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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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경모는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출생하여 게이오기주쿠 대학과 에모리 대학교에서 수학한 인물이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통역관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이후에는 한일 관계 개선 및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헌신했으며, 1989년에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4.2 공동성명 작성을 주도했다. 그는 2021년 일본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모란공원 민주화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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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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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경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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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24년 7월 11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시흥군 |
사망일 | 2021년 2월 16일 (향년 96세) |
사망지 |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동래 |
종교 | 기독교 |
학력 | |
유치원 | 영등포면 홍화유치원 졸업 |
중학교 | 일제강점기 경성부 경기공립중학교 졸업 (1937 ~ 1942) |
대학교 (일본) | 일본국 게이오대학교 의학부 예과 수료 (1943 ~ 1945) |
대학교 (한국) | 대한민국 서울대학교 의학부 중퇴 (1945 ~ 1947) |
대학교 (미국) | 미국 에모리대학 문리대 졸업 |
대학원 (미국) | 동대학원 화학과 중퇴 (1947 ~ 1950 ) |
경력 | |
통역 | 일본국 토쿄 맥아더 사령부 통역관 |
한국전쟁 | 한국전쟁 휴전회담 판문점 통역관(1950.10 ~ 1956.5) |
가족 | |
배우자 | 나카무라 지요코(1924~) |
자녀 | 2남. 정강헌 (1954~) 정아영 (1957~) |
형제 | 2남 1녀 중 장남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김일성 |
기타 | 在日評論家(재일평론가) |
2. 생애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태어난 정경모는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미국 국방부 직원으로 근무하며 판문점 휴전 회담에 참여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기술 고문, 회사 임원 등을 역임했다.
박정희 등 한국 독재 정권을 비판하며 김지하를 지원했고, 한국 전쟁을 미국의 침략으로 규정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하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으로 남북 통일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1]
2021년 2월 16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924-1950)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태어났다. 부친 정인환은 영등포에서 개척교회를 운영하고 '홍화유치원'을 설립하였는데, 정경모는 이 유치원에서 수학하였다.[2] 이후 부친은 을축년 홍수의 수해구제로 받은 자금을 기반으로 '영등포 토기조합'을 설립, 공장을 증설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 자금으로 영등포에 200채 규모의 '이백채마을'을 조성하였으나, 입주자들이 집세를 내지 않아 사업은 실패하였다.[2]정경모는 소학교 졸업 후 평양 숭실중학교 진학을 고려했으나 연고지 문제로 경성 경기공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 김교신에게서 수학하였다. 교련 점수 낙제로 조선 내 대학교 진학이 어려워 일본으로 건너가 1년간 재수하여 게이오대 의학부에 합격하였다. 당시 의학부, 이공학부는 1년간 군입대가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도쿄 대공습을 피해 귀국하였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학부에 편입하였다.
서울의대 재학 중 해부학에 심취했으나, 미국을 동경하여 1947년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이승만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떠나기 전 경교장에 머물던 김구를 알현하였다. 1950년 에모리 대학교 문리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화학과로 진학하였다.
2. 2. 한국 전쟁과 미군 통역관 시절 (1950-1956)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미대사 장면의 요청으로 도쿄에 위치한 맥아더 사령부에 통역관으로 지원하여 문익환, 박형규 목사 등과 함께 미국 국무성 직원 자격으로 근무하게 된다.[2] 1951년 7월 과거 게이오대 재학 시절 하숙했던 집의 딸 지요코와 재회하여 문익환 목사의 주례로 결혼한다.[2] 부인은 결혼 후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이승만은 일본 여성과의 결혼을 보고받고 장학금을 끊는다.[2] 1951년 10월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이듬해 초부터 판문점에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정전 협정에 이르는 역사적인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2]1956년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미군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받아 해직당한다.[2] 미국 비자 발급이 불가능해져 에모리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갈 계획은 무산되고, 자리가 잡히면 부인과 큰아들을 불러들일 계획으로 혼자 한국으로 귀국한다.[2]
2. 3.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망명 (1956-1989)
