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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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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독일의 외교관이자 나치 정권의 정치인으로, 1873년에 태어나 1954년에 사망했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총독으로 임명되어 체코 레지스탕스 진압에 관여했으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54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으며, 2년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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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노이라트, 1939년 [[제국 보호관]] 시절
노이라트, 1939년 제국 보호관 시절
본명콘스탄틴 헤르만 카를 폰 노이라트 남작
출생1873년 2월 2일
출생지클라인글라트바흐, 독일 제국
사망1956년 8월 14일
사망지엔츠바이힝겐, 서독
배우자마리 아우구스테 모저 폰 필제크 (1901년 결혼)
자녀2명
직업외교관
법률가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1932년 - 1937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37년 - 1945년)
군사 경력
1914년
소속독일 제국 육군
뷔르템베르크 왕국 육군
친위대
복무 기간1914년 - 1916년 (독일 제국 육군)
1937년 - 1945년 (친위대)
최종 계급[[파일:DR Oberleutnant v 1918.png|15px]] 예비역 육군 중위
[[파일:SS-Obergruppenführer Collar Rank.svg|40px]] 명예 친위대 대장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수훈[[파일:D-PRU EK 1914 1 Klasse BAR.svg|40px]] 1급 철십자 훈장
[[파일:DEU Wound Badge 1918 Black BAR.png|40px]] 전상장 흑장
[[파일:NSDAP badge.svg|28px]] 황금 나치당원 배지
정치 경력
제국 외무장관임기 시작: 1932년 6월 1일
임기 종료: 1938년 2월 4일
대통령파울 폰 힌덴부르크
아돌프 히틀러 (총통)
수상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아돌프 히틀러
전임하인리히 브뤼닝
후임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보호관임기 시작: 1939년 3월 21일
임기 종료: 1943년 8월 24일
임명권자아돌프 히틀러
전임신설
후임빌헬름 프리크
독일국 내각비밀고문관 의장임기 시작: 1939년 2월 4일
임기 종료: 1945년 4월 30일
독일국 무임소 장관임기 시작: 1938년 2월 4일
임기 종료: 1945년 4월 30일
소속 내각히틀러 내각
재판 및 유죄 판결
범죄 혐의평화에 대한 죄 공모
침략 범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재판뉘른베르크 재판
형량15년 징역형
상태사망

2. 초기 생애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1873년 뷔르템베르크 왕국 파이힝겐안데어엔츠의 일부가 된 클라인글라트바흐 영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슈바벤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콘스탄틴 프란츠 폰 노이라트는 뷔르템베르크의 카를 1세 치하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 콘스탄틴 세바스티안 폰 노이라트는 독일 자유보수당의 국회의원이자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2세 국왕의 실내관이었다.

노이라트는 튀빙겐 대학교와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97년에 졸업한 후, 그는 처음에 고향의 지역 로펌에 입사했다. 1901년에는 공무원으로 들어가 독일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1903년에는 주 런던 독일 대사관에 부영사로, 1909년부터는 '레가티온스라트'(공사)로 배치되었다. 1904년 조지 5세웨일스 공으로서 뷔르템베르크 왕국을 방문한 후, 빌헬름 2세 국왕의 실내관이었던 노이라트는 로열 빅토리아 훈장의 명예 기사단장이 되었다.[2] 노이라트의 경력은 국무장관 알프레트 폰 키더렌-베히터에 의해 결정적으로 발전했다. 1914년에는 콘스탄티노플 대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1916년 심하게 부상을 입을 때까지 보병 연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1914년 12월, 그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는 오스만 제국 (1914-1916)에서 독일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과 관련된 독일 대사관의 공식 입장에 대한 각서를 오스만 제국의 독일 영사관에 보냈다.[3] 이 각서는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동안 오스만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독일 정부가 집단 학살의 "과도함"에 항의하는 것으로 묘사하려 했다.

2. 1. 가문과 출생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1873년 뷔르템베르크 왕국 클라인글라트바흐(Kleinglattbach)에서 태어났다. 그는 슈바벤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할아버지 콘스탄틴 프란츠 폰 노이라트는 뷔르템베르크의 카를 1세 치하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냈고, 아버지 콘스탄틴 세바스티안 폰 노이라트(:de:Konstantin Sebastian von Neurath)는 독일 자유보수당 국회의원이자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2세 국왕의 실내관이었다.[2]

튀빙겐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897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고향의 로펌에서 일하다가 1901년 독일 외무성에 들어가 공무원이 되었다. 1901년 5월 30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마리 아우구스테 모저 폰 필세크 (1875-1960)와 결혼하여 1902년에 아들 콘스탄틴, 1904년에 딸 위니프레드를 낳았다.

