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독일 해군력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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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독일 해군력 경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과 독일 제국 간에 벌어진 해군력 증강 경쟁을 의미한다. 영국은 '양강 표준' 정책에 따라 세계 최대 해군력을 유지하며 해상 무역로를 보호하려 했고, 독일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주도하에 '존재 함대' 전략을 통해 영국 해군에 도전했다. 독일은 1898년부터 여러 차례 해군법을 통과시키며 전함 건조를 가속화했고, 이에 영국은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건조하며 대응했다. 1912년 독일은 군비 경쟁을 종식하려 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영국은 독일보다 더 많은 수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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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독일 해군력 경쟁 | |
---|---|
배경 | |
원인 | 독일의 해군력 확장 정책에 대한 영국의 우려 |
시기 | 1898년 ~ 1912년 |
관련 국가 | 영국 독일 |
주요 인물 | |
영국 | 존 아버스넛 피셔 윈스턴 처칠 |
독일 |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빌헬름 2세 |
경과 | |
주요 사건 | 드레드노트함 건조 경쟁 해군력 증강 경쟁 건함 경쟁 |
결과 | 양국 간 긴장 고조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 |
영향 | |
정치적 영향 | 영국과 독일 간의 관계 악화 유럽의 세력 균형 변화 |
군사적 영향 | 해군 기술 발전 가속화 |
관련 조약 및 협정 | |
관련 조약 | 헤이그 협약 (일부 조항) |
2. 배경
19세기 말, 영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다른 두 강대국의 해군력을 합친 것 이상의 규모를 유지하는 '양강 표준(Two-Power Standard)' 정책을 고수했다.[1] 당시 영국의 경제는 원자재 수입과 완제품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해상 교통로의 안전 확보는 국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군력 우위 상실은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독일 제국에서는 통일을 이끈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이 1890년 퇴임한 후 외교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비스마르크가 유지했던 유럽 내 세력 균형 외교와 달리,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러시아 제국과의 재보장 조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러시아는 프랑스와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는 유럽의 국제 관계를 재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미국의 해군 전략가 앨프레드 테이어 매한이 저술한 ''역사에 나타난 해양력의 중요성''은 양국의 해군 전략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2][3][4][5] 매한은 강력한 해군력, 특히 대규모 함대 간의 결전을 통한 해상 지배가 국가 번영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며, 특히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매한의 이론에 깊이 공감하여 해군력 증강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다.[6]
하지만 빌헬름 2세의 해군 확장 계획은 국회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황제는 1897년, 해군력 증강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을 해군성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티르피츠는 매한의 이론을 신봉하며, 독일이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영국에 필적하는 강력한 전투 함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 해군을 직접 격파하기보다는, 독일 함대를 공격할 경우 영국 역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의 강력한 해군, 즉 '존재 함대(Fleet in being)'를 건설하여 영국을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양보를 얻어내려는 전략을 구상했다.[7] 티르피츠와 당시 외무장관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이를 통해 영국이 전통적인 '화려한 고립' 정책을 포기하고 독일과의 협상에 나서거나 삼국 동맹에 가입하게 될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이러한 독일의 야심적인 해군력 증강 계획은 기존의 해양 강국이었던 영국과의 긴장을 고조시키며 본격적인 해군력 경쟁의 배경이 되었다.
2. 1. 영국의 해군 정책

영국은 전통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 해군은 적어도 다른 두 강대국 해군의 전력을 합친 것과 동등한 규모를 유지한다는 '양강 표준'(Two-Power Standard) 정책을 고수했다.[1] 이는 당시 영국 경제가 원자재 수입과 완제품 수출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필수적인 정책이었다. 1900년 기준으로 영국인이 섭취하는 열량의 58%가 해외 수입에 의존했으므로, 해상 교통로의 안전 확보는 식량 안보와 직결된 문제였다. 만약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상실한다면, 이는 곧바로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독일의 해군력 증강 시도가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영국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은 해군력이 영국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지 못할 경우,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군력과 국가 방어 능력에 대한 우려는 1871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까지 큰 인기를 끌었던 침략 문학 장르의 주요 소재가 되었으며, 당시 영국 사회의 여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2. 2. 독일의 부상과 도전
당시 영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해군력을 최소한 경쟁국 두 나라의 해군력을 합친 것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유지하는 양강 표준(Two-power standard)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1] 영국의 경제는 원자재 수입과 완제품 수출 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1900년에는 영국인이 섭취하는 칼로리의 58%가 해외 수입에 의존할 정도였다. 이는 해상 교통로 확보가 국가 생존에 필수적임을 의미했으며, 독일의 해군력 증강 이전부터 영국 지도자들은 해군력 우위 상실이 가져올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파국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1871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유행하며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친 침략 문학 장르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했다.
