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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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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히 켈러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190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수학, 천문학, 물리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 켈러는 대수기하학, 미분기하학, 수리물리학 분야에 기여했으며, 켈러 계량, 켈러 다양체, 켈러 미분 등 그의 이름을 딴 개념들이 존재한다. 그는 엘리 카르탕의 미분 형식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수론과 기하학의 통합을 시도했다. 1930년대에는 나치에 협력하여 독일 해군에 자원 입대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철학에 관심을 갖고, 수학과 철학을 융합한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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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켈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리히 켈러, 1990년 함부르크
로마자 표기Erich Kähler
출생1906년 1월 16일, 라이프치히, 독일 제국
사망2000년 5월 31일 (향년 94세), 베델, 독일
국적독일
학력
모교라이프치히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제목Über die Existenz von Gleichgewichtsfiguren, die sich aus gewissen Lösungen des n-Körperproblems ableiten (n-체 문제의 특정 해에서 파생되는 회전 액체의 평형 솔루션의 존재에 대하여)
박사 학위 논문 URL박사 학위 논문 링크
박사 학위 취득 연도1928년
지도 교수레온 리히텐슈타인
경력
직장라이프치히 대학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함부르크 대학교
베를린 공과대학교
연구 분야 및 업적
연구 분야수학
주요 업적켈러 미분
카르탕-켈러 정리
켈러 다양체
디랙-켈러 방정식
수상
수상 내역작센 과학 아카데미 (1949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1955년)
레오폴디나 독일 국립 과학 아카데미 (1957년)
린체이 국립 아카데미 (1957년)
함부르크 수학회 (1976년)
롬바르도 과학 문학 아카데미 (1992년)
개인사
배우자루이제 귄터, 샬로테 슐체

2. 생애

에리히 켈러는 1906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전신 관리사였던 아버지 에른스트 켈러(Ernst Kählerde)와 어머니 엘자 괴치(Elsa Götschde) 사이에서 태어났다.[16] 어린 시절 스벤 헤딘에 관한 책을 읽고 탐험가가 되기를 열망했으나, 곧 탐험에 대한 열정을 천문학으로 돌렸다.[1]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 분수 미분에 대한 50페이지 분량의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지만, 선생님들은 그에게 먼저 대학 과정을 수강해야 한다고 답했다.[1]

1924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입학하여 갈루아 이론을 공부하고, 수학자 에밀 아르틴을 만났으며, 레온 리히텐슈타인의 지도 아래 연구를 수행했다.[1][2] 1928년 "회전하는 액체의 평형 해의 존재에 관하여, n체 문제의 특정 해에서 유도됨"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2]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수학, 천문학,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아래에서 1928년에 "n체 문제의 특수해로부터 유도되는 회전 액체의 평형 형상의 존재에 관하여"[7]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과학 진흥 협회의 연구 장학금을 받아 다음 해에도 라이프치히에서 학업을 계속했으며, 1929년 알베르투스-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연구 조교로 근무한 것을 제외하면 학업을 계속했다.[1] 1930년 켈러는 빌헬름 블라슈케의 지휘 아래 일하기 위해 함부르크 대학교 수학과에 합류하여 "대수 방정식의 적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썼다.[1] 1930년, 아래에서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대수적 미분 방정식의 적분에 관하여"[8]로 교수 자격을 얻었다. 1929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조교수가 되었고, 1930년부터는 부교수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수학 강좌를 맡았다.

1931-1932년에 로마에서 1년을 보내며 , , , , 레비-치비타, 세베리, 세그레를 포함한 이탈리아 기하학자들과 함께 일했다.[1] 이를 통해 그는 1932년에 현재 켈러 계량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그의 유명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3] 이때 이탈리아와 인연이 생겨, 틈틈이 이탈리아어로 발표하게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에리히 켈러는 1906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전신 관리사였던 아버지 에른스트 켈러(Ernst Kählerde)와 어머니 엘자 괴치(Elsa Götschde) 사이에서 태어났다.[16] 어린 시절 스벤 헤딘에 관한 책을 읽고 탐험가가 되기를 열망했으나, 곧 탐험에 대한 열정을 천문학으로 돌렸다.[1]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 분수 미분에 대한 50페이지 분량의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지만, 선생님들은 그에게 먼저 대학 과정을 수강해야 한다고 답했다.[1]

