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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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바티스트 세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자유주의 사상가로, '세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767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나 제네바에서 성장했으며, 영국에서 상업 견습 생활을 거쳐 프랑스 혁명기에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철학, 학문, 정치의 시대》 잡지 편집장을 맡아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했으며, 나폴레옹 정부에서 호민원 재무 담당을 역임했다. 세는 《정치경제학 개론》을 통해 기업가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생산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의 법칙'을 제시했다. 그의 경제학 방법론은 주관적 가치론과 인간 행동학을 기반으로 했으며, 정부 지출과 과세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했다. 그는 1831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부임했으나 이듬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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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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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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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바티스트 세 |
출생 | 1767년 1월 5일 |
출생지 | 리옹, 프랑스 왕국 |
사망 | 1832년 11월 15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국적 | 프랑스 |
분야 | 정치경제학 |
사상적 경향 | 프랑스 자유주의 학파 |
영향 | 리처드 캔틸런, 애덤 스미스, 피에트로 베리 |
주요 기여 | 세의 법칙, 기업가 정신 |
학력 및 경력 | |
소속 | (정보 없음) |
모교 | (정보 없음) |
업적 | |
수상 | (정보 없음) |
기타 | |
서명 | (정보 없음) |
RePEc 식별자 접두사 | (정보 없음) |
RePEc 식별자 | (정보 없음) |
2. 생애
세는 리옹에서 태어났으며, 낭트 칙령 폐지 이후 제네바로 이주한 프로테스탄트 집안 출신이다. 1767년 리옹에서 위그노(프랑스 칼뱅주의 개신교)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는 이탈리아인 수사의 기숙 학교에서 역사,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배웠고, 1780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파리로 이주했다.
1785년부터 2년간 상인의 견습생으로 동생과 함께 영국에서 지낸 후, 에티엔 클라비에르가 운영하는 파리의 보험 회사에서 근무했다. 이후 영국으로 보내져 런던 크로이든 구역의 한 상인의 집에서 머물며 실업가로서의 경력을 쌓았고, 런던에서 계속 일하다가 프랑스로 돌아와 에티엔 클라비에르가 운영하는 생명 보험 회사에서 일했다.
1792년, 공화주의자이자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 세는 의용병으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제국 연합군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 시기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제5판을 읽고 자유 방임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1793년에는 전직 변호사의 딸인 델로슈 양과 결혼했다.
1794년부터 1800년까지 잡지 "철학의 10년(La Décade philosophique)"의 편집을 맡았다. 그는 앙시앵 레짐 시대의 사상 속에서 계몽주의적인 자유주의를 부흥시키려 했으며, 데스튀 드 트라시와 함께 프랑스 자유주의 학파의 창시자이자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이후 호민원의 재무 담당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프랑스 학술원의 현상 논문에 응모했지만 낙선했고, 1800년 "올비(Olbie)"를 출판했다. 1803년에는 주저 "경제학 개론(Traité d'économie politique)"을 출판했으나,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한 이 책은 나폴레옹에 의해 금서가 되었고, 1804년 세는 호민원에서 면직되었다. 1805년 프랑스 북단의 칼레로 이주하여 면 공장을 설립, 성공적인 경영으로 부를 축적한 후 1812년 파리로 돌아와 투자가로 살았다.
나폴레옹 몰락 후 1814년, 정치경제학 개론 제2판을 출판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데이비드 리카도, 윌리엄 고드윈 등을 만났다. 1815년에는 이들을 정리한 수기를 출판했다. 루이 18세의 복고 왕정은 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1816년 국립 대학의 경제학 교관, 1819년 왕립 공예원의 산업 경제학 교수로 초빙했다. 1828년에는 강의록이 출판되었다.
1819년과 1822년에는 리카도가 파리의 세를 방문했고, 1820년에는 J·S·밀이 잠시 머물렀다. 이 무렵, 세의 법칙을 둘러싼 일반 과잉 공급 논쟁이 일어났고,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와 시스몽디의 과소 소비 설을 공격했다.
1831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치경제학 교수로 부임했으나, 다음 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세는 만년에 신경성 졸도 발작을 겪었고, 1832년 11월 15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1]
2. 1. 초기 생애
세는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는 낭트 칙령 폐지의 여파로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세는 상업적인 경력을 쌓기 위해, 1785년 형제 오라스와 함께 영국으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다.[4] 그는 잠시 런던 크로이든 구역의 한 상인의 집에서 머물며 실업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5]
이후 런던에서 계속 일했으며, 나중에 프랑스로 돌아와 에티엔 클라비에르가 운영하는 생명 보험 회사에서 일했다.[4]
1767년 프랑스 남동부의 리옹에서 위그노 (프랑스 칼뱅주의 개신교)에 속하는 직물 상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는 이탈리아인 수사의 기숙 학교에서 역사,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배웠다. 1780년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파리로 이주했다.
1785년부터 2년간, 상인의 견습생으로 동생과 함께 영국에서 보낸 후, 클라비에르가 운영하는 파리의 보험 회사에 근무했다 (클라비에르는 제네바의 은행가로 1792년에 프랑스 혁명기의 지롱드파의 재무 장관이었고, 후에 투옥되어 옥사했다).