통일 독일의 초대 재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능숙한 외교술을 통해 독일이 특정 유럽 강대국에 얽매이지 않도록 세력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1890년 그가 물러난 후, 독일의 외교 정책은 삼국 동맹의 파트너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독일 외무성의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은 새로운 재상 레오 폰 카프리비를 설득하여,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맺었던 러시아 제국과의 재보장 조약을 1890년에 갱신하지 않도록 했다. 이는 결국 러시아가 동맹국을 찾아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체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홀슈타인은 재보장 조약 파기가 영국과의 관계 개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1890년부터 1897년까지 독일 외교는 친영국 노선과 친러시아 노선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지도부의 일관성 부족을 드러냈다.
1890년, 미국의 해군 장교이자 역사가인 앨프레드 테이어 매한은 현대 해군 전략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역사에 나타난 해양력의 중요성''을 출판했다.[2][3][4][5] 매한은 이 책에서 해양력이 강대국의 번영과 약소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결정적 요소이며, 해군력 우위를 확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대규모 함대 간의 결전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독일 제국 해군은 해상 교통로를 공격하는 통상 파괴 전략을 따르고 있었으나, 매한의 주장은 이후 독일과 영국의 해군 전략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매한의 저서는 루트비히 보르켄하겐 제독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어 모든 독일 해군 함정에 비치되었다. 특히 황제 빌헬름 2세는 1894년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매한의 이론을 적극 수용했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한 해군력 증강 예산을 국회에 요구했다.[6] 하지만 국회는 1895년 빌헬름 2세가 요청한 36척의 순양함 건조 예산 중 단 4척분만 승인했고, 이후 2년간은 어떠한 추가 예산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빌헬름 2세는 1897년, 극동 함대에서 근무하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을 불러들여 독일 제국 해군성의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티르피츠는 반영(反英) 민족주의 성향의 역사가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의 영향을 받았으며, 매한의 이론을 신봉하여 강력한 전투 함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미 1894년에 작성한 각서에서 "함대의 자연스러운 목적은 전략적 공세이다"라고 주장하며, 기존의 통상 파괴나 연안 방어 전략을 비판하고 독일이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세적인 해상 전투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1897년 6월 빌헬름 2세와의 첫 만남에서 티르피츠는 독일이 유럽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영국과의 해군력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 해군을 직접 격파하는 대신, 독일 해군을 공격할 경우 영국 자신도 심각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영국이 프랑스나 러시아 같은 다른 경쟁국들의 위협에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게 만들어 독일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으며, 매한이 제시한 "존재 함대(Fleet in being)" 개념의 변형이었다. 티르피츠는 영국 해군이 전 세계에 흩어져 식민지를 방어해야 하므로, 주력 함대가 헬리고랜드와 템스 강 사이의 북해에서 결전을 벌일 경우 독일에게 승산이 있다고 계산했다.[7] 티르피츠와 당시 외무장관이었으며 이후 재상이 된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이러한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영국이 독일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상에 나서게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영국이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 노선인 "화려한 고립"을 포기하고 삼국 동맹에 가입하게 될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2. 3.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의 역할