1924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입학하여 갈루아 이론을 공부하고, 수학자 에밀 아르틴을 만났으며, 레온 리히텐슈타인의 지도 아래 연구를 수행했다.[1][2] 1928년 "회전하는 액체의 평형 해의 존재에 관하여, n체 문제의 특정 해에서 유도됨"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2]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수학, 천문학,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아래에서 1928년에 "n체 문제의 특수해로부터 유도되는 회전 액체의 평형 형상의 존재에 관하여"[7]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과학 진흥 협회의 연구 장학금을 받아 다음 해에도 라이프치히에서 학업을 계속했으며, 1929년 알베르투스-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연구 조교로 근무한 것을 제외하면 학업을 계속했다.[1] 1930년 켈러는 빌헬름 블라슈케의 지휘 아래 일하기 위해 함부르크 대학교 수학과에 합류하여 "대수 방정식의 적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썼다.[1] 1930년, 아래에서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대수적 미분 방정식의 적분에 관하여"[8]로 교수 자격을 얻었다. 1929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조교수가 되었고, 1930년부터는 부교수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수학 강좌를 맡았다.

1931-1932년에 로마에서 1년을 보내며 , , , , 레비-치비타, 세베리, 세그레를 포함한 이탈리아 기하학자들과 함께 일했다.[1] 이를 통해 그는 1932년에 현재 켈러 계량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그의 유명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3] 이때 이탈리아와 인연이 생겨, 틈틈이 이탈리아어로 발표하게 되었다.

2. 2. 학문적 경력

에리히 켈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수학, 천문학,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Leon Lichtensteinde의 지도 아래 1928년에 "n체 문제의 특수해로부터 유도되는 회전 액체의 평형 형상의 존재에 관하여"[7]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 1929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연구 조교로 근무했다.[1] 1930년에는 Wilhelm Blaschkede의 지도 아래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대수적 미분 방정식의 적분에 관하여"[8]라는 논문으로 하빌리타치온을 수여받았다.[1]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하며, Guido Castelnuovode, Francesco Severi (Mathematiker)de, Federigo Enriquesde, Beniamino Segrede, Tullio Levi-Civitait 등 이탈리아 기하학자들과 교류했다.[1] 이탈리아 기하학자들과의 교류는 1932년 켈러 계량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는 계기가 되었다.[3]

1935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연구원을 거쳐 이듬해 교수로 승진하였다.[1] 1948년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동독의 정치 상황에 불만을 품고 1958년 서독베를린 공과대학교로 이적했다.[6] 1964년 함부르크 대학교 교수가 되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다. 은퇴 후에는 주로 수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했다.[5]

1955년 동독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57년에는 국립 과학 아카데미 레오폴디나 정회원이 되었다.[7] 1966년에는 레오폴디나 비정회원, 1969년에는 외국 회원,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에는 다시 정회원이 되었다. 켈러의 지도를 받아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학생으로는 와 이 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과 전후 행적

켈러는 나치 당과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하였으며, 1937년에 독일 해군에 자원하였다.[16]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육군에 소속되어 독일의 군정 아래 프랑스 생나제르 군 기지에 주둔하다가 연합군의 전쟁 포로가 되었다. 엘리 카르탕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등의 도움으로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도 수학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16]

1947년에 석방되었으나, 이후에도 나치 독일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적어도 1988년까지 사무실에 나치 독일 해군의 기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16]

2. 4. 만년

1970년 부인 루이제가 사망하였으며, 샤를로테 슐체(Charlotte Schulzede)와 재혼하였다.[1] 1974년에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은퇴하였다.[1]

