 다양한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하여 대규모 반징병 운동을 벌였다. 군복무법 1916이 1918년 4월 16일 통과되자, 존 딜론은 IPP 의원들과 함께 영국 의회를 떠나 아일랜드로 돌아와 운동에 합류했다.[31] 오 플라나간은 이전부터 징병에 반대해왔으며, 5월 5일 발라데린에서 열린 대규모 집회에서 연설했다. 이 자리에는 존 딜론과 에몬 데 발레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섰다.[41]

영국 정부는 프렌치 경 주도로 이른바 독일 음모를 조작하여 대응했다.[42] 5월 16일과 17일, 69명의 신 페인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마이클 콜린스의 정보로 도피했다. 사제라는 이유로 체포를 면한 오 플라나간은 당의 임시 대통령 역할을 맡게 되었다.[43]
1918년 초 신 페인은 3번의 보궐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6월 20일 1918년 이스트 카반 보궐 선거가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독일 음모 사건으로 대부분의 지도부가 수감된 상황에서 오 플라나간은 글로스터 감옥에 있던 아서 그리피스를 위해 선거 운동을 이끌었다.[35] 그는 주교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 5월 26일 발리제임스더프에서 1만 명 앞에서 연설했다.[44] 검열된 이 연설문은 "오 플라나간 신부의 억압된 연설"이라는 제목으로 인쇄되어 널리 퍼졌다.[45] 오 플라나간은 선거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그의 활동은 언론에 광범위하게 보도되었다.[38] 그의 노력 덕분에 그리피스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43]
발리제임스더프 연설 때문에 오 플라나간은 코인 주교로부터 성직 정지 처분을 받았다.[5] 이는 영국 정부의 탄압보다 더 가혹한 조치라는 평가도 있다.[46] 크로스나와 클리포니 주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교회를 폐쇄했으나[35][27], 주교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고 교회는 오 플라나간의 요청으로 3주 후에 다시 열렸다.[5]

10월 29일, 지도부 대부분이 부재한 가운데 오 플라나간의 주재로 신 페인 당대회(Ard Fheis)가 열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1910년 이후 첫 총선이 예정되었다. 11월 11일 휴전 기념일에 신 페인은 총선 운동을 시작했다.[31] 오 플라나간은 신 페인의 주요 연설가로서 전국을 순회했으며, 종종 아일랜드 의용군 대원들이 그를 호위했다.[15] 선거 운동 기간은 인플루엔자 유행과 겹쳤다. 1918년 선거에서는 투표권 확대로 여성과 더 많은 젊은 남성들이 처음 투표에 참여했다. 오 플라나간은 연설에서 1916년 봉기의 희생을 기리고 징병을 지지했던 아일랜드 의회당 지도부를 비판했다.[6] 12월 선거 결과, 신 페인은 105석 중 73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아일랜드 의회당은 사실상 몰락했다.[38] 선거 후 오 플라나간은 "국민들은 신 페인을 선택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신 페인이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38]

드 발레라가 미국에 가고 아서 그리피스가 감옥에 있는 동안, 오 플라나간은 다시 신 페인의 임시 대통령 대행을 맡았다. 1920년 12월 6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가 평화에 대해 언급하자, 오 플라나간은 전보를 통해 공개적인 대화를 시도했다.[43] 첫 메시지는 "당신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평화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일랜드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첫 번째 단계로 무엇을 제안하십니까?"[6]였다. 이 독자적인 행동은 당내 동료들, 특히 비밀리에 평화 교섭을 진행 중이던 마이클 콜린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42][57] 콜린스는 오 플라나간의 행동이 언론에 알려지도록 했고, 로이드 조지는 이를 신 페인 지도부의 분열 신호로 해석하여 휴전 조건을 더 불리하게 변경했다. 오 플라나간은 자신의 전보가 더블린 성의 영향을 과도하게 받은 클룬 대주교의 노력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후에 밝혔다.[58] 12월 23일 미국에서 돌아온 드 발레라는 오 플라나간에게 평화 협상 중단을 설득했지만, 당에서 제명하는 대신 비난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40]
1월 초, 드 발레라는 오 플라나간을 통해 로이드 조지와 비공식 회담을 진행하여 영국 측의 제안 한계가 남아일랜드의 자치령 지위임을 확인했다.[59] 1월 말에는 오 플라나간과 제임스 오코너 판사가 런던에서 에드워드 카슨 경과 만나 평화적 해결 방안을 논의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0] 당시 로이드 조지는 오 플라나간을 중요한 협상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었다.[61] 그러나 드 발레라는 로이드 조지의 회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영국 정부는 갈등을 격화시켰고, 아일랜드 독립 전쟁의 마지막 6개월은 가장 폭력적인 시기가 되었다. 1921년 5월, 더블린과 벨파스트에 각각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38]
7. 4. 1918년 총선과 제1차 다일
신 페인 아르드 페이스(Ard Feis, 당대회)는 10월 29일 맨션 하우스에서 열렸다. 지도부 대부분이 투옥된 상황에서 오 플라나간이 회의를 주재하고 주요 연설을 했다. 예상대로 전쟁이 끝나자 1910년 이후 첫 총선이 치러졌다.
