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트라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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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트라서주의는 나치당 내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오토 슈트라서 형제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상으로, 반자본주의, 사회주의적 개혁, 노동자 계급 지지 등을 핵심으로 한다. 이들은 금융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부의 재분배와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하며,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히틀러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슈트라서주의는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사망하고 오토 슈트라서가 망명하면서 쇠퇴했다. 하지만 이후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네오 나치, 극우 단체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재해석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오토 슈트라서 형제는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폭동으로 감옥에 수감된 후, 독일 북부의 나치당 세력을 이끌었다. 당시 북부 독일은 하층 노동자 계급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은 부의 재분배와 구 군주의 재산 몰수를 주장하는 나치당 좌파의 주요 지지층이 되었다. 이들은 '민족사회주의통신'이라는 독자적인 잡지를 발행하며 당 내 우파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29]
슈트라서주의는 반자본주의, 사회주의적 개혁, 노동자 계급 지지 등을 주요 이념으로 삼았다.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우리는 사회주의자이며, 경제적 약자의 착취와 부당한 임금 지급과, 성과에 의하지 아니하고 재산과 돈을 축적하는 비도덕적인 인간을 평가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의 천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체제를 멸종시켜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라고 말하며, 당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36]
2. 슈트라서 형제
1926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히틀러는 '지도자원리'를 천명하며 슈트라서 형제의 주장을 부인했다. 그는 나치 좌파의 유력 인사였던 요제프 괴벨스를 회유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오토 슈트라서에게는 탈당을 강요했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형인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피살되었고, 오토 슈트라서는 살아남아 반히틀러 민족 사회주의 조직인 흑색전선을 이끌며 히틀러 정권에 저항했다.[36]
슈트라서 형제는 1923년 뮌헨 폭동으로 히틀러가 투옥된 후, 주로 북독일에서 나치당 계열 조직을 이끌었다. "국가사회주의 통신" 등 독자적인 기관지를 발행하며 사회주의적 측면을 강조했고, 독일 공산당이 제안한 Fürstenenteignungde 법안에 대해 "사익보다 공익 우선"이라는 나치 좌파의 강령 하에 찬성했다. 이 때문에 뮌헨을 중심으로 한 나치당 우파와 강하게 대립했다. 25개조 강령을 명확히 하고, 당 주류의 반유대주의 일변도 대신, 공화제 주장, 반서유럽 자본주의에 기반한 친소 외교 노선 등과 함께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1926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히틀러는 슈트라서 등의 주장을 부정하고, 당내 지도자 원리를 확립했다. 이후 그레고어와 요제프 괴벨스를 회유하는 한편, 오토는 탈당을 강요받았다. 히틀러의 권위가 당내에서 확고해지자, 좌파의 세력은 쇠퇴했고,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에른스트 룀, 그레고어 슈트라서 등 대표적인 인물이 숙청되면서 좌파는 당내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오토는 후에 흑색 전선을 결성하여 좌파적인 국가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2. 1. 그레고어 슈트라서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에 참전한 후 독일의 극민족주의 정치에 뛰어들어 자유군단에 가입했다. 1920년 카프 쿠데타에 참여했고, 이후 1921년 나치당에 통합된 "민중 방위 연합"이라는 자신의 민족주의적 방위 연합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하여 맥주 홀 폭동 (1923년 11월 8–9일)에도 참여했고, 나치당에서 높은 지위를 얻었다.[29]
그러나 슈트라서는 나치당 내에서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는 인물로, 전후 독일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혁명적 민족주의가 필요하며, 독일 노동 계급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후, 나치당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SA)의 지도자 에른스트 룀은 사회, 정치, 경제 엘리트들을 권력에서 몰아내는 2차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다. 그러나 슈트라서와 룀의 주장은 보수주의자들과 군, 그리고 히틀러를 따르는 나치 당원들에게 반대를 받았다.
1923년 뮌헨 폭동으로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슈트라서 형제(그레고어, 오토 슈트라서)는 주로 북독일에서 나치당 조직을 이끌었다. 이들은 "국가사회주의 통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며 사회주의적 주장을 펼쳤고, 독일 공산당이 제안한 Fürstenenteignungde 법안에 찬성했다. 이로 인해 뮌헨을 중심으로 한 나치당 우파와 갈등을 겪었다.
