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요시무라 사다아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시무라 사다아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982년부터 1998년까지 선수로 활동하며, 1986년과 1987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88년 부상으로 선수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재활을 거쳐 복귀하여 1990년 컴백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 및 2군 감독을 역임했으며, 일본 15세 이하 청소년 야구 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22년부터는 요미우리 구단의 편성 본부장 스카우트 담당 겸 국제 부장을 맡고 있으며, 일본 대표팀 타격 코치를 겸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나라현 출신 야구 선수 - 마이클 나카무라
    마이클 나카무라는 호주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메이저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으며, 2006년 퍼시픽 리그 최다 세이브 투수를 기록하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으며, 이후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했다.
  • 나라현 출신 야구 선수 - 에나쓰 유타카
    에나쓰 유타카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한 좌완 투수로, 한신 타이거스, 난카이 호크스 등 여러 팀에서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활약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 은퇴 후에는 다양한 활동을 했으나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기도 했다.
  • 나라현 출신 - 야마다 사부로
    야마다 사부로는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국제사법 권위자로 한·프랑스 문화 교류에 기여한 일본의 법학자이자 관료이다.
  • 나라현 출신 - 기무라 도쿠타로
    기무라 도쿠타로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후 변호사, 검찰총장, 법무대신, 요시다 내각의 법무총재 및 방위청장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며, 반공주의 활동과 전일본검도연맹 초대 회장으로서 검도 부흥에 기여했다.
  • 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 - 후지타 모토시
    후지타 모토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활약하며 리그 MVP를 2연패하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 - 기타벳푸 마나부
    기타벳푸 마나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213승을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로, 일본시리즈 우승과 MVP 수상, 명예의 전당 헌액 등 화려한 선수 경력 이후 야구 해설가, 지도자, 유튜버로 활동했다.
요시무라 사다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시절 (2010년 4월 4일, 마쓰다 스타디움에서)
출생일1963년 4월 27일
출생지나라현 고세시
포지션외야수 / 코치
투구좌투
타석좌타
프로 입단1981년 드래프트 3순위
첫 출장1982년 7월 20일
마지막 출장1998년 10월 3일 (은퇴 경기)
선수 경력
소속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년–1998년)
코치 경력
소속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2002년–2003년, 2006년–2011년, 2018년–2021년)
일본 대표팀 (2022년–)
수상
주요 수상2× 베스트 나인 (1986년-1987년)
1× 일본 프로 야구 컴백 선수상 (1990년)
NPB 올스타 (1986년-1987년, 1991년, 1993년)
1× NPB 올스타전 MVP (1986년 3차전)
통계 (1998년 기준)
리그NPB
타율0.296
홈런149
안타964

2. 선수 시절

PL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3순위로 지명을 받아 입단한 요시무라 사다아키는 뛰어난 타격 센스와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프로 2년차인 1983년에 84경기에 출전했다.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시즌 타율 3할 2푼 6리를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남겼고, 1984년부터 우익수로 활약했다.

1985년, 한신 타이거스랜디 바스오 사다하루의 시즌 55홈런 기록 경신에 도전하자, 요미우리는 바스에게 고의사구를 냈고, 그 결과 바스는 출루율 리그 선두였던 요시무라를 제치고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차지했다.

1986년 요시무라는 128경기에 출전해 타격 5위(타율 .312), 23홈런을 기록했고, 1987년에는 타율 5위(.322), 86타점, 30홈런을 달성했다. 1988년 3월 18일에는 도쿄 돔 완공 후 첫 경기(vs 한신)에서 1호 홈런을 기록했다. 프로 7년간 통산 타율은 3할 2푼 1리였으며, 하라 다쓰노리와 함께 3, 4번 타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1988년 7월 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에서 3회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했지만, 8회 수비 도중 나카오 다카요시의 타구를 잡으려다 중견수 사카에무라 다다히로와 충돌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왼쪽 무릎 인대 4개 중 3개가 끊어지고 신경까지 손상되는 큰 부상으로[22], 장기간 요양과 후유증이 남았다.

