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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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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히 코흐는 독일의 나치 정치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반 바이마르 공화국 활동으로 철도 공무원에서 해고된 후 나치당에 입당했다. 1928년 동프로이센 가울라이터가 되었고, 1930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3년 나치 정권 장악 후 동프로이센 주지사를 겸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어 잔혹한 통치를 펼쳤으며, 종전 후 체포되어 폴란드에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기독교 신념을 가졌으며, 1986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뉘우침 없이 90세의 나이로 복역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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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코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1년의 에리히 코흐
1941년의 코흐
직책
동프로이센 대관구 지도자시작: 1928년 10월 1일
종료: 1945년 4월 23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
전임자: 한스 알베르트 혼펠트 (대행)
후임자: 직책 폐지
동프로이센 오버프레지덴트시작: 1933년 6월 2일
종료: 1945년 4월 23일
전임자: 빌헬름 쿠처
후임자: 직책 폐지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시작: 1941년 9월 1일
종료: 1944년 11월 10일
임명자: 아돌프 히틀러
전임자: 직책 신설
후임자: 직책 폐지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시작: 1944년 9월 21일
종료: 1945년 1월 21일 (사실상 1944년 10월 13일 축출)
임명자: 아돌프 히틀러
전임자: 힌리히 로제
후임자: 직책 폐지
개인 정보
출생일1896년 6월 19일
출생지엘버펠트, 독일 제국
사망일1986년 11월 12일 (90세)
사망 장소바르체보 교도소, 바르체보,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당나치당
형사 처벌
유죄 판결전쟁 범죄
형벌사형; 무기징역으로 감형
군사 복무
군대
프라이코어 로스바흐
복무 기간1915년–1918년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2.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코흐는 1896년, 독일의 엘버펠트(오늘날의 부퍼탈)에서 생산현장 감독관인 직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엘버펠트에서 전문학교를 다니며 화학을 공부하였고,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1] 종전 후 상부 실레지아에서 ''자유군단 로스바흐''의 일원으로 싸웠다.[1] 유능한 상인이었던 코흐는 프로이센 국유 철도에 근무하여 중간급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으나,[1]바이마르 공화국 활동으로 인해 1926년 이 직위에서 해고되었다.[1] 1922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에 입당하였고(당원 번호 90), 에센 지구 지도자를 거쳐, 루르 지역 대관구 대리 지도자를 거쳐 1928년, 동프로이센 제국 대관구 지도자가 되었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동프로이센 선출 국회의원이 되었다.

2. 1. 출생 및 성장



에리히 코흐는 오늘날 부퍼탈의 일부인 엘버펠트에서 감독관 구스타프 아돌프 코흐(1862-1932)와 그의 아내 앙리에테(1863-1939, 옛 성은 마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군인으로 복무했다. 이후 상부 실레지아에서 ''자유군단 로스바흐''의 일원으로 싸웠다.[1] 유능한 상인이었던 코흐는 철도 공무원에 입사하여 중간급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으나,[1]바이마르 공화국 활동으로 인해 1926년 이 직위에서 해고되었다.[1]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에리히 코흐는 부퍼탈의 일부인 엘버펠트에서 감독관 구스타프 아돌프 코흐(1862-1932)와 그의 아내 앙리에테(1863-1939)의 아들로 태어났다.[1]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1] 종전 후 상부 실레지아에서 ''자유군단 로스바흐''의 일원으로 싸웠다.[1]

2. 3. 철도 공무원 생활

에리히 코흐는 오늘날 부퍼탈의 일부인 엘버펠트에서 감독관 구스타프 아돌프 코흐(1862-1932)와 그의 아내 앙리에테(1863-1939)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군인으로 복무했고, 상부 실레지아에서 자유군단 로스바흐의 일원으로 싸웠다.[1] 유능한 상인이었던 코흐는 철도 공무원에 입사하여 중간급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으나,[1]바이마르 공화국 활동으로 인해 1926년 이 직위에서 해고되었다.[1]

3. 나치당 입당 및 초기 활동

코흐는 1896년, 독일의 엘버펠트 (Elberfeld, 오늘날의 부퍼탈)에서 생산현장 감독관인 직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엘버펠트에서 전문학교를 다니며 화학을 공부하였고, 1915년까지 1918년까지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1922년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에 입당하였고, 루르 지역 대관구 대리 지도자를 거쳐 1928년, 프로이센 대관구 지도자가 되었다. 1930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1933년 나치당의 정권 장악 이후, 동프로이센의 주지사까지 겸직하게 되었다.[18]

돌격대의 구성원이 되어 1938년 11월에는 돌격대 대장(SA-Obergruppenführer)으로 명예 승진하였으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동프로이센 국방 위원(Reichsverteidigungskommissar)이 되었다.

1922년 나치당(NSDAP)에 입당(당원 번호 90)했다.[1] 1922년부터 그는 나치당 가우 루르에서 사업 관리자를 포함한 다양한 당직을 맡았다. 루르 점령 기간 동안 그는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의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프랑스 당국에 의해 여러 번 투옥되었다.[1] 그는 당의 좌익에 속했으며 그레고어 슈트라세가 이끄는 파벌의 지지자였다.[1] 그는 슈트라세가 조직하고 이끈 북부 및 북서부 독일 ''가우''의 단명한 그룹인 국가 사회주의 노동 연합의 일원이 되었으며, 당 프로그램의 수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연합은 밤베르크 회의 이후 1926년에 해산되었다.[2]

1926년 3월 22일, 코흐는 에센의 나치당 ''지구 지도자''(Bezirksleiter)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요제프 괴벨스의 뒤를 이어 ''Großgau'' 루르의 사업 관리자가 되었다. 1927년에는 Viktor Lutze의 뒤를 이어 부 ''가울라이터''(Gauleiter)가 되었다.[3]

1930년 9월 선거에서 동프로이센 선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33년 나치당의 정권 장악 후, 동프로이센주의 주지사(Oberpräsident)가 되었다. 돌격대원이 되어, 1938년에는 돌격대 대장(SA-Obergruppenführer)이 되었다. 1939년 10월 26일 동프로이센의 국가 방위 위원(:de:Reichsverteidigungskommissar)이 된다.

