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부아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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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743년 파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94년 사형당한 프랑스의 화학자이다. 그는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연소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정립하는 등 화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새로운 화학 명명법을 도입하고 열역학 및 생물학 분야에서도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공직 생활을 통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했으며,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도량형 통일안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금 징수 조합원으로서의 활동이 혁명 재판에 영향을 미쳐 사형당했다. 사후 그의 업적은 재평가되어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으며,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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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라부아지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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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
원어 이름 | Antoine-Laurent de Lavoisier |
로마자 표기 | Antoan Loran de Lavwazye |
출생일 | 1743년 8월 26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사망일 | 1794년 5월 8일 |
사망지 |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
사망 원인 | 단두대 처형 |
안장 장소 | 파리 지하 묘지 |
국적 |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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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및 경력 | |
모교 | 콜레주 데 카트르나시옹, 파리 대학교 |
직업 | 생물학자, 화학자 |
분야 | 화학, 철학, 경제학 |
소속 | 세금 징수 조합,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
주요 제자 |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 |
업적 | |
주요 업적 | 산소와 수소 명명 질소 명명 질량 보존의 법칙 확립 플로지스톤설 부정 원소와 화합물 구분 열량계 탄소 순환 원소 분석 기체 측정기 산화 환원 반응 화학 양론 열화학 산과 염기 연소 |
영향 | |
영향 |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 베르나르 드 쥐시외 장 에티엔 게타르 기욤프랑수아 루엘 피에르 마케르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약 |
가족 | |
배우자 | 마리안 폴즈 라부아지에 (1771년 결혼) |
2. 초년 (1743~1789)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743년 파리의 부유한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101][8] 11살에 콜레주 마자랭에 입학하여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배우며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101][102]
1761년 콜레주 마자랭을 졸업한 후 가문의 전통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지만, 과학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었다. 기욤프랑수아 루엘의 화학 강의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105] 장에티엔 게타르[80]와 함께 광물학 및 지질학 조사를 떠나기도 했다.[105] 1764년 법학 학위를 받았으나 변호사로 활동하는 대신 과학 연구에 매진했다.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 재학하면서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에게서 천문학을, 베르나르 드 쥐시외에게서 식물학을, 장에티엔 게타르[80]에게서 지질학과 광물학을, Guillaume-François Rouelle|기욤프랑수아 루엘프랑스어에게서 화학을 배웠다.
1763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가로등 설치 공모에 참여하여 메달을 받았고,[106] 석고에 대한 연구 논문을 제출했다.[107] 1768년에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109]
당시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물을 계속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실험을 통해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110] 질량 보존의 법칙을 따르는 실험을 통해 생성된 고체가 물이 아닌 용기에서 나온 물질임을 밝혔다.[111]
1772년, 라부아지에는 황과 인의 연소 실험을 통해 무게 증가가 공기와의 결합 때문임을 보고했다.[112] 1774년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산소를 발견하고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라고 명명했으며,[113] 칼 빌헬름 셸레도 산소를 발견했다.[114] 라부아지에는 이들의 연구와 자신의 실험 결과를 종합하여 연소 이론을 정립했다.[115] 그는 플로지스톤설을 반박하고 연소가 산소와 물질의 결합임을 밝혀냈다. 1779년에는 산소에 "옥시젠(oxygèn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부아지에는 26세에 조세 징수청(Ferme générale)의 일원이 되었고,[16] 1771년에는 마리안 피에레트 폴즈와 결혼했다.[118] 마리안은 영어 논문 번역, 실험 기록 등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도왔다.[118][86] 라부아지에는 세금 징수원으로 활동하며 밀수와 사기를 적발하는 역할을 맡았고,[119] 담배에 재와 물을 섞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19]
2. 1. 유년 및 청년기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743년 파리 고등법원의 법률 고문이었던 장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 에밀리 라부아지에 사이에서 태어났다.[101] 그는 5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여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다.[8] 1748년 라부아지에의 가족은 장앙투안의 장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101]1754년, 11살의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Collége Mazarin|콜레주 마자랭프랑스어)에 입학하여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101] 1760년 여동생이 사망한 후, 가족의 애정과 기대가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고, 라부아지에는 배우는 데에 상당한 열정을 보였다. 콜레주 마자랭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에게 배웠는데, 라카유는 라부아지에가 자연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102]
1761년 6월 콜레주 마자랭을 졸업한 라부아지에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자연 과학에도 큰 관심을 두었고, 라카유의 조언을 따라 기상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와 라카유와의 관계는 1762년 3월 라카유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103]
라부아지에는 왕의 정원[104]에서 베르나르 드 쥐시외 등의 수업을 듣기도 하였고, 특히 기욤프랑수아 루엘의 화학 수업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루엘은 지질학을 처음으로 가르친 화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실험적인 방법을 매우 중시하는 등 앞서 나가는 면도 있었으나, 연금술과 사원소설(四元素說)에 큰 관심을 가지는 등의 구시대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105] 라부아지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장에티엔 게타르[80]를 만나 1763년 광물학적·지질학적 조사를 위해 발루아 지방으로 떠나기도 하였다.[105] 게타르는 이후로도 계속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지도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4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여전히 자연 과학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100] 법학 학위를 받고 변호사 협회(bar association)에 입회했지만, 변호사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대신 여가 시간에 과학 공부를 계속했다.
2. 2. 과학적 활동
라부아지에는 파리 대학교 법학부에 재학하면서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니콜라-루이 드 라카유에게서 천문학을, 베르나르 드 쥐시외에게서 식물학을, 장-에티엔 게타르[80]에게서 지질학과 광물학을, Guillaume-François Rouelle|기욤-프랑수아 르엘프랑스어에게서 화학을 배웠다.라부아지에는 게타르와 함께 알자스-로렌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각 지역의 석고를 비교 연구했다. 이는 라부아지에의 첫 번째 자연과학 연구였으며, 실험 사실을 중시하는 그의 연구 태도를 보여준다.
이후 라부아지에는 연소 연구를 통해 연소가 산소와 물질의 결합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플로지스톤설을 반박했다. 그는 황과 인의 연소 실험과 금속회(금속 산화물) 실험을 통해 질량 변화가 공기, 특히 산소와의 결합 및 분리와 관련 있음을 증명했다.[112] 1774년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산소를 발견하고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라고 명명했으며, 같은 해 칼 빌헬름 셸레도 산소를 발견했다.[113][114]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와 셸레의 연구 결과와 자신의 실험 결과를 종합하여 연소 이론을 정립했다.[115]
1779년, 라부아지에는 산소에 "옥시젠(oxygèn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산소의 발견자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연소에서 산소의 역할을 규명하고 플로지스톤설을 폐기한 라부아지에가 산소의 명명자로 알려져 있다.
