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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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익은 삼국 시대 촉한의 장수로, 유비가 익주를 평정했을 때 서좌로 임명되었다. 남중 지역을 다스리다 이민족의 반란으로 소환되었으나, 제갈량의 신임을 얻어 북벌에 참여했다. 제갈량 사후에는 전군도독, 관내후를 역임하며 강유의 북벌에 동참했으나, 강유와 갈등을 겪었다. 촉한 멸망 후 종회에게 항복했으나, 종회의 난에 휘말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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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장익 |
한자 표기 | 張翼 |
로마자 표기 | Jang Ik |
자 | 백공 |
관직 | 좌차기장군, 기주자사 |
작위 | 도정후 |
출생지 | 익주건위군 무양현 |
사망일 | 264년 3월 3일 |
사망 장소 | 성도 |
소속 국가 | 촉한 |
가족 관계 | 장량 (선조), 장위 (아들) |
관력 | |
주요 활동 | 군사, 정치 |
초기 관직 | 서남중랑장, 자강도독 |
주요 경력 | 상서 전령군 부풍태수 (명목상) 정서대장군 진남대장군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제갈량, 유선, 종회 |
묘 | 성도무후사 |
후대 평가 | 강직하고 용감한 장수 |
2. 생애
고조부는 사공 장호이며, 증조부는 광릉군 태수 장강으로 모두 명망과 공적이 있었다.
장익은 제갈량 사후, 촉한의 중신으로서 내정과 군사 양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연희 원년(238년)에 상서가 되었고, 독건위·가절·정서대장군으로 승진하여 도정후에 봉해졌다.[31]
경요 6년(263년) 촉나라가 위나라에 멸망할 때 강유와 함께 검각에서 종회에게 항복했다. 이듬해 정월, 종회를 따라 성도로 갔다가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진수는 장익이 강유의 북벌에 반대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아들 장미는 서진의 광한태수가 되었지만, 이특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후한 말, 현재의 쓰촨성메이산 시펑산 구에 위치한 검위군 무양현에서 태어났다.[2] 그는 전한의 창시자인 유방(고 황제)을 섬긴 전략가이자 정치가인 장량의 10대손이다. 그의 증조부 장호와 조부 장강은 각각 순제 치세에 사공과 광릉군 태수를 역임했다.[4]214년, 군벌 유비가 익주 (현재의 쓰촨성과 충칭시를 포함)를 유장으로부터 빼앗아 새로운 익주목이 되자, 장익을 서좌(書佐)로 임명했다.[5]
후한의 건안 연간(196–220) 말에 효렴 (문관 후보)으로 추천되었고, 이후 강양현(江陽縣; 현재의 루저우시, 쓰촨성)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중에 부릉현(涪陵縣; 현재의 펑수이현, 충칭시)의 현령으로 재임명되었으며, 이후 군 태수로 승진했다. 그는 이어서 자통군(梓潼; 현재의 쯔퉁현, 쓰촨성 일대), 광한군(廣漢; 현재의 광한시, 쓰촨성 일대), 촉군(蜀; 현재의 청두시, 쓰촨성 일대)의 태수를 역임했다.[6]
한중 공방전에서 조운의 부하로 복무했으며, 한수 전투에서 조조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고, 퇴각하는 적군 병사 다수가 죽임을 당했다.[7]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고(입촉), 익주목을 겸임했을 때 서좌로 발탁되었다. 그 후, 효렴으로 추천되어, 강양현장, 부릉현령, 재동군태수, 광한군태수, 촉군태수를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면양현장이었을 때, 유비의 한중 공략(정군산 전투)에 참가하여, 조운의 지휘 하에 조조군을 크게 격퇴했다고 한다(『삼국지』촉지 「조운전」의 주에 인용된 『조운별전』).
