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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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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이로 선언은 194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장제스 간의 정상 회담을 통해 발표된 선언이다. 이 선언은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도서, 만주, 대만, 펑후 제도의 중국 반환,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명시했다. 카이로 선언은 이후 포츠담 선언과 일본 항복 문서에 영향을 미쳐 연합국의 대일 정책 기본 방침이 되었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라는 문구로 인해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대만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현재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2. 카이로 선언의 배경 및 주요 내용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중화민국의 정상들이 모여 일본에 대한 전략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카이로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6]


  •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억제하고 처벌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며, 자국을 위한 이익이나 영토 확장의 의도가 없다.
  •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탈취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을 박탈한다.
  • 만주, 대만, 펑후 등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한다.
  •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추방된다.
  • 한국의 노예 상태를 고려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킨다.


"적절한 시기"라는 문구는 초안에는 "일본의 몰락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라고 적혀 있었으나, 미국의 제안으로 수정되었다.[14] 많은 한국인들은 이 문구에 격분했는데, 이는 연합국이 한국에 즉각적인 독립을 부여하는 대신 신탁 통치를 하려는 의도로 해석했기 때문이다.[15]

카이로 선언은 이후 포츠담 선언에 인용되었으며, 일본 항복 문서에도 언급되었다.

2. 1. 카이로 회담의 개최

1943년 11월 22일부터 이집트 카이로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이 만나 대일 방침을 협의했다.[16] 회담 결과, 12월 1일에는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다. 미국이 기초한 선언 초안을 영국이 수정하여 일본의 항복만주, 대만, 펑후 제도의 중화민국 반환, 조선의 자유와 독립 등에 대해 언급했다.[16]

미군기에서 일본 통치 시대의 대만에 뿌려진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나타내는 전단


이 회담을 통해 중화민국은 국제 사회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높였다.[16] 처칠의 회고록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은 장제스나 쑹메이링에게 권력의 절정이었다.[16] 장제스는 회담에서 루스벨트의 질문에 답하여 천황 존폐에 관해서는 일본 국민 스스로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고 답했다.[16]

처칠은 장제스의 참석에 반대했지만,[16] 루스벨트는 장제스를 참석시켜 중화민국에 과도한 기대를 걸었다.[17] 루스벨트는 중일 전쟁에서 연합국 전선을 이탈할 우려가 있었던 중화민국을 미국, 영국, 소련 3대 강국과 함께 격려하여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17] 뤼시우롄 전 부총리 또한 "카이로 회의는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화민국과 일본이 단독 강화하고, 장제스 전 총통이 강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막고, 만주·타이완·펑후 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18]

하지만 루스벨트는 중국 전선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중화민국은 개전 이래 일본과의 전쟁에서 열세였고, 중국 공산당 군과의 연계에도 소극적이었으며, 국공 내전마저 재발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42년에 일본군이 버마의 원조 루트를 차단했기 때문에, 장비·물자가 히말라야를 넘어 공급될 수밖에 없었다.[19]

결국 미국은 중국 대륙을 반격 거점으로 삼는 초기 계획을 변경하여 마리아나·필리핀 경유로 일본을 공략하기로 했다. 카이로 선언은 전술적 오산이 있었던 셈이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이후, 연합국의 중요 회의인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다.

2. 2. 카이로 선언의 주요 내용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억제하고 처벌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며, 자국을 위한 이익이나 영토 확장의 의도가 없음을 명시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였다.[16]

  •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탈취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모든 섬을 박탈한다.
  • 만주, 대만, 펑후 등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한다.
  •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추방된다.
  • 한국민의 노예 상태를 고려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킨다.[14][15]


이러한 목표를 위해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 데 필요한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을 천명하였다.

3. 카이로 선언의 영향

카이로 선언은 1943년 11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12월 1일에 발표되었다. 이 선언에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만주, 대만, 펑후 제도의 중화민국 반환, 조선의 자유와 독립 등이 언급되었다.

카이로 선언의 대일 방침은 이후 연합국의 기본 방침이 되었으며, 포츠담 선언에 계승되었다. 이 회담 이후, 중화민국은 국제 사회에서의 명성을 어느 정도 높였다. 처칠의 회고록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은 장제스 또는 쑹메이링에게 있어서 권력의 절정이었다.[16] 장제스는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킬 때까지 싸울 것을 약속했다.