2. 2. 프랑스 혁명과 저술 활동
세는 1789년 언론의 자유에 관한 팸플릿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1] 이후 미라보의 ''프로방스 통신''에서 활동했고, 1792년에는 샹파뉴 전역에 자원병으로 참여했다. 1793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유행에 따라 아티쿠스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에티엔 클라비에르의 비서가 되었다.[1]1794년부터 1800년까지 아담 스미스의 교리를 설명하는 ''라 데카드 필로소피크, 리테레르, 에 폴리티크''라는 정기 간행물을 편집하여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확립했다. 1799년 통령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트리부나의 100명의 구성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데카드''의 편집장직을 사임했다. 1800년에는 ''올비, 우 에세르 쉬르 레 무옌 드 레포르메 레 뫼르 데 윈 나시옹''을 출판했고, 1803년에는 주요 저서인 ''경제학 논고, 또는 부가 형성, 분배 및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단순한 설명''을 출판했다.[1] 나폴레옹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기를 꺼린 세는 1804년 트리뷴 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산업 활동으로 전환하여 면화 제조 공정에 익숙해진 후, 약 400~500명의 주로 여성과 어린이를 고용하는 방적 공장을 오시레제댕의 파드칼레에 설립했다. 그는 여가 시간을 경제학 논문을 수정하는 데 할애했지만, 당시 시행되던 국가 검열 시스템으로 인해 재출판할 수 없었다.
1814년, 세는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입하여 발생한 상대적인 자유를 이용하여 자신의 저서를 인용하여 자신의 제자라고 자처했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황제에게 헌정하는 두 번째 판을 출판했다. 같은 해 프랑스 정부는 그를 영국 경제 상황을 연구하기 위해 파견했고, 그의 관찰 결과는 소책자 ''드 랑글테르 에 데 장글레''에 실렸다. ''논고''의 세 번째 판은 1817년에 출판되었다.[1]
1819년에는 국립 공예 학교에 산업 경제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1825년에는 ''상업 및 산업 특별 학교''(나중에 파리 고등 상업 학교, 현재 ESCP 비즈니스 스쿨)의 개선 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비즈니스 스쿨 중 하나이다. 1831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정치 경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28~1830년에는 ''실천 정치 경제학 강좌''를 출판했다.[1]
2. 3. 나폴레옹 시대와 기업 활동
세는 1799년 나폴레옹의 통령 정부에 참여했다. 1804년, 나폴레옹 정부에 참여하기를 부담스러워한 세이는 결국 정부를 떠나 다시 실업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드칼레의 오시에 500명(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 가량이 일하는 방적 공장을 소유했다. 그리고 여가 시간에는 자신의 경제학 논문 저술에 전념했다.1799년 통령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그는 트리부나의 100명의 구성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데카드''의 편집장직을 사임했다. 나폴레옹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굽히기를 꺼린 세는 1804년 트리뷴 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산업 활동으로 전환하여 면화 제조 공정에 익숙해진 후, 약 400~500명의 주로 여성과 어린이를 고용하는 방적 공장을 오시레제댕의 파드칼레에 설립했다. 그는 여가 시간을 경제학 논문을 수정하는 데 할애했지만, 당시 시행되던 국가 검열 시스템으로 인해 재출판할 수 없었다.
1799년의 나폴레옹의 쿠데타 후에 호민원의 재무 담당으로 취임했다. 1803년에는, 주저 "경제학 개론(Traité d'économie politique)"을 출판했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하는 이 논문 저작은 나폴레옹의 눈에 띄어, 세를 사적 회합에 소환한 다음, 전쟁 경제의 구축을 위해 보호 정책과 규제에 대해 다시 쓰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동 저작은 금지되었고, 1804년에는 호민원을 면직되었다. 또한 다른 직책으로의 취임을 제안받았지만, 통령 정부에 실망한 그는 1805년에 프랑스 북단의 칼레로 이주하여 Auchy-lès-Hesdin에서 면 공장을 설립했다. 이것이 대성공하여, 1812년에는 경영 주식을 전매하여 부유해진 그는 파리로 돌아와 투자가로 살았다.
