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예루살렘 공의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예루살렘 공의회는 기원후 48-50년경에 열린 초기 기독교 회의로, 안디옥 교회에서 발생한 율법 준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주요 쟁점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모세 율법, 특히 할례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회의 결과, 사도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음란한 행동,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피를 멀리하도록 결정했다. 이 결정은 기독교의 보편성을 확립하고 유대교와의 분리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72년의 예루살렘 시노드는 동방 정교회 내에서 개신교 신학의 영향을 배제하고 정경에 대한 입장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예루살렘 공의회
개요
명칭예루살렘 공의회
시기기원후 48–50년경
인정기독교 주류 및 대부분의 기독교 교파
이전없음
다음고대 교회 공의회 (에큐메니칼 이전) 및 니케아 공의회
소집미지정
주재야고보 (예수의 형제), 베드로, 사도 요한으로 추정
참석미지정
주제초기 기독교의 할례 논쟁, 구약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모세의 율법 준수 필요성
문서신약성경 (사도행전 및 갈라디아서) 발췌문
배경 및 의제
주요 쟁점할례 논쟁: 이방인 기독교인의 할례 요구
율법 준수: 모세 율법의 준수가 구원에 필요한가
관련 성경 구절사도행전 15:19–29 및 갈라디아서 2:1–10
주요 인물
주도적 인물바울로: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 주장
베드로: 이방인에게 복음 전파 지지
야고보 (예수의 형제): 절충안 제시 및 의장 역할
결의 내용
핵심 내용이방인 기독교인에게 할례 의무 면제
우상 숭배, 음행, 목매어 죽인 짐승, 피를 멀리할 것을 권고
영향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분리되어 보편 종교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
역사적 논란
역사적 해석공의회의 정확한 내용과 범위에 대한 다양한 해석 존재
바울 서신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 지속
관련 정보
연대기원후 78년경

2. 역사적 배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기독교의 첫 번째 중심지였으며,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있던 곳이다.[1][8] 사도들은 오순절 이후 얼마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가르쳤다.[9]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다른 친족들은 130년경 예루살렘이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될 때까지, 즉 모든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될 때까지 주변 지역의 지도자 직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9]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교회의 기둥"인[1][10]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5][1] 예루살렘 공의회는 일반적으로 예수의 십자가형(26년에서 36년 사이) 후 약 15~25년이 지난 48년에서 50년사이로 추정된다.

당시 예수의 추종자들(역사학자들은 이를 유대계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의 대부분은 유대인 출신이었으며, 심지어 개종자들조차도 초기 기독교인을 유대교의 일부로 간주했을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유대인 메시아라는 믿음을 더하여 현대 제2성전 유대교의 모든 측면을 긍정했다.[17]

2. 1.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기독교의 첫 번째 중심지였으며,[1]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있던 곳이다.[8] 사도들은 오순절 이후 얼마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가르쳤다.[9]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다른 친족들은 도시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될 때까지, 모든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될 때까지 주변 지역의 지도자 직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9]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교회의 기둥"인[1][10]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5][1] 예루살렘 공의회는 일반적으로 예수의 십자가형(26년에서 36년 사이) 후 약 15~25년이 지난 시점으로 추정된다.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은 바나바와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대부분의 모세 율법에서 자유롭다는 것에 대한 논쟁, 특히 남성의 할례에 대한 논쟁을 위해 회의가 소집되었음을 시사한다.[5][1] 이는 헬레니즘 시대의 동지중해에서 혐오스럽고 혐오스러운 행위로 여겨졌으며,[11][12][13][14][15] 특히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고전 시대에서 경멸받았는데, 이들은 오히려 포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1][12][14][13][16]

당시 예수의 추종자들(역사학자들은 이를 유대계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의 대부분은 유대인 출신이었으며, 심지어 개종자들조차도 초기 기독교인을 유대교의 일부로 간주했을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유대인 메시아라는 믿음을 더하여 현대 제2성전 유대교의 모든 측면을 긍정했다.[17]

2. 2. 이방인 선교와 율법 논쟁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기독교의 첫 번째 중심지였다.[1]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교회의 기둥"인[1][10]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5][1]