1956년, 정경모는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미군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받아 해직되었다.[2] 이로 인해 미국 비자 발급이 불가능해져 에모리 대학교에서의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고, 혼자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서울에서 노모와 함께 셋방살이를 하며 대학 시간강사나 여러 회사의 임시직원으로 전전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2] 1969년에는 울산 석유화학단지 건설에 참여하여 상공부에서 기술고문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2] 당시에는 일본과 정식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거주하는 부인과는 수삼 년에 한 번, 사흘간의 통과비자를 얻어야만 겨우 만날 수 있었다.[2]1970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반발하여 처음으로 6개월짜리 여권을 발급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2] 여권 만료 기한이 지난 후에는 일본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지내다가, 자주 투고하던 아사히 신문사의 신원 보증을 조건으로 일본에서 망명에 해당하는 '특별재류허가'를 취득하였다.[2]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될 무렵,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을 만나 교류하였다.[2] 1973년 8월 8일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 때는 일본에서 적극적인 구명 활동을 벌였다.[2]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시사비평지인 '세카이'는 납치 사건 당일 판을 한국 특집으로 꾸몄는데, 정경모가 기고한 글과 납치 직전 이루어진 김대중과 세카이 편집장과의 대담문이 실리면서 잡지가 100만 부 이상 팔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2] 이를 계기로 일본 지식인들은 김대중 구출 운동을 위해 '일한연대연합'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2]
1973년, 정경모는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시보'에서 주필로 일하면서 한일 지식인, 정치인들과 함께 김대중 사건 해결과 김지하 석방 운동을 벌였다.[2] 또한 영문으로 '코리아 뉴스레터'를 펴내 외신 기자와 외교관들에게 한국 정세를 알렸다.[2] 1979년에는 토쿄에 '씨알어학숙'이라는 글방을 개설하여 한국어와 한국사 강좌를 시행하였다.[2]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에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한국민주 통일연합(한통련)' 활동에 참여하였다.[2]
1980년대 초, 정경모가 일본에서 발행한 '씨알의 힘'에는 한국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정치 평론 글 외에도 황석영의 '한씨연대기'나 송기숙, 현기영의 소설 같은 한국 문학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게재되었다.[2] 특히 1983년 6월에는 여운형, 김구, 장준하 세 선각자가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내용의 픽션집 '운상경륜문답'이 정경모의 작품으로 실렸는데, 이 내용은 한국에서 '찢겨진 산하'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번역, 출간되어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2] '씨알의 힘'은 1991년부터 '씨알 粒'로 이름을 바꿔 2004년까지 발간되었다.[2]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한다.[2] 이것이 문익환-허담의 4.2 공동성명으로, 정경모는 성명문 작성을 주도하였다.[2] 4.2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은 점진적 혹은 단계적 연방제로의 통일 방식도 수용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으며, 이는 2000년 남북 정상이 조인한 6·15 남북 공동선언의 선행 단계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2]
2. 4. 방북과 4.2 공동성명 (1989)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문익환-허담의 4.2 공동성명으로 정경모는 성명문 작성을 주도하였다.[2] 4.2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은 점진적 혹은 단계적 연방제로의 통일 방식도 수용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으며, 이어 1991년 김일성 주석은 외교와 국방권을 일정 기간 지역 정부에 위임하고 점차로 이를 중앙 정부에 귀속시키는 단계적인 연방제를 정식으로 협의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2] 따라서 4.2 공동성명은 북한의 완고한 연방제 통일안을 완화토록 한 최초의 합의서이며, 이는 2000년 남북 정상이 조인한 6·15 남북 공동선언의 선행 단계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2]2. 5. 노년과 사망 (1989-2021)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정경모는 문익환-허담 4.2 공동성명의 성명문 작성을 주도했다.[2] 4.2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은 점진적 혹은 단계적 연방제로의 통일 방식도 수용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으며, 1991년 김일성 주석은 외교와 국방권을 일정 기간 지역 정부에 위임하고 점차 중앙 정부에 귀속시키는 단계적인 연방제를 정식으로 협의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2] 4.2 공동성명은 북한의 완고한 연방제 통일안을 완화한 최초의 합의서이며, 2000년 남북 정상이 조인한 6·15 남북 공동선언의 선행 단계로 평가받는다.[2]1992년 9월 재독음악가 윤이상 선생의 초청으로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민족 문제 강연회'에 참석했다.[2] 1995년 7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모식에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와 함께 참석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접견했다.[2]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1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제6회 '늦봄통일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이전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한국 정부에 의해 귀국이 불허되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2] 2003년 참여정부 시절에도 정부 예산 지원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의 해외 민주인사 초청 행사에 초청되었으나, 주일 한국영사관 면접에서 과거 평양 방문이 실정법 위반임을 인정하는 자수서 작성을 요구받아 거부, 귀국이 불허된다.[2]
2009년 한겨레신문에 회고록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를 연재했다.[2] 이후 한일 고대사에 관한 저술 작업에 몰두했다.[2]
2020년 가족들의 노력으로 한국 귀국이 거의 성사 단계에 이르렀으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무산되고,[2] 2021년 2월 16일 게이오기주쿠 대학 유학 당시 하숙했던 요코하마시 히요시의 그 하숙집에서 부인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했다.[2]
3. 사후
2021년 4월 2일 유해의 일부가 모란공원(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102) 민주화열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2022년 4월 2일, 4.2 공동성명 동지들인 문익환, 유원호의 기존 묘를 이장하여 정경모 묘역에 같이 조성하였다.