11월 11일, 휴전 기념일과 같은 날, 신 페인은 다시 모여 총선 운동을 시작했다.[31]
오 플라나간은 신 페인의 주요 연사이자 가장 인기 있는 연설가 중 한 명으로 전국을 순회했다. 군사 역사국 증언 기록에는 그의 연설과 여정에 대한 많은 기록이 흩어져 있다. 그는 보통 보디가드로 아일랜드 의용군 대원들을 동반했다.[15] 이 선거 운동은 인플루엔자 유행과 겹쳤고, 아일랜드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1918년 선거는 투표권이 세 배로 늘어 여성과 더 많은 젊은 남성들이 처음으로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오 플라나간은 발라가데린에서 연설하며 1916년의 희생을 이야기하고 징병을 장려한 아일랜드 의회당 지도부를 비난했다.[6] 12월에 투표가 실시되자 신 페인이 압승을 거두며 북로스커먼에서 시작된 과정을 마무리했고, 105석 중 73석을 차지하여 아일랜드 의회당을 초토화시켰다.[38]
1918년 선거가 끝난 후 오 플라나간은 "국민들은 신 페인을 선택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 페인이 무엇인지 국민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38]

성공적인 금권 거부 신 페인 후보들은 웨스트민스터에서 금권 거부를 했고 대신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다일 에이레안을 의회로 삼았다.[48]
제1차 다일의 출범은 1919년 1월 21일 더블린의 맨션 하우스에서 열렸다. "1918년 선거에서 당선된 103명의 의원 중 대다수는 참석하지 못했다. 일부는 자의로, 다른 이들은 상황의 강요로 부재했으며, 그들의 부재는 'faoi ghlas ag Gallaibh'(영국인에 의해 투옥됨)라는 구절로 기록되었다."[49] 해리 볼랜드와 미할 콜린스는 영국으로 건너가 에몬 데 발레라의 링컨 감옥 탈출을 조작하느라 부재했다.[42]
오 플란나간은 제1차 다일의 채플린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의장 캐할 브루하에 의해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굳건한 사제"로 소개되었으며, 기도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요청받았다.[81] 그는 이에 따라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기도를 아일랜드어와 영어로 읽었다. 제1차 다일의 개막은 그날 오후 티퍼레리에서 두 명의 경찰관이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독립 전쟁이 발발한 시점과 일치했다.[48]
7. 5. 독립 전쟁 시기 활동
1920년 말, 아일랜드 전역에서 폭력과 보복 행위가 계속해서 격화되었다. 10월 11일, 오 플라나간은 볼리나슬로 정신병원 위원회 회의에 가던 중 영국 치안군에게 체포되었으나 몇 시간 만에 풀려났다.[53]
10월 22일 금요일, 오 플라나간이 머물던 로스커먼의 방이 영국 보조군 2명과 RIC 장교 2명에게 급습당했다. 그들은 책과 서류를 가져가고 타자기를 압수했으며, 오 플라나간의 제의 가방을 찢고 5파운드 지폐를 훔쳐갔다. 이 사건은 당시 현장에 있던 RIC 순경 존 더피와 오 플라나간의 비서 베라 맥도넬의 증언으로 자세히 기록되었다.[54][55]

사흘 뒤인 10월 25일, 오 플라나간의 거주지였던 클리포니에서 남쪽으로 약 약 4.83km 떨어진 곳에서 머니골드 매복 사건이 발생했다.[48] 오 플라나간과 친분이 있던 지역 아일랜드 의용군 대원들이 클리포니 막사에서 나온 9명의 RIC 순찰대를 공격하여 4명을 사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0월 말, 쿨라빈에 주둔하던 영국 보조군 부대가 북부 슬라이고주로 이동하여 클리포니와 주변 지역을 여러 밤에 걸쳐 급습했다.[56] 클리포니의 여러 집과 그레인지 금주회관, 발린트릴릭 크리머리가 불탔다. 또한 오 플라나간의 이름을 딴 클리포니의 신 페인 회관도 불탔는데, 폐허가 된 벽에는 "살인 갱단의 비어있는 집"이라는 메시지가 지역 공화주의자들을 향해 적혀 있었다.[48] 11월 1일, 케빈 배리가 처형되고 테렌스 맥스위니의 장례식이 열린 날,[42] 오 플라나간은 자신의 개인 서류들을 로클린의 수녀원 세탁실에 숨겼다.[14] 이후 11월 21일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여 영국 치안군 13명, 민간인 16명, 공화주의자 포로 3명이 사망했다.[42]
드 발레라가 미국에 가 있고 아서 그리피스가 감옥에 수감된 동안, 오 플라나간은 신 페인의 임시 대통령 대행을 맡았다. 12월 6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가 언론을 통해 평화에 대해 언급하자, 오 플라나간은 전보와 신문을 통해 공개적인 대화를 시도했다.[43] 그가 보낸 첫 메시지는 "당신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평화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일랜드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첫 번째 단계로 무엇을 제안하십니까?"[6]라는 내용이었다.
이 예상치 못한 독자적인 행동에 신 페인 동료들은 놀랐고 그의 발언과 거리를 두었다. 특히 클룬 대주교를 통해 비밀리에 평화 협상을 진행하던 마이클 콜린스는 오 플라나간의 행동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휴전도 없는데 휴전을 논하느라 서로 앞다투는 어리석은 작품이나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42][57] 콜린스와 그리피스는 로이드 조지가 휴전 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한 클룬 대주교와 회담 중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오 플라나간의 메시지를 신 페인 지도부 내 분열의 신호로 해석하고, 즉시 클룬 대주교와의 합의 조건을 변경하여 무기 항복 요구를 포함시켰다.
오 플라나간은 나중에 자신의 전보가 더블린 성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는다고 생각한 클룬 대주교의 노력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했다.[58] 그는 12월 23일 드 발레라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영국 총리와의 대화를 계속했다. 드 발레라는 아일랜드 정부법이 통과되어 국가 분단이 확정된 바로 그날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오 플라나간에게 평화 협상을 중단하도록 설득했으며, 당의 권위를 무시한 것에 대해서는 제명 대신 비난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40]
드 발레라는 1921년 1월 초 오 플라나간을 통해 로이드 조지와 비공식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을 통해 영국이 제안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건이 남아일랜드에 대한 자치령 지위 부여라는 것을 확인했다.[59] 1921년 1월 말, 오 플라나간은 제임스 오코너 판사와 함께 런던에서 에드워드 카슨 경과 비공식적으로 만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방안을 논의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60] 오 플라나간의 이러한 활동과 회담 내용은 RIC 수사관들에 의해 면밀히 기록되고 보고되었다.[42] 평화 중재자로서 오 플라나간의 중요성은 로이드 조지에게도 인식되었고, 로이드 조지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밀 회담 방안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 드 발레라, 오 플라나간, 오코너, 카슨, 크레이그 간의 회담 후, 이 5명과 총리 및 보나 로 간의 회담
# 드 발레라의 선택에 따라, 드 발레라, 오 플라나간, 오코너, 총리 및 보나 로 간의 첫 회담[61]
하지만 드 발레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로이드 조지와 그의 내각은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길을 택했고, 아일랜드 독립 전쟁의 마지막 6개월은 가장 폭력적인 시기로 치달았다. 1921년 3월 14일 월요일, 오 플라나간의 친구이자 크로스나 출신인 패트릭 모란이 여러 살인 혐의로 마운트조이 감옥에서 처형되었다.[27] 신 페인은 1921년 5월 더블린과 벨파스트에 각각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38]
8. 공화주의 특사 (Republican Envoy) (1921-1925)
1921년 10월 말, 신 페인 아르드 페이스(당 대회)에서 미할 오 플라나간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특사로 선출되어 미국으로 파견되었다.[5] 그는 미국과 이후 호주 등지를 방문하며 아일랜드 공화국의 채권 발행을 지원하고 공화주의 대의를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던 중인 1921년 12월 6일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63] 1922년 1월, 신 페인은 조약 찬반을 둘러싸고 분열되었는데, 오 플라나간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 특사였던 존 J. 오켈리(Sceilg)와 함께 조약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들은 조약에 따라 수립된 아일랜드 자유국의 정당성이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22년에는 아일랜드 협동조합의 경제적, 인적 가치를 논하는 Co-operation|협력영어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더블린에서 소책자로 출판되기도 했다.[64]
이후 호주 방문 중 선동적인 연설을 이유로 추방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65], 그의 공화주의 운동 내 영향력은 여전했다. 국외에 체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24년 11월 신 페인 아르드 페이스에서 부회장 중 한 명으로 재선되었으며, 당의 임원 위원회에도 선출되었다.[66] 이는 조약 반대파 내에서 그의 입지가 굳건했음을 보여준다.