예루살렘 공의회는 예수의 십자가형(26년에서 36년 사이) 후 약 15~25년이 지난 시점으로 추정된다.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은 바나바와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대부분의 모세 율법에서 자유롭다는 것에 대한 논쟁, 특히 남성의 할례에 대한 논쟁을 위해 회의가 소집되었음을 시사한다.[5][1]

당시 예수의 추종자들(역사학자들은 이를 유대계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의 대부분은 유대인 출신이었으며, 심지어 개종자들조차도 초기 기독교인을 유대교의 일부로 간주했을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유대인 메시아라는 믿음을 더하여 현대 제2성전 유대교의 모든 측면을 긍정했다.[17]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 회의의 목적은 안디옥에서 발생한 의견 불일치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할례뿐만 아니라 더 광범위한 문제와 관련이 있었는데, 할례는 유대교에서 아브라함 언약의 "영원한" 표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유대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너희가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노라"고 설교했다.[18] 사도행전은 또한 믿는 자가 된 일부 바리새인들이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9]

해결해야 할 주요 문제는 할례의 요구와 관련이 있었지만, 사도적 결정에 나타난 것처럼 다른 중요한 문제들도 발생했다.[5] 이 논쟁은 교회가 토라 (즉, 전통적인 유대교의 규칙)를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야고보가 이끄는 "교회의 기둥"과 같은 추종자들과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라고 부르는 사도 바울 사이에서 벌어졌다.[20] 그는 그러한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5][1][21][22]

베드로의 조언(사도행전 15:7-11, 15:14)을 따른 회의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들 사이에서의 그들의 사역에 대해 설명했고(사도행전 15:12), 야고보는 예언자 아모스의 말씀을 인용했다 (사도행전 15:16-17, 아모스 9:11-12 인용). 야고보는 인용구에 자신의 말을 덧붙였다.[23] "영원부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아셨다"[24] 그리고 제안을 제출했는데, 이 제안은 교회에서 받아들여져 사도적 결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도행전 15:23-29는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작성된 편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의 서부 버전 (사도행전: 사본 참조)은 황금률의 부정적 형태를 추가한다("그리고 너희가 남에게서 받기를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은 할례, 특히 식단 문제, 음행, 우상 숭배, 피, 그리고 비유대인에게 성경 율법을 적용하는 문제보다 더 광범위한 문제를 결정했다. 사도들과 공의회의 장로들은 이렇게 말했다. "성령과 우리는 이 필요한 것들 외에는 여러분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진 것과 피와 목 졸라 죽인 것과 음행을 삼가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이것들을 조심하여 지키면 번성할 것입니다."(사도행전 15:27-28) 이 사도적 결정은 다른 지역의 모든 다른 지역 기독교 회중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25]

3. 예루살렘 공의회의 발단과 진행 (기원후 48-50년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기독교의 첫 번째 중심지였으며,[1]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있던 곳이다.[8] 사도들은 오순절 이후 얼마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가르쳤다.[9]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다른 친족들은 도시가 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될 때까지, 모든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될 때까지 주변 지역의 지도자 직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9]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교회의 기둥"인[1][10]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5][1] 예루살렘 공의회는 일반적으로 예수의 십자가형(26년에서 36년 사이) 후 약 15~25년이 지난 으로 추정된다.

당시 예수의 추종자들(역사학자들은 이를 유대계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의 대부분은 유대인 출신이었으며, 심지어 개종자들조차도 초기 기독교인을 유대교의 일부로 간주했을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유대인 메시아라는 믿음을 더하여 현대 제2성전 유대교의 모든 측면을 긍정했다.[17]

바울이 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새 언약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에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5][21][22]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은 바나바와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대부분의 모세 율법에서 자유롭다는 것에 대한 논쟁, 특히 남성의 할례에 대한 논쟁을 위해 회의가 소집되었음을 시사한다.[5][1] 할례는 헬레니즘 시대의 동지중해에서 혐오스러운 행위로 여겨졌으며,[11][12][13][14][15] 특히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고전 시대에서 경멸받았는데, 이들은 오히려 포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1][12][14][13][16]

