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시바타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시바타번은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미조구치 히데카쓰가 에치고에 자리 잡으면서 성립된 번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공을 세웠으며, 아가노강과 시나노강 하류의 간바라 평야를 중심으로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보신 전쟁 당시 신정부 편에 섰으나,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압력으로 동맹에 가입하는 등 복잡한 상황을 겪었다. 이후 신정부군에 합류하여 시바타 지역을 지켰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마지막 번주 미조구치 나오마사는 백작 작위를 받았고, 귀족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시바타번 - 소미번
    소미 번은 미조구치 요시카쓰가 개창한 에도 시대의 번으로, 요시카쓰의 자손들이 번주를 이어가다 마사치카 대에 영지가 몰수되어 폐지되었다.
  • 미조구치씨 - 미조구치 히데카쓰
    미조구치 히데카쓰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공으로 에치고 시바타 번 초대 번주가 되어 시바타 성 건설과 치수 사업으로 번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조겐지를 창건했다.
  • 미조구치씨 - 소미번
    소미 번은 미조구치 요시카쓰가 개창한 에도 시대의 번으로, 요시카쓰의 자손들이 번주를 이어가다 마사치카 대에 영지가 몰수되어 폐지되었다.
시바타번
지리 정보
위치시바타성
기본 정보
이름시바타 번 (新発田藩)
유형
국가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
오늘날의 위치니가타현의 일부
역사
성립1598년
소멸1871년
통치
정부 형태다이묘
다이묘 가문
가문미조구치 씨 (溝口氏)
가문의 지위후다이

2. 역사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쓰아이즈로 이동한 후, 에치고노쿠니 시바타 지역에는 미조구치 히데카쓰가 배치되었다. 히데카쓰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에치고 내 우에스기 옛 가신들의 봉기를 진압한 공으로 영지를 인정받아 시바타 번(초기 6만 석)을 세웠다. 이후 시바타 번은 토자마 다이묘로서 메이지 시대까지 미조구치 가문이 12대에 걸쳐 통치하였다.

번의 역사 동안 영지 분할과 재편성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아가노강시나노강 하류의 광대한 저습지인 간바라 평야(蒲原平野일본어)를 개간하여 곡창지대로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이러한 노력으로 실제 수확량은 공식적인 고쿠다카를 훨씬 초과하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는 4대 번주 미조구치 시게카쓰가 조성한 시미즈엔(清水園) 정원이나 8대 번주 미조구치 나오야스가 설립한 번교 도학당(道学堂일본어) 등을 통해 번영을 이루었다. 11대 번주 미조구치 나오아키 대에는 번의 실제 규모를 반영하여 고쿠다카를 10만 석으로 조정하기도 했으나, 이에 따른 재정 부담 증가를 우려하는 내부 논쟁도 있었다.

보신 전쟁 시기에는 주변 번들의 압력으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잠시 가담했으나, 번 내부의 반대와 정세 변화에 따라 결국 신정부군 측에 합류하였다. 이 결정으로 시바타 지역은 전쟁의 피해를 면할 수 있었지만, 주변 번들과의 관계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시바타 번은 폐지되었고, 이후 니가타현에 통합되었다.

2. 1. 번의 성립과 발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에치고노쿠니를 다스리던 우에스기 가게카쓰아이즈(会津일본어)로 옮겨가게 되자, 에치고에는 여러 무장들이 새롭게 배치되었다. 이때 니이하타(新発田, 현재의 시바타) 지역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던 미조구치 히데카쓰가 자리 잡았다.

히데카쓰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였다. 그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대신 에치고에 남아 우에스기 가문의 옛 가신들이 일으킨 잇키[6]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히데카쓰는 이에야스로부터 기존 영지(니이하타)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받았고, 이로써 고쿠다카 6만 석의 시바타 번이 성립되었다. 시바타 번은 후다이 다이묘신판 다이묘가 많은 에치고 국 내에서 토자마 다이묘에 해당했다.

