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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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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이명은 조선 숙종, 경종, 영조 시대의 문신으로, 노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세종대왕의 후손이자 사헌부 대사헌 이민적의 아들로,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숙종의 후사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연잉군(영조)을 지지했으며, 경종 즉위 후 영조의 대리청정을 시도하다 소론의 반발로 유배되었다. 이후 역모 혐의로 사사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복권되었다. 그는 서양 문물에 개방적이었으며,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소재집》, 《동국강역도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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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이명
이이명
작위조선의 정치인
출생일1658년 2월 2일 (음력 1월 1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722년 6월 13일 (음력 4월 30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사망 원인사사(賜死)
거주지조선 한성부
국적조선
종교유교(성리학)
배우자김만중의 딸 김수혜(金秀惠)
자녀1남 5녀
부모생부 이민적, 양부 이민채
친척형 이사명, 조부 이경여

2. 생애

이이명은 조선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의 후손으로, 왕족의 먼 후예였다. 서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서인노론소론으로 분열될 때 노론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이민적이며, 지평 이민채의 양자로 들어갔다.[2]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 박사, 수찬, 응교, 헌납, 이조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3] 1680년(숙종 6년) 별시문과에 급제,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후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1686년 문과중시에 재차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호조참의로 복귀했다. 이후 대사간까지 승진했으나, 기사환국 때 송시열 등과 함께 죽은 형 사명(師命)이 정치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자, 1698년 이를 문제삼았다가 공주로 유배되었다. 1699년 유배가 풀렸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701년에 예조판서로 특임되었으며, 이후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등을 지냈다.[3]

갑술환국 이후 호조참의를 거쳐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1706년 우의정이 되었고, 1708년 좌의정,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3] 1717년 숙종은 병환중에 그를 비밀리에 불러 독대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의 후사(後嗣)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독대(獨對)라는 형식으로 숙종과 비밀리에 만나, 세자(뒤의 경종)가 아닌 연잉군(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고 이들의 후원을 자임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다.[3]

1720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연경을 방문했다. 연경에서 독일,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들과 서양 학자들을 만나 교류하며 천주교, 천문학, 역산 등 서양 학문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이듬해 귀국하여 이를 조선에 소개했다.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와 함께 빈청에 모여 마음속으로 정해둔 사람을 세자로 세우기로 하고, 그 이름을 써서 펴 보기로 하였다. 이들은 모두 '양(良)'자를 써서 보였는데, 이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의 아호가 양심헌(養心軒)이었기 때문이다.[2]

이후 경종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노론 4대신과 함께 세제 대리청정을 제기하여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시키려 하였으나, 소론의 반발로 실패하여 파직당하고 경상남도 남해로 유배되었다. 그 뒤 역모 고변이 터져, 그의 아들 이기지(李器之)가 관련된 목호룡의 고변 때 임금으로 추대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 도중 한강진(漢江津)에서 사사되었다가 영조 즉위 후 복권되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2. 1. 생애 초반

이이명은 조선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의 후손으로, 왕족의 먼 후예였다. 서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서인노론소론으로 분열될 때 노론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이민적이며, 지평 이민채의 양자로 들어갔다.[2] 아버지 이민적은 홍문관에서 숙직할 때 이이명을 데리고 가서, 상번 방에서 하번 방까지 뛰게 한 뒤 배가 꺼졌는지를 묻고 나서 계속 책을 읽게 하여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2] 숙종 때 사형당한 참판 이사명은 그의 형이었다.

2. 2. 관료 생활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 박사, 수찬, 응교, 헌납, 이조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3] 1680년(숙종 6년) 별시문과에 급제,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후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1686년 문과중시에 재차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영해(寧海)에 유배되었다.

여러 번 대제학 물망에 올랐으나, 기사환국 때 사형당한 이사명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남인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강원도감사를 거쳐 승정원의 승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송시열, 김석주노론 거물의 지원 아래 노론의 기수로 활동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의 공격을 받고 영해와 남해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호조참의로 복귀했다. 대사간까지 승진했으나, 기사환국 때 송시열 등과 함께 죽은 형 사명(師命)이 정치적으로 신원되지 못하자, 1698년 이를 문제삼았다가 공주로 유배되었다. 1699년 유배가 풀렸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1701년에 예조판서로 특임되었으며, 이후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등을 지냈다.[3]

2. 2. 1. 숙종과의 독대와 후사 문제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호조참의에 제수된 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06년 우의정이 되었고, 1708년 좌의정,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3] 1717년 병환중의 숙종은 그를 비밀리에 불러 독대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숙종의 후사(後嗣) 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독대(獨對)라는 형식으로 숙종과 비밀리에 만나, 세자(뒤의 경종)가 아닌 연잉군(뒤의 영조)의 보호를 부탁받고 이들의 후원을 자임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다.[3]

숙종이 임종하기 직전(?) 독대(1717년 정유독대)를 하였을 때 소론이 지지하는 세자(경종)에게 불리한 말을 하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지지하여 소론과 남인의 불만을 샀다.