8. 1. 미국 방문 (1921-1922)

1921년 10월 말 열린 신 페인 아르드 페이스(당 대회)에서 오 플라나간은 공화당 특사로 미국에 파견되도록 선출되었다.[5] 여권과 신분 문제로 약간의 어려움을 겪은 후, 그는 11월에 미국에 도착했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파테 뉴스에서 그를 촬영하고 인터뷰하기도 했다.[62]
오 플라나간은 아일랜드 의회Dáil Éireann|달 에런ga의 두 번째 대외 채권 증서 대출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동부 해안을 순회하며 강연했고, 이는 많은 신문의 주목을 받았다.[63]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던 중인 1921년 12월 6일,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었다.[63]
1922년 1월이 되자 신 페인은 조약 문제를 놓고 찬반으로 분열되었다. 오 플라나간과 그의 친구이자 동료 특사였던 존 J. 오켈리(Sceilg)는 조약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아일랜드 자유국의 유효성이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8. 2. 호주 방문과 추방 (1922-1923)
오플래너건과 존 J. 오켈리(Sceilg)는 호주에 도착하여 멜버른의 대주교인 다니엘 매닉스를 만났다. 매닉스 대주교는 오플래너건의 메이누스 시절 스승 중 한 명이었으며, 그들의 임무에 정치적으로 공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보타니 만에 몇 주 동안 수감된 후 7월 16일에 추방되었다.[65]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프랑스로 보내졌다.[6]9. 아일랜드 귀환과 신 페인 분열 (1925-1927)
1925년 2월, 오 플란나간은 재보궐 선거 지원을 위해 미국에서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신 페인은 에이먼 데 발레라의 지도 아래 있었으나, 아일랜드 자유국 의회 참여를 거부하는 기권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38] 오 플란나간은 아일랜드 내전 이후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는 자유국 정부와 교회의 정치 개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6][71] 이로 인해 1925년 4월 코인 주교로부터 성직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다.[69] 같은 해 9월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왕립 얼스터 경찰대(RUC)에 의해 잠시 체포되기도 했다.[70]
신 페인 내부에서는 기권 정책을 둘러싼 노선 갈등이 심화되었다. 1926년 3월, 데 발레라는 충성 서약 폐지를 조건으로 자유국 의회에 참여하자는 안건을 특별 아르드 페이스(Ard-Fheis, 당 대회)에 제출했으나, 오 플란나간을 포함한 기권주의자들의 반대로 부결되었다.[67][71][72] 이 결정에 반발한 데 발레라는 결국 다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신 페인을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인 피아나 페일을 창당했다.[71] 이 분열은 데 발레라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존재한다.[67]
오 플란나간은 션 레마스가 "괴짜들의 집합체"라고 칭한 소수파와 함께 신 페인에 남게 되었다.[71] 이후 그는 정치 일선에서 다소 물러나 개인적인 발명과 역사 연구에 몰두했으며,[5] 생계를 위해 미국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병행했다.[81][73][74] 1927년 10월 부친상 당시 일시적으로 성직 정지가 해제되어 장례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으나,[6] 이후에도 공개적인 사제 활동은 제약을 받았다.[5] 한편, 데 발레라가 이끄는 피아나 페일은 1927년 6월 아일랜드 총선에서 신 페인을 압도하며 아일랜드 정치의 주요 세력으로 빠르게 부상했다. 이 시기 오 플란나간은 노동운동가 제임스 라킨과 교류하며 마르크스주의에 일부 공감대를 보이기도 했으나, 특정 좌파 단체에 가입하지는 않았다.[81]
9. 1. 신 페인 내 갈등과 분열
1925년 2월 21일, 오 플란나간은 여러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는 신 페인을 돕기 위해 미국에서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당시 신 페인은 에이먼 데 발레라에 의해 1923년 개편된 상태로, 다양한 세력의 연합체였으나 공화주의자만 포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극단주의자와 상대적 온건주의자, 이념가와 정치인, 근본주의자와 현실주의자가 뒤섞인 불안정한 조합이었다.[38] 신 페인은 1923년 8월 총선에서 44석을 얻었지만, 아일랜드 자유국 의회(오러크타스) 참여를 거부하는 기권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오 플란나간은 아일랜드 내전 이후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는 조약 지지파(쿰란 나 응게일)가 통치하는 국가 상황에 불만을 느꼈다.[6] 그는 가톨릭 교회 내 권력 남용에 대해 급진적인 견해를 표명했으며, 교회가 세속적인 문제에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것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1925년 재보궐 선거 유세에서 오 플란나간은 극심한 정치적 편향을 보인 아일랜드 주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교회를 제단에서 어리석고 무지한 정치적 연설을 하여 정치 회의 장소로 만들려는 시도"를 비난했다.[71] 또한 성사가 정치적 무기로 사용되고, 공화주의자들이 강단에서 부당하게 비난받는 현실에 분노했다.[6][67]
이러한 오 플란나간의 솔직한 민족주의 활동과 미국에서 했던 반(反)성직자적 연설, 그리고 "엘핀 교구 다섯 곳에서 흥분한 군중에게 혐오스러운 장광설"을 펼쳤다는 이유로, 1925년 4월 코인 주교는 오 플란나간의 사제 성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미사 집전을 금지했다.[69] 그의 견해, 특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은 신 페인 내 독실하거나 정치적 야심이 있는 일부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성무 정지 상태에서 그는 1925년 6월부터 12월까지 공화주의 저널인 ''아 포블라흐트''에 글을 기고하며 사회 문제에 대한 급진적인 입장을 유지했다.[59] 1925년 9월에는 아르마의 국회의원 이몬 도넬리와 함께 북아일랜드 러건 근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왕립 얼스터 경찰대(RUC)에 체포되어 하룻밤 구금된 후 더블린으로 추방되기도 했다.[70]
한편, 신 페인의 기권 정책에 점점 환멸을 느낀 데 발레라는 자유국 의회에 참여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밀리에 로마를 방문하여 오랜 친구인 몬시뇰 존 헤이건을 만나 충성 서약을 우회할 방안을 논의했다.[68]
1926년 3월 9일부터 11일까지 데 발레라는 특별 아르드 페이스(Ard-Fheis, 당 대회)를 소집했다.[67] 그는 충성 서약이 폐지될 경우 신 페인 의원들이 자유국 의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안을 제출했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사람들을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고속도로 대신 늪길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71] 오 플란나간은 이러한 움직임을 예상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다음과 같은 반대 제안을 제출하며 기권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 법에 의해 세워진 어떤 찬탈 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것은 Sinn Féin의 기본 원칙과 양립할 수 없으며, 아일랜드의 명예를 훼손한다.[72]
결국 데 발레라의 제안이 부결되자, 그는 신 페인을 탈당하여 피아나 페일을 창당했고, 신 페인의 유능한 인물 대다수가 그를 따라나섰다. 이로 인해 신 페인에는 션 레마스가 "괴짜들의 집합체"라고 묘사한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71]

코인 주교는 1926년 7월 사망했고, 에드워드 도어리가 후임 주교가 되었다. 1927년 10월 20일 아버지 에드워드 오 플라나간이 사망했을 때, 도어리 주교가 로마에 부재중인 동안 교구장 대리를 맡았던 하트 신부에 의해 오 플란나간의 성무 집행 금지가 일시적으로 해제되어 장례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6] 오 플란나간은 금지가 완전히 철회되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으나, 이후에도 공개적으로 미사를 집전하거나 교계 내에서 승진하지는 못했다.