2. 2. 교육 및 초기 경력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1872년 뷔르템베르크 왕국 파이힝겐안데어엔츠의 클라인글라트바흐 영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슈바벤 귀족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콘스탄틴 프란츠 폰 노이라트는 뷔르템베르크의 카를 1세 치하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냈고, 그의 아버지 콘스탄틴 세바스티안 폰 노이라트는 독일 자유보수당 국회의원이자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2세 국왕의 실내관이었다.

노이라트는 튀빙겐 대학교와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97년에 졸업한 후 고향의 지역 로펌에 입사했다. 1901년 독일 외무부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1903년 주 런던 독일 대사관 부영사, 1909년 '레가티온스라트'(공사)로 배치되었다. 1904년 조지 5세웨일스 공으로서 뷔르템베르크 왕국을 방문한 후, 빌헬름 2세 국왕의 실내관이었던 노이라트는 로열 빅토리아 훈장 명예 기사단장이 되었다.[2] 노이라트의 경력은 국무장관 알프레트 폰 키더렌-베히터에 의해 발전했다. 1914년 콘스탄티노플 대사관으로 파견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1916년 심하게 부상을 입을 때까지 보병 연대 장교로 복무했다. 1914년 12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오스만 제국 (1914-1916)에서 독일 외교관으로 복귀,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관련 독일 대사관 공식 입장에 대한 각서를 오스만 제국 독일 영사관에 보냈다.[3] 1917년 삼촌 율리우스 폰 조덴의 뒤를 이어 뷔르템베르크 왕실 정부 수장이 되기 위해 잠시 외교관을 그만두었다.

1901년 5월 30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마리 아우구스테 모저 폰 필세크 (1875-1960)와 결혼했다. 아들 콘스탄틴은 1902년에, 딸 위니프레드는 1904년에 태어났다.

2. 3.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16년, 노이라트는 뷔르템베르크 왕국군 척탄병 연대에 예비역 장교로 종군 중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15] 1914년 12월에는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3] 그는 오스만 제국 (1914-1916)에서 독일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과 관련된 독일 대사관의 공식 입장에 대한 각서를 오스만 제국의 독일 영사관에 보냈다.[3] 이 각서는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 동안 오스만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독일 정부가 집단 학살의 "과도함"에 항의하는 것으로 묘사하려 했다. 1917년, 노이라트는 삼촌 율리우스 폰 조덴의 뒤를 이어 뷔르템베르크 왕실 정부의 수장이 되기 위해 잠시 외교관을 그만두었다.

2. 4. 결혼

1901년 5월 30일, 노이라트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마리 아우구스테 모저 폰 필세크 (1875-1960)와 결혼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은 1902년에 태어났고, 딸 위니프레드는 1904년에 태어났다.[1]

3. 정치 경력

1919년 노이라트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외교계로 복귀, 코펜하겐 주재 대사덴마크 대사관에 합류했다. 1921년부터 1930년까지 로마 주재 대사로 재직하며 이탈리아 파시즘에 큰 감명을 받지 않았다. 1929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총리 사망 이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노이라트를 헤르만 뮐러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고려했지만, 집권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30년 노이라트는 런던 주재 대사로 복귀했다.

1932년 프란츠 폰 파펜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한 후, 쿠르트 폰 슐라이허 내각과 아돌프 히틀러 내각에서도 외무장관 직을 유지했다. 1933년 국제 연맹 탈퇴, 1935년 영독 해군 협정 협상, 라인란트 재무장 등에 참여했다. 1937년 나치당에 입당하고 친위대(SS) 명예 SS 중장이 되었다.

1937년 11월 5일 호스바흐 각서에 기록된 회담에서 히틀러의 전쟁 계획에 반대하여 1938년 외무장관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무임소 장관 및 비밀 내각 위원회 의장을 맡았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없었다.