은퇴 후에는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5] 수학과 철학을 융합하는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으며, 물리학의 기초와 푸앵카레 군에 관한 여러 중요한 논문과 많은 철학 논문을 저술하며 활발한 연구를 계속했다.[5] 1955년 2월 24일, 동독 과학 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7] 1957년에는 국립 과학 아카데미 레오폴디나 정회원이 되었다.[7] 1966년 11월 17일에는 비정회원, 1969년 5월 20일에는 외국 회원이었다가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다시 정회원이 되었다.[7]

2000년 5월 31일에 함부르크 근교의 작은 마을인 베델(Wedelde)에서 사망하였다.[5]

3. 학문적 업적

수학자로서 쾰러는 다음과 같은 여러 기여로 알려져 있다. 비선형 해석적 미분 시스템의 해에 대한 카르탕-쾰러 정리, 복소다양체에 대한 쾰러 계량, 그리고 순수하게 대수적인 이론을 제공하며 일반적으로 대수기하학에서 채택된 쾰러 미분. 이 모든 것에서 미분 형식 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쾰러는 엘리 카르탕과의 형식적 기원을 바탕으로 이 이론을 발전시킨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쾰러 다양체 — 세 구조가 서로 호환되도록 리만 계량과 심플렉틱 형식이 부여된 복소다양체 —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9]

K3 곡면쿠머, 쾰러, 그리고 고다이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초기 연구는 천체역학에 관한 것이었고, 그는 스키마 이론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널리 채택되지 않았다.

삼체체 문제에 대한 박사 연구 후, 복소 해석을 연구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의 로마 유학 중, 대수 기하학의 "이탈리아 학파"의 중심 인물인 카스텔누오보, 엔리케, 세베리를 만났다.

이 시기, 기하학은 대수적 구조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이 주류가 되었고, 수론 기하학으로 발전했다. 거기에, 켈러는 이탈리아 학파의 대수 기하학적 방법과 블라슈케 밑에서 배운 미분 기하학적 방법을 결합했다. 켈러 방법의 주요 내용은 복잡한 어떤 리만 공간을 닫힌 미분 형식을 통해 식별하는 것이다. 계량이 닫힌 미분 형식 ''g''''ij'' d''z''''i'' d''z''''j''}}를 형성하는, 즉 이 성립하는 복소 다양체를 켈러 다양체라고 부른다.[9] 켈러는 1932년에 켈러 계량 및 켈러 다양체를 도입했다[9]. 켈러 다양체는 끈 이론에서 여분 차원의 콤팩트화 등에 필요한 수학의 기초적 역할을 한다.[9]

켈러의 작업은 강한 철학적 편향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 이해 및 수용의 장애가 될 수 있다[10]。 그의 대저 ''Geometria aritmetica''에서는 수론과 기하학의 통합이 모색되었으며, 체뿐만 아니라 국소환의 종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1950년대 후반의 거의 동시기에 개형론을 바탕으로 대수 기하학의 새로운 기반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시작했던 알렉산드르 그로텐디크에 앞선 것이다[11]。 켈러는 ''Geometria aritmetica''를 계획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로텐디크의 작업이 공개될 때까지 더 이상 추구하지 않았다. 1963년, 그의 이론을 널리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 출판되었다[12]。 ''Geometria aritmetica''에 포함된 아이디어와의 차이점은, 이후의 ''Arithmetischen Geometrie''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졌다.

켈러는, 예를 들어 미분 형식맥스웰 방정식이나 디랙 방정식 등, 수리물리학에도 몰두했다. 그는, 엘리 카르탕에 의한 미분 형식을 더욱 발전시키고 (카르탕-켈러 이론, 쾰러 미분), 미분 방정식계의 이론에 응용했다. 그 외에도 영향이 큰 업적으로, 2변수 복소 함수와 관련된 이론이 있다.

