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마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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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시다 마사오는 일본의 원자력 기술자이자 도쿄전력의 임원으로, 1955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쿄공업대학에서 원자핵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2010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현장 대응을 지휘했다. 사고 초기, 그는 정부와 도쿄전력의 지시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판단을 내려 해수 주입을 지속하는 등, 위기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사고 후 식도암으로 투병하다 2013년 사망했으며, 그의 증언은 후쿠시마 사고의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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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마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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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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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시다 마사오 |
원어 이름 | 吉田 昌郎 (요시다 마사오) |
출생일 | 1955년 2월 17일 |
출생지 | 오사카부 |
사망일 | 2013년 7월 9일 |
사망지 | 도쿄도 신주쿠구 |
사망 원인 | 식도암 |
국적 | 일본 |
직업 | 도쿄전력 (현: 도쿄전력 홀딩스) 전 집행임원 |
주요 업적 |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서 대응 |
학력 | 도쿄공업대학 대학원 이공학연구과 원자핵공학 전공 석사 과정 졸업 |
기타 |
2. 생애
1955년 일본 오사카부에서 태어났다.[17] 1979년 도쿄공업대학 대학원에서 원자력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통상산업성의 채용 제안을 거절하고 대학 선배의 권유로 도쿄전력에 입사했다.[17] 입사 후 경력의 대부분을 원자력 발전소 현장에서 보냈다.[19][20]
2007년 4월, 도쿄전력 원자력 시설 관리 부장으로 임명되었다.[17] 2009년, 2007년 니가타현 지진 당시 도쿄전력의 대응 미흡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른 임원들과 함께 1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다.[3] 2010년 6월에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부임했다.[17]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발생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현장에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일, 식도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위해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그의 총 방사능 피폭량은 약 70 mSv에 달했다. 이후 2012년 7월 30일 뇌출혈로 응급 수술을 받았으며, 2013년 7월 9일 식도암으로 게이오 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55년 일본 오사카부에서 태어났다.[17] 1961년 (쇼와 36년) 오사카 시립 금오 초등학교(현: 오사카 시립 중앙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덴노지 중학교와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고등학교 덴노지 교사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검도부와 사진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54], 성적은 학년 180명 중 20등 정도였다.[53]1977년 도쿄공업대학 공학부를 졸업했으며[17], 대학 시절에는 보트부에서 활동했다.[54] 이후 1979년 같은 대학 대학원 이공학연구과에서 원자핵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17] 당시 지도 교수는 이노우에 아키라였다.[18] 대학 졸업 후 통상산업성의 채용 제안을 거절하고 대학 선배의 권유로 도쿄전력에 입사하여 경력의 대부분을 원자력 발전소 현장에서 근무했다.
2007년 4월, 도쿄전력은 원자력 자산 관리 부서를 신설했고, 요시다는 부서 창설 시점부터 2010년 6월까지 부서장을 역임했다. 2008년, 해당 부서는 최대 15.7m 높이의 쓰나미가 발전소에 미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에 대한 데이터를 검토했다. 그러나 대규모 쓰나미 발생 위험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판단 하에 발전소 방어 시설 강화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 당시 이러한 판단은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토목 학회에서도 공유되던 견해였다.[2]
2009년, 요시다는 다른 여러 도쿄전력 고위 임원들과 함께 2007년 니가타현 지진에 대한 도쿄전력의 대응 미흡에 책임을 지고 1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다.[3]
2. 2. 도쿄전력 입사 후
1979년 도쿄공업대학에서 원자력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통상산업성의 채용 제안을 거절하고 대학 선배의 권유로 도쿄전력에 입사했다.[17] 입사 후 경력의 대부분을 원자력 발전소 현장 근무로 보냈으며, 본사 근무는 드물었다.[19][20]처음 배속된 곳은 후쿠시마 제2 원자력 발전소 2호기 건설 사무소였으며, 당시 상사는 다케구로 이치로였다.[21] 이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와 후쿠시마 제2 원자력 발전소의 발전부 보수과, 유닛 관리과 등을 거쳤고,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1·2·3·4호기 유닛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5년부터 4년간은 전기사업연합회 원자력부에 과장 대우로 파견 근무를 했다.[21]