2. 4. 나폴레옹 몰락 이후
1814년 세는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입하여 발생한 상대적인 자유를 이용하여 자신의 저서를 인용하여 자신의 제자라고 자처했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황제에게 헌정하는 두 번째 판을 출판했다.[2] 같은 해, 프랑스 정부는 그를 영국 경제 상황을 연구하기 위해 파견했고, 그의 관찰 결과는 소책자 ''드 랑글테르 에 데 장글레''에 실렸다.[2] ''경제학 논고''의 세 번째 판은 1817년에 출판되었다.[2]1819년 국립 공예 학교에 산업 경제학 강좌가 개설되었다.[2] 1825년 ''상업 및 산업 특별 학교''(나중에 파리 고등 상업 학교, 현재 ESCP 비즈니스 스쿨)의 개선 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비즈니스 스쿨 중 하나이다.[2] 1831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정치 경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2] 1828년~1830년 그의 ''실천 정치 경제학 강좌''를 출판했다.[2]
2. 5. 개인적인 삶과 죽음
세는 리옹에서 태어났다. 낭트 칙령 폐지의 여파로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건너간 프로테스탄트 집안 출신이다. 1767년 프랑스 남동부 리옹에서 위그노 (프랑스 칼뱅주의 개신교)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는 이탈리아인 수사의 기숙 학교에서 역사, 이탈리아어, 라틴어를 배웠다. 1780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파리로 이주했다.1785년부터 2년간, 상인의 견습생으로 동생과 함께 영국에서 보낸 후, 에티엔 클라비에르가 운영하는 파리의 보험 회사에 근무했다. (클라비에르는 제네바의 은행가로 1792년 프랑스 혁명기 지롱드파의 재무 장관이었고, 후에 투옥되어 옥사했다.) 이후 세는 영국으로 보내져 런던 크로이돈 구역의 한 상인의 집에서 머물며 실업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런던에서 계속 일했으며, 나중에 프랑스로 돌아와 에티엔 클라비에르가 운영하는 생명 보험 회사에서 일했다.
1792년, 공화주의자이자 프랑스 혁명의 성립을 크게 기뻐한 세는 의용병으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제국 연합군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 무렵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제5판을 구독하고 자유 방임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1794년 공화주의자 협회의 주필이 되었고, 1794년부터 1800년까지 잡지 "철학의 10년(La Décade philosophique)"의 편집을 맡았다. 그 논조는 89년의 대혁명 이후, 수상쩍은 것으로 여겨졌던 앙시앵 레짐 시대의 사상 속에서 계몽주의적인 자유주의를 부흥시키려 한 것이다. 그가 속한 단체는 "이론가 협회(La société des idéologues)"라고 불렸으며, 데스튀 드 트라시와 함께 프랑스 자유주의 학파의 창시자이자 지도적 입장이 되었다.
1793년, 세는 전직 변호사의 딸인 델로슈 양과 결혼했다.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 후 호민원의 재무 담당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프랑스 학술원의 현상 논문에 응모했지만 낙선, 1800년 "올비(Olbie)"로 출판된다 (올비는 세가 생각한 가상 국가의 명칭). 1803년, 주저 "경제학 개론(Traité d'économie politique)"을 출판했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하는 이 논문은 나폴레옹의 눈에 띄어, 세를 사적 회합에 소환한 다음, 전쟁 경제 구축을 위해 보호 정책과 규제에 대해 다시 쓰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동 저작은 금지되었고, 1804년에는 호민원에서 면직되었다. 다른 직책으로의 취임을 제안받았지만, 통령 정부에 실망한 그는 1805년 프랑스 북단의 칼레로 이주하여 Auchy-lès-Hesdin에서 면 공장을 설립했다. 이것이 대성공하여, 1812년에는 경영 주식을 전매하여 부유해진 그는 파리로 돌아와 투자가로 살았다. 나폴레옹 몰락 후 1814년, 정치경제학 개론 제2판을 출판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데이비드 리카도와 윌리엄 고드윈 등을 만났고, 리카도와 함께 벤담이나 J·S·밀을 방문하거나,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애덤 스미스가 사용했던 강단에 서서 감격했다고 한다. 1815년에 이들을 정리한 수기를 출판했다.
루이 18세의 복고 왕정은 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많은 포상이 주어졌다. 1816년 국립 대학의 경제학 교관으로 초빙, 1819년 왕립 공예원의 산업 경제학 교수로 초빙되었고, 1828년에는 강의록이 출판되었다. 1819년과 22년에는 리카도가 파리의 세를 방문했고, 20년에는 J·S·밀이 잠시 머물렀다. 이 무렵, 세의 법칙을 둘러싼 일반 과잉 공급 논쟁이 일어났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 앞으로의 서한(1820년)이나 시스몽디와의 백과사전적 리뷰 지상(1824년)에서, 그들의 주장한 과소 소비 설을 공격했다.
1831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치경제학 교수로 부임했으나, 그 다음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814년 자신의 저서 '정치경제학개론' 재판을 발행했는데, 그는 이것을 스스로를 세의 제자라 자칭해온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게 헌정했다. 같은 해 프랑스 정부의 파견으로 대영제국의 경제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와 그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정치경제학개론' 제3판은 1817년에 나왔다. 1831년 경제학자로는 처음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에 초빙되었다. 프랑스 자유주의 학파 창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세는 만년에 신경성 졸도 발작을 겪었다. 1830년 1월 아내를 잃었고, 그때부터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해 7월 혁명이 발발하자 세는 센 주 의회 의원으로 임명되었지만 사임해야 했다.[1]
세는 1832년 11월 15일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3. 세의 법칙
장바티스트 세는 세의 법칙(혹은 세이의 시장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세의 법칙은 "판로 법칙(Loi des débouchés)" 또는 "세의 시장 법칙(Say's law of markets)"이라고도 불린다.