2. 2. 남중 지역 통치와 이민족 반란
건흥 9년(231년), 장익은 래강도독·수남중랑장이 되어 남중 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나 법 집행이 엄격하여 이민족의 반감을 샀다.[8] 장익은 관할 지역에 촉의 법규를 그대로 적용하여 현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9][10]233년, 이민족의 수령 유주가 반란을 일으켰다.[11][12] 장익은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반란을 진압하기 전에 촉 중앙 정부로부터 성도로 소환 명령을 받았다. 부하들은 즉시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장익은 후임자인 마충이 도착할 때까지 전선에 남아 군량 보급 등 군사 준비를 철저히 했다.[13][14]
장익은 "내가 오랑캐들의 반란을 막지 못해 소환되었지만, 후임자가 아직 오지 않았다. 후임자가 반란을 진압할 수 있도록 물자를 비축하고 운송해야 한다. 지휘권을 잃었다고 공적인 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마충은 장익이 마련해 둔 기반 덕분에 유주의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고, 제갈량은 장익의 행동을 칭찬했다.[15][16]
2. 3. 제갈량의 북벌 참여
제갈량이 무공으로 진군했을 때, 장익은 전군도독이 되었고, 부풍태수를 겸임했다.[17]234년 오장원 전투에서 제갈량이 사망한 후, 장익은 전령군이 되었다. 그는 또한 전투에서의 공헌과 앞서 마충이 유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관내후(關內侯) 작위를 받았다.[18]
2. 4. 강유와의 갈등과 북벌
255년, 장익은 촉의 수도 성도로 돌아와 강유가 계획한 위나라 침공 계획에 대한 논의에 참여했다. 조정에서의 논의 동안, 장익은 강유의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며 촉은 전쟁을 수행할 자원이 부족하고 백성들이 이미 전쟁에 지쳐 있다고 지적했다.[20] 강유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획을 진행했다. 그는 장익을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으로 재임명하고 원정에 참여하도록 명령했다.[21]강유는 왕경, 당시 옹주의 위나라 태수를 디다오(현재의 린타오현, 간쑤성)에서 공격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수만 명의 위나라 군사들이 패배 후 도주하다가 인근 타오강에서 익사했다.[22] 그 시점에서 장익은 강유에게 "이제 그만 멈춰야 합니다. 더 이상 진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얻은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라고 조언했다. 강유가 격노하자 장익은 더 나아가는 것은 "畫蛇添足|화사첨족중국어"(뱀에게 다리를 더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는 불필요한 일을 하여 결국 처음 하려던 것을 망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중국 속담이다.[23]
강유는 장익의 경고를 무시하고 디다오에서 왕경을 계속 포위했지만 디다오의 성벽을 함락시키지 못했다.[24] 진태가 이끄는 위나라의 지원군이 디다오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는 요새를 포기하고 중제(鐘堤, 현재의 린타오현, 간쑤성 남쪽)로 후퇴했다.
장익은 위나라에 대한 강유의 공격적인 입장에 강력히 반대했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유는 여전히 위나라에 대한 군사 원정에 그를 데려갔다. 장익 또한 마지못해 원정에 참여했다.[25]
259년, 촉의 황제 유선은 장익을 좌차기장군(左車騎將軍)으로 승진시키고 기주의 명목상의 자사로 임명했다.[26]
255년, 강유가 북벌을 계획하자, 장익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장익도 진남대장군으로서 북벌에 종군했다. 강유는 도수에서 왕경군을 대파했다(적도의 전투). 그러나, 장익은 이 이상의 전투 지속에 반대하여, 전과에 흠이 생기기 전에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강유는 분노했지만, 장익은 계속 반대했다. 결국, 강유는 적도성에 웅거한 왕경을 포위했지만, 깨뜨릴 수 없었다. 이후 강유는 장익을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하게 되었지만, 북벌 때는 항상 종군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장익도 어쩔 수 없이 따랐다.
259년, 좌차기장군으로 승진하여, 기주자사를 겸임했다.
2. 5. 촉한 멸망과 죽음
263년, 위나라 섭정 사마소는 종회, 등애 등을 시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세 방면에서 촉나라를 침공하도록 명령했다.[27] 이에 맞서 촉나라의 장수 강유, 장익, 요화, 동궐 등은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다. 장익과 동궐은 양안관(陽安關; 일명 양평관 陽平關; 현재의 산시성, 닝창 현에 위치)을 지키고 외부 방어선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7]장익은 후에 강유, 요화와 함께 검문관으로 가서 종회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에 저항했다. 263년 겨울, 등애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가 예상치 못하게 성도 외곽에 나타나자 촉나라 황제 유선은 항복했다. 유선의 항복으로 인해 촉나라는 멸망하고 위나라에 병합되었다.[28] 유선의 항복 소식을 들은 장익과 검문관의 다른 촉나라 장수들은 부현(涪縣; 현재의 쓰촨성, 몐양 시)에서 종회에게 항복했다.[28]
264년 2월 29일, 장익은 종회 등과 함께 성도로 돌아왔다. 그 후 며칠 동안 강유의 지원을 받아 종회는 위나라 섭정 사마소에 대항하여 반란을 계획했다. 3월 3일, 반란에 참여하기를 꺼린 종회의 일부 장교들이 상관에게 반기를 들고 그와 강유를 죽이면서 반란이 발발했다. 장익 또한 이 혼란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29]
3. 《삼국지연의》 속 장익
유비가 촉에 입성할 때, 장익은 유괴의 부하로서 유비군과 맞서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괴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그 후, 조조와의 한중 공방전, 이릉 대전, 제갈량의 남정과 북벌 등에 참여하였다. 제갈량 사후에는 강유와 함께 검각에서 종회에게 항복할 때까지 싸웠다.