3. 1. 나치당 입당

에리히 코흐는 1922년 나치당(NSDAP)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90).[1] 1922년부터 그는 나치당 가우 루르에서 사업 관리자를 포함한 다양한 당직을 맡았다. 루르 점령 기간 동안 그는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의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프랑스 당국에 의해 여러 번 투옥되었다.[1] 그는 당의 좌익에 속했으며 그레고어 슈트라세가 이끄는 파벌의 지지자였다.[1] 그는 슈트라세가 조직하고 이끈 북부 및 북서부 독일 ''가우''의 단명한 그룹인 국가 사회주의 노동 연합의 일원이 되었으며, 당 프로그램의 수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연합은 밤베르크 회의 이후 1926년에 해산되었다.[2]

1926년 3월 22일, 코흐는 에센의 나치당 ''지구 지도자''(Bezirksleiter)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요제프 괴벨스의 뒤를 이어 ''Großgau'' 루르의 사업 관리자가 되었다. 1927년에는 Viktor Lutze의 뒤를 이어 부 ''가울라이터''(Gauleiter)가 되었다.[3]

3. 2. 초기 당직

코흐는 1922년 나치당(NSDAP)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90).[1] 1922년부터 그는 나치당 가우 루르에서 사업 관리자를 포함한 다양한 당직을 맡았다.[1] 루르 점령 기간 동안 그는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의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프랑스 당국에 의해 여러 번 투옥되었다.[1] 그는 당의 좌익에 속했으며 그레고어 슈트라세가 이끄는 파벌의 지지자였다.[1] 그는 슈트라세가 조직하고 이끈 북부 및 북서부 독일 ''가우''의 단명한 그룹인 국가 사회주의 노동 연합의 일원이 되었으며, 당 프로그램의 수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연합은 밤베르크 회의 이후 1926년에 해산되었다.[2]

1926년 3월 22일, 코흐는 에센의 나치당 ''지구 지도자''(Bezirksleiter)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요제프 괴벨스의 뒤를 이어 ''Großgau'' 루르의 사업 관리자가 되었다. 1927년에는 Viktor Lutze의 뒤를 이어 부 ''가울라이터''(Gauleiter)가 되었다.[3]

3. 3. 슈트라서 파벌 지지

코흐는 1922년 나치당(NSDAP)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90).[1] 1922년부터 그는 나치당 가우 루르에서 사업 관리자를 포함한 다양한 당직을 맡았다. 루르 점령 기간 동안 그는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의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프랑스 당국에 의해 여러 번 투옥되었다.[1] 그는 당의 좌익에 속했으며 그레고어 슈트라세가 이끄는 파벌의 지지자였다.[1] 그는 슈트라세가 조직하고 이끈 북부 및 북서부 독일 ''가우''의 단명한 그룹인 국가 사회주의 노동 연합의 일원이 되었으며, 당 프로그램의 수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연합은 밤베르크 회의 이후 1926년에 해산되었다.[2]

1926년 3월 22일, 코흐는 에센의 나치당 ''지구 지도자''(Bezirksleiter)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요제프 괴벨스의 뒤를 이어 ''Großgau'' 루르의 사업 관리자가 되었다. 1927년에는 Viktor Lutze의 뒤를 이어 부 ''가울라이터''(Gauleiter)가 되었다.[3]

4. 동프로이센 대관구 지도자

1928년 10월 코흐는 동프로이센 주의 ''가울라이터''(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지방 의회에서 NSDAP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1] 1930년 9월부터 그는 동프로이센 지역의 국회 의원이 되었다.[1] ''권력 장악'' 이후, 1933년 7월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에 임명되었다.[1] 그는 1933년 6월 2일 빌헬름 쿠처를 대신하여 동프로이센의 ''최고 의장''이 되었다(9월까지 대행).[1] 그는 이로써 주에서 가장 높은 당 및 정부 직책을 자신의 통제 하에 통합했다. 1938년 11월 코흐는 ''SA-상급 집단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코흐의 동프로이센에서의 전쟁 전 통치는 지역 농업의 집단화 노력을 특징으로 했으며, 당 안팎의 비판자들을 가혹하게 대했다.[1] 그는 또한 농업이 주를 이루는 이 지역의 대규모 산업화를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그를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게 만들었다.[1] 그러나, 농지 개선 프로젝트와 도로 건설에 집중하는 공공 자금 지원 비상 구호 프로그램을 통해 동프로이센을 위한 "에리히 코흐 계획"은 실업을 없앤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8월 16일, 코흐는 히틀러에게 실업이 동프로이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는데, 이 업적은 나치 독일 전역에서 찬사를 받았다.[4]

코흐의 산업화 계획은 국가 농민 지도자 (''Reichsbauernführer'')이자 농업부 장관 직을 맡고 있던 리하르트 발터 다레와 갈등을 일으켰다. 신이교도적 농촌 낭만주의자였던 다레는 자신의 농업적인 동프로이센의 비전을 강요하고 싶어했다. 그의 "토지" 대표들이 코흐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자, 코흐는 그들을 체포했다.[5]

폴란드에서 재판 중인 에리히 코흐
(1958년부터 1959년 사이)


폴란드 침공 뒤에는 몇몇 폴란드 영토를 자신의 관구로 얻었으며, 그의 폴란드인을 향한 악행으로 무수한 폴란드인이 희생되고, 특히 땅을 강제로 빼앗아 자신의 사유지로 만들기도 하였다.