히데카쓰의 아들이자 2대 번주인 미조구치 노부카쓰(溝口宣勝)는 동생 미조구치 요시카쓰(溝口善勝)에게 1만 석을 나누어 주어 소메이 번을 세웠다. 이로 인해 시바타 번의 고쿠다카는 5만 석으로 줄어들었다. 노부카쓰의 뒤를 이은 3대 번주 미조구치 노부나오(溝口宣直) 역시 세 명의 동생에게 각각 영지를 나누어 주었다.

시바타 번의 영지는 현재의 시바타시를 중심으로 니가타시 동부, 아가노시, 가모시, 미나미칸바라군까지 아우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간바라 평야(蒲原平野일본어)는 아가노강시나노강 하류 유역에 펼쳐진 저습지대로, 초기에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바타 번과 영지민들은 대대로 간척과 치수 사업에 힘쓰며 꾸준히 땅을 개간해 나갔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점차 비옥한 곡창지대로 변모했으며, 실제 수확량은 공식적인 고쿠다카를 훨씬 웃돌아 40만 석에 달했다는 설도 있다.

문화적으로도 번성하여, 4대 번주 미조구치 시게카쓰(溝口重雄)는 겐로쿠 시대에 에도에서 막부 소속 정원사였던 아카타 소치(赤田 宗知)를 초빙하여 교토 풍의 회유식 정원인 시미즈엔(清水園)을 조성했다. 이는 당시 시바타 번의 문화적 번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8대 번주 미조구치 나오야스(溝口直養)는 번교인 도학당(道学堂일본어)을 설립하여 학문을 장려하는 등 교육에도 힘썼다.

10대 번주 미조구치 나오아키(溝口直諒) 때에는 번의 실제 생산력에 맞춰 고쿠다카를 기존 5만 석에서 10만 석으로 수정해 줄 것을 막부에 요청하여 인정받았다. 하지만 번 내부에서는 가문의 격이 높아지는 이점과 함께, 재정 부담 증가 및 추가적인 의무(과역) 부과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면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2. 2. 보신 전쟁 시기

보신 전쟁 시기에 시바타 번은 처음에는 신정부 측에 서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주변 여러 번들이 참여한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동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동맹 측은 시바타 번의 참전을 확실히 하고자 번주 미조구치 나오마사를 인질로 삼으려 했으나, 번 영지 백성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1868년 2월 15일, 호쿠리쿠도 선봉 총독 겸 진무사 다카쿠라 나가히사와 부총독 겸 진무사 시조 다카히라로부터 신정부의 칙서가 전달되었을 때, 시바타 번은 에치고의 다른 번들보다 발 빠르게 대응했다. 교토의 정세에 밝았던 시바타 번은 3월 9일, 가장 먼저 신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청서(請書)를 제출했다. 이는 가와이 쓰구노스케의 부재와 정보 부족으로 당황하며 소동을 벌였던 나가오카 번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결국 시바타 번은 입장을 바꾸어 신정부군에 합류하여 참전하였고, 그 결과 시바타 지역은 전쟁의 피해를 비교적 적게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보인 시바타 번의 행동은 나가오카 번 등 동맹에 참여했던 주변 번들에게는 명백한 배신 행위로 간주되어, 이후 주변 지역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2. 3. 폐번과 그 이후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인해 시바타 번은 폐지되었다. 폐번 이후 잠시 시바타 현(新発田県)이 되었다가, 새로 창설된 니가타현에 통합되었다. 마지막 번주였던 미조구치 나오마사는 새로운 메이지 정부 아래에서 화족 작위인 백작(伯爵)을 수여받았으며,[3] 이후 귀족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3. 역대 번주