1925년 9월,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북·서독일 대관구 활동 공동체』(Arbeitsgemeinschaft der Nord-und Westdeutschen Gaue der NSDAP, 약칭 NSAG)를 결성했다. 이들은 기관지 『국민 사회주의 통신』(Nationalsozialistische Briefe)을 발행했으며, 오토 슈트라서와 괴벨스도 참여했다.
1926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히틀러는 슈트라서의 주장을 부정하고 당내 지도자 원리를 확립했다. 이후 그레고어와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회유되었고, 오토는 탈당했다. 히틀러의 권위가 강화되면서 좌파 세력은 약해졌고,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숙청되어 살해당했다.
2. 2. 오토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는 형인 그레고어 슈트라서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36] 그는 1925년 나치당에 입당하여 '국가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30년 나치당에서 추방된 후에는 반체제 단체인 검은 전선을 설립하여 독일 민족주의 형태의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하며 활동했다.[29] 1923년 뮌헨 폭동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투옥된 후, 오토 슈트라서는 형과 함께 북독일에서 나치당 계열 조직을 이끌었다.[36] "국가사회주의 통신" 등 독자적인 기관지를 발행하며 사회주의적 측면을 강조했고, 독일 공산당이 제안한 법안에 찬성하는 등 뮌헨을 중심으로 한 나치당 우파와 대립했다.[31]
1934년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오토 슈트라서는 흑색 전선을 결성하여 좌파적인 국가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1933년 독일을 탈출하여 체코슬로바키아와 캐나다에서 살다가 말년에 서독으로 돌아왔으며, 그동안 히틀러와 그가 생각하는 나치즘의 이상에 대한 배신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34]
3. 이념
슈트라서주의는 25개조 강령을 대체하여 공화정 수립, 반자본주의, 사회주의적 개혁 등을 주장했다. 오토 슈트라서가 지롱드지에 발표한 '독일 혁명의 열네 테제 (Die 14 Thesen Deutschen Revolution)'에는 이러한 자코뱅주의적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5] 그는 1925년에 출판한 ''Nationalsozialistische Briefe''에서 계급 투쟁, 부의 재분배, 소비에트 연방과의 동맹 가능성을 논의했고, 1930년 후속작 ''Ministersessel oder Revolution''(''내각 의석 또는 혁명'')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즘의 사회주의적 측면을 배반한 것과 '지도자 원리'를 비판했다.[5]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나치당에 더 오래 머물렀고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영향력은 더 적었다. 반면, 오토 슈트라서는 대규모 토지 분할과 길드 사회주의와 유사한 것의 발전, 경제 계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Reich'' 협동조합 회의소의 설립을 요구했다.[6]
이안 커쇼에 따르면, SA의 지도자(그레고어 슈트라서 포함)는 독일의 미래에 대한 다른 비전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정치를 제안하지 않았다. 슈트라서주의자들은 나치 정권의 급진화와 독일 엘리트의 전복을 옹호하며, 히틀러의 집권을 완성되어야 할 반쪽 혁명이라고 불렀다.[7]
오토 슈트라서는 범유럽 민족주의를 강하게 옹호했으며, 리하르트 폰 쿠덴호베-칼레르기의 범유럽 통일 주장을 칭찬하기도 했다.[8] 그는 스페인 내전에 독일이 개입하는 것을 가장 비판했으며, 친위대(S.S.), S.A. 및 국방군(Reichswehr)에게 "스페인을 위한 독일 피는 없다, 독일 만세"라는 구호를 내걸고 히틀러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8]
1923년 뮌헨 폭동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투옥된 후, 슈트라세르 형제는 주로 북독일에서 나치당 계열 조직을 이끌었다. 이들은 독자적인 기관지를 발행하며 사회주의적 측면을 강조했고, 독일 공산당이 제안한 법안에 대해 "사익보다 공익 우선"이라는 나치 좌파의 강령 하에 찬성했다. 뮌헨을 중심으로 한 나치당 우파와 강하게 대립했으며, 25개조 강령을 명확히 하고, 공화제 주장, 반서구 자본주의에 기반한 친소 외교 노선 등과 함께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히믈러, 롤란트 프라이슬러 등이 좌파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에른스트 룀 등의 돌격대 간부도 좌파에 가까웠고, 정권 획득 후에는 "제2 혁명"을 주창했다. 1926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히틀러는 슈트라세르 등의 주장을 부정하고, 당내 지도자 원리를 확립했다. 이후 그레고어와 요제프 괴벨스를 회유하고, 오토는 탈당을 강요받았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룀, 그레고어 슈트라서 등 대표적인 인물이 숙청되었고, 좌파는 당내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그러나 나치 독일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괴벨스와 히믈러 등의 사상에도 좌파의 영향은 남아 있었다. 오토는 후에 흑색 전선이라 불리는 조직을 결성하여 좌파적인 국가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등 나치 좌파의 활동 기반은 바이에른을 기반으로 하는 뮌헨 나치(나치 우파)와는 달리 북독일이나 루르 지역의 서독에 있었다. 1925년 9월, 그레고어를 지도자로, 요제프 괴벨스를 서기장으로 하는 '''북·서독일 대관구 활동 공동체'''(NSAG)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기관지 『'''국민 사회주의 통신'''(Nationalsozialistische Briefe)』을 발간했고, 오토 슈트라서는 선전부장과 편집장을, 괴벨스는 논설 위원으로 활동했다.
