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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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슬라비아의 수립은 17세기 후반 남슬라브족의 단결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1848년에는 남슬라브 연방 수립 계획이 세워졌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의 유고슬라비아 국가 건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위원회가 결성되어 연합국에 남슬라브족의 입장을 알리고, 코르푸 선언을 통해 전후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후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이 수립되었고, 세르비아 왕국과의 통합을 거쳐 1918년 12월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이 선포되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케른텐, 자다르, 피우메 등 영토 문제와 초기 국가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고, 유고슬라비아 왕국(1929-1941),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1945-1992)을 거쳐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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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의 탄생 - 소련 수립 조약
소련 수립 조약은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를 포함한 4개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소련을 창설하기 위해 체결한 조약으로, 공산주의 체제 강화와 연방 정부 구조 및 공화국 권한을 규정했으나 스탈린 집권 이후 변질되었고 소련 해체 과정에서 효력 논쟁이 있었다. - CS1 - 프랑스어 인용 (fr) - 유고슬라비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 왕국을 중심으로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등을 통합하여 건국되었으나 민족 갈등, 독재,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된 국가이다. - CS1 - 프랑스어 인용 (fr) - 1946년 유고슬라비아 헌법
1946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은 유고슬라비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인민공화국이자 연방제 국가임을 선포한 후 제정된 헌법으로, 유고슬라비아를 6개의 연방주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정의하며 소련 헌법과 유사한 특징을 보였으나, 공산당의 권력 강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유고슬라비아의 수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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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슬로건 | |
슬로건 | 하나의 민족, 하나의 왕, 하나의 국가 |
국가 | |
국가 | 신이여, 정의를! |
수도 | |
수도 | 베오그라드 |
정부 |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
역사적 시대 | |
역사적 시대 | 제1차 세계 대전 |
유고슬라브 통일 선언 | |
유고슬라브 통일 선언 | 1918년 12월 1일 |
면적 | |
면적 | 247,542 제곱킬로미터 |
인구 | |
인구 | 12,017,323명 |
통화 | |
통화 | 유고슬라브 디나르 |
2. 발상의 기원
모든 남슬라브족을 위한 국가라는 발상은 17세기 후반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는 크로아티아의 작가들과 철학자들의 선견지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여러 제국의 점령 하에서 수세기 동안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단결하여 폭정과 독재 정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믿었다.
1848년, ''남슬라브 연방을'' 수립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세르비아 정부가 시작한 이 계획은 베오그라드 비밀 조직의 멤버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지배 계층과 가까운 사람들도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의식이 가장 강했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정치적 미래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여 각 부족(유고슬라비아인)은 외부 환경이 허락하는 한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하나된 방향으로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다.[1]
# 모든 슬라브족에게는 연방 제도가 허용된다.
# 유고슬라비아인들은 한 명의 지도자, 즉 국왕을 수반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국가를 형성한다. 그 자리는 세습된다.
# 유고슬라비아인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의 세 유고슬라비아 부족으로 나뉜다.
# 각 부족은 왕의 대리인이 이끄는 입법부(국회)가 재무, 사무, 내무 및 종무 등을 관리하기 전까지 완전한 자주권을 가진다. 대리인은 지역 주민들 중에서 서기를 선출하고 국왕에게 제출하여 승인을 받는다.
# 국왕은 모든 부족 구성원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로 구성된 내각을 가지게 된다. 국회에서 세 부족은 모두 동등하게 대표된다. 군대 역시 동등하게 된다. 또한, 군대는 집결되고 그 비용도 균등하게 분배된다.
# 각 부족은 고유한 방언으로 주민들을 교육할 기회가 주어지고, 세르비아어와 키릴 문자가 행정과 문학에 사용된다.
#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된다. 그들의 예배와 관행은 동등하며 필요하다면 전례 언어로 이루어진다.
# 크로아티아 부족은 다음 지역을 관할한다: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군사 국경 포함), 크라이나, 케른텐, 슬라브 슈타이어마르크 지역를 포함하는 이스트라, 육상 국경에서 브르바스와 북부 달마티아, 체티나까지의 보스니아, 이전에 크로아티아 국왕의 수도가 있었던 스플리트와 자그레브 지역.