2002년 7월, 본사 원자력 관리부 그룹 매니저가 되었고,[21] 2007년 4월 1일에는 본사에 원자력 기술·품질 안전부를 개편하여 신설된 원자력 설비 관리부의 부장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집행 임원을 겸임하게 되었다.[17]
요시다가 부장으로 있던 원자력 설비 관리부는 2008년 쓰나미 위험 평가 논의에 관여했다. 문부과학성 지진조사연구추진본부의 2002년 보고서 발표 이후 실시된 도쿄전력 내부 조사에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에 설계 기준을 크게 넘는 최대 15.7m 높이의 쓰나미가 도달할 수 있다는 평가 결과가 나왔다.[1][22] 원자력·입지본부 일부 간부의 위험성 지적에도 불구하고, 요시다의 부서는 "그러한 쓰나미는 올 리 없다"고 주장했으며 상층부의 승인 하에 별도의 방어 시설 강화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1][22] 이 결정은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조사·검증 위원회에 의해 지적되었다.[22]
다만, 당시 일본 정부나 토목학회 등도 후쿠시마 앞바다를 쓰나미 주요 위험 지역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점[2], 그리고 요시다 개인이 메이지 산리쿠 지진 파원이 후쿠시마 앞바다에 있었을 경우를 가정한 자체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대 15.7m 파고를 계산하고 토목학회에 심의를 의뢰하거나, 조간 지진 관련 퇴적물 조사를 통해 추정 쓰나미 높이를 4m로 시산하는 등[23][24][25] 쓰나미 문제에 관심을 보인 정황도 있다. 2009년 6월에는 경제산업성 공식 회의에서 산업기술종합연구소의 오카무라 유키노부 센터장이 조간 지진을 고려한 쓰나미 대책 재검토를 도쿄전력에 요구하기도 했다.
2009년, 2007년 니가타현 주에쓰 해역 지진 당시 도쿄전력의 대응 미흡에 대한 책임으로 다케구로 이치로 부사장, 무토 사카에 상무 등 다른 임원들과 함께 1개월 감봉(5%) 처분을 받았다.[3][26]
2010년 6월, 집행 임원이자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네 번째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근무였다.[17]
동일본 대지진 이후 도쿄 전력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조사·검증 위원회(정부 사고조사위원회)는 2011년 요시다를 대상으로 총 28시간 넘는 청취 조사를 진행하고 "청취 결과서"를 작성했다.[45] 이 문서는 2014년 아사히 신문이 "요시다 조서"라 명명하며 "소장 명령 위반 원전 철수"라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46][47] 이후 산케이 신문 등이 반박 보도를 내놓았고,[47] 일본 정부는 당초 비공개 방침이었으나 논란이 확산되자 요시다 본인의 우려("기억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오인 가능성, 확대 해석 경계")[52]를 감안하면서도[49] 2014년 9월 11일 해당 조서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52][50][51]
2. 3. 쓰나미 대책 관련 논란
2002년 문부과학성 산하 지진조사연구추진본부는 보고서를 통해 동일본 태평양 연안 지역에 대규모 쓰나미가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이 보고서는 조간 지진, 메이지 산리쿠 지진 등 과거 사례를 들며 산리쿠 앞바다에서 후쿠시마현 앞바다, 보소 반도 앞바다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쓰나미 발생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22]2007년 4월, 도쿄전력은 원자력 설비 관리부를 신설했고 요시다는 초대 부장으로 취임하여 2010년 6월까지 해당 부서를 이끌었다.[1][17] 2008년, 도쿄전력은 자체 조사를 통해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에 최대 15.7m 높이의 쓰나미가 닥칠 수 있다는 평가 결과를 얻었다. 당시 원자력·입지본부의 일부 간부는 이러한 위험성을 인지하고 지적했으나,[22] 요시다가 부장으로 있던 원자력 설비 관리부는 "그러한 쓰나미는 올 리 없다"고 주장하며 대규모 쓰나미 발생 위험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별다른 방어 시설 강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정은 도쿄전력 상층부의 승인을 거쳐 이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건물 및 중요 기기에 대한 침수 방지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훗날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조사·검증 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1][22]
다만,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당시 일본 정부나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도 영향을 미쳤다. 2002년 토목학회와 2006년 내각부 중앙방재회의는 후쿠시마 앞바다에는 쓰나미를 유발할 만한 파원이 없다고 보고 재해 대책 검토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2][23][24][25] 요시다 개인은 이러한 공식 견해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산리쿠 지진의 파원이 만약 후쿠시마 앞바다에 있었을 경우를 가정하여 쓰나미 높이를 자체적으로 시뮬레이션하여 최대 파고 15.7m라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토목학회에 공식 견해와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에 대한 심의를 정식으로 의뢰하기도 했다. 또한, 퇴적물 조사를 통해 조간 지진 당시의 추정 쓰나미 높이를 4m로 추산하는 등, 쓰나미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관심을 기울였다는 평가도 있다.[23][24][25]
한편, 2009년 6월 경제산업성의 공식 회의인 '종합자원 에너지 조사회 원자력 안전·보안부회 내진·구조 설계 소위원회 지진·쓰나미, 지질·지반 합동 워킹 그룹' 내에서, 산업기술종합연구소의 오카무라 유키노부 활단층·지진 연구센터장은 도쿄전력을 향해 조간 지진의 영향을 고려하여 쓰나미 상정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명확히 지적하기도 했다.