사도행전은 또한 믿는 자가 된 일부 바리새인들이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KJV).[19]

3. 1. 안티오키아 교회의 논쟁

소아시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성서의 율법 준수 문제에 대해,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간의 교리 논쟁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개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18] 안티오키아 교회에서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Barnabas)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에 대표로 보내어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תּוֹרָה|토라he (Torah영어, 전통적인 유대교의 규칙) 준수와 관련하여, 야고보가 이끄는 "교회의 기둥"과 같은 추종자들과 스스로를 "이방인의 사도"라고 부르는 사도 바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20] 바울은 그러한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5][1][21][22]

3. 2. 공의회의 소집과 토론

소아시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성서의 율법준수문제에 대해 율법준수를 주장하는 유대 그리스도교인과 이방 그리스도 교인 간의 교리 논쟁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주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18] 안티오키아 교회에서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 교인들을 예루살렘에 대표로 보내어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오랜 토론 끝에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므로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했고, 공의회 참석자들은 그의 말에 침묵으로 동의하였다. 또한 유대인이 대부분인 예루살렘 교회의 좌장인 예수의 동생 사도 야고보가 나서서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라.
  •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
  •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52]


사도들과 예루살렘 공의회는 교회 대표와 바울 그리고 바나바를 안티오키아에 파송해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를 편지로 알렸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 회의의 목적은 안디옥에서 발생한 의견 불일치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할례뿐만 아니라 더 광범위한 문제와 관련이 있었는데, 할례는 유대교에서 아브라함 언약의 "영원한" 표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조언()을 따른 회의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들 사이에서의 그들의 사역에 대해 설명했고(), 야고보는 예언자 아모스의 말씀을 인용했다 (, 인용). 야고보는 인용구에 자신의 말을 덧붙였다.[23] "영원부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아셨다"[24] 그리고 제안을 제출했는데, 이 제안은 교회에서 받아들여져 Apostolic Decree영어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도행전은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작성된 편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의 서부 버전 (사도행전: 사본 참조)은 황금률의 부정적 형태를 추가한다("그리고 너희가 남에게서 받기를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Apostolic Decree영어는 다른 지역의 모든 다른 지역 기독교 회중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25]

3. 3. 야고보의 중재와 공의회의 결정

소아시아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성서의 율법 준수 문제에 대해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유대 그리스도교인과 이방 그리스도 교인 간의 교리 논쟁이 있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서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이방 그리스도 교인들을 예루살렘에 대표로 보내어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오랜 토론 끝에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므로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했고, 공의회 참석자들은 그의 말에 침묵으로 동의하였다. 예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좌장인 사도 야고보는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라.
  •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
  •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52]


사도들과 예루살렘 공의회는 교회 대표와 바울 그리고 바나바를 안티오키아에 파송해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를 편지로 알렸다. 이 결정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노아의 7계명과 유사하다는 견해도 있지만, 레위기 17-18장에 근거한다는 주장도 있다.[44]

4. 공의회 결정의 의미와 영향

예루살렘 공의회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이방인 기독교인의 할례 문제와 유대 율법 준수 문제를 다루었다. 이 회의의 결정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를 넘어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는 이방인 기독교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기독교의 문턱을 낮추고 더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또한,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교제할 수 있도록 음식 규정 등 몇 가지 최소한의 준수 사항을 정했다.

4. 1. 기독교의 보편성 확립

사도행전 15장에 묘사된 사도 회의는 일반적으로 갈라디아서 2장에 묘사된 사건과 동일한 사건으로 간주되지만,[30]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이 갈라디아서의 내용과 모순된다고 보기도 한다.[31] 사도행전에 기록된 누가의 기록은 역사성에 대한 도전을 받아왔으며,[32][33][34] 20세기 중후반 일부 학자들은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35] 그러나 최근의 학문은 예루살렘 공의회와 그 결정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36] 이는 때때로 신중하게 표현되기도 한다.[37]