2. 2. 1. 초기 연구
1763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대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방안에 관해 공모를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여기에 참여하였고 그의 제안은 뛰어남을 인정받아 1766년 8월 9일 아카데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106] 1765년 2월 27일 라부아지에는 석고를 분석하여 그 논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장-에티엔느 게타르(Jean-Étienne Guettard)의 제안으로 작성된 이 논문은 지질학, 광물학, 화학 등을 모두 다루고 있었다. 1766년 3월 19일 그는 석고에 관한 두 번째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필요성을 느껴 4월 아카데미의 실험 물리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으나, 아카데미는 라부아지에의 신청을 거절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요청이 거절된 바로 다음 날 화학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107]1767년 6월 14일 라부아지에는 게타르를 따라 보주산맥을 탐사하러 떠났고, 10월 19일에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라부아지에는 각 지역의 광천수를 분석하여 그것이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108] 176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자리에 공석이 생기자 라부아지에는 새로운 회원 후보자가 되었고, 5월 18일의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함에 따라 6월 1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109]
라부아지에는 당시 프랑스의 계몽주의 이상에 흠뻑 빠져 있었고, 피에르 마케르(Pierre Macquer)의 화학 사전에 매료되었다. 그는 자연 과학 강의를 들었다.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대한 헌신과 열정은 18세기 저명한 프랑스 학자 에티엔느 콩디야크(Étienne Condillac)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764년에 발표된 그의 첫 번째 화학 논문은 석고(gypsum)(수화된 황산칼슘(calcium sulfate)])의 화학적 및 물리적 특성에 관한 것이었다. 1763년부터 1767년까지 그는 게타르 밑에서 지질학을 공부했다. 게타르와의 공동 연구로 라부아지에는 1767년 6월
2. 2. 2. 물에서 흙으로의 변화
당시 물을 계속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이 여러 과학자 사이에서 만연하였다. 과학자들은 식물이 물만으로도 자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물이 흙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로버트 보일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가 물을 계속해서 증류하면 고체가 남으며, 이것이 물이 변화하여 생긴 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주장에 의심하였으며, 1770년 4월 10일에 발표한 논문에서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 반증으로 인해 라부아지에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해졌다.[110]라부아지에는 물을 100일 동안 증류한 결과 고체가 남는 것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생성된 고체의 질량을 측정한 후, 물을 증류하는 데 사용했던 용기의 질량을 측정하자 생성된 고체의 질량만큼 용기의 질량이 감소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생성된 고체가 물에서 연유한 물질이 아니라 용기가 일부 녹아서 생성된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으며, 이는 물이 흙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였다.[111]
2. 2. 3. 연소 연구
1772년 11월 1일, 라부아지에는 황과 인을 연소시키면 공기를 흡수하여 질량이 증가하고, 금속회(금속 산화물)를 가열하면 공기를 잃고 금속이 생성되어 질량이 감소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아카데미에 제출했다. 그는 이 현상에 공기의 어떤 성분이 관여하는지 알지 못했다.[112] 그는 이 실험 결과를 1774년에 《물리와 화학 소론》(''Opuscules Physiques et chimiques'')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1774년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비(非)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으로 산소를 발견했고, 그해 10월 라부아지에는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75년 3월 프리스틀리는 “탈플로지스톤 공기”의 발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113] 한편, 스웨덴의 칼 빌헬름 셸레 역시 1772년경 산소를 발견하여 그에 관한 내용을 1774년 9월 30일 라부아지에에게 편지로 보냈으나, 라부아지에는 10월 15일 셸레의 편지를 받고도 답장하지 않았다. 일부 과학사 학자, 특히 스웨덴의 과학사 학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셸레의 편지를 무시한 일이 단순한 무례함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4]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가 자신이 생각하는 연소와 관련된 공기 일부와 대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공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추가 실험을 진행하였다.[115]
이전 실험을 통해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 가열하면 이산화 탄소가 생성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1775년 3월, 라부아지에는 숯가루를 연소한 후 발생하는 기체를 물에 녹이면 탄산수가 생성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추가 실험을 통해 이 기체가 이산화 탄소임을 확인했다. 계속된 실험에서 라부아지에는 수은의 금속회를 숯을 사용하지 않고 가열하면 금속 형태의 수은과 대기 중의 공기와 유사한 성질을 가지는 기체가 생성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라부아지에는 금속회를 숯을 사용해 가열하면 금속회가 포함하고 있던 기체와 숯이 반응하여 이산화 탄소가 발생하고, 따라서 금속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가 일반 공기와 성질이 유사하나 더 오랫동안 촛불을 태울 수 있고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체에서 산소를 추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결과를 1775년 3월 24일에 발표했다. 4월 26일, 라부아지에는 이 실험 결과를 토대로 금속회를 가열할 경우의 질량 변화는 공기의 출입으로 인한 것이며, 이 공기는 대기 중의 공기보다 더 순수하다고 설명하였다.[116] 이 실험 결과와 산소의 발견은 이후 라부아지에가 산소가 연소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여, 새로운 연소 이론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117]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라부아지에는 공기 또는 공기의 구성 성분 중 하나가 물질이 연소될 때 물질과 결합한다고 이론화했다.[39] 그는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39] 1772년 말, 라부아지에는 연소 현상에 주목하여, 인과 황의 연소 실험을 통해 무게 증가가 공기와의 결합 때문이라는 것을 보고했다.
1774년 봄, 라부아지에는 밀봉된 용기에서 주석과 납의 삭화에 대한 실험을 수행했고, 그 결과 금속의 연소 시 무게 증가는 공기와의 결합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확인했다. 하지만 질문은 대기 중의 일반적인 공기 전체와 결합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기 중 공기의 일부와만 결합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1774년 10월,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파리에 방문하여 라부아지에를 만났고, 그는 수은의 적색 삭화물을 돋보기로 가열하여 생성한 공기, 즉 연소를 극도로 활발하게 지지하는 공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프리스틀리는 당시 이 기체의 성질을 확신하지 못했지만, 일반 공기의 특히 순수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라부아지에는 이 특이한 물질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수행했다. 그 결과, 1775년 4월 26일 아카데미에 발표된 그의 논문 "금속의 삭화 과정에서 결합하여 무게를 증가시키는 원리의 성질에 관하여"(일반적으로 부활절 논문이라고 함)가 나왔다.[40] 원 논문에서 라부아지에는 수은 삭화물이 숯으로 환원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블랙의 고정 공기를 방출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금속 삭화물임을 보였다. 숯 없이 환원했을 때, 호흡과 연소를 향상된 방식으로 지지하는 공기를 방출했다. 그는 이것이 일반 공기의 순수한 형태일 뿐이며, 삭화 과정에서 금속과 결합하는 것은 "나뉘지 않고, 변화 없이, 분해되지 않은" 공기 자체라고 결론지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프리스틀리는 수은 삭화물에서 나온 공기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했다. 그의 결과는 이 공기가 단순히 일반 공기의 특히 순수한 형태가 아니라 "호흡, 염증 및…일반 공기의 다른 모든 용도에 있어 일반 공기보다 5배 또는 6배 더 우수한" 것이었다. 그는 이 공기를 탈플로지스톤 공기라고 불렀는데, 일반 공기에서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74년 라부아지에는 실험을 통해 당시 독일의 의사이자 화학자인 게오르크 슈탈이 제창한 플로지스톤설이 틀렸음을 밝혀내고, 연소를 “산소와의 결합”으로 설명했으며, 1779년에는 산소를 "옥시젠(oxygène)"이라고 명명했다.
“산소의 발견자”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연소에서 산소의 역할을 밝히고 플로지스톤설을 뒤엎은 라부아지에가 산소의 명명자로 알려져 있다.
