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케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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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케 칸은 튀르크 및 몽골 민족이 사용한 이름으로, 몽골어에서 "어려운"을 의미한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조치의 아들로, 1207년에서 1209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252년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1257년 킵차크 칸국의 지도자가 되어 유능한 통치를 펼쳤다. 훌레구 칸의 바그다드 파괴에 분노하여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고 대립했으며, 1265년 캅카스 원정 중 사망했다. 그는 신 사라이를 건설했으며, 몽케 테무르가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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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케 칸 | |
---|---|
기본 정보 | |
이름 | 베르케 칸 |
원어 이름 | |
![]() | |
별칭 | 알-말리크 알-사이드 베르케 칸 |
통치 | |
칭호 | 킵차크 한국의 칸 (서부 절반, 청색 호르드) |
재위 기간 | 1257년–1266년 |
이전 통치자 | 울라그치 |
다음 통치자 | 멩구-티무르 |
가문 | |
왕가 | 보르지긴 가문 |
아버지 | 주치 |
어머니 | 술탄 하툰 (포로로 잡힌 호라즘 공주) |
배우자 | 멜리케 하툰 (알라에딘 케이쿠바드 1세의 딸) |
자녀 | 타그타가이 하툰 지제크 하툰 우르바이 하툰 케하르 하툰 |
출생과 사망 | |
출생 | 기원전 1208년경, 부르한 할둔, 몽골 |
사망 | 1266년/1267년 (58세), 쿠라 강, 아제르바이잔 |
종교 | |
종교 | 이슬람교, 이전에는 텡그리 신앙 |
2. 이름
베르케는 튀르크 민족과 몽골족 모두가 사용하는 이름이다. 몽골어에서 berke(고대 튀르크어의 bärk와 유사)는 "어려운, 힘든"을 의미한다.[2]
베르케는 칭기즈 칸의 장남인 조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두 가지 설이 있다. 맘루크 사절단이 이슬람력 663년(서기 1264/1265년)에 베르케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가 56세였다는 기록에 따르면, 1207년에서 1209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동시대 페르시아 역사가 주자니는 베르케가 몽골 제국의 호라즘 제국 침공(1219년-1221년) 중에 태어났다고 주장했다.[3]
베르케 칸은 몽골 왕족 가운데 이슬람교 신앙을 가졌던 것이 확인되는 가장 이른 인물 중 하나이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집사』 등에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동시대 맘루크 왕조의 군주 일투투미쉬를 섬겼던 역사학자 주즈자니의 저서 『타바카트-이 나시리』(1259년-1260년 완성)에서 그의 이슬람 신앙 배경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다.
3. 출생과 배경
주자니의 주장은 베르케의 어머니가 호라즘 제국의 무함마드 2세의 딸로, 전쟁 중 포로로 잡힌 칸-술탄(또는 술탄 카툰)이라는 역사가 장 리샤르의 연구와 연결된다. 조치와 칸-술탄의 결혼은 1220년에 이루어졌으므로, 이 설에 따르면 베르케는 빨라도 1221년에 태어났을 것이다.[4]
1229년 봄, 베르케는 형제들인 오르다, 바투, 시반, 탕구트, 토카 테무르 등 조치 가문의 여러 아들들과 함께 삼촌 오고타이 칸이 대칸으로 즉위하는 쿠릴타이에 참석했다.
1236년에 시작된 바투 칸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서방 원정에 형제들과 함께 참여했다. 이 원정에는 약 15만 명의 대규모 군대가 동원되었으며, 시베리아에서 출발하여 무슬림 볼가 불가르와 킵차크의 영토로 진군하여 이들을 정복했다. 베르케는 특히 킵차크인 정벌에서 공을 세웠다. 바투와 수부타이는 베르케에게 코카서스 북쪽 지역의 킵차크인 정복 임무를 맡겼다. 이후 몽골군은 1237년에 랴잔과 수즈달 공국을 파괴하고 러시아로 더 깊숙이 진군했다. 1238년에서 1239년 사이 겨울 동안 베르케는 킵차크인을 격파하고 메르키트 부족장을 사로잡았으며, 쿠마 강과 테레크 강 유역의 카스피 해 서쪽 대초원을 정복했다.