나치 좌파는 반유대주의라는 점에서는 우파와 다르지 않았지만,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전체와 투쟁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반마르크스주의였으며, 중소기업주, 봉급 생활자, 연금 생활자, 중산 농민층의 반독점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를 대변했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을 취하지 않았고, 나치 좌우파의 차이는 이념보다는 전술에 있었다.
3. 1. 반자본주의와 사회주의적 개혁
슈트라서주의는 금융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부의 재분배와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했다.[3] 오토 슈트라서는 '독일 혁명의 열네 테제'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을 제시했다.[5]
그레고어 슈트라서에 따르면, 슈트라서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로서 경제적 약자를 착취하고 부당한 임금을 지급하며, 성과가 아닌 재산과 돈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멸망시키려 했다.[36] 그들은 더 우수하고, 정당하며, 도덕적인 체제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6]
오토 슈트라서는 1925년에 출판한 ''Nationalsozialistische Briefe''에서 대중주의 형태의 경제적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며, 계급 투쟁, 부의 재분배, 소비에트 연방과의 동맹 가능성을 논의했다.[5] 1930년 후속작인 ''Ministersessel oder Revolution''(''내각 의석 또는 혁명'')에서는 히틀러가 나치즘의 사회주의적 측면을 배반한 것을 공격하고, '지도자 원리'라는 개념을 비판했다.[5]
나치 좌파는 반유대주의라는 점에서는 우파와 다르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전체와 투쟁하는 자세를 보였다.[29] 그러나 나치 좌파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었고, 오히려 반마르크스주의를 표방했다.[30]
3. 2. 반유대주의
슈트라서주의는 반유대주의라는 점에서는 나치즘의 주류와 다르지 않았지만, 경제적 측면에 더 집중했다.[3] 이들은 금융 자본주의와 '유대인 자본주의'를 동일시하며 비판했고, 이를 생산주의 또는 "생산적 자본주의"와 대립시켰다.[4]
오토 슈트라서는 1925년에 출판한 ''Nationalsozialistische Briefe''에서 계급 투쟁, 부의 재분배, 소비에트 연방과의 동맹 가능성을 언급하며 경제적 반유대주의를 지지했다.[5]
나치 좌파는 반자본주의를 반유대주의로 둔갑시키는 것을 비판했고,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전체와 투쟁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반마르크스주의였으며, 거대 자본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화를 두려워하는 중소기업주, 봉급 생활자, 연금 생활자, 중산 농민층의 반독점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를 대변했다.[30]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1927년 7월 『국민 사회주의자 통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3. 3. 범유럽 민족주의 (오토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는 범유럽 민족주의를 강하게 옹호했으며, 리하르트 폰 쿠덴호베-칼레르기가 범유럽 통일을 주장한 것에 대해 칭찬하기도 했다.[8] 그는 스페인 내전에 독일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친위대(S.S.), S.A., 국방군(Reichswehr)에게 "스페인을 위한 독일 피는 없다, 독일 만세"라는 구호를 외치며 히틀러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8]
4. 히틀러와의 갈등 및 몰락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오토 슈트라서 형제는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폭동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독일 북부의 나치당 세력을 이끌었다. 북부 독일은 하층 노동자 계급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은 부의 재분배와 구 군주의 재산 몰수를 주장하는 나치당 좌파의 주요 지지층이 되었다. 이들은 '민족사회주의통신'이라는 독자적인 잡지를 발행하며 당내 우파와 갈등했다.[29]
히틀러는 출옥 후 밤베르크 회의에서 '지도자원리'를 내세워 슈트라서 형제의 주장을 부정했다. 그는 나치 좌파의 유력 인사였던 요제프 괴벨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슈트라서 형제에게 탈당을 강요했다.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형인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살해되었고, 오토 슈트라서는 살아남아 반(反)히틀러 민족 사회주의 조직인 흑색전선을 이끌며 히틀러 정권에 저항했다.
