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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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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빗살무늬토기 시대는 빗살무늬토기가 사용된 시기로, 초기,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기원전 8000년에서 6000년경까지 덧무늬토기가 남해안과 북부 지방에서 발견되었으며,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를 "이른 빗살무늬 시대"로 묘사한다. 전기는 기원전 6000년부터 3500년경으로, 어로와 수렵을 하며 움집에 거주했고, 빗살무늬 토기가 유라시아 북부 지역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있다. 중기는 기원전 3500년부터 2000년경으로 잡곡 재배가 시작되었고, 동삼동 유적 등에서 농경의 증거가 발견된다. 후기는 기원전 2000년부터 1500년경으로 내륙 거주가 증가하고 농업에 의존하는 생활이 진행되었으며, 초기 민무늬 토기가 등장한다. 빗살무늬토기의 기원과 농경, 암각화의 연대 등에 대한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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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시대
개요
빗살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시대
시대신석기 시대
존속 기간기원전 8000년경 – 기원전 1500년경
지역한반도
이전 시대한국의 구석기 시대
다음 시대민무늬토기 문화
주요 유적서울 암사동 유적
강원도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지
제주도 고산리 유적
그 외 다수
명칭
한국어빗살무늬토기 시대, 즐문 토기 시대
한자櫛文土器時代
로마자 표기Jeulmun togi sidae
사회 및 경제
사회어로, 수렵, 채집 생활
씨족 사회
경제초기 농경 시작
정착 생활
문화적 특징
토기빗살무늬토기 (즐문 토기)
다양한 문양과 형태
주거 형태움집
신앙애니미즘, 샤머니즘
기타
관련 유적패총

2. 역사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기원전 40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 시대는 일반적으로 초기, 전기, 중기, 후기의 네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각 시기별 특징과 유적 등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2. 1. 초기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6000년)

빗살무늬토기 시대의 초기는 대략 기원전 8000년경부터 기원전 6000년경까지로 여겨진다.[19] 이 시기에는 주로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덧무늬토기(隆起紋土器, 융기문토기)가 발견된다. 덧무늬토기는 토기 표면에 진흙 띠를 덧붙이거나 표면을 맞집어 돋게 하여 무늬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

넓은 입을 가진 전형적인 빗살무늬 토기, 기원전 3500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덧무늬토기는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출토되었다. 주요 발견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19]

지역주요 유적지
남부제주도 고산리, 부산 동삼동, 부산 영선동, 울산 우봉리, 거창 임불리, 양산 신암리, 통영 상노대도
북부양양 오산리, 춘천 내평리



또한, 일본 쓰시마섬의 고시다카 유적(越高遺蹟)에서도 부산 동삼동 유적의 것과 유사한 형태의 덧무늬토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45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의 정확한 기원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초기 형태인 덧무늬토기(융기문토기, 隆起文土器)는 제주특별자치도 고산리나 울산 해안의 언양 우봉리와 같은 남부 유적에서 주로 나타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를 '이른 빗살무늬 시대'로 구분하며, 특히 고산리 유적의 토기 연대를 기원전 10,000년까지 올려 보기도 한다.[7]

고산리 유적 토기 샘플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중 일부(10,180±65 BP [AA-38105])는 이러한 이른 시기 주장을 뒷받침하지만, 다소 늦은 연대를 보이는 결과도 있어 논란이 있다.[8] 만약 이른 연대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고산리 덧무늬토기는 중국 중남부, 일본 열도, 러시아 극동 지역의 토기와 더불어 세계 선사 시대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 그룹에 속하게 될 것이다. 고고학자 쿠즈민(Kuzmin)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절대 연대 측정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9]

2. 2. 전기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3500년)

전기는 기원전 6000년부터 기원전 3500년경까지로 추정된다. 이 시기 사람들은 주로 어로와 수렵을 통해 식량을 얻었으며, 움집을 짓고 반(半)정주적인 생활을 하였다. 대표적인 전기 유적으로는 서포항, 암사동, 오산리 등이 있다.[10]

기원전 4000년경에는 한반도의 대표적인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토기는 유라시아 북부 지역(핀란드, 러시아, 시베리아, 만주 등)에 널리 퍼져 있던 빗살무늬토기(Comb ceramic) 문화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20] 가장 오래된 빗살무늬 토기는 요하 문명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17], 이는 당시 한반도가 우랄계 민족(하플로그룹 N (Y 염색체))이 중심이 된 요하 문명권[18]의 영향 아래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를 근거로 한국 민족의 기층을 우랄계 민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전기 후반기에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대규모 패총(조개더미)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울산 세죽리, 동삼동 패총, 가도 등의 유적에서는 조개류를 식량 자원으로 활발히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다만, 일부 고고학자들은 본격적인 패총의 등장을 전기 후기보다는 그 이후 시기로 보기도 한다.

