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가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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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강가 왕조는 4세기부터 11세기까지 남인도 지역을 통치한 왕조이다.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남인도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콩가니바르마 마다바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초기에는 콜라르를 수도로 삼았다. 이후 탈라카드로 수도를 옮겨 세력을 확장하며, 찰루키야, 팔라바, 라슈트라쿠타 왕조 등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자이나교와 힌두교를 모두 후원했으며, 특히 자이나교는 8세기 이후 왕조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문학, 건축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칸나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행정 언어로 사용했다. 1000년경 촐라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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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가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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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서강가 왕조 |
일반 명칭 | 서강가 |
상태 | 왕국 |
상태 설명 | 팔라바 왕조의 속국 (350년까지) |
정치 체제 | 군주제 |
존속 시작 | 350년 |
존속 종료 | 999년 |
이전 사건 | 초기 강가 기록 |
이전 날짜 | 400년 |
수도 | 콜라르 (초기) 탈라카드 (후기) |
공용어 | 칸나다어 산스크리트어 |
종교 | 자이나교 힌두교 |
현재 국가 | 인도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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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 | |
초대 통치자 | 콩가니바르만 마다바 (350–370) |
마지막 통치자 | 라차말라 5세 (986–999) |
칭호 | 마하라자 |
2. 역사
서방 갠가 왕조는 4세기 이전에 건국되었으며, 건국자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1][2] 남인도 기원설을 주장하는 역사가들은 초기 갠가 왕조의 소규모 수장들이 현대 카르나타카 주 남부,[4][5][6][7][8][9][10] 타밀나두 주의 콩구 나두,[11][12] 또는 안드라프라데시 주 남부 지역 출신이었다고 주장한다.[13][14] 이 지역들은 세 개의 현대 주가 지리적으로 합쳐지는 데칸 고원 남부 지역을 포함한다.
350년경 콩가니바르마 마다바가 콜라르를 수도로 삼아 왕조를 건국하고 약 20년 동안 통치했다.[16] 390년 하리바르마 시대에 수도를 탈라카드로 옮겼는데, 이는 성장하는 카담바 왕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인 조치였을 것이다.[16] 430년까지 동부 영토(현대 방갈로르, 콜라르, 툼쿠르 지역)를 통합했고, 470년까지는 콩구 나두, 센드라카, 푼나타와 판나다 지역(현대 헤가다데바나코테와 난잔구드를 포함)을 장악했다.[17][18]
529년, 두르비니타 왕은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후 왕위에 올랐다.[19] 이 전쟁에서 팔라바 왕조는 두르비니타의 동생을, 바다미 찰루키야 왕조는 두르비니타를 지지했다.[20] 두르비니타는 톤다이만달람과 콩구 나두 지역에서 팔라바 왕조를 성공적으로 물리쳤다.[21] 그는 음악, 무용, 아유르베다, 야생 코끼리 길들이기와 같은 예술에 정통했으며, 일부 비문에서는 그를 힌두 신화의 인물인 유디슈티라와 마누에 비유하며 찬사를 보낸다.[22][23]
갠가 왕조는 찰루키야 왕조와 봉신 관계이자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었고, 혼인 관계도 공유했다. 725년 이후 갠가바디 영토는 "갠가바디-96000"으로 불렸으며,[25] 스리푸루샤 왕은 팔라바 왕조의 난디바르만 팔라바말라를 물리치고 ''페르마나디''라는 칭호를 얻었다.[26][27] 판디아 왕조와의 다툼은 갠가 공주와 라자심하 판디아의 아들 사이의 결혼으로 평화가 찾아왔다.[28][29]
753년,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데칸 지역의 주도 세력이 되자, 갠가 왕조는 약 1세기 동안 저항했다.[30][31] 시바마라 2세 왕은 드루바 다라바르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지만, 결국 전투 중 사망했다. 819년, 라차말라 왕의 지휘 아래 갠가바디에 대한 부분적인 지배권을 되찾았다. 아모가바르샤 1세는 갠가 왕조와의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그의 딸 찬드라발라베를 붓가 1세와 결혼시켰다.
938년, 붓가 2세는 아모가바르샤 3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고, 타콜람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콜라 왕조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36][37][38][39] 963년 권력을 잡은 마라심하 2세는 구자라 프라티하라 왕조와 파라마라 왕조에 대한 승리에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도왔다.[41][42]
10세기 말,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서찰루키야 제국에 의해 대체되었다. 남쪽에서는 라자라자 1세의 지휘 아래 부활한 콜라 왕조가 1000년경 갠가바디를 정복하여 서방 갠가 왕조를 멸망시켰다.[45]
2. 1. 건국과 초기 발전
서방 갠가 왕조는 350년경 콩가니바르마 마다바가 콜라르를 수도로 삼아 건국하였다. 콩가니바르마 마다바는 약 20년간 왕조를 통치했다. 서방 갠가 왕조의 건국에 대해서는 북인도 기원설과 남인도 기원설 등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 남인도 기원설을 주장하는 역사가들은 초기 갠가 왕조의 수장들이 카르나타카 주 남부, 타밀나두 주의 콩구 나두, 또는 안드라프라데시 주 남부 지역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이 지역들은 세 개의 현대 주가 지리적으로 합쳐지는 데칸 고원 남부 지역을 포함한다. 갠가 왕조는 350년 이전 삼무드라굽타 왕의 남인도 침입으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왕국을 건설했을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390년, 하리바르마는 수도를 탈라카드로 옮겼다. 이는 성장하는 카담바 왕조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전략적인 조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430년까지 갠가 왕조는 현대 방갈로르, 콜라르, 툼쿠르 지역으로 구성된 동부 영토를 통합했고, 470년까지는 현대 타밀나두 주의 콩구 나두, 센드라카 (현대 치크카마갈루루와 벨루르), 푼나타와 판나다 지역 (현대 헤가다데바나코테와 난잔구드를 포함)을 장악했다.