3.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2010년 6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부임한 요시다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현장을 총괄 지휘했다.[4] 지진과 쓰나미 발생 직후 핵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초기 혼란 속에서 사실상 재난 대응의 전권을 갖고 위기 수습에 나섰다.[4]
사고 초기, 요시다는 원자로 압력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1호기 배출을 결정했고, 현장을 방문한 간 나오토 당시 총리대신과 직접 만나 상황을 논의했다.[5][6][7] 이후 전력 손실로 냉각 기능이 마비되자, 도쿄전력 본사의 중단 명령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해수 주입을 강행하는 결정을 내렸다.[8][27] 이 결정은 나중에 큰 논란을 낳았지만, 결과적으로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는 평가와 함께[31] 간 총리의 옹호를 받기도 했다.[9][29][30]
상황이 악화되자 3월 15일에는 현장 직원 650여 명 중 대부분을 인근 후쿠시마 제2 원자력 발전소로 대피시키고, 자신을 포함한 약 50명의 필수 인력과 함께 남아 현장을 지켰다.[4] 이들은 훗날 '후쿠시마 50'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요시다는 이들의 리더로서 사고 수습을 이끌었다.[11] 사고 수습 과정에서 그는 본사의 지시에 맞서 작업원의 안전을 우선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54]
사고 이후 요시다는 정부의 사고 조사 위원회로부터 장시간 인터뷰에 응했으며, 이는 '요시다 증언'으로 알려진 중요한 기록으로 남았다.[12] 그러나 사고 수습 과정에서의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로 탓인지 건강이 악화되어 2011년 11월 식도암 진단을 받고 입원했으며, 같은 해 12월 소장직에서 물러났다.[34][35] 도쿄전력은 요시다의 누적 피폭 선량(약 70밀리시버트)과 식도암 발병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낮다고 발표했지만,[35] 극도의 스트레스가 암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36]
2012년 6월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관련하여 다른 도쿄전력 임원들과 함께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 등으로 형사 고소되기도 했으며,[37] 같은 해 7월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긴급 수술을 받았다.[38] 투병 중에도 원전 사고에 관한 회고록을 집필하던 요시다는 2013년 7월 9일, 식도암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에서 향년 58세로 사망했다.[40] 그의 죽음에 대해 히로세 나오키 도쿄전력 사장은 "결사의 각오로 사고 대응에 임해주셨다"며 감사를 표했고,[41] 아베 신조 당시 총리는 "굉장한 노력을 하셨다. 명복을 빈다"고 애도했으며,[42] 간 나오토 전 총리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사고 확대를 억제하는 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 대학 후배이자 전우와 같은 사람이었다"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43]
3. 1. 사고 초기 대응
2010년 6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부임한 요시다는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당시 현장을 책임지고 있었다.[4] 지진 발생(오후 2시 46분) 후 쓰나미가 발전소를 덮치자(오후 3시 37분), 요시다는 오후 4시 30분에 공식적으로 핵 비상사태를 선포했다.[4] 사고 초기, 비상 계획과 도쿄전력 본사의 리더십 부재 속에서 요시다는 사실상 재난 대응의 전권을 갖고 책임을 져야 했다.[4]쓰나미가 발생한 3월 11일 자정 직전, 요시다는 원자로 용융으로 내부 압력이 위험 수준에 도달하자 1호기 격납 용기의 압력을 낮추기 위한 배출(venting)을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총리대신 간 나오토가 후쿠시마 현장을 방문하여 요시다 등 도쿄전력 관계자들과 배출 계획을 논의했다. 요시다는 약 20분간 지휘 센터를 비우고 간 총리를 직접 만났다.[5] 간 총리는 훗날 요시다가 상황을 명확히 설명했고 자신이 이를 납득했다고 회고했지만,[6] 요시다는 당시 간 총리가 "격분하여 고함을 지르고 극도로 거만하게 행동했다"고 상반되게 기억했다.[7] 배출 작업은 간 총리와의 면담 직후인 3월 12일 오전 9시에 시작되었으나 오후 2시에야 완료되었고, 약 두 시간 뒤 1호기 건물에서 수소 폭발이 발생하여 지붕과 벽이 파괴되었다.[4]