한편, 같은 시기 일본 열도에서는 조몬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소하타식 토기(曾畑式土器)가 규슈에서 난세이 제도까지 퍼져나갔는데, 이는 한반도 빗살무늬 토기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시기 한반도 남부와 규슈 지역 사이에서는 한반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이는 "결합식 낚시 바늘"과 일본 열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 여겨지는 "융기문 토기", "톱니 모양 첨두기", "돌 톱" 등 공통된 문화 요소들이 발견되어 당시 두 지역 간의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2. 3. 중기 (기원전 3500년 ~ 기원전 2000년)

중기는 기원전 3500년경부터 기원전 2000년경까지의 시기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는 잡곡 등의 재배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여전히 어로나 수렵이 생활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경의 증거로는 최와 베일(Choi and Bale)이 최소 14개의 중기 빗살무늬토기 시대 유적지(기원전 3500-2000년경)에서 탄화된 식물 잔해와 농업용 석기를 근거로 제시한 바 있다.[11] 구체적인 예로,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유적(사적 제266호)에서는 AMS 연대 측정 결과 중기 빗살무늬토기 시대에 해당하는 재배된 수수(*Setaria italica* ssp. *italica*) 씨앗이 발견되었다.[12] 동삼동 유적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조개더미 유적으로, 1930년대 초 일본인들에 의한 소규모 발굴을 시작으로 1962년에서 1964년까지는 미국 학자들에 의해,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서울대학교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의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북한 황해북도 지탐리 유적에서도 농경의 흔적이 보고되었다. 지탐리 움집에서는 북한 고고학자들이 기장이라고 주장하는 수백 그램의 탄화된 재배 작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13][14] 그러나 이 곡물이 실제로 재배된 기장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유물이 체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습되었고, 흑백 사진만 존재하며, 원 보고서가 한국어로만 되어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된다. 따라서 당시의 농경은 심해 어업, 조개 채취, 사냥 등 기존의 생계 활동을 보조하는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토기는 이른 시기 말에 등장하여 중기에 서해안 내륙과 남해안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전형적인 빗살무늬 토기" 또는 ''빗살무늬토기''이다. 이 토기는 그릇 표면 전체에 걸쳐 빗살 무늬, 끈으로 감은 듯한 자국 등 다양한 장식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2. 4. 후기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500년)

후기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전 1500년경까지의 시기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내륙 지역의 거주가 증가하고 해안가의 패총 수가 줄어들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점차 농업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으로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조개류 채취의 중요성이 감소했으며, 진주시 대평면의 상촌리 유적이나 거창군의 임불리 유적과 같은 내륙 정착지가 등장했다.[15] 일부 연구자들은 조개류 개체 수 감소와 같은 환경적 요인과 함께, 사람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재배 작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을 것으로 본다.[15]

이 시기에는 다양한 생계 활동과 더불어 소규모의 화전 농업(화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생활 방식은 이후 등장하는 초기 민무늬 토기 시대(기원전 1500년~기원전 1250년)의 생활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15] 후기 빗살무늬 토기 시대는 중국 랴오닝성의 하가점 하층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해당한다. 고고학자들은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가 이 시대의 유물일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후기 빗살무늬 토기 시대의 수렵 채집 및 초기 경작자들은 점차 남쪽으로 이동한 새로운 집단에 의해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김장석은 더 발전된 화전 농업 기술을 가지고 무문토기 無文土器를 사용한 이들이 남하하면서, 기존 빗살무늬 토기 사용자들을 점차 그들의 생활 터전("자원 구역")에서 밀어냈다고 주장한다. 그는 무문토기 사용자들이 토지를 화전 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빗살무늬 토기 사용자들의 사냥터가 잠식되고 차단되었을 것으로 설명한다.[16]