529년, 두르비니타 왕은 아버지 아비니타 왕이 총애했던 동생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왕위에 올랐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권력 투쟁에서 칸치의 팔라바 왕조는 아비니타의 상속인 선택을 지지했고, 바다미 찰루키야 왕 비자야디탸는 그의 장인인 두르비니타를 지지했다.[20]
2. 2. 찰루키야-팔라바 전쟁 시기
두르비니타 왕은 아버지 아비니타 왕이 총애했던 동생과의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529년 서강가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19] 이 권력 투쟁에서 칸치의 팔라바 왕조는 아비니타의 상속자 선택을 지지했고,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의 비자야디탸는 그의 장인인 두르비니타를 지지했다는 기록이 있다.[20] 이 전투는 톤다이만달람과 콩구 지역(타밀나두 주 북부)에서 벌어졌으며, 두르비니타가 팔라바 왕조를 성공적으로 물리쳤음을 알 수 있다.[21]갠가 왕조는 찰루키야 왕조와 봉신 관계이자 긴밀한 동맹 관계였고, 혼인 관계도 맺었다. 이는 그들의 숙적이었던 칸치의 팔라바 왕조에 대한 공동 원정을 묘사하는 비문으로 입증된다.[24] 725년 이후, 갠가바디 영토는 "갠가바디-96000"(''샨나바티 사하스라 비샤야''(Shannavati Sahasra Vishaya))으로 불렸는데,[25] 이는 현대 카르나타카 주 남부의 동부와 서부 지방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스리푸루샤 왕은 팔라바 왕 난디바르만 팔라바말라를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북 아르콧의 펜쿨리콧타이를 일시적으로 장악하여 ''페르마나디''(Permanadi)라는 칭호를 얻었다.[26][27]
2. 3. 라슈트라쿠타 왕조와의 관계
753년,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바다미 찰루키야 왕조를 대신하여 데칸 지역의 주도 세력이 되자, 서방 갠가 왕조는 약 1세기 동안 강력하게 저항했다.[30]Rashtrakuta영어[31] 시바마라 2세 왕은 주로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드루바 다라바르샤와의 전쟁, 그에 따른 패배와 투옥, 감옥에서의 석방, 그리고 결국 전투 중 사망으로 알려져 있다. 갠가 왕조의 저항은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고빈다 3세 통치 기간 동안 계속되었고, 819년 라차말라 왕의 지휘 아래 갠가바디에 대한 부분적인 지배권을 되찾았다.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아모가바르샤 1세는 서방 갠가 왕조와의 전쟁이 소용없음을 깨닫고 그의 딸 찬드라발라베를 에레간가 니티마르가 왕의 아들인 붓가 1세 왕자와 결혼시켰다. 그 후 갠가 왕조는 마냐케타의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그들의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다.[33]Manyakheta영어[34][35]2. 4. 쇠퇴와 멸망
붓가 2세는 938년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아모가바르샤 3세(그의 딸과 결혼했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36] 그는 타콜람 전투에서 라슈트라쿠타 왕조가 콜라 왕조를 상대로 타밀라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이 승리로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현대 타밀나두 주 북부를 장악했다.[37][38][39] 갠가 왕조는 그들의 용기에 대한 보상으로 퉁가바드라 강 유역에 광대한 영토를 하사받았다.[36][40]963년 권력을 잡은 마라심하 2세는 구자라 프라티하라 왕조의 랄라 왕과 중앙 인도 말와의 파라마라 왕조의 왕들에 대한 승리에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도왔다.[41][42] 서방 갠가 왕조의 재상이었던 차운다라야는 용감한 지휘관이자 능숙한 관리였으며, 칸나다어와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한 뛰어난 시인이었다.[43][44] 그는 마라심하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을 훌륭하게 섬겼고, 975년 라차말라 4세가 내전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0세기 말,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마냐케타에서 서찰루키야 제국에 의해 대체되었다. 남쪽에서는 라자라자 1세의 지휘 아래 부활한 콜라 왕조가 1000년경 갠가바디를 정복하여 서방 갠가 왕조를 멸망시켰다.[45] 그 후 카르나타카 주 남부 지역의 광대한 지역이 약 1세기 동안 콜라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3. 행정
서방 간가 왕조의 행정은 아르타샤스트라에 명시된 원칙들의 영향을 받았다. 왕위 계승은 세습적이었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46] 왕국은 "라슈트라(Rashtra)"(지구), "비샤야(Visaya)"(아마도 1000개의 마을로 구성), "데사(Desa)"로 나뉘었다. 8세기부터 산스크리트어 "비샤야"는 칸나다어 "나두(Nadu)"로 대체되었다. 학자들은 "나두" 뒤의 숫자 접미사가 현금 수입,[48] 전투원 수, 세금 납부 촌락 수,[49] 또는 마을 수[48]를 의미한다고 추정한다.