4. 1. 대관구 지도자 임명

1928년 10월 코흐는 동프로이센 주의 ''가울라이터''(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지방 의회에서 NSDAP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1] 1930년 9월부터 그는 동프로이센 지역의 ''국회'' 의원이 되었다.[1] ''권력 장악'' 이후, 1933년 7월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에 임명되었다.[1] 1933년 6월 2일 빌헬름 쿠처를 대신하여 동프로이센의 ''최고 의장''이 되었다(9월까지 대행).[1] 그는 이로써 주에서 가장 높은 당 및 정부 직책을 자신의 통제 하에 통합했다. 1938년 11월 코흐는 ''SA-상급 집단지도자''로 임명되었다.[1]

코흐의 동프로이센에서의 전쟁 전 통치는 지역 농업의 집단화 노력을 특징으로 했으며, 당 안팎의 비판자들을 가혹하게 대했다.[1] 그는 또한 농업이 주를 이루는 이 지역의 대규모 산업화를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그를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게 만들었다.[1] 농지 개선 프로젝트와 도로 건설에 집중하는 공공 자금 지원 비상 구호 프로그램인 "에리히 코흐 계획"을 통해 실업을 없앤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8월 16일, 코흐는 히틀러에게 실업이 동프로이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다.[4]

코흐의 산업화 계획은 국가 농민 지도자 (''Reichsbauernführer'')이자 농업부 장관 직을 맡고 있던 리하르트 발터 다레와 갈등을 일으켰다. 신이교도적 농촌 낭만주의자였던 다레는 자신의 농업적인 동프로이센의 비전을 강요하고 싶어했다. 그의 "토지" 대표들이 코흐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자, 코흐는 그들을 체포했다.[5]

4. 2. 국회의원 당선

1928년 10월 코흐는 동프로이센 주의 ''가울라이터''(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지방 의회에서 NSDAP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1] 1930년 9월부터 그는 동프로이센 지역의 ''국회'' 의원이 되었다.[1]

4. 3. 권력 장악 이후

1928년 10월 코흐는 동프로이센의 ''가울라이터''(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지방 의회에서 NSDAP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1] 1930년 9월부터 그는 동프로이센 지역의 국회 의원이었다.[1] 1933년 7월 프로이센 국가 평의회에 임명되었다.[1] 1933년 6월 2일 동프로이센의 ''최고 의장''이 되어[1] 주에서 가장 높은 당 및 정부 직책을 자신의 통제 하에 통합했다. 1938년 11월 코흐는 ''SA-상급 집단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코흐의 동프로이센 통치는 지역 농업의 집단화와 당 안팎의 비판자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 특징이었다.[1] 그는 농업 지역인 동프로이센의 대규모 산업화를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행동은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 그를 인기가 없게 만들었다.[1] 그러나, 농지 개선 프로젝트와 도로 건설에 집중하는 공공 자금 지원 비상 구호 프로그램을 통해 "에리히 코흐 계획"은 실업을 없앤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8월 16일, 코흐는 히틀러에게 동프로이센에서 실업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다.[4]

코흐의 산업화 계획은 국가 농민 지도자이자 농업부 장관이었던 리하르트 발터 다레와 갈등을 일으켰다. 신이교도적 농촌 낭만주의자였던 다레는 자신의 농업적인 동프로이센의 비전을 강요하고 싶어했다. 그의 "토지" 대표들이 코흐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자, 코흐는 그들을 체포했다.[5]

4. 4. 농업 정책 및 갈등

1928년 10월 코흐는 동프로이센의 ''가울라이터''(관구 지도자)가 되었고, 지방 의회에서 NSDAP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1] 1930년 9월부터 그는 동프로이센 지역의 ''국회'' 의원이었다.[1] 1933년 6월 2일 빌헬름 쿠처를 대신하여 동프로이센의 ''최고 의장''이 되었다(9월까지 대행).[1]

코흐의 동프로이센 통치는 지역 농업의 집단화 및 산업화를 추진하여 지역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1] 그러나, 농지 개선과 도로 건설에 집중하는 "에리히 코흐 계획"은 실업을 없앤 것으로 알려졌다. 1933년 8월 16일, 코흐는 히틀러에게 동프로이센에서 실업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고했다.[4]

코흐의 산업화 계획은 국가 농민 지도자이자 농업부 장관이었던 리하르트 발터 다레와 갈등을 일으켰다.[5] 신이교도적 농촌 낭만주의자였던 다레는 자신의 농업적인 동프로이센의 비전을 강요하고자 하였다. 그의 "토지" 대표들이 코흐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자, 코흐는 그들을 체포했다.[5]

5.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활동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코흐는 동프로이센을 포함하는 제1군관구(Wehrkreis)의 국방판무관(Reichsverteidigungskommissar)으로 임명되었다.[18] 1939년 10월 26일, 폴란드 침공이 끝난 후 그의 가우(Gau, 나치 독일의 행정구역)의 영토가 조정되었다.[18] 레기어룽스베지르크 서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에서 새로운 국가가우인 서프로이센으로 이전되었고, 나중에 단치히-서프로이센 국가가우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동프로이센은 레기어룽스베지르크 치헤나우(이전 치에하누프)로 보상받았다. 이 새로운 지역은 비스툴라강과 나레프강 사이에 대략 위치해 있었다.

