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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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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멸보궁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으로, 불상 대신 사리를 모신다는 특징이 있다. 자장율사가 창건한 이래 불교 성지 역할을 해왔으며, 특히 5대 적멸보궁이 유명하다. 적멸보궁은 건축 양식, 미술적 특징을 통해 불교의 가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역사적으로는 고려 시대 불교 진흥, 임진왜란 시기 승병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6.25 전쟁으로 훼손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대한민국 불교 신도들의 중요한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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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개요
종류불교 사찰 전각
위치대한민국
상세 위치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문화재 지정지정 예정
상세 정보
정의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
역사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사리를 모신 곳에서 유래
특징불상을 모시지 않음
창건 설화와 관련된 다양한 전설 존재
현황대한민국 각지에 위치
대표적인 곳: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등
관련 용어
관련 용어불사리, , 불교

2. 적멸보궁의 유래와 의미

적멸보궁은 본래 석가모니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설법을 펼친 '적멸도량'을 의미했다. 그러나 석가모니 사후에는 그의 진신사리를 모신 , , 암자 등을 가리키는 말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진신사리는 부처님 그 자체로 여겨지기 때문에, 적멸보궁에는 별도의 불상을 모시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일반적인 사찰 건물을 '전(殿)'이나 '각(閣)'으로 부르는 것과 달리, 진신사리를 모신 곳은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보궁(寶宮)', 즉 '궁(宮)'으로 높여 부른다. 이는 적멸보궁이 불교 문화유산으로서 지니는 높은 가치를 보여준다.[4]

2. 1. 적멸도량의 개념

원래 적멸도량은 석가모니보리수 아래에서 설법을 펼친 장소를 의미했다. 하지만 석가모니 사후에는 그의 진신사리를 모신 , , 암자 등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흔히 절 전체를 적멸보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절 내에서도 진신사리를 모신 특정 장소를 '보궁'이라고 칭한다.

진신사리는 곧 석가모니 부처님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에, 진신사리를 모신 곳에는 다른 불상을 두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일반적인 절의 건물을 '전(殿)'이나 '각(閣)'(예: 대웅전, 삼신각)으로 부르는 것과 달리, 진신사리를 모신 건물은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궁(宮)'으로 높여 부른다. 적멸보궁은 여러 불교 문화재 중에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4]

대한민국에는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5]이 있다.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오대산 중대의 상원사 적멸보궁,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의 적멸보궁이 그것이다. 이 중 정선 정암사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왜적의 약탈을 피해 사리를 분산하여 옮겨온 곳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2. 2. 진신사리 봉안과 보궁

원래 적멸보궁은 석가모니가 설법을 펼친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을 의미했다. 하지만 석가모니 사후에는 그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 , 암자 등을 뜻하는 말로 의미가 변화했다.

흔히 절 전체를 적멸보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절 안에서도 진신사리를 모신 특정 장소를 '보궁'이라고 부른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는데, 진신사리를 모신 곳에는 부처님이 직접 계신다고 여겨 다른 불상이나 조각을 두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인 절의 건물은 '전(殿)'이나 '각(閣)'(예: 대웅전, 삼신각)으로 부르지만, 진신사리를 모신 곳은 특별히 '보궁(寶宮)'이라 하여 '궁(宮)'으로 높여 부른다. 이는 적멸보궁이 여러 불교 문화재 중에서도 그 가치가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4]

현재 한국에는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5]이 있는데, 영축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정암사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왜적의 탈취에 대비하여 진신사리 일부를 분산해 옮겨온 곳이다.

2. 3. 불상을 모시지 않는 이유

석가모니사리, 즉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곳을 적멸보궁이라고 한다. 진신사리를 모신 곳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계신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다른 불상이나 조각을 두지 않는다.[4] 이는 부처님의 형상보다는 존재 자체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의 표현 방식이다. 이러한 이유로 진신사리를 봉안한 건물은 일반적인 사찰의 '전(殿)'이나 '각(閣)' 대신 '궁(宮)'이라는 높은 격의 명칭으로 불린다.