중앙 행정에는 총리, 재무장관, 외무장관, 수상 등의 직책이 있었고, 지방에는 페르가데, 나다보바, 날라가미가, 프라부, 가운다 등의 관리들이 있었다. 특히 가운다스는 남부 카르나타카 중세 정치의 중추였다.[58]
토지 부여 및 소유권 관련 비문에는 강, 개울, 수로, 언덕 등 자연적 특징을 경계로 사용했고, 토양 종류, 재배 작물, 관개 시설 등도 상세히 기록했다.[59][60] 습지, 경작지, 삼림, 황무지, 사냥꾼 공동체 마을(bedapalli) 등도 언급되었다.[61][62] 6세기부터 봉건 영주 "아라사(arasa)"는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세습 영토를 통제하는 브라만이나 부족 출신이었다.[63]
왕실 경호원 "벨라발리(velavali)"는 맹세(vele)를 한 맹렬한 전사로, 왕족과 함께 이동하며 주인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바쳤다. 왕이 죽으면 주인의 장례식 화장터에서 자결했다.[64]
3. 1. 중앙 행정
서방 간가 왕조의 행정은 고대 텍스트인 아르타샤스트라의 영향을 받았다. 간가 기록에 나오는 "프라제 가운다스(praje gavundas)"는 카우틸리아가 언급한 마을 원로(gramavriddhas)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46] 왕위 계승은 보통 세습되었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46]비문을 통해 여러 중요한 행정 직책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직책으로는 총리(sarvadhikari), 재무장관(shribhandari), 외무장관(sandhivirgrahi), 수상(mahapradhana)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지휘관(dandanayaka)이라는 추가 직함을 가졌다. 이 외에도 왕실 집사(manevergade), 의복 관리자(mahapasayita), 코끼리 군단 사령관(gajasahani), 기병 사령관(thuragasahani) 등의 직책이 있었다.[51]
왕실에서는 니요기(Niyogi)s가 궁궐 행정, 왕실 의복 및 보석 등을 감독했고, "파디야라(Padiyara)"는 문지기와 의전을 포함한 궁중 의식을 담당했다.[52]
3. 2. 지방 행정
서방 간가 왕조의 행정은 고대 텍스트인 아르타샤스트라에 명시된 원칙들의 영향을 받았다. 간가 기록에 언급된 "프라제 가운다스(praje gavundas)"는 카우틸리아가 언급한 마을 원로(gramavriddhas)와 유사한 책임을 맡았다.[46]왕국은 "라슈트라(Rashtra)"(지구)로 나뉘었고, 다시 "비샤야(Visaya)"(아마도 1000개의 마을로 구성)와 "데사(Desa)"로 나뉘었다. 8세기부터 산스크리트어 용어 "비샤야"는 칸나다어 용어 "나두(Nadu)"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예로는 신다나두-8000(Sindanadu-8000)과 푼나두-6000(Punnadu-6000)이 있다.[47] 학자들은 숫자 접미사의 의미에 대해 의견이 다른데, 현금으로 계산된 구역의 세수입,[48] 그 구역의 전투원 수 또는 그 구역의 세금 납부 촌락 수,[49] 또는 그 지역에 포함된 마을 수[48]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지방 차원의 관리들은 "페르가데(pergade)", "나다보바(nadabova)", "날라가미가(nalagamiga)", "프라부(prabhu)" 및 "가운다(gavunda)"였다.[53] "페르가데스(pergades)"는 장인, 금세공인, 대장장이 등 모든 계층의 감독관이었다. 왕실과 관련된 "페르가데스"는 "마네페르가데(manepergade)"(집 감독관)라고 불렸고, 통행세를 징수하는 사람들은 "순카 베르가데스(Sunka vergades)"라고 불렸다.[54] "나다보바스(nadabovas)"는 "나두" 수준의 회계사이자 세금 징수원이었고, 때로는 서기관으로도 일했다.[55] "날라가미가스(nalagamigas)"는 "나두" 수준에서 방어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장교였다.[56] "프라부(prabhu)"는 토지 부여와 토지 경계 획정을 목격하기 위해 모인 엘리트 집단을 구성했다.[57]
비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가운다스(gavundas)"는 남부 카르나타카 지역의 중세 정치의 중추였다. 그들은 지주이자 지역 엘리트로서 국가는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토지 소유권 기록을 유지하고, 부여 및 거래를 증명하고, 필요할 때 민병대를 모았다.[58]