# 세르비아 부족은 다음 지역을 관할한다: 세르비아, 소피아, 마케도니아, 제타, 코토르와 두브로브니크만, 남부 달마티아 및 그 섬들, 헤르체고비나, 브르바스에서 드리나까지의 보스니아, 보이보디나를 포함한 시르미아.
# 다른 모든 지역은 불가리아 부족이 관할한다.
# 각 부족들은 외국의 침략자로부터 공유지를 해방하기 위해 서로 돕는다.
# 각 유고슬라비아 부족은 자신들의 민족 이름을 유지하지만, 외교적으로는 그들은 모두 유고슬라비아인으로 불리며 그들의 국가는 유고슬라비아로 불린다.
19세기, 일리리아 운동은 크로아티아의 저명한 지식인과 정치인을 끌어들였다. 이 운동은 1848년 혁명과 남슬라브족의 자유 운동에 반대하는 정책으로 인해 19세기 말에야 큰 추진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통일 국가에 대한 아이디어는 개념적인 수준에서 실제적인 계획 단계로 성숙되지 않았으며, 그러한 실체를 추진하는 사람들 중 새로운 국가가 어떠한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베를린 회의 이후, 오스만 제국이 약해지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가 강해지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남슬라브족의 주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생겼고, 이들 사이의 연합이라는 발상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학자 아우렐 포포비치는 1906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제안은 합스부르크 황제에 의해 실행되지 못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말 평화 회의에 영감을 제공하였다.
토미슬라브 바추린은 19세기 초 유고슬라비아의 구상자 중 한 명이었다. 유고슬라비아 발상은 폴란드인와 서방의 다른 서슬라브계 이민자들에 의해 고안되었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되는 것을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하며, 모든 남슬라브족의 공통 국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프란티셰크 자흐(슬라브 호혜주의를 지지하는 모라비아인)를 영입하고, "나체르타니예"라는 초안을 작성하여 베오그라드로 파견하였다.
1917년 5월 31일, 안톤 코로셰츠는 빈에서 슬로베니아 국민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이중 군주제에서 삼중 군주제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는 5월 선언을 낭독하였다. 선언의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더 이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만 나뉘지 않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제국 내에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개체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해당 선언은 거부되었다.
2. 1. 19세기 일리리아 운동과 민족주의
19세기, 일리리아 운동은 크로아티아의 저명한 지식인과 정치인을 끌어들였다. 이 운동은 1848년 혁명과 남슬라브족의 자유 운동에 반대하는 정책으로 인해 19세기 말에야 큰 추진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모든 남슬라브족을 위한 국가라는 발상은 17세기 후반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이는 크로아티아의 작가들과 철학자들의 선견지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여러 제국의 점령 하에서 수세기 동안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단결하여 폭정과 독재 정권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믿었다.1848년, 남슬라브 연방을 수립하려는 계획이 세르비아 정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계획은 베오그라드 비밀 조직의 멤버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지배 계층과 가까운 사람들도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의식이 가장 강했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정치적 미래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베를린 회의 이후, 오스만 제국이 약해지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가 강해지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남슬라브족의 주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생겼고, 이들 사이의 연합이라는 발상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학자 아우렐 포포비치는 1906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합스부르크 황제에 의해 실행되지 못했다.
토미슬라브 바추린은 19세기 초 유고슬라비아의 구상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프란티셰크 자흐(슬라브 호혜주의를 지지하는 모라비아인)를 영입하고, "나체르타니예"라는 초안을 작성하여 베오그라드로 파견하였다.
1917년 5월 31일, 안톤 코로셰츠는 빈에서 5월 선언을 낭독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이중 군주제에서 삼중 군주제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였다. 해당 선언은 거부되었다.
