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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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각은 돌, 금속, 나무 등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 넣는 예술 형식으로, 중국에서 기원하여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상나라 시대에 권력과 권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 시작하여, 진나라 시대에 문자 통일과 함께 건축 자재에도 활용되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학자 예술가들이 인장 제작을 즐기면서 예술적 가치를 더했으며, 명·청 시대에는 전각 예술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전각이 사용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금속 활자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발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문인들의 필수 소양으로 여겨졌으며, 근현대에는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전각은 재료, 도구, 형태, 용도 등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되며, 절파, 휘파, 해파 등 유파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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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각 | |
|---|---|
| 전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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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종류 | 예술 |
| 문화권 | 동아시아 문화권 |
| 관련 항목 | 서예, 회화, 도장 |
| 역사 | |
| 기원 | 상나라 |
| 발전 | 진나라, 한나라 |
| 재료 | |
| 도구 | 칼 |
| 재료 | 돌, 나무, 뿔, 상아, 금속 |
| 기법 | |
| 서체 | 전서 |
| 구성 요소 | 음각, 양각 |
| 용도 | |
| 개인 | 인장 |
| 예술 | 서화 작품의 장식 |
| 기관 | 관인 |
| 같이 보기 | |
| 관련 직업 | 각자장 |
| 관련 용어 | 낙관, 두인, 요인, 압각, 장서인 |
2. 역사
전각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초기 단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나라 시대에는 관청에서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에는 동물의 뼈, 구리(청동), 도기 등이 인장 제작 재료로 사용되었다. 전문 장인들이 인장을 만들었으며, 주로 귀족과 관리가 사용했기 때문에 매우 형식적이고 아름다운 스타일을 지녔다. 상나라 시대에는 갑골문이, 주나라 시대에는 대전이나 금문과 같은 다양한 글자가 사용되었다.[2]
진나라 시대에는 재상 이사에 의해 전서인 ''소전''이 공식화되었고 진시황에 의해 지정되어 한자의 문자가 처음으로 통일되었다. 이 시대의 인장은 건축 자재에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타일이나 벽돌을 완성한 후 제작자가 표면에 자신의 인장을 찍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인장은 제작자의 정보를 담는 것 외에도 다양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개인적인 특성을 반영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학자 예술가들이 번성하면서 인장 제작이 인기를 얻었고, 연석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저장성의 청전에서 나온 청전석과 푸젠성에서 나온 수산석이 대표적이다. 일부 장인들은 전문가가 되어 다양한 조각 스타일을 만들었으며, 이 시대부터 그림과 서예 작품에 진품을 증명하기 위해 인장이 사용되기 시작했다.[2]
원나라 시대에는 인장 조각이 이미 매우 발달한 예술이었다.[2]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는 인장 조각 예술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청나라 시대에는 몽골에서 나온 발린석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대 중국 회화나 서예 작품에는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인장이 찍혀 있다.[2]
2. 1. 중국의 전각사