'''미조구치씨''' (도자마 다이묘) 1598년 ~ 1871년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위고쿠다카
1미조구치 히데카쓰 溝口秀勝일본어1598년 ~ 1610년호키노카미(伯耆守)종5위하(従五位下)60,000 고쿠
2미조구치 노부카쓰 溝口宣勝일본어1610년 ~ 1628년호키노카미(伯耆守)종5위하(従五位下)60,000 → 50,000 고쿠
3미조구치 노부나오 溝口宣直일본어1628년 ~ 1672년이즈모노카미(出雲守)종5위하(従五位下)50,000 고쿠
4미조구치 시게카쓰 溝口重雄일본어1672년 ~ 1706년시나노노카미(信濃守)종5위하(従五位下)50,000 고쿠
5미조구치 시게모토 溝口重元일본어1706년 ~ 1719년호키노카미(伯耆守)종5위하(従五位下)50,000 고쿠
6미조구치 나오하루 溝口直治일본어1719년 ~ 1732년시나노노카미(信濃守)종5위하(従五位下)50,000 고쿠
7미조구치 나오아쓰 溝口直温일본어1732년 ~ 1761년이즈모노카미(出雲守)종5위하(従五位下)50,000 고쿠
8미조구치 나오야스 溝口直養일본어1761년 ~ 1786년슈젠노카미(主膳正)종5위하(従五位下)50,000 고쿠
9미조구치 나오토키 溝口直侯일본어1786년 ~ 1802년이즈모노카미(出雲守)종5위하(従五位下)50,000 고쿠
10미조구치 나오아키 溝口直諒일본어1802년 ~ 1838년호키노카미(伯耆守)종5위하(従五位下)50,000 → 100,000 고쿠
11미조구치 나오히로 溝口直溥일본어1838년 ~ 1867년슈젠노카미(主膳正)종5위하(従五位下)100,000 고쿠
12미조구치 나오마사 溝口直正일본어1867년 ~ 1871년호키노카미(伯耆守)종5위하(従五位下)100,000 고쿠



12대 번주 미조구치 나오마사는 1884년 (메이지 17년) 화족령에 의해 백작위를 받았다.[3]

4. 주요 가신

시바타번의 주요 가신은 다음과 같다. 이들 가문의 형성 과정은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룬다.


  • 미조구치 한자에몬(半兵衛)
  • 미조구치 이오리(伊織)
  • 미조구치 다쿠미(内匠)
  • 호리 조다이후(宇内蔵)
  • 호리 주케이(十計)
  • 하야미 구로에몬(九郎右衛門, 하치야(蜂屋) 가문)
  • 구보다 헤이베에(平兵衛)
  • 사토무라 간지(勘次)
  • 사토무라 누이도노(縫殿)
  • 사카이 가즈마(数馬)
  • 센고쿠 부에몬(武右衛門)
  • 센고쿠 구로베에(九郎兵衛)
  • 와키모토 기자에몬(儀左衛門)
  • 미야기타 고사에몬(五左衛門)
  • 핫토리 이치로자에몬(市郎左衛門)
  • 사지 도자에몬(藤左衛門)


대정봉환 이후 조정이 10만 석 이상 다이묘에게 상경을 명령했을 때, 어린 번주 나오마사를 대신하여 에도에 머물던 가로 구보다 헤이베에가 파견되기도 했다.

4. 1. 가신단의 형성

미조구치 히데카츠는 니와 나가히데를 섬겼으며, 덴쇼 9년(1581년) 와카사국 다카하마성 성주가 되어 5,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 시기 이전부터 히데카쓰를 섬긴 가신으로는 창을 담당하며 60석을 받은 이리에 구자에몬(入江九左衛門)과, 덴쇼 5년(1577년)에 가신이 된 오미국 아자이군 하야미고(速水郷) 출신의 하야미 산에몬(早水酸右衛門)이 가장 오래된 인물들이었다. 다카하마성 성주가 된 후에는 이전 영주였던 이츠미 스루가노리(逸見駿河守)의 유신(遺臣)인 가와 미부(河井弥兵衛), 테라이 슈마(寺井主馬) 등을 가신으로 받아들였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그의 유신인 가토 키요시게(加藤清重), 사카이 시키부(酒井式部, 사카이 가즈마(坂井数馬)의 조상) 등을 가신으로 삼았다. 가토 가문은 후에 미조구치 성씨를 하사받아 미조구치 나이젠(溝口内膳)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그 외 다카하마성 성주 시절에 등용한 인물로는 카키모토 쿠라노스케(柿本蔵助), 쿠보다 요자에몬(窪田与左衛門), 오쓰(大津), 미야케(三宅), 나카니시(中西) 등이 있었다. 쿠보다 요자에몬 가문은 겐로쿠 9년(1696년)에 단절되었으나, 그 분가인 쿠보다 헤이베에(窪田平兵衛) 가문은 이후 가로를 배출하는 집안이 되었다. 덴쇼 12년(1584년)에는 호리 히데마사요리키가 되어 가가국 다이쇼지에서 4만 4천 석의 영주가 되었는데, 이때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서 패배한 시바타 가쓰이에의 유신인 니와 히데쓰나(丹羽秀綱, 니와 시로베에(丹羽四郎兵衛)의 조상)와 와키모토 진베에(脇本甚兵衛)를 가신으로 받아들였다.