1939년 3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의 ''Reichsprotektor''(제국 보호관)로 임명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 점령에 대한 국제적 분노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11] 프라하 부임 후 언론 검열, 정당 및 노동조합 금지, 시위 학생 탄압, 뉘른베르크법에 따른 유대인 박해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통치는 나치 기준으로 온건한 편이었으며, 경찰 서장 카를 헤르만 프랑크의 과도한 행위를 억제하려 했다. 1941년 히틀러는 노이라트의 통치가 너무 관대하다고 판단, 권한을 박탈하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부관으로 임명했다. 1943년 노이라트는 ''Reichsprotektor'' 직에서 물러났고, 1943년 6월 21일 SS-Obergruppenführer(3성 장군)으로 승진했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 저항과 접촉했다.[11]

3. 1.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1932년 6월 2일 파펜 내각이 대통령 내각으로 발족되자,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으로 노이라트는 외무 장관에 취임했다.[14][17] 각료에 귀족이 많아 "남작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32년 6월 16일부터 독일의 배상 문제에 관한 로잔 회의가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를 의장으로 개최되었다. 노이라트는 총리 프란츠 폰 파펜, 재무장관 루트비히 슈베린 폰 크로시크 백작, 경제장관 헤르만 발름볼트(de) 등과 함께 이 회의에 참석했다.[18] 7월 9일에 체결된 로잔 협정에 의해 독일은 배상 금액을 대폭 삭감받았지만, 여전히 30억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18][19]

1932년 12월 2일, 파펜 총리와 내각의 실력자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국방장관의 대립이 심화되자, 노이라트는 재무장관 크로시크와 함께 슐라이허를 지지하여 파펜의 실각에 기여했다.[20] 12월 3일에 성립된 슐라이허 내각1933년 1월 30일에 성립된 아돌프 히틀러 내각에서도 노이라트는 외무 장관으로 유임되었다.

3. 2. 외무장관 재임

1932년 6월 2일 프란츠 폰 파펜 내각에서 외무 장관으로 취임했다.[14][17]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취임이었다.[17] 노이라트 뿐만 아니라 각료에 귀족이 많아 "남작 내각"이라고 불렸다.

1932년 6월 16일부터 독일의 배상 문제에 관한 로잔 회의가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를 의장으로 개최되었고, 노이라트는 총리 프란츠 폰 파펜, 재무장관 루트비히 슈베린 폰 크로시크 백작, 경제장관 헤르만 발름볼트(de) 등과 함께 이 회의에 참석했다.[18] 그 결과, 7월 9일에 체결된 로잔 협정에 의해 독일은 배상 금액을 대폭 삭감했지만, 여전히 30억 마르크의 지불을 요구받았다.[18][19]

총리 파펜과 내각의 실력자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국방장관이 대립하자, 1932년 12월 2일 각의에서 노이라트는 재무장관 크로시크와 함께 슐라이허를 지지했고, 파펜의 실각에 기여했다.[20] 12월 3일에 성립된 슐라이허 내각과 1933년 1월 30일에 성립된 아돌프 히틀러 내각에서도 외무 장관으로 유임되었다.

1933년 5월, 미국의 한 영사는 "폰 노이라트 남작은 나치에게서 모욕과 굴욕으로만 여겨질 수 있는 것에 굴복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그들이 얼마 동안 허수아비로 그를 남겨두는 것으로 만족할 가능성이 아직 있다"고 보고했다.[4] 그는 1933년 국제 연맹 탈퇴, 영독 해군 협정 (1935년) 협상 및 라인란트 재무장에 참여했다. 노이라트는 한스 프랑크의 독일 법 아카데미 회원이었다.[5]

1937년 1월 30일, 히틀러는 정권 4주년을 기념하여 남아있는 비나치 장관들을 모두 나치당에 등록하고 황금 당 배지를 수여했고, 노이라트는 이를 수락하여 나치당에 입당했다(당원 번호 3,805,229). 1937년 9월, SS에서 명예 Gruppenführer 계급(육군 Generalleutnant에 해당)을 받았다.

1937년 11월 5일, 호스바흐 각서에 기록된 히틀러와 제국 최고 군사-외교 정책 지도부 간의 회담에서, 히틀러는 가까운 미래에 중부 및 동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켜 독일의 생존권자급자족을 확보하고, 서방 열강의 군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이 1938년 이른 시일 내에, 늦어도 1943년까지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7][8]

이에 노이라트, 전쟁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는 독일의 침략 행위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촉발하고, 영국까지 개입하는 유럽 전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보다 늦게 재무장을 시작했으므로 히틀러의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9] 이들의 반대는 도덕적 반대나 히틀러의 기본 생각에 대한 이견이 아닌, 독일이 앵글로-프랑스 개입 없이 유럽 중심부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는 평가에 따른 것이었다.[10]