전력 손실로 1호기 격납 용기 압력 제어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3월 12일 오후 6시경 가이에다 반리 경제산업대신은 1호기에 해수 주입을 구두로 지시했다.[5] 그러나 오후 7시 4분, 이미 해수 주입이 시작된 것을 몰랐던 간 총리는 해수 주입으로 인한 재임계 가능성을 우려했고, 이에 도쿄전력 본사는 총리 관저의 의중을 고려하여 오후 7시 25분 요시다에게 해수 주입 중단을 명령했다.[8][27] 요시다는 이 명령을 받았지만 독단적으로 주입 속행을 결정했다. 그는 본사와의 텔레비전 회의 시스템이 연결된 상태에서 담당 작업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금부터 하는 말은 듣지 마라"고 속삭인 뒤, 주변 부하들에게는 큰 소리로 "주수 정지"를 명령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실제로는 주입을 계속했다.[27] 한편, 간 총리는 재임계 우려가 없다는 보고를 받고 오후 7시 55분에 주입 재개를 지시했다.[8] 요시다는 도쿄전력 본사에는 주입을 중단했다고 보고하면서 실제로는 작업을 계속한 것이다.[8] 요시다는 나중에 국제 원자력 기구(IAEA) 조사단에게 해수 주입을 계속했다고 실토하며, 그 이유로 "관저나 도쿄전력 본사는 신뢰할 수 없고, 국제 조사단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1년 5월, 요미우리 신문은 당시 야당이었던 자민당의 아베 신조가 퍼뜨린 정보를 근거로 간 총리가 해수 주입 중단을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타니가키 사다카즈 당시 자민당 대표 역시 간 총리 정부가 주입을 지연시켜 용융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약 일주일 후 요시다가 직접 해수 주입이 중단된 적이 없음을 인정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되었고, 실제 중단 명령은 도쿄전력 간부(다케쿠로 이치로 펠로우)로부터 나왔음이 밝혀졌다.[4][27] 도쿄전력은 요시다를 견책하려 했으나(무토 사카에 부사장 해임론 제기), 간 총리는 "사업자의 판단으로 대응하는 것은 법률상 인정된다. 결과적으로 주입을 계속한 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며 요시다를 옹호하고 해임론을 막았다.[9][29][30] 요시다의 이 결정은 오늘날 도쿄전력 경영진의 명령을 어기고 현장의 판단을 우선시한 사례로 가장 많이 회자된다.[10]
3월 15일,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제1 원전을 완전히 포기하고 간토 지방 전체의 피난까지 고려해야 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자, 요시다는 현장에 있던 650여 명의 직원 대부분을 인근 후쿠시마 제2 원자력 발전소로 대피시키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4] 이후 그는 약 50명의 필수 인력과 함께 남아 현장 대응을 지휘했는데, 이들은 훗날 '후쿠시마 50'으로 불리게 되었다.[11] 요시다는 당시 최악의 경우 자신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동료들을 생각하며 결정을 내렸다고 회고했다. 다행히 3월 18일경 냉각 및 감압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소방차와 80ton급 푸츠마이스터 콘크리트 펌프 트럭 등이 투입되면서 상황은 점차 안정되었다.[4]
원전 사고 이후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진 요시다는 2011년 4월 상순, 1호기 격납 용기의 수소 폭발을 막기 위해 질소 가스 주입을 지시하는 본사를 향해 "할 수가 없어! 그런 위험한 짓을 작업원에게 시킬 수 있겠어!"라고 고함을 치며 강하게 반발했다. 다음 날에는 항의의 표시로 선글라스를 쓴 채 텔레비전 회의에 나타나 도쿄전력 임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54]
요시다의 독단적인 해수 주입 결정은 논란을 낳았다. 원자력 안전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반메 하루키는 처음에는 "중단이 없었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이었던가"라며 불신을 표했지만, 나중에는 요시다의 결단이 없었다면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31] 반면, 뉴스 캐스터 신보 지로는 "원자력 재해 대책 특별 조치법에 따른 의사 결정 절차를 무시하는 행위를 용인하면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진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3] 다만, 2017년 시뮬레이션 분석 결과 당시 주입된 해수가 실제 노심에는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32]
사고 이후 요시다는 정부의 핵 사고 조사 위원회)로부터 13차례, 총 28시간 이상 인터뷰에 응했으며, 이는 '요시다 증언'으로 알려진 방대한 기록으로 남아 사고 경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12]
3. 2. 해수 주입 논란