세의 법칙은 산업 혁명 초기, 생산량 증가라는 경제 현상이 영국이 판매와 실업을 모두 유지할 수 없는 주기적인 무능력과 결합되면서 등장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생산 성장에 한계가 있으며, 생성된 모든 산출물을 구매할 수단이 없는 시점이 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세이는 자신의 저서 『정치경제학 강요(Traité d’économie politique, 1841, 6판)』 제1권 제15장 "판로에 관하여(Des débouchés)"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화폐가 이 상호 교환에서 수행하는 것은 일시적인 역할일 뿐이다. 교환이 끝나고 나면, 어떤 생산물에 다른 생산물이 지불되었다는 것을 항상 발견하게 된다.
>
> 다음 사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어떤 생산물은 만들어지는 즉시, 그 순간부터, 그 자신의 총액에 상당하는 다른 생산물의 판로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세이는 맬서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과잉 생산 및 과소 생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30]
> 상품의 잉여, 소위 과잉 생산의 문제에 있어서, 상품의 공급이 증가하면 당연히 가격이 하락하므로, 하나 이상의 재고가 있다면, 수요를 자극하기 위해 가격은 모든 상품을 청산할 때까지 내려가고, 잉여는 일어나지 않는다.
>
> 또, 과소 생산에 있어서도, 가격을 올리면 민첩한 기업가들은 이윤을 추구하고, 공급이 증가하게 된다. 요는 가격을 변경하면 된다.
>
> 혹은, 공급의 증가로 생산비를 충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에 있어서도, 생산량의 증가는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오므로 판매 가격 및 생산비를 낮춘다.
>
> 노동 등 생산 용역의 고착으로 인해 공급의 증가로도 비용을 충당할 수 없다는 가능성에 있어서도, 이들은 항상 대체 용도가 존재하고, 그것들과의 경쟁으로 그러한 높이까지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이러한 요인이 기업 또는 산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거나 멸망의 우려에 처하게 된다면, 이는 이러한 요인들이 다른 곳에서 더욱 생산적이며, 그 중요한 사실이 단순히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이의 법칙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주요 내용
그는 세의 법칙(혹은 세이의 시장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세의 법칙은 종종 다음과 같이 축약된다."공급은 자체적인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정확한 문구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만들어냈으며, 그는 이전 두 문구와 마찬가지로 이 네 가지 진술을 모두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여 비판했다. 그러나 세이의 법칙 옹호자들을 포함한 일부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의 해석을 오해라고 주장하며 그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6]
존 스튜어트 밀(1848)과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1808)의 저작에도 비슷한 정서가 다른 표현으로 나타난다. 제임스 밀은 1808년에 세이의 법칙을 다시 기술하면서 "상품의 생산은 상품 시장을 창출하며, 이것이 상품 시장을 창출하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원인이다"라고 썼다.[7]
세이는 "제품은 제품으로 지불된다"(1803, p. 153), "과잉 공급은 한 종류의 제품에 너무 많은 생산 수단이 투입되고 다른 종류의 제품에는 충분하지 않을 때만 발생할 수 있다"(1803, pp. 178–179)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했다.[8]
세이는 또한 돈의 풍요가 아니라 다른 제품의 일반적인 풍요가 판매를 촉진한다고 썼다.[10]
세이의 법칙은 전도서 5장 11절("재물이 많아지면 그것을 먹는 자도 많아지니 재물을 가진 자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으랴?", KJV)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세이의 법칙을 "잘못된 경우를 포함하여 경제적 아이디어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예"로 간주했다.[11]
세이의 법칙은 상품 생산이 해당 재화 및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자본, 노동, 토지의 구성 요소 공급자에게 소득을 지불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상품의 판매 가격은 임금, 임대료, 이윤의 지불액의 합이다.[12] 상품 생산 과정에서 창출된 소득은 해당 상품의 가치와 같다. 따라서 산출량 증가는 해당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데 필요한 소득 증가를 초래한다.
