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크레쾨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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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인 1875년에 보불 전쟁과 파리 코뮌으로 희생된 프랑스 시민을 기리고자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설이 시작된 건축물이다. 1914년에 완공되었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19년에 정식 봉헌되었으며, 좌파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파리 코뮌 파괴와 연관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비판을 지속했다.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건축 양식을 자유롭게 해석하여 설계되었으며, 83.33미터 높이의 돔과 4개의 작은 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종인 "사보야르"가 있는 종탑이 특징이다. 2022년 12월 8일 국가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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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크레쾨르 대성당 | |
---|---|
기본 정보 | |
![]() | |
공식 명칭 | Sacré-Cœur de Montmartre |
종류 | 로마 가톨릭의 소성당 |
관할 | 파리 대교구 |
봉헌 연도 | 1919년 |
지위 | 미성년자 대성당 |
웹사이트 | 사크레쾨르 대성당 공식 웹사이트 |
google_map | 사크레쾨르 대성당 |
위치 | |
위치 | 프랑스 파리 |
건축 | |
건축가 | 폴 아바디 |
기공 | 1875년 |
완공 | 1914년 |
건축 양식 | 로마네스크 리바이벌 건축과 비잔틴 리바이벌 건축 양식의 혼합 |
재료 | 트래버틴 석재 |
길이 | 85 미터 |
폭 | 35 미터 |
최대 높이 | 83 미터 |
2. 역사적 배경
프랑스 제3공화국 헌법이 발포된 1875년에 프랑스의 새로운 정체(政體)의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아 사크레쾨르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보불전쟁과 그에 이어진 파리 코뮌으로 목숨을 잃은 프랑스 시민을 기리는 공공 건축물로도 생각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는 자연스럽게 변화하였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 황제가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히고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낭트 교구 주교 펠릭스 푸르니에는 예수 성심에 헌정하는 새로운 파리 교회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였다. 1871년 1월, 푸르니에는 생 빈센트 드 폴 협회를 설립한 프레데릭 오자남의 추종자인 박애주의자 알렉상드르 르장티유와 협력했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도시의 여러 곳에서 보이는 뛰어난 높이와 가시성, 그리고 파리의 생 드니와의 연관성 때문에 새로운 대성당 부지로 선정되었다. 이 부지는 지방 정부 소유의 토지와 개인 소유의 토지를 포함했기 때문에 프랑스 의회는 대성당 건설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선언하여 부지 확보를 지원했다.
대성당 설계를 위한 공모전에서 77개의 제안이 접수되었고, 건축가 폴 아바디가 선정되었다.[8] 1875년 6월 16일에 초석이 놓였다.[9] 초기 건설은 불안정한 지반으로 인해 지연되고 복잡해졌다. 부지 아래에 각각 깊이 30m의 우물 83개를 파서 암석과 콘크리트로 채워 대성당을 지탱하는 지하 기둥 역할을 해야 했다.[10]
1884년 아바디가 사망한 후, 오노레 도메 (1884–1886), 장-샤를 라네 (1886–1891), 앙리-피에르-마리 롤린 (1891–1904), 뤼시앙 마뉴 (1904–1916), 장-루이 율로 (1916–1924) 등 5명의 다른 건축가가 그 뒤를 이어 광범위한 수정을 가했다.
교회의 돔은 1899년에 완공되었고, 종탑은 1912년에 완공되었다. 대성당은 1914년에 완성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19년에 정식으로 봉헌되었다. 그러나 파리 코뮌과의 연관성 때문에 지속적인 논란이 있었다.
2. 1. 건립 제안
1870년 9월 4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 황제가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히고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낭트 교구 주교 펠릭스 푸르니에는 예수 성심에 헌정하는 새로운 파리 교회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1877년 사망할 때까지 푸르니에는 낭트 대성당의 복원을 완료한 적극적인 건축가였다. 그는 1870년 프랑스의 패배가 프랑스 혁명 이후 국가의 도덕적 쇠퇴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주장했다.[3]
1871년 1월, 푸르니에는 생 빈센트 드 폴 협회를 설립한 프레데릭 오자남의 추종자인 박애주의자 알렉상드르 르장티유와 협력했다. 르장티유는 프랑스가 세당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교황의 감금으로 인해 정당하게 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3]
> 우리는 우리가 유죄였고 정당하게 처벌받았음을 인정한다. 우리의 죄를 갚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의 무한한 자비와 우리의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최고 폰티프를 포로 상태에서 구출하고 프랑스의 불행을 뒤집을 수 있는 특별한 도움을 얻기 위해, 우리는 파리에 예수 성심에 헌정된 성전을 세우는 데 기여할 것을 약속한다.