1940년 3월, 전후 역사 지역 사무소(Landesstelle fur Nachkriegsgeschichte)의 국장이었던 테오도르 시더는 에리히 코흐 가울라이터에게 동프로이센에 병합된 영토에 대한 연구와 관련된 상세한 계획을 제시했는데, 코흐는 이 지역의 정치, 사회, 민족적 상황을 알고 싶어했다.[6] 시더는 코흐에게 두 개의 보고서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나치의 학살 및 정착 정책과 관련이 있으며, 독일 민족명부(Volksliste)에서 유대인과 "슬라브" 배우자를 민족 독일인과 분리하는 근거를 제공한 19세기 말에 실시된 해당 지역의 인구 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6]

1942년 가울라이터 에리히 코흐는 병합된 폴란드에서의 나치 작전에 대한 도움에 대해 테오도르 시더에게 감사를 표하며, " 'Landesstelle Ostpreußen für Nachkriegsgeschichte'의 국장으로서 귀하는 폴란드인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료를 제공했으며, 오늘날 레기어룽스베지르케 치헤나우와 비알리스토크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데 계속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라고 썼다.[7]

소련 침공 직후, 코흐는 1941년 8월 1일에 "민간 판무관"(Zivilkommissar)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비알리스토크구의 민간 행정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9월 1일, 코흐는 게슈타포질서경찰(Ordnungspolizei)을 통제하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이 되었다. 그의 관할 구역은 이제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확장되었으며,[8] 독일계, 폴란드계, 벨라루스계 및 우크라이나계 지역을 포함했다. 그는 국가판무관으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치 관료제의 다른 요소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점령 동부 지역 국가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41년 12월 히틀러에게 코흐의 자율적인 행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다.[9]

코흐가 국가판무관으로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지역 학교를 폐쇄하고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학교가 필요 없다.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독일인 주인이 가르칠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었다.[1] 그의 잔혹함은 "내 식탁에 앉을 만한 우크라이나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를 쏴야 한다."라는 그의 발언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10] 코흐는 노동 배치를 위한 전권 대리(Generalbevollmächtigter für den Arbeitseinsatz)인 프리츠 자우켈과 함께 독일 제국에 강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 유대인을 박해했다. 그의 잔혹한 행동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의 나치 통치는 증가하는 게릴라전 봉기로 혼란을 겪었다.[1]

독일인을 우월 민족(Herrenvolk)으로 묘사하는 진술은 다양한 계급의 나치 관리들에게서 나왔다. 특히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 코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4년 9월 21일, 코흐는 힌리히 로제를 이어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이 되어 발트해 연안 국가에서 나치 행정을 감독했다. 1944년 10월 13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수도이자 이 지역의 중심지인 리가가 소련군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코흐는 1944년 11월 25일 동프로이센의 국민돌격대(Volkssturm)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붉은 군대가 그의 지역으로 진격해오자, 코흐는 동프로이센으로부터의 유사한 탈출을 시도한 국방군(Wehrmacht)을 비난한 후 1월 말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처음 탈출했다. 그는 그 후 훨씬 더 안전한 필라우로 돌아와 "해군 라디오 통신을 사용하여 해상 탈출을 조직하는 훌륭한 쇼를 연출한 후" [12], 1945년 4월 23일 이 쇄빙선(icebreaker) ''오스트프로이센''을 타고 이 발트해 항구를 통해 다시 탈출했다. 필라우에서 헬 반도, 뤼겐, 코펜하겐을 거쳐 플렌스부르크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U보트가 그를 남아메리카로 데려가기를 요구했지만 실패한 후 숨어 있었다.[13] 그는 1949년 5월 함부르크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5. 1. 국방 위원 임명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코흐는 동프로이센을 포함하는 제1군관구(Wehrkreis)의 국방판무관(Reichsverteidigungskommissar)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10월 26일, 폴란드 침공이 끝난 후 그의 가우(Gau, 나치 독일의 행정구역)의 영토가 조정되었다. 레기어룽스베지르크 서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에서 새로운 국가가우인 서프로이센으로 이전되었고, 나중에 단치히-서프로이센 국가가우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동프로이센은 레기어룽스베지르크 치헤나우(이전 치에하누프)로 보상받았다. 이 새로운 지역은 비스툴라강과 나레프강 사이에 대략 위치해 있었다.

1940년 3월, 전후 역사 지역 사무소(Landesstelle fur Nachkriegsgeschichte)의 국장이었던 테오도르 시더는 에리히 코흐 가울라이터에게 동프로이센에 병합된 영토에 대한 연구와 관련된 상세한 계획을 제시했는데, 코흐는 이 지역의 정치, 사회, 민족적 상황을 알고 싶어했다.[6] 시더는 코흐에게 두 개의 보고서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나치의 학살 및 정착 정책과 관련이 있으며, 독일 민족명부(Volksliste)에서 유대인과 "슬라브" 배우자를 민족 독일인과 분리하는 근거를 제공한 19세기 말에 실시된 해당 지역의 인구 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6]

1942년 가울라이터 에리히 코흐는 병합된 폴란드에서의 나치 작전에 대한 도움에 대해 테오도르 시더에게 감사를 표하며, " 'Landesstelle Ostpreußen für Nachkriegsgeschichte'의 국장으로서 귀하는 폴란드인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료를 제공했으며, 오늘날 레기어룽스베지르케 치헤나우와 비알리스토크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데 계속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라고 썼다.[7]

