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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탱 루이 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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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귀스탱 루이 코시는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해석학을 엄밀한 기초 위에 올려놓았으며, 미적분, 복소함수론, 급수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엄밀한 극한 개념을 사용하여 미적분을 합리화했고, 복소함수론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코시 수열, 코시의 평균값 정리, 코시의 적분 정리 등 다양한 수학적 개념과 정리를 정립했다.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였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적 신념을 지키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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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탱 루이 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40년경 코시. 장 롤레가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제피랭 벨리아르가 석판화함.
1840년경 코시. 장 롤레가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제피랭 벨리아르가 석판화함.
이름오귀스탱 루이 코시
로마자 표기Ogiseutaeng Rui Kosi
프랑스어 표기Augustin Louis Cauchy
출생과 사망
출생1789년 8월 21일, 프랑스 파리
사망1857년 5월 23일, 프랑스 소
국적
국적프랑스
교육 및 직업
모교에콜 데 퐁
직업수학, 물리학, 토목 공학
근무 기관École Centrale du Panthéon, 에콜 데 퐁, 에콜 폴리테크니크
박사 학위 제자프란체스코 파 디 브루노, 빅토르 부냐코프스키
업적
주요 업적수학적 해석, 기울기 하강법, 음함수 정리, 중간값 정리, 스펙트럼 정리, 극한 (수학), 전체 목록 참조
수상L'Académie Royale des Sciences 대상
가족
배우자알로이즈 드 뷔르
자녀마리 프랑수아즈 알리시아, 마리 마틸드
기타

2. 생애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89년 파리에서 태어난 오귀스탱 루이 코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高等理工科學校)에서 공부하고 훗날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당시는 혁명과 반혁명이 교차하는 정치적 격동기였으며, 엄격한 가톨릭 신자이자 왕당파였던 코시는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었다.

코시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혁명의 혼란을 피해 파리 교외의 아르쾨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라플라스가 이웃에 살면서 아버지와 친분을 쌓았고, 어린 코시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았다. 코시는 가난과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병약해졌고, 평생 건강에 유의하며 살았다.

13세 무렵 코시 가족은 파리로 돌아왔고, 아버지가 나폴레옹 정권에서 원로원 서기직을 얻으면서 살롱의 과학자들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다. 라그랑주는 코시를 "미래의 대수학자"라 칭하며 기대감을 표했다.

코시는 기술자로도 활동했다. 180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거쳐 토목 학교를 졸업하고, 토목 기사로서 나폴레옹을 도와 셰르부르 항구 건설에 참여했다.

정치적으로 코시는 부모의 영향으로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이자 예수회 옹호자였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폐위되고 루이 필리프가 즉위하자, 코시는 샤를 10세를 따라 8년간 국외 망명 생활을 했다. 토리노 대학교에서 물리학 강좌를 맡았고, 이후 샤를 10세의 요청으로 프라하로 이동하여 그의 손자 앙리 다르투아의 가정교사로 활동했다.

2. 1. 유년기와 교육

코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1789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루이 프랑수아 코시는 앙시앵 레짐 시대 파리 경찰의 고위 관리였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직위를 잃었다. 코시 가족은 혁명의 혼란을 피해 아르쾨유로 피신했고, 코시는 아버지로부터 첫 교육을 받았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 가족은 파리로 돌아왔다.

1802년, 코시는 파리 최고의 중등학교였던 에콜 센트랄 뒤 팡테옹에 입학하여 고전 언어를 중심으로 공부했다. 1805년,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여 수학과 과학 교육을 받았다. 1807년, 에콜 데 퐁 에 쇼세(교량 및 도로 학교)에 진학하여 토목 공학을 전공하고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2. 2. 공학자 시절

1810년, 코시는 셰르부르에서 나폴레옹의 해군 기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주니어 엔지니어로 일했다. 코시는 이곳에서 3년 동안 우르크 운하, 생클루 다리 건설에 참여했고, 셰르부르 항구에서 일했다.[1] 1812년, 23세의 코시는 과로로 병을 얻어 파리로 돌아왔다.[1] 그는 엔지니어링 업무보다 추상적인 수학에 더 매력을 느꼈고, 파리에서 수학 관련 직책을 찾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1813년, 건강을 회복한 코시는 셰르부르로 돌아가지 않고 파리에 남았다.[1] 그는 형식적으로 엔지니어 직책을 유지했지만, 해양부에서 내무부로 전출되었다. 이후 3년 동안 코시는 주로 무급 병가를 내고 대칭 함수, 대칭군 등 수학 연구에 몰두했다.