히틀러는 회담에서 유보를 표명한 블롬베르크, 프리치, 노이라트를 제거하여 군사-외교 정책 결정 기구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938년 2월 4일, 노이라트는 외무장관에서 해임되었고(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노이라트는 해임이 국제적으로 야기할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무임소 장관 및 외교 문제에 대해 히틀러에게 조언하는 비밀 내각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위원회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했다. 헤르만 괴링은 이후 위원회가 "단 1분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11]

3. 3. 나치당 입당 및 SS 입대

1937년 나치당에 입당했다.[15] 같은 해 9월에는 친위대(SS) 명예SS 중장으로 입대했다.[15] 1943년 6월 19일에는 SS 대장으로 승진했다.[15]

1937년 1월 30일, 히틀러는 정권 4주년을 기념하여 남아있는 비나치 장관들을 모두 나치당에 입당시키고 황금 당 배지를 수여했다.[6] 노이라트는 이를 수락하여 당원 번호 3,805,229번으로 나치당원이 되었다.[6]

3. 4. 호스바흐 각서와 실각

1937년 11월 5일, 베를린에서 제국의 최고 군사-외교 정책 지도부와 아돌프 히틀러 간의 회담이 열렸으며, 이 회담 내용은 호스바흐 각서에 기록되었다. 이 회담에서 히틀러는 가까운 미래에 중부 및 동유럽에서 일련의 국지적 전쟁을 일으켜 독일의 생존권자급자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방 열강이 군비 경쟁에서 극복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하기 전에 행동해야 하며, 1938년 이르면, 늦어도 1943년까지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7][8]

이 회담에 참석한 노이라트, 전쟁부 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는 히틀러의 계획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동유럽에서의 독일의 침략 행위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촉발할 것이며, 이는 영국까지 개입하는 유럽 전쟁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우려했다.[9] 또한, 그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보다 늦게 재무장을 시작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9] 프리치, 블롬베르크, 노이라트의 반대는 오스트리아 또는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에 대한 반대가 아닌, 재무장을 위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10]

히틀러는 이러한 반대에 대응하여 1938년 2월 4일, 블롬베르크와 프리치를 해임하고 노이라트 역시 외무장관에서 해임했다.(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노이라트는 자신의 직위가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느꼈으며, 호스바흐 각서에 자세히 설명된 히틀러의 공격적인 전쟁 계획에 반대했다. 노이라트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로 교체되었지만, 그의 해임이 국제적으로 야기할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무임소 장관으로 정부에 남아있었다. 또한 외교 문제에 대해 히틀러에게 조언하는 비밀 내각 위원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헤르만 괴링은 이 위원회가 "단 1분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11]

4.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총독

1938년 2월 4일, 노이라트는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외무장관에서 해임되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그의 뒤를 이었지만, 해임으로 인한 국제적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 무임소 장관으로 내각에 남았다. 또한 외교 문제에 대해 히틀러에게 조언하는 비밀 내각 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헤르만 괴링은 이 위원회가 "단 1분도" 회의를 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11]

1939년 3월, 노이라트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의 ''Reichsprotektor'' (총독)으로 임명되어 히틀러의 개인 대표로 활동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 점령에 대한 국제적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이라트를 선택했다.[11] 프라하 성에 도착한 직후, 노이라트는 언론 검열을 강화하고 정당 및 노동 조합을 금지했다. 1939년 10월11월에는 시위 학생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여 1,200명의 학생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고 9명을 처형했다.[11] 또한 뉘른베르크법에 따라 체코 공화국의 유대인 역사에 대한 박해를 감독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노이라트의 통치는 나치 기준으로 볼 때 전반적으로 온건한 편이었다. 그는 경찰 서장 카를 헤르만 프랑크의 과도한 행위를 억제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1941년 9월, 히틀러는 노이라트의 통치가 너무 관대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권한을 박탈하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부관으로 임명했다. 하이드리히는 1942년 암살되었고, 쿠르트 달루게가 그 뒤를 이었다. 노이라트는 공식적으로 총독 직함을 유지했지만, 1941년 사임을 시도했다. 그의 사임은 1943년 8월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전 내무장관 빌헬름 프릭이 후임 총독이 되었다. 1943년 6월 21일, 노이라트는 명예 SS-Obergruppenführer (3성 장군)로 승진했다.