세이는 "공급은 그 자체의 수요를 창출한다"라고 요약되는 세이의 법칙으로 유명하다. 그는 교환 경제에서 교환을 전제로 한 재화를 생산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 생산자를 위한 동등 가치의 소득을 생산하므로, 어떤 생산 재화가 경제에 투입되면 반드시 그 재화를 구매하기 위한 충분한 수요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생산량은 수요보다는 재화의 공급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세이의 교환 경제에서는 실업이나 토지, 기타 자원의 유휴는 있을 수 없으며, 만약 존재한다면 거래상의 제약이 있다고 보았다. (세이의 실업관에는 18세기~19세기 초 프로테스탄트적 실업관의 윤리적 한계가 있다. 실업 항목 참조)
그는 자신의 학문 분야의 적절한 방법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자신의 연구 기초로 사용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17] 그는 최고 걸작인 "개론"의 서론에서, 경제학은 일반적 사실로부터의 엄격한 추론에 의한 확고부동한 제 원칙이 그 기초가 된다고 말하며,[19] 미제스와 같은 "인간 행동학" 방법론에 도달했다. 이 학문은 물질 세계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고, 사려 깊은 관찰과 분석을 통해 밝혀진 결과가 사실을 설명하므로, 이론과 실제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렇다면 무의미하다고 보았다.[20][21] 그는 이 학문에 수학을 사용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반대했다.[22] 가치와 수량에는 크고 작음이 있어 수학의 범위에 들어가는 듯하지만, 인간의 주관적 평가에 노출되어 그 영향 정도를 엄정하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정확한 여건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23][24] 그는 이 학문은 엄밀히 정성적 학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애덤 스미스의 신봉자가 아니라, 스콜라 철학에서 시작하여 리처드 칸틸론,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로 이어지는 대륙의 주관적 가치 전통 속에 있었다.[17] 그는 오스트리아 학파와 같은 "생산 단계" 개념을 선취했다.[17][25] 그는 대부 시장에서 이자는 자본의 수요(정비례)와 자본의 공급(반비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17][26]
그는 거의 모든 경제학자와 달리, 국가와 과세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명민했다. 정부는 자체와 그들이 좋아하는 서비스를 공급하며, 모든 정부 지출은 정치가와 관료에 의한 소비 지출이고, 이는 납세의 강제로 일반 사람들의 부담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명확히 이해했다. 과세는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자원을 빼앗으므로, 생산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망친다고 명확히 지적했다.[27] 그러므로 최소한의 과세가 최선이라고 보았다.[28][29]
그는 화폐가 경제적 영향에 있어서 중립적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다. 화폐는 자체 목적이 아니라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을 위해 소망된다. 화폐 순환 속 화폐량 증가는 다른 재화의 화폐 환산 가격을 증가시키지만(인플레이션의 원인), 재화의 상대 가격이나 생산량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 생각은 후에 경제학자들에 의해 화폐 수량설로 발전했다.
세이의 생각은 19세기 후반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영감을 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세이의 법칙이라고 불린 논의는 후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격렬하게 비판받았다. 경제학자 장바티스트 세의 저서 『정치경제학 강요(Traité d’économie politique, 1841, 6판)』 제1권 제15장 "판로에 관하여(Des débouchés)"에서 유래하여 "판로 법칙(Loi des débouchés)" 또는 "세의 시장 법칙(Say's law of markets)"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과잉 생산 및 과소 생산설 등에 대한 반론은 대부분 맬서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제시되어 있다.[30]
3. 2. 케인즈의 비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공급은 자체적인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문구를 직접 만들었고, 세이의 법칙을 비판했다. 케인스는 "총공급은 그 자체의 총수요를 창출한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문구와 자신이 만든 문구를 동일한 의미로 간주했다.[6] 그러나 세이의 법칙 옹호자들을 포함한 일부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의 해석이 오해라고 주장하며, 세이의 법칙은 실제로는 "생산이 소비에 선행한다"로 더 정확하게 요약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세이가 소비하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여 교환(돈 또는 물물교환)을 통해 나중에 소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말한다.제임스 밀은 1808년에 세이의 법칙을 다시 기술하면서 "상품의 생산은 상품 시장을 창출하며, 이것이 상품 시장을 창출하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원인이다"라고 썼다.[7] 존 스튜어트 밀의 저작에도 비슷한 정서가 다른 표현으로 나타난다.
세이의 법칙은 후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격렬하게 비판받았다.
3. 3. 대한민국에서의 논의
장바티스트 세는 세이의 법칙(혹은 세이의 시장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세이의 법칙은 종종 다음과 같이 축약된다."공급은 자체적인 수요를 창출한다"라는 정확한 문구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만들어냈으며, 그는 이전 두 문구와 마찬가지로 이 네 가지 진술을 모두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여 비판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의 해석을 오해라고 주장하며 그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으며,[6] 세이의 법칙은 실제로 "생산이 소비에 선행한다"로 더 정확하게 요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슷한 정서는 존 스튜어트 밀(1848)과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1808)의 저작에 나타난다. 제임스 밀은 1808년에 세이의 법칙을 다시 기술하면서 "상품의 생산은 상품 시장을 창출하며, 이것이 상품 시장을 창출하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원인이다"라고 썼다.[7]
세이는 "제품은 제품으로 지불된다"(1803, p. 153) 또는 "과잉 공급은 한 종류의 제품에 너무 많은 생산 수단이 투입되고 다른 종류의 제품에는 충분하지 않을 때만 발생할 수 있다"(1803, pp. 178–179)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요점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8]
> 제품이 생성되자마자 즉시 다른 제품을 위한 시장을 그 가치만큼 충분히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생산자는 제품에 마무리를 가하면 가치가 손상될 수 있으므로 즉시 판매하려는 의지가 가장 강하다. 그는 또한 제품 판매로 얻은 돈을 처분하는 데에도 똑같이 열심이다. 돈의 가치 역시 썩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제품의 창조라는 단순한 상황 자체가 즉시 다른 제품을 위한 출구를 열어준다.[9]
세이는 또한 돈의 풍요가 아니라 다른 제품의 일반적인 풍요가 판매를 촉진한다고 썼다.[10]
> 돈은 이중 교환에서 순간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며, 거래가 최종적으로 종료되면 항상 한 종류의 상품이 다른 종류의 상품으로 교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이의 법칙은 전도서 5:11 - "재물이 많아지면 그것을 먹는 자도 많아지니 재물을 가진 자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으랴?" (KJV)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세이의 법칙을 "잘못된 경우를 포함하여 경제적 아이디어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예"로 간주했다.[11]
시장의 세이의 법칙은 상품의 생산이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자본, 노동, 토지의 구성 요소 공급자에게 소득을 지불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상품의 판매 가격은 임금, 임대료, 이윤의 지불액의 합이다.[12] 상품 생산 과정에서 창출된 소득은 해당 상품의 가치와 같다. 따라서 산출량의 증가는 해당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데 필요한 소득의 증가를 초래할 것이다.