빌헬름 2세는 앨프레드 테이어 매한의 해양력 이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 해군력 증강을 추진했으나, 국회는 그의 해군 확장 계획에 필요한 예산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다.[6] 1895년 요청한 순양함 36척 중 단 4척만 승인되었고, 이후 2년간은 예산 지원이 전무했다. 이에 좌절한 빌헬름 2세는 1897년, 극동 함대에서 복무 중이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를 불러들여 독일 제국 해군성의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티르피츠는 반영국적 민족주의자인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의 영향을 받았으며, 매한의 이론을 신봉하여 강력한 전투 함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미 1894년에 작성한 각서를 통해 "함대의 자연스러운 목적은 전략적 공세"라고 주장하며, 기존의 통상 파괴나 연안 방어 전략을 비판하고 독일이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공세적인 해상 전투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897년 6월, 빌헬름 2세와의 첫 회담에서 티르피츠는 독일이 유럽 내 강대국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영국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국 해군을 직접 압도하기보다는, 독일 해군과의 충돌이 영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 다른 경쟁국들(프랑스, 러시아)의 위협에 취약해질 정도로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는 매한이 제시한 "존재 함대(Fleet in being)" 개념을 활용한 것으로, 영국 해군이 전 세계에 분산되어 있다는 점을 이용해 북해, 특히 헬리고랜드와 템스 강 사이 해역에서 결정적인 해전을 벌일 수 있다고 계산했다.[7]
티르피츠와 당시 외무부 국무장관이자 이후 재상이 되는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이러한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영국이 독일을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면, 영국이 결국 기존의 화려한 고립 정책을 포기하고 독일과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에 나서거나 심지어 삼국 동맹에 가입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3. 독일 해군법 (1898–1912)
빌헬름 2세의 해군력 증강에 대한 열망과 티르피츠 제독의 전략적 구상에 따라, 독일 제국 의회는 1898년, 1900년, 1906년, 1908년, 1912년에 걸쳐 총 다섯 차례의 함대법을 통과시켰다. 이를 통해 독일 공해 함대는 대대적인 확장을 이루게 되었다. 독일의 목표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 해군 전력의 3분의 2에 달하는 함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8]
첫 번째 해군법은 빌헬름 2세, 티르피츠, 그리고 당시 총리였던 뷜로프가 주도한 광범위한 로비와 홍보 활동 끝에 1898년 3월 통과되었다. 이 법은 향후 7년간 11척의 전함 건조 예산을 확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국은 초기에는 이 법안에 크게 우려하지 않았는데, 독일 해군력 증강이 영국의 전통적인 '두 배 우위 정책'(Two-power standard, 세계 2, 3위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강력한 해군력 유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르피츠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898년 11월부터 함대 규모를 전함과 장갑순양함을 포함하여 총 45척으로 두 배 가까이 늘리는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1899년 9월 빌헬름 2세에게 이를 보고했다. 이 계획이 추진되던 시기는 제2차 보어 전쟁 발발과 영국이 남아프리카 연안에서 독일 증기선을 나포하는 사건이 겹치면서 독일 내 반영 감정이 고조되던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국 의회는 1900년 6월 두 번째 해군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세 차례의 해군법이 더 통과되면서 독일의 해군력 증강은 계속되었다.
3. 1.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등장

독일의 제2차 해군법 통과는 영국 정책 입안자들의 우려를 키웠다. 1902년, 당시 제1 해군 경이었던 셀본 백작은 독일 해군이 영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고 있다고 내각에 경고했다. 1904년 재키 피셔 제독이 제1 해군 경으로 임명되면서 영국 해군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피셔 제독은 영국 해군력의 대부분을 본국 근해로 재배치하는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또한, 그는 새로운 형태의 강력한 전함, 즉 드레드노트급 전함 설계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는 특히 1905년 5월 쓰시마 해전 이후 해전의 미래로 여겨졌던 거함거포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 결과, HMS 드레드노트는 건조 승인 후 불과 14개월 만인 1906년 2월에 진수되었다.[9] 해군 군함 연감인 ''제인 해군 군함 목록''은 HMS 드레드노트 한 척이 기존 전함 2~3척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1905년 초, 영국 주재 독일 해군 무관은 티르피츠 제독에게 영국이 신형 전함을 계획하고 있음을 보고했다. 티르피츠는 그해 여름 참모들과 논의 끝에 가을에는 독일 역시 영국의 해군력 증강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주목할 점은 당시 독일 제국의 의사 결정 과정이 일관성이 부족하여, 티르피츠가 총리, 외무부, 재무부 등 주요 부서나 다른 해군 기관들과 충분한 협의 없이 이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다. 그는 제2차 해군법보다 예산을 35% 증액하여 매년 드레드노트급 전함 2척과 장갑 순양함 1척 건조를 목표로 하는 추가 해군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재정 부담 증가와 증세 문제로 인해 정치권 전반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제1차 모로코 위기 이후 1906년 4월 알헤시라스 회의가 마무리되면서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독일 내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었고, 이는 법안 통과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제3차 해군법은 1906년 5월 비교적 쉽게 통과되었다.