5.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연합국은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노이라트를 기소했다.[12] 그의 변호는 오토 폰 뤼딩하우젠이 맡았다. 검찰은 그에게 "평화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를 공모; 침략 전쟁의 계획, 시작 및 수행;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 혐의를 제기했다. 노이라트의 변호 전략은 그의 후임자이자 공동 피고인인 리벤트로프나치 정권에서 저질러진 만행에 대해 노이라트보다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국제군사재판소는 노이라트가 보헤미아 및 모라비아 보호령의 명목상 수장으로 짧게 재임하는 동안, 특히 체코 저항을 진압하고 여러 대학생들을 즉결 처형하는 등 인도에 반한 죄의 대부분을 저질렀다는 점을 인정했다. 재판소는 노이라트가 전쟁 범죄에 기꺼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제3제국 전성기에는 그러한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지 않았고, 따라서 저질러진 만행에 단지 사소하게 관여했을 뿐이라는 합의에 도달했다. 그는 연합국에 의해 네 가지 혐의 모두 유죄로 판결받았고,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2]

1945년, 뉘른베르크 재판. 뒷줄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가 노이라트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노이라트와 괴링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노이라트는 뒷줄 가장 끝의 한스 프리체 옆자리에 배정되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는 피고였다.[30] 그는 이 시기에 이미 초기 노인성 치매 징후를 보였다.[21] 참고로 뉘른베르크 감옥 부속 심리 분석관 구스타프 길버트 대위가 개정 전에 피고 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웩슬러 벨뷰 성인 지능 검사에 따르면 노이라트의 지능 지수는 125였다.[31]

1946년 6월 22일, 노이라트는 검찰의 반대 신문을 받았다.[32] 베르사유 조약의 일방적 파기에 대한 추궁에 노이라트는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 국민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평화적인 수단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증언했다.[33] 19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에 대한 추궁에는 "불소 상호 원조 조약 협상은 독일의 서부 국경에 위협이 되었으므로 1개 사단 병력으로 라인란트를 상징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에 대해서는 "프란츠 폰 파펜이 자신의 선을 넘어 히틀러와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다"라고 증언하며 자신의 관여를 부인했다.[33]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총독 시대에 대해 그는 "나는 카를 헤르만 프랑크의 횡포를 억제하고 많은 체코인을 투옥의 운명에서 지켜냈다", "나는 히틀러에게 체코를 독립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영국 검사 데이비드 맥스웰-파이프(en)는 노이라트가 히틀러에게 제출한 체코의 완전 식민지화를 요구하는 보고서를 증거로 제출하며 그의 주장을 무너뜨렸다. 그 보고서에서 노이라트는 "인종적으로 독일인과 융합할 수 있는 체코인만을 보호령에 남겨두고, 독일인과 물과 기름 같은 체코인은 추방하거나 '특별 처치'를 가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34] 노이라트는 이에 상당히 당황하며 "프랑크가 마음대로 쓴 것이며, 나는 모른다"라고 주장했지만, 파이프는 곧바로 히틀러, 노이라트, 프랑크의 3자 회담 기록을 제출했다. 이 회담에서 노이라트는 앞서 보고서의 내용을 뒷받침하며 히틀러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노이라트는 이에 대해 일절 반론할 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하지만 나는 곧 사임했다. 모든 책임은 나의 후임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있다"라고 말하고 증언대에서 물러났다.[35]

10월 1일, 모든 피고에게 판결이 내려졌다. 먼저 모든 피고가 법정에 소환되어 한 명씩 판결문이 낭독되었다.[36] 법정은 노이라트에 대해 "국제 연맹 하의 군축 회의에서 탈퇴하도록 히틀러에게 권고했다", "라인란트를 재점령하려는 히틀러의 결정에 중요한 관여를 했다", "자신의 통치 영역(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에서 노이라트는 독일이 동방에서 벌이는 침략 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가 그의 통치 하에서 행해졌다"며 4가지 기소 사유 모두에서 유죄로 판결했다.[37][38] 그러나 "다음 사항이 감형 사유로 고려될 수 있다. 즉 노이라트가 1939년 9월 1일에 체포된 체코인 중 다수, 그리고 같은 해 가을에 체포된 학생 중 다수를 석방하도록 보안 경찰과 게슈타포에 간섭한 것이다. 또한 1941년에 히틀러는 그의 정부가 가혹하지 않다고 질책했다"라는 판결도 덧붙였다.[39] 이후 개별적으로 선고된 형량 판결에서 노이라트는 금고 15년형을 선고받았다.[40]