2. 3. 세금 징수원
라부아지에는 1768년에 세금 징수 조합의 일원이 되었고, 1771년에는 자크 폴즈의 딸인 마리안 피에레트 폴즈와 결혼했다.[118] 마리안은 이후 실험 기구 묘사, 결과 기록, 영어 논문 번역 등을 하면서 라부아지에를 도왔다.[118] 라부아지에는 소매상인들 간의 밀수와 사기를 적발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당시 담배는 밀수를 통해 은밀하게 거래되곤 했는데, 소매상인들은 이익을 늘리기 위해 밀수한 담배를 농장에서 생산된 담배와 섞은 후 재와 물을 첨가했다.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소매상인들이 판매하는 담배의 질을 분석하여 이러한 사기 행위를 적발했다.[119]1772년, 라부아지에의 아버지 장 앙투안은 라부아지에에게 귀족 칭호를 사주었다.[100] 1774년 8월 24일,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루이 16세에 의해 프랑스의 재정 총감으로 임명되면서,[120] 세금 징수 조합 역시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튀르고는 쓸모없는 세금을 폐지하려 했으나,[121] 이는 세금 징수원들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튀르고의 자유주의 정책으로 교역과 소비가 늘어나 거둘 세금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러한 걱정은 사라졌다. 라부아지에는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직을 맡기도 했으며, 소금, 담배, 알코올성 음료 등 파리에 드나드는 물건의 세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했다.[122]
라부아지에는 조세농업 주식을 매입하여 상당한 수입을 얻었고, 이를 통해 과학 연구에 전념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며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14] 당시 과학 연구에 대한 공공 자금 지원은 매우 어려웠고, 과학자에게는 재정적으로 큰 이익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프랑스에 매우 비싸고 정교한 실험실을 열어,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 자금 확보의 어려움 없이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11][14]
26세 무렵, 라부아지에는 조세 징수청(Ferme générale)이라는 조세 징수 금융 회사의 지분을 매입했다. 이 회사는 왕실 정부에 예상 세수를 미리 지급하는 대신 세금 징수권을 갖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조세 징수청을 대표하여 파리를 둘러싼 성벽 건설을 의뢰하여 도시로 물건을 운반하는 사람들에게 관세를 징수할 수 있도록 했다.[16]
1771년 28세 때, 라부아지에는 조세 징수청 고위 관리의 13세 딸인 마리 앙느 폴제와 결혼하여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혔다.[4] 그녀는 라부아지에의 과학 경력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특히 리처드 커원의 '플로지스톤에 관한 논문'과 조셉 프리스틀리의 연구를 포함한 영어 자료들을 번역했다. 또한 실험실에서 그를 도왔고, 라부아지에와 그의 동료들이 과학 연구에 사용한 실험 기구의 많은 스케치와 조각 인쇄물을 제작했다. 마담 라부아지에는 앙투안의 회고록을 편집하고 출판했으며, 저명한 과학자들이 모여 화학과 관련된 아이디어와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파티를 주최했다.[17]
유명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앙투안과 마리 앙느 라부아지에의 초상화를 그렸다. 혁명 직전인 1788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반 귀족적인 정서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로 파리 살롱에서 공개 전시가 거부되었다.[18]
라부아지에는 프랑스의 조세청부업자들이 담배에 재와 물을 섞어 품질을 저하시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재가 섞였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조세청부업자들의 공장에서 담배에 일정량(6.3%)의 물을 첨가하도록 권고했다.[19] 이를 통해 소매상이 밀수 담배를 구하거나 담배의 양을 늘려 이익을 높이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21]
1771년 12월 6일, 조세 징수인 Jacques Paulze프랑스어의 딸 마리 앙느 폴즈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마리 앙느는 라부아지에를 돕기 위해 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화학과 회화(실험도) 그리는 법 등을 익혔다. 아일랜드의 과학자 리처드 커완과 프리스틀리의 논문과 편지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거나, 실험 시에는 세세한 부분까지 스케치하여 기록으로 남겼다.[86]
3. 활동기 (1775~1789)
라부아지에는 농업 왕립 위원회 설립을 촉구하고 위원회 서기로 활동하며 소롱 지역의 농업 생산량 개선을 위해 자신의 자금을 투자했다. 소롱 지역은 농지 질이 좋지 않았고, 높은 습도로 인해 호밀 수확 시 병충해가 자주 발생하여 주민들이 맥각증을 앓았다. 1788년 라부아지에는 10년간 자신의 실험 농장에서 새로운 작물과 가축을 도입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는 농업 개혁의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세금 제도로 인해 소작농들이 너무 적은 수입만 가져가 기존 관행을 바꾸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22]
1775년,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에 의해 화약 위원으로 임명된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화약의 양과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는 그의 과학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왕립 병기창 내 집과 실험실을 제공받아 1792년까지 연구를 진행했다.[23] 그는 탄산칼륨이 화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하고, 농가에 사례금을 주어 화약 원료인 초석[88] 생산을 장려했다. 또한 엘레테르 이레네 뒤퐁에게 화약 제조 기술을 가르쳐 뒤퐁 화약 사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23]
1788년, 라부아지에는 자크 네케르에게 삼부회 대표 선출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지역에서 전국에 걸친 4단계 회의를 개설하여 각 회의에서 상위 회의로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제안했다.[158]
라부아지에는 과학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1][12][13][14] 그는 인도주의자였으며, 농업, 산업, 과학을 통해 프랑스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했다.[12] 1765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도시 가로등 개선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고, 1768년에는 이베트 강의 물을 파리로 끌어들이는 수도교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비록 건설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 라부아지에는 물의 화학과 공중위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4]
그는 대기 질에도 관심이 많았고, 화약이 대기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건강 위험을 연구했다.[13] 1772년에는 화재로 피해를 입은 오텔되외 병원을 재건축하는 연구를 수행했다.[14] 1780년과 1791년에는 파리의 열악한 감옥 위생을 조사하고 개선을 제안했지만, 대부분 무시되었다.[11][14]
프랑스의 조세청부업자는 담배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세금을 통해 많은 수입을 올렸으나, 밀수와 품질 저하 담배로 인해 수입이 감소했다. 라부아지에는 재가 섞인 담배를 확인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소량의 재 첨가가 담배 풍미를 향상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조세청부업자 공장에서 담배에 일정량의 물을 첨가하도록 권고했으며,[19] 철저한 검사 시스템을 통해 밀수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담배 소매상들의 반감을 샀고, 프랑스 혁명 기간 중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1]
3. 1. 과학적 활동
라부아지에는 다양한 공적, 사적 업무로 바빴지만 연소 연구를 꾸준히 진행했다. 왕실 정부 요청으로 과학 아카데미의 보고서 및 위원회에 참여했고, 뛰어난 조직력을 바탕으로 보고서 작성 임무를 맡았다.[23] 1775년 프랑스 군수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명의 화약 위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프랑스 화약의 양과 질이 크게 향상되어 정부 수입원이 되었다. 화약 위원회 임명은 라부아지에에게 왕립 병기창 내 집과 실험실을 제공하여 과학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1775년부터 1792년까지 이곳에서 연구했다.[23]
1772년경 라부아지에는 귀족 지위를 얻었고, 1775년경 화약초석회사 화약 감독관이 되었다. 1776년에는 병기창으로 거처를 옮겨 실험실을 만들었고, 이곳은 화학자들의 모임 장소로 유명해졌다. 그는 대포용 화약을 개량하고 초석 생산량을 늘려 화약 생산력을 증대시켰다.[87] 이 과정에서 탄산칼륨이 화력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했고, 농가에 사례금을 주어 화약 원료인 초석[88] 생산을 장려했다. 이후 왕립농업학회와 프랑스 정부 농업위원회에도 참여했다.

라부아지에는 엘레테르 이레네 뒤퐁에게 화약 제조 기술을 가르쳐 뒤퐁 화약 사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뒤퐁은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23]
3. 1. 1. 새로운 연소 이론
라부아지에는 당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공기 또는 공기의 구성 성분 중 하나가 물질이 연소될 때 물질과 결합한다고 생각했다.[39] 그는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39]1772년 말, 라부아지에는 연소 현상에 주목했다. 그는 인이 연소될 때 다량의 공기와 결합하여 인산을 생성하고, 인의 무게가 연소 시 증가한다는 것을 보고했다. 또한 황의 연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고, 금속의 삭화(calcination) 시 무게 증가는 공기와의 결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773년, 라부아지에는 조지프 블랙의 "고정된 공기"(현재의 이산화탄소)에 대한 연구를 검토했다. 그는 블랙의 고정된 공기가 금속 칼크스가 숯으로 환원될 때 발생하는 공기와 동일하며, 금속의 삭화 시 무게를 증가시키는 공기가 이산화탄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74년 봄, 라부아지에는 밀봉된 용기에서 주석과 납의 삭화 실험을 통해 금속의 연소 시 무게 증가는 공기와의 결합 때문임을 확인했다. 같은 해 10월,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에게 수은의 적색 삭화물을 가열하여 생성한 공기가 연소를 활발하게 돕는다는 것을 알렸다. 라부아지에는 이 공기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여 1775년 "금속의 삭화 과정에서 결합하여 무게를 증가시키는 원리의 성질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프리스틀리는 이 공기를 "탈플로지스톤 공기"라고 불렀는데, 일반 공기에서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78년,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반복하고 자신의 실험을 추가하여 일반 공기가 두 가지 다른 성질을 가진 화학 종의 혼합물임을 확인했다. 그는 금속이 삭는 과정에서 결합하는 원리를 "가장 건강하고 순수한 공기의 일부"라고 했다. 같은 해, 그는 이 공기 성분의 이름을 산소(oxygen)라고 명명했다.[40][48] 그는 황, 인, 숯, 질소와 같은 비금속의 연소 생성물이 산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했고, 모든 산에는 산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1774년, 라부아지에는 물질의 부피와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실험을 통해 화학 반응 전후 물질 전체의 질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질량 보존 법칙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게오르크 슈타알의 플로지스톤설이 지배적이었다. 플로지스톤설은 연소를 가연물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오는 현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실험을 통해 연소가 산소와의 결합임을 밝혀내고, 1779년 산소를 "옥시젠(oxygène)"이라고 명명했다.