3. 한국의 5대 적멸보궁

대한민국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여러 적멸보궁이 있으며, 그중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특히 높은 다섯 곳을 '5대 적멸보궁'[5]으로 꼽는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모두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진신사리를 받아와 봉안했다는 공통된 유래를 가지고 있다.[6] 자장율사는 문수보살로부터 불법을 널리 펴라는 가르침을 받고 신라로 돌아와 이들 사찰의 창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의 5대 적멸보궁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5대 적멸보궁
사찰소재지비고
통도사영축산 (경상남도 양산시)삼보사찰 중 불보사찰
상원사오대산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월정사에 속함
법흥사사자산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구산선문 중 사자산문
정암사태백산 자락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정암사 수마노탑에 사리 봉안
봉정암설악산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해발 1244m,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단순한 사찰 건물을 넘어 불교 신앙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각각 독특한 역사와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6] 각 보궁의 상세한 내력과 이야기는 해당 사찰 문서를 통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3. 1. 통도사 적멸보궁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 후 신라로 돌아와 가장 먼저 세운 절이 통도사이다. 통도사 창건 이야기는 절 안의 연못인 구룡지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예로부터 영취산 일대는 좋은 터로 알려져 많은 이들이 건물을 세우려 했으나, 그곳에 살던 아홉 마리 용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자장율사는 절을 지을 곳을 찾던 중, 나무로 깎은 오리를 날렸는데 한겨울임에도 칡꽃을 물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이곳이 생기가 넘치는 명당임을 알아챘다. 처음 자장율사는 연못의 용들에게 좋게 타일러 내보내려 했지만, 용들이 듣지 않자 종이에 '불 화(火)' 자를 써서 연못에 던지고 진언을 외웠다. 그러자 연못 물이 뜨겁게 끓어올랐고, 견디지 못한 용들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때 하늘로 오르려던 세 마리는 떨어져 죽고, 다섯 마리는 근처 골짜기로 도망쳤는데, 이 골짜기를 오룡곡(五龍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미처 도망가지 못한 눈 먼 용 한 마리가 남아 자장율사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자장율사는 이를 가엾게 여겨 연못을 지키도록 허락했는데, 이것이 바로 구룡지의 유래이다. 전설에 따르면 구룡지는 용이 지키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큰 홍수가 나도 물이 넘치지 않는다고 한다.[7]

이후 통도사는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불교 중심 사찰로 발전했으며, 불교의 세 가지 보물인 삼보(三寶) 중 부처님, 즉 불보(佛寶)를 상징하는 사찰로 자리매김했다. (법보사찰은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은 순천 송광사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침략으로 절의 많은 건물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다행히 사명대사가 통도사에 모셔져 있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일부를 정암사로 미리 옮겨 안전하게 지켜낸 덕분에, 가장 중요한 성보(聖寶)인 진신사리의 훼손은 막을 수 있었다.

3. 2.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자장율사가 오대산을 개산한 이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고 전해져 불교 성지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이 사리가 정확히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아 신비로운 전설처럼 내려온다. 상원사는 이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수호 역할을 맡는 사찰이다.

상원사의 건립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상원사는 선덕왕의 두 왕자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며, 당시 이름은 진여원이었다. 자장율사가 오대산을 개산한 뒤 불교 성지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오대산은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되기 시작했다. 절을 지은 두 왕자는 그곳에서 수행했는데, 신문왕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이 일자, 오대산의 두 왕자를 찾아왔고 그중 한 명이 왕위에 오른 후 진여원을 상원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8]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상원사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국교가 불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록이 부족한 것으로 보아, 후삼국 시대 혼란기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고려 후기 문인 이색의 기행문 '오대상원사승당기'에는 나옹 스님의 제자로 알려진 영로암 스님이 상원사를 재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현재의 상원사는 적어도 고려 말 이후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상원사가 위축될 위기에 처했으나, 세조와의 특별한 인연[9] 덕분에 다행히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현재 상원사는 월정사에 속한 사찰이다.