토지 부여, 권리 및 소유권을 명시하는 비문은 강, 개울, 수로, 언덕, 큰 바위, 마을의 배치, 요새(kote)의 위치(근처에 있는 경우), 관개 수로, 사원, 저수지, 심지어 관목과 큰 나무와 같은 자연적 특징을 사용하여 경계 획정의 경계를 설명했다. 또한 토양의 종류, 재배할 작물, 관개를 위해 발굴할 저수지 또는 우물도 포함되었다.[59][60] 비문에는 습지, 경작지, 삼림 및 황무지가 언급되어 있다.[61] 그곳에 거주하는 사냥꾼 공동체(bedapalli)에 속한 작은 마을(palli)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62]
6세기부터 비문은 봉건 영주를 "아라사(arasa)"라는 칭호로 언급한다. "아라사스(arasas)"는 왕에게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세습 영토를 통제하는 브라만이거나 부족 출신이었다.[63]
4. 경제
서강가 왕조는 농업과 목축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운영했으며, 다양한 세금 제도를 통해 국가 재정을 확보했다. 농업, 목축업, 세금 제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4. 1. 농업과 목축업
강가바디 지역은 말나드, 평야(바얄루세마), 준말나드 지역으로 나뉘었다. 말나드 지역에서는 벼, 베텔 잎, 카다멈, 후추를 재배했고, 준말나드 지역에서는 쌀, 수수, 옥수수, 콩, 유지종자를 생산했으며 소 사육의 중심지였다.[65] 동쪽 평야 지역에서는 카베리 강, 퉁가바드라 강, 베다바티 강 등의 강을 이용해 사탕수수, 벼, 코코넛, 아레카야자, 베텔 잎, 바나나, 꽃(''vara vana'')을 재배했다.[47][66] 관개 시설로는 저수지, 우물, 자연 연못, 댐 집수 지역의 수역(''Katta'')이 있었다.[67] 경작되지 않던 토지를 관개했다는 기록은 농업 공동체가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68]토양은 신다-8000 지역의 검은 토양(''Karimaniya'')과 붉은 토양(''Kebbayya mannu'')이 있었다.[69][70] 경작지는 논, 밭, 소규모 과수원으로 나뉘었고, 벼가 주요 작물이었다. 논은 ''kalani'', ''galde'', ''nir mannu'', ''nir panya'' 등으로 불렸으며, 특히 물을 가둬 재배하는 벼 논을 가리켰다.[71]
목축은 강가바디 전역에서 널리 행해졌다. ''고사하스라''(소 천 마리), ''가사라''(소 주인), ''고사시''(소 기증자), ''고이티''(목녀), ''고사사''(소 보호자) 등의 용어가 이를 뒷받침한다.[72] 소 소유는 경작지 못지않게 중요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73] 비문에는 소 떼 약탈이 언급되어 목축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파괴적인 약탈, 여성 폭행(''pendir-udeyulcal''), 베다(사냥꾼 부족)에 의한 여성 납치는 당시의 군사주의를 보여준다.[74]
4. 2. 세금 제도
만야(ಮನ್ಯ|만야kan)는 세금이 면제되는 토지로, 때때로 여러 마을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토지는 상위 지배자와 관계없이 지역 수장에 의해 부여되었는데, 이는 분권화된 경제를 나타낸다. 직무 중 사망한 영웅에게는 빌라브리티(ಬಿಲವೃತ್ತಿ|빌라브리티kan) 또는 칼나드(ಕಾಲ್ನಡ್|칼나드kan)라고 불리는 토지가 부여되었다.[75] 사원 유지를 위해 봉헌된 토지는 탈라브리티(ತಲವೃತ್ತಿ|탈라브리티kan)라고 불렸다.[76]소득세의 종류로는 카라(ಕರ|카라kan) 또는 안타카라(ಅಂತಕರ|안타카라kan), 우트코타(ಉತ್ಕೋತ|우트코타kan), 히란야(ಹಿರಣ್ಯ|히란야kan), 술리카(ಸುಲಿಕ|술리카kan)가 있었다. 토지 경작권을 가진 사람은 실제 경작 여부와 관계없이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77][78]
싯다야(ಸಿದ್ಧಾಯ|싯다야kan)는 농업에 부과되는 지방세였고, 포톤디(ಪೊತ್ತೊಂದಿ|포톤디kan)는 지역 봉건 통치자가 상품에 부과하는 세금이었다. 포톤디는 문맥에 따라 1/10, 아이다라비(ಆಯ್ದಲವಿ|아이다라비kan)는 1/5, 엘라라비(ಏಳಲವಿ|엘라라비kan)는 1/7을 의미했다.[79] 만나다레(ಮನ್ನದರೆ|만나다레kan)는 토지세, 쿠림바데레(ಕುರಿಂಬದೆರೆ|쿠림바데레kan)는 목자세를 의미했다. 바가(ಭಾಗ|바가kan)는 토지 생산량이나 면적의 일부를 의미했다. 키루데레(ಕಿರುದೆರೆ|키루데레kan), 사마타데레(ಸಮಥದೆರೆ|사마타데레kan)와 같은 소액 세금도 있었다. 마을은 지역 관리 수행원 유지비 외에도 전투에 나서는 군대에 식량을 제공해야 했다.[80] 빗투바타(ಬಿತ್ತುವಟ್ಟ|빗투바타kan) 또는 니라바리(ನೀರಾವರಿ|니라바리kan) 세금은 관개 저수지 건설을 위해 징수되었으며, 생산량의 일정 비율로 구성되었다.[81]