1772년, 라부아지에는 인과 황의 연소 실험을 통해 무게가 증가하는 것을 확인하고, 공기가 연소물에 흡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연소 시 무게 증가의 원인이 공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1773년 초 연소와 무게 증가 문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연소 시에는 플로지스톤과 공기가 교체된다"고 말했다.
1774년, 라부아지에는 "레토르트 실험"을 통해 "불의 입자(플로지스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같은 해,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에게 수은재를 가열하면 조연성이 있는 기체가 나온다는 것을 알렸다. 1775년, 라부아지에는 산화수은을 가열하여 얻은 기체가 이산화탄소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 기체와 가연물이 결합하는 것이 연소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옥시젠"이라고 명명했다.[90] 1777년,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대해 "물질과 기체가 결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783년, 라부아지에는 캐번디시의 실험을 재현하여 물이 화합물임을 보였다. 이 실험을 계기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게 되었다. 1777년에는 동물의 호흡도 연소의 일종임을 입증하고, 호흡을 수반하는 연소도 산소와의 결합 반응임을 보였다.
3. 1. 2. 화학적 명명법
이전에는 화합물의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서 기준이 제각각이라, 이름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라부아지에,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 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 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 등이 주축이 되어 화학적 명명법을 개정하였고, 이를 1787년에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132] 이들은 화학 물질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이름은 그 물질의 성질을 잘 드러내며, 이름은 그리스어 또는 라틴어에 근간을 둔다는 등의 원칙에 기반을 두어 화학 물질들을 새롭게 명명하였다.[133] 이후 마르틴 하인리히 클라프로트를 주축으로 한 독일의 화학자, 그리고 자신의 관측을 더 중시했던 헨리 캐번디시와 예전의 이론에 집착했던 조지프 프리스틀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국의 화학자도 프랑스 화학자의 움직임에 동참하였다.[134]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은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독일·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과학사 학자들은 이러한 화학적 명명법 개정은 통일된 화학적 언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 화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하여 큰 의의를 두고 있다.[135]
라부아지에는 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 앙투안 프랑수아 드 푸르크루아와 함께 1787년 아카데미에 화학 명명법 개혁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출했다. 당시에는 사실상 합리적인 화학 명명법 체계가 없었기 때문이다.[43] 이 연구는 '''화학 명명법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 1787)'''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산소 화학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새로운 체계를 도입했다.[44][45]
고전 원소는 버려졌고, 대신 알려진 어떤 화학적 방법으로도 더 간단한 물질로 분해될 수 없는 약 33가지 물질이 임시적으로 원소로 목록에 올랐다.[44][45] 새로운 체계에서 산은 여러 원소와 산소의 화합물로 간주되었으며, 관련된 원소와 그 원소의 산소화 정도를 나타내는 이름이 붙여졌다. 예를 들어 황산과 아황산, 인산과 인산, 질산과 아질산 등이 있으며, "ic" 접미사는 "ous" 접미사를 가진 산보다 산소 비율이 더 높은 산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ic" 산의 염에는 "ate"라는 어미가 붙여졌다(예: 황산구리). 반면 "ous" 산의 염은 "ite"라는 접미사로 끝났다(예: 아황산구리). 새로운 명명법의 전반적인 효과는 새로운 이름인 "황산구리"와 이전 용어인 "금성의 비트리올"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명명법은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퍼져 나가 화학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3. 1. 3. 열 연구
라부아지에는 1782년경부터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 협력하여 물리학에 관한 연구도 하였다. 특히 그는 열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라부아지에와 라플라스는 열에 따른 물질의 팽창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고안하기도 하고, 조지프 블랙의 얼음 열량계를 개량하기도 하였다.
현대 화학의 관점에서는 잘못된 것이었지만, 라부아지에는 물체의 온도 변화가 '열소(カロリック)'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를 체계화한 열소설을 구축했다.
3. 1. 4. 생물학 연구
라부아지에는 발효와 호흡에 관해 연구하면서, 이와 관련된 화학적 과정을 탐구했다. 1775년 10월 13일 실험에서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 농도가 높을수록 동물이 더 오래 생존함을 확인했다. 또한 호흡 과정에서 산소가 흡수되고 이산화 탄소가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38] 1783년 6월 28일 제출한 〈열에 관한 보고서〉(''Mémoire sur la chaleur'')에서 생체 내 열 발생을 언급하며, 들이마신 산소가 느린 연소 반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연소 반응이 허파에서 일어나고, 발생한 열이 혈액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했다.[136] 실제 소화는 연소 반응과 유사하지만, 라부아지에는 반응 위치를 잘못 파악했다. 반응은 허파가 아닌 온몸의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체내 생리 현상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물질 대사를 통해 체온 항상성이 유지된다는 기초적인 인식은 옳았다.[139]
라부아지에는 농업 왕립 위원회 설립을 촉구하고 위원회 서기로 활동하며 소롱(Sologne) 지역 농업 생산량 개선을 위해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 소롱 지역은 농지 질이 좋지 않았고, 높은 습도로 인해 호밀 수확 시 병충해가 자주 발생하여 주민들이 맥각증을 앓았다. 1788년 라부아지에는 10년간 자신의 실험 농장에서 새로운 작물과 가축을 도입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는 농업 개혁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세금 제도로 인해 소작농들이 너무 적은 수입만 가져가 기존 관행을 바꾸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22]
3. 2. 공직에서의 활동
라부아지에는 과학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1][12][13][14] 그는 인도주의자였으며, 농업, 산업, 과학을 통해 프랑스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했다.[12]1765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도시 가로등 개선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면서 그의 공공 이익을 위한 노력이 처음 나타났다.[12][13][14] 1768년에는 이베트 강의 물을 파리로 끌어들여 시민들에게 깨끗한 식수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도교 건설 프로젝트에 집중했지만, 건설은 시작되지 않았고 대신 센 강의 물 정화에 집중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라부아지에는 물의 화학과 공중위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4]
그는 대기 질에도 관심이 많았고, 화약이 대기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건강 위험을 연구했다.[13] 1772년에는 화재로 피해를 입은 오텔되외 병원을 재건축하는 연구를 수행했다.[14] 1780년과 1791년에는 파리의 열악한 감옥 위생을 조사하고 개선을 제안했지만, 대부분 무시되었다.[11][14]
프랑스의 조세청부업자(Fermiers Généraux)는 담배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세금을 통해 많은 수입을 올렸으나, 밀수와 품질 저하 담배로 인해 수입이 감소했다. 라부아지에는 재가 섞인 담배를 확인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소량의 재 첨가가 담배 풍미를 향상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조세청부업자 공장에서 담배에 일정량의 물을 첨가하도록 권고했으며,[19] 철저한 검사 시스템을 통해 밀수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담배 소매상들의 반감을 샀고, 프랑스 혁명 기간 중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1]
1788년 라부아지에는 자크 네케르에게 삼부회 대표 선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지역에서 전국에 걸친 4단계의 회의를 개설하여 각 회의에서 상위 회의로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제안하였다.[158]
라부아지에는 농업 왕립 위원회 설립을 건의하여 위원회 서기로서 소롱 지역의 농업 생산량 개선을 위해 자신의 자금을 투자했다. 그는 농업 개혁의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세금 제도로 인해 소작농들이 기존 관행을 바꾸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22]
엘레테르 이레네 뒤퐁의 스승으로서, 라부아지에는 프랑스에서 화약 제조에 대해 뒤퐁 창업자를 교육했고, 이는 뒤퐁 화약 사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23]
3. 2. 1. 튀르고와 네케르
1774년 8월 24일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가 루이 16세에 의해서 프랑스의 재정 총감으로 임명되었다.[120] 튀르고는 여러 개혁을 시도하였고, 라부아지에가 속해있던 세금 징수 조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튀르고는 쓸모없는 세금을 폐지하려고 하였으나,[121] 이러한 움직임은 세금 징수원들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튀르고의 자유주의 정책으로 교역과 소비가 많이 늘어나 거둘 세금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러한 걱정은 사라졌다. 이 와중에 라부아지에의 영향은 점점 커져 세금 징수 조합의 관리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소금·담배·알코올성 음료 등 파리에 드나드는 물건의 세금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122]