2. 2. 1848년 혁명과 남슬라브 연방 계획
1848년, 세르비아 정부 주도로 남슬라브 연방 수립 계획이 세워졌다. 이 계획에는 베오그라드 비밀 조직 구성원들이 참여했다.[1] 이들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세 부족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국가를 구상했으며, 각 부족은 자주권을 가지되,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단일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 각 부족은 고유한 방언을 사용하며, 세르비아어와 키릴 문자가 행정과 문학에 사용될 예정이었다.[1]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각 부족은 외세로부터 서로를 돕고, 외교적으로는 모두 유고슬라비아인으로 불리며 국가는 유고슬라비아로 불릴 예정이었다.[1]19세기 일리리아 운동은 크로아티아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통일 국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미흡했다. 오스만 제국이 약해지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가 강해지면서 남슬라브족의 연합이라는 발상이 탄력을 받았다. 1906년 아우렐 포포비치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토미슬라브 바추린은 폴란드인 및 서슬라브계 이민자들의 영향을 받아 남슬라브족 공통 국가 수립을 구상했고, 프란티셰크 자흐를 통해 "나체르타니예" 초안을 베오그라드에 전달했다. 1917년 안톤 코로셰츠는 5월 선언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삼중 군주제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되었다.
2. 3. 베를린 회의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
19세기 말, 베를린 회의 이후 오스만 제국이 약화되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가 강해지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남슬라브족의 주권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고, 이들 사이의 연합이라는 발상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1] 학자 아우렐 포포비치는 1906년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제안은 합스부르크 황제에 의해 실행되지 못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말 평화 회의에 영감을 제공하였다.[1]3. 제1차 세계 대전과 유고슬라비아의 형성
3. 1. 유고슬라비아 위원회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안테 트룸비치, 이반 메슈트로비치, 니콜라 스토야디노비치 등 합스부르크 제국의 남슬라브 지역 출신 여러 유명 정치인들은 런던으로 도피하여 그곳을 본거지로 삼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남슬라브족을 대표할 위원회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유고슬라비아 위원회는 1915년 4월 30일 런던에서 결성되었으며,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는 남슬라브족을 중심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일된 유고슬라비아 또는 남슬라브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북아메리카와 영국에 거주했던 추방된 유고슬라비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위원회의 주요 지지자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위원회 위원들은 그들의 지위 덕분에 연합국 정부에 자신들의 견해를 알릴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운명이 불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 정부는 위원들의 견해를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위원회의 기본 목표는 합스부르크의 남슬라브 영토를 세르비아 왕국(당시 독립국)과 통일하는 것이었지만, 더 시급한 관심사는 이스트라와 달마티아의 합스부르크 영토에 대한 이탈리아의 영유권 주장을 막는 것이었다. 1915년, 연합국은 상당한 영토를 확보해주겠다는 약속으로 이탈리아를 전쟁에 끌어들였다. 런던 비밀 조약에 따르면, 여기에는 이탈리아계와 슬라브계 주민이 섞여 사는 이스트라와 달마티아 상당 부분이 포함되었다.