브루스 메츠거의 ''그리스 신약성경에 대한 주석''(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에는 1994년경까지 이 주제에 대한 연구 요약이 포함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사도적 칙령의 복잡한 본문적 및 주석적 문제에 대한 가장 덜 불만족스러운 해결책은 네 가지 항목의 칙령(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목 졸라 죽인 고기, 피를 먹는 것, 부정한 행위—의례적이든 도덕적이든)을 원본으로 간주하고, 세 가지 항목의 칙령의 두 가지 형태를 위에 제시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영어 [39] 사도적 칙령의 본문과 해석에 대한 방대한 문헌이 존재한다. 자크 뒤퐁에 따르면, "오늘날의 학문은 칙령의 '동방' 본문('동방' 본문)을 유일한 정본 텍스트(네 가지 항목)로 간주하고, 그 규정을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의례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데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최근 연구에 따른 사도행전의 문제''(Les problèmes du Livre des Actes d'après les travaux récents) (Louvain, 1950), p.70].영어 [40]

4. 2.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

예루살렘 공의회는 초기 교회가 기독교의 유대교 뿌리에서 벗어나 주요 차별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43] 이 회의에서는 피, 피가 섞인 고기, 목 졸라 죽인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 간음과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사도적 칙령이 결정되었다.[44][41][42]

''유대인 백과사전''에 따르면, 바나바와 바울이 이교도 세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예루살렘의 권위자들은 할례를 교회의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고집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의 주도로 이교도들이 교회에 들어올 때 우상 숭배, 간음, 산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을 피하는 노아의 7계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칙령은 노아의 7계명과 유사해 보이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 연관성에 대해 이견을 제시한다.[44] 조셉 A. 피츠마이어는 사도적 칙령이 노아의 7계명이 아닌 레위기 17-18장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44]

사도 칙령은 사도 규정[45]트룰로 공의회[46]에서 재확인되었으나, 카를 요제프 폰 헤펠레[47]에 따르면 서방 기독교에서는 수세기 동안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에서는 여전히 명목상으로 인정되고 준수되고 있다.[48]

피렌체 공의회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개종자 간의 구분이 사라졌을 때 사도 칙령이 폐지된 것으로 정의했다. 이는 교황 우르바노 8세의 1642년 동방 개종자를 위한 신조[50]교황 베네딕토 14세의 1756년 회칙 ''Ex Quo''에서 반복되었다.[51]

5. 1672년 예루살렘 시노드

1672년 예루살렘 공의회는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신앙고백을 반박하고, 동방정교의 공식 입장을 재확인한 중요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도시테오스 신앙고백서가 채택되었으며, 개신교 신학의 영향을 배격하고 정교회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신교의 영향을 배척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신학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러시아 정교회 등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성경 목록과 관련된 결정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5. 1. 배경: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의 갈등

종교개혁은 약 백여 년 뒤 동방정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동방정교회는 세력이 약해졌고, 이에 따라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결탁하여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시도했다. 이스탄불의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였던 키릴로스 루카리스는 제네바 유학 중 칼뱅 계열 개신교 세력과 교류하며, 서유럽 개신교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비잔틴 제국 재건을 모색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는 1631년 칼뱅 신학을 수용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을 출간하여 오스만 제국의 주목을 받았고, 1638년 교살당했다.

그의 피살 이후 동방정교회는 개신교 신학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했으며, 1672년 예루살렘 시노드에서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신앙고백을 반박한 도시테오스 신앙고백서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을 배척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신학에 지나치게 기울어졌다는 비판이 18세기 이후 러시아 정교회를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일부 국가의 정교회에서는 성경 목록 등의 결정에 대한 수용을 유보하기도 했다.