빌헬름 2세와 티르피츠를 비롯한 독일 지도부는 영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프랑스, 러시아와 연계하여 독일을 포위하려는 시도로 해석했다. 티르피츠는 영국이 값비싼 드레드노트와 장갑 순양함을 건조하는 것은 실수이며, 독일이 주저 없이 이를 따라잡으면 영국이 자신들의 판단 착오를 깨달을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독일 지도부는 1807년 코펜하겐 해전처럼 영국 해군이 기습 공격으로 독일 함대를 무력화시키는 소위 '코펜하겐식 공격'에 대한 불안감을 점점 더 크게 느꼈다. 실제로 1904년 12월 러일 전쟁의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이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가 직접 나서 빌헬름 황제와 고위 관리들에게 영국은 전쟁 의사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 국방비 증액에 반대하고 평화 외교를 주장했던 좌파 성향의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우익 세력의 비판이 거세지는 등 독일 내 민족주의 정서도 함께 고조되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1905년부터 피셔 제독이 독일 해안을 봉쇄하는 전쟁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고, 이는 이후 영국의 핵심 해군 전략으로 자리 잡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실행에 옮겨졌다.[10] 1906년 피셔 제독은 독일을 "유일한 적"으로 규정하며, 영국 해군이 독일 해안에서 불과 몇 시간 거리에 독일 해군의 두 배에 달하는 강력한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이러한 기조는 영국 외무부에도 반영되었다. 1907년 1월 1일, 외무부의 아이르 크로는 외무 장관 에드워드 그레이에게 제출한 각서에서 독일의 유럽 패권 추구 시도에 강력히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로는 독일의 행동이 명확한 전략 없이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그 의도가 영국의 국가 안보와 무관하지 않다고 분석하며 적극적인 견제를 주문했다. 이 각서는 이후 영국의 대독일 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3. 2. 4차 해군법 (1908년)

1908년 3월, 티르피츠는 네 번째 해군 법안, 즉 두 번째 추가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향후 4년간 신형 전함 건조 속도를 연간 3척에서 4척으로 늘리고, 그 이후에는 연간 3척 수준으로 안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안이 계획대로 시행되었다면, 독일은 1914년에 총 21척의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보유하게 될 예정이었다. 티르피츠는 영국이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크게 경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해서 가정했으며,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추가 법안이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가능한 한 작고 무해하게 보이도록" 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위기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군사 자금 조달 책임을 맡고 있던 총리 뷜로프는 티르피츠의 전략이 막대한 비용을 초래하고 독일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킨다고 판단하여 문제 삼기 시작했다. 실제로 독일의 국가 부채는 1900년과 1908년 사이에 두 배로 증가했으며,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이 군대에 투입되고 있었다. 뷜로프는 독일이 유럽 최대 육군과 세계 2위 해군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편, 런던 주재 독일 대사 파울 메테르니히 역시 해군 증강이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보고했지만, 티르피츠는 영국과의 갈등이 해군 경쟁보다는 경제적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티르피츠는 또한 독일이 해군력 증강 계획에 이미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매몰 비용) 중단할 수 없으며, 해군 증강을 지지하는 국내 정치 세력이 군비 경쟁 중단 시 예측 불가능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늘어나는 예산 적자 문제 해결을 위해 증세를 시도했으나 황제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국회의 반대에 부딪힌 뷜로프는 1909년 7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해군력 증강을 둘러싼 독일 내부의 갈등과 재정적 부담이 심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 영국의 대응
독일의 1908년 해군 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 영국은 대체로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군과 정부 일부에서는 잠재적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1907년 12월 해군성은 오히려 다음 해 전함 건조 속도를 드레드노트 1척과 장갑 순양함 1척으로 줄이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1908년 5월 H. H. 아스퀴스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 정부가 사회 복지 프로그램 지출을 늘리고 전반적인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정책 우선순위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8년 독일의 새 해군법 통과 이후 여름부터 영국 내 여론과 정부의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 독일의 해군력 증강이 영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전의 소극적인 태도는 급격히 변화했다. 이는 이후 영국 내에서 격렬한 정치적 논쟁을 촉발하고, 결국 대규모 해군력 증강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결정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4. 1. 해군 재편성과 드레드노트 건조