오 플란나간은 축소된 신 페인에 남았고, 이 시기부터는 자신의 발명품 개발과 역사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시작했다.[5] 데 발레라의 피아나 페일은 1927년 6월 아일랜드 총선에서 빠르게 신 페인을 압도하며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성직자로서 수입이 없었던 오 플란나간은 성무 정지 기간 동안 매년 몇 달씩 미국을 여행하며 역사 연구와 아일랜드 정치 상황에 대한 강연으로 생계를 유지했다.[81] 그는 1926년 "오늘날의 아일랜드, 정치 및 경제", "아일랜드 문학, 게일어 및 영어", "유럽에서 아일랜드의 고대 지도력" 등의 강연을 광고하는 팸플릿을 제작했다.[73] 1927년 6월 30일 뉴욕 타라 홀에서 열린 "교회와 정치" 강연은 팜플렛으로 인쇄되어 판매되기도 했다.[74] 그는 노동조합 지도자 제임스 라킨과 교류하며 마르크스주의에 일부 공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특정 좌익 단체에 가입하지는 않았다.[81]
9. 2.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악화
1912년 로스커먼의 사제로 임명된 후, 같은 해 10월 클랜시 주교가 사망하고 후임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버나드 코인 주교가 부임했다. 코인 주교는 오 플라나간의 근대주의적 성향과 독립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어[6]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1913년 슬라이고 부두 파업 당시 오 플라나간이 파업 노동자들을 방문하여 지지를 표명한[5] 사회주의적 행보가 코인 주교로 하여금 오 플라나간을 슬라이고주의 클리포니로 이동시킨 원인이라는 시각이 있다.[5] 실제로 1914년, 오 플라나간은 사순절 강연차 로마에 머물던 중 로스커먼에서 해임되어 클리포니로 발령받았다는 통보를 받았다.[14]
아일랜드 내전 이후, 오 플라나간은 가톨릭 교회가 자유국 정부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6] 그는 가톨릭 교회 내부의 권력 남용과 세속적인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간섭 및 통제 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특히 1925년 여러 재보궐 선거 유세 과정에서 아일랜드 주교들의 극심한 정치적 편향성을 강하게 비판하며, "교회를 제단에서 어리석고 무지한 정치적 연설을 하여 정치 회의 장소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71] 또한, 그는 성사가 정치적 무기로 사용되고 공화주의자들이 강단에서 부당하게 비난받는 현실에 분노했다.[6][67]
오 플라나간의 솔직한 민족주의 활동, 미국에서의 반(反)성직자주의적 연설, 그리고 "엘핀 교구 다섯 곳에서 흥분한 군중에게 혐오스러운 장광설"을 설교했다는 점[69] 등을 이유로, 1925년 4월 코인 주교는 마침내 오 플라나간의 성직 활동을 정지시키고 미사 집전을 금지했다. 오 플라나간의 이러한 급진적인 견해, 특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당시 신 페인 내의 일부 독실하거나 정치적 야심이 있던 구성원들 사이에서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했다.[59]
코인 주교는 1926년 7월 발작으로 사망했다. 이후 1927년 10월 20일, 오 플라나간의 아버지 에드워드 오 플라나간이 사망했을 때, 당시 로마에 있던 도어리 주교를 대신하여 교구장 대리를 맡고 있던 하트 신부는 오 플라나간의 성직 정지 처분을 일시적으로 철회하여 그가 아버지의 장례 미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6] 오 플라나간은 이를 계기로 성직 정지가 해제되었다고 여겼을 수 있으나, 이후에도 공개 미사 집전이나 교회 내 승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5] 성직 정지 기간 동안 그는 성직자로서의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매년 몇 달간 미국 등지를 여행하며 역사 연구나 아일랜드 정치 상황에 대한 강연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81] 1927년 뉴욕에서는 "교회와 정치"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이 강연 내용은 팜플렛으로 인쇄되어 판매되었다.[74]
10. 발명과 학문 연구 (1927-1942)
1920년대 중반 이후, 특히 교회로부터의 수입이 중단된 시기에 미할 오 플란나간은 발명과 학문 연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으며, 특히 수영 애호가로서의 경험은 보호 수영 고글 'Suil and Ron' 개발로 이어졌다. 이 고글은 당시 수영 선수들에게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며 주목받았다.[75][76][77] 그의 발명 활동은 사후에도 인정받아, 1942년 더블린에서 열린 과학 발명품 전시회에서 그의 수영 고글이 수상하기도 했다.