2011년 3월 12일,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원자로 냉각을 위한 해수 주입을 둘러싸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날 오후 6시경, 가이에다 반리 경제산업대신은 1호기에 해수를 주입하라는 구두 지시를 내렸다.[5] 그러나 오후 7시 4분경, 해수 주입이 이미 시작된 것을 알지 못했던 간 나오토 당시 총리는 해수 주입으로 인한 재임계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도쿄전력 본사는 총리의 우려에 따라 오후 7시 25분, 현장에 있던 요시다에게 해수 주입 중단을 명령했다.[8]하지만 요시다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해수 주입 속행을 결정했다. 그는 본사와의 텔레비전 회의 시스템이 연결된 상태에서 부하 직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지금부터 하는 말은 듣지 마라"고 속삭인 뒤, 겉으로는 '주수 정지'를 명령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해수 주입을 계속하도록 지시했다.[27][58] 이후 간 총리는 재임계 우려가 없다는 보고를 받고 오후 7시 55분에 주입 재개를 지시했지만, 실제로는 요시다의 판단으로 주입이 중단되지 않았던 것이다.[8]
이 사실은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고, 2011년 5월 요미우리 신문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배포한 이메일 뉴스레터를 근거로 간 총리가 해수 주입 중단을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야당 대표였던 타니가키 사다카즈 역시 간 총리 정부가 해수 주입을 지연시켜 노심용융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4] 그러나 약 일주일 후 요시다는 해수 주입이 중단된 적이 없으며, 중단 명령은 도쿄전력의 다케쿠로 이치로 펠로우에게서 온 것이었다고 밝혔다.[4][27] 그는 나중에 국제 원자력 기구(IAEA) 사찰단에게 진실을 밝힌 이유에 대해 "관저나 도쿄전력 본사는 신뢰할 수 없고, 국제 조사단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요시다의 이러한 항명 행위에 대해 도쿄전력 내부에서는 무토 사카에 부사장 등이 해임론을 제기하며 처벌 의사를 밝혔으나[29][30], 간 나오토 총리는 "사업자의 판단에 따른 대응은 법률상 인정되며, 결과적으로 주입을 계속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며 요시다를 옹호하고 해임론을 막았다.[9][29][30] 당시 원자력 안전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반메 하루키 도쿄 대학 교수도 처음에는 절차상 문제를 지적하며 불신을 표했으나[29][30], 나중에는 요시다가 주입을 계속하지 않았다면 "도호쿠・간토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었을 것"이라며 그의 결단을 높이 평가했다.[31]
한편, 뉴스 캐스터 신보 지로는 요시다의 행동이 원자력 재해 대책 특별 조치법에 따른 의사 결정 절차를 무시한 것이며 책임 소재를 불명확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33] 또한 2017년 시뮬레이션 분석 결과에 따르면, 당시 주입된 해수는 대부분 누수되어 실제 노심에는 거의 도달하지 못했을 가능성(초당 0.07~0.075리터 유입 추정)도 제기되었다.[32] 요시다는 도쿄전력 경영진의 명령에도 해수 주입을 계속한 결단으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10]
3. 3. 후쿠시마 50
2011년 3월 11일 지진과 쓰나미가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를 덮친 후, 소장 요시다 마사오는 현장에서 사고 수습을 지휘했다. 초기 혼란 속에서 본사의 리더십 부재로 인해 요시다는 거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재난 대응에 나서야 했다.[4]사고 다음 날인 3월 12일, 간 나오토 당시 총리가 현장을 방문했다. 같은 날 오후, 1호기에서 폭발이 발생하고 냉각 기능 상실로 위기가 고조되자, 가이에다 반리 경제산업대신은 해수 주입을 구두로 지시했다.[5] 그러나 도쿄전력 본사는 재임계 가능성을 우려한 간 총리의 언급[8]과 자체 판단[27]을 이유로 요시다에게 해수 주입 중단을 명령했다. 요시다는 이 명령을 공식적으로는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부하 직원에게 비밀리에 지시하여 해수 주입을 계속했다.[8][27] 이 결정은 나중에 요미우리 신문 보도와 당시 야당이었던 자민당의 타니가키 사다카즈 총재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4], 요시다는 해수 주입이 실제로 중단된 적이 없음을 인정했고, 간 총리는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며 그의 행동을 옹호했다.[9] 반메 하루키 전 원자력 안전 위원회 위원장도 훗날 요시다의 결단이 없었다면 도호쿠와 간토 지방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판단을 지지했다.[31] 다만, 2017년 시뮬레이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주입된 해수는 대부분 누설되어 실제 노심 냉각 효과는 미미했을 가능성(1초당 0.07L~0.075L 수준)도 제기되었다.[32]