중국에서 전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각 시대별 특징적인 양식을 보인다.진나라 시대에는 재상 이사에 의해 더 규칙적이고 형식적인 전서인 小篆|소전중국어이 공식화되었고 진시황에 의해 지정되어 한자의 문자가 처음으로 통일되었다.[2] 중국 건축의 발달로 인해 건축 자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타일이나 벽돌을 완성한 후 제작자는 일반적으로 표면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는데, 이는 이 시대의 골동품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장은 제작자의 이름, 시간 또는 장소를 나타내는 것 외에도 다양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제조업체의 개인적인 특성을 반영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학자 예술가들이 번성했고 인장 제작이 인기를 얻었다. 그 시대 이후로 연석이 널리 사용되었다. 현재 저장성 청전에서 나온 돌은 青田印石|청전석중국어이라 불리고, 푸젠성에서 나온 壽山印石|수산석중국어도 널리 사용되었다. 일부 장인은 전문가가 되어 수많은 조각 스타일을 만들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인장이 그림과 서예 작품에 진품 증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2]
원나라 시대에는 인장 조각이 이미 매우 발달한 예술이었다.[2]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는 인장 조각 예술의 두 황금기였다. 청나라 시대에는 몽골에서 나온 巴林印石|발린석중국어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중국 회화나 서예 작품에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인장이 찍혀 있다.[2]
2. 1. 1. 상나라 (은나라)
상나라 시대에 인장은 관청에서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에는 인장 제작 재료가 주로 동물의 뼈, 구리(청동), 도기였다. 이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도공을 포함하여 특별히 훈련된 정교한 장인이나 장인이 인장을 만들었다. 이 시대의 인장은 주로 정부에서, 주로 귀족과 관리가 사용했기 때문에 인장의 스타일은 매우 형식적이고 아름다웠다. 상나라 시대에는 갑골문 (甲骨文)이 사용되었다. 주나라 시대에는 한자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글자가 사용되었지만, 주로 ''대전'' (大篆) 또는 ''금문'' (金文) 글자가 사용되었다.[2]2. 1. 2. 주나라
상나라와 주나라 시대에 인장은 관청에서 권위와 권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장 제작 재료는 주로 동물의 뼈, 구리(청동), 도기였다. 이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도공을 포함하여 특별히 훈련된 정교한 장인이나 장인이 인장을 만들었다. 이 시대의 인장은 주로 정부, 귀족, 관리가 사용했기 때문에 인장의 스타일은 매우 형식적이고 아름다웠다. 상나라 시대에는 갑골문이 사용되었다. 주나라 시대에는 (한자가 아직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글자가 사용되었지만, 주로 ''대전'' 또는 ''금문'' 글자가 사용되었다.[2]2. 1. 3. 전국 시대
전국 시대에는 정치, 경제적 변화와 함께 신하 관계나 상품 거래의 보증으로 인장이 사용되었다. 죽간이나 목간의 봉니에 사용되었고, 문자 외에 그림 등의 도상 인, 특히 동물을 모티브로 한 '''생초인'''이 많았다. 이러한 도상 인은 육조 시대까지 간신히 존재했지만 이후 소멸되었고, 일본의 전국 시대에 일시적으로 부활하였다.[2]2. 1. 4. 진나라, 한나라
진나라 시대에는 재상 이사에 의해 ''소전''(小篆)이 공식화되었고 진시황에 의해 지정되어 한자의 문자가 처음으로 통일되었다.[2] 황제가 사용하는 인을 '''새'''(璽)라 하고, 관리나 일반용은 '''인'''(印)이라 불렀다.[2] 한나라 시대에는 장군의 인을 '''장'''(章)이라 불렀다.[2]2. 1. 5. 육조 시대, 수나라, 당나라
육조 시대에는 소전 외에 현침전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서체도 사용되었다. 북제의 문헌에는 종이에 주인을 날인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보인다.[2]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종이의 사용이 일반화되어, 인장은 봉니에서 종이에 날인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문은 양각이 주류가 되었고 크기도 커졌다.[2]
당나라 시대가 되자 해서·행서가 침투하고 국제화가 진행되면서 인문에 예서나 해서, 이민족의 문자(서하 문자, 여진 문자, 티베트 문자)가 새겨지기도 했지만, 그 대부분은 역시 전서를 사용했다. 이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인장을 미술적으로 논한 문헌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고, 차츰 인장에 예술성이 요구되게 되었다.[2]
2. 1. 6. 송나라, 원나라
송나라 시대에는 학자 예술가들이 번성했고 인장 제작이 인기를 얻었다. 그 시대 이후로 연석이 인장 조각에 널리 사용되었다. 현재 저장성 청전에서 나온 돌은 青田印石|청전석중국어이라고 불리고, 푸젠성에서 나온 壽山印石|수산석중국어도 널리 사용되었다.[2] 일부 장인은 전문가가 되어 수많은 조각 스타일을 만들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인장이 그림과 서예 작품에 진품 증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원나라 시대에는 인장 조각이 이미 매우 발달한 예술이었다.[2]
