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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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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참배는 신사나 사찰을 방문하여 경의를 표하는 행위로, 참배 방법은 장소에 따라 다르다. 일본의 신사나 사찰에서는 손을 씻고 입을 헹군 후, 절을 하거나 박수를 치는 등의 의식을 행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조선인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여 종교적 갈등을 빚었으며, 숭실전문학교와 같은 학교는 이에 저항하여 폐교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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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배
기본 정보
유형종교 행위
목적신, 부처, 조상, 성인 등 숭배 대상에 대한 존경과 경의 표현
관련 종교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신토
기타 종교
관련 행위기도
헌금
제사
순례
불교에서의 참배
의미삼보(三寶)에 귀의하고 공경하는 행위
방법합장
염불
사경
보시

탑돌이
장소사찰
불탑
불상 앞
신토에서의 참배
의미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소원을 기원하는 행위
방법신사 참배
2례 2박수 1례
헌금
방울 흔들기
장소신사
가미다나
기독교에서의 예배
의미하느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
방법기도
찬송
성경 봉독
설교
성찬
장소교회
가정
이슬람에서의 예배
의미알라에 대한 복종과 숭배
방법살라트 (하루 5번 기도)
자카트 (의무적인 자선)
사움 (라마단 금식)
하즈 (메카 성지 순례)
장소모스크
가정
유교에서의 제례
의미조상에 대한 숭배와 효도의 표현
방법제사
묘제
차례
장소사당
묘소
가정

2. 참배 방법

도리이나 문을 통과하기 전에 가볍게 인사를 하고, 모자를 착용하고 있는 경우에는 벗는다.[1] 데미즈야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군다. 신사·불전에 참배하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는 행위로, 신사의 경우에는 약식의 미소기가 된다.[1]

신사나 절에 참배하기 전에 손이나 입을 씻는 데미즈다.


사전을 사전함에 조용히 넣는다.[1] 혼페이 스즈(방울)/와니구치 등을 울린다.[1]

배례를 행한다.[1]

: 신사의 경우 두 번 절 두 번 박수 한 번 절한다.[1] 절은 깊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사찰의 경우에는 합장을 한다.[1]

사찰에 따라 위와 다른 참배 방법인 경우도 있으며, 대부분 그 취지의 표시가 있다.

  • 이즈모 대사, 우사 하치만에서는 두 번 박수가 아닌 네 번 박수를 한다.

일반적으로 박수와 한 번 절 사이, 혹은 합장할 때 신불에게 기원 등을 한다. 사찰에서 손을 모으는 것은 인도 등에서의 인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박수와는 다르다.

신사참배 전에는 옷차림을 정돈하고 물로 왼손, 오른손, 입 순으로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여 몸을 정화한다.[2][3] 소지품은 발아래 두고 신전에 나가 절 두번, 손뼉치기 두번, 절 한번 등 신사에 따라 숫자가 정해진 순서로 행한다.[2][3] 손뼉을 칠때는 마음 속으로 기도하듯이 기원하는 바를 말한다.

2. 1. 일본 신사 및 사찰의 참배 방법

도리이나 문을 통과하기 전에 가볍게 인사를 하고, 모자를 착용하고 있는 경우에는 벗는다.[1] 데미즈야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군다. 신사·불전에 참배하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는 행위로, 신사의 경우에는 약식의 미소기가 된다.[1]

사전을 사전함에 조용히 넣는다.[1] 혼페이 스즈(방울)/와니구치 등을 울린다.[1]

배례를 행한다.[1]

: 신사의 경우 두 번 절 두 번 박수 한 번 절한다.[1] 절은 깊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사찰의 경우에는 합장을 한다.[1]

사찰에 따라 위와 다른 참배 방법인 경우도 있으며, 대부분 그 취지의 표시가 있다.

  • 이즈모 대사, 우사 하치만에서는 두 번 박수가 아닌 네 번 박수를 한다.

일반적으로 박수와 한 번 절 사이, 혹은 합장할 때 신불에게 기원 등을 한다. 사찰에서 손을 모으는 것은 인도 등에서의 인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박수와는 다르다.