독일의 제2차 해군법 통과는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큰 우려를 안겨주었다. 1902년, 당시 제1 해군 경이었던 셀본 백작은 독일 해군이 영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건설되고 있다는 의견을 내각에 전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4년, 존 피셔 제독이 제1 해군 경으로 임명되면서 영국 해군은 대대적인 재편성을 맞이했다. 피셔 제독은 영국 해군력의 대부분을 본국 근해로 집중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다. 또한, 1905년 쓰시마 해전 이후 해전의 미래로 떠오른 새로운 개념의 초(超)전함 설계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결과, HMS ''드레드노트''는 건조 승인 후 불과 14개월 만인 1906년 2월에 진수되었다.[9] 당시 해군 군함 연감인 ''제인 해군 군함 목록''은 HMS ''드레드노트'' 한 척이 기존 전함 2~3척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영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독일에 즉각 감지되었다. 1905년 초, 영국 주재 독일 해군 무관은 영국이 신형 전함을 계획 중이라고 보고했다. 같은 해 여름, 티르피츠 제독은 참모들과 논의를 거쳐 가을에는 영국의 건함 계획에 맞대응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제국의 의사 결정 과정은 일관성이 부족하여, 티르피츠는 총리, 외무부, 재무부 등 다른 주요 부서와 충분한 협의 없이 이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제2차 해군법보다 예산을 35% 증액하여 매년 드레드노트 2척과 장갑 순양함 1척 건조를 목표로 하는 추가 해군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재정 부담 증가와 증세에 대한 반발로 인해 정치권 전반에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제1차 모로코 위기 이후 열린 알헤시라스 회의(1906년 4월 종료)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독일 내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고, 제3차 해군법은 1906년 5월 비교적 쉽게 통과되었다.
빌헬름 2세와 티르피츠를 비롯한 독일 지도자들은 영국의 움직임을 프랑스, 러시아와 연계하여 독일을 포위하려는 시도로 해석했다. 티르피츠는 영국이 값비싼 드레드노트급 함선 건조 경쟁을 시작한 것을 실수로 여겼으며, 독일이 주저 없이 따라붙는다면 영국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달을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 독일 지도부는 1807년 코펜하겐 해전처럼 영국 해군이 기습 공격으로 독일 함대를 무력화시키는 '코펜하겐식 공격'에 대한 불안감을 키워갔다. 러일 전쟁 중이던 1904년 12월에는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이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가 직접 나서 빌헬름 2세와 고위 관리들을 안심시켜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불안감 속에서, 국방비 증액에 반대하고 평화적 외교를 주장했던 좌파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한 우익의 비판이 거세지는 등 독일 내 민족주의 정서도 고조되었다.
1905년부터 존 피셔 제독은 독일 해안을 봉쇄하는 전쟁 계획을 구체화했으며, 이는 이후 영국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 실행되었다.[10] 1906년 피셔는 독일을 "유일한 적"으로 규정하고, 영국 해군이 독일 해안에서 불과 몇 시간 거리에 독일 해군의 두 배에 달하는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11] 영국 외무부의 아이르 크로는 1907년 1월 1일,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에게 제출한 각서를 통해 독일의 유럽 패권 추구에 강력히 맞설 것을 촉구했다. 그는 독일의 행동이 혼란스러운 전략의 결과일 수 있으나, 그 의도가 무엇이든 영국의 국가 안보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1908년 해군 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 영국은 대체로 독일의 해군력 증강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군과 정부 일부에서는 잠재적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1907년 12월 영국 해군성은 오히려 다음 해 전함 건조 속도를 드레드노트 1척과 장갑 순양함 1척으로 줄이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1908년 5월 H. H. 아스퀴스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 정부가 사회 복지 프로그램 지출을 늘리고 전반적인 정부 지출을 줄이려는 정책 우선순위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8년 독일의 새 해군법 통과 이후 여름부터 영국 내 여론과 정부의 우려가 커졌다.