2. 3.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 시절

1815년 11월, 루이 푸앵소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부교수였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강의 의무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코시는 당시 떠오르는 수학계의 스타였으며, 페르마의 다각수 정리 증명과 같은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엔지니어 직을 그만두고 에콜 폴리테크니크 2학년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1년 계약을 받았다. 1816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재편되면서 코시는 정교수로 승진했다.[1]

28세의 코시는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다섯 살 연하의 알로이즈 드 뷔르를 신부감으로 찾아주었다. 드 뷔르 가문은 인쇄업자이자 서적상이었으며, 코시의 대부분의 저서를 출판했다.[1] 알로이즈와 오귀스탱은 1818년 4월 4일, 생 쉴피스 교회에서 성대한 로마 가톨릭 의식으로 결혼했다. 1819년 부부의 첫 딸 마리 프랑수아즈 알리시아가 태어났고, 1823년 두 번째이자 마지막 딸 마리 마틸드가 태어났다.[1]

2. 4. 망명과 귀환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축출되고, 루이 필리프가 "국민의 왕"으로 왕위에 오르자, 열렬한 왕당파였던 코시는 샤를 10세를 따라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4] 망명 기간 동안 코시는 스위스 프리부르, 이탈리아 토리노 등지를 거쳤다. 토리노에서는 국왕의 지원으로 토리노 대학교 물리학 강좌를 맡았다.[4] 그 후, 샤를 10세의 요청으로 프라하로 옮겨 샤를 10세의 후계자이자 손자인 앙리 다르투아(보르도 공작)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코시는 앙리 다르투아에게 수학을 가르쳤으나, 앙리 다르투아는 수학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1838년, 코시는 파리로 돌아와 과학 아카데미에 복귀했다.[4] 그러나 새로운 정권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여 교직을 되찾지는 못했다. 1839년에는 경도국에 선출되었으나, 왕의 승인을 받지 못해 4년간 정식 국원으로 활동하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코시는 천체역학 연구에 몰두하여 1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848년 혁명 이후 충성 서약이 폐지되면서, 코시는 1849년에 과학부 수학 천문학 교수로 복귀했다. 1853년, 코시는 미국 철학 학회 국제 회원으로 선출되었다.[5] 코시는 1857년 기관지 질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3. 업적

코시의 수학상 업적은 매우 다양하다. 가장 큰 공로는 해석학을 엄밀한 기초 위에 올려 놓은 것이다. 무한소라는 애매한 개념 대신 극한, 연속, 급수의 합 등의 개념을 확립하여 미적분을 합리화했다. 실변수의 함수에 대한 정적분 문제에서 복소변수 함수 연구로 확장하여 복소함수론의 기초를 확립했다. 미분방정식에 대해 의 존재를 증명하여 해석학을 계산에서 논리의 단계로 발전시켰다.[8]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8]



코시는 초기 연구에서 다면체에 관한 오일러의 정리에 대한 최초의 증명을 제시했고, 치환 계산을 발전시켜 군론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론에서 프레넬의 파동 이론과 빛의 분산 및 편광에 대해 연구했다. 또한 역학 분야에 기여하여, 물질 연속성의 원리 대신 기하학적 변위의 연속성 개념을 도입했다.[6] 탄성 분야에서 응력 이론을 창시했으며, 그의 결과는 시메옹 푸아송의 결과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페르마 다각수 정리를 최초로 증명했다.

3. 1. 해석학

해석학을 엄밀한 기초 위에 올려 놓은 것은 코시의 가장 큰 업적이다. 무한소라는 애매한 개념 대신 극한(極限), 연속, 급수의 합 등의 개념을 확립하여 미적분을 합리화했다.[8] 실변수의 함수에 정적분 문제를 넘어 복소변수 함수 연구를 시작하여 복소함수론의 기초를 확립했다.[8] 미분방정식에 대해 의 존재를 증명하여, 해석학을 계산에서 논리의 단계로 발전시켰다.[8]

코시의 교재 표지
코시는 저서 ''해석학 강의''(Cours d'Analyse)에서 해석학의 엄밀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엄밀성'은 ''대수학의 일반성''(오일러와 라그랑주와 같은 이전 저자들의) 원칙을 거부하고 기하학과 무한소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주디스 그라비너는 코시를 "유럽 전체에 엄밀한 해석학을 가르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이 책은 부등식과 \delta-\varepsilon 논법이 미적분학에 처음 도입된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여기서 코시는 연속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함수 f(x)가 주어진 극한 내에서 x에 대해 연속인 것은, 이 극한 내에서 변수의 무한히 작은 증분이 항상 함수 자체의 무한히 작은 증분을 생성할 경우이다.''