게이초 3년(1598년), 호리 히데하루와 함께 에치고국으로 이봉되어 시바타번 6만 석의 영주가 되자, 이전 아이즈번 영주였던 가모씨의 유신인 모리(毛利), 오쿠무라(奥村), 야시로(矢代), 쿠마다(熊田) 등을 가신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아이즈 중'(会津衆)이라 불렸다. 게이초 15년(1610년), 에치고 소동으로 호리씨가 개역되고 호리 타다토시와 호리 나오키요가 처벌받자, 나오키요의 여섯째 아들인 슈마스케 나오마사(主馬助直政, 호리 죠다이후(堀内蔵太夫) 가문의 조상)를 가신으로 맞아들였다.

겐나 원년(1615년)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패잔병이 된 모자(母子)를 받아들여 난부 지자에몬(南部治左衛門)의 양자로 삼았고, 마찬가지로 패잔병이었던 도바시 야타로(土橋弥太郎)도 가신으로 받아들였다. 도바시 가문은 후에 미조구치 성씨를 하사받아 미조구치 이오리(溝口伊織)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겐나 4년(1618년), 무라카미번주 무라카미 타다카쓰가 후계자 문제로 개역되자, 그의 유신인 시모 모토쿠니(下元国)를 가신으로 받아들였다. 시모(下) 가문은 에치고국 오쿠야마 장(奥山庄, 현 세키카와촌 부근) 지역의 중세 고쿠진 영주 가문 출신으로, 모토쿠니의 아버지 대에는 우에스기씨의 가신으로 쇼나이 지방의 다이칸을 지냈으며, 이후 모가미 요시아키를 거쳐 무라카미 타다카쓰를 섬겼었다.

간에이 4년(1627년), 아이즈번주 가모 타다사토가 후계 없이 사망하여 가문이 단절되자, 그의 유신인 테라오(寺尾), 센고쿠(千石) 등을 가신으로 받아들였다. 간에이 19년(1642년), 무라카미번주 호리 나오쓰구 대에 호리 가문이 다시 단절되자, 호리 카즈에 나오요(堀主計直寄), 가와무라(河村), 오오카(大岡) 등을 가신으로 받아들였다. 카즈에 나오요는 앞서 가신이 된 슈마스케 나오마사의 형이자 호리 나오키요의 차남이었다. 쇼호 원년(1645년), 아이즈번가토 아키나리가 사망한 후 아이즈 가토 가문 내에서 소동(아이즈 소동)이 일어나자, 그 유신인 사지(佐治), 키미(君), 시치리(七里), 우메하라(梅原), 아카자(赤座) 등이 시바타번 가신단에 합류했다.

그 외에도 도쿠가와 타다나가, 마쓰다이라 나오노리(무라카미번주 시절), 호소카와 타다오키, 후쿠오카번, 시마바라번, 아이즈번, 요네자와번 등 다양한 다이묘 가문을 섬기다가 시바타번으로 옮겨온 가신들도 있었다.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개역되자 그의 가신이었던 호리 도시시게가 시바타번을 찾아와 가신이 되었는데, 그는 호리 칸베에(堀勘兵衛), 호리 젠다이후(堀善太夫)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다카쿠(高久), 후쿠오카번 구로다 가문에서는 사토무라(里村), 무라카미번 마쓰다이라 가문에서는 미야키타(宮北), 요네자와번에서는 야마쇼(山庄), 시마바라번의 유신인 이타쿠라(板倉), 와타나베(渡辺), 오노데라(小野寺) 등이 시바타번으로 왔다.