3. 2. 코르푸 선언 (1917)
1916년, 망명 중이던 세르비아 의회는 코르푸 시립 극장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건국에 찬성하기로 결정하였다.[2] 1917년 6월과 7월에 유고슬라비아 위원회는 코르푸에서 세르비아 정부와 회동하였고, 7월 20일에 전후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는 코르푸 선언을 발표하였다.[3] 선언의 서문에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이 "혈통, 언어, 통일의 감정, 분할되지 않은 영토의 연속성과 무결성, 그리고 국가적 생존과 도덕적, 물질적 삶의 다양한 발전이라는 공통의 중대한 이익에 의해 동일하다"고 명시되어 있었다.[3] 미래의 국가는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이라 불리며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입헌군주국이 될 예정이었다.[3]3. 3.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 (1918)
1918년 10월 6일,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되자 친협상파인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 민족 평의회가 자그레브에서 권력을 잡았다.[4] 10월 29일, 유고슬라비아주의자였던 크로아티아 사보르(의회)는 독립을 선언하고 새로운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에 주권을 부여하였다. 이 국가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의 연합 국가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하였다.[4]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의 민족 평의회는 크로아티아의 무정부 상태를 통제하기 위해 세르비아 군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4] 그러나 세르비아와의 통합 조건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이자 크로아티아-세르비아 연합의 지도자이며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의 부통령이었던 스베토자르 프리비체비치는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통합을 원했다. 반면, 스테판 라디치는 세르비아 국왕, 크로아티아 반(Ban), 슬로베니아 민족 평의회 의장 등 세 명의 국가 원수가 있는 남슬라브 연방의 수립을 요구하였다.[4]
결국 민족 평의회는 세르비아와의 통일에 동의하였고, 1918년 12월 1일 베오그라드에서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이 선포되었다.[5]
3. 4. 세르비아 왕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삼국협상의 일원으로 승리한 세르비아 왕국은 동맹국에 완패하여 점령당했다가, 코르푸에서 회복한 후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전투에 복귀하였다. 1918년 9월 바르다르 계곡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불가리아군을 물리치고 불가리아를 항복시켰으며, 한 달 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해체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세르비아 군대는 북마케도니아를 포함한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바나트 바치카 바라냐, 시르미아를 빠르게 점령하고,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3. 4. 1. 시르미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붕괴된 후, 시르미아는 새로 형성된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국의 일부가 되었다. 1918년 10월 29일,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자치 왕국) 의회는 빈과 부다페스트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1918년 11월 5일, 제문 마을은 동맹군의 철수로부터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세르비아 왕립군을 초청하였다. 1918년 11월 24일, 자결권에 대한 결정에 따라 역사적으로 세르비아주(Vojvodship)에 해당했던 시르미아의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의 지방 의원들이 루마에서 민족 평의회를 구성하였다. 크로아티아계 주민이 주로 거주하는 서부 지역(쇼카디야 지역)의 의원들은 이 의회에 대표를 두지 않았다. 민족 평의회는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과 자그레브의 지도부가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어 행동이 느릴 것을 우려하여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의 공동 국가를 만드는 데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위원회는 또한 이러한 통일 프로젝트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세르비아 국민의 땅의 일부로 국가에 합류할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3. 4. 2. 바나트 바치카 바라냐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제가 해체되면서, 노비사드에서 세르비아 민족 위원회가 설립되어 바나트, 바치카, 바라냐 지역의 임시 행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부네브치족 등 다른 슬라브족도 포함하려 했다. 판체보 지방 행정부는 베오그라드에 세르비아 왕립군의 보호를 요청했다.1918년 11월 25일, "바나트, 바치카, 바라냐의 세르브인, 부네브치인, 다른 슬라브족의 대인민의회"가 구성되어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세르비아인 578명, 부네브치인 84명, 슬로바키아인 62명 등 총 757명의 대표가 참여했다. 이들은 세르비아 왕국과의 즉각적인 통합을 주장하는 급진파의 의견을 채택했다. 의회는 해당 지역을 세르비아 왕국에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임시 행정 기관을 선출했다. 베오그라드 정부는 통합을 수용했지만, 지방 행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3. 4. 3.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는 원래 제타 국가에 속했던 땅을 해방하고, 이후 남슬라브 지역을 통일하려는 민족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열망에 의해 건국되었다. 1907년 몬테네그로에서 의회 제도가 탄생하였고, 최초의 정당인 인민당은 세르비아의 민족 통일과 해방과 함께 다른 슬라브족과의 협력과 유대감을 형성해야 한다고 표명하였다. 니콜라 1세 몬테네그로 국왕은 세르비아와 점차 냉담한 관계에 접어들고, 세르비아 혁명에서 자신과 조국이 수장을 잃은 데 실망하였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6]
1916년 초 세르비아 육군의 그리스 탈출을 지원하기 위해 세르비아 편에서 전쟁에 참전한 직후, 몬테네그로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점령당했다. 1918년에 연합군은 몬테네그로를 장악하고 점령을 위한 공동 임무를 수행하였다. 1918년 10월 15일, 세르비아 정부는 통일 과정을 조직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통일을 위한 중앙 집행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열흘 후 위원회는 새로운 선거법에 따라 전국 선거 일정을 잡기로 결정하였다.