5. 2. 폴란드 침공 이후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코흐는 동프로이센을 포함하는 제1군관구(Wehrkreis)의 국방판무관(Reichsverteidigungskommissar)으로 임명되었다.[6] 폴란드 침공이 끝난 후 1939년 10월 26일, 그의 가우(Gau, 나치 독일의 행정구역) 영토가 조정되면서 레기어룽스베지르크 서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에서 새로운 국가가우인 서프로이센으로 이전되었고, 나중에 단치히-서프로이센 국가가우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동프로이센은 레기어룽스베지르크 치헤나우(이전 치에하누프)로 보상받았으며, 이 새로운 지역은 비스툴라강과 나레프강 사이에 대략 위치해 있었다.[6]

1940년 3월, 전후 역사 지역 사무소(Landesstelle fur Nachkriegsgeschichte)의 국장이었던 테오도르 시더는 에리히 코흐 가울라이터에게 동프로이센에 병합된 영토에 대한 연구와 관련된 상세한 계획을 제시했는데, 코흐는 이 지역의 정치, 사회, 민족적 상황을 알고 싶어했다.[6] 시더는 코흐에게 두 개의 보고서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나치의 학살 및 정착 정책과 관련이 있으며, 독일 민족명부(Volksliste)에서 유대인과 "슬라브" 배우자를 민족 독일인과 분리하는 근거를 제공한 19세기 말에 실시된 해당 지역의 인구 조사가 포함되어 있었다.[6] 1942년 가울라이터 에리히 코흐는 병합된 폴란드에서의 나치 작전에 대한 도움에 대해 테오도르 시더에게 감사를 표하며, " 'Landesstelle Ostpreußen für Nachkriegsgeschichte'의 국장으로서 귀하는 폴란드인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료를 제공했으며, 오늘날 레기어룽스베지르케 치헤나우와 비알리스토크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데 계속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라고 썼다.[7]

소련 침공 직후, 코흐는 1941년 8월 1일에 "민간 판무관"(Zivilkommissar)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비알리스토크구의 민간 행정 책임자가 되었다.[7] 1941년 9월 1일, 코흐는 게슈타포질서경찰(Ordnungspolizei)을 통제하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이 되었다.[8] 그의 관할 구역은 이제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확장되었으며, 독일계, 폴란드계, 벨라루스계 및 우크라이나계 지역을 포함했다.[8] 그는 국가판무관으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치 관료제의 다른 요소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점령 동부 지역 국가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41년 12월 히틀러에게 코흐의 자율적인 행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다.[9]

코흐가 국가판무관으로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지역 학교를 폐쇄하고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학교가 필요 없다.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독일인 주인이 가르칠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었다.[1] 그의 잔혹함은 "내 식탁에 앉을 만한 우크라이나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를 쏴야 한다."라는 그의 발언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10] 코흐는 노동 배치를 위한 전권 대리(Generalbevollmächtigter für den Arbeitseinsatz)인 프리츠 자우켈과 함께 독일 제국에 강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 유대인을 박해했다.[1] 그의 잔혹한 행동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의 나치 통치는 증가하는 게릴라전(partisan) 봉기로 혼란을 겪었다.[1]

독일인을 우월 민족(Herrenvolk)으로 묘사하는 진술은 다양한 계급의 나치 관리들에게서 나왔다. 특히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 코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4년 9월 21일, 코흐는 힌리히 로제를 이어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이 되어 발트해 연안 국가에서 나치 행정을 감독했다. 1944년 10월 13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수도이자 이 지역의 중심지인 리가가 소련군에 의해 재탈환되었다.[12] 코흐는 1944년 11월 25일 동프로이센의 국민돌격대(Volkssturm)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12] 1945년, 붉은 군대가 그의 지역으로 진격해오자, 코흐는 동프로이센으로부터의 유사한 탈출을 시도한 국방군(Wehrmacht)을 비난한 후 1월 말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처음 탈출했다. 그는 그 후 훨씬 더 안전한 필라우로 돌아와 "해군 라디오 통신을 사용하여 해상 탈출을 조직하는 훌륭한 쇼를 연출한 후" [12], 1945년 4월 23일 이 쇄빙선(icebreaker) ''오스트프로이센''을 타고 이 발트해 항구를 통해 다시 탈출했다. 필라우에서 헬 반도, 뤼겐, 코펜하겐을 거쳐 플렌스부르크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U보트가 그를 남아메리카로 데려가기를 요구했지만 실패한 후 숨어 있었다.[13] 그는 1949년 5월 함부르크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13]

5. 3. 비알리스토크 민간 행정 책임자



소련 침공 직후, 코흐는 1941년 8월 1일에 "민간 판무관"(Zivilkommissar)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비알리스토크구의 민간 행정 책임자가 되었다.[6] 1940년 3월, 테오도르 시더는 동프로이센에 병합된 영토에 대한 연구와 관련된 상세한 계획을 코흐에게 제시했고, 코흐는 이 지역의 정치, 사회, 민족적 상황을 알고 싶어했다. 시더는 코흐에게 두 개의 보고서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나치의 학살 및 정착 정책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2년 가울라이터 에리히 코흐는 테오도르 시더에게 병합된 폴란드에서의 나치 작전에 대한 도움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귀하는 폴란드인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료를 제공했으며, 오늘날 레기어룽스베지르케 치헤나우와 비알리스토크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데 계속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라고 썼다.[7]

5. 4.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



1941년 9월 1일, 코흐는 게슈타포질서경찰을 통제하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이 되었다. 그의 관할 구역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확장되었으며,[8] 독일계, 폴란드계, 벨라루스계 및 우크라이나계 지역을 포함했다. 그는 국가판무관으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치 관료제의 다른 요소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점령 동부 지역 국가부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41년 12월 히틀러에게 코흐의 자율적인 행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다.[9]