발명 활동과 더불어 오 플란나간은 아일랜드 역사 연구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는 아일랜드 측량국에 보관된 방대한 양의 역사 기록, 특히 존 오도노반 등이 남긴 편지들을 정리하고 편집하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78] 미국 후원자들의 도움과 게일 연맹 등 아일랜드 문화 단체의 관심 속에서 진행된 이 작업은 아일랜드 내전 중 소실된 역사 자료에 대한 안타까움 속에서 더욱 의미를 가졌다.[69] 오 플란나간은 이 자료들을 타이핑된 문서로 만들어 아일랜드 국립도서관 등 주요 기관에 기증함으로써 후대의 아일랜드 고고학 및 역사 연구에 귀중한 기여를 했다. 또한 1930년대에는 아일랜드 정부의 의뢰를 받아 국립 학교에서 사용할 아일랜드어 카운티 역사 시리즈를 집필하는 등 저술 활동에도 힘썼다.
10. 1. 발명 활동
오 플라나간은 발명에 관심이 많았으며,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다. 그는 열렬한 오픈 워터 수영 선수였고, 회고록에서 멀라모어(Mullaghmore)에 거주할 당시 매일 밤 수영을 즐겼다고 밝혔다.[14] 이러한 경험은 그의 발명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1923년에는 장거리 해상 항해 경험(그는 이 분야에 많은 경험이 있었다)을 바탕으로 자이로스코프식 여행 침대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발명품은 'Suil and Ron' 또는 '물개 눈'으로 알려진 보호 수영 고글 세트로, 1926년과 1930년에 특허를 출원했다.[75] 1920년대 후반, 교회로부터 수입이 중단되었을 때, 그는 아일랜드 위클로 주 브레이에 있는 자택에서 가톨릭 게시판과 미국 강연 투어를 통해 이 고글을 우편 주문 방식으로 판매했다.[76] 오 플라나간 신부의 특허 고글은 당시 수영 선수들이 사용하던 오토바이 고글을 대체할 수 있는 최초의 실질적인 대안으로 평가받는다. 이 고글은 브라질 출신의 국제 마라톤 수영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아빌리오 알바로 다 코스타 쿠토와 같은 장거리 수영 선수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77]
또한, 1936년에는 중공벽 단열 제품 디자인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다.[5] 오 플라나간이 세상을 떠난 지 4개월 후인 1942년 11월, 더블린의 맨션 하우스에서 개최된 과학 발명품 전시회에서 그의 수영 고글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10. 2. 역사 연구와 저술
오 플란나간은 1920년대 중반부터 학문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아일랜드 측량국의 기록 보관소에 있던 존 오도노반과 다른 수집가들이 남긴 방대한 양의 손글씨 편지를 편집하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았다. 이 자료 중 일부는 피닉스 공원의 측량국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게일 연맹 회원들은 자료가 손실될 것을 염려하여 마이클 오라일리(Michael O'Rahlly)의 아일랜드 지형학회를 통해 사본을 만들고자 노력했다.[78]오 플란나간은 이 프로젝트를 총괄하며 손으로 쓴 편지들을 타이핑된 문서로 정리하고, 각 카운티별로 여러 부의 사본을 제작했다. 이렇게 정리된 기록들은 아일랜드 고고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으며, 오 플란나간의 이름은 측량국 편지 편집자로서 수많은 학술 논문의 주석에 등장한다. 1927년에 그는 '교회와 정치'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미국 후원자들의 기부를 통해 이 방대한 작업의 자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설명하고, 아일랜드 내전 중 포 코츠 폭격으로 인해 소실된 막대한 양의 역사 문서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69] 기부금의 첫 할부금은 앞으로 2년간 편지 정리 작업에 참여할 타이피스트들을 고용하는 데 사용되었다. 오 플란나간은 완성된 사본들을 아일랜드 국립도서관, 더블린 대학교, 벨파스트 공공 도서관에 기증했으며, 다른 세트는 뉴욕 공공도서관에 보냈다.
1930년대에는 아일랜드 정부의 의뢰를 받아 국립 학교에서 사용할 아일랜드어로 된 카운티 역사 시리즈 집필이라는 또 다른 역사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총 10부로 기획되었으며, 그중 5부가 그의 생전에 출판되었다.
11. 신 페인 대표와 스페인 내전 (1933-1939)
1933년 신 페인의 대표로 선출된 오 플라나간은 당내 분열과 쇠퇴 속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59] 이후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아일랜드 내 다수 가톨릭계의 입장과 달리 스페인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며 국제적인 연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81]
11. 1. 신 페인 대표 (1933-1935)
오 플라나간은 1933년 10월 신 페인의 대표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대표 선출에 반발한 브라이언 오히긴스는 당에서 사임했다.[59] 1934년 10월 14일에 열린 신 페인 연례 아르드 페이스(Ard Fheis, 당 대회)에서 오 플라나간은 "신 페인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며, 당의 여러 시기별 모습과 분열 과정을 자신의 독특한 시각으로 설명했다.[79]오 플라나간은 국립 묘지 협회(National Graves Association)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35년에는 킬데어의 무어스 브리지(Moore's Bridge)에서 아일랜드 내전 중인 1922년 12월 아일랜드 자유국 군대에 의해 처형된 7명의 공화주의 의용군을 기리는 기념비를 제막하는 행사를 주관했다.[80]
1930년대 중반 신 페인은 활력과 비전을 잃어가고 있었다. 1935년 더블린의 윈스 호텔(Wynn's Hotel)에서 열린 신 페인 아르드 페이스는 최근 병에서 회복한 오 플라나간이 의장을 맡았다. 그는 연설에서 신 페인이 최근 골웨이 보궐선거에 출마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고 언급하며, '스켈'(존 J. 오'켈리), 플렁킷 백작, 톰 매과이어에게 출마를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했다고 밝혔다.[70] 또한, 아비시니아 전쟁에 대해 언급하며, 이 전쟁의 배경에는 이탈리아가 지중해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을 깨뜨리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70]
그러나 1936년 1월, 오 플라나간은 26년간 당원으로 활동했던 신 페인에서 제명되었다. 브라이언 오히긴스와 메리 맥스위니와 같은 당내 강경파들은 오랫동안 오 플라나간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으며, 그가 제1대 달 개회식을 라디오로 재현하는 행사에 참여한 것을 빌미로 그를 축출했다.[70]
11. 2. 스페인 내전 참전

스페인 내전이 1936년 7월 18일에 발발했을 때, 오 플라나간은 아일랜드 가톨릭 사제 중 유일하게, 그리고 신 페인 당원 중 스페인 공화국의 정당성을 옹호한 인물 중 하나였다.[81] 드 발레라와 아일랜드 정부는 중립과 불간섭 정책을 유지했지만, 아일랜드 가톨릭 주교들은 프랑코를 거의 맹렬하게 지지하며 국민파를 위한 모금을 승인했다. 전직 자유국 경찰청장이자 블루셔츠의 지도자인 에오인 오더피는 약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국민파를 위해 싸우러 갔으며, 반면 프랭크 라이언이 이끄는 약 60명의 아일랜드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은 코놀리 대대라는 부대로 국제 여단에 합류하여 공화파를 위해 싸웠다.[82]
오 플라나간은 프랑코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6년 12월 3일, 그는 더블린 기술자 회관에서 열린 회의를 주재했는데, 이 자리에는 스페인에서 막 돌아온 조지 길모어, 한나 시히-스케핑턴, 프랭크 라이언 등이 참석하여 프랑코 지지 선전에 맞서는 대안적 시각을 제시했다. 1937년 1월 17일에는 게이어티 극장에서 열린 만원 회의에서 바스크 사제 라몬 라보르다 신부와 함께 연설했다.[83]