뤼시우롄 전 부총리는 카이로 회의가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화민국과 일본의 단독 강화를 막고, 만주·타이완·펑후 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18]

하지만 루스벨트는 중국 전선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중화민국은 중일 전쟁에서 일본에 열세였고, 국공 내전 가능성도 있었다. 1942년에는 일본군이 버마의 원조 루트를 차단하여 물자 공급에도 어려움을 겪었다.[19]

루스벨트는 카이로 회담 이후 중화민국에 파견된 외교관이나 조셉 스틸웰로부터 일본군 공세 시 국민당 정부가 붕괴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결국 미국은 중국 대륙을 반격 거점으로 삼는 초기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카이로 선언은 전술적 오산이 있었던 셈이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이후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 연합국의 중요 회의에 초청받지 못했고, 1944년에는 미우빈을 통해 대일 평화 공작을 펼쳤다.

3. 1. 포츠담 선언과 일본 항복 문서에 미친 영향

카이로 선언의 주요 내용은 포츠담 선언 제8항에 인용되었고,[3][4] 이는 일본 항복 문서에 언급되었다.[12] 카이로 선언의 대일 방침은 이후 연합국의 기본 방침이 되었으며, 포츠담 선언에 계승되었다.

1961년 3월, 당시 일본 외무대신은 카이로 선언의 조항이 포츠담 선언에서 이행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고, 일본 항복 문서에 따라 포츠담 선언을 준수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일본 항복 문서는 휴전의 성격을 지닐 뿐, 영토 처분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고 답변했다.[12]

3. 2. 국제 질서에 미친 영향

카이로 선언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원칙들을 제시하였다. 특히, 식민지 해방과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1943년 11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장제스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12월 1일에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만주, 대만, 펑후 제도의 중화민국 반환, 조선의 자유와 독립 등이 언급되었다.[16] 카이로 선언의 대일 방침은 이후 연합국의 기본 방침이 되었고,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졌다.

카이로 회담 이후, 중화민국은 국제 사회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높였다. 처칠의 회고록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은 장제스나 쑹메이링에게 권력의 절정이었다.[16] 뤼시우롄 전 부총리는 "카이로 회의는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화민국과 일본이 단독 강화하고, 장제스 전 총통이 강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막고, 만주·타이완·펑후 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18]

그러나 루스벨트는 중국 전선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중화민국은 중일 전쟁에서 일본에 밀리고 있었고, 국공 내전의 가능성도 있었다. 1942년에는 일본군이 버마의 원조 루트를 차단하여 물자 공급에도 어려움을 겪었다.[19] 결국 미국은 중국 대륙을 반격 거점으로 삼는 초기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카이로 선언은 전술적 오산을 초래한 셈이 되었다. 장제스는 이후 연합국의 중요 회의인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다.

4. 카이로 선언을 둘러싼 논란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독립 시점과 타이완의 귀속 문제 등과 관련하여 여러 논란을 야기했다.

한국의 독립과 관련해서는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라는 표현이 문제가 되었다. 한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이승만은 이 표현이 연합국에 의한 신탁 통치 가능성을 내포하여, 한국이 다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본의 가세 도시카즈는 대일강화조약 체결 논의 과정에서 카이로 선언의 영토 조항 배제를 주장했다. 2012년 양제츠 중국 외교장관은 청일전쟁을 통해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불법 점령한 일본이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이를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5][38]

타이완 귀속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이 카이로 선언을 하나의 중국 원칙의 근거로 삼아 타이완과 펑후중화민국의 일부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타이완의 주요 정당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역사학자들은 카이로 선언의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이 선언을 의향 표명으로 간주하며 공식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은 카이로 선언이 "공동의 목적에 대한 진술"일 뿐이며, 타이완의 주권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만 독립파는 카이로 선언이 서명 없는 보도 자료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3][4][5][6][7][9][10][20]

일본은 카이로 선언이 "영토를 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1961년 일본 외무대신은 일본 항복 문서가 휴전의 성격을 가질 뿐, 영토 처분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고 답변했다.[12][31]

4. 1. 한국 독립 관련 논란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언급하면서 사용된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라는 표현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문구는 한국인들에게 즉각적인 독립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지만, 동시에 '적절한 시기'라는 표현의 모호함 때문에 실망감과 우려를 안겨주었다.[14][15]