1775년 3월 30일, 튀르고는 라부아지에를 화약국장으로 임명하였다.[140] 라부아지에는 일꾼을 대상으로 초석과 화약에 관한 화학과 수학 지식 등을 가르치는 교육 과정을 개설하였고, 화약 제조 과정을 크게 개선하였으며,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어 초석이 많이 산출되는 이유에 관한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하였다. 1776년 4월, 라부아지에는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병기창으로 그의 집과 연구실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큰 도서관과 거대한 실험실이 있었으며, 당대의 수많은 과학자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남편의 실험을 돕고 영어 논문을 번역하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141]
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는 튀르고를 해임하고[142] 자크 네케르를 재정 총감으로 임명하였으나, 라부아지에는 화약국장 자리를 유지하였다. 1778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초석 산지를 찾고 조직 체계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의 화약 제조는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질산을 제조하는 여러 방법을 알아내었으나, 초석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143] 같은 해, 라부아지에는 발루아 근처의 사유지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통한 새로운 경작 제도를 시도하여 농작물 생산을 크게 증대시켰다.[144] 이 기간에 라부아지에의 재정 관리 능력은 크게 발전하였다.[145] 공중위생에도 관심을 가져 센강의 수질, 음식 보존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1781년 5월 19일, 루이 16세는 네케르를 해임하였다.[146]
3. 2. 2. 고위공직자 생활
세금 징수원으로서의 능력과 과학적·기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1775년 3월 30일 재정 총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라부아지에를 화약국장으로 임명하였다.[140] 그는 일꾼을 대상으로 초석과 화약에 관한 화학과 수학 지식 등을 가르치는 교육 과정을 개설하였고, 화약 제조 과정을 크게 개선하였으며, 인도로 기술자를 보내어 초석이 많이 산출되는 이유에 관한 책을 저술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다. 1776년 4월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병기창으로 그의 집과 연구실을 옮겼다. 그의 집에는 큰 도서관과 거대한 실험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화학자뿐만이 아닌 당대의 수많은 과학자가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이곳에서 남편의 실험을 종종 돕기도 하였다. 그녀는 화학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141]1776년 5월 12일 루이 16세는 튀르고를 해임하고[142] 자크 네케르를 재정 총감으로 임명하였으나, 라부아지에는 화약국장 자리를 유지하였다. 1778년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석 산지를 찾기 위해 프랑스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고 조직 체계를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프랑스의 화약 제조는 크게 개선될 수 있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초석을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고, 그 결과 질산을 제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아내었으나 초석 합성에는 실패하였다.[143] 같은 해 라부아지에는 발루아 근처의 사유지를 샀다. 그는 자기 사유지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통한 새로운 경작 제도를 시도하였고, 이는 농작물의 생산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144] 이 기간에 라부아지에의 재정 관리 능력은 크게 발전하였다.[145] 또한, 라부아지에는 공중위생에 관심을 가져 센강의 수질에 관한 연구나 음식의 보존에 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네케르는 종종 대중의 의견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행위는 왕의 위엄에 해를 끼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루이 16세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1781년 5월 19일 네케르를 해임하였다.[146]
1784년 라부아지에는 독일의 의사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의 치료 요법을 검증하는 데 일조하였다. 메스머는 자력을 이용하여 사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라부아지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여러 과학자와 함께 메스머의 치료 요법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1785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가 되었고, 이는 그의 공직 생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147] 그는 아카데미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의 조직을 개편하였다.[148] 1787년에는 1778년에 라부아지에가 담배와 술 등의 밀수를 막기 위해서 제안한, 파리를 벽으로 둘러싸는 방안이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149]
1785년 6월 7일 라부아지에는 네케르의 후임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의 요청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담은 기사를 《프랑스 신보》(''Gazette de France'')에 출판하였다. 칼론은 이에 만족하였고, 라부아지에를 신설된 농업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농업 위원회의 위원이 된 후 그는 농업에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하고, 농업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시도하였다.[150] 그는 루타바가 경작을 장려하기 위해서 농부에게 씨를 분배해 주고 경작 방법을 가르쳤으며, 농부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융자해줄 은행의 설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업 위원회는 파리 농업학회와 주도권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각 지역의 농업학회는 농업 위원회의 방침이나 조사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1787년 위원회장이 교체되고 4월 9일에는 칼론이 재정 총감에서 물러나자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경작 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던 그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작 제도를 실험할 시험 농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151]
1787년 라부아지에는 오를레앙 주(州)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와 오를레앙을 오가며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는 주 의회의 하위 기관인 공공복지 및 농업 위원회에 활발히 활동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벵티엠(vingtième프랑스어)[152]이라는 소득세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 세금에 관해서는 귀족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라부아지에는 귀족도 벵티엠의 과세 대상이 되는, 새로운 토지세로 변경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부역을 하위 계층을 대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인 타유(taille프랑스어)의 일부로 변경하는 것에 관해서, 이 역시도 모든 사람이 타유의 과세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귀족 계급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이루지는 못하였다.[153] 라부아지에는 복지 사안에 관심을 가져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154] 그는 정체되어 있던 프랑스의 농경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였으며, 이외에도 산업 발전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155]
3. 2. 3. 혁명 직전
1788년 4월 16일 라부아지에는 할인 은행(Caisse d'Escompte프랑스어)의 이사가 되었다. 튀르고가 설립한 이 은행은 금화와 은화를 만드는 특권과 지폐 발행을 주 업무로 하였다. 당시 프랑스 재정은 악화되어 네케르가 복직한 8월 말에는 국가 재정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네케르는 할인 은행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사들은 이를 승낙하였다.[156] 라부아지에는 은행 국영화에 노력했지만, 의회는 은행의 지나친 권력 확장을 우려하여 비협조적이었고, 프랑스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157]같은 해 여름, 라부아지에는 네케르에게 보내는 논문을 통해 삼부회 대표 선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지역에서 전국에 걸친 4단계의 회의를 개설하여 각 회의에서 상위 회의로 대표를 파견하는 것을 제안하였다.[158]
라부아지에는 과학뿐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1][12][13][14] 그는 인도주의자로, 농업, 산업, 과학을 통해 국민의 생활 수준 향상에 헌신했다.[12] 1765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도시 가로등 개선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면서 그의 노력이 처음 나타났다.[12][13][14]
1768년, 그는 수도교 건설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이베트 강의 물을 파리로 끌어들여 시민들에게 깨끗한 식수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건설은 시작되지 않았고, 대신 센 강의 물 정화에 집중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라부아지에는 물의 화학과 공중 위생 업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14]
그는 대기 질에도 관심이 많았고, 화약이 대기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건강 위험을 연구했다.[13] 1772년에는 화재로 피해를 입은 오텔되외 병원을 재건축하는 연구를 수행했다.[14]
당시 파리의 감옥은 열악했고, 라부아지에는 1780년(그리고 1791년) 감옥 위생 조사에 참여하여 개선 제안을 했지만, 대부분 무시되었다.[11][14]
프랑스의 조세청부업자(Fermiers Généraux)는 담배의 생산, 수입, 판매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고, 담배 세금으로 연간 3천만 리브르(livre)의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밀수 및 품질 저하된 담배의 암시장이 성장하면서 수입이 감소했다. 라부아지에는 재가 담배에 섞였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또한 소량의 재를 첨가하면 담배 풍미가 향상된다는 것을 알았다.