1908년 8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는 조카인 빌헬름 2세를 크론베르크에서 만났다. 그는 영국의 우려 사항을 담은 문서를 준비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해칠 것을 염려해 해군력 증강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 빌헬름 2세는 동행한 영국 외무부 차관 찰스 하딩에게 양국 관계가 매우 좋다고 말했지만, 하딩은 정중하게 반박하며 독일의 해군력 증강에 대한 영국의 우려가 결국 자유당 정부로 하여금 해군력 확장을 추진하게 만들어 양국 간 긴장을 고조시키는 군비 경쟁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빌헬름 2세는 영국의 우려는 근거가 없으며 독일의 해군법이 양국 해군력 균형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날카롭게 반박했다. 결국 회담에서는 아무런 해결책도 나오지 않았고, 빌헬름 2세는 오히려 영국 측에 독일의 입장을 납득시켰다고 믿으며 자리를 떴다.
이후 일련의 사건들은 영국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1908년 가을, 베를린 주재 영국 해군 무관은 독일이 예정보다 더 많은 전함을 건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는 사실 독일 조선업체 시카우-베르케가 단치히(현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 해고를 피하기 위해 1909년 건조 예정 물량의 조기 계약을 정부에 요청했던 것에서 비롯된 오해였다. 10월 28일에는 영국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빌헬름 2세와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며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이 발생했다. ''텔레그래프''는 기사 게재 전 빌헬름 2세에게 승인을 요청했고, 그는 다시 뷜로프 재상에게 검토를 넘겼으나 제대로 된 확인 없이 기사가 나간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서 빌헬름 2세는 영국이 자신들의 호의를 몰라주고 독일의 해군력 증강이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영국인들이 "미친 토끼처럼 미쳤다"고 발언하는 등 자기 연민과 비난을 동시에 쏟아냈다. 이 사건으로 영국에서는 빌헬름 2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여론을 조작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의심이 커졌다. 독일 내에서도 지도자의 경솔한 발언에 대한 경악, 영국과의 우호 표명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분노, 황제에 대한 의회 통제 강화를 요구하는 좌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사건으로 빌헬름 2세와 황실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황제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빌헬름 2세는 뷜로프가 기사 게재를 막지 못한 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이는 1909년 7월 뷜로프의 사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thumb''에 실린 해군력 경쟁을 벌이는 5개국(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일본)을 묘사한 만화. 카이저는 흰색 옷을 입고 있다.]]
독일의 1908년 해군법 통과 이후, 영국 해군성은 기존의 감축 계획을 폐기하고 1908년 12월 최소 6척의 드레드노트를 추가 건조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내각에서는 재무부 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상무부 장관 윈스턴 처칠을 중심으로 비용 문제를 들어 반대했다. 이들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이 자유당이 추진하던 자유주의 복지 개혁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로이드 조지는 해군 예산을 약 3800만파운드 증액하는 안에 대해 자유당 의원들이 반발할 것이라고 아스퀴스 총리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반면, 보수당 야당, 해군 리그, 그리고 영국의 무기 산업계는 해군력 증강을 강력히 지지했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에드워드 7세 국왕까지 8척 추가 건조를 지지하고 나섰다. 당시 보수당 의원이 내건 "우리는 8척을 원하고, 기다릴 수 없다!(We want eight and we won't wait!)"는 구호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12]
해군력 증강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에 부딪힌 아스퀴스 총리는 1909년 2월, 다음 회계 연도에 4척의 드레드노트를 건조하고, 필요하다면 1910년 봄까지 4척을 추가 건조하는 타협안을 마련했다. 자유당의 지지 하에 정부는 보수당이 제기한 불신임 결의안을 부결시켰다. 로이드 조지는 1909년 4월 말, 추가 드레드노트 건조 예산을 포함한 "인민 예산"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예산안은 소득과 부의 재분배 조치에 반발한 귀족원에 의해 1909년 11월 거부되었다. 이에 아스퀴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1910년 1월 총선을 실시했다. 선거 결과 자유당 정부는 과반수 의석을 상실했지만 아일랜드 의회당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유지했다. 총선 직후 귀족원은 드레드노트 건조 예산이 포함된 인민 예산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고, 예산안은 1910년 4월 최종 통과되어 영국의 군비 경쟁 참여를 본격화했다.