유럽 침공 중에는 형 바투의 지휘 아래 모히 전투에 참전하여 헝가리 왕국 군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오고타이 칸이 사망한 후,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기 위해 몽골에서 열린 쿠릴타이에 베르케는 형제들과 함께 바투를 따라 참석했다.
1249년, 베르케는 몽케 칸을 대칸으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토카 테무르와 함께 조치 가문의 군대를 이끌고 케룰렌 강 유역으로 가서 소르칵타니 베키의 오르도를 지켰으며, 몽케 칸 곁에서 바투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활동했다. 몽케 칸 옹립에 대한 베르케의 기여는 컸으며, 이는 후일 훌라구가 세운 일 칸국과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분쟁에서 일 칸국 측의 대응이 늦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4. 이슬람교 개종
주즈자니에 따르면, 베르케는 아버지 조치가 불가르 원정 중 태어났으며, 조치는 아들이 무슬림으로 자라길 원하여 탯줄을 자르는 역할과 유모 모두 무슬림에게 맡겼다고 한다. 베르케는 어린 시절부터 신뢰할 수 있는 무슬림 학자에게 이슬람 교육을 받았고, 마 와라 안나흐르의 호젠트에서 코란을 배웠으며, 적절한 시기에 할례도 받았다. 성장하여 조치 울루스 내 군대를 이끌게 되자, 휘하의 무슬림 부대(바투 시대부터 약 3만 명 규모)는 그의 지휘 아래 있었고, 이들은 항상 예배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1233년경 베르케는 맘루크 왕조에 무슬림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냈으나, 당시 몽골 제국과 적대 관계였던 술탄 일투투미쉬는 이를 정찰로 의심하여 추방했다. 이 시기 베르케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성지를 참배하고 부하라를 방문했으며,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도 여러 차례 우호 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베르케는 1252년 부하라에서 공식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사라이-주크에 머물던 중 부하라에서 온 대상을 만나 그들의 종교에 대해 묻고 깊은 감명을 받아 개종을 결심했으며, 이후 동생 투흐 티무르도 설득하여 함께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5. 킵차크 칸국 통치
1255년 바투 칸이 사망하자, 몽골 제국의 대칸 몽케 칸은 그해 쿠릴타이에 참석했던 바투의 장남 사르타크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사르타크는 조치 울루스로 귀환하던 중 병사했다. 이에 몽케 칸은 다시 사르타크의 동생(혹은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이자 바투의 넷째 아들인 울라그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울라그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바투의 후궁 중 으뜸이었던 보라크친 하툰이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울라그치 역시 불과 몇 달 만에 요절하면서, 1257년 조치 가문의 연장자였던 베르케가 킵차크 칸국의 칸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베르케는 유능한 통치자로서 몽골 제국의 서부 칸국인 킵차크 칸국을 유지하고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몽골군은 갈리치아의 다니엘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으며, 장군 부룬다이의 지휘 아래 1259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대한 두 번째 대규모 공격(폴란드에 대한 2차 몽골 침공)을 감행하여 루블린, 자비호스트, 산도미에시, 크라쿠프, 비톰 등을 약탈했다. 또한 1265년에는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령 트라키아를 공격하기도 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미하일은 이후 킵차크 칸국에 공물로 많은 귀중한 직물을 보냈다.