르장티유의 영향력은 전적으로 개인 기부에 기반한 성공적인 모금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2. 2. 부지 선정
몽마르트르 언덕은 도시의 여러 곳에서 보이는 뛰어난 높이와 가시성, 그리고 파리의 생 드니와의 연관성 때문에 새로운 대성당 부지로 선정되었다. 이 부지는 지방 정부 소유의 토지와 개인 소유의 토지를 포함했기 때문에 프랑스 의회는 대성당 건설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선언하여 부지 확보를 지원했다.[4] 1873년 7월, 이 제안은 마침내 국회에 상정되어 승인되었으며, 공식 성명은 "이 속죄의 사업으로 우리의 슬픔을 덮었던 범죄들을 지워야 할 필요가 있다"였다.[5]몽마르트르는 초기 기독교 교회와의 연관성 때문에 "순교자의 언덕"으로도 선택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파리의 수호성인인 파리의 생 드니가 로마인들에게 참수된 곳이다. 그의 무덤은 생 드니 대성당의 부지가 되었고, 이는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 왕들의 전통적인 안식처였다.
또한, 몽마르트르 언덕은 가톨릭 교회 역사상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종교 단체 중 하나인 예수회의 발상지였다. 1534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그의 추종자 몇몇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 생피에르 드 몽마르뜨에서 서약을 했다.[6] 이 교회는 혁명에서 살아남았지만, 이 교회가 속해 있던 몽마르뜨 수도원은 파괴되었다.[7]
2. 3. 건설 과정
대성당 설계를 위한 공모전에서 77개의 제안이 접수되었고, 건축가 폴 아바디가 선정되었다.[8] 1875년 6월 16일에 초석이 놓였다.[9]초기 건설은 불안정한 지반으로 인해 지연되고 복잡해졌다. 부지 아래에 각각 깊이 30m의 우물 83개를 파서 암석과 콘크리트로 채워 대성당을 지탱하는 지하 기둥 역할을 해야 했다.[10] 순전히 개인 기부자들로부터 모금된 으로 추산되는 건설 비용은 지상 구조물이 보이기 전에 모두 소진되었다. 1876년 3월 3일에 임시 예배당이 봉헌되었고, 순례는 곧 추가 자금을 끌어들였다.[11]
1884년 아바디가 사망한 후, 오노레 도메 (1884–1886), 장-샤를 라네 (1886–1891), 앙리-피에르-마리 롤린 (1891–1904), 뤼시앙 마뉴 (1904–1916), 장-루이 율로 (1916–1924) 등 5명의 다른 건축가가 그 뒤를 이어 광범위한 수정을 가했다.
1882년,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끄는 좌파 연합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교회의 벽은 겨우 기초 위로 올라와 있었다. 클레망소는 즉시 공사 중단을 제안했고, 의회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추가 자금 지원을 막았다. 그러나 프로젝트 취소로 인해 의 막대한 부채에 직면한 정부는 건설을 계속 진행하도록 허가해야 했다.[9]
1891년, 대성당 내부가 완공되어 봉헌되었고 대중 예배를 위해 개방되었다. 1897년 클레망소는 의회에서 완공을 막으려 다시 시도했지만, 프로젝트를 취소하려면 건설에 기여한 800만 명에게 을 상환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동의안은 압도적으로 부결되었다.[9]
교회의 돔은 1899년에 완공되었고, 종탑은 1912년에 완공되었다. 대성당은 1914년에 완공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19년에 정식으로 봉헌되었다.