3월 15일, 도쿄전력이 발전소 완전 포기까지 검토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자, 요시다는 현장에 있던 650여 명의 직원 대부분을 인근 다이니 발전소로 대피시키고, 자신을 포함한 최소한의 필수 인원만 남아 현장을 지키기로 결정했다.[4] 이때 남아 끝까지 사고 수습에 헌신한 직원들이 바로 후쿠시마 50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요시다는 이들의 리더로서 목숨을 건 현장 대응을 이끌었다.[11] 그는 당시 최악의 경우 자신과 함께 죽음을 각오해야 할 동료들을 선별해야 했던 참담한 심정을 훗날 회고했다.[4] 3월 13일 도쿄전력 내부 화상 회의에서는 2호기 해수 주입 라인 복구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이건 이제 '할아버지의 결사대'로 가자"고 말하며 비장한 각오를 드러내기도 했다.[28] 요시다와 후쿠시마 50의 필사적인 노력, 그리고 외부에서 투입된 소방차와 80ton의 푸츠마이스터 콘크리트 펌프 트럭 등의 지원으로 3월 18일경 발전소 상황은 점차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었다.[4]
사고 수습 과정에서 요시다는 종종 본사의 지시에 맞서 현장 작업원의 안전을 우선하며 강하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4월 초, 본사가 1호기 격납 용기의 수소 폭발 방지를 위해 질소 가스 주입을 지시하자 "할 수가 없어! 그런 위험한 짓을 작업원에게 시킬 수 있겠어!"라고 고함을 치며 격렬히 반대했다. 다음 날에는 항의의 표시로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화상 회의에 참석하여 본사 임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54]
사고 이후 요시다는 정부의 핵 사고 조사 위원회로부터 13차례에 걸쳐 총 28시간 이상 인터뷰에 응했으며, 이는 사고 경위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인 '요시다 증언'으로 기록되었다.[12]
3. 4. 요시다 조서
도쿄 전력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조사·검증 위원회(정부 사고조)는 2011년에 13차례에 걸쳐 총 28시간 이상 요시다 마사오에게 청취 조사를 실시하여, 총 7편 약 50만 자 분량의 일문일답 형식의 "청취 결과서"를 정리했다.[45] 이는 사고 후 요시다가 정부의 핵 사고 조사 위원회로부터 받은 인터뷰 기록으로, 사고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자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2]2014년 5월, 아사히 신문은 이 청취 결과서를 "요시다 조서"라고 부르며 "소장의 명령 위반 원전 철수"라는 제목의 특종 기사를 게재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해외 주요 언론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 작업자들이 원전에서 도망쳤다"는 식으로 보도하기도 했다.[46][47] 그러나 같은 해 8월 18일, 산케이 신문은 아사히 신문의 보도 내용을 반박하는 형태로 조서 내용을 보도했고,[47] 다른 언론사들도 이를 따랐다.[47]
당초 일본 정부는 요시다 본인이 비공개를 요청하는 상신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청취 결과서"를 공개하지 않을 방침이었다. 요시다는 청취 조사 시작 전 기록 공개 가능성에 동의했으나,[48] 이후 "단편적으로 인용된 기사가 여러 신문에 게재되어, 혼자서 확대 해석될 가능성에 대한 본인의 우려가 현실화되었으며, 이대로 비공개로 하는 것이 오히려 본인의 유지를 거스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49]" 정부는 방침을 바꿔 2014년 9월 11일 조서 공개를 결정했다.[52][50][51]
요시다 본인은 조서 내용의 정확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제가 위원회로부터 청취를 받았을 때, 제 기억에 근거하여 솔직하게 사실 관계를 말씀드렸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른 기억의 희미함, 다양한 사상에 잇따라 대처해야 했던 것으로 인한 기억의 혼동 등으로 인해, 사실을 오인하여 말씀드린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위원회에 말씀드린 내용의 전부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확대 해석되지 않을까, 다른 자료나 이야기와 제대로 맞춰본 후에 다루어졌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52]
4. 질병 및 사망
후쿠시마 사고 대응 8개월 후인 2011년 11월, 요시다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식도암을 진단받았다. 그는 2011년 11월 24일 입원했으며, 식도암 치료를 위해 같은 해 12월 1일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직에서 물러나 본사 임원으로 전보되었다.