3. 빗살무늬토기의 형태와 특징

토기 겉면에 빗과 같은 무늬새기개를 이용하여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긴 토기를 말한다. 주로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 혹은 여러 가닥이 난 빗살 모양의 무늬새기개를 사용하여 그릇 바깥 면에 짧은 줄무늬를 누르거나 그어서 새겼기 때문에 빗살무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토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선이나 점선으로 이루어진 짧은 줄을 한쪽 방향으로 그리거나 서로 방향을 엇갈리게 배열하여 마치 생선 뼈와 같은 모양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릇의 형태는 밑바닥이 달걀처럼 뾰족한 포탄 모양이거나, 밑이 납작하여 깊은 바리와 같은 모양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크기와 쓰임새에 따라 독처럼 큰 것부터 항아리, 단지, 대접, 보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토기를 만드는 바탕흙으로는 진흙모래만 섞은 것과 석면이나 활석 부스러기 등을 섞은 것이 사용되었다. 구워진 토기의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갈색 계열이 주를 이룬다. 제작 온도는 대략 600°C에서 700°C 사이로 추정되며, 특별한 가마 시설 없이 땅을 판 구덩이에서 장작불을 피워 구운 것으로 보인다.

빗살무늬토기의 용도는 그 크기에 따라 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의 과 같이 큰 토기는 곡식 등을 담아두는 저장용으로, 중간 크기의 토기는 음식을 끓이는 취사용으로, 작은 토기는 음식을 담는 식기나 조리 과정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빗살무늬토기는 만들어진 지역에 따라 그 형태와 무늬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4. 지역별 빗살무늬토기

기원전 4000년경 한반도에 출현한 빗살무늬 토기는 유라시아 북부 일대(핀란드,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등)에서도 보이는 토기이다. 가장 오래된 형태의 빗살무늬 토기는 요하 문명에서 발견되었으며[17], 이는 당시 한반도가 우랄계 민족(하플로그룹 N (Y 염색체))이 주도한 요하 문명권[18]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는 한국 민족의 기층 형성 과정에 대한 중요한 단서로 여겨진다.

한편, 일본 열도조몬 시대 전기에 규슈에서 남서 제도까지 퍼진 소하타식 토기 역시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시기 한반도 남부와 규슈 지역에서는 공통된 문화 요소들이 발견되는데, 한반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이는 "결합식 낚시 바늘"과 일본 열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이는 "융기문 토기", "톱니 모양 첨두기", "돌 톱"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두 지역 간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5. 빗살무늬토기와 관련된 논쟁

빗살무늬토기 시대는 여러 측면에서 학술적인 논쟁이 진행 중이다. 주요 쟁점은 토기의 기원, 농경의 시작과 규모, 그리고 대표적인 유적인 암각화의 제작 연대 등이다.

빗살무늬토기 자체의 기원과 더불어, 제주특별자치도 고산리 유적 등에서 발견된 이른 시기 융기문 토기의 연대 측정 결과 해석, 그리고 요하 문명과의 연관성 등이 논의되고 있다. 특히 고산리 토기의 연대는 세계 토기 역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므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빗살무늬토기 시대 중기에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으나, 그 규모와 당시 생계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일부 유적에서 발견된 작물 유존체의 해석을 둘러싸고 학계의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나 천전리 각석과 같은 중요한 암각화 유적의 정확한 제작 시기를 밝히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이며,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명확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논쟁들은 빗살무늬토기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5. 1. 빗살무늬토기의 기원



빗살무늬 토기의 정확한 기원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시기의 토기로 보이는 융기문 토기가 제주특별자치도 고산리와 울산 해안의 언양 우봉리 등 남부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를 "이른 빗살무늬 시대"로 분류하며, 특히 고산리 유적의 토기가 기원전 10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7] 실제로 고산리 토기 시료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중 하나는 기원전 10,180±65년(10,180±65 BP [AA-38105])으로 나타나 매우 이른 시기의 제작 가능성을 뒷받침하지만, 다른 측정 결과는 이보다 늦은 연대를 보여준다.[8] 만약 이른 연대가 맞는다면, 고산리 융기문 토기는 중국 중남부, 일본 열도, 러시아 극동 지역의 토기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다만, 고고학자 쿠즈민은 이 주장을 명확히 하기 위해 더 많은 절대 연대 측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9]

일반적으로 빗살무늬토기 시대의 전기(前期)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기원전 3500년경까지로 본다. 이 시기 사람들은 주로 어로와 수렵 활동을 했으며, 움집을 짓고 반영구적인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후반기 유적에서는 대규모 조개더미가 발견되기도 한다.