코시는 0으로 수렴하는 수열을 사용하여 무한소에 대한 정의를 제시했다. 코시의 "무한히 작은 양" 개념은 비표준 해석의 개념까지 이어진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그는 테일러 정리를 엄밀하게 증명하고, 잔차의 형태를 확립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을 위해 수학적 분석의 기본 정리를 개발한 교과서 (그림 참조)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극한의 존재에 대한 필요충분 조건을 제시했다. 절대 수렴에 대한 코시 판정법, 코시 응축 판정법도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 1829년에는 복소변수의 복소함수를 처음으로 정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시의 연구 논문은 직관적이고 엄밀하지 않은 방법을 자주 사용했다. 그의 정리 중 하나는 아벨에 의해 "반례"에 노출되었고, 균등 연속성 개념을 도입하여 수정되었다.

코시는 군론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해석학에서는 이전의 모호함을 해소하고 엄밀한 기초를 제공하고자 했다. "엄밀성"을 목표로 한 코시의 해석학 강의는 이후 해석학 교과서 스타일의 규범이 되었다. 그는 극한과 무한소의 개념을 사용하여 현재의 연속 함수를 정의했다. 그러나 코시의 정의에서는 연속성과 균등 연속성을 구별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실해석학에서는 입실론-델타 논법의 원형이 되는 아이디어로 급수의 수렴 개념을 형식적으로 다시 파악했다. 이로 인해 해석학 전반의 엄밀한 형식화가 진행되었고, 근대 수학의 기초가 다져졌다. 19세기 전반의 복소해석학 연구는 거의 코시가 수행했으며, 복소 평면에서의 적분 이론, 잉여 계산 등, 기본 개념의 많은 부분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냈다. 코시 수열, 코시의 평균값 정리, 코시의 적분 정리, 코시-리만 방정식 등 그 이름을 딴 정리가 현재에도 해석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3. 2. 복소함수론

해석학을 엄밀한 기초 위에 올려놓은 코시는 복소함수론의 기초를 확립하는데도 큰 공헌을 하였다. 코시는 복소 함수론을 혼자서 발전시킨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코시가 증명한 최초의 중요한 정리는 현재 ''코시 적분 정리''로 알려진 다음 내용이다.[8]

:

\oint_C f(z)dz = 0,



여기서 ''f''(''z'')는 복소 평면에 놓인 자기 교차하지 않는 닫힌 곡선 ''C''(경로) 내부와 경계에서 정칙인 복소수 값을 갖는 함수이다. ''경로 적분''은 경로 ''C''를 따라 수행된다.

1826년에 코시는 함수의 residual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를 내렸다.[8] 이 개념은 극점—고립 특이점, 즉 함수가 양의 무한대 또는 음의 무한대로 가는 점—을 갖는 함수와 관련이 있다. 복소수 값을 갖는 함수 ''f''(''z'')가 특이점 ''a''의 근방에서 다음과 같이 전개될 수 있다면,

:

f(z) = \varphi(z) + \frac{B_1}{z-a} + \frac{B_2}{(z-a)^2} + \cdots + \frac{B_n}{(z-a)^n},\quad

B_i, z,a \in \mathbb{C},



여기서 φ(''z'')는 해석적(즉, 특이점이 없는 잘 동작하는 함수)이라면, ''f''는 점 ''a''에서 ''n''차 극점을 갖는다고 한다. 만약 ''n'' = 1이면, 극점은 단순극점이라고 한다. 계수 ''B''1은 코시에 의해 함수 ''f''의 점 ''a''에서의 residual이라고 불린다. 만약 ''f''가 ''a''에서 특이점을 갖지 않으면, ''f''의 residual은 ''a''에서 0이다. 분명히, 단순극점의 경우 residual은 다음과 같다.