도쿄전력은 요시다의 총 방사능 피폭량이 약 70 밀리시버트였고, 방사선 피폭 후 암 발병까지 통상 5년 정도 걸린다는 이유로, 그의 질병과 후쿠시마 원전 업무 간의 연관성은 낮다고 주장했다.[13][14]
이후 요시다는 여러 차례 입원했으며, 2012년 7월 30일에는 뇌출혈로 응급 수술을 받았다.[15] 결국 2013년 7월 9일, 식도암 투병 끝에 게이오 대학 병원에서 향년 58세로 사망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요코와 세 아들이 있다.
사망 후, 오쿠마 마을 사업 단체 대표 하치스카 레이코는 "요시다가 없었다면 재앙은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역할을 평가했다.[9] 전 총리 간 나오토는 트위터에 "그의 리더십과 의사 결정에 경의를 표한다"는 글을 올려 추모했다.[16]
5. 인물
초등학교 동창에 따르면, 매우 공부를 잘하는 데다가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가고, 우두머리 기질도 있었다고 한다.[53] 사내에서는 "호쾌", "우두머리 기질"[54]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현장의 신망이 두텁고 성격은 호탕하다고 알려져 있다. 잘난 체하지 않는 성격으로, 부하 직원뿐만 아니라 하청 기업의 작업자들에게서도 인망이 있었다.[54][55]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에서 부하였던 전 여자 축구 일본 대표 출신 탤런트 마루야마 카리나는 요시다를 "언제나 상냥하고, 재미있다"라고 평했다.[56]
종교에 조예가 깊어 젊은 시절부터 종교 서적을 탐독했으며, 취미는 사찰 순례였다. 좌우명은 『정법안장』으로, 도쿄전력의 사무소 내에 두었다고 한다.[25]
2020년 영화 《후쿠시마 50》에서는 와타나베 켄이, 2023년 넷플릭스 시리즈 《The Days》에서는 야쿠쇼 코지가 요시다 마사오를 연기했다.
6. 연표
- 1955년 - 오사카부 출생
- 1967년 - 오사카 시립 금우 초등학교 (현 오사카 시립 중앙 초등학교) 졸업
- 1970년 -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천왕사 중학교 졸업 (21기)
- 1973년 - 오사카 교육대학 부속 고등학교 천왕사 교사 졸업 (15기)
- 1977년 - 도쿄 공업대학 공학부 기계물리공학과 졸업
- 1979년 - 도쿄 공업대학 대학원 이공학 연구과 원자핵공학 전공 석사 과정 수료
- 1979년 - 도쿄전력 입사
- 2007년 - 도쿄전력 집행 임원 원자력·입지 본부 원자력 설비 관리 부장 (초대)
- 2010년 - 도쿄전력 집행 임원 원자력·입지 본부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 겸 입지 지역부 후쿠시마 제1원자력 조사소 소장
- 2011년 - 도쿄전력 집행 임원 원자력·입지 본부 후쿠시마 제1 안정화 센터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소장 겸 입지 지역부 후쿠시마 제1원자력 조사소 소장 (개편)
- 2011년 11월 24일 - 식도암 치료를 위해 입원
- 2011년 12월 1일 - 도쿄전력 집행 임원·원자력·입지 본부 사무 위촉 (병 치료를 위해)
- 2012년 2월 - 식도 절제술을 받음
- 2012년 7월 26일 - 뇌출혈로 쓰러져 긴급 입원·수술
- 2013년 7월 9일 - 식도암으로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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