4. 기업가 정신 이론
세는 1789년 언론의 자유에 관한 팸플릿을 출판하며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미라보 밑에서 ''프로방스 통신''에서 일했고, 1792년에는 샹파뉴 전역에 자원병으로 참여했다. 1793년에는 아티쿠스라는 필명으로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에티엔 클라비에르의 비서가 되었다.[3]
1794년부터 1800년까지 아담 스미스의 교리를 설명하는 ''라 데카드 필로소피크, 리테레르, 에 폴리티크''라는 정기 간행물을 편집하며 언론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1799년 통령 정부 수립 후 트리부나의 10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어 ''데카드'' 편집장직을 사임했다. 1803년에는 주요 저서인 ''경제학 논고, 또는 부가 형성, 분배 및 구성되는 방식에 대한 단순한 설명''을 출판했다.[3]
나폴레옹의 이익을 위해 신념을 굽히기를 거부한 세는 1804년 트리뷴 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산업 활동으로 전환하여 방적 공장을 설립, 운영하면서 여가 시간에 경제학 논문을 수정했다. 1814년,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입하여 발생한 자유를 이용하여 자신의 제자라고 자처했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황제에게 헌정하는 ''논고''의 두 번째 판을 출판했다. 같은 해, 프랑스 정부는 그를 영국 경제 상황 연구를 위해 파견했고, 그 결과는 ''드 랑글테르 에 데 장글레''라는 소책자에 실렸다. ''논고''의 세 번째 판은 1817년에 출판되었다.[3]
1819년 국립 공예 학교에 산업 경제학 강좌가 개설되었고, 1825년에는 ESCP 비즈니스 스쿨의 개선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831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정치 경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828~1830년에는 ''실천 정치 경제학 강좌''를 출판했다.[3]
세는 기업가 정신을 경제학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으며, 모든 생산 과정은 노력, 지식 및 기업가의 "적용"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그는 기업가를 토지, 자본, 노동과 같은 생산 요소를 결합하여 소비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생산 과정의 중개자로 정의했다. 세는 기업가가 경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조정 기능을 수행한다고 강조했다.[3]
4. 1. 기업가의 역할
세는 그의 주요 경제 저서인 『경제학 논고』에서 모든 생산 과정은 노력, 지식 및 기업가의 "적용"을 필요로 한다고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기업가는 토지, 자본, 노동과 같은 생산 요소를 결합하여 소비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생산 과정의 중개자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경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조정 역할을 수행한다.[3]세는 대규모 기업가뿐만 아니라 자영업자도 연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는 또한 성공적인 기업가에게 필수적인 자질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업가는 시장의 요구와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을 지속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이는 "정확한 시장 감각"을 필요로 한다.[3]
세는 기업가의 조정 기능을 강조하면서 기업가적 소득을 주로 기업가의 기술과 전문 지식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되는 높은 임금으로 간주했다. 그는 기업 기능과 자본 공급 기능을 구분함으로써 기업가의 수입과 자본에 대한 보상을 별도로 고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기업가적 임대료를 높은 위험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한 요제프 슘페터(슘페터적 임대료)의 이론과는 분명히 다르다.[3] 세는 또한 기업가 정신을 논의하면서 위험과 불확실성 뿐만 아니라 혁신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그들의 관계를 깊이 조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4. 2. 위험, 불확실성, 혁신
세는 그의 주요 경제 저서인 경제학 논고에서 모든 생산 과정은 노력, 지식 및 기업가의 "적용"을 필요로 한다고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기업가는 토지, 자본, 노동과 같은 생산 요소를 결합하여 소비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생산 과정의 중개자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경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조정 역할을 수행한다.[3]세는 대규모 기업가뿐만 아니라 자영업자도 연구했다. 그는 성공적인 기업가에게 필수적인 자질로 판단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업가는 시장의 요구와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을 지속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이는 "정확한 시장 감각"을 필요로 한다.[3]
세는 기업가의 조정 기능을 강조하면서 기업가적 소득을 주로 기업가의 기술과 전문 지식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되는 높은 임금으로 간주했다. 그는 기업 기능과 자본 공급 기능을 구분함으로써 기업가의 수입과 자본에 대한 보상을 별도로 고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기업가적 임대료를 높은 위험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한 요제프 슘페터의 이론(슘페터적 임대료)과는 분명히 다르다.[3]
세는 또한 기업가 정신을 논의하면서 위험과 불확실성 뿐만 아니라 혁신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그들의 관계를 깊이 조사하지는 않았다.