2. 4. 논란
좌파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파리 코뮌 파괴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대성당 건설이 파리 코뮌 이전부터 제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21세기까지 비판을 지속했다. 1898년, 에밀 졸라는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프랑스는 죄인이다. 속죄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속죄인가? 혁명에 대한 속죄, 자유로운 언론과 과학의 한 세기에 대한 속죄, 해방된 이성에 대한 속죄... 그들은 파리의 모든 거리에서 보이고, 오해받고 상처받은 느낌 없이는 볼 수 없는 이 거대한 랜드마크를 세웠다.[12]
자유의 여신상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운송된 직후,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반대파들은 몽마르뜨 언덕 꼭대기에 대성당 정면에 자유의 여신상과 똑같은 크기의 복제품을 설치하여 교회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자는 제안을 했다. 이 아이디어는 비용이 많이 들고 실현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13]
2004년, 파리 사회당 시장 베르트랑 들라노에와 18구 시장 다니엘 바양은 대성당 앞 광장인 루이즈 미셸 광장의 이름을 파리 코뮌의 아나키스트 루이즈 미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함으로써 대성당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97년에서 2002년까지 사회당 총리였던 리오넬 조스팽은 대성당을 "암흑, 좋지 않은 취향, 반동주의"의 상징으로 보고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16]
2021년, 프랑스 국회 좌파 의원들은 파리 코뮌 150주년과 같은 해에 교회의 역사를 기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회를 국가 역사 기념물로 지정하는 조치를 막고 2022년으로 연기했다.[17]
2022년 12월 8일, 대성당은 국가 유산 및 건축 위원회의 만장일치 투표로 국가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장뤼크 멜랑숑은 이 결정을 "단 8일 만에 32,000명의 파리 코뮌 참가자를 학살한 것을 미화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18]
3. 건축 및 예술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건축 양식은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을 자유롭게 해석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당시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한 오페라 가르니에 등 나폴레옹 3세 시대 건물들의 신고전주의 양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새로운 시도였다.[20]
성당 내부는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십자형 평면이며, 성가대와 회랑이 추가되어 비잔틴 건축 양식을 따랐다. 어두운 내부 조명은 신비로운 효과를 더하며, 타일 바닥과 유리 세공 디자인은 비잔틴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23] 본당은 하늘을 상징하는 돔과 땅을 상징하는 직사각형 공간으로 구성되며, 이 둘은 거대한 기둥으로 연결되어 있다.[23]
성가대석 위에 있는 "주님 재림" 모자이크는 475m2 면적의 세계에서 가장 큰 모자이크 중 하나로, 교회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예술 작품이다. 뤽-올리비에 메르송 등이 제작했으며, 1923년에 봉헌되었다. 흰 옷을 입고 금으로 장식된 심장을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마리아, 대천사 미카엘, 잔 다르크, 교황 레오 13세 등이 묘사되어 있다.[24] 모자이크 하단에는 "예수 성심께, 열정적이고, 참회하며 감사하는 프랑스가 바칩니다."라는 라틴어 비문이 있는데, '감사하는'이라는 단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추가되었다.[25]
성당 내부는 여러 개의 예배당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대부분 전문 단체나 수도회에서 헌납했다. 이 예배당들은 조각상, 부조,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다. 지하 예배당은 "소 드 루"(saut-de-loup)라는 독특한 구조 덕분에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19]
아리스티드 카바예-콜이 제작한 파이프 오르간은 109개의 랭크와 78개의 스피킹 스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개의 61음 건반과 32음 페달보드를 가지고 있다.[27]
종루에는 5개의 종이 있는데, 가장 큰 종은 "사보야르"라고 불리는 부르동으로, 무게는 18835kg, 지름은 3.03m이다. 사보야르는 주요 종교 휴일에만 울리지만,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예외적으로 울렸다.[29]
3. 1. 외관
교회는 길이 85미터, 너비 35미터이다. 중앙의 큰 로툰다를 중심으로 작은 네이브, 두 개의 트랜셉트, 그리고 십자가 형태를 이루는 전면 합창대가 배치되어 있다. 교회의 현관은 3개의 만(bay)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페리고 대성당의 현관을 본떠 만들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높이 83.33미터의 거대한 타원형 돔으로, 4개의 작은 돔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북쪽 끝에는 높이 84미터의 종탑인 캄파닐레가 있는데, 여기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종인 "사보야르드"가 있다.[19]전반적인 건축 양식은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을 자유롭게 해석한 것이다. 이는 당시에는 흔치 않은 건축 양식이었으며,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한 오페라 가르니에와 나폴레옹 3세 시대의 다른 건물들의 신고전주의 양식에 대한 반작용의 일환이었다.[20] 건설은 결국 여러 새로운 건축가들에게 넘겨졌으며, 그 중에는 1891년부터 1904년까지 건축가 앙리 피에르 롤랭의 고문이었던 가르니에 자신도 포함되었다.