3. 3.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사자산 영월 법흥사는 선덕여왕 12년에 자장율사가 흥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흥녕사는 자장율사가 창건한 적멸보궁 중 가장 오래 머물던 곳으로, 자장율사가 직접 수행하던 토굴이 절 뒤편에 남아 있다. 절이 세워진 후 신라의 선승들이 모여들어 사자산문을 열었는데, 이는 신라 말 구산선문 중 하나이다. 특히 흥녕선원으로 불리며 한국 불교사의 명맥을 이어가는 중요한 선원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불법을 계승하는 역할을 하였다. 흥녕사는 고려 의종 때인 1163년에 중창되었으며, 조선 영조, 정조, 헌종 시대까지 적멸보궁과 선문의 역할을 이어왔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절은 거의 폐사지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1902년에 대원각사에 의해 '법흥사'로 이름이 바뀌고 다시 세워졌다.

3. 4.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

정선 정암사 적멸보궁은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영조 47년(1771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이곳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정암사 수마노탑에 안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내부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으며, 신중탱화 2점과 동종 1점을 보관하고 있다.

3. 5.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명당을 찾던 중, 한 마리 봉황이 나타나 율사를 이끌었다. 설악산 깊은 곳까지 봉황을 따라간 자장율사는 부처의 모습을 닮은 큰 바위를 발견했다. 봉황이 그 바위의 이마 부분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율사는 그곳이 사리를 모실 길지임을 깨달았다. 자장율사는 봉황이 사라진 바위 이마 부분에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하고 암자를 세웠는데, 이것이 봉정암 창건의 유래이다. 봉정암(鳳頂庵)이라는 이름은 봉황(鳳)이 부처의 이마(頂)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봉정암은 창건 이후 여러 고승들의 수행처로 이름 높았다. 신라의 원효대사, 고려지눌(보조국사) 등이 이곳에서 수행했으며, 많은 학자들도 정진을 위해 봉정암을 찾았다. 그러나 설악산의 험준한 산세 때문에 봉정암이 현재와 같은 사찰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중건을 이끌었고, 고려 명종 때 지눌국사가 다시 세웠다. 6.25 전쟁 이전까지도 여러 스님들과 불자들이 7차례에 걸쳐 모금 활동을 벌이는 등 중수를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4. 적멸보궁의 건축적, 미술적 특징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직접 모시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른 전각과 구별된다. 이 때문에 내부에는 불상이나 탱화부처를 형상화한 대상을 두지 않는다. 대신, 건물의 공포, 벽화, 과 같은 건축 및 미술 요소에서 독특한 특징과 상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일반적인 사찰 건축 형식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아 불교의 가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10]

4. 1. 불상 없는 공간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직접 모시는 공간이기 때문에, 불상이나 탱화처럼 부처를 상징하는 다른 조형물은 두지 않는다. 대신, 건물의 공포, 벽화, 등 건축 및 미술 요소에서 다른 전각과는 구별되는 특징과 상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일반적인 사찰 건축 형식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아, 불교의 가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10]

4. 2. 공포와 벽화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직접 모시는 건물이므로, 내부에는 불상이나 탱화처럼 부처를 상징하는 다른 대상이 없다. 대신 대들보를 구성하는 공포나 벽면의 벽화, 또는 등에서 다른 전각들과는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특히 다른 들의 건축 형식이나 미술 형식보다 더 큰 상징성을 지니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숨겨진 상징들을 통해 은유적으로 불교의 가치[10]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4. 3. 불탑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직접 모신 곳이기에, 불상이나 탱화와 같은 다른 상징물을 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신 이나 건물의 공포, 벽화 등에서 다른 전각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나 더 깊은 상징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10] 이러한 요소들은 불교의 가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적멸보궁과 관련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거나 독특한 양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설악산 봉정암에 위치한 오층석탑(불뇌보탑)은 석가모니의 뇌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지며, 그 형태와 구조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4. 3. 1. 봉정암 불뇌보탑

봉정암의 불뇌보탑은 석가모니불, 즉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했다고 전해지는 탑이다. 이 탑은 다른 불탑과 달리 별다른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5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가장 아랫부분에 연꽃 모양의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다른 문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처음에는 다른 문양이 있었으나 풍화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지만, 조사 결과 밑 부분의 연꽃 문양이 유일한 조각임이 밝혀졌다.