윤지완은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의 독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4] 또한 숙종과 여러 차례 독대를 하면서 그 내용은 숙종이 교묘하게 사관들을 따돌렸으므로 왕조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 점이 문제가 되어 뒷날 임인옥사 때 사형의 빌미를 제공한다.

2. 2. 2. 서구 문물 견학

1720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는 고부사(告訃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연경을 방문했다. 연경에서 독일, 포르투갈 출신 선교사들과 서양 학자들을 만나 교류하며 천주교, 천문학, 역산 등 서양 학문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이듬해 귀국하여 이를 조선에 소개했다.

이이명은 고부사로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서양 선교사들과 학자들을 사귀고, 돌아올 때 천주교와 서양 서적들을 들여오는 등 서양 문물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2. 3. 소론과의 정쟁과 최후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와 함께 빈청에 모여 마음속으로 정해둔 사람을 세자로 세우기로 하고, 그 이름을 써서 펴 보기로 하였다. 이들은 모두 '양(良)'자를 써서 보였는데, 이는 영조가 즉위하기 전의 아호가 양심헌(養心軒)이었기 때문이다.[2] 그러나 훗날 소론은 '양(良)'자가 그의 자인 양숙(養叔)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모함하며 탄핵하였다.[2] 남인과 소론은 그가 경신환국으로 사형당한 이사명의 동생이라는 점, 서양 문물에 호의적이고 개방을 주장하는 점, 숙종과 비밀 독대를 한 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공격했다.

이후 경종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노론 4대신과 함께 세제 대리청정을 제기하여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시키려 하였으나, 소론의 반발로 실패하여 파직당하고 경상남도 남해로 유배되었다. 그 뒤 역모 고변이 터져, 그의 아들 이기지(李器之)가 관련된 목호룡의 고변 때 임금으로 추대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 도중 한강진(漢江津)에서 사사되었다가 영조 즉위 후 복권되었다.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제향되었다.

3. 사후

영조 때 경신처분으로 복관되었으며 경기도 과천의 사충서원에 제향되었다. 충문(忠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 사상과 신념

이이명은 유교적 화이사상에 입각하면서도 서구 문물의 유용성을 인정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록 서구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청나라에서 가져온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양 학문을 접하고 이를 조선 사회에 소개하려 노력했다.[1] 그러나 당시 시대적 한계와 소론, 남인의 정치적 반대에 부딪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노론 출신 외교관들이 청나라고증학실학 사상, 그리고 서구 문물에 관심을 갖고 이를 국내에 소개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1]

이이명은 양반 사대부에게도 군포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양반 사대부 역시 조선의 백성이므로 양민들과 동등하게 병역을 적용하고, 병역을 징발하거나 군포, 호포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남인계와 서인계 모두의 비난에 직면하였다.

4. 1. 서구 문물 수용

이이명은 유교적 화이사상에 입각하면서도 서구 문물의 유용성을 인정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비록 서구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청나라에서 가져온 서양 서적들을 통해 서양 학문을 접하고 이를 조선 사회에 소개하려 노력했다.[1] 그러나 당시 시대적 한계와 소론, 남인의 정치적 반대에 부딪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노론 출신 외교관들이 청나라고증학실학 사상, 그리고 서구 문물에 관심을 갖고 이를 국내에 소개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1]

4. 2. 양반 군포 징수

이이명은 양반 사대부에게도 군포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양반 사대부 역시 조선의 백성이므로 양민들과 동등하게 병역을 적용하고, 병역을 징발하거나 군포, 호포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남인계와 서인계 모두의 비난에 직면하였다.

5. 저서


  • 《소재집》
  • 《동국강역도설》
  • 《전산촬요》
  • 《강도삼충전》

6. 관련 문화재

7.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병산집
[2] 서적 대동기문(하) 국학자료원 2006
[3] 웹사이트 이이명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4] 웹사이트 http://sunday.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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