신사참배 전에는 옷차림을 정돈하고 물로 왼손, 오른손, 입 순으로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여 몸을 정화한다.[2][3] 소지품은 발아래 두고 신전에 나가 절 두번, 손뼉치기 두번, 절 한번 등 신사에 따라 숫자가 정해진 순서로 행한다.[2][3]

2. 1. 1. 정식 참배

정식 참배는 배전에 올라가 신직의 안내에 따라 옥(구)슬을 바치고 배례하는 의식이다. 사[무소]에서 정식 참배를 하고 싶다는 뜻을 알리고, 배전에 올라간다. 신직에 의한 수발, 축문 주상 후, 신전에 옥(구)슬을 바치고 배례한다. 이 경우도 일반적으로는 두 번 절하고 두 번 박수치고 한 번 절하지만, 신직의 지시에 따른다. 그 후, 나오라이로서 신주를 받는다.

2. 2. 한국 신사에서의 참배 방법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부터 장려되었으나, 1930년 후반 중일 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에까지 강요되면서 기독교 신앙과 충돌하여 큰 반발을 샀다. 각 기독교 교단은 신사참배가 국민으로서의 의무일 뿐이라고 선언하며 강요에 굴복하였으나, 주기철 목사처럼 끝까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희생된 이들도 있었다.

1938년 3월 4일,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는 강제적인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자진 폐교를 결정했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다른 대학들과 비교해 볼 때, 숭실전문학교의 폐교는 민족을 위한 결정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은 신사참배에 거부하는 학생과 그의 가족들을 칼로 참수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러한 역사는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라샬 대학교의 [http://www.dlsu.edu.ph 역사(history) 검색] 홈페이지에 있는 역사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3. 신사참배의 역사

고대에는 참배, 참예라고 하면 가까운 신사나 절에 찾아가 참배하는 것이었지만, 헤이안 시대 무렵부터는 먼 곳의 사찰에도 참배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 무렵부터 귀족을 중심으로 구마노 삼산, 고야산, 이세 신궁에 참예하는 순례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구마노 참배는 인기를 얻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했고, 좁은 산길을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은 "개미의 구마노 참배"라고 불렸다.

근세에 들어 교통망이 정비되면서 서민들의 원거리 이동이 활발해져, 이세 신궁, 고토히라궁, 젠코지 등으로 전국에서 참배자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원격지 참배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을 조직하여 돈을 모아 대표자가 대신 참배하는 습관도 생겨났다. 또한, 이세 신궁 참배에서는, 도중에 무일푼이 되더라도 길가의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누케마이리"라는 풍습도 있었다. 이는 도움을 준 사람도 참배한 사람과 같은 효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에 신사를 세우고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다.[4] 이는 주로 기독교인들과 마찰을 빚었는데, 일제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부터 신사참배를 장려했으나, 기독교계 학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교리에 따라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도 용인되었다.[4] 그러나 1930년 후반 중일 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성직자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4]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생과 가족들을 칼로 참수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러한 역사는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라샬 대학교 역사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토(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신 사당이다.[7] 일제는 1935년경부터 각급 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했다.[7]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이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도 있었다.[7]

결국 기독교 각 교단은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결함되지 않는 의식이며 국민으로서의 의무일 뿐이라고 선언하였다.[4] 1938년 3월 4일, 숭실전문학교는 일본 제국의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자진 폐교를 결정했다.[4] 이는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과 비교해 볼 때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4] 1954년에 서울에서 다시 대학문을 열었다.[5]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전 이후에도 신사참배와 관련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야스쿠니 신사참배 사건은 태평양 전쟁 전범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치인이 참배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중화민국 등 주변국의 반발을 빚는 국제적 문제이다.[7] 양용근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1943년 12월 옥중에서 사망했다.[7]

3. 1. 고대 및 중세

고대에는 가까운 신사나 절에 찾아가 참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헤이안 시대 무렵부터는 먼 곳의 사찰에도 참배하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 무렵부터 귀족을 중심으로 구마노 삼산, 고야산, 이세 신궁에 참예하는 순례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구마노 참배는 인기를 얻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했고, 좁은 산길을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은 "개미의 구마노 참배"라고 불렸다.