당시 중경에 있던 한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미국에 있던 이승만 등은 이 문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특히, "적절한 시기"라는 표현이 연합국에 의한 신탁 통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하여, 장차 한국이 다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게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14][15]

E. C. 카우스 주중대사가 미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적절한 시기"라는 문구의 해석에 대해 문의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은 중국이 한국에 대해 위임통치를 하려 한다는 소문과 함께, 이 문구가 연합국이 한국을 중국의 지배하에 두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우려했다.[35]

이승만은 소련이 극동군 내 한국인 부대를 활용하여 한국을 침공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할 것을 우려하여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기도 했다.[35]

한편, 일본의 가세 도시카즈 총무국 참사관은 대일강화조약 체결 논의 과정에서 카이로 선언의 영토 조항이 일본에 불리하다며 배제를 주장했다.[38]

2012년, 양제츠 중국 외교장관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일본이 청일전쟁을 통해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불법 점령했으며,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이를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8]

4. 2. 타이완 귀속 문제 논란

카이로 선언은 포츠담 선언 8항에 인용되었으며, 이는 일본 항복 문서에 언급되어 있다.[3]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 모두 카이로 선언을 하나의 중국 원칙의 근거 중 하나로 인용하여, 타이완과 펑후중화민국의 일부임을 주장했다.[3][4] 그러나 타이완의 주요 정당들은 이 문제에 대해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았으며,[5] 타이완의 여러 역사학자들은 카이로 선언이 구속력이 없다고 말했다.[6]

미국 정부는 이 선언을 의향의 표명으로 간주하며, 공식적으로 시행한 적이 없다.[7] 1950년 11월, 미국 국무부는 포모사(타이완)와 페스카도르스 제도에 대한 주권을 중국에 반환하는 공식적인 행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8]

1955년 2월, 윈스턴 처칠은 카이로 선언이 "단지 공동의 목적에 대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며, 타이완의 미래 주권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9][10] 영국 관리들은 1955년 5월 이 견해를 반복했다.[11]

1961년 3월, 당시 일본 외무대신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포츠담 선언에서 이행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었고, 일본 항복 문서에 따라 우리는 포츠담 선언을 준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른바 일본 항복 문서는 휴전의 성격을 지닐 뿐, 영토 처분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12]


한편, 당시 중화민국 총통 마잉주는 카이로 선언을 시작으로 일련의 문서들을 인용하며 2014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13]

타이완과 그 부속 도서(댜오위다오 포함)를 중화민국에 반환해야 하는 법적 의무의 이행은 카이로 선언에서 처음 규정되었으며, 이후 포츠담 선언, 일본 항복 문서,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및 중화민국과 일본 간의 평화 조약에서 재확인되었다. 따라서 카이로 선언은 조약 지위를 가진 법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이다.


대만 독립파를 중심으로 카이로 선언은 외교적으로 유효한 선언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0]

2008년 3월, 당시 중화민국 총통 천수이볜은 인터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카이로 선언을 근거로 대만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 시간과 날짜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 세 정상 중 누구도 서명하지 않았고, 사후 추인도, 수권도 없다.
  • 애초에 커뮤니케가 아니라, 보도 자료, 성명서에 불과하다.




천수이볜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1955년 2월 1일의 의회 답변에서 "「카이로 선언」에 기초하여 중국이 대만에 대한 주권을 가진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답했다고 주장하며, "3인(루즈벨트, 처칠, 장)에게는 애초에 컨센서스 같은 것은 없었고, 그 때문에 서명도 없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 답변에서 처칠은 중국(China)이 어떤 중국을 지칭하는지(중화인민공화국인지 중화민국인지)에 대해 명확히 답변하지 않았으며, 또한 실제 의사록에서 카이로 선언을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부분은 없다.