5. 1. 훌라구 칸과의 대립 (베르케-훌라구 전쟁)
베르케-훌라구 전쟁
베르케는 독실한 무슬림이었으며, 그의 개종 이후 금장 칸국은 점차 이슬람화되었으나, 여전히 애니미즘 신봉자와 불교 신자들도 공존했다. 베르케는 훌라구 칸이 바그다드를 파괴하고 아바스 칼리파국의 마지막 칼리프 알-무스타심을 살해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또한 훌라구가 시리아와 이집트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며 동료 무슬림들을 위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 그를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훌라구가 이끄는 일 칸국 군대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에게 패배하여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상실했고, 이후 일 칸국의 서쪽 국경은 티그리스 강에 머물게 되었다. 베르케는 훌라구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지만, 몽케 칸이 사망하고 훌라구가 툴루이 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훌라구는 1262년에 자신의 영토로 돌아왔으나, 아인잘루트에서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베르케와의 전면적인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베르케는 이미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약탈했을 때부터 이러한 충돌을 예고했었다. 무슬림 역사가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는 베르케 칸이 바그다드 공격에 대해 몽골인과 무슬림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고 기록했다.
> "그(훌라구)는 무슬림의 모든 도시를 약탈했고, 칼리프의 죽음을 초래했다. 신의 도움으로 나는 그에게 그토록 많은 무고한 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베르케는 칸이 되기 전에도 형 바투 칸에게 "우리는 몽케의 등극을 도왔지만, 그는 친구와 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우리 친구인 칼리프의 땅을 탐내고 있다. 이는 비참한 일이다"라고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베르케와 훌라구 간의 갈등은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토 문제도 얽혀 있었다. 몽케 칸은 본래 칭기즈 칸이 조치에게 분배했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여름 목초지를 훌라구에게 주었는데, 베르케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나 몽케 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훌라구의 서방 원정군에 참여했던 조치 가문의 왕족들, 특히 바라칸, 크리, 토칼 등이 훌라구 휘하에서 의문스럽게 사망하거나 처형된 사건은 두 세력 간의 불신과 적대감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256년 바라칸이 훌라구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베르케에게 송환되었다가 다시 훌라구에게 보내져 처형되었고, 이후 크리와 토칼마저 급사하자 독살설이 퍼지며 양측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5]
경제적인 갈등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일 칸국이 이란 북부의 부를 통제하고 금장 칸국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맘루크 왕조로의 노예 판매를 금지하려 하자, 베르케는 이를 경제적 압박으로 받아들이고 지하드를 선포하게 되었다.[6]
처음에는 같은 몽골인끼리의 싸움을 피하고자 했던 베르케("몽골인들은 몽골의 칼에 죽는다. 만약 우리가 단결했다면 우리는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도 결국 1262년 전쟁을 결심했다. 그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술탄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맺었다. 1261년부터 양측은 사절을 교환하며 동맹 관계를 구축했고, 훌라구 휘하에서 탈출한 조치 가문 군인들이 맘루크 왕조로 망명하는 것을 도왔다.
1262년, 베르케는 조카 노가이에게 3만 명의 군사를 주어 캅카스를 넘어 훌라구의 영토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베르케-훌라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몽골 제국 내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내전으로, 제국의 실질적인 분열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양측은 서로의 영토에 있는 오르토그(상인 조합) 상인들을 학살하며 적대감을 드러냈다.[5] 1263년, 노가이가 이끄는 금장 칸국 군대는 테레크 강 전투에서 훌라구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고, 훌라구는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 했다. 이 침공 과정에서 조치 가문의 왕족들과 군민들은 캅카스나 호라산 방면에서 킵차크 초원으로 도주했고, 네구델이 이끄는 일부는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경계 지역을 점령했다.
한편, 베르케는 툴루이 내전(1260-1264)에서 대칸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 칸과 다투던 아릭 부케를 지지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화폐를 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릭 부케는 1264년 쿠빌라이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쿠빌라이는 훌라구와 베르케에게 아릭 부케 문제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했지만, 두 사람 모두 쿠릴타이 참석을 거부하면서 몽골 제국의 통합은 요원해졌다.