불뇌보탑의 또 다른 특징은 탑의 기반이 되는 기단부가 없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탑의 기단부는 탑의 가장 아랫부분과 지면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석조물이지만, 불뇌보탑은 이러한 구조물 없이 자연 암반 위에 바로 세워져 있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력한 설명은 설악산의 장엄한 암석 자체가 탑의 기단부 역할을 하여 탑을 떠받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인공적인 기단부를 만들지 않고 자연 암반을 그대로 활용함으로써 부처의 진신사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5. 적멸보궁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가치

적멸보궁은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이래 한국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해왔다. 단순한 종교적 성지를 넘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회문화적 역할을 수행해 온 공간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성지로서 그 가치가 더욱 부각되었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국난 극복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현대에 들어 6.25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는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이후 복원 노력을 통해 오늘날까지 중요한 불교 성지이자 문화유산으로서 그 명맥과 가치를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적멸보궁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 한국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5. 1. 불교 성지로서의 역할

적멸보궁은 자장율사가 건립한 이래로 중요한 불교 성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큰 불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열렸으며, 여러 고승들이 수행 장소로 선택하면서 자연스럽게 불법(佛法)을 이어가는 장소가 되었다.

특히 불교를 국가 종교로 삼고 크게 장려했던 고려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성지로서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당시에는 일반 백성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사찰들이 많이 세워졌지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만의 특별함은 오히려 더욱 빛을 발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숭유억불) 때문에 많은 불교 신도들이 어려움을 겪었고, 적멸보궁 역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승병과 의병을 일으키는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는 데 적멸보궁의 영향력이 컸다. 특히 사명대사는 전국의 명산과 명승지, 그중에서도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다니며 승려들의 참여를 독려했고, 이는 적멸보궁의 선승들이 구국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통도사에는 왜군이 사리를 훔치려다 실패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함을 열자 두꺼비가, 다시 열자 구렁이가 사리를 지키고 있어 가져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특정 전설이라기보다는 적멸보궁을 포함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당시 백성들의 간절한 마음이 비유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승병들의 봉기는 많은 일반 백성들이 의병 활동에 참여하도록 이끌었고,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적멸보궁은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이어오며,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민족 운동의 중심지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적멸보궁은 6.25 전쟁 때 크게 훼손되었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한 탓에 적군의 집결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군사적 판단 아래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전쟁이 끝난 후 꾸준히 재건과 수리가 이루어졌고, 현재 적멸보궁은 대한민국 불교 신도들에게 중요한 성지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5. 2. 임진왜란과 적멸보궁

조선 시대에 이르러 국가적인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많은 불교 신도들이 탄압받았고, 적멸보궁 또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이 닥치자, 적멸보궁은 구국의 기치를 들고 승병과 의병을 일으키는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사명대사는 전국의 명산과 명승지, 그중에서도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다니며 승려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촉구했다. 이러한 노력은 적멸보궁의 선승들이 구국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통도사와 관련된 설화는 이러한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왜군들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훔치기 위해 함을 열었으나, 처음에는 두꺼비가 나타나 사리를 지키고 있었고, 놀라서 함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보니 이번에는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사리를 지키고 있어 결국 가져가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설화 속 두꺼비와 구렁이는 단순히 신비한 존재라기보다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적멸보궁을 비롯한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했던 당시 백성들의 강한 저항 의지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승병들의 봉기는 많은 일반 백성들이 의병 활동에 참여하도록 이끌었으며, 이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확산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적멸보궁은 오랜 역사 속에서 종교적 성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적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며 그 명맥을 이어왔다.

참조

[1] 웹인용 적멸보궁 (寂滅寶宮)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1-30
[2] 웹인용 적멸보궁 (寂滅寶宮)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1-30
[3] 웹인용 적멸보궁 (寂滅寶宮)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1-30
[4] 서적 한국불교사 2011
[5] 서적 한국불교사산책 1995
[6] 서적 한국(韓國)의 사찰(寺刹) 일지사 1977
[7] 서적 한국(韓國)의 사찰(寺刹)-통도사(通度寺) 일지사 1974
[8] 서적 삼국유사 2008
[9] 서적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2009
[10] 간행물 통도사 적멸보궁의 상징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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