위에 언급된 가문들은 주로 부교(武頭) 이상의 상급 무사 가문이었으며, 가로, 조다이, 요닌, 쿠미가시라, 부교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10]

5. 막부 말기의 영지

한 체제의 다른 영지들처럼 시바타번의 영지는 고쿠다카를 기준으로 분산된 여러 지역으로 구성되었다.[4][5] 막부 말기 시점의 영지는 다음과 같다.

지역상세 위치
에치고국니가타현 간바라군 내 512개 마을
무쓰국 (이와시로국)후쿠시마현 시노부군 내 8개 마을



11대 번주 미조구치 나오아키라 대에는 막부에 10만 석으로의 승격을 신청하여 인정받았다. 이는 번의 격을 높이는 이점도 있었지만, 재정 부담 증가에 대한 우려로 번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시바타번은 신정부 측 입장을 취하려 했으나, 주변 번들의 압력에 밀려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맹할 수밖에 없었다. 동맹 측은 시바타번의 참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번주 미조구치 나오마사를 인질로 삼으려 했으나, 영민들의 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후 시바타번은 신정부군에 합류하여 참전했고, 그 결과 시바타 영지는 전쟁의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에치고 나가오카번 등 동맹 측 번들에게는 명백한 배신 행위로 여겨져, 이후 주변 지역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남겼다.

보신 전쟁 초기, 1868년 2월 15일, 시바타번은 호쿠리쿠도 선봉 총독 다카쿠라 나가히사와 부총독 시조 다카히라가 보낸 칙서를 무라마츠 번으로부터 전달받았다. 칙서는 각 번의 의향을 묻는 내용이었고, 시바타번은 다음 날인 16일 미카이치 번에 칙서를 전달했다. 교토의 정보를 통해 진무사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던 시바타번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3월 9일 다카오카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더욱 충성을 다하여 왕사에 근로 봉사할 뿐, 다른 생각은 없사옵니다"라는 내용의 청서를 제출했다. 이는 에치고 지역 번들 중 가장 빠른 대응이었으며, 이토이가와 번(12일), 다카다 번(14일), 나가오카번, 미네야마 번(16일) 등이 뒤를 이었다. 반면 에치고 나가오카번은 가와이 쓰구노스케의 부재와 정보 부족으로 갑작스러운 칙서 전달에 큰 혼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조구치 가문은 메이지 시대까지 개역되지 않고 12대에 걸쳐 시바타 지역을 통치했다.

6. 시바타 번을 무대로 한 작품


  • 『이슬의 옥울타리』 (乙川優三郎|오토가와 유사부로일본어)
  • 『11인의 적군』

7. 저명한 번사


  • 이노우에 큐스케 (井上久助|이노우에 규스케일본어): 시바타 번의 위기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아이즈번에서 참수형을 당해 번을 구한 인물이다.
  • 구메 고타로 (粂小太郎|구메 고타로일본어): 29년의 세월을 들여 복수를 이룬 번사이다.
  • 구와타 릿사이 (桑田立斎|구와타 릿사이일본어): 란학 의사로, 홋카이도에서 많은 천연두 환자를 치료하였다.
  • 호리베 다케토요 (堀部武庸|호리베 다케토요일본어): 낭인이 된 후 다카다노바바 결투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이후 아코 낭사 중 한 명이 되었다. 나카야마 야스베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Echigo Province http://www.japanese-[...] 2013-04-07
[2]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3]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6] 문서 現在の新潟市秋葉区七日町で家臣が一揆の一味により殺されている
[7]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下巻 吉川弘文館
[8] 문서 新発田藩主のほか、横田溝口家・池之端溝口家の旗本溝口家がある。
[9] 웹사이트 開基家ご当主ご来駕 – 日日是好日 – 2016-06-13
[10] 서적 新発田藩史料 第二巻 藩臣編 国書刊行会
[11] 서적 新発田藩史料 第一巻 藩主篇、第三巻 藩政篇 新発田市史編纂委員会
[12] 서적 裏切り―戊辰新潟港陥落す 恒文社
[13] 서적 堀部武庸日記
[14] 간행물 嘉永慶応 江戸切絵図 尾張屋清七板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