독립 성향의 이메일 잡지인 "타이완의 소리"는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에 대해, 각국 대표의 카이로 선언 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서명에 관해 언급한 기사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이완의 소리"는 도서관 측이 사실 관계를 조사한 결과, "11월 27일에 각국 대표에 의한 서명이 이루어졌다"는 확실한 자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며, 카이로 선언에 관한 기사에서 "서명" 부분을 삭제했다고 보도했다.[22][23]

이후의 포츠담 선언에는 제8조에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해야 한다"라고 명기되어 있으며, 연합국 수뇌에 의해 서명되었고, 더 나아가 일본의 항복 문서에는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받아들여 이행해야 한다"라고 명기되어, 연합국과 함께 일본도 서명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무서명인 것에 대해 "선언"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며, 포츠담 선언의 제8조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해야 한다" 부분은 무효라는 주장이 있다.[24]

중화민국외교부 (외무성에 해당)는 2014년 1월 21일자로 견해를 발표했으며,[25] 카이로 선언은 법적 실질 구속력이 있으며 법적 효력 요건을 갖춘 조약 협정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 선언 제8조가 카이로 선언을 참조하고 있으며, 1945년 9월 2일의 일본의 항복 문서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이 명시되어 있다.
  •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제2조에 따르면, 명칭은 조약의 특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국제 사법 재판소는 1978년 에게해 대륙붕 사건에서, 공동 코뮤니케가 국제 협정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제닝스 전 국제사법재판소장의 『오펜하임 국제법』 제1권 제9판에는 "미조인 및 가조인 문서, 예를 들어 보도 자료라 할지라도 국제 협정이 될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 국제 연맹 상설 국제 사법 재판소는 1933년 4월 15일 동부 그린란드 사건에 관한 판결에서, 한 국가의 외무장관이 외국 공사에게 그 직무 범위 내에서 답변한 것은, 그 해당 국가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3개국 수뇌가 발표한 공식적인 선언은, 법적으로 조인국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다.
  • 카이로 선언은 미국 국무성이 1969년에 출판한 『미국 1776-1949 조약 및 국제 협정 편찬』(Bevans, Treaties and Other International Agreem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776-1949)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미국 정부에서도 카이로 선언은 법적 구속력을 갖는 문서이다.
  •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월 5일 기자 회견에서 "대만은 이미 장개석 총통에게 인도했으며, 미국 및 연합국은 지난 4년 동안 중국이 대만의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했다"고 발언했다.
  • 1959년에 미국 국무성 법률 고문실이 대만의 지위 문제에 대해 발표한 문서에서는, 대만이 카이로 선언 등 일련의 국제 문서에 근거하여 이미 중화민국에 반환되었으며, 당시 연합국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입장을 다시 표명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 선언을 의지 표명으로 간주하며, 정식으로 실시·실행된 적은 없다고 보고 있다.[26]

1950년 11월, 미국 국무부는, 중국에 대만과 펑후 열도의 주권을 회복하는 정식 행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발표했다.[27]

1955년 2월, 윈스턴 처칠은 카이로 선언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했다. 처칠은 하원에서 연설하며, 카이로 선언은 "공통의 목적을 표명한 것에 불과"하며, 대만의 미래 주권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미결정 상태로 남아 있다고 언급했다.[28][29] 1955년 5월, 영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 견해를 반복하며, "중국 국민당은 1945년에 대만과 펑후 열도의 군사 점령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52년까지 일본의 주권 하에 있었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카이로 선언"은 의지의 표명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단순한 의지 표명에 불과하므로, 그 시점의 의지를 말하는 한에서만 구속력을 가지며, 그것만으로는 주권을 이양할 수 없다.[30]

1971년 4월,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보도 자료에서, 미국 정부는 대만의 지위는 미확정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카이로 선언은 연합국의 목적 선언이며, 정식으로 실시·실행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26]

일본은 "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불가분 부분임을 표명하는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입장을 취하지만, 승인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며, 카이로 선언은 "영토를 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 1961년 3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 공산당 의원이 "카이로 선언, 포츠담 선언, 항복 문서의 정신에 따라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었다"고 발언했지만, 외무대신은 "카이로 선언의 조항이 이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포츠담 선언에 명기되어 있으며, 일본의 항복 문서에 따라 우리는 포츠담 선언을 따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른바 일본의 항복 문서는 휴전의 성격을 가지며, 영토 처분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고 답했다.[31]
  • 일본은 카이로 선언의 당사자가 아니지만, 연합국에 의한 정책의 선언으로 인식한다.[32]
  •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의 영토를 법적으로 확정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며,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영토 처리에 대해 최종적인 법적 효력을 가지지 않는다.[33][34]