조세청부업자 공장에서는 그의 권고에 따라 가공하는 담배에 6.3%의 물을 첨가했다.[19] 조세청부업자들은 소매상에게 17온스의 담배를 제공하면서 16온스만큼의 금액만을 청구했다.[20] 라부아지에는 철저한 검사 시스템을 통해 소매상의 밀수 담배 유통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이 시스템을 엄격하게 시행했으며, 이는 전국 담배 소매상들의 극심한 반감을 샀다. 이러한 반감은 프랑스 혁명 기간 중 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21]
4. 혁명 정국 (1789~1794)
1791년 6월, 라부아지에는 뒤퐁 드 네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에게 인쇄소 구입 자금 71000LVR를 대출해 주었다. 뒤퐁은 이 인쇄소를 이용해 "애국 통신(La Correspondance Patriotique)"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프랑스 입헌의회의 토론 보고와 과학 아카데미의 논문을 게재할 계획이었다.[24] 그러나 혁명으로 인해 뒤퐁의 신문은 곧 붕괴되었지만, 그의 아들 엘레테르 이레네 뒤퐁은 "공화주의자(Le Republicain)"를 발행하여 라부아지에의 최신 화학 저술을 출판했다.[23]
라부아지에는 통일된 도량형 시스템 확립을 위한 위원회 의장을 맡았으며,[25][26] 1791년 3월, 이 위원회는 미터법 채택을 권고했다.[27] 새로운 도량형 시스템은 1793년 8월 1일 국민공회에서 채택되었다.[28] 그러나 1793년 12월 23일, 라부아지에는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등과 함께 정치적인 이유로 도량형 위원회에서 해임되었다.[26]
프랑스 혁명이 격화되면서, 인기가 없던 조세농(Ferme générale)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고, 결국 1791년 3월에 폐지되었다.[31] 1792년, 라부아지에는 왕립 무기고에 있던 집과 실험실에서 나와 화약 위원회 직에서도 사임해야 했다. 1793년 8월 8일에는 앙리 그레고아르(Abbé Grégoire) 신부의 요청으로 과학 아카데미를 포함한 모든 학회가 폐지되었다.[28]
1793년 11월 24일, 모든 전직 조세농들의 체포령이 내려졌다.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조세농들은 국가 재정 사취 및 담배에 물을 섞어 판매한 혐의를 받았다. 라부아지에는 변론을 통해 혐의를 부인하고, 고품질 담배 유지를 위한 노력을 강조했지만, 법정은 유죄를 선고하고 재산을 압류했다.[20] 결국 라부아지에는 1794년 5월 8일, 다른 27명의 조세농들과 함께 파리에서 50세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32]
라부아지에가 처형될 당시, 그의 실험을 위해 목숨을 살려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판사 장-바티스트 코팽알은 "공화국은 학자도 화학자도 필요 없다. 사법 절차는 연기될 수 없다."라며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33]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는 "그들은 이 머리를 자르는 데 단 몇 순간밖에 걸리지 않았고, 아마도 100년이 지나도 이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34][35]
4. 1. 활동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라부아지에의 활동은 조금씩 제한받기 시작했다.[159] 그럼에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790년 5월 8일 국회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도량형 통일안 제작을 의뢰받아 참여하였다.[161] 라부아지에는 비서와 회계 업무를 담당했고, 헌법제정국민의회에 일의 진행을 보고했으며,[162] 1793년 1월에는 질량 단위를 정하는 일을 했다.[163]1791년 12월,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재무 담당관이 되었고,[164] 1792년 1월에는 헌법제정국민의회에서 조직한 기술 및 교역 고문 위원회에 참석했으며,[165] 리세 기술학교(Lycèe des Arts) 경영에도 참여했다.[166] 1791년 3월 20일, 헌법제정국민의회는 라부아지에가 오랫동안 봉직해 온 세금 징수 조합을 해체했다.[167]
프랑스의 조세청부업자들은 담배의 생산, 수입, 판매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라부아지에는 담배에 재가 섞였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고안했다.[19] 또한, 소량의 재를 첨가하면 담배 풍미가 향상된다는 것을 알았다. 조세청부업자들은 그의 권고에 따라 담배에 6.3%의 물을 첨가했다.[20] 라부아지에는 철저한 검사, 회계, 감독 및 검사 시스템을 통해 소매상의 밀수 담배 유통 및 담배 양 증가를 막았다. 이 시스템은 전국 담배 소매상들의 반감을 샀고, 프랑스 혁명 기간 중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21]

라부아지에는 왕실 정부의 요청에 따라 과학 아카데미의 보고서와 위원회에 참여했다. 1775년, 그는 화약 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프랑스 화약의 양과 질을 크게 향상시켰다. 화약 위원회 임명은 라부아지에에게 왕립 병기창에 집과 실험실을 제공하여 그의 과학 경력에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1775년부터 1792년까지 여기서 생활하고 일했다. 라부아지에는 엘레테르 이레네 뒤퐁에게 화약 제조를 교육하여 뒤퐁 화약 사업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23]
1791년 6월, 라부아지에는 뒤퐁 드 네무르(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에게 인쇄소 구입 자금을 대출해 주었다. 뒤퐁은 이 인쇄소로 신문을 발행하여 프랑스 입헌의회의 토론 보고와 과학 아카데미의 논문을 게재할 계획이었다.[24] 라부아지에는 통일된 도량형 시스템을 확립하기 위한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고,[25][26] 1791년 3월, 이 위원회는 미터법(metric system) 채택을 권고했다.[27] 새로운 도량형 시스템은 1793년 8월 1일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에서 채택되었다.[28] 라부아지에는 1793년 12월 23일 도량형 위원회에서 해임되었다.[26]
그의 마지막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프랑스 교육 개혁에 대한 국민공회 제안이었다. 그는 또한 여러 외국 출신 과학자들을 대신하여 개입하여 그들을 모든 외국인의 재산과 자유를 박탈하는 명령에서 면제받도록 도왔다.[30]
라부아지에는 최초의 정량적 화학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밀폐된 유리 용기에서 화학 반응의 반응물과 생성물을 정밀하게 측정하여 기체가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했다.[41] 1774년, 그는 화학 반응에서 물질은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지만, 모든 화학적 변화에서 반응 전후의 총 질량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부아지에의 실험은 질량 보존의 법칙을 뒷받침했다.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라부아지에의 법칙으로 가르치며,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변형된다.”라고 설명한다. 미하일 로모노소프(Mikhail Lomonosov)는 1748년에 이미 유사한 생각을 표명하고 실험으로 증명했으며, 라부아지에의 연구보다 앞서 유사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로는 장 레이(Jean Rey), 조지프 블랙(Joseph Black),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등이 있다.[42]
라부아지에는 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Louis-Bernard Guyton de Morveau),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Claude-Louis Berthollet), 앙투안 프랑수아 드 푸르크루아(Antoine François de Fourcroy)와 함께 1787년 아카데미에 화학 명명법 개혁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출했다. 당시에는 합리적인 화학 명명법 체계가 없었기 때문이다.[43] 이 연구는 '''화학 명명법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 1787)'''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산소 화학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새로운 체계를 도입했다.[44][45]
고전 원소는 버려졌고, 대신 화학적 방법으로 더 간단한 물질로 분해될 수 없는 약 33가지 물질이 임시적으로 원소로 목록에 올랐다.[44][45] 여기에는 빛, 열소, 산소, 수소, 질소(nitrogen); 탄소; 황; 인; 염산(hydrochloric acid)의 "근본 물질", 붕산, "불산"의 "근본 물질"; 17가지 금속; 5가지 토류(주로 산화물, 예: 마그네시아, 바리아, 스트론티아); 3가지 알칼리(수산화칼륨, 소다, 암모니아); 19가지 유기산의 "근본 물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체계에서 산은 여러 원소와 산소의 화합물로 간주되었으며, 관련된 원소와 그 원소의 산소화 정도를 나타내는 이름이 붙여졌다. 예를 들어 황산과 아황산, 인산과 인산, 질산과 아질산 등이 있으며, "ic" 접미사는 "ous" 접미사를 가진 산보다 산소 비율이 더 높은 산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ic" 산의 염에는 "ate"라는 어미가 붙여졌다(예: 황산구리), 반면 "ous" 산의 염은 "ite"라는 접미사로 끝났다(예: 아황산구리). 새로운 명명법의 전반적인 효과는 "황산구리"와 "금성의 비트리올"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명명법은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 나가 화학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4. 2. 생물학 연구
1790년 말, 라부아지에는 모든 정치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의회의 재정 고문의 자리만 유지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과학 연구를 재개하였다. 그는 호흡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호흡은 혈액을 식히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대신 호흡은 탄소와 수소를 연소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장하였다.[168] 또한, 발한 작용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여, 열이 호흡 때문에 발생하면 발생한 열을 땀의 증발을 통해서 방출한다고 주장하였고, 상당한 양의 수분이 호흡을 통해서도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발한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물의 양 측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169] 라부아지에는 양분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고, 1792년에는 동물의 유기 합성에 양분이 사용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에 상금을 걸기도 하였다.[170]
4. 3. 사형
라부아지에는 혁명 중에도 여러 활동을 했지만, 그의 입지는 점차 위협받았다. 1793년 9월, 국민 공회는 전직 세금 징수원들의 처리를 앙투안 뒤팽에게 맡겼다.[172] 1793년 11월 24일, 전직 세금 징수원 체포 발의가 국민 공회를 통과했고,[173] 라부아지에는 11월 28일 장인과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174]1794년 5월 8일, 라부아지에를 포함한 28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날 저녁 라부아지에는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시신은 장례식도 없이 공동묘지에 버려졌다.[175]
프랑스 혁명 기간, 극도로 인기가 없던 조세농(Ferme générale)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고, 라부아지에는 국가에 지급해야 할 돈을 사취하고 담배에 물을 섞어 판매한 혐의 등으로 1794년 5월 8일 파리에서 50세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20][32]
일반적인 전설에 따르면, 그의 실험을 계속할 수 있도록 목숨을 살려달라는 호소는 판사 코팽알에 의해 ''"공화국은 학자도 화학자도 필요 없다. 사법 절차는 연기될 수 없다."''라는 말로 짧게 잘렸다고 한다.[33]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라부아지에의 참수를 애도하며 ''"그들은 이 머리를 자르는 데 단 몇 순간밖에 걸리지 않았고, 아마도 100년이 지나도 이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표현했다.[34][35]
라부아지에의 처형과 관련하여 과학자의 목이 잘린 후에도 눈을 깜빡였다는 것을 보여주어 머리가 어느 정도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다는 위경전[37]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도시 전설로 여겨진다.[38][37]
1793년 11월 24일 프랑스 제1공화정 혁명정부는 조세 징수인[85] 전원을 체포하기 위해 전직 조세 징수인들을 수배했다. 라부아지에는 혹독한 세금 징수를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금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수배에 따라 자진 출두했다. 그러나 조세 징수인의 딸과 결혼한 것을 이유로 투옥되었다.