:

\underset{z=a}{\mathrm{Res}} f(z) = \lim_{z \rightarrow a} (z-a) f(z),



여기서 우리는 ''B''1을 residual의 현대적인 표기법으로 대체했다.

1831년에, 코시는 현재 코시 적분 공식으로 알려진 공식을 제안했다.[8]

:

f(a) = \frac{1}{2\pi i} \oint_C \frac{f(z)}{z-a} dz,



여기서 ''f''(''z'')는 ''C''에서 해석적이고, 경로 ''C''로 둘러싸인 영역 내부에 있으며, 복소수 ''a''는 이 영역 어딘가에 있다. 경로 적분은 반시계 방향으로 수행된다. 분명히, 피적분 함수는 ''z'' = ''a''에서 단순 극점을 갖는다. 같은 해에 그는 잉여 정리를 제시했다.[7]

:

\frac{1}{2\pi i} \oint_C f(z) dz = \sum_{k=1}^n \underset{z=a_k}{\mathrm{Res}} f(z),



여기서 합은 경로 ''C'' 내부와 경계에서 ''f''(''z'')의 모든 ''n''개의 극점에 걸쳐 있다. 코시의 이러한 결과는 오늘날 물리학자와 전기 공학자에게 가르치는 복소 함수론의 핵심을 형성한다.

19세기 전반의 복소해석학 연구는 거의 코시가 수행했으며, 복소 평면에서의 적분 이론, 잉여 계산 등, 기본 개념의 많은 부분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냈다. 코시 수열, 코시의 평균값 정리, 코시 적분 정리, 코시-리만 방정식 등 그 이름을 딴 정리가 현재에도 해석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8]

3. 3. 기타 업적

해석학을 계산에서 논리의 단계로 끌어올린 코시는 다음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8]

코시는 군과 치환 이론, 함수론, 미분방정식행렬식에 관해서도 글을 썼다. 초기 연구에서 다면체에 관한 오일러의 정리에 대한 최초의 증명을 제시했고, 치환 계산을 발전시켜 군론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빛 이론에서 프레넬의 파동 이론과 빛의 분산 및 편광에 대해 연구했다. 또한 역학 분야에 기여하여, 물질 연속성의 원리 대신 기하학적 변위의 연속성 개념을 도입했다.[6] 막대와 탄성 막의 평형, 탄성 매질에서의 파동에 관해 글을 썼으며, 현재 코시 응력 텐서로 알려진 3 × 3 대칭 행렬을 도입했다. 탄성 분야에서 응력 이론을 창시했으며, 그의 결과는 시메옹 푸아송의 결과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페르마 다각수 정리를 최초로 증명한 것도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이다.

4. 정치적, 종교적 신념

프랑스 혁명의 해에 파리에서 태어난 코시는 엄격한 가톨릭 신자이자 왕당파였다. 그는 성 빈센트 드 폴 협회의 회원이자 예수회와도 연관되어 있었다.[2]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샤를 10세를 따랐으며,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쫓겨나자 8년간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다.[3]

코시의 왕당파적 성향과 종교적 열정은 동료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2] 닐스 헨리크 아벨은 그를 "독선적인 가톨릭교도"라고 불렀다.[2] 구글리에모 리브리 카루치 달라 소마야가 수학과 학과장이 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코시의 견해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2]

5. 다른 수학자들과의 관계

코시는 많은 공적을 남겼지만, 다른 수학자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은 부족했다. 특히 닐스 헨리크 아벨에바리스트 갈루아의 논문 심사를 맡으면서 논문을 분실하는 등 부주의한 모습을 보였는데, 일설에는 이 사건이 두 사람의 요절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참조

[1] EPD Cauchy
[2] 웹사이트 Cauchy https://www.collinsd[...] HarperCollins 2023-08-03
[3] dictionary Cauchy http://www.dictionar[...]
[4] 웹사이트 Book of Members, 1780–2010: Chapter C http://www.amacad.or[...]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2016-09-13
[5]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4-04-24
[6] 서적 The History of the Theory of Structures. Searching for Equilibrium Wiley 2018
[7] 문서 Mémoire sur les rapports qui existent entre le calcul des Résidus et le calcul des Limites, et sur les avantages qu'offrent ces deux calculs dans la résolution des équations algébriques ou transcendantes
[8] 서적 Advanced Engineering Mathema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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