코흐가 국가판무관으로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지역 학교를 폐쇄하고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학교가 필요 없다.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독일인 주인이 가르칠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었다.[1] 그의 잔혹함은 "내 식탁에 앉을 만한 우크라이나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를 쏴야 한다."라는 그의 발언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10] 코흐는 노동 배치를 위한 전권 대리(Generalbevollmächtigter für den Arbeitseinsatz)인 프리츠 자우켈과 함께 독일 제국에 강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 유대인을 박해했다. 그의 잔혹한 행동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의 나치 통치는 증가하는 게릴라전 봉기로 혼란을 겪었다.[1]

독일인을 우월 민족(Herrenvolk)으로 묘사하는 진술은 다양한 계급의 나치 관리들에게서 나왔다. 특히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 코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5. 4. 1. 우크라이나 통치



1941년 9월 1일, 코흐는 게슈타포질서경찰을 통제하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이 되었다. 그의 관할 구역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확장되었으며,[8] 독일계, 폴란드계, 벨라루스계 및 우크라이나계 지역을 포함했다. 그는 국가판무관으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치 관료제의 다른 요소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점령 동부 지역 국가부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41년 12월 히틀러에게 코흐의 자율적인 행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다.[9]

코흐가 국가판무관으로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지역 학교를 폐쇄하고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학교가 필요 없다.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독일인 주인이 가르칠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었다.[1] 그의 잔혹함은 "내 식탁에 앉을 만한 우크라이나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를 쏴야 한다."라는 그의 발언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10] 코흐는 노동 배치를 위한 전권 대리인 프리츠 자우켈과 함께 독일 제국에 강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 유대인을 박해했다. 그의 잔혹한 행동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의 나치 통치는 증가하는 게릴라전 봉기로 혼란을 겪었다.[1]

독일인을 우월 민족(Herrenvolk)으로 묘사하는 진술은 다양한 계급의 나치 관리들에게서 나왔다. 특히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 코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5. 4. 2. 로젠베르크와의 갈등

로젠베르크는 1941년 12월 히틀러에게 점령 동부 지역 국가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의 책임자로서,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이었던 코흐의 자율적인 행동에 대해 불만을 표명했다.[9] 코흐는 국가판무관으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치 관료제의 다른 요소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5. 5.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

에리히 코흐는 1941년 9월 1일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으로 임명되어 게슈타포질서경찰(Ordnungspolizei)을 통제하며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8] 이 지역은 독일계, 폴란드계, 벨라루스계, 우크라이나계 지역을 포함했다.[8] 그는 국가판무관으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완전한 권한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점령 동부 지역 국가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비롯한 나치 관료들과 갈등을 빚었다.[9] 로젠베르크는 1941년 12월 히틀러에게 코흐의 자율적인 행동에 대해 불만을 표명했다.[9]

코흐는 우크라이나인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했다. 그는 지역 학교를 폐쇄하며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학교가 필요 없다.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독일인 주인이 가르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1] 또한 "내 식탁에 앉을 만한 우크라이나인을 만난다면, 나는 그를 쏴야 한다."라고 발언할 정도로 잔혹함을 드러냈다.[10] 코흐는 프리츠 자우켈과 협력하여 독일 제국에 강제 노동력을 제공했으며,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 유대인을 박해했다.[1] 그의 잔혹한 통치는 우크라이나에서 게릴라전(partisan) 봉기를 초래했다.[1] 코흐는 1943년 3월 5일에 "우리는 여기 인구보다 천 배나 더 가치있는, 인종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독일인 노동자임을 기억해야 하는 우월 민족이다."라고 발언했다.[11]

1944년 9월 21일, 코흐는 힌리히 로제의 뒤를 이어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이 되어 발트해 연안 국가의 나치 행정을 감독했다. 1944년 10월 13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수도인 리가가 소련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5. 6. 국민돌격대 지휘

1944년 11월 25일, 에리히 코흐는 동프로이센 국민돌격대(Volkssturm)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12] 1945년 붉은 군대가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하자, 코흐는 1월 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베를린으로 탈출했다. 그는 국방군(Wehrmacht)이 동프로이센에서 탈출을 시도한 것을 비난했다.[12] 이후 그는 필라우로 돌아가 해상 탈출을 조직하고,[12] 1945년 4월 23일 쇄빙선 ''오스트프로이센''을 타고 발트해를 통해 탈출했다.[13] 헬 반도, 뤼겐, 코펜하겐을 거쳐 플렌스부르크에 도착한 그는 U보트를 통해 남아메리카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은신했다.[13]

5. 7. 독일 패전과 도피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코흐는 동프로이센을 포함하는 제1군관구(Wehrkreis)의 국방판무관(Reichsverteidigungskommissar)으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침공이 끝난 후, 코흐의 가우(Gau, 나치 독일의 행정구역)의 영토가 조정되어, 레기어룽스베지르크 서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에서 새로운 국가가우인 서프로이센으로 이전되었고, 나중에 단치히-서프로이센 국가가우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동프로이센은 레기어룽스베지르크 치헤나우(이전 치에하누프)로 보상받았으며, 이 새로운 지역은 비스툴라강과 나레프강 사이에 대략 위치해 있었다.