곧 라부아지에는 혁명재판소의 재판을 받았다. 라부아지에의 변호인은 그의 과학적 업적을 들어 변론했지만, 재판장은 “공화국에 과학자는 필요 없다(La République n'a pas besoin de savants ni de chimistes.)”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이렇게 1794년 5월 8일, “프랑스 국민에 대한 음모”라는 죄목[87][93]으로 라부아지에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사형은 그날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집행되었고, 라부아지에는 50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라부아지에의 죽음에 대해 “그의 목을 베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와 같은 두뇌를 가진 자가 나타나려면 100년이 걸릴 것이다(Il ne leur a fallu qu'un moment pour faire tomber cette tête et cent années, peut-être, ne suffiront pas pour en reproduire une semblable.)”라는 말을 남기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96]
5. 사후
라부아지에는 처형된 지 1년 반 만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백색 테러 기간 중 그의 유품은 "잘못 유죄 판결을 받은 라부아지에의 미망인에게"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미망인에게 반환되었다.[36]
라부아지에는 연소와 호흡 간의 관계를 연구하여 호흡 생리학 분야에 공헌하였다. 1782년에서 1783년 겨울, 라플라스와 함께 얼음 열량계 장치를 고안하여 연소 또는 호흡 중에 발생하는 열량을 측정했다. 실험 결과, 호흡이 느린 연소 과정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la respiration est donc une combustion," 즉, 호흡 가스 교환은 촛불이 타는 것과 같은 연소라고 말했다.[52] 1789년에서 1790년까지 아르망 세갱과 협력하여 호흡 실험을 계속했지만, 혁명으로 인해 연구는 부분적으로만 완료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일관된 화학 저울 사용을 확립하고, 산소를 이용하여 플로지스톤설을 뒤엎었으며, 새로운 화학 명명법 체계를 개발하는등 화학에 근본적인 공헌을 했다. 라플라스와의 공동 실험을 통해 물리화학과 열역학 분야의 초기 연구를 수행했다. 또한, 라디칼 이론을 제시하고, 동소체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는 기체 용량계(가스오미터)를 제작하여 시범에 사용했으며, 더 작고 저렴하며 실용적인 기체 용량계도 만들었다.[53] 그의 공헌은 화학을 18세기 물리학 및 수학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4]
그의 사망 후, 그의 친척들은 푸이 드 돔의 샤토 드 라 카니에르(Château de la Canière)에 그의 과학 원고 및 기구 대부분을 포함하는 자료를 보관했다.[55] 1970년 뉴질랜드 과학산업연구부는 파파로아 산맥의 라부아지에 산(Mount Lavoisier)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56]
5. 1. 마리안 라부아지에
사형 집행 이후, 집행관은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집과 연구실에 있던 모든 물품 목록을 작성하여 가져갔고, 곧 라부아지에의 재산은 몰수되었다.[176]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피신하지 않고 집을 지켰고, 결국 1794년 6월 14일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으나, 1794년 8월 17일에 풀려났다.[177] 1795년, 마리안은 전직 세무 징수원을 살해한 혐의로 앙투안 뒤팽을 기소했고, 1796년 4월 라부아지에의 유품을 돌려받았다.[178] 1805년, 마리안은 벤저민 톰프슨과 재혼했고,[179] 1836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180]5. 2. 재평가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처형이 완전히 그릇되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천문학자 제롬 랄랑드는 1795년 초,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책을 쓰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라부아지에에 관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1796년 8월 2일에는 매우 성대한 두 번째 장례식이 열려 3,000명이 참여하여 수많은 찬사와 애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마리안 라부아지에는 남편의 죽음을 막지 못한 제자들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이러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181]라부아지에는 처형된 지 1년 반 만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완전히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백색 테러 기간 중 그의 유품이 미망인에게 반환되었고, "잘못 유죄 판결을 받은 라부아지에의 미망인에게"라는 간략한 메모가 함께 전달되었다.[36]
라부아지에는 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 앙투안 프랑수아 드 푸르크루아와 함께 1787년 화학 명명법 개혁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출했다. 당시에는 합리적인 화학 명명법 체계가 없었기 때문이다.[43] 이 연구는 '''화학 명명법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 1787)'''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산소 화학 이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새로운 체계를 도입했다.[44][45]
고전 원소는 버려졌고, 대신 더 간단한 물질로 분해될 수 없는 약 33가지 물질이 임시적으로 원소로 목록에 올랐다. 여기에는 빛, 열소, 산소, 수소, 질소, 탄소, 황, 인 등이 포함되었다.[44][45] 새로운 체계에서 산은 여러 원소와 산소의 화합물로 간주되었으며, 관련된 원소와 그 원소의 산소화 정도를 나타내는 이름이 붙여졌다.
새로운 명명법의 전반적인 효과는 새로운 이름인 "황산구리"와 이전 용어인 "금성의 비트리올"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명명법은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퍼져 나가 화학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1789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화학 원론(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에서 새로운 명명법을 사용했다. 이 저서는 라부아지에의 화학에 대한 기여를 종합한 것으로, 최초의 현대적인 교과서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책은 새로운 화학 이론에 대한 통합된 관점을 제시하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명확하게 설명하며,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부정했다.
라부아지에는 모든 실험을 단일 이론의 틀에 맞추려는 노력의 결과로 화학에 근본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일관된 화학 저울 사용을 확립했고, 산소를 이용하여 플로지스톤설을 뒤엎었으며, 산소가 모든 산의 필수 구성 요소라는 새로운 화학 명명법 체계를 개발했다.
라부아지에는 라플라스와의 공동 실험을 통해 물리화학과 열역학 분야에서도 초기 연구를 수행했다. 그들은 열량계를 사용하여 생성된 이산화탄소 단위당 발생하는 열을 추정하여 결국 불꽃과 동물에서 동일한 비율을 발견했는데, 이는 동물이 일종의 연소 반응을 통해 에너지를 생성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또한 기체 용량계(가스오미터)의 제작을 담당했는데, 이는 그가 시범에 사용한 값비싼 기구였다. 그는 이 기구를 시범에만 사용했지만, 더 많은 화학자들이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정밀도로 작동하는 더 작고 저렴하며 실용적인 기체 용량계도 만들었다.[53]
전반적으로 그의 공헌은 18세기 물리학 및 수학에서 달성된 수준까지 화학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54]
처형 후 약 반세기가 지난 1853년에는 나폴레옹 3세의 제정 하에서 조각가 자크-레오나르 메예가 라부아지에의 흉상을 제작했다. 2013년 현재 파리 시청에는 라부아지에의 업적을 기리는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21세기 현대에 이르러서는 과학사에서 라부아지에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수많은 과학, 특히 화학 분야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69][70]
5. 3. 듀폰
라부아지에의 조수였던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은 프랑스 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하여 듀폰사를 설립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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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ibliographic Details Lavoisier in perspective / edited by Marco Beretta.