3. 2. 근세

근세에 들어 교통망이 정비되면서 서민들의 원거리 이동이 활발해져, 이세 신궁, 고토히라궁, 젠코지 등으로 전국에서 참배자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원격지 참배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을 조직하여 돈을 모아 대표자가 대신 참배하는 습관도 생겨났다. 또한, 이세 신궁 참배에서는, 도중에 무일푼이 되더라도 길가의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누케마이리"라는 풍습도 있었다. 이는 도움을 준 사람도 참배한 사람과 같은 효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3.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

일제강점기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에 신사를 세우고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다.[4] 이는 주로 기독교인들과 마찰을 빚었는데, 일제는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부터 신사참배를 장려했으나, 기독교계 학교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교리에 따라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도 용인되었다.[4] 그러나 1930년 후반 중일 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성직자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4]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생과 가족들을 칼로 참수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러한 역사는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라샬 대학교 역사 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토(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신 사당이다.[7] 일제는 1935년경부터 각급 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했다.[7]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이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도 있었다.[7]

결국 기독교 각 교단은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결함되지 않는 의식이며 국민으로서의 의무일 뿐이라고 선언하였다.[4] 1938년 3월 4일, 숭실전문학교는 일본 제국의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자진 폐교를 결정했다.[4] 이는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과 비교해 볼 때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4] 1954년에 서울에서 다시 대학문을 열었다.[5]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전 이후에도 신사참배와 관련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야스쿠니 신사참배 사건은 태평양 전쟁 전범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치인이 참배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중화민국 등 주변국의 반발을 빚는 국제적 문제이다.[7] 양용근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1943년 12월 옥중에서 사망했다.[7]

4. 천황의 신사참배

역사적으로 천황이 신사를 참배하는 경우에는 행행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가모 행행, 이와시미즈 행행 등이 그것이다. 천황이 직접 배례하는 것은 친배라고 하며, 칙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배례하는 것이다. 천황이 이세 신궁이나 천황릉을 친배하는 경우에는 친알이라고 한다.

5. 종교별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

가톨릭교회도 초기에는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1919년 동경에 교황청 대사관을 설립하고 초대 교황사절로 푸마소니 비온디 대주교를 파견했다. 그리고 교황청은 1934년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승인하였다.[6]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비오 10세는 8월에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막고 만주, 중국, 조선의 가톨릭을 보호하기 위해 마렐라 대주교를 통해 국방 헌금을 일본 외무성에 보냈고 10월에는 반공 정신의 입장에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행동, 즉 중일전쟁에 적극 협력하도록 극동의 모든 교회에 지시하였다.[6] 1936년 일본의 신도 의식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담은 포교성성의 교령 <Pluries Instanterque>가 1936년 5월 26일 공포되며 신사참배에 참여하였다.[6]

5. 1. 개신교

개신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교리에 따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7]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주기철 목사, 양용근 목사 등이 있다.[7] 양용근 목사는 1905년 태어나 순천노회 노회원들과 함께 1940년 11월 15일 구속됐다. 감옥에서 각혈을 하는 등 심한 해소천식으로 인해 일시 풀려났다가 1942년 9월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됐으며 1943년 12월 사망했다.[7]

5. 2. 로마 가톨릭 교회

가톨릭교회도 초기에는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1919년 동경에 교황청 대사관을 설립하고 초대 교황사절로 푸마소니 비온디 대주교를 파견했다. 그리고 교황청은 1934년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승인하였다.[6]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비오 10세는 8월에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막고 만주, 중국, 조선의 가톨릭을 보호하기 위해 마렐라 대주교를 통해 국방 헌금을 일본 외무성에 보냈고 10월에는 반공 정신의 입장에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행동, 즉 중일전쟁에 적극 협력하도록 극동의 모든 교회에 지시하였다.[6] 1936년 일본의 신도 의식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담은 포교성성의 교령 <Pluries Instanterque>가 1936년 5월 26일 공포되며 신사참배에 참여하였다.[6]

6. 패전 후 신사참배 논란

1945년 8월 15일 제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다음의 논란과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6. 1.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이다. 신사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제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논란과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태평양 전쟁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어,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등 주변국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를 넘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문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참조

[1] 서적 神主ライフ! 徳間書店 2010
[2] 웹인용 神社参拝のルールとマナー https://web.archive.[...] 2008-06-19
[3] 웹인용 参拝の作法 https://web.archive.[...] 2008-06-19
[4] 기록
[5] 뉴스 오시영의 세상의 창-김삼환 시인의 “따뜻한 손”, 참을 수 없는 역사 왜곡자들의 궤변 https://web.archive.[...] 법률신문 2013-06-07
[6] 논문 한국 초기 교회사에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에 관한 硏究 총신대 신학대학원 2002
[7] 웹인용 신사참배·동방요배 거부한 양용근 목사의 순교 신앙 https://web.archive.[...] 202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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