5. 사회
서강가 사회는 여러 면에서 당대의 종교, 정치, 문화적 발전을 반영했다. 왕실 가족은 정치학, 코끼리와 말 타기, 궁술, 의학, 시, 문법, 연극, 문학, 무용, 노래, 악기 사용 등 다양한 과목을 교육받았다.[105]
일반 남성은 하의로 도티를, 상의로 평범한 천을 사용한 두 개의 제한 없는 의복을 착용했고, 여성은 바느질한 속치마와 함께 사리를 입었다. 지위가 높은 남성은 터번을 착용했고, 사람들은 대나무나 갈대로 만든 우산을 사용했다.[119] 남녀 모두 장신구를 착용했으며, 코끼리와 말도 장식했다. 남성은 반지, 목걸이(honnasara, honnagala sara), 팔찌(Kaduga, Kaftkina)를, 여성은 코 장식(bottu), 코 링(mugutti), 팔찌(bale, kankana), 다양한 목걸이(honna gante sara, kati sutra)를 착용했다.[119]
여가 시간에는 남성들이 승마, 레슬링 관람, 닭싸움, 숫양 싸움을 즐겼다.[120] 살로트기(Salotgi), 발리가비(Balligavi), 탈라군다(Talagunda), 아이홀레(Aihole), 아라시케레(Arasikere) 등지에는 아그라하라(agraharas), 가티카(ghatikas), 브라마푸라(brahmapura), 마타(matha)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고등 교육 기관이 있었다.[121]
5. 1. 사회 구조와 계층
서강가 사회는 그 당시의 종교, 정치, 문화적 발전을 반영하였다. 여성들은 지역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왕비들에게 영토 책임이 분배되기도 하였다.[104] 사위, 아내, 딸이 재정 및 행정적 책임을 상속받은 사례도 있었다. 에레강가 2세 왕의 총리직과 전사의 아내인 자키아베에게 수여된 '날가분다' 지위가 그 예시이며, 자키아베가 금욕 생활을 시작하자 그녀의 딸이 그 지위를 물려받았다.[106][107]사원의 데바다시 제도(sule 또는 기녀)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왕궁의 구조를 본떠 만들어졌다.[108] 당시 문헌에는 낮은 계급의 왕비들과 여성들의 왕실 구역의 기녀들을 동반한 수석 왕비가 언급되어 있다.[108] 왕과 수장들의 궁궐에 고용된 일부 기녀와 첩들은 존경받았는데, 난다브바의 요청으로 지역 수장이 자이나 사원에 토지를 기증한 사례가 있다.[109]
브라만은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를 누렸고 토지에 대한 특정 세금과 관습이 면제되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교육, 지역 사법부, 수탁자 및 은행가로서의 기능, 학교, 사원, 관개 저수지, 휴식처 관리, 마을에서 징수해야 할 세금 징수, 공공 기금 모금과 같은 공공 업무를 관리했다.[110]
브라만을 죽이는 것은 죄라는 힌두교의 신념에 따라 사형이 적용되지 않았다.[111] 크샤트리아(satkshatriya)도 카스트 제도 내에서의 높은 지위 때문에 사형이 면제되었다. 심각한 범죄는 발이나 손을 절단하는 형벌을 받았다.[112] 당시 문학 자료에 따르면 힌두 카스트 제도에는 최대 10개의 카스트가 있는데, 크샤트리아 중 3개, 브라만 중 3개, 바이샤 중 2개, 수드라 중 2개 카스트가 있었다.[113]
가족법은 남성 상속인이 없을 경우, 사망자의 아내나 딸 또는 생존 친척이 집, 토지, 곡물, 돈 등의 재산을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재산 청구자가 없을 경우 국가가 이러한 재산을 자선 자산으로 소유했다.[114] 계급 간 결혼, 아동 결혼, 외삼촌의 딸과의 결혼, 스바얌바라 결혼(신부가 많은 지원자 중에서 신랑을 선택하여 화환을 씌우는 결혼)이 모두 유행했다.[115] 전사의 영웅석(Viragallu)이 있는 기념물이 세워졌고, 해당 가족은 기념물 유지 관리를 위해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116]
수많은 마하사티칼(Mahasatikals, 또는 Mastikal – 남편의 죽음에 따라 의식적인 죽음을 받아들인 여성을 위한 영웅석)의 존재는 왕족들 사이에서 사티의 인기가 있었음을 나타낸다.[117] 살레카나와 얄라사마디(jalasamadhi, 물에 빠져 죽는 것)에 의한 의식적 죽음도 행해졌다.