훌라구는 테레크 강 전투에서의 패배를 만회하지 못하고 1265년에 사망했다. 같은 해, 노가이가 데르벤트에서 훌라구의 아들 아바카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하자, 베르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정복에 나섰다. 그러나 그루지야의 트빌리시로 진군하던 중 쿠라 강을 건너다 병사했다. 그의 시신은 수도 사라이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베르케 사후 칸위는 몽케 테무르가 계승했다.
베르케는 또한 볼가 강 하류에 새로운 수도인 '''베르케 사라이'''(신 사라이)를 건설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6. 죽음과 유산
베르케는 1266년과 1267년 사이에 사망했다.[7] 일 칸국의 칸이자 훌레구의 아들인 아바카 칸을 공격하기 위해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 부근에서 쿠라 강을 건너려던 중 병사했다. 그의 시신은 킵차크 칸국의 수도인 바투 사라이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베르케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사후 칸위는 증손자인 몽케 테무르가 계승했다.[7] 베르케가 추진했던 맘루크 왕조와의 동맹 및 일 칸국 봉쇄 정책은 몽케 테무르에 의해 계승되었다.[7] 베르케는 1261년 일 칸국 내에 있던 조치 가문 군민들에게 맘루크 왕조로 망명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1262년부터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와 사절을 주고받으며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이는 몽골 제국 내 다른 세력, 특히 일 칸국을 견제하는 중요한 외교적 발판이 되었다.
베르케와 훌레구 사이의 대립(베르케-훌레구 전쟁)은 몽골 제국 분열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대립의 배경에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영유권 문제뿐만 아니라, 훌레구의 서방 원정 당시 참여했던 조치 가문 왕족들(바라칸, 크리, 토칼 등)이 연이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특히 이들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양측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1262년 9월, 베르케는 노가이를 지휘관으로 삼아 3만 명의 기병을 보내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게 함으로써 베르케-훌레구 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베르케는 '신 사라이'(Новый_Сарай|노비 사라이ru)를 건설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7. 가계
베르케는 칭기즈 칸의 장남인 조치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호라즘 제국의 무함마드 2세의 딸로 알려진 술탄 카툰이다.[4]
베르케의 정확한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요 주장이 있다. 첫째는 663 AH(1264년 또는 1265년)에 맘루크 사절단이 그를 방문했을 때 그의 나이가 56세였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토대로 하면 1207년에서 1209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둘째는 동시대 페르시아 역사가 주자니의 주장으로, 베르케가 1219년에서 1221년 사이에 있었던 호라즘 제국에 대한 몽골 제국의 침공 시기에 태어났다는 것이다.[3]
후자의 주장은 베르케의 어머니 칸-술탄(술탄 카툰)이 호라즘 침공 당시 포로로 잡혔으며, 조치와의 결혼이 1220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이 경우 베르케는 빨라도 1221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4]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조치 칸 |
어머니 | 술탄 카툰[4] |
친할아버지 | 칭기즈 칸 |
친할머니 | 보르테 우진 |
외할아버지 | 무함마드 2세 (추정)[4] |
친증조할아버지 (부계) | 예수게이 바가투르 |
친증조할머니 (부계) | 호엘룬 |
친증조할아버지 (모계) | 데이 세이첸 |
친증조할머니 (모계) | 타초탄 |
참조
[1]
서적
Islamization and Native Religion in the Golden Horde
Penn State Press
[2]
서적
Festschrift in Honor of Andras J. E. Bodrogligeti
Türk Dilleri Araştırmaları
[3]
서적
The Mongols and the Islamic World: From Conquest to Conversion
Yale University Press
[4]
서적
Women and the Making of the Mongol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간행물
The role of the ortoq in the Mongol Empire in forming business partnerships
[6]
서적
Buddhism and Islam on the Silk Road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1-06-06
[7]
서적
E.J. Brill's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Volume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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