2. 1. 프로 입단 전

1988년 7월 6일 주니치 전(삿포로 마루야마 야구장)에서 요시무라 사다아키는 3회에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8회 좌익수 수비 중 나카오 타카요시가 날린 뜬공을 포구하다가, 같은 회부터 중견수로 수비에 들어간 사카무라 타다히로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왼쪽 무릎 인대 4개 중 3개가 완전히 파열되고 신경까지 손상되는 큰 부상을 입었는데, 주치의는 이를 "교통사고 수준"이라고 표현했다.[3] 왕정치 감독도 "경기에 이긴 것보다 요시무라의 부상이 걱정된다.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이라며 우려를 표했다.[4] 당초 "인대 손상"으로 발표되었던 이 부상은[3], 7회 말 요시무라에게 타석이 돌아오면 수비 교체가 예정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발생하여 안타까움을 더했다.

요시무라 사다아키는 장기간 요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년 ~ 1998년)

요시무라 사다아키는 PL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3순위로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 뛰어난 타격 센스와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프로 2년차인 1983년에 84경기에 출전,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타율 .326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남겼다. 같은 해 코마다 노리히로,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50번 트리오'''라고 불렸다.

1984년부터 우익수로 고정되었다.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가진 선수로서 장래가 기대되었다.

1985년, 남은 1경기를 남겨두고 요시무라는 출루율.432로, 한신 타이거스랜디 바스(.423)보다 9리 앞선 1위였다. 최종전에서 바스가 오 사다하루의 시즌 홈런 기록에 1개 차이로 다가왔기 때문에 요미우리는 승부를 피했고, 바스는 5타석 모두 출루(1안타, 4사사구)하여 .42807이 되었다. 반면 요시무라는 풀타임 출장했지만 4타석 모두 범타로 물러나 .42754가 되었다. 결국 바스가 .00053 차이로 역전하여 요시무라는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놓쳤다. 이 해부터 센트럴 리그는 최다 출루수가 아닌 최고 출루율로 기록·표창하게 되었고, 출루율 계산 방식도 희생 플라이를 분모에 넣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자이언츠 벤치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전년까지의 출루율 계산 방식에서는 바스가 .430, 요시무라가 .433).

1986년부터 등번호를 '''7'''번으로 변경하고 주축 선수로서 128경기에 출전했다. 타율 5위인 .312, 23홈런, 72타점을 기록하여,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87년에도 타율 5위인 .322, 30홈런, 86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개막전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스기모토 마사에게서 홈런을 쳤다. 30번째 홈런은 10월 1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고라쿠엔 구장) 마지막 경기 4회말 타석에서 나왔다. 볼 카운트 2-2에서 스코어보드 표시(2-1)와 구심 야마모토 후미오의 수중 카운터(2-2)가 달랐는데, 포수 다쓰카와 미쓰오가 스코어보드 표시가 맞다고 어필하여 카운트 2-1로 시라타케 요시히사가 다음 공을 투구해 버려 카운트가 확정, "2스트라이크 4볼" 상태에서 쳐서 홈런이 되었다.[2]

1988년 3월 18일, 한신과의 오픈전에서 도쿄 돔 완공 후 첫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 3회에 개인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했지만, 8회 수비 도중 나카오 다카요시의 타구를 잡으려다 중견수 사카에무라 다다히로와 충돌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왼쪽 무릎 4개의 인대 중 3개가 끊어지고 신경까지 손상된 큰 부상이었다.[22] 장기간 요양이 불가피했고, 후유증이 남을 정도의 심각한 부상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스포츠 의학 권위자인 프랭크 조브 박사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가나가와현아쓰기시의 가나가와 재활 병원에서 1년 이상 재활 치료를 받은 후, 특수 제작된 레가드와 슈즈를 착용하고 100m를 11초대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1989년 9월 2일 사이토 마사키대타로 복귀했다.[6] 1990년에는 8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27, 14홈런을 기록했다. 9월 8일에는 팀의 리그 우승을 사요나라 홈런으로 결정짓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컴백상을 수상했다.[6]