5. 2. 여성의 역할
서강가 왕조 시기 여성들은 지역 행정에 참여했다. 쿤다투르의 봉건 영주 파랍바야-아라시[104]와 스리푸루샤 왕, 부투가 2세, 그리고 봉건 영주 페르마디[105]의 왕비들처럼 왕비에게 영토 책임을 분배했기 때문이다. 사위, 아내 또는 딸이 재정 및 행정적 책임을 상속받은 사례가 있었다. 에레강가 2세 왕의 총리직과 전사의 아내인 자키아베에게 수여된 '날가분다'(nalgavunda, 지역 지주)의 지위가 그 예이다. 자키아베가 금욕 생활을 시작하자 그녀의 딸이 그 지위를 물려받았다.[106][107]데바다시 제도(sule 또는 기녀)는 널리 퍼져 있었으며, 왕궁의 구조를 본떠 만들어졌다.[108] 바다라다네(Vaddaradhane)와 같은 당대 문헌에는 낮은 계급의 왕비들(arasiyargal)과 여성들의 왕실 구역(pendarasada suleyargal)의 기녀들을 동반한 수석 왕비(Dharani Mahadevi)가 언급되어 있다.[108] 왕과 수장들의 궁궐에 고용된 일부 기녀와 첩들은 존경받았는데, 예를 들어 난다브바의 요청으로 지역 수장이 자이나교 사원에 토지를 기증한 사례가 있다.[109]
수많은 마하사티칼(Mahasatikals, 또는 Mastikal – 남편의 죽음에 따라 의식적인 죽음을 받아들인 여성을 위한 영웅석)의 존재는 왕족들 사이에서 사티가 인기 있었음을 나타낸다.[117] 살레카나와 얄라사마디(jalasamadhi, 물에 빠져 죽는 것)에 의한 의식적 죽음도 행해졌다.[118]
5. 3. 기념물과 의례
서강가 사회에서 여성은 지역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왕비에게 영토 책임을 분배하기도 했다.[104] 사위, 아내, 딸이 재정 및 행정적 책임을 상속받은 사례도 있었다. 에레강가 2세 왕의 총리직과 전사의 아내인 자키아베에게 '날가분다'라는 지역 지주의 지위가 수여되었고, 자키아베가 금욕 생활을 시작하자 그녀의 딸이 그 지위를 물려받은 것이 그 예이다.[106][107]전사한 영웅을 기리기 위해 영웅석(Viragallu)을 세웠고, 해당 가족은 기념물 유지 관리를 위해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116] 남편이 죽으면 의식적인 죽음을 택한 여성을 위한 영웅석인 마하사티칼(Mahasatikals, 또는 Mastikal)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왕족들 사이에서 사티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117] 살레카나와 얄라사마디(물에 빠져 죽는 것)를 통한 의식적 죽음도 행해졌다.[118]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아그라하라(agraharas), 가티카(ghatikas), 브라마푸라(brahmapura), 마타(matha) 등이 있었으며, 발리가비(Balligavi), 탈라군다(Talagunda), 아이홀레(Aihole), 아라시케레(Arasikere), 살로트기(Salotgi) 등지에 있었다.[121] 왕실 가족의 교육은 엄격하게 감독되었으며, 정치학, 코끼리와 말 타기, 궁술, 의학, 시, 문법, 연극, 문학, 무용, 노래, 악기 사용 등의 과목을 포함했다.[105]
6. 문화
서강가 왕조는 자이나교와 힌두교의 여러 종파를 후원하여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문화를 이루었다.[82] 칸나다어 문학과 산스크리트어 문학이 활발하게 발전했으며, 건축 분야에서도 뛰어난 유산을 남겼다. 행정에는 칸나다어와 산스크리트어가 함께 사용되었다.[155]
6. 1. 종교
서강가 왕조는 자이나교와 힌두교의 샤이바교, 베다 브라만교, 바이슈나바교를 모두 후원했다.[82] 그러나 모든 왕이 모든 종교에 동등한 우선순위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82] 마다바 왕과 하리바르마는 소와 브라만을 숭배했고, 비슈누고파 왕은 독실한 바이슈나바교 신자였다.[83] 마다바 3세와 아비니타의 비문에는 자이나교 승려와 사원에 대한 후한 기증이 묘사되어 있으며,[84] 두르비니타 왕은 베다 제사를 거행하여 그가 힌두교 신자였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85]8세기에 시바마라 1세 왕이 수많은 자이나교 바사디를 건설하면서 자이나교가 왕조 내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86] 부투가 2세 왕과 차운다라야 장관은 열렬한 자이나교 신자였으며, 이는 곰마테슈와라 거석 건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87] 자이나교도들은 24명의 티르탄카라(지나)를 숭배했으며, 그들의 이미지는 사원에 봉헌되었다. 10세기부터 슈라바나벨골라의 바드라바후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의 발자취 숭배는 불교와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88] 곰마테슈와라 거석(티르탄카라 아디나타의 아들인 바후발리의 동상)의 봉헌에서 일부 브라만교의 영향을 볼 수 있다.[89] 이전에는 단순히 티르탄카라의 수행자로 여겨졌던 약샤와 약시와 같은 하위 신들의 숭배는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볼 수 있었다.[90]
비문에서 슈로트리야 브라만에게 주어진 기증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베다 브라만교는 6세기와 7세기에 인기가 있었다.[91] 이 비문들은 또한 왕족의 고트라(혈통) 소속과 아슈바메다(말 제사) 및 히라냐가르바와 같은 베다 의식 준수에 대해 설명한다.[92] 브라만과 왕은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누렸다. 브라만이 거행한 의식은 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했고, 왕이 브라만에게 한 토지 기증은 그들을 사회에서 부유한 지주 수준으로 끌어올렸다.[93] 그러나 바이슈나바교는 저조한 수준을 유지했으며, 그 원인에 대한 기증을 설명하는 비문은 많지 않다.[94] 서강가 왕조에 의해 건설된 일부 바이슈나바 사원으로는 현 미소르 지구의 난잔구드, 사투르, 헝갈라에 있는 나라야나스와미 사원이 있다.[95] 신 비슈누는 소라(산카), 원반(차크라), 곤봉(가다), 연꽃(파드마)을 들고 있는 네 개의 팔로 묘사되었다.[96]
8세기 초부터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샤이바교에 대한 후원이 증가했다.[97] 샤이바 사원에는 지성소에 시바 링가와 함께 어머니 여신, 수르야(태양신),[100] 난디(황소, 시바의 수행자)의 이미지가 들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지성소를 향한 별도의 정자에 안치되었다.[101][102] 링가는 인공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경우에는 가네샤(시바의 아들)와 파르바티(시바의 배우자)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101] 사제와 금욕주의자들의 활발한 노력 덕분에 샤이바 수도원은 현 콜라르 지구의 난디 언덕, 아바니, 헤바타와 같은 많은 곳에서 번영했다.[103]