켈러는 수론이 물리학에서 더욱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13]。 따라서, 그는 비주류적인 아이디어를 추구하게 되었다.[13] 예를 들어,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군을 "신 푸앵카레 군"이라고 불리는 것(이것은 헤르만 니콜라이에 의한[14] 드 지터 군과 동일하다)으로 대체했다[15]。 그는 이 군을 이산 부분군이자 보형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수론과 연결했다.[13] 이 아이디어는 그가 후년에 탐구한 대수의 기초를 세우는 포괄적인 철학의 일부로, 그는 수학의 언어를 철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학문적 문제, 나아가 생활상의 문제를 다루고 해결하기 위한 기초로 간주했으며, 그 때문에 그의 저작에 사용된 용어는 독특한 것이 되었다.[13] 1970년대, 그는 함부르크에서 철학 강좌를 계속 열었다. 그의 철학적 저작(예를 들어 ''Monadologie'' 1975, 1977)의 많은 부분은 미출판 상태로 남아 있다.

3. 1. 미분기하학 및 복소기하학

카르탕-켈러 정리는 비선형 해석적 미분 시스템의 해에 대한 정리이다. 켈러 다양체는 복소 구조, 리만 계량, 심플렉틱 형식이 서로 호환되는 복소다양체로, 끈 이론에서 여분 차원의 콤팩트화 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9] 켈러 다양체에는 켈러 계량이 도입된다.[9] K3 곡면쿠머, 켈러, 고다이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켈러는 엘리 카르탕과의 형식적 기원을 바탕으로 미분 형식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대수기하학에서 채택된 켈러 미분에 대한 순수하게 대수적인 이론을 제공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로마 유학 중 카스텔누오보, 엔리케, 세베리 등 대수 기하학의 "이탈리아 학파"의 중심 인물들을 만났고, 이탈리아 학파의 대수 기하학적 방법과 블라슈케 밑에서 배운 미분 기하학적 방법을 결합했다.

켈러는 수론과 기하학의 통합을 모색했으며, 그의 저서 ''Geometria aritmetica''에서는 체뿐만 아니라 국소환의 종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업적은 알렉산드르 그로텐디크의 개형론에 기반한 대수 기하학의 새로운 기반 구축 계획보다 앞선 것이었다.[11]

켈러는 미분 형식맥스웰 방정식이나 디랙 방정식 등, 수리물리학에도 몰두했다. 그는 엘리 카르탕에 의한 미분 형식을 더욱 발전시키고 (카르탕-켈러 이론, 켈러 미분), 미분 방정식계의 이론에 응용했다.

3. 2. 대수기하학

쾰러는 비선형 해석적 미분 시스템의 해에 대한 카르탕-쾰러 정리, 복소다양체에 대한 쾰러 계량, 그리고 순수하게 대수적인 이론을 제공하며 일반적으로 대수기하학에서 채택된 쾰러 미분등 여러 수학적 기여를 하였다. 미분 형식 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쾰러는 엘리 카르탕과의 형식적 기원을 바탕으로 이 이론을 발전시킨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K3 곡면쿠머, 쾰러, 그리고 고다이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로마 유학 중, 대수 기하학의 "이탈리아 학파"의 중심 인물인 카스텔누오보, 엔리케, 세베리를 만났다. 이 시기, 기하학은 대수적 구조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이 주류가 되었고, 수론 기하학으로 발전했다. 켈러는 이탈리아 학파의 대수 기하학적 방법과 블라슈케 밑에서 배운 미분 기하학적 방법을 결합했다. 켈러는 1932년에 켈러 계량 및 켈러 다양체를 도입했다[9]. 켈러 다양체는 끈 이론에서 여분 차원의 콤팩트화 등에 필요한 수학의 기초적 역할을 한다.[9]

켈러의 작업은 강한 철학적 편향을 가지고 있으며,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 이해 및 수용의 장애가 될 수 있다[10]。 그의 대저 ''Geometria aritmetica''에서는 수론과 기하학의 통합이 모색되었으며, 체뿐만 아니라 국소환의 종류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1950년대 후반의 거의 동시기에 개형론을 바탕으로 대수 기하학의 새로운 기반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시작했던 알렉산드르 그로텐디크에 앞선 것이다[11]。 켈러는 ''Geometria aritmetica''를 계획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로텐디크의 작업이 공개될 때까지 더 이상 추구하지 않았다. 1963년, 그의 이론을 널리 알기 쉽게 정리한 것이 출판되었다[12]

3. 3. 수리물리학

쾰러는 미분 형식을 사용하여 맥스웰 방정식, 디랙 방정식수리물리학의 여러 방정식을 연구했다.[13] 그는 엘리 카르탕에 의한 미분 형식을 더욱 발전시키고(카르탕-쾰러 이론, 쾰러 미분) 미분 방정식계의 이론에 응용했다.