1937년 4월 17일, 오 플라나간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한 달 동안 강연하며 공화파를 위한 자금을 모으고 식량, 의류, 의료 물품 기부를 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진 프랑코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에, 그의 방문은 북미 성직자 다수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오 플라나간의 자격을 문제 삼으며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에 속거나 기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오 플라나간이 의장을 맡은 '스페인 지원 아일랜드 푸드십'(Irish Foodship for Spain)은 1938년 더블린에서 설립되었다.[6]
스페인 내전 발발 2주년을 맞아, 오 플라나간은 1938년 7월 19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스페인 지원 연합 사회'(United Societies for Spanish Aid) 주최 대규모 집회에 기조 연설자로 다시 초청받았다. 그의 연설 내용은 또다시 북미 성직자들의 분노를 샀다.[84]
1938년 9월, 국제 여단은 해산되어 귀국길에 올랐다. 코놀리 대대원 중 44명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지도자 프랭크 라이언은 체포되어 부르고스 감옥에 수감되었다. 코놀리 대대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1938년 12월 10일 더블린으로 돌아왔을 때, 오 플라나간은 애비 스트리트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몰즈워스 홀에서 열린 기념 회의에서는 분쟁에 참전했던 로디 코놀리, 테리 오 플라나간, 짐 프렌더개스트의 연설이 있었고, 오 플라나간은 스페인에서 사망한 이들을 기리는 배너를 공개했다.[85] 12월 말, 오 플라나간은 스페인으로 직접 가서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열린 회의에서 연설하고, 공화 정부 대표들과 만났다.[6]
12. 사망과 장례 (1942)
오 플라나간은 더블린 마운트 스트리트 크레센트의 한 요양원에서 짧은 투병 끝에 1942년 8월 7일, 66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위암으로 사망했다.[37] 그의 장례는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 주관으로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많은 시민들이 조문했다.[88] 그는 글래스네빈 묘지의 공화주의 묘역에 안장되었으며[6], 이후 그를 기리는 다양한 추모 활동이 이어졌다.
12. 1. 사망과 유언

오 플라나간은 더블린 마운트 스트리트 크레센트 7번지의 요양원에서 짧은 투병 끝에, 1942년 8월 7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경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66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37]
그의 마지막 편지는 1942년 8월 2일, 오랜 친구였던 클리포니의 버니 콘웨이에게 보낸 것이었다.
친애하는 버니에게, 안녕, 그리고 사랑하는 클리포니에게도 안녕. 나는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느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천국에서 클리포니 사람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 문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을요. —마이클 오 플라나간.[87]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의 션 피츠패트릭에 의해 조직된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88] 그의 유해는 시청 라운드 룸에 안치되었는데, 이곳은 그가 1915년 오도노반 로사의 장례식에서 연설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유해는 개방된 관에 놓였으며, 아일랜드 독립 전쟁 참전 용사들과 에이먼 데 발레라를 포함한 21,000명의 시민들이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의 곁을 지켰다.
오 플라나간은 글래스네빈 묘지의 공화주의자 묘역에 마우드 곤과 오스틴 스택 사이에 묻혔다.[6] 그의 오랜 친구 스킬그(Skellig, 존 조셉 오켈리의 필명)가 묘지에서 추도 연설을 했으며, 이 연설은 나중에 더블린의 전국 원조 보조 위원회에서 인쇄하여 출판했다.[89]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스킬그의 묘비 연설, 1942년 8월 10일"이라는 제목의 이 소책자는 수집가들의 소장품이 되었다.[90]

클리포니 교회 현관에는 그를 기리는 세례반이 놓였으나, 당시 가톨릭 교회는 그의 이름을 새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단순한 라틴 십자가와 1943년 날짜만 새겨졌다. 극작가 션 오케이시는 회고록에서 오 플라나간을 "이기심 없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나, 권위적인 주교들에게 좀 더 존경심을 보일 필요가 있었던 인물; 너무 많은 좋은 자질 때문에 오히려 어려움을 겪은 사제"라고 평가했다.[91] 1954년, 코놀리 협회의 편집자 C. 데스몬드 그리브스는 젊은 세대에게 오 플라나간의 기억이 잊힐 것을 우려하여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공화주의 사제"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다.[92] 1992년, 가톨릭 교회는 마침내 오 플라나간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을 허용했다. 제막식에는 그의 증손자인 패트 오 플라나간과 1942년 기념 위원회의 마지막 생존자 토마스 하가돈이 참석했다.[93] 1992년, 국립 묘지 협회는 그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무덤에 기념비를 세웠다. 2019년 8월 25일에는 국립 묘지 협회 주최로 글래스네빈 묘지의 오 플라나간 묘소에서 기념행사가 열렸으며, 토미 맥키어니의 연설 후 새로운 켈트 십자가 모양의 묘비가 공개되었다.[94]
12. 2. 장례와 추모
오 플라나간은 더블린 마운트 스트리트 크레센트 7번지의 요양원에서 짧은 투병 끝에, 1942년 8월 7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경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66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37]
그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1942년 8월 2일 자로, 클리포니의 오랜 친구 버니 콘웨이에게 보낸 것이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친애하는 버니에게, 안녕, 그리고 사랑하는 클리포니에게도 안녕. 나는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느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천국에서 클리포니 사람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 문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을요. —마이클 오 플라나간.[87]
오 플라나간의 장례는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의 션 피츠패트릭이 주관하여 국장으로 치러졌다.[88] 그의 유해는 더블린 시청의 라운드 룸에 안치되었는데, 이곳은 그가 1915년 오도노반 로사의 장례식에서 연설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열린 관에 안치된 그의 유해 앞에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 참전 용사들과 당시 총리였던 에이먼 데 발레라를 포함하여 약 21,000명이 조문했다.