Deutsches Museum
[14]
서적
Lavoisier in the year one
https://archive.org/[...]
W.W. Norton
[15]
서적
Antoine Lavoisier: scientist, economist, social reformer.
https://archive.org/[...]
Schuman
[16]
서적
Citizens
Penguin
[17]
학술지
Marie Anne Paulze Lavoisier: The Mother of Modern Chemistry
[18]
서적
Antoine Lavoisier: Science, Administration, and Revolu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
서적
Lavoisier: Chemist, Biologist, Economist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
서적
Three Philosophers: Lavoisier, Priestley and Cavendish
https://books.google[...]
Elsevier Science
2014-05-12
[21]
서적
Antoine Lavoisier: Science, Administration and Revolu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04-11
[22]
서적
Citizens
Penguin
[23]
서적
Du Pont: One Hundred and Forty Years
https://books.google[...]
Charles Scribner's Sons
[24]
서적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Longman
[25]
서적
Companion to the French Revolution
Facts on File Publications
[26]
서적
A Cultural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Yale University Press
[27]
서적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Longman
[28]
서적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Long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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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Long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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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Joseph-Louis Lagrange
http://www-groups.dc[...]
200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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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Long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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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oday in History: 1794: Antoine Lavoisier, the father of modern chemistry, is executed on the guillotine during France's Reign of Terror
http://www.app.co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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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Antoine Laurent Lavoisier and the French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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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소스
Œuvres de Lagrange
Gauthier-Vill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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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ntoine-Laurent Lavoisier – Chemist and Revolutionary
Charles Scribner's 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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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Vesalius
http://www.biusante.[...]
[37]
웹사이트
Does the head remain briefly conscious after decapitation (revisited)?
https://www.straight[...]
2024-04-23
[38]
논문
Did Lavoisier Blink?
https://pubs.acs.org[...]
200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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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Lavoisier—the Crucial Year: The Background and Origin of His First Experiments on Combustion in 1772
https://library.oape[...]
201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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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Mémoire sur la combustion en général
http://www.lavoisier[...]
177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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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General Chemistry
Prentice-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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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n Historical Note on the Conservation of Mass
http://www.eric.e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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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The Introduction of Lavoisier's Chemical Nomenclature into America
195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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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 : Présenté dans un ordre nouveau et d'après les découvertes modernes ; avec figures
https://archive.org/[...]
A Paris, Chez Cuchet, libraire, rue et Hôtel Serpente
[45]
서적
Inorganic Chemistry
https://books.google[...]
Academic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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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Precision instruments and the demonstrative order of proof in Lavoisier's chemistry
https://paperz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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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ssay on Phlogiston
[48]
간행물
Considérations générales sur la nature des acides
http://www.lavoisier[...]
177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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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Edge of Objectivity: An Essay in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https://archive.org/[...]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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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Développ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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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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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Is a Calorie a Calorie?
http://www.ajcn.org/[...]
200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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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ransforming Matter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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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Foreword to Lavoisier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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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Arsenal of Eighteenth-Century Chemistry:The Laboratories of 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
https://books.google[...]
Koninklijke Brill
2022-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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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Mount Lavoisier
https://en.wikipedia[...]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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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1-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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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Antoine-Laurent Lavoisier: The Chemical Revolution
http://portal.acs.or[...]
American Chemical Society
201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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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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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z Cuchet (Sous le Privilége de l’Académie des Sciences)
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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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2015 Awardees
http://www.scs.illin[...]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School of Chemical Sciences
20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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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Citation for Chemical Breakthrough Award
http://www.scs.illin[...]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School of Chemical Sciences
201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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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ociété Chimique de France
http://www.societech[...]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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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International Society for Biological Calorimetry (ISBC) – About ISBC_
http://biocalorimetr[...]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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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he Lavoisier Medal honors exceptional scientists and engineers
http://www.dupont.co[...]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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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Le Prix Franklin–Lavoisier2018 a été décerné au Comité Lavoisier
https://www.gazettel[...]
201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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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Franklin-Lavoisier Prize
https://www.scienceh[...]
Science History Institute
20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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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The "American" Edition of Lavoisier's L'art de fabriquer le salin et la potasse
https://www.jsto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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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ntoine-Laurent de Lavoisier 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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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자연의 弁証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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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라보아지에
https://kotobank.jp/[...]
2013-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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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72]
문서
論文等の著書・著作での発表はプリーストリーよりも後である
[73]
문서
元素や単体と解せる
[74]
문서
元素の系統名のみしか名前がない元素は含んでいない
[75]
웹사이트
原子の構造と核分裂 - 原子力発電 | 電気事業連合会
https://www.fepc.or.[...]
2023-10-20
[76]
웹사이트
元素って何?
http://www.tbs.co.jp[...]
2023-10-20
[77]
문서
単体が酸化した酸化物も含めるなら31種
[78]
문서
光は現代化学の元素でこそないが、標準模型においては基本粒子(光子)である。ただしもちろん、ラヴォアジエの時代には素粒子物理学はおろか量子力学もまだない
[79]
문서
燃焼反応の理解を大きく前進させたラヴォアジエであるが、「熱の正体」は「物質」的なものであるとの古代以来の四元素以来の観念は脱却できなかった。この点で人類は、19世紀の熱力学の発展まで待たねばならなかった
[80]
문서
ゲタールは、それ以前からラヴォアジエ家と親交があったとされる
[81]
문서
同説においては、水も土もそれぞれ基本元素のひとつである
[82]
문서
ここでのペリカンは鳥のペリカンではなく、形が鳥のペリカンに似ていることから「ペリカン」と名付けられた蒸留器のことを指す
[83]
서적
世界不思議百科
青土社
1989-06-30
[84]
문서
自身の資産は別途に有利に運用しようと考えていたとされる
[85]
문서
徴税請負人は、市民から税金を取り立て国王に引き渡す職である。取り立て行為に対する報酬として高い収入を得られた。しばしば市民を過剰に経済的に苦しめたため、専制的な王の手先・共犯者であるとして、当時の市民からは憎まれていた職業であった
[86]
간행물
ラヴワジエ夫人:化学革命の女神か?
http://www.chart.co.[...]
数研出版
2011-02-04
[87]
서적
ラルース 図説 世界史人物百科
[88]
문서
硝石は農業の副産物として得ることができる
[89]
문서
水銀を12日間加熱した
[90]
문서
スウェーデンの化学者で薬学者のカール・ヴィルヘルム・シェーレは、1773年頃(ラヴォアジエより先)にその物質をすでに発見しており、彼は「傷んだ空気」と呼んでいたとされる。しかしながら、この発見は未発表のものであった
[91]
문서
そのリストにはカロリック(熱素)や酸化物等の元素でないものも含まれている
[92]
웹사이트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 p.192
http://bibulyon.hypo[...]
[93]
문서
あるいは、「水と有害物質をタバコに混入した」との架空の罪も含まれたとされる
[94]
문서
定量実験をモットーとするラヴォアジエは、マラーの論文は「実験もせず憶測の内容であったため」として却下したとされる
2024-12
[95]
문서
但し、マラーは投獄に関与があった可能性までは排除できないが、1793年7月13日に殺害されており、処刑に関与があったとは考えにくい
2024-12
[96]
웹사이트
DEATH OF LAVOISIER
http://www.uh.edu/en[...]
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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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斬首 ― 切断された人間の頭部は意識を有するか
http://x51.org/x/06/[...]
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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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riumph of the Straight Dope
Ballantin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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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d Lavoisier B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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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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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avoisier, chemist, biologist, economist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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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Ibid.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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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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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오늘날의 파리 식물원 (Jardin des Plantes)
[105]
서적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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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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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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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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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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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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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프리스틀리와 라봐지에
한국과학사학회
[11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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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Antoine Lavoisier: science, administration, and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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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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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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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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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산소는 누가 발견하였는가
성신여자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
[132]
서적
[13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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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LAVOISIER, ANTOINE LAUR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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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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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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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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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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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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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5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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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153]
서적
[154]
서적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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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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