4. 저서 및 번역
정경모는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다양한 주제로 저술 및 번역 활동을 했다. 그의 저서는 주로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으며, 일본어로 쓰인 책들도 다수 존재한다. 1972년 아사히 신문사에서 출간된 ある韓国人のこころ- 朝鮮統一の夜明けに|아루 간코쿠진 노 고코로 - 조센토이쓰노요아케니|어느 한국인의 마음-조선통일의 새벽에일본어는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이다.
번역 활동으로는 김지하 시인의 시화집, 문익환 목사의 옥중 서간집 등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소개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朝鮮戦争の起源 解放と南北分断体制の出現|조선전쟁의 기원 해방과 남북 분단 체제의 출현|한국전쟁의 기원일본어, 개빈 맥코맥의 侵略の舞台裏 朝鮮戦争の真実|침략의 무대 뒤편 조선전쟁의 진실|침략의 무대 뒤편 한국전쟁의 진실일본어 등 한국전쟁 관련 서적, 황석영의 소설 張吉山|장길산|장길산일본어과 客人|손님|손님일본어도 일본어로 번역했다.
4. 1. 저서
ある韓国人のこころ- 朝鮮統一の夜明けに|아루 간코쿠진 노 고코로 - 조센토이쓰노요아케니|어느 한국인의 마음-조선통일의 새벽에일본어 (아사히 신문사, 1972)日本人と韓国|니혼진토 간코쿠|일본인과 한국일본어 (신인물왕래사, 1974)
韓国民衆と日本|간코쿠 민슈토 니혼|한국 민중과 일본일본어 (신인물왕래사, 1976)
岐路に立つ韓国 : 中間決算(朴射殺)後の行くすえ|기로니타쓰 간코쿠 : 주칸 겟산 (보쿠사사쓰) 고노 유쿠스에|기로에 선 한국 : 중간결산 (박사살) 후의 미래일본어 (미래사, 1980)
日本を問う|니혼오토우|일본을 묻다일본어 (경서방 고미치 쌍서 세계의 책, 1985)
- 한국어판: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이호철 역, 창작과비평사, 1989)
南北統一の夜明け 朝米関係の軌跡をたどる|난보쿠토이쓰노 요아케 조비칸케이노키세키오타도루|남북통일의 새벽 조미관계의 궤적을 더듬다일본어 (이노우에 스미오 편, 기술과 인간, 2001)
찢겨진 산하 (거름, 1992)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 (한겨레신문사, 2001)
찢겨진 산하 (한겨레출판 재판, 2002)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 2010)
歴史の不寝番(ねずのばん) 亡命 韓国人の回想録|레키시노네즈노반 보메이 간코쿠진노 가이소로쿠|역사의 불침번(네즈노반) 망명 한국인의 회상록일본어 (정강헌 역, 후지와라 서점, 2011)
찢어진 산하, 운상정담·한국 현대사|사키자레타 산카, 운조테이단 간코쿠 겐다이시|찢어진 산하, 운상정담·한국 현대사일본어 (영서방, 1984)
4. 2. 번역 (일역)
- 深夜 金芝河+富山妙子詩画集|심야 김지하 도야마 시화집일본어 토요미술사 1976
- 夢が訪れる夜明け 文益煥獄中書簡集|꿈이 방문한 새벽 문익환 옥중서간집일본어 감역 시알레힘사 1986
- 브루스 커밍스 朝鮮戦争の起源 解放と南北分断体制の出現|한국전쟁의 기원 해방과 남북 분단 체제의 출현일본어 전 2권 하야시 테츠, 카지 에츠코 공역 시알레힘사 1989‐91, 후 아카시 서점
- 개빈 맥코맥 侵略の舞台裏 朝鮮戦争の真実|침략의 무대 뒤편 한국전쟁의 진실일본어 카나이 카즈코 공역 시알레힘사 1990
- 이병주 クーデター 朴正煕とその時代|쿠데타 박정희와 그 시대일본어 고고 요코 공역 시알레힘사 1993‐96
- 황석영 張吉山|장길산일본어 전 3권 시알레힘사 1994‐96
- 황석영 客人|손님일본어 이와나미 서점 2004
참조
[1]
뉴스
在日評論家の鄭敬謨氏死去 89年に訪朝、金日成氏と会談
https://web.archive.[...]
2021-02-16
[2]
웹인용
동아일보 1928년 11월 30일자 4면
https://www.dong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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