오 플라나간은 글래스네빈 묘지의 공화주의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묘는 마우드 곤과 오스틴 스택 사이에 자리 잡았다.[6] 장례식에서 그의 오랜 친구였던 스킬그가 낭독한 추도사는 나중에 더블린의 전국 원조 보조 위원회에서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스킬그의 묘비 연설, 1942년 8월 10일"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인쇄 및 출판되어 수집가들의 소장품이 되었다.[89][90]
그를 기리기 위해 클리포니 교회 현관에는 기념 세례반이 놓였으나, 당시 가톨릭 교회는 오 플라나간 신부의 이름을 세례반에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단순한 라틴 십자가와 1943년이라는 날짜만 새겨졌다. 극작가 션 오케이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오 플라나간을 "이기심이 없고, 훌륭한 연설가였지만, 약간의 권위를 가진 주교들에 대해 더 많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위험한 필요성을 가졌던 인물; 너무 많은 좋은 자질 때문에 망가진 사제"라고 묘사했다.[91] 1954년에는 코놀리 협회의 편집자였던 C. 데스몬드 그리브스가 젊은 세대에게 오 플라나간의 기억이 잊힐 것을 우려하여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공화주의 사제"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92]
시간이 흘러 1992년, 가톨릭 교회는 마침내 오 플라나간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 설치를 허용했다. 이 명판 제막식에는 오 플라나간의 증손자인 패트 오 플라나간과 1942년 기념 위원회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토마스 하가돈이 참석했다.[93] 같은 해, 국립 묘지 협회는 그의 사망 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무덤에 기념비를 세웠다. 2019년 8월 25일에는 국립 묘지 협회 주최로 글래스네빈 묘지의 오 플라나간 묘역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토미 맥키어니가 연설한 후 새로운 켈트 십자형 묘비가 공개되었다.[94]
13. 유산과 평가
미할 오 플라나간은 아일랜드의 독립과 사회 정의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그의 유산은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나타난다. 1942년 사망 후[37]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88] 이는 그가 생전에 누렸던 대중적 지지와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는 글래스네빈 묘지의 공화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었다.[6]
오 플라나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극작가 션 오케이시는 그의 헌신과 연설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강직한 성품과 교회 권위에 대한 도전적인 태도를 지적했다.[91]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업적이 잊힐 것을 우려한 C. 데스몬드 그리브스와 같은 인물들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노력을 기울였다.[92]
그를 기리기 위한 노력은 사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고향 클리포니 교회에는 기념 세례반이 설치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부착되었다.[93] 또한 국립 묘지 협회는 그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묘지에 기념비를 세우고 추모 행사를 개최하는 등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94] 이러한 활동들은 오 플라나간이 아일랜드 공화주의 운동과 사회에 남긴 발자취가 후대에도 계속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13. 1. 정치적 유산
오 플라나간은 더블린 마운트 스트리트 크레센트 7번지의 요양원에서 짧은 투병 끝에 1942년 8월 7일, 66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37] 그의 마지막 편지는 오랜 친구였던 클리포니의 버니 콘웨이에게 보낸 것으로, 클리포니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87]
그의 장례식은 ITGWU의 션 피츠패트릭이 조직하여 국장으로 치러졌다.[88] 유해는 더블린 시청 라운드 룸에 안치되었는데, 이곳은 그가 1915년 오도노반 로사의 장례식에서 연설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열린 관에 안치된 그의 유해에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 참전 용사들과 에이먼 데 발레라를 포함한 약 21,000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경의를 표했다. 이는 그가 아일랜드 사회와 독립 운동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 플라나간은 글래스네빈 묘지의 공화주의 묘지에 마우드 곤과 오스틴 스택 사이에 묻혔다.[6] 그의 오랜 친구 스킬그가 묘지에서 한 추도 연설은 후에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스킬그의 묘비 연설, 1942년 8월 10일"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인쇄되어 수집가들 사이에서 귀하게 여겨졌다.[89][90]
사후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다. 극작가 션 오케이시는 그를 "이기심 없고 훌륭한 연설가"라고 칭찬하면서도, "주교들에 대해 더 많은 존경심을 가져야 할 위험한 필요성을 가진", "너무 많은 좋은 자질에 의해 망가진 사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91] 이는 그의 강직하고 때로는 급진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그의 고향 클리포니 교회 현관에는 기념 세례반이 놓였으나, 당시 가톨릭 교회는 그의 이름을 새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십자가와 1943년 날짜만 새겨졌다. 시간이 흘러 1954년, 코놀리 협회의 편집자 C. 데스몬드 그리브스는 오 플라나간이 젊은 세대에게 잊힐 것을 우려하여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공화주의 사제"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다.[92] 마침내 1992년, 가톨릭 교회는 오 플라나간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 부착을 허용했고, 제막식에는 그의 증손자와 1942년 기념 위원회의 마지막 생존자가 참석했다.[93]
같은 해 국립 묘지 협회는 그의 사망 50주년을 기념하여 글래스네빈 묘지의 그의 무덤에 기념비를 세웠다. 2019년 8월 25일에는 국립 묘지 협회 주최로 오 플라나간의 무덤 앞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으며, 토미 맥키어니의 연설 후 새로운 켈트 십자형 묘비가 공개되었다.[94] 이러한 활동들은 오 플라나간이 아일랜드 공화주의 운동에 남긴 유산이 계속해서 기억되고 평가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13. 2. 사회적 유산
오 플라나간은 더블린 마운트 스트리트 크레센트 7번지의 요양원에서 짧은 투병 생활 끝에, 1942년 8월 7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경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66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37]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는 1942년 8월 2일, 클리포니의 친구 버니 콘웨이에게 보낸 것이었다.
친애하는 버니에게, 안녕, 그리고 사랑하는 클리포니에게도 안녕. 나는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느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천국에서 클리포니 사람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 문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을요. —마이클 오 플라나간.[87]
오 플라나간의 장례식은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의 션 피츠패트릭이 주관하여 국장으로 치러졌다.[88] 그의 유해는 더블린 시청의 라운드 룸에 안치되었는데, 이곳은 그가 1915년 오도노반 로사의 장례식에서 연설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관은 열린 채로 안치되었으며, 아일랜드 독립 전쟁 참전 용사들과 에이먼 데 발레라를 포함한 약 21,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지키며 경의를 표했다.