4. 2. 정치적, 사회적 반응
독일의 1908년 해군 법안 이전까지 영국은 대체로 해군력 증강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지만, 군과 정부 일부에서는 이미 잠재적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다. 1907년 12월, 해군성은 다음 해 전함 건조 속도를 드레드노트 1척과 장갑 순양함 1척으로 줄이는 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1908년 5월 H. H. 아스퀴스 총리가 이끄는 자유당 정부가 사회 프로그램 지출을 늘리고 정부 지출 전반을 줄이려던 우선순위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1908년 독일 해군 법안이 통과되자 여름부터 영국 대중과 정부 내에서 우려가 커지기 시작했다.1908년 8월, 에드워드 7세 국왕은 조카인 빌헬름 2세를 크론베르크에서 만났다. 그는 영국의 우려를 담은 문서를 받았지만, 관계를 고려해 해군 지출 문제를 직접 제기하지는 않았다. 빌헬름 2세는 외무부 차관 찰스 하딩에게 양국 관계가 매우 좋다고 말했지만, 하딩은 정중히 반박하며 독일의 해군력 증강이 영국의 우려를 낳고 결국 해군 경쟁으로 이어져 양국 간 긴장을 고조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의 해군 법안이 위협적이지 않다며 날카롭게 반응했고, 결국 이 만남에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빌헬름 2세는 오히려 영국이 독일의 입장을 이해했다고 잘못 판단하고 돌아갔다.
영국의 긴장감은 일련의 사건들로 더욱 고조되었다. 1908년 가을, 베를린 주재 영국 해군 무관은 독일이 추가 전함을 건조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는 사실 조선업체 시카우-베르케가 단치히 (현재: 그단스크)의 노동자 해고를 피하기 위해 1909년 건조 예정이던 선박 계약을 정부에 앞당겨 요청한 것이었다. 이어 10월 28일,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빌헬름 2세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빌헬름 2세의 승인을 거쳤으나, 독일 정부 내 의사소통 문제로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채 발행되었다.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란에 따르면, 기사에서 빌헬름 2세는 "자기 연민과 비난"을 동시에 드러내며, 영국이 자신을 좋은 친구로 여기지 않고 독일의 해군력 증강이 일본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며 영국을 "미친 토끼처럼 미쳤다"고 비난했다. 이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은 영국에서 빌헬름 2세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영국 여론을 조작하려는 음모의 일부라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내에서도 지도자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한 것에 대한 충격, 민족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분노, 제국 의회의 권한 강화 요구 등 파장이 컸다. 이 사건으로 빌헬름 2세와 왕위는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빌헬름 2세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으며, 결국 1909년 7월 뷜로프 재상의 사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해군 법안 발표 이후, 해군성은 기존의 감축 계획을 철회하고 1908년 12월, 최소 6척의 드레드노트 추가 건조를 제안했다. 그러나 자유당 내각에서는 비용 문제가 큰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재무부 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상무부 장관 윈스턴 처칠은 과도한 군사 지출이 자유당이 약속한 자유주의 복지 개혁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로이드 조지는 아스퀴스 총리에게 해군 예산 증액안이 자유당 의원들의 반발을 살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면, 보수 야당, 해군 리그, 그리고 영국의 무기 산업은 강력한 해군력 유지를 주장하며 예산 증액을 압박했다. 이러한 여론에 에드워드 7세 국왕까지 가세하여 8척의 드레드노트 건조를 지지했다. 당시 보수당 의원이 만든 "우리는 8척을 원하고 기다리지 않겠다!"[12]라는 슬로건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해군력 증강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에 직면한 아스퀴스 총리는 1909년 2월, 다음 회계 연도에 4척의 드레드노트를 건조하고 필요시 1910년 봄까지 4척을 추가 건조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자유당의 지지를 확보한 정부는 보수당이 제기한 불신임 결의안을 부결시켰다. 로이드 조지는 1909년 4월 말, 추가 드레드노트 건조 비용을 포함한 "인민 예산"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예산안은 부의 재분배 조치에 반발한 귀족원에 의해 1909년 11월 거부되었다. 이에 아스퀴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1910년 1월 총선을 치렀다. 선거 결과, 자유당 정부는 과반수 의석을 상실했지만 아일랜드 의회당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유지했다. 선거 직후, 귀족원은 결국 드레드노트 건조 자금을 포함한 인민 예산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고, 예산안은 1910년 4월 통과되어 영국의 군비 경쟁 참여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5. 군비 경쟁의 종식과 유산 (1912–1914)