설계의 일부 요소, 특히 길쭉한 돔과 남쪽 파사드의 창문 구조는 신고전주의 양식이며, 이는 후대의 건축가 앙리 피에르 롤랭과 뤼시앙 마뉴가 추가한 것이다.[21]

북쪽 정면에 있는 종탑에는 1895년 안시에서 주조된 19톤의 ''사보야드'' 종(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종 중 하나)이 있다. 이 종은 1860년 사보이가 프랑스에 귀속된 것을 암시한다.
주요 입구인 남쪽 정면의 현관은 종교적 주제와 프랑스 국가적 주제를 결합한 조각으로 가득하다. 현관 꼭대기에는 예수 성심을 묘사한 조각상이 있다. 정면의 아치는 프랑스 국가의 성인인 기마 조각상 두 개로 장식되어 있는데, 각각 잔 다르크 (1927)와 성 루이 9세이며, 둘 다 청동으로 이폴리트 르페브르가 제작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하얀 돌은 프랑스 센에마른의 수프쉬르루앙에서 채석된 샤토-랑동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석회화 석회암이다. 이 돌의 특징은 입자가 고운 매우 단단한 돌이며, 빗물과 접촉하면 방해석을 발산하여 매우 흰색을 띤다는 것이다.[22]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종루에는 5개의 종이 있다. 가장 큰 종에서 작은 종 순서로 '''펠리시테''', '''루이즈''', '''니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네 개의 작은 종이 있는데, 이 종들은 생 로슈 교회의 원래 종이었으며 1969년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네 개의 종 아래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종인 "'''사보야르'''"라고 불리는 거대한 부르동이 있다. 부르동의 전체 이름은 “'''예수의 성심을 기리는 프랑수아즈 마르그리트'''"이다. 이 종은 1891년 5월 13일, 안시-르-비유에 있는 파카르 제련소(조르주, 이폴리트-프랑시스크, 빅토르 또는 "G & F" 가문의)에서 주조되었다.
사보야르는 주요 종교 휴일, 특히 부활절, 오순절, 승천일, 크리스마스, 성모 승천일 및 모든 성인의 날에만 울린다. 1944년 8월 24일 밤, 라 누에브 - 프랑스 제2기갑사단의 차드 행진 연대 제9중대가 나치 독일 점령에서 파리 해방 당시 오텔 드 빌에 도착하여 1940년 이후 도시로 돌아온 최초의 프랑스군이 되었을 때 예외적으로 울렸다. 그 후 피에르 샤퍼가 국립 방송에서 이 소식을 방송하고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한 후, 듣고 있던 모든 성직자들에게 교회 종을 울리라고 요청했을 때 종이 울렸다.[29] 사보야르는 10 km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이 종은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큰 종으로, 독일의 쾰른에 있는 ''페터스글로케'', 런던의 올림픽 종, 로베레토 (이탈리아)의 ''마리아 돌렌스'', 비엔나 (오스트리아)의 ''푸메린''에 이어 순위가 매겨진다. 무게는 18,835 kg, 지름은 3.03 m, 외부 둘레는 9.60 m, 하단 두께는 22 cm, 잎은 850 kg이다. 부속품을 포함하면 공식 무게는 19,685 kg에 달한다. 이 종은 사보이의 네 개 교구에서 기증했다. 1895년 10월 16일 28마리의 말 팀이 끌어 대성당으로 운송되었다. 1990년대 후반, 종에 금이 간 것이 발견되었다.