촉이 멸망한 다음 해인 264년, 강유와 종회가 위나라에 모반을 일으켰을 때의 혼란 속에서 사망한 것은 정사와 같다.
4. 가계
장익은 후한 말, 현재의 쓰촨성 메이산 시 펑산 구에 위치한 검위군 무양현에서 태어났다.[2] 그는 전한을 세운 유방(고 황제)을 섬긴 전략가이자 정치가인 장량의 10대손이다.[3] 그의 증조부 장호와 조부 장강은 각각 순제 때 사공과 광릉군 태수를 지냈다.[4]
장익의 아들 장미(張微)는 어려서부터 야심 있고 학문에 힘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서진 시대에 광한군(廣漢郡; 현재의 쓰촨성, 광한시 일대)의 태수를 지냈다.[30]
참조
[1]
삼국지
咸熙元年正月十八日日中, ... 姜維率會左右戰,手殺五六人,衆旣格斬維,爭赴殺[鍾]會。
[2]
삼국지
張翼字伯恭,犍為武陽人也。
[3]
후한서
張晧[浩?]字叔明,犍為武陽人也。六世祖良,高帝時為太子少傅,封留侯。
[4]
삼국지
高祖父司空浩,曾祖父廣陵太守綱,皆有名迹。
[5]
삼국지
先主定益州,領牧,翼為書佐。
[6]
삼국지
建安末,舉孝廉,為江陽長,徙涪陵令,遷梓潼太守,累遷至廣漢、蜀郡太守。
[7]
삼국지
公軍追至圍,此時沔陽長張翼在雲圍內,...公軍驚駭,自相蹂踐,墮漢水中死者甚多。
[8]
삼국지
建興九年,為庲降都督、綏南中郎將。
[9]
삼국지
翼性持法嚴,不得殊俗之歡心。
[10]
화양국지
李恢卒後,以蜀郡太守犍為張翼為都督。翼持法嚴,不得殊俗和。
[11]
삼국지
耆率劉胄背叛作亂,翼舉兵討胄。胄未破,會被徵當還,羣下咸以為宜便馳騎即罪
[12]
화양국지
夷帥劉冑反,徵翼,以馬忠為代。忠未至,翼脩攻戰方略、資儲。群下懼。
[13]
삼국지
翼曰:「不然。吾以蠻夷蠢動,不稱職故還耳,然代人未至,吾方臨戰場,當運糧積穀,為滅賊之資,豈可以黜退之故而廢公家之務乎?」
[14]
화양국지
翼曰:「吾方臨戰場,豈可以絀退之故,廢公家之務乎?」
[15]
삼국지
於是統攝不懈,代到乃發。馬忠因其成基以破殄胄,丞相亮聞而善之。
[16]
화양국지
忠至,承以滅冑。
[17]
삼국지
亮出武功,以翼為前軍都督,領扶風太守。
[18]
삼국지
亮卒,拜前領軍,追論討劉胄功,賜爵關內侯。
[19]
삼국지
延熈元年,入為尚書,稍遷督建威,假節,進封都亭侯,征西大將軍。
[20]
삼국지
'[延熈]十八年,與衞將軍姜維俱還成都。維議復出軍,唯翼庭爭,以為國小民勞,不宜黷武。'
[21]
삼국지
維不聽,將翼等行,進翼位鎮南大將軍。
[22]
삼국지
維至狄道,大破魏雍州刺史王經,經衆死於洮水者以萬計。
[23]
삼국지
翼曰:「可止矣,不宜復進,進或毀此大功。」維大怒,曰:「為蛇畫足。」
[24]
삼국지
維竟圍經於狄道,城不能克。
[25]
삼국지
自翼建異論,維心與翼不善,然常牽率同行,翼亦不得已而往。
[26]
삼국지
景耀二年,遷左車騎將軍,領兾州刺史。
[27]
삼국지
及鐘會將向駱谷,鄧艾將入沓中。然後乃遣右車騎廖化詣沓中為維援,左車騎張翼、輔國大將軍董厥等詣陽安關口以為諸圍外助。
[28]
삼국지
'[景耀]六年,與維咸在劒閣,共詣降鍾會于涪。'
[29]
삼국지
明年正月,隨會至成都,為亂兵所殺。
[30]
화양국지
翼子微,篤志好學,官至廣漢太守。
[31]
삼국지
진수의 《삼국지》 45권 촉서 제15 등장종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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