1912년, 독일 제국의 재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재정적 부담과 러시아 제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을 종식시키려 했다. 이는 육군력 강화에 집중하는 '군비 전환점'(Rüstungswende) 정책의 일환이었다.[13] 독일은 할데인 사절단을 통해 영국의 중립을 얻으려 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1913년 무렵 영국 내부에서도 재정 문제 등으로 신규 전함 건조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1914년 상반기, 독일은 드레드노트급 전함 건조 대신 잠수함 건조에 집중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며 사실상 건함 경쟁에서 발을 뺐지만, 이를 비밀에 부쳤다.
결과적으로 해군 군비 경쟁은 표면적으로 잦아들었으나, 양국 간의 근본적인 긴장 관계는 해소되지 않았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한 배경이 되었다. 전쟁 발발 직전 주요 열강들의 해군력은 다음과 같았다.
국가 | 병력 | 대형 해군 함정 (드레드노트) | 톤수 |
---|---|---|---|
러시아 | 54,000 | 4 | 328,000 |
프랑스 | 68,000 | 10 | 731,000 |
영국 | 209,000 | 29 | 2,205,000 |
총계 | 331,000 | 43 | 3,264,000 |
독일 | 79,000 | 17 | 1,019,000 |
오스트리아-헝가리 | 16,000 | 3* | 249,000 |
총계 | 95,000 | 20 | 1,268,000 |
총 합계 | 426,000 | 63 | 4,532,000 |
*4번째는 아직 취역하지 않음. |
5. 1. 할데인 사절단
1912년, 독일 제국의 수상이었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을 멈추고자 시도했다. 그의 목표는 독일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군사력 증강으로 인해 독일은 육군력 강화에 집중하고 해군 예산을 줄이는 이른바 '군비 전환점'(Rüstungswende) 정책을 추진하게 된 상황이었다.[13]이러한 배경 속에서 할데인 사절단이 영국에 파견되었다. 독일은 이 사절단을 통해, 만약 독일이 명백한 침략자로 간주될 수 없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영국이 중립을 지켜준다면, 독일은 영국의 해군력 우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미 해군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통해 얻을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 당시 영국 외무부 장관이었던 에드워드 그레이 경 역시 독일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선호했다.
5. 2. 잠수함 건조로의 전환

1912년, 독일 제국의 재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는 영국과의 해군 군비 경쟁을 종식시키려 시도했다. 이는 독일의 외교적 고립을 완화하고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또한, 러시아의 군사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은 해군 예산을 줄이고 육군력 강화에 집중하는 '군비 전환점'(Rüstungswende) 정책을 추진했다.[13]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할데인 사절단이 영국을 방문하여, 독일이 침략자로 간주되지 않는 전쟁에서 영국의 중립을 보장받는 대가로 영국의 해군 우위를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영국은 이미 해군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기에 이를 거부했다.
1914년 상반기에 이르러, 독일은 새로운 드레드노트급 전함과 구축함 건조 대신 잠수함 건조에 집중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며 사실상 영국과의 건함 경쟁에서 발을 뺐다. 하지만 독일은 이 새로운 정책을 비밀에 부쳤고, 이로 인해 다른 열강들은 독일의 전략 변화를 즉시 파악하고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당시, 영국 해군은 20척의 드레드노트와 9척의 순양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독일 해군은 15척의 드레드노트와 7척의 순양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14] 독일의 이러한 잠수함 중심 전략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해군의 주요 전술 중 하나가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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