5. 2. 시노드의 결정과 정교회 신학의 재정립

종교개혁이 서유럽에서 발생한 지 약 100년 후, 동방정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아래 있던 동방정교는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정교회 내부에서는 유럽의 기독교 세력과 연합하여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움직임의 중심에는 이스탄불의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였던 키릴로스 루카리스가 있었다. 그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기독교 신학교육 금지 정책으로 인해 서유럽으로 유학을 갔으며, 특히 제네바에서 칼뱅 계열 개신교 세력과 교류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는 서유럽 개신교 국가들로부터 은밀한 지원을 받아 비잔틴 제국의 재건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1631년, 그는 칼뱅 신학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새로운 신앙고백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을 출간하여 이러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이러한 혐의를 받는 인물을 좌시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1638년에 교살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바다에서 발견되었다.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사망 이후, 동방정교는 내부에 침투한 개신교 신학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했으며, 그 정점은 1672년에 열린 예루살렘 시노드였다. 이 회의에서는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신앙고백을 반박하는 도시테오스 신앙고백서가 발표되었고, 동방정교의 보편적 입장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의 영향을 배척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 신학적 입장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졌다는 비판이 18세기 이후 러시아 정교회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성경 목록 등의 몇몇 결정에 대해서는 일부 국가의 정교회에서 수용이 유보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당시 성경 목록에 대한 결정문의 일부이다.

The Acts and Decrees of the Synod of Jerusalem, The Confession of Dositheus (Eastern Orthodox, 1672)|예루살렘 시노드의 법령과 포고, 도시테오스 신앙고백 (동방 정교회, 1672)영어

In the year of Salvation 1672, on the 16th [day] of the month of March, in the Holy City of Jerusalem|구원의 해 1672년, 3월 16일,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영어

Question 3. 어떤 책들을 당신은 성경이라고 부르는가?

: 가톨릭 교회의 규범에 따라서 우리가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책들을 키릴(로스)은 라오디케이아 시노드로부터 모두 다 모으고 열거한 다음에, 그는 - 특히 '솔로몬의 지혜, 유딧, 토비트, 용의 역사(벨과 용), 수산나의 역사, 마카비들, 그리고 시라의 지혜(주 : 집회서) - 에 무지한 바보처럼.. 상당히 악의적으로 '아포크리파(외경)'라는 이름을 붙였다.

: 우리는 이 책들이 마찬가지로 진실된 (성경의) 다른 책들처럼 성경의 진실된 일부라고 판단한다. 옛 관례에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우리에게 성스러운 복음들과 성경의 다른 책들, 의심할 여지 없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 그들에 대한 거절이 부정되는 이 책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 그리고 만약, 아마도 이 모든 책들이 다른 책(->원정경)들과 언제나 비슷한 수준으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듯 하더라도, 시노드들과 많은 가톨릭 교회의 옛 탁월한 신학자들 모두가 이 책들 역시 성경의 나머지로서 여겨서 셈하였다. 이 모든 책들을 우리는 정경이라고 판단하며, 성경임을 우리는 고백한다.[1]

5. 3. 정경 논쟁

키릴로스 루카리스는 1631년, 칼뱅 신학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동방교회적 고백>이라는 새로운 신앙고백을 출간하였다. 그가 피살된 이후, 동방정교는 내부에 침투한 개신교 신학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했는데, 그 정점은 1672년에 열린 예루살렘 시노드였다. 예루살렘 시노드에서는 키릴로스 루카리스의 신앙고백을 조목조목 반박한 도시테오스 신앙고백서가 나왔고, 이를 동방정교의 보편적 입장으로서 주장하였다.

1672년 예루살렘 시노드에서 성경 목록에 대한 결정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질문 3.''' 어떤 책들을 당신은 성경이라고 부르는가?

: 가톨릭 교회의 규범에 따라서 우리가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부르는 모든 책들을 키릴(로스)은 라오디케이아 시노드로부터 모두 모으고 열거한 다음에, 그는 - 특히 '솔로몬의 지혜, 유딧, 토비트, 용의 역사(벨과 용), 수산나의 역사, 마카비들, 그리고 시라의 지혜(주 : 집회서) - 에 무지한 바보처럼.. 상당히 악의적으로 '아포크리파(외경)'라는 이름을 붙였다.

: 우리는 이 책들이 마찬가지로 진실된 (성경의) 다른 책들처럼 성경의 진실된 일부라고 판단한다. 옛 관례에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우리에게 성스러운 복음들과 성경의 다른 책들, 의심할 여지 없는 성경의 다른 부분들, 그들에 대한 거절이 부정되는 이 책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 그리고 만약, 아마도 이 모든 책들이 다른 책(->원정경)들과 언제나 비슷한 수준으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듯 하더라도, 시노드들과 많은 가톨릭 교회의 옛 탁월한 신학자들 모두가 이 책들 역시 성경의 나머지로서 여겨서 셈하였다. 이 모든 책들을 우리는 정경이라고 판단하며, 성경임을 우리는 고백한다.