4. 3. 슘페터와의 비교
세는 그의 주요 경제 저서인 『경제학 논고』에서 모든 생산 과정은 노력, 지식 및 기업가의 "적용"을 필요로 한다고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기업가는 토지, 자본, 노동과 같은 생산 요소를 결합하여 소비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생산 과정의 중개자이며, 경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조정 기능을 수행한다.[3]세는 대규모 기업가뿐만 아니라 자영업자도 연구했다. 그는 성공적인 기업가에게 필수적인 자질로 판단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기업가는 시장의 요구와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을 지속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이는 "정확한 시장 감각"을 필요로 한다.[3]
세는 기업가의 조정 기능을 강조하면서 기업가적 소득을 주로 기업가의 기술과 전문 지식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되는 높은 임금으로 간주했다. 그는 기업 기능과 자본 공급 기능을 구분함으로써 기업가의 수입과 자본에 대한 보상을 별도로 고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기업가적 임대료를 높은 위험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한 요제프 슘페터의 이론(슘페터적 임대료)과는 분명히 다르다.[3] 세는 또한 기업가 정신을 논의하면서 위험과 불확실성 뿐만 아니라 혁신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그들의 관계를 깊이 조사하지는 않았다.
5. 경제학 방법론
세이는 "공급은 그 자체의 수요를 창출한다"라고 요약되는 세이의 법칙으로 유명하다. 그는 교환 경제에서 재화 생산은 자동적으로 생산자에게 동등 가치의 소득을 창출하므로, 어떤 생산 재화가 경제에 투입되면 그 재화를 구매하기 위한 충분한 수요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생산량은 수요보다는 재화의 공급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세이의 교환 경제에서는 실업이나 토지, 기타 자원의 유휴는 있을 수 없으며, 만약 존재한다면 거래상의 제약이 있다고 보았다. (※ 세이의 실업관에는 18세기~19세기 초의 프로테스탄트적 실업관의 윤리적 한계가 있다. 실업 항목 참조)
그는 오스트리아 학파와 같은 "생산 단계"의 개념을 제시했다.[25][17]
그는 대부 시장에서 이자는 자본의 수요(정비례)와 자본의 공급(반비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26][17]
그는 거의 모든 경제학자와 달리, 국가와 과세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명확히 이해했다. 그는 정부는 그 자체와 그들이 좋아하는 서비스를 공급하며, 따라서 모든 정부 지출은 정치가와 관료에 의한 소비 지출이며, 그것은 납세의 강제로 일반 사람들의 부담에서 얻어지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과세는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자원을 그들로부터 빼앗으므로, 생산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망친다고 명확히 지적했다.[27] 그러므로 최소한의 과세가 최선이라고 보았다.[28][29]
그는 또한, 화폐는 경제적 영향에 있어서 중립적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다. 화폐는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을 위해 소망된다. 화폐 순환 속에서의 화폐량 증가는, 다른 재화의 화폐로 환산한 가격을 증가시키지만 (인플레이션의 원인), 재화의 상대 가격이나 생산량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생각은, 후에 경제학자들에 의해, 화폐 수량설로 발전했다.
세이의 생각은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영감을 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세이의 법칙이라고 불린 논의는, 후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격렬하게 비판받았다.
5. 1. 주관적 가치론
세이는 애덤 스미스의 추종자가 아니라, 스콜라 철학에서 시작하여 리처드 칸틸론,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로 이어지는 대륙의 주관적 가치 전통 속에 있었다.[17] 그는 자신의 학문 분야의 적절한 방법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자신의 연구의 기초로 사용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17]그는 "개론"의 서론에서, 경제학은 일반적 사실로부터의 엄격한 추론에 의한 확고부동한 제 원칙이 그 기초가 된다고 말하며, 미제스와 같은 "인간 행동학" 방법론에 도달했다.[19] 그는 물질 세계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고, 그것들의 사려 깊은 관찰과 분석에 의해 밝혀진 결과, 이것이 사실을 설명하므로, 이론과 실제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20][21]
또한, 그는 경제학에 수학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그것은 무익하다고 반대했다.[22] 그는 가치와 수량에는 크고 작음이 있으므로 수학의 범위에 들어가는 듯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주관적 평가에 노출되며, 그 영향의 정도를 엄정하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정확한 여건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23][24] 그리하여, 그는 경제학은 엄밀히 정성적 학문이라고 지적했다.
5. 2. 인간 행동학 방법론
세이는 자신의 학문 분야의 적절한 방법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자신의 연구 기초로 사용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17] 그는 그의 최고 걸작인 "개론"의 서론에서, 통계학[18]과 대비하여, 경제학은 일반적 사실로부터의 엄격한 추론에 의한 확고부동한 제 원칙이 그 기초가 된다[19]라고 말하며 미제스와 같은 "인간 행동학" 방법론에 도달했다. 이 학문은 물질 세계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고, 그것들의 사려 깊은 관찰과 분석에 의해 밝혀진 결과를 설명하므로, 이론과 실제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20][21]또한, 세이는 이 학문에 수학을 사용하는 것은 무익하다고 반대했다.[22] 그는 언뜻 보기에 가치와 수량에는 크고 작음이 있으므로 수학의 범위에 들어가는 듯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주관적 평가에 노출되며, 그 영향의 정도를 엄정하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정확한 여건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23][24] 그리하여, 그는 이 학문은 엄밀히 정성적 학문이라고 지적했다.