쾰러는 수론물리학에서 더욱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13] 그는 특수 상대성 이론의 로렌츠 군을 "신 푸앵카레 군"이라고 불리는 것(이것은 헤르만 니콜라이에 의한[14] 드 지터 군과 동일하다)으로 대체했다.[15] 그는 이 군을 이산 부분군이자 보형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수론과 연결했다.

4. 철학 사상

5. 저서


  • Einführung in die Theorie der Systeme von Differentialgleichungende, Hamburger Mathematische Einzelschrift, 16권, B. G. Teubner, 1934
  • * 《미분 방정식 개론》
  • Geometria aritmeticade, Annali di Matematica, 시리즈 IV, 제45권, 1958, 1–399쪽
  • * 《수리 기하학》
  • Über die Beziehungen der Mathematik zu Astronomie und Physikde, Jahresbericht DMV, 제51권, 1941, 52–63쪽 (개정판은 가우스 기념관, 편집: 라이히하르트, 라이프치히 1957)
  • * 《수학천문학물리학의 관계에 대하여》
  • Wesen und Erscheinung als mathematisches Prinzip der Philosophiede, Nova Acta Leopoldina, 새로운 시리즈, 제30권, 제173호, 1965, 9–21쪽
  • * 《철학의 수학적 원리로서의 본질과 현상》
  • Raum-Zeit-Individuumde, 하인리히 베게어, Mathematik in Berlinde, 베를린 1997, 41–105쪽
  • * 《시공 개체》
  • Ariadne hat gesagtde, Istituto Lombardo, Rend.Sc., A 126, 1992, 105–154쪽
  • Nietzsches Philosophie als Vollendung der deutschen idealistischen Philosophiede, Spectrum, 제22권, 1991, 44–46쪽

6.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Kahler biography https://mathshistory[...] 2024-09-16
[2] 웹사이트 The Mathematics Genealogy Project - Erich Kähler https://www.genealog[...] 2016-08-08
[3] 간행물 Über eine bemerkenswerte Hermitesche Metrik 1933-12-01
[4] 서적 Mathematicians under the Nazis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11-23
[5] 웹사이트 ERICH KÄHLER http://cs.unitbv.ro/[...] 2016-08-08
[6] 서적 Mathematische Werke / Mathematical Works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2003-01-01
[7] 문서 "„Über die Existenz von Gleichgewichtsfiguren rotierender Flüssigkeiten, die sich aus gewissen Lösungen des n-Körperproblems ableiten“"
[8] 문서 "„Über die Integrale algebraischer Differentialgleichungen“"
[9] 문서 Kähler Über eine bemerkenswerte hermitesche Metrik, Abhandlungen Math.
[10] 문서 Zum Beispiel André Weil in der Besprechung der Geometria aritmetica in Mathematical Reviews: 'The authors seems to have done everything in his power to discourage prospective readers and is only too likely to have succeeded', zitiert nach Kunz, Review von Kählers Werken, Mathem.
[11] 문서 Kunz in der Besprechung der Werke von Kähler, Mathematical Intelligencer 2006, Nr.1; Grothendieck weist auf die Bedeutung der Arbeiten von Kähler auf diesem Gebiet in seinen Elements de geometrie algebrique hin.
[12] 문서 Infinitesimal-Arithmetik, Univ.
[13] 문서 Kunz, Math.
[14] 문서 Essay in den Werken von Kähler
[15] 문서 Kähler The Poincaré Group, in J. Chisholm, A. Common Clifford algebras and their application in mathematical physics, NATO Advanced Study Institute, Serie C, Band 183, 1986, S.265-272, und in Festschrift für Ernst Mohr, Universitätsbibliothek TU Berlin 1985
[16] 서적 Mathematicians under the Nazi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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