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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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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태빈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소속 고위 관료로,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총독부 관료로 근무하며 경기도 참여관, 강원도 및 충청북도 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으며, 매일신보 기고 및 친일 단체 활동을 통해 전쟁 지원을 선전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고,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었으며,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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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빈
기본 정보
이름윤태빈
한글윤태빈
한자尹泰彬
가타카나유ン・테비ン

2. 생애

윤태빈은 한성부 출신으로 관립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어에 능통하여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총독부 소속 관리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1935년 경기도 참여관, 이후 강원도충청북도 지사를 역임하며 1942년 퇴임 때까지 약 22년간 고위 관료로 재직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1]

2. 1. 출생과 초기 경력

188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03년 관립 일어 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어학교 부교관, 관립 고등소학교 일어 교수 등을 역임했다.[1] 1910년 2월 12일 관세국 촉탁을 거쳐,[2] 같은 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용원이 되었다.[2]

2. 2. 일제 강점기 관료 생활

한성부 출신으로, 관립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어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총독부 소속 관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도청 내무부에서 일하다가 1935년 경기도 참여관에 올랐으며, 이후 강원도충청북도의 지사를 지내면서 1942년 퇴임 때까지 약 22년간 총독부 소속 고위 관료를 역임했다. 퇴임 무렵에는 조선귀족의 예우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종4위, 정4위에 서위되기도 했다.[3][4]

1910년 2월 12일 관세국 촉탁을 거쳐[2], 같은 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용원이 되었다[2]1912년 총독부 도서기에 임명되어 경기에서 근무했다[2]1921년 도리사관이 되어, 경기도 내무부 권업과장[2], 1922년 경기도 산업과장, 1930년 함경남도 재무부장, 1932년 충청남도 내무부장 등을 역임했다[2]1935년 경기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전임, 1936년부터 경기도 지방미곡통제조합 회장을, 1938년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겸임[1]했다. 1939년 강원도 지사로 임명되었다. 1940년 충청북도 지사로 전임[1], 1942년 퇴관했다[1]

경기도 참여관으로 재직하던 1936년 매일신보에 신년사를 실어 총독부의 시정방침을 선전하고 일본 황실의 번영과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1938년에는 매일신보의 대담기사에서 중일 전쟁과 관련하여 조선의 병참기지로서의 사명을 강조하고, 경기도의 역할에 특히 기대되는 바가 크다는 발언을 했다. 1939년에 또다시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내선일체의 제일선에 활약하는 황군장병의 노고를 격려”하면서 후방에서도 국책수행에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충청북도 지사로 재임 중이던 1941년에도 《조광》과 매일신보에 전쟁 지원을 역설하는 친일 기고문을 실었다.

관직 활동 외에 1933년 조선신궁 설치 1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결성된 조선신궁봉찬회에서 평의원을 지냈고, 중일 전쟁 발발로 인한 전시체제 구축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사회교화방송 상식강좌에는 강사로 참여했다. 같은 해 애국금차회가 발족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발기인회에 참석해서 모임 결성의 취지를 설명한 일이 있다. 1937년 애국금차회가 결성되자, 동회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1]1938년에는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 따라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실행하며 황국신민으로서의 각오를 다지고 후방의 동요를 막자는 취지로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역임했다.

지방관을 지내는 동안 군국주의 성격이 강한 관제 외곽단체 조선국방의회연합회와 반공주의를 주창하는 조선방공협회, 치안 유지를 내세우며 반일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조직된 지역 단체인 조선경방협회에도 꾸준히 가담했다. 1939년 조선경방협회 강원도 연합지부장 자격으로 "지금 항일정권은 변방에 숨어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을 비하한 일이 있다.

2. 3. 친일 행적

한성부 출신 윤태빈은 관립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어에 능통하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부터 조선총독부 소속 관리로 근무했다. 1935년 경기도 참여관을 시작으로 강원도충청북도 지사를 역임하며 1942년 퇴임할 때까지 약 22년간 고위 관료로 재직했다. 퇴임 무렵에는 조선귀족에 준하는 종4위, 정4위에 서위되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3][4]

1936년 경기도 참여관 재직 시절, 《매일신보》에 신년사를 실어 총독부 시정방침을 선전하고 일본 황실의 번영과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1938년 매일신보 대담 기사에서 중일 전쟁과 관련, 조선의 병참기지로서의 사명을 강조하며 경기도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1939년 매일신보 기고를 통해 “내선일체의 제일선에 활약하는 황군장병의 노고를 격려”하며 후방의 국책수행 동참을 촉구했다. 1941년 충청북도 지사 재임 중에는 《조광》과 매일신보에 전쟁 지원을 역설하는 친일 기고문을 게재했다.

관직 활동 외에도 1933년 조선신궁 설치 10주년 기념사업 조선신궁봉찬회 평의원, 중일 전쟁 관련 사회교화방송 상식강좌 강사로 참여했다. 같은 해 애국금차회 발족에 주도적 역할을 하며 발기인회에서 모임 결성 취지를 설명했다. 1938년 신사참배 강요 정책에 따라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실행, 황국신민으로서의 각오를 다지고 후방 동요를 막기 위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역임했다.

군국주의 성향의 관제 외곽단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반공주의를 내세운 조선방공협회,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반일 움직임을 감시한 조선경방협회 등에도 가담했다. 1939년 조선경방협회 강원도 연합지부장 자격으로 "지금 항일정권은 변방에 숨어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운동을 폄하했다. 1943년 식량 수탈을 위한 조선중요물자영단 감사, 1944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을 역임하는 등 광복 직전까지 활동했다.

2. 4. 해방 이후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후에 석방되었다[1]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납북되었다[1]2004년 대한민국에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었다[1]

3. 약력

연도내용
1903년관립한성일어학교 졸업, 외국어학교 교관 (판임관 6등)
1910년관세국 촉탁
1912년경기도 도서기
1915년경기도 제1부 도서기
1917년경기도 장관 관방 도서기 (겸임)
1921년경기도 도이사관/산업과장
1922년경기도 내무부 도이사관 상공과장
1924년고등관 6등
1930년함경남도 도사무관/재무부장
1932년충청남도 도사무관/내무부장, 충청남도 도농회장
1934년충청남도 도사무관
1935년경기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
1936년경기도 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
1939년경기도 도농회장, 강원도 지사
1940년충청북도 지사
1942년종4위 서위, 정4위 서위


4. 훈포장 서훈 내역

연도내용
1928년쇼와기념대례장
1929년훈6등 서보장
1934년훈5등 서보장
1939년훈4등 서보장
1942년훈3등 서보장


5. 사후 평가

윤태빈은 여러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파 목록에 수록되었다.

발표 연도명칭수록 부문
2002년친일파 708인 명단도지사, 도 참여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2007년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관료
2008년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관료


참조

[1] 웹사이트 윤태빈(尹泰彬) http://encykorea.aks[...] 2022-08-24
[2] 웹사이트 윤태빈 ( 尹泰彬 ) http://db.history.go[...] 国史編纂委員会
[3]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4-03-18
[4]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www.ilyosisa.[...] 일요시사 200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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