6. 2. 문학
서강가 왕조 시대에는 칸나다어 문학과 산스크리트어 문학이 활발하게 발전했다. 그러나 많은 작품이 현재는 사라지고, 다른 작품에서 언급되는 내용으로만 전해진다.[132][122]978년에 쓰여진 차운다라야의 ''트리샤슈티락샤나 마하푸라나''는 초기 칸나다어 산문 작품이다. 이 작품은 1세기 전 라슈트라쿠타 아모가바르샤 1세 시대에 지나세나와 구나바드라가 저술한 산스크리트 작품인 ''아디푸라나''와 ''우타라푸라나''를 요약한 것이다.[122] 이 책은 쉬운 칸나다어로 쓰여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으며, 복잡한 자이나교 교리와 철학은 다루지 않았다. 차운다라야의 작품은 아디카비 팜파와 란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4명의 자이나교 ''티르탄카라'' 등 총 63명의 자이나교 관련 인물들의 전설을 담고 있다.[123][124]
6세기 두르비니타 왕은 초기 칸나다어 작가로 추정된다. 850년의 ''카비라자마르가''는 두르비니타를 초기 칸나다어 산문 작가로 언급한다.[19][125][126] 900년경 구나바르마 1세는 ''슈드라카''와 ''하리밤샤''를 칸나다어로 저술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이후 시대의 작품에서 언급된다. 그는 에레강가 니티마르가 2세의 후원을 받았으며, ''슈드라카''에서 자신의 후원자를 고대 슈드라카 왕과 비교했다.[127][128] 란나는 초기 문학 활동 시절 차운다라야의 후원을 받았으며, 그의 고전 ''파라슈라마 차리테''는 그의 후원자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여겨진다.[129][43]
벵기 출신 브라만 학자 나가바르마 1세(10세기 후반)는 차운다라야의 후원을 받아 ''찬돔부디''(운율의 바다)를 저술했다. 이는 칸나다어 운율에 관한 초기 저술로 평가받는다.[123][128] 그는 또한 칸나다어로 된 초기 연애 소설 중 하나인 ''카르나타카 카담바리''를 ''참푸''(산문과 운문이 혼합된 양식) 스타일로 저술했다. 이 작품은 바나 시인의 산스크리트어 연애 작품을 바탕으로 한다.[123][128] 800년경 시바마라 2세 왕이 저술한 ''가자샤타카''(코끼리에 관한 백수시)는 코끼리 관리에 관한 칸나다어 작품이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122][130]
산스크리트 문학에서는 마다바 2세가 ''다타카 수트라브리티''를 저술했다. 두르비니타는 ''바다카타''의 산스크리트어 버전, 파니니 문법 주석인 ''사바다바타라'', ''키라타르주네야'' 15장에 대한 주석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32] 시바마라 2세는 ''가자마타 칼파나''를 저술했다.[132] 헤마세나는 ''라가바판다비야''를 저술했다.[133] 바데바심하는 ''가야친타마니''와 ''크샤트라추다미니''를 산문 스타일로 저술했다.[127] 차운다라야는 ''차리타라사라''를 저술했다.[43]
6. 3. 건축
서강가 양식 건축은 팔라바와 바다미 찰루키아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토착적인 자이나교 특징 또한 지니고 있다.[134] 강가 양식 기둥은 기단에 전통적인 사자상을 새기고 머리 부분에 원형 기둥을 세운 것이 특징이며, 사원의 계단식 비마나와 사각 기둥에는 수평 몰딩이 있는 등 팔라바 양식에서 계승된 특징을 보인다.[127]차운다라야가 의뢰한 고마테슈와라 거상은 고대 카르나타카 서강가 조각 예술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상은 미세한 입자의 백색 화강암으로 조각되었으며, 연꽃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허벅지까지는 지지대가 없고, 높이는 약 18.29m, 얼굴 크기는 약 1.98m이다. 고요한 표정, 우아한 곱슬머리, 비례적인 해부학적 구조, 거대한 크기, 예술성과 장인 정신의 조화는 이 상을 중세 카르나타카 조각 예술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만들었다.[135] 이 상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암석 조각상이기도 하다.[136]
마하스탐바 또는 브라마스탐바라고 불리는 독립 기둥 또한 독특한데, 티야가다 브라마데바 기둥과 브라마데바 기둥이 그 예이다.[137][138] 덩굴과 꽃 모티브로 장식된 원통형 또는 팔각형 기둥 꼭대기에는 앉아 있는 브라마가 있고, 기둥 기단에는 일반적으로 중요한 자이나 인물과 비문이 새겨져 있다.[139]
탑이 점차 좁아지는 층(탈라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작은 사원 모형으로 장식된 자이나 바사디는 또 다른 중요한 건축물이다. 이 작은 사원에는 티르탄카라(자이나 성자)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반원형 창문이 사원들을 연결하고, 꼭대기에는 장식적인 키르티무카(악마 얼굴)가 사용되었다. 슈라바나벨골라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물로는 10세기 또는 11세기에 건설된 차운다라야 바사디, 6세기에 건설된 찬드라굽타 바사디, 그리고 982년의 고마테슈와라 거상이 있다.[140] 12세기에 유명한 호이살라 조각가 다소자는 찬드라굽타 바사디에 일부 특징을 추가했는데,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왕의 삶을 묘사하는 장식적인 문설주와 구멍이 뚫린 스크린 창문이 그의 작품이다.[141]
드라비다 예술의 훌륭한 예인 캄바다할리 판차쿠타 바사디(5개의 탑이 있는 자이나 사원)는 약 900년경에 건설되었으며, 브라마데바 기둥이 있다.[142][143] 벽 감실은 꽃 모티브, 날아다니는 신성한 생물(간다르바), 야크샤(성자의 시중)가 타고 있는 상상 속 괴물(마카라)의 조각이 있는 토라나(린텔)로 장식되어 있으며, 감실에는 티르탄카라의 이미지가 있다.[144] 라차말라 2세 통치 기간 동안 건설된 발리말라이 자이나 석굴과 시야망갈람 자이나 사원[145][146], 그리고 카나카기리 자이나 티르타의 5세기 또는 6세기 파르슈바나타 사원도 주목할 만한 건축물이다.[147][148]
강가 왕조는 인상적인 드라비다 고푸람을 가진 많은 힌두 사원을 건설했는데, 고푸람에는 힌두 신화의 회반죽 인물상이 있으며, 만다파(홀)에는 장식적인 구멍이 뚫린 스크린 창문과 삽타마트리카 조각(일곱 하늘의 어머니)이 있다.[149] 잘 알려진 예로는 홀레 알루르의 아라케슈와라 사원[150], 만네의 카필레슈와라 사원, 콜라르의 콜라라마 사원, 나라사망갈라의 라메슈와라 사원[151], 베구르의 나가레슈와라 사원[152], 그리고 아랄라굽페의 칼레슈와라 사원이 있다.[153] 탈라카드에서는 마랄레슈와라 사원, 아라케슈와라 사원, 파탈레슈와라 사원을 건설했다. 힌두 사원은 꽃 테두리 장식이 일반적인 자이나 사원과 달리 서사시와 푸라나의 에피소드를 묘사한 테두리(장식 조각이 있는 돌판)로 구별되었다.[144]