5. 카이로 선언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평가

카이로 선언은 한국 독립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과 해석을 둘러싸고 다양한 관점과 평가가 존재한다. 특히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는 논란의 중심에 있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김구, 이승만 등은 카이로 선언에 처음에는 기뻐했지만,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를 보고 격분했다. 그들은 이 문구가 한국에 즉각적인 독립을 주는 대신, 연합국이 신탁 통치를 하려는 의도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신탁 통치가 무기한으로 이어지거나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한국이 사실상 다시 강대국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가 있었다.[14][15]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는 초안에는 없었다. 원래는 "일본의 몰락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라고 적혀 있었다. 미국은 "적절한 시점에"를 제안했고, 영국은 최종적으로 "적절한 시기에"를 제안했다. 이러한 변경의 정확한 동기는 불분명하다.[14]

카이로 회담은 중화민국장제스에게는 권력의 절정으로 여겨졌지만,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고려하면 미국의 전략적 오판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루스벨트중일 전쟁에서 중화민국을 지원하고 격려하여 연합국의 전선에 묶어두려 했으나,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에 열세였고, 국공 내전의 위험도 있었다. 결국 미국은 중국 대륙을 반격 거점으로 삼는 초기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5. 1. 중도 진보적 관점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즉각적으로 보장하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를 삽입한 것은, 강대국 중심의 전후 질서 재편 과정에서 약소국의 완전한 주권 회복이 유보된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김구, 이승만 등 많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처음에 이 선언에 기뻐했지만,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를 보고 격분했다. 이들은 연합국이 한국에 즉각적인 독립을 부여하는 대신, 신탁 통치를 통해 한국을 강대국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의도로 해석했다.[14][15] 신탁 통치가 무기한으로 이어지거나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한국이 사실상 다시 강대국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는 원래 초안에는 없었고, "일본의 몰락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라고 적혀 있었다. 미국이 "적절한 시점에"를 제안했고, 영국이 최종적으로 "적절한 시기에"를 제안했는데, 이러한 변경의 정확한 동기는 불분명하다.[14]

한편, 카이로 회담은 중화민국장제스에게는 권력의 절정으로 여겨졌지만,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고려하면 미국의 전략적 오판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루스벨트중일 전쟁에서 중화민국을 지원하고 격려하여 연합국의 전선에 묶어두려 했으나,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에 열세였고, 국공 내전의 위험도 있었다. 결국 미국은 중국 대륙을 반격 거점으로 삼는 초기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5. 2. 기타 관점

대한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김구, 이승만을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카이로 선언에 처음에는 기뻐했지만,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를 보고 격분했다. 그들은 이 문구가 한국에 즉각적인 독립을 주는 대신, 연합국이 신탁 통치를 하려는 의도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신탁 통치가 무기한으로 이어지거나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한국이 사실상 다시 강대국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가 있었다.[14][15]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는 초안에는 없었다. 원래는 "일본의 몰락 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라고 적혀 있었다. 미국은 "적절한 시점에"를 제안했고, 영국은 최종적으로 "적절한 시기에"를 제안했다. 이러한 변경의 정확한 동기는 불분명하다.[14]

카이로 회담 이후, 중화민국은 국제 사회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높였다. 처칠의 회고록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은 장제스 또는 쑹메이링에게 권력의 절정이었다. 장제스는 지원을 넉넉하게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을 동반하여 카이로에 왔으며,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킬 때까지 싸울 것을 약속했다.[16]

루스벨트항일 전쟁에서 이탈할 우려가 있었던 중화민국을 , , 3대 강국과 함께 격려하여 사기를 높이고자 했다. 타이완 할양이나 상임이사국 진입 등이 그 예시이다.[17] 뤼시우롄 전 부총리 또한 "카이로 회의는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화민국과 일본이 단독 강화하고, 장제스 전 총통이 강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막고, 만주·타이완·펑후 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18]

하지만 루스벨트는 중국 전선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중화민국은 개전 이래 일본과의 전쟁에서 열세였고, 중국 공산당군과의 연계에도 소극적이었으며, 국공 내전마저 재발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42년에 일본군이 버마의 원조 루트를 차단했기 때문에, 장비와 물자는 히말라야를 넘어 공급될 수밖에 없었다.[19]

루스벨트는 카이로 회담 이후인 12월 6일, 중화민국에 파견된 외교관이나 조셉 스틸웰로부터 일본군에게 공세를 받으면 국민당 정부가 붕괴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스틸웰은 중화민국에서 미국군이 일본 본토를 공습하는 계획에도 반대했다. 일본군의 내륙 침공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일본제국 육군은 카이로 선언 다음 해, 대륙 타통 작전을 성공시켜 중화민국군의 대일 전선을 거의 붕괴시켰다.