5. 3. 반(反)수학적 접근
세이는 자신의 학문 분야의 적절한 방법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자신의 연구의 기초로 사용한 최초의 경제학자였다.[17] 그는 그의 최고 걸작인 "개론"의 서론에서, 통계학[18]과 대비하여, 경제학은 일반적 사실로부터의 엄격한 추론에 의한 확고부동한 제 원칙이 그 기초가 된다[19]라고 말하며 미제스와 같은 "인간 행동학" 방법론에 도달했다. 이 학문은 물질 세계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물의 본질을 연구하고, 그것들의 사려 깊은 관찰과 분석에 의해 밝혀진 결과, 이것이 사실을 설명하므로, 이론과 실제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20][21] 또한, 그는 이 학문에 수학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무익하다고 반대했다.[22] 언뜻 보기에 가치와 수량에는 크고 작음이 있으므로 수학의 범위에 들어가는 듯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주관적 평가에 노출되며, 그 영향의 정도를 엄정하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정확한 여건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23][24] 그리하여, 그는 다시 이 학문은 엄밀히 정성적 학문이라고 지적했다.6. 정부와 과세에 대한 관점
세이는 화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중립적이라고 주장한 초기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화폐 자체보다는 화폐로 살 수 있는 물건 때문에 사람들이 화폐를 원한다고 보았다. 세이는 화폐량이 증가하면 다른 재화의 가격이 상승하지만(인플레이션의 원인), 재화의 상대 가격이나 생산량은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훗날 경제학자들에 의해 화폐 수량설로 발전했다.[17]
6. 1. 화폐의 중립성
세이는 화폐가 경제적 영향에 있어서 중립적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화폐는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그것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을 위해 소망된다고 보았다. 화폐 순환 속에서의 화폐량 증가는 다른 재화의 화폐로 환산한 가격을 증가시키지만(인플레이션의 원인), 재화의 상대 가격이나 생산량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후에 경제학자들에 의해 화폐 수량설로 발전했다.[17]7. 저작
- Traité d'économie politique, ou simple exposition de la manière dont se forment les richesses|정치경제학 논고, 또는 부의 형성 방식에 대한 단순한 설명프랑스어, 1803년 (제6판), 증이 유키오 역, 이와나미 쇼텐, 다이쇼 15년
- Catéchisme d'économie politique, ou Instruction familière qui montre de quelle façon les richesses sont produites, distribuées et consommées dans la société|정치경제학 문답, 또는 사회에서 부가 생산, 분배, 소비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친숙한 설명프랑스어, 1817년, 호리 쓰네오, 하시모토 히토시(번역), 겐다이시칸, 1967년
- 샤를르 콩트, Mélanges, et correspondance d'économie politique, ouvrage posthume|정치, J.-B.세의 서한 모음프랑스어, 1833년 수록:
- Lettres à M. Malthus, sur différens sujets d'économie politique, notamment sur les causes de la stagnation générale du commerce|일반적인 상업의 정체 원인에 대한 정치경제학의 다양한 주제에 관한 M.맬서스에게 보낸 편지프랑스어, 1820년
- Correspondance, de David Ricardo|데이비드 리카도와의 서신프랑스어, 1815-1822
- de Robert Malthus|로버트 맬서스와의 서신프랑스어, 1827
- de Thomas Tooke|토마스 투크와의 서신프랑스어, 1825-1828
- Correspondance sur les crises|공황에 관한 서신프랑스어 세계 고전 문고, 나카노 타다시(번역), 니혼 효론샤, 쇼와 25년
- Petit volume contenant quelques aperçus des hommes et de la société|정치경제학 발전 약사프랑스어 Aperçus de l'histoire du développement de l'économie politique|경제학 발전 소사프랑스어 시코쿠가쿠인대학 창립 25주년 기념 논문집, 하시모토 히토시(번역), 시코쿠가쿠인대학 문화학회, 1975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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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Baptiste Say's 1785 Croydon street p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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詰り統計学は特定の事実のこれまでに変化した類型の記述であり、歴史のように多少不正確であるので、必然的に不完全である、と。夫れ自体が複雑な事実であり、経済学によって説明されることを必要としているのだ、と。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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詰り、1+1=2というのは、暗黙のうちに夫れが均質であることを含意している。我々が、甲の1がアキタコマチで、乙の1がコシヒカリであると、夫れは別の物であると認識しているなら、最早斯かる等式は成り立たない。常に変化する主観的評価に晒される現実では、測定の為めの共通の単位が無いので当に無益である。一体どこにあるのか。夫れは定義を待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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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ical Economics:An Austrian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Volume II
Edward Elgar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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