1990년대 초반에는 중요한 타격을 해낼 수 있는 외야수로 활약했다. 1993년 9월 30일에는 팀 통산 4000승을 결정하는 사요나라 안타를 쳤다.[7]

1994년에는 타율 1할대로 부진했지만,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부상으로 결장한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대신하여 4차전과 5차전에 "4번·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두 경기 모두 2안타를 기록했고, 특히 5차전에서는 와타나베 히사노부에게서 홈런을 쳐 팀 승리에 기여했다.[8]

선수 생활 말년에는 대타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요시무라가 은퇴를 언급할 때마다 "바로 너야말로 리더다, 벤치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며 만류했다.[7] 1998년에는 나가시마 감독으로부터 제16대 캡틴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10월 3일 시즌 최종전에서 은퇴 경기가 열렸다.[7]

2. 3. 부상과 재활

1988년 7월 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에서 3회에 개인 통산 100호 홈런을 기록했지만, 8회 수비 도중 나카오 다카요시가 때린 타구를 잡으려다 당시 중견수였던 사카에무라 다다히로와 충돌했다. 이로 인해 왼쪽 무릎 인대가 4개 중 3개가 끊어지고 신경까지 손상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22] 당시 요시무라는 수비 강화를 위해 교체될 예정이었으나, 이 부상으로 장기간 요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으며, 복귀가 불투명하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왼쪽 무릎 인대 파열은 중증 장애 판정을 받을 정도였다. 홋카이도 대학 부속 병원에 입원했지만,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활 훈련을 받았다. 두 차례의 대수술과 1년 이상의 재활 훈련 끝에 100미터를 11초대에 뛸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1989년 9월 2일, 사이토 마사키의 대타로 복귀했을 때 도쿄 돔 장내 아나운서가 요시무라의 이름을 호명하자 관중들이 큰 함성을 질렀다. 상대 투수는 신인이었던 가와사키 겐지로였고, 결과는 내야 땅볼이었다. 1990년 9월 8일, 팀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때려냈는데, 이 경기에서도 상대 투수는 가와사키였다.[23] 1990년대 전반에는 팀의 간판 외야수로 활약했다.

2. 4. 복귀와 활약

1989년 9월 2일, 사이토 마사키의 대타로 복귀하여[22] 당시 신인이었던 가와사키 겐지로와 대결했고, 결과는 2루 땅볼이었다. "타자, 사이토 대신 요시무라"라는 장내 아나운서의 호명이 사라질 정도로 도쿄 돔은 큰 환호에 휩싸였다.

1990년에는 8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27, 14홈런을 기록했다. 9월 8일에는 팀의 리그 우승을 끝내기 홈런으로 결정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며,[23] 이 해 컴백상을 수상했다. 이후 1990년대 초반에는 팀의 간판 외야수로서 활약했다.

1993년 9월 30일에는 팀 통산 4000승을 결정하는 끝내기 안타를 쳤다.[7]

1994년에는 타율 1할대로 부진했지만, 같은 해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부상으로 결장한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대신하여 제4차전과 제5차전에 4번 타자 겸 지명 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두 경기 모두 2안타를 기록했으며, 특히 제5차전에서는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상대로 홈런을 쳐내는 등 팀 승리에 기여했다.[8]