5. 현대의 슈트라서주의
현대에는 일부 극우 단체들이 슈트라서주의를 계승하며 반자본주의, 반세계화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유럽의 극우 단체들 사이에서 슈트라서주의 사상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는 1960년대 후반 독일 국가민주당(NPD) 내에서 슈트라서주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아돌프 폰 타덴을 당 지도부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NPD는 히틀러가 기업 및 군 지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회주의에서 벗어났다고 비난하며 슈트라서주의를 수용했다.
미하엘 큔넨과 같은 극단주의자들은 슈트라서주의를 더욱 தீவிர하게 지지했으며, 독일 민족 사회주의 운동/노동당, 민족 전선 (독일), 자유 독일 노동자당 등도 이 사상을 따랐다. 슈트라서주의 운동인 검은 전선의 깃발과 상징은 독일 및 기타 유럽의 네오 나치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 초 국민 전선(NF) 내에서 슈트라서주의가 등장했으며, 데이비드 맥컬든, 리처드 로슨, 데니스 피리 등이 주요 필진이었다. 이들은 존 틴들의 지도부에 반대하여 국가당(NP)으로 이동했으며, 국가당은 영국 노동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슈트라서주의적 경제 정책을 제시했다. 1980년대 초 앤드루 브론스는 국민 전선에 슈트라서주의를 다시 도입하려 했으며, 공식 국민 전선의 급진파는 분배주의를 선택했지만, 반자본주의 수사와 국제 제3의 입장 후계자들의 수사는 슈트라서주의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이탈리아의 제3의 입장 단체들은 경제적 반유대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를 이유로 슈트라서주의를 지지했으며, 프랑스에서도 Groupe Union Défense, Renouveau français 등의 단체들이 슈트라서주의 경제 플랫폼을 칭송했다. 미국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 톰 메츠거가 슈트라서주의와 연관성을 보였으며, 전통주의 노동자당의 매튜 하임바흐는 자신을 슈트라서주의자로 밝히기도 했다.
5. 1. 1930년대 핀란드
1932년 핀란드 정치인 이르외 루투는 핀란드 나치 정당 중 하나인 핀란드 국가 사회주의 연합을 창설했다. 루투의 사상은 대기업 및 국가 이익에 필수적인 기타 자산의 국유화, 자급자족 계획 경제, 노동 조합이 통제하는 의회, 기술 관료의 장관 임명을 포함했다.[10] 루투의 정당은 핀란드 정치에서 주변부에 머물렀고 국회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했지만, 학술 카렐리아 협회와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의 이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12] 1944년, 핀란드의 모든 나치 정당은 파시스트 정당을 금지하는 모스크바 휴전 조약 제21조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11] 이르외 킬펠라이넨, 운토 바르요넨과 같은 루투 정당의 전직 구성원들은 전후 핀란드 사회민주당의 우익 파벌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12][13] 또 다른 주요 전직 구성원인 비에티 뉘캐넨은 급진 인민당의 부의장이 되었다.[14] 이 정당의 이사회 구성원인 헤이키 와리스는 1957년 폰 피에안트 내각에서 사회부 장관이 되었다.[15]5. 2. 전후 독일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돌프 히틀러와 연관이 없고, 경제적 반유대주의가 강한 젊은 구성원들이 부상하면서, 유럽의 극우 단체들 사이에서 슈트라서주의 사상이 더 많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슈트라서주의 사상은 1960년대 후반 독일 국가민주당(NPD) 내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슈트라서주의자들은 아돌프 폰 타덴을 당 지도부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가 떠난 후 당은 히틀러가 기업 및 군 지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회주의에서 벗어났다고 비난하는 데 더욱 강력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16]슈트라서주의는 처음에는 NPD에 의해 수용되었지만, 곧 미하엘 큔넨을 비롯한 더욱 주변적인 극단주의자들과 연관되기 시작했다. 그는 1982년에 이 사상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팸플릿 ''히틀러에게 작별을 고함''을 제작했다. 1982년에 불법화된 소규모 극단주의 운동인 독일 민족 사회주의 운동/노동당이 이 정책을 채택했다. 그 후속 운동인 민족 전선 (독일)도 마찬가지로, 10개 조항의 강령에서 "반물질주의 문화 혁명"과 "반자본주의 사회 혁명"을 요구하며 이 사상에 대한 지지를 강조했다.[17] 자유 독일 노동자당 또한 1980년대 후반 프리드헬름 부세의 지도 아래 이러한 사상으로 기울었다.[18]