2. 1. 7. 명나라, 청나라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는 인장 조각 예술의 두 황금기였다. 명나라 중기의 문팽·하진은 '문하'라고 불리며 존경받는 가장 뛰어난 전각가였다. 문팽은 평생 전각에 전념하여 한인(漢印)을 연구하고 그 작풍을 받아들여 전각 발전에 힘썼다. 이전까지는 장인에게 의뢰하여 상아 등에 새기게 하였으나, 우연히 손에 넣은 동석(돌 도장 재료)에 스스로 새긴 후에는 두 번 다시 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화는 다른 문인들에게도 전해져 돌 도장에 의한 전각이 일시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문팽의 제자인 하진은 '''휘파'''(신안인파)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일파에서 소선, 양질, 왕관, 주간, 정수, 파위조 등 많은 전각가를 배출했다. 휘파는 황산 지방(안휘섭현)을 거점으로 청나라 중기까지 성행하여 각지로 퍼져나갔다. 휘파는 한인의 정통 작풍을 기초로 신선함을 더한 작풍이었다.[2]18세기에는 항주에서 정경을 개조로 '''절파'''(서령인파)가 흥했다. 휘파와 마찬가지로 한인을 기초로 하였지만, 구습에서 탈피하여 소박한 힘을 특징으로 했다. 황이, 장인, 혜강, 진예종, 진홍수, 조지겸, 전송 등 뛰어난 전각가가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서령팔가'''라고 불렸다.[2]
청나라 시대에는 몽골에서 나온 ''발린석''(巴林印石)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등석여가 침체된 전각에 혁신을 가하여 등파(신휘파·후휘파)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묘전을 사용하는 구습을 타파하고, 보수적인 복고주의를 쇄신했다. 오희재, 서삼경, 조지겸, 황사령 등이 그의 제자로 배출되었으며, 이 중 조지겸은 등파와 절파를 종합하여 신절파(조파)를 세워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 이 외에도 청나라 말기에는 오창석, 제백석 등 뛰어난 전각가들이 잇따라 나타났다.[2]
2. 2. 한국의 전각사
한국의 전각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인 발전 과정을 거쳤다.2. 3. 일본의 전각사
일본의 전각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다.3. 유파
전각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유파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유파로는 저장성을 기반으로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주도적이었던 절파, 안후이성을 기반으로 역시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주도적이었던 휘파/완파, 상하이를 기반으로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시대에 주도적이었던 해파가 있다.[1]
3. 1. 중국의 주요 유파
4. 재료 및 도구
전각에는 다양한 재료와 도구가 사용된다. 상나라 시대에는 주로 동물의 뼈, 구리(청동), 도기를 인장 재료로 사용했다. 송나라 시대부터는 엽납석의 일종인 청전석과 수산석 같은 연석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2] 원나라 시대에는 몽골에서 나오는 바린석이 사용되기도 했다.[2]
전각에 사용되는 주요 도구는 '''인도'''(印刀, 전각도 또는 철필)와 '''인상'''(印床)이 있다. 인도는 인장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데 사용되는 칼이며, 인상은 인재를 고정하는 도구이다.
4. 1. 재료
전각의 재료로는 엽납석이 주로 사용되지만, 금속, 대나무, 뼈, 상아, 뿔, 식물 씨앗 등도 사용된다.[2] 최근에는 쉽게 구하고 가공하기 쉬운 지우개가 사용되기도 한다. 인재로 사용되는 광물로는 모스 경도 3.5 정도의 비교적 부드러운 엽납석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돌 인재는 한반도, 태국, 미얀마, 몽골, 일본에서도 생산되지만, 산출량, 품질, 가공 기술, 유통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이며, 푸젠성의 수산석, 저장성의 청전석, 창화석, 내몽골의 바린석 등이 널리 저렴하게 유통되고 있다. 중국 인석 삼보: 전황(수산석의 하나), 부용(수산석의 하나), 계혈석(창화석의 하나)은 소재가 아름답고 희귀하여 매우 비싸며, 연보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희귀하기 때문에 이미 도장이 새겨진 것을 인재로 재사용하여 고가로 거래되는 경우도 있다. 전각과 별개로, 인재 자체가 수집이나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4. 2. 도구
전각을 할 때 사용하는 도구는 '''인도'''(印刀, 전각도 또는 철필)라고 불린다. 전각에서의 인도는 목각 등에서 사용되는 인도(선단이 예각으로 되어 있고 한쪽 날인 것)와는 다른 칼날을 의미한다. 전각용 인도는 대부분 양날의 평도이며, 직각으로 연마된 양쪽 모서리를 이용하여 조각한다. 칼날 폭은 5~20mm 정도인 경우가 많다.전각을 할 때 인재(印材)를 고정하는 도구를 '''인상'''(印床)이라고 부른다. 나무로 만든 것이 많다.
5. 종류
전각은 형태, 용도, 내용, 모양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된다.