1940년 3월, 전후 역사 지역 사무소 국장이었던 테오도르 시더는 에리히 코흐에게 동프로이센에 병합된 영토에 대한 연구와 관련된 상세한 계획을 제시했으며, 코흐는 이 지역의 정치, 사회, 민족적 상황을 알고 싶어했다.[6] 시더는 코흐에게 두 개의 보고서를 보냈는데, 여기에는 나치의 학살 및 정착 정책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6] 1942년 가울라이터 에리히 코흐는 테오도르 시더에게 감사를 표했다.[7]

소련 침공 직후, 코흐는 1941년 8월 1일에 "민간 판무관"(Zivilkommissar)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비알리스토크구의 민간 행정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9월 1일, 코흐는 게슈타포질서경찰(Ordnungspolizei)을 통제하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Reichskommissar)이 되었다. 그의 관할 구역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확장되었으며,[8] 독일계, 폴란드계, 벨라루스계 및 우크라이나계 지역을 포함했다.[8] 점령 동부 지역 국가부(Reichsministerium für die besetzten Ostgebiete)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41년 12월 히틀러에게 코흐의 자율적인 행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다.[9]

코흐가 국가판무관으로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지역 학교를 폐쇄하고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학교가 필요 없다. 그들이 배워야 할 것은 독일인 주인이 가르칠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이었다.[1] 코흐는 노동 배치를 위한 전권 대리(Generalbevollmächtigter für den Arbeitseinsatz)인 프리츠 자우켈과 함께 독일 제국에 강제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 유대인을 박해했다.

코흐는 1943년 3월 5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4년 9월 21일, 코흐는 힌리히 로제를 이어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이 되어 발트해 연안 국가에서 나치 행정을 감독했다. 1944년 10월 13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수도이자 이 지역의 중심지인 리가가 소련군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코흐는 1944년 11월 25일 동프로이센의 국민돌격대(Volkssturm)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붉은 군대가 그의 지역으로 진격해오자, 코흐는 동프로이센으로부터의 유사한 탈출을 시도한 국방군(Wehrmacht)을 비난한 후 1월 말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처음 탈출했다.[12] 그는 그 후 훨씬 더 안전한 필라우로 돌아와 해상 탈출을 조직한 후,[12] 1945년 4월 23일 쇄빙선(icebreaker) ''오스트프로이센''을 타고 발트해 항구를 통해 다시 탈출했다.[13] 필라우에서 헬 반도, 뤼겐, 코펜하겐을 거쳐 플렌스부르크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U보트가 그를 남아메리카로 데려가기를 요구했지만 실패한 후 숨어 있었다.[13] 그는 1949년 5월 함부르크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

6. 체포, 재판 및 사망



코흐는 1949년 함부르크에서 영국군에게 체포되었다.[19] 소련은 코흐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영국 정부는 그를 폴란드에 인도하였다.[19] 1950년 1월 14일, 코흐는 바르샤바의 모코투프 감옥으로 넘겨졌고, 1958년 10월 19일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8년 동안 수감되었다.[14] 그는 40만 명의 폴란드인을 학살한 혐의로 전쟁 범죄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의 범죄에 대해서는 기소되지 않았다.

1959년 3월 9일, 바르샤바 지방 법원은 코흐에게 민간인 대량 학살을 계획, 준비 및 조직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코흐의 형은 건강 악화로 인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19]

많은 사람들은 코흐가 나치에 의해 약탈된 예술품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믿는다. 특히 레닌그라드 근처 차르스코예 셀로 궁전의 호박 방 행방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소련은 코흐가 1945년 초 동프로이센에서 독일 난민을 대피시키던 중 발트해에서 소련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한 ''빌헬름 구스틀로프'' 유람선에 호박 방의 일부를 숨기라고 명령했다고 믿었다.[14]

코흐는 1986년 쾨니히스베르크 역사에 관한 텔레비전 보고서에 출연하여 서독 기자들과 인터뷰했다. 그는 뉘우치지 않았으며, 쾨니히스베르크를 항복하지 않은 것은 "명예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후 90세의 나이로 폴란드에서 복역한 마지막 전쟁 범죄자로서 바르체보 감옥에서 자연사했고, 지역 감옥 묘지에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15]

6. 1. 체포 및 인도

소련은 코흐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영국 정부는 그를 폴란드 정부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1950년 1월 14일, 코흐는 영국에 의해 바르샤바의 모코투프 감옥으로 넘겨졌고, 1958년 10월 19일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8년 동안 수감되었다.[14] 그는 40만 명의 폴란드인을 학살한 혐의로 전쟁 범죄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의 범죄에 대해서는 기소되지 않았다.

1959년 3월 9일, 코흐는 바르샤바 지방 법원에서 민간인 대량 학살을 계획, 준비 및 조직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은 건강 악화로 인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14]

많은 사람들은 코흐가 나치에 의해 약탈된 예술품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믿는다. 특히 레닌그라드 근처 차르스코예 셀로 궁전의 호박 방 행방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소련은 코흐가 1945년 초 동프로이센에서 독일 난민을 대피시키던 중 발트해에서 소련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한 ''빌헬름 구스틀로프'' 유람선에 호박 방의 일부를 숨기라고 명령했다고 믿었다.[14]

코흐는 1986년 쾨니히스베르크 역사에 관한 텔레비전 보고서에 출연하여 서독 기자들과 인터뷰했다. 그는 뉘우치지 않았으며, 쾨니히스베르크를 항복하지 않은 것은 "명예의 문제"라고 주장했다.[15] 이후 90세의 나이로 폴란드에서 복역한 마지막 전쟁 범죄자로서 바르체보 감옥에서 자연사했고, 지역 감옥 묘지에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15]

6. 2. 재판 및 판결



소련은 코흐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영국 정부는 그를 공산주의 폴란드 정부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1950년 1월 14일, 영국은 코흐를 바르샤바의 모코투프 감옥으로 넘겼고, 1958년 10월 19일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8년 동안 수감되었다.[14] 그는 40만 명의 폴란드인을 학살한 혐의로 전쟁 범죄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의 범죄는 기소되지 않았다.