몬테네그로 헌법에 위배되는 이 결정으로 세르비아가 만든 위원회는 몬테네그로 의회를 폐지하였고, 휴전 협정이 체결된 날 국왕의 의회 회기 명령을 뒤집었다.[6] 이 결정의 공식적인 이유는 국회의원의 2/5가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의원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 적격 유권자 명단 없이 선거가 치러졌으며,[7] 세르비아 공무원들이 투표를 통제했다고 알려졌다.[6] 그렇게 선출된 포드고리차 의회(공식적으로는 몬테네그로 세르브인 대인민의회)는 세르비아 군대의 분견대에 포위되었다.[8] 1918년 11월 26일, 포드고리차 의회는 페트로비치-네고시 왕조를 폐위하고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를 왕으로 추대했으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의 공동 국가를 수립할 때까지 세르비아와 연합하기로 결정하였다.
포드고리차 의회는 마르코 다코비치의 지휘 하에 "세르비아와의 통합을 위한 몬테네그로 위원회"라는 임시 집행 기관을 선출하였고, 이 기관은 1919년 4월 23일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 정부가 집권할 때까지 몬테네그로의 통합을 감독하였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반발은 1919년 초 합병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크리스마스 봉기로 확대되었다. 국제 지도자들은 봉기에 반대했고, 세르비아군은 반란을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9]
3. 5. 불가리아의 유고슬라비아 합류 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불가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 측에 가담했지만 패전했다. 초기 연합국은 1915년 런던 조약을 통해 불가리아를 연합국 측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세르비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바다로 통하는 출구를 제공하는 대가로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불가리아에 양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정부는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았고, 불가리아는 결국 동맹국에 합류했다.전쟁이 끝날 무렵,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와 같은 많은 불가리아 정치인들은 유고슬라비아 합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는 연합군과의 전쟁 배상금 문제를 피하고, 마케도니아의 동족과 통합하려는 목적이었다. 세르비아 지도부는 1915년 런던 조약을 수용하여 세르비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라보니아, 남부 달마티아를 얻고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양도한 다음,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간의 유고슬라비아 국가를 형성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이 제안에 따르면,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 거주 지역 대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남아 추후 해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연합국이 민족자결주의를 옹호하며 런던 조약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자체가 붕괴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모든 남슬라브 지역이 유고슬라비아 국가에 편입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4.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 (1918-1929)
4. 1. 국가 গঠন 초기 겪은 문제들
건국 초기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케른텐 지방은 오스트리아에 남기로 결정되었다. 달마티아의 항구 도시 자라(자다르)와 몇몇 달마티아 섬들은 이탈리아에 양도되었다. 피우메(리예카)시는 피우메 자유국으로 선포되었으나, 곧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점령하였다가 1924년 로마와 베오그라드 간 양자 협정으로 이탈리아에 합병되었다.이탈리아는 달마티아 해안의 다른 지역을, 유고슬라비아는 이스트라를 영유권으로 주장하며 양국 간 국경 분쟁이 이어졌다. 이스트라의 주요 도시에는 이탈리아-베네치아 사람들이 거주했지만, 농촌 지역은 남슬라브족(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5. 유고슬라비아 왕국 (1929-1941)
6. 제2차 세계 대전과 유고슬라비아 (1941-1945)
6. 1.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저항 운동
7.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1945-1992)
7. 1. 티토-스탈린 결렬 (1948)
7. 2. 비동맹 운동과 유고슬라비아
8.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1991-1992)
8. 1. 유고슬라비아 전쟁 (1991-2001)
9.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1992-2003)
10.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2003-2006)
11. 몬테네그로 독립과 유고슬라비아의 완전한 해체 (2006)
12. 유산과 교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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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rbijansko-crnogorska saradnja 1830–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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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the municipal 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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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ll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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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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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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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eb.archive.[...]
2009-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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