오 플라나간은 글래스네빈 묘지의 공화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묘는 마우드 곤과 오스틴 스택 사이에 자리 잡았다.[6] 그의 오랜 친구였던 '스킬그'(Skellig, 존 조셉 오켈리의 필명)가 묘지에서 행한 추도 연설은 나중에 더블린의 전국 원조 보조 위원회에 의해 인쇄 및 출판되었다.[89]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스킬그의 묘비 연설, 1942년 8월 10일"이라는 제목의 이 소책자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90]''
그를 기리기 위해 클리포니 교회 현관에는 기념 세례반이 놓였지만, 당시 가톨릭 교회는 오 플라나간 신부의 이름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세례반에는 단순한 라틴 십자가와 1943년 날짜만 새겨졌다. 극작가 션 오케이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오 플라나간을 "이기심 없고, 훌륭한 연설가이며, 약간의 권위를 가진 주교들에 대해 더 많은 존경심을 가져야 할 위험한 필요성을 가진 인물; 너무 많은 좋은 자질 때문에 오히려 어려움을 겪은 사제"라고 평가했다.[91] 1954년, 코놀리 협회의 편집자였던 C. 데스몬드 그리브스는 젊은 세대가 오 플라나간을 잊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공화주의 사제"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하기도 했다.[92]
시간이 흘러 1992년, 가톨릭 교회는 마침내 오 플라나간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을 기념 세례반에 부착하는 것을 허용했다. 제막식에는 오 플라나간의 증손자인 패트 오 플라나간과 1942년 기념 위원회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토마스 하가돈이 참석했다.[93] 같은 해, 국립 묘지 협회는 그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글래스네빈 묘지의 그의 무덤에 기념비를 세웠다. 2019년 8월 25일에는 국립 묘지 협회 주최로 글래스네빈 묘지의 오 플라나간 묘소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으며, 토미 맥키어니의 연설 후 새로운 켈트 십자 형태의 묘비가 공개되었다.[94]
13. 3. 문화적 유산
오 플란나간은 더블린 마운트 스트리트 크레센트 7번지의 요양원에서 짧은 투병 끝에 1942년 8월 7일 금요일 오후 4시 30분경, 66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37]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는 1942년 8월 2일, 클리포니의 버니 콘웨이에게 보낸 것이었다.
:친애하는 버니에게, 안녕, 그리고 사랑하는 클리포니에게도 안녕. 나는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느끼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천국에서 클리포니 사람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특히 교회 문 앞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을요. —미할 오 플란나간.[87]
오 플란나간의 장례는 아일랜드 운수일반노동조합(ITGWU)의 션 피츠패트릭이 주관하여 국장으로 치러졌다.[88] 그의 유해는 시청 라운드 룸에 안치되었는데, 이곳은 그가 1915년 오도노반 로사의 장례식에서 연설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열린 관에 안치된 그의 유해 앞에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 참전 용사들과 에이먼 데 발레라를 포함한 21,000명의 사람들이 경의를 표하기 위해 지나갔다.
오 플란나간은 글래스네빈 묘지의 공화주의자 묘역에 마우드 곤과 오스틴 스택 사이에 묻혔다.[6] 그의 오랜 친구였던 '스킬그'(Skellig, 존 오코넬의 필명)가 낭독한 추도사는 나중에 더블린의 전국 원조 보조 위원회에서 인쇄하여 출판했다.[89]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스킬그의 묘비 연설, 1942년 8월 10일"이라는 제목의 이 소책자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귀한 자료가 되었다.''[90]''
그를 기리기 위해 클리포니 교회 현관에 기념 세례반이 놓였으나, 당시 가톨릭 교회는 오 플란나간 신부의 이름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세례반에는 단순한 라틴 십자가와 1943년이라는 날짜만 새겨졌다. 극작가 션 오케이시는 회고록에서 오 플란나간을 "사심 없고, 훌륭한 연설가이며, 약간의 권위를 가진 주교들에 대해 더 많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위험한 필요성을 가진, 너무 많은 좋은 자질 때문에 망가진 사제"라고 묘사했다.[91] 1954년, 코놀리 협회의 편집자였던 C. 데스몬드 그리브스는 오 플란나간의 기억이 젊은 세대에게 잊힐 것을 우려하여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공화주의 사제"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92]
시간이 흘러 1992년, 가톨릭 교회는 마침내 오 플란나간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을 세례반에 부착하는 것을 허용했다. 제막식에는 오 플란나간의 증손자인 팻 오 플라나간과 1942년 기념 위원회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토마스 하가돈이 참석했다.[93] 같은 해, 국립 묘지 협회는 그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무덤에 기념비를 세웠다. 2019년 8월 25일에는 국립 묘지 협회 주최로 글래스네빈 묘지의 오 플란나간 묘소에서 기념행사가 열렸으며, 토미 맥키어니의 연설 후 새로운 켈트 십자가 모양의 묘비가 공개되었다.[94]
13. 4. 후대의 평가
작가 숀 오케이시는 그의 회고록에서 오 플라나간을 "이기심이 없고, 훌륭한 연설가이며, 약간의 권위를 가진 주교들에 대해 더 많은 존경심을 가져야 할 위험한 필요성을 가진; 너무 많은 좋은 자질에 의해 망가진 사제"라고 평가했다.[91] 1954년, 코놀리 협회의 편집자였던 C. 데스몬드 그리브스는 오 플라나간의 기억이 젊은 세대에게 잊혀지고 있다는 점을 우려하며 그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 "프. 마이클 오 플라나간: 공화주의 사제"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했다.[92]오 플라나간을 기리기 위한 노력은 사후에도 이어졌다. 클리포니 교회 현관에는 기념 세례반이 설치되었지만, 초기에 가톨릭 교회는 오 플라나간의 이름을 명판에 새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세례반에는 단순한 라틴 십자가와 1943년 날짜만 새겨졌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992년, 교회는 마침내 그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 설치를 허용했다. 이 제막식에는 오 플라나간의 증손자인 패트 오 플라나간과 1942년 기념 위원회의 마지막 생존자인 토마스 하가돈이 참석하여 의미를 더했다.[93]
또한, 국립 묘지 협회는 그의 사망 50주년인 1992년을 기념하여 글래스네빈 묘지의 그의 무덤에 기념비를 설치했다. 2019년 8월 25일에는 국립 묘지 협회 주최로 글래스네빈 묘지의 오 플라나간 무덤 앞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토미 맥키어니가 연설한 후 새로운 켈트 십자형 묘비가 공개되었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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