선수 생활 말년에는 대타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요시무라가 은퇴를 언급할 때마다 만류하며 "바로 너야말로 리더다, 벤치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7] 1997년 시즌 종료 후에는 나가시마 감독으로부터 요미우리의 주장(제16대)으로 지명되었고, 1998년에 17년 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10월 3일 시즌 최종전에서 은퇴 경기가 열렸다.[7]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2002년부터 2003년까지 현역 시절 친정 팀인 요미우리의 1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 이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2006년에는 요미우리의 2군 감독으로 취임하여 시즌 후반기에 부상자가 속출한 1군에서 와키야 료타를 1번 타자로 기용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7년에는 사카모토 하야토 등 4명의 신인들을 우선적으로 기용했지만, 팀의 출루율과 희생타 개수는 리그 최저를 기록했다. 하지만 재조정 중인 1군 투수 등의 도움을 받아 이스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09년부터는 요미우리의 1군 야수 종합 코치로 부임했고, 당시 1루 코치였던 기무라 다쿠야 내야 수비 코치가 사망한 이후에는 3루 코치도 겸임했다. 2011년에는 1군 타격 코치로 전향했고,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의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2012년에는 니혼 TV에서 야구 해설위원, 스포츠 닛폰에서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2013년에는 RF라디오닛폰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2015년에는 일본 15세 청소년 야구 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18년 시즌에 다시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군 타격 종합 코치로 부임한 후 2020년 시즌 작전 코치로 옮겼다.

연도팀명직책
2002년 ~ 2003년요미우리 자이언츠1군 타격 코치
2006년 ~ 2008년요미우리 자이언츠2군 감독
2009년 ~ 2011년요미우리 자이언츠1군 야수 종합 코치
2015년일본 청소년 야구 국가대표팀(U-15)감독
2018년 ~ 2019년요미우리 자이언츠1군 타격 종합 코치
202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1군 작전 코치


4. 은퇴 이후

요시무라는 1995년 이후 타율은 2할 중반대를 기록했지만 수비 기회가 줄어들어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한 자릿수 출장에 그쳤다. 1996년에는 외야수로 10경기 출전한 것이 최다였고, 1997년에는 한 자릿수 출장에 머물렀다. 은퇴하던 해인 1998년에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외야수 출전 없이 1루수로 2경기에 출전하고 은퇴했다.[19]

5. 논란 및 사건 사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이전 답변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원문 소스가 제공되면 지시사항에 맞게 수정할 수 있습니다.

6. 수상 및 기록

요시무라 사다아키는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상을 수상했다.

상 명칭수상 연도비고
베스트 나인1986년, 1987년외야수 부문
월간 MVP1987년 9월, 1990년 9월
JA 전농 Go·Go상1993년 4월호주루상
컴백상1990년
올스타전 MVP1986년 3차전
도쿄 돔 MVP1985년, 1990년
야나세·자이언츠 MVP상1986년


6. 1. 수상

상 명칭수상 연도비고
베스트 나인1986년, 1987년외야수 부문
월간 MVP1987년 9월, 1990년 9월
JA 전농 Go·Go상1993년 4월호주루상
컴백상1990년
올스타전 MVP1986년 3차전
도쿄 돔 MVP1985년, 1990년
야나세·자이언츠 MVP상1986년


6. 2. 주요 기록



연도소속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 번트희생 플라이볼넷고의 사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82년요미우리4330000000000000010.000.000.000.000
1983년8410495263114555113010810111.326.379.579.958
1984년1152982605689263131603488412914300.342.415.6151.030
1985년12041834457113191161825686465935364.328.428.529.957
1986년128534474841482562325472104754137688.312.372.536.908
1987년12746442876138212302538651832431629.322.357.591.949
1988년652562223367121131203940152612233.302.373.541.913
1989년1731280500054000120030.179.226.179.404
1990년842412082668110141214500012963254.327.415.582.997
1991년9327124225556010914201012721316.227.306.376.682
1992년9124822425711006993210022022225.317.375.442.817
1993년94351311268414181244301162815466.270.334.399.733
1994년811741601428603432300001400209.175.241.269.510
1995년5375665192043313100091084.288.373.500.873
1996년5365612150022111010130091.246.277.344.621
1997년69696221660125140003410113.258.290.403.693
1998년717665217201221000001120121.262.368.338.707
통산: 17년13493678325345996416118149160853540222635334273041864.296.364.494.858