1959년 3월 9일, 바르샤바 지방 법원은 민간인 대량 학살을 계획, 준비 및 조직한 혐의로 코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형은 건강 악화로 인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14]

많은 사람들은 코흐가 살아남은 이유가 소련이 그가 전쟁 중 나치에 의해 약탈된 예술품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특히 코흐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해체된 레닌그라드 근처 차르스코예 셀로 궁전의 호박 방 행방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14] 소련은 코흐가 빌헬름 구스틀로프 유람선에 호박 방의 일부를 숨기라고 명령했다고 믿었으나,[14] 1950년대 소련 및 폴란드 잠수 팀의 인양 시도는 이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코흐는 1986년 쾨니히스베르크 역사에 관한 텔레비전 보고서에 출연하여 폴란드 감옥에서 서독 기자들과 인터뷰했다.[15] 그는 뉘우치지 않았으며, 쾨니히스베르크를 항복하지 않은 것은 "명예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90세의 나이로 폴란드 바르체보 감옥에서 자연사했으며, 지역 감옥 묘지에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15]

6. 3. 종신형 감형 및 사망

소련은 코흐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영국 정부는 그를 공산주의 폴란드 정부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1950년 1월 14일, 그는 영국에 의해 바르샤바의 모코투프 감옥으로 넘겨졌고, 1958년 10월 19일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8년 동안 그곳에 수감되었다.[14] 그는 40만 명의 폴란드인을 학살한 혐의로 전쟁 범죄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의 범죄에 대해서는 기소되지 않았다.[14]

이러한 범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은 그는 1959년 3월 9일 바르샤바 지방 법원에 의해 민간인 대량 학살을 계획, 준비 및 조직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14] 그의 형은 건강 악화로 인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소련이 그가 전쟁 중 나치에 의해 약탈된 예술품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믿는다.[14] 특히 코흐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해체된 레닌그라드 근처 차르스코예 셀로 궁전의 호박 방의 행방에 대한 정보로 인해 살아남았다고 믿는다.[14] 소련은 그가 이 유명한 방의 일부를 1945년 초 동 프로이센에서 독일 난민을 대피시키던 중 발트해에서 소련에 의해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한 ''빌헬름 구스틀로프'' 유람선에 숨기라고 명령했다고 믿었다.[14]

코흐는 1986년 쾨니히스베르크의 역사에 관한 텔레비전 보고서에 출연하여 폴란드 감옥에서 서독 기자들과 인터뷰했다.[15] 그는 끝까지 뉘우치지 않았으며, 쾨니히스베르크를 항복하지 않은 것은 "명예의 문제"라고 주장했다.[15] 그는 이후 90세의 나이로 폴란드에서 복역한 마지막 전쟁 범죄자로서 바르체보 감옥(구 동 프로이센의 바르텐부르크)에서 자연사했다. 그는 지역 감옥 묘지에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15]

7. 종교관

코흐는 공공연한 기독교 나치당 당원이었다.[16] 정치 경력 외에도 동프로이센 프로이센 개신교 연합 시노드의 선출된 의장이었다.[16] 동시대 사람들은 코흐를 bona fide 기독교인으로 여겼으며, 그의 교회 경력 성공은 루터교 신앙에 대한 그의 헌신 덕분이라고 보았다.[16]

코흐는 1943년에 공식적으로 교회 회원을 사임했지만, 전후 증언에서 "나는 나치 사상이 기본적인 프로이센-개신교적 태도와 마르틴 루터의 미완성된 종교 개혁에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16] 루터 탄생 450주년(1933년 11월 10일)에 코흐는 루터의 생일과 관련된 상황에 대해 연설했다. 그는 권력 장악이 신의 뜻에 따른 행위임을 암시하며, 루터와 히틀러 모두 신념을 위해 투쟁했다고 말했다.[16]

코흐가 로젠베르크 및 다레와 갈등을 겪은 데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5]

참조

[1] 서적 Who's who in Nazi Germany
[2] 서적 Hitler, A Study in Tyranny Harper & Row 1964
[3] 서적 Gauleiter: The Regional Leaders of the Nazi Party and Their Deputies, 1925–1945, Volume 2 (Georg Joel - Dr. Bernhard Rust) R. James Bender Publishing 2017
[4] 간행물 Fantasy and Reality in Nazi Work-Creation Programs, 1933-1936
[5] 서적 The Holy Reich - Nazi Conceptions of Christianity 1919-1945
[6] 서적 German scholars and ethnic cleansing, 1919-1945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06
[7] 서적 Macht - Geist - Wahn: Kontinuitäten deutschen Denkens Fischer Taschenbuch Verlag 1999
[8] 서적 The Holocaust in the Soviet Unio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2009-07
[9] 웹사이트 The Avalon Project : Nazi Conspiracy and Aggression Volume IV - Document No. 1517-PS http://avalon.law.ya[...] Avalon.law.yale.edu 2013-10-10
[10] 서적 Europe at War Macmillan 2006
[11]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William Shirer 2011-10-11
[12] 서적 The Fall of Berlin: 1945
[13] 서적 The End: The Defiance and Destruction of Hitler's Germany, 1944-1945
[14] 서적 Last Days of the Reich
[15] 뉴스 Serbski zbrodniarz będzie siedział w Polsce http://wiadomosci.ga[...] 2012-09
[16] 서적 The Holy Reich - Nazi conceptions of Christianity 1919-1945
[17] 문서 カーショー(2021年)
[18] 서적 Who's who in Nazi Germany
[19] 저널 Serbski zbrodniarz będzie siedział w Polsce http://wiadomosci.ga[...]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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