결국 미국은 중국 대륙을 반격 거점으로 삼는 초기 계획을 변경하여 마리아나·필리핀 경유로 일본을 공략하기로 했다. 카이로 선언은 전술적 오산이 있었던 셈이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 이후, 연합국의 중요 회의인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다. 장제스는 1944년에 미우빈을 통해 대일 평화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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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Text of Cairo Declaration, Government of Japan website http://www.ndl.go.jp[...]
[3] 서적 The Dragon Roars Back: Transformational Leaders and Dynamics of Chinese Foreign Policy http://dx.doi.org/10[...] Stanford University Press 2022
[4] 웹사이트 MOFA reaffirms ROC sovereignty over Taiwan, Penghu https://taiwantoday.[...] 2011-09-05
[5] 뉴스 KMT pans DPP for disputing retrocession legitimacy https://www.taipeiti[...] Taipei Times 2017-10-26
[6] 뉴스 Cairo Declaration as legal basis incorrect: advocates https://www.taipeiti[...] Taipei Times 2013-12-02
[7] 서적 Strait Talk: Avoiding a Nuclear War Between the US and China over Taiwan http://mercury.ethz.[...] James Martin Center for Nonproliferation Studies (CNS) 2008
[8] 간행물 Sec. of State (Acheson) to Sec. of Defense (Marshall) http://digicoll.libr[...] US GPO 201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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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Ministry of Foreign Affairs clarifies legally binding status of Cairo Declaration https://en.mofa.gov.[...] 2014-01-21
[14] 간행물 (Mis)-Interpretations of the 1943 Cairo Conference: The Cairo Communiqué and Its Legacy among Koreans During and After World War II https://ijkh.khistor[...]
[15] 웹사이트 孫世一의 비교 評傳 (6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http://monthly.chosu[...] 2023-03-20
[16] 문서 『総図解 よくわかる第二次世界大戦―写真とイラストで歴史の流れと人物・事件が一気に読める』倉山満(著) 鍛冶俊樹(著)
[17] 웹사이트 台独聯盟台湾e広場/WUFI eopenforum 存亡の危機に瀕した台湾(上)米国は台湾に対する政策を転換すべきだ 2005年5月9日 アジア安保フォーラム幹事 宗像隆幸 http://www.wufi.org.[...]
[18] 웹사이트 日華平和条約締結55周年に呂秀蓮副総統が歴史観を語る http://www.roc-taiwa[...] 台北駐日経済文化代表処 2007-04-28
[19] 문서 ビルマルート切断は1942年5月、レド公路の打通は1945年1月であり、中華民国は太平洋戦争では援蔣ルートはヒマラヤ越えのみという大きなハンデを持っていた。
[20] 웹사이트 陳水扁総統:「カイロ宣言」は署名がないニセモノ http://www.taiwanemb[...] 台北経済文化代表処 2017-03-12
[21] 웹사이트 フォルモサ(台湾)の状況について(英語) https://hansard.parl[...]
[22] 뉴스 【カイロ宣言】国会図書館HPが「署名した」削除 http://www.emaga.com[...] 台湾の声 2007-02-22
[23] 뉴스 【カイロ宣言】国会図書館のHP修正が意味するもの http://www.emaga.com[...] 台湾の声 2007-02-24
[24] 서적 日本核武装入門 飛鳥新社 2010
[25] 웹사이트 『カイロ宣言』は法的拘束力のある条約協定 https://www.roc-taiw[...] 20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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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웹사이트 尖閣諸島情勢に関するQ&A https://www.mofa.go.[...] 外務省 2024-03-11
[34] 웹사이트 衆議院議員緒方林太郎君提出中国の南シナ海等に対する認識に関する質問に対する答弁書 https://www.shugiin.[...] 衆議院 2024-03-11
[35] 서적 臨政에서 印度까지 : 林炳稷外交回顧錄
[36] 문서 1943년
[37] 문서 중국 최고 국방위원회 비서장
[38] 서적 《독도1947》
[39] 백과사전 “카이로 선언” http://ko.wikisource[...]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017-11-19
[40] 백과사전 “포츠담 선언” http://ko.wikisource[...]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0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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