참조

[1] 뉴스 過去のドラフト 第17回(1981年)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 뉴스 【10月18日】1987年(昭62)やっぱ老朽化?後楽園最後の公式戦に飛び出した“怪弾” https://web.archive.[...] スポーツニッポン 2008-10-18
[3] 웹사이트 「巨人を変える」と言われた“天才”吉村禎章の悲劇と再生/プロ野球20世紀・不屈の物語【1988~89年】 https://column.sp.ba[...] 2020-05-31
[4] 서적 不屈の男吉村禎章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5] 웹사이트 【7月6日】1988年(昭63) 通算100号本塁打の日に…2人の運命を変えた外野フライ http://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08-07-01
[6] 문서 p.70~ 優勝決定サヨナラ本塁打、p.9 徳光和夫のメッセージ
[7] 뉴스 不屈の魂持つ男・吉村禎章が引退 「よくぞ、ここまで…」栄光と挫折を味わい尽くした真のリーダー https://www.zakzak.c[...] 2020-12-05
[8] 서적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1995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95
[9] 뉴스 巨人吉村、香田コーチ退団 秦氏ら入閣へ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1-11-01
[10] 뉴스 巨人・吉村コーチ 不可解退団の陰に愛人への不倫暴行事件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12-04-02
[11] 뉴스 侍ジャパンU-15代表メンバー発表!吉村禎章監督が意気込み語る http://www.japan-bas[...]
[12] 웹사이트 来季のコーチングスタッフについて https://www.giants.j[...] 読売巨人軍公式サイト 2017-10-10
[13] 웹사이트 巨人&阪神の「知られざる内情」を番記者がブチまける! https://web.archive.[...] 2017-11-29
[14] 웹사이트 由伸ジャイアンツ、空前絶後の「粛清と補強」スッパ抜き https://web.archive.[...] 2017-10-24
[15] 웹사이트 【巨人】吉村禎章1軍作戦コーチ、来季からフロント入りで編成業務に https://hochi.news/a[...]
[16] 웹사이트 【巨人】吉村禎章氏が執行役員編成本部長国際担当兼国際部長、水野雄仁氏が編成本部長代理スカウト担当兼スカウト部長に…球団人事発表 https://hochi.news/a[...] 2024-09-10
[17] 웹사이트 江川卓氏が「巨人の4番になって球界に残る成績を収める」と確信した高卒ルーキーは?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23-05-29
[18] 웹사이트 プロ野球界におけるケガに泣いた選手の代表格・吉村禎章 https://www.badge-of[...]
[19] 문서 "肩の弱さの原因は対外的には1986年シーズン中の練習によって痛めたためとされていたが、真の理由は自らの飲酒運転に起因する交通事故によるものである"
[20] 웹사이트 大怪我を乗り越えた早熟の天才打者【吉村禎章・最後の1年】 https://baseballking[...] 2020-04-06
[21] 뉴스 「青春ラジメニア」岩崎和夫アナ ── 毎週800通アニソンリクエストはがき見つめ25年 https://news.yahoo.c[...] THE PAGE 2014-12-27
[22] 뉴스 당시 1988년 7월 7일자 요미우리 신문 19면에 실린 기사에서 구단 측은 당초에 ‘인대 손상’ 이라고 발표되었다. 오 사다하루 감독(당시)도 이 경기에 대해 “경기에 이긴 것보다는 요시무라의 부상이 걱정이다. 부상이 일어난 것은 어쩔 수는 없지만….” 이라고 말했다.
[23] 뉴스 요미우리의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은 10년 후인 2000년 9월 24일의 주니치전에서 1990년에 당시 요시무라의 등번호였던 ‘7’번을 붙인 니오카 도모히로도 기록했다. 가와사키도 이후에 요시무라와 똑같이 1993년에 컴백상을 수상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