참조

[1]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https://books.google[...] Doubleday
[2] 성경
[3] 간행물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 http://www.scotthah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2-12
[4] 간행물 Echoes of Intra-Jewish Polemic in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993-Autumn
[5]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6] 간행물 Paul's Argument against Gentile Circumcision in Romans 2:17-29 Brill Publishers 2014-09
[7] 문서
[8] 웹사이트 Jerusalem (A.D. 71–1099) http://www.newadvent[...]
[9] 서적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University Press
[10] 웹사이트 St. James the Less http://www.newadvent[...] Catholic Encyclopedia
[11] 간행물 The Ideal Prepuce in Ancient Greece and Rome: Male Genital Aesthetics and Their Relation to Lipodermos, Circumcision, Foreskin Restoration, and the Kynodesme http://www.cirp.org/[...]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20-01-03
[12] 간행물 Celsus' Decircumcision Operation: Medical and Historical Implications http://www.cirp.org/[...] Elsevier 2020-01-03
[13] 서적 When Christians Were Jews: The First Generation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18
[14] 간행물 Uncircumcision: A Historical Review of Preputial Restoration http://www.cirp.org/[...] Lippincott Williams & Wilkins 2020-02-13
[15] 웹사이트 Circumcision: In Apocryphal and Rabbinical Literature http://jewishencyclo[...] Kopelman Foundation 2020-01-03
[16] 서적 Approaches to Ancient Judaism, New Series: Religious and Theological Studies Scholars Press
[17] 서적 Christianity: An Introduction Blackwell Publishing
[18] 성경
[19] 성경
[20] 서적 Anatomy of the New Testament Fortress Press
[21] 서적 The Early Christian World Routledge
[22] 서적 Justification by Faith: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a Central Pauline Theme Brill Publishers
[23] 웹사이트 Acts 15 http://biblehub.com/[...] Gill's Exposition of the Whole Bible 2015-09-13
[24] 성경
[25] 웹사이트 Apostolic Presbyterianism http://www.swrb.com/[...] 2018-09-16
[26] 서적 Augustus to Constantine: The Rise and triumph of Christianity in the Roman World Westminster John Knox
[27] 서적 Jesus & the Rise of Early Christianity: A History of New Testament
[28] 서적 1 Corinthians: a new translation Volume 32 Anchor Bible
[29] 서적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30] 문서
[31] 문서
[32] 서적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논문 The Origins of Pauline Pneumatology: the Eschatological Bestowal of the Spirit Mohr Siebeck 2005
[37] 서적 Jewish Christian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38] 웹사이트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A-D https://books.google[...] 1995
[39] 서적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4
[40] 서적 Textual Commentary
[41] 간행물 Les lois noaẖides: Une mini-Torah pré-sinaïtique pour l'humanité et pour Israël Éditions in Press 2013-05
[42] 간행물 The Noachide Commandments and New Testament Ethics: with Special Reference to Acts 15 and Pauline Halakhah Peeters Publishers 1995-01
[43] 웹사이트 Jewish Encyclopedia: Baptism http://jewishencyclo[...] Jewish Encyclopedia
[44] 서적 The Acts of the Apostle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45] 문서 Canon 63
[46] 문서 Canon 67
[47] 웹사이트 commentary on canon II of Gangra http://www.ccel.org/[...]
[48] 웹사이트 Eating food that has blood in it https://catalog.obit[...] Convent of St. Elisabeth, Minsk, Belarus
[49] 웹사이트 Council of Florence, Bull of Union with the Copts https://www.papalenc[...] 1431-12-14
[50] 웹사이트 Professio Orthodoxae Fidei ab orientalibus faciend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1642 https://books.google[...]
[51] 웹사이트 Ex Quo, Benedict XIV, 1756 https://www.papalenc[...]
[52] 문서 성서연구자들은 피를 먹지 말라는 말은 당시 이방종교에서 피를 먹는 풍습을 따르지 말라는 즉, 이방종교의 습속을 따르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