강가 왕조의 또 다른 독특한 유산은 그들이 남긴 많은 비라갈루(영웅석)이다. 비라갈루는 전투 장면, 힌두 신, 삽타마트리카, 자이나 티르탄카라, 그리고 의식적인 죽음(예: 도다훈디 영웅석)을 부조로 묘사한 기념물이다.[139][154]
6. 4. 언어
서강가 왕조는 행정과 통치에 칸나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널리 사용했다. 이 두 언어를 함께 사용한 비문도 발견되었다.[155] 이중 언어 비문의 경우, 왕조의 기원, 계보, 왕의 칭호, 축복과 같은 내용은 주로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되었다. 반면, 토지 기증과 관련된 내용, 마을 경계, 지역 관리의 역할, 기증받은 사람의 권리와 의무, 세금 및 기타 지역 관련 내용은 당시 지역에서 사용하던 언어인 칸나다어로 작성되었다.[155]시간이 흐르면서 두 언어의 사용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초기(350년~725년)에는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된 구리판 비문이 많았다. 이는 행정 언어로 칸나다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이 시기 기록의 대부분이 브라만 사원에 토지를 기증하는 내용(브라마데야)이었기 때문이다.[156] 725년에서 1000년 사이에는 칸나다어로 된 석비문이 산스크리트어로 된 구리판보다 많아졌다. 이는 자이나교 신자들이 칸나다어를 통해 자이나교를 전파했기 때문이다.[47][157] 최근 마이소르 근처 툼불라에서 4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구리판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왕조의 계보는 산스크리트어로, 마을 경계는 칸나다어로 기록되어 있다.[158]
현대 방갈로르 근처 베구르에서는 890년에 '방갈로르 전투'를 언급하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은 할레 칸나다어(고대 칸나다어)로 작성되었으며, 방갈로르라는 도시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된 기록이다.[159] 서강가 왕조는 칸나다어와 나가리 문자로 된 글자가 새겨진 주화를 만들었다.[160][161] 주화 앞면에는 주로 코끼리 그림이, 뒷면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코끼리 그림 위에는 칸나다어로 '바드르'(Bhadr, 왕실 우산 또는 소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사용된 화폐 단위는 파고다(pagoda, 52그레인), 파남(fanam, 파고다의 1/10 또는 1/2), 그리고 1/4 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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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diganhalli and Bangalore copper plates, the Chaluvanahalli plates, Kutalur grant, Kadagattur and Nallala grants of King Durvinita, Kondunjeruvu grant of King Avin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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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i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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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i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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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kunda in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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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i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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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di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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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di copper plates of Rashtrakuta Govinda III of 800, Koyattur-12000 grant of King Dodda Naradhipa Bana in 810, the Ganiganur inscription, Nolamba King Mahendradhirajas grant of his house towards a Shaiva temple in 878, Baragur inscription of 914 of King Ayappadeva Nolamba, the Ninneshvaradeva temple built by King Dilipayya Nolamba in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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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kkarahalli, Manalevadi, Aragodupalli and Torevalli inscrip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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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di copper plates of 800, Avani pillar inscription, Perbetta hero stones, 878 inscription of Nolamba Mahendradhiraja, Baragur inscription of 919, 942 Tumkur grant and Basavanahalli inscrip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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