3. 2. 내부
본당은 하늘을 상징하는 돔과 땅을 상징하는 직사각형 공간으로 구성되며, 이 둘은 거대한 기둥으로 연결되어 있다.[23] 내부는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십자형 평면이며, 성가대와 회랑이 추가되어 비잔틴 건축 양식을 따랐다. 어두운 내부 조명은 신비로운 효과를 더하며, 타일 바닥과 유리 세공 디자인은 비잔틴 양식의 특징이다.[23]
3. 2. 1. 모자이크
성가대석 위에 있는 모자이크는 ''예수 성심의 승리''라는 제목으로, 교회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예술 작품이다. 뤽-올리비에 메르송, H. M. 마그네, R. 마르탱이 제작했으며, 1923년에 봉헌되었다. 이 모자이크는 에나멜 처리되고 금박을 입힌 25,000개의 세라믹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75m2 면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모자이크 중 하나이다.[23]
중앙에는 흰색 옷을 입고 금으로 장식된 심장을 내어주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 옆에는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교회와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대천사 미카엘이 함께 있다.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는 성녀 잔 다르크가 무릎을 꿇고 그에게 왕관을 바치고 있다. 교황 레오 13세는 그리스도에게 지구본을 바치고 있는데, 이는 세계를 상징한다.[24]
그리스도의 오른편에는 "예수 성심에 대한 프랑스의 경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여러 교황과 추기경들이 그리스도에게 성당의 모형을 바치고 있다. 왼편에는 "예수 성심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경의" 장면이 있는데, 다섯 대륙의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예수 성심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모자이크 하단에는 라틴어 비문이 있으며, 성당이 프랑스의 선물임을 나타낸다. "예수 성심께, 열정적이고, 참회하며 감사하는 프랑스가 바칩니다."라는 문구에서 "감사하는"이라는 단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추가되었다.[25]
모자이크 상단에는 "프랑스의 성인들과 세계 교회의 성인들"이라는 또 다른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전체 모자이크에서, 예술가들은 인물 구성, 변형된 원근법, 은과 금으로 강조된 다색 색상의 사용 등 비잔틴 미술의 요소를 적용했다.[24]
3. 2. 2. 예배당
성당 내부는 여러 개의 예배당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대부분 전문 단체나 수도회에서 헌납했다. 이 예배당들은 조각상, 부조,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으며, 종종 기증자들의 직업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바다의 노트르담 수도회 예배당은 물 위를 걷는 그리스도와 기적적인 물고기 잡이를 묘사한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다.[23] 정문 오른쪽부터 시작되는 예배당은 다음과 같다.- 대천사 미카엘 예배당 (군대 예배당)
- 생 루이 (루이 9세) 예배당 (변호사 예배당)
- 상업 및 산업 재판소 (동쪽 익랑 끝)
- 마르그리트 마리 알라코크 예배당
- 바다의 노트르담 예배당
앱스 자체는 추가로 7개의 예배당으로 둘러싸여 있다.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예배당
- 캐나다와 몰타 기사단에서 헌납한 세례자 요한 예배당
- 성 요셉 예배당
- 성모 마리아 예배당
- 코메와 다미안 (의사들이 헌납한 성 루카 복음사가 예배당)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예배당
- 쾰른의 성 우르술라 예배당
- 성 빈센트 드 폴 예배당
- 농업 재판소 (서쪽 익랑 끝)
- 프랑스 여왕 예배당
3. 2. 3. 지하 예배당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지하 예배당(크립트)은 일반적인 지하 예배당과는 달리, "소 드 루"(saut-de-loup)라는 독특한 구조 덕분에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소 드 루"는 지하 예배당 벽의 창문과 눈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약 4미터 폭으로 파놓은 참호이다.[19] 지하 예배당 중앙에는 피에타 예배당이 있으며, 제단 십자가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 기념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은 1895년 쥘 쿠탱(Jules Coutain)이 제작했다.지하 예배당에는 7개의 예배당이 동쪽에, 또 다른 7개의 예배당이 서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위층의 예배당들과 같은 배치이다. 지하 예배당에는 기욤 루제 드 기베르 추기경과 프랑수아 리샤르 추기경 등 대성당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의 무덤이 있다.[19]