기원전 4000년경에는 본격적인 빗살무늬 토기가 등장한다. 이 토기는 유라시아 북부의 넓은 지역(핀란드, 러시아,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 등)에서도 발견되는 양식이지만, 가장 오래된 형태는 요하 문명에서 확인되었다.[17] 이는 당시 한반도가 우랄계 민족(하플로그룹 N (Y 염색체))이 주축이었던 요하 문명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18], 한국 민족 형성의 바탕에 우랄계 민족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한편, 같은 시기 일본 열도에서는 조몬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소하타식 토기가 규슈에서 남서 제도까지 퍼져나갔는데, 이 토기 역시 한반도 빗살무늬 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외에도 당시 한반도 남부와 규슈 사이에는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결합식 낚시 바늘"과 일본 열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융기문 토기", "톱니 모양 첨두기", "돌 톱" 등 공통적인 문화 요소들이 발견되어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5. 2. 빗살무늬토기 시대의 농경

빗살무늬토기 시대, 특히 중기(기원전 3500년~기원전 2000년경)에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최와 베일은 적어도 14곳의 중기 빗살무늬토기 시대 유적지에서 탄화된 식물 잔해와 농업용 석기 형태로 경작의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추정한다.[11]

대표적인 예로, 동삼동 조개더미 유적지에서는 AMS 연대 측정 기술을 사용하여 중기 빗살무늬토기 시대의 것으로 확인된 재배 수수 (''Setaria italica'' ssp. ''italica'') 씨앗이 발견되었다.[12] 또한 북한의 지탐리(치탐니) 움집 유적에서는 북한 고고학자들이 기장이라고 주장하는 수백 그램의 탄화된 재배 작물이 발견되었다.[13][14] 그러나 지탐리에서 발견된 곡물에 대해서는, 체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수집되었고 흑백 사진만 존재하며 원래 설명이 한국어로만 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모든 고고학자들이 재배된 기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의 경작은 심해 어로, 조개류 채취, 사냥 등 기존의 생계 활동을 보충하는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대별로 보면, 전기(기원전 6000년경 ~ 기원전 3500년경)에는 어로사냥이 중심이었고, 후반기에는 대규모 조개더미가 나타난다. 중기(기원전 3500년경 ~ 기원전 2000년경)에 잡곡 등의 재배가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어로사냥이 중요했다. 후기(기원전 2000년경 ~ 1500년경)에는 내륙부 거주가 증가하고 조개더미가 줄어들면서 농업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5. 3. 암각화의 연대

울산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 등 주요 암각화 유적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 암각화들이 후기 빗살무늬토기 시대 (기원전 2000년경 ~ 기원전 1500년경)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는 아직 학계에서 명확히 합의되지 않은 사항으로,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참조

[1] 서적 Archaeology of Early Agriculture in Korea: An Update on Recent Developments Bulletin of the Indo-Pacific Prehistory Association
[2] 문서 Choe and Bale 2002
[3] 문서 see also Crawford and Lee 2003, Bale 2001
[4] 논문 Current Perspectives on Settlement, Subsistence, and Cultivation in Prehistoric Korea 2002
[5] 문서 Lee 2001
[6] 문서 Lee 2001, 2006
[7] 논문 The New Archaeological Data Concerned with the Cultural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n the Neolithic Age
[8] 논문 Chronology of the Earliest Pottery in East Asia: Progress and Pitfalls
[9] 문서 Kuzmin 2006:368
[10] 서적 Hanguk Sinseokgi Munhwa Jibmundang, Seoul
[11] 문서 Choe and Bale 2002:110
[12] 문서 Crawford and Lee 2003:89
[13] 서적 Chitam-ni Wonshi Yuchok Palgul Pogo Kwahakwon Ch'ulpan'sa, Pyeongyang
[14] 문서 see also Im 2000:149
[15] 문서 Lee 2001:323; 2006
[16] 논문 Land-use Conflict and the Rate of Transition to Agricultural Economy: A Comparative Study of Southern Scandinavia and Central-western Korea
[17] 웹사이트 中国北方新石器文化研究の新展開【詳細報告】「東北アジアにおける先史文化の交流」 王 巍(中国社会科学院考古研究所・副所長) http://www.ipc.tohok[...]
[18] 웹사이트 "Y Chromosome analysis of prehistoric human populations in the West Liao River Valley, Northeast China. " http://bmcevolbiol.b[...] 2013
[19] 웹인용 신석기시대 유적 http://jinju.museum.[...] 2009-10-16
[20] 뉴스 韓國의 再發見 國寶·寶物을 찾아 <22> 土器編 (1) 形成과 發達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사 197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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