| 종류 | 설명 |
|---|---|
| 성명인 | 이름을 새긴 것이다. |
| 아호인 | 아호를 새긴 것이다. |
| 인두인(관방인) | 관직명을 새긴 것이다. |
| 유인 (성어인·길어인) | 좋은 글귀나 좌우명 등을 새긴 것이며, 항조인과 대응된다. |
| 초형인 | 그림을 새긴 것이다. |
| 화압인 | 서명 대신 사용하던 도장이다. |
| 사고인 | 소장자의 인장이다. |
| 장서인(수장인) | 책에 찍는 도장이다. |
5. 1. 형태
주로 전서를 새기는 것을 전각이라고 한다. 다만, 갑골문, 금문, 예서, 해서, 또는 초형(일러스트)을 새긴 것도 포함하는 경우가 있어, 엄밀한 정의는 없다.- 백문(음각)
- 주문(양각)
- 주백상관
5. 2. 용도/내용
주로 전서를 새기는 것을 전각이라고 한다. 다만, 갑골문, 금문, 예서, 해서, 또는 초형(일러스트)을 새긴 것도 포함하는 경우가 있어, 엄밀한 정의는 없다.[1]전각 작품은 서화의 낙관(사인)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압날한 인영 자체가 독립된 작품이기도 하여 감상의 대상이 된다.[1] 인영을 다수 모은 작품집을 인보라고 한다.[1]
| 종류 | 설명 |
|---|---|
| 성명인 | 성명인은 이름을 새긴 것이다. |
| 아호인 | 아호인은 아호를 새긴 것이다. |
| 인두인(관방인) | 인두인은 관직명을 새긴 것이다. |
| 유인 (성어인·길어인) | 유인은 좋은 글귀나 좌우명 등을 새긴 것이며, 항조인과 대응된다. |
| 초형인 | 초형인은 그림을 새긴 것이다. |
| 화압인 | 화압인은 서명 대신 사용하던 도장이다. |
| 사고인 | 사고인은 소장자의 인장이다. |
| 장서인(수장인) | 장서인은 책에 찍는 도장이다. |
5. 3. 모양
전각은 주로 전서를 새기는 것을 말하지만, 갑골문, 금문, 예서, 해서 또는 초형(일러스트)을 새긴 것도 포함하는 경우가 있어 엄밀한 정의는 없다.- 변형 인장
- 관방인 (引首印)
6. 주요 전각가
다음은 주요 전각가 목록이다.
- 치 바이시
- 사멍하이 (해파)
- 쉬웨이 (절파)
- 우창숴 (해파 & 절파)
- 우치우옌
6. 1. 중국의 전각가
- 치 바이시
- 사멍하이 (해파)
- 쉬웨이 (절파)
- 우창숴 (해파 & 절파)
- 우치우옌
명나라 중기의 문팽·하진 두 사람은 가장 뛰어난 전각가로, '문하'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문팽은 전각에 평생을 바쳐 한인(漢印) 연구를 하고 그 작풍을 받아들여 전각 발전에 힘썼다. 이전까지는 장인에게 의뢰하여 상아 등에 새기게 하였으나, 우연히 손에 넣은 동석(돌 도장 재료)에 스스로 새긴 후에는 두 번 다시 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화가 다른 문인들에게도 전해져 돌 도장에 의한 전각이 일시에 퍼졌다고 여겨진다. 문팽의 제자인 하진은 휘파(신안인파)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일파에서 많은 전각가를 배출했다. 소선, 양질, 왕관, 주간, 정수, 파위조 등이다. 휘파는 황산 지방(안휘섭현)을 거점으로 청나라 중기까지 성행하여 각지로 퍼져나갔다. 한인의 정통 작풍을 기초로 신선함을 더한 작풍이었다.
한편, 18세기에는 항주에 정경을 개조로 절파(서령인파)가 흥했다. 휘파와 마찬가지로 한인을 기초로 하였지만, 구습에서 탈피하여 소박한 힘을 특징으로 했다. 황이, 장인, 혜강, 진예종, 진훙수, 조지겸, 전송 등 뛰어난 전각가가 배출되었으며, '''서령팔가'''라고 불렸다.
청나라 말기에 등석여가 침체된 전각에 혁신을 가하여 등파 (신휘파·후휘파)의 시조가 되었다. 묘전을 사용하는 구습을 타파하고, 보수적인 복고주의를 쇄신했다. 오희재, 그 뒤에 서삼경, 조지겸, 황사령 등의 제자가 배출되었으며, 이 중 조지겸은 등파와 절파를 종합하여 신절파(조파)를 세워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 이 외에도 청나라 말기에는 오창석, 제백석 등 잇따라 뛰어난 전각가들이 나타났다.
6. 2. 일본의 전각가
일본의 전각가 목록을 참조하라.참조
[1]
웹사이트
Oxford Dictionary
https://web.archive.[...]
[2]
웹사이트
The Seal
http://www.vincentpo[...]
2020-11-27
[3]
웹인용
울산광역시 고시 제2015 - 163호, 《울산광역시 문화재 지정 고시》
http://210.99.24.25/[...]
2015-07-23
[4]
웹인용
전각
https://ko.wikisourc[...]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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