3. 2. 4. 오르간
아리스티드 카바예-콜이 제작한 크고 훌륭한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 109개의 랭크와 78개의 스피킹 스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개의 61음 건반과 32음 페달보드를 가지고 있다.[27] 이 오르간은 1898년 알베르 드 레스페 남작의 비아리츠 샤토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카바예-콜이 제작한 마지막 악기였다. 1905년 카바예-콜의 후계자인 샤를르 뮈탱에 의해 파리에 설치되었다.[28]이 오르간은 1981년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여러 차례 복원 작업을 거쳤으나, 현재 파이프는 두꺼운 먼지 층으로 덮여 있어 음고와 음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27]
3. 2. 5. 종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종루에는 5개의 종이 있다. 가장 큰 종부터 작은 종 순서로 펠리시테, 루이즈, 니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네 개의 작은 종이 있는데, 이 종들은 생 로슈 교회의 원래 종이었으며 1969년 대성당으로 옮겨졌다.네 개의 종 아래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큰 종인 "사보야르"라고 불리는 거대한 부르동이 있다. 부르동의 전체 이름은 “예수의 성심을 기리는 프랑수아즈 마르그리트"이다. 이 종은 1891년 5월 13일, 안시-르-비유에 있는 파카르 제련소에서 주조되었다.
사보야르는 주요 종교 휴일, 특히 부활절, 오순절, 승천일, 크리스마스, 성모 승천일 및 모든 성인의 날에만 울린다. 예외적으로 1944년 8월 24일 밤, 라 누에브 - 프랑스 제2기갑사단의 차드 행진 연대 제9중대가 나치 독일 점령에서 파리 해방 당시 오텔 드 빌에 도착하여 1940년 이후 도시로 돌아온 최초의 프랑스군이 되었을 때 울렸다.[29] 그 후 피에르 샤퍼가 국립 방송에서 이 소식을 방송하고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한 후, 듣고 있던 모든 성직자들에게 교회 종을 울리라고 요청했을 때 종이 울렸다. 사보야르는 10km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이 종은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큰 종으로, 독일 쾰른의 ''페터스글로케'', 런던의 올림픽 종, 로베레토 (이탈리아)의 ''마리아 돌렌스'', 비엔나 (오스트리아)의 ''푸메린''에 이어 순위가 매겨진다. 무게는 18835kg, 지름은 3.03m, 외부 둘레는 9.6m, 하단 두께는 22cm, 잎은 850kg이다. 부속품을 포함하면 공식 무게는 19685kg에 달한다. 이 종은 사보이의 네 개 교구에서 기증했다. 1895년 10월 16일 28마리의 말 팀이 끌어 대성당으로 운송되었다. 1990년대 후반, 종에 금이 간 것이 발견되었다.
4. 가톨릭에서의 역할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가 파레르모니알에서 환시를 본 이후 점점 인기를 얻게 된 예수 성심에 봉헌되었다.[30] 프랑스 주교들의 요청에 따라 교황 비오 9세는 1856년에 예수 성심 축일을 반포했다. 대성당 자체는 1919년 10월 16일에 봉헌되었다.
1885년(건축이 완료되기 전)부터 성체(미사 중 축성된 그리스도의 몸)가 높은 제단 위의 성체 현시대에 계속 전시되어 있다. 영원한 성체 숭배는 1885년 이후로 대성당에서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
티비린 수도원 학살의 희생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앙 드 셰르제는 1964년부터 1969년까지 대성당의 군종 신부였다.[31]
관광객과 다른 방문객들은 대성당을 방문할 때 적절한 복장을 갖추고, 특히 성체가 전시되어 있으므로 이 순례지에서 기도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침묵을 지켜달라고 요청받고 있다. 대성당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5. 접근성
메트로 2호선 앙베르역에서 접근할 수 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매일 06:00부터 22:30까지 개방하며, 돔은 여름에는 09:00부터 19:00까지, 겨울에는 18:00까지 접근 가능하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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