슈트라서주의 운동인 검은 전선의 깃발과 망치와 칼이 교차된 상징은 독일 및 기타 유럽의 네오 나치들이 독일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 금지된 더 악명 높은 나치 깃발을 대체하여 사용해 왔다.
5. 3. 영국
1970년대 초 영국에서 국민 전선(NF)의 출판물인 『브리튼 퍼스트』를 중심으로 슈트라서주의가 등장했다. 이 출판물의 주요 필자들은 데이비드 맥컬든, 리처드 로슨, 데니스 피리였다.[19] 이들은 존 틴들의 지도부에 반대하여 존 킹슬리 리드와 동맹을 맺었고, 결국 그를 따라 국가당(NP)으로 들어갔다.[19] 국가당은 영국 노동자들에게 일할 권리를 요구했고, 상당히 슈트라서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제시했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당은 오래가지 못했다.1980년대 초 앤드루 브론스는 국민 전선에 슈트라서주의를 다시 도입하여 당의 이념을 더 명확히 하고자 했다.[21] 그러나 슈트라서주의는 곧 공식 국민 전선의 급진파 영역이 되었고, 리처드 로슨은 배후에서 정책 지시를 돕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22] 이 정치적 군인 분파는 결국 분배주의라는 토착 대안을 선택했지만, 그들의 강력한 반자본주의 수사와 국제 제3의 입장 후계자들의 수사는 슈트라서주의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트로이 사우스게이트가 등장했고, 그의 이념과 잉글리시 민족주의 운동 및 국가 혁명 분파와 같은 관련 단체의 이념은 슈트라서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5. 4. 기타 국가
제3의 입장 단체들은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영감을 받아 경제적 반유대주의적 근거에 기반한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 때문에 종종 슈트라서주의를 지지했다. 이는 프랑스에서 학생 단체인 Groupe Union Défense와 Renouveau français가 모두 슈트라서주의 경제 플랫폼을 칭송하면서 나타났다.[23]나치즘을 좌익 기반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이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특히 1984년 슈트라서주의의 영향을 받은 저서 '국가 사회주의: 좌익 운동'을 저술한 포블 리스-누센의 작품을 통해 나타났다.[24]
미국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인 톰 메츠거가 큉넨의 팜플렛에 영향을 받아 슈트라서주의와 어느 정도 연관성을 보였다.[25] 또한 미국에서 전 전통주의 노동자당의 매튜 하임바흐는 자신을 슈트라서주의자로 밝힌다.[26] 하임바흐는 공개 연설에서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반프리메이슨주의 또는 반공산주의 수사 대신 주로 반자본주의 수사에 참여한다. 하임바흐는 그의 경제적 견해가 해당 단체에 의해 지나치게 좌익적으로 여겨져 국가 사회주의 운동에서 제명되었다.[27] 하임바흐는 NSM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으로 무능한 백인 우월주의 갱으로 남기를 원한다"고 말했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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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o-Nazi group's new leader, a black activist, has vowed to end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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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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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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