6. 슈판다우 교도소 수감 및 석방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은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노이라트를 기소했다.[12] 검찰은 그에게 "평화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를 공모; 침략 전쟁의 계획, 시작 및 수행;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 혐의를 제기했다. 국제군사재판소는 노이라트가 체코 저항을 진압하고 여러 대학생들을 즉결 처형하는 등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그는 네 가지 혐의 모두 유죄 판결을 받고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2]

노이라트는 1954년 11월까지 슈판다우 형무소에 전쟁 범죄자로 수감되었으며,[13] 파리 회담 이후 건강 악화(심근 경색)로 인해 석방되었다. 노이라트를 포함한 금고형을 선고받은 7명의 전범들은 1947년 7월 18일 DC-3기로 베를린으로 이송되어 호송차로 슈판다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41]

유진 버드 미군 형무소 관리관은 노이라트에 대해 "매우 정중하고 노신사라는 인상을 받았다. 뛰어난 매너를 갖춘 것 같았다. 두어 마디 말을 할 때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42]

노이라트는 초콜릿을 좋아해 형무소 직원 중 누군가를 포섭하여 초콜릿을 숨겨 먹었다. 또한 건강이 악화되어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실어증 증세도 나타났다. 형무소 의사는 노이라트가 빨리 걷는 것은 위험하며, 계단을 내려갈 때는 알베르트 슈페어발두어 폰 시라흐 등 젊은 수감자들의 부축을 받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44]

1953년 7월과 1954년 9월 2일에 심장 발작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으나, 노이라트의 상태는 호전되었다.[45] 미국, 영국, 프랑스는 이전부터 그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지만, 소련이 계속 반대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 이후 소련이 갑자기 석방에 동의하여, 결국 노이라트의 석방이 결정되었다. 1954년 11월 6일에 노이라트는 석방되었다.[46]

7. 말년과 사망

그는 엔츠바일링겐(Vaihingen an der Enz)에 있는 가족 소유지로 은퇴했으며, 2년 뒤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참조

[1] 문서 Regarding personal names: Freiherr is a former title (translated as Baron). In Germany since 1919, it forms part of family names. The feminine forms are Freifrau and Freiin.
[2] 간행물 London Gazette 1904-05-10
[3] 서적 Justifying Genocide: Germany and the Armenians from Bismarck to Hitler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Diplomatic Revolution in Europe 1933–36 University of Chicago Press
[5] 서적 Das Personenlexikon zum Dritten Reich. Wer war was vor und nach 1945 Fischer-Taschenbuch-Verlag
[6] 웹사이트 Nazi Conspiracy and Aggression, Volume V, pp. 543-544, Document 2879-PS https://www.loc.gov/[...] Office of United States Chief of Counsel For Prosecution of Axis Criminality 1946
[7] 서적 Foreign Policy and Preparation for War Clarendon Press
[8] 서적 Arms, Autarky and Aggression Edward Arnold
[9]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0]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11]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Simon & Schuster
[12] 웹사이트 Konstantin von Neurath https://encyclopedia[...] 2024-02-13
[13] 웹사이트 Konstantin, baron von Neurath ! German Diplomat, Nazi, WW2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2-13
[14] 문서 ヴィストリヒ(2002)、p.166
[15] 웹사이트 LeMO http://www.dhm.de/le[...]
[16] 문서 ゴールデンソーン(2005)、上巻p.246
[17] 문서 モムゼン(2001)、p.395
[18] 문서 阿部(2001)、p.199
[19] 문서 モムゼン(2001)、p.412
[20] 문서 モムゼン(2001)、p.440
[21] 문서 パーシコ(1996)、下巻p.218
[22] 문서 ワイツ(1995)、p.80
[23] 문서 阿部(2001)、p.263
[24] 문서 ワイツ(1995)、p.99
[25] 문서 阿部(2001)、p.302
[26] 문서 阿部(2001)、p.303
[27] 문서 阿部(2001)、p.302
[28] 문서 ワイツ(1995)、p.107
[29] 문서 ジョウ下巻(2023年)、184頁
[30] 문서 パーシコ(1996)、下巻p.218
[31] 서적 第三帝国の演出者 ヘルマン・ゲーリング伝 下 早川書房
[32] 문서 『ニュルンベルグ裁判記録』、p.187
[33] 문서 『ニュルンベルグ裁判記録』、p.188
[34] 문서 『ニュルンベルグ裁判記録』、p.190
[35] 문서 『ニュルンベルグ裁判記録』、p.191
[36] 서적 パーシコ(1996)、下巻p.269
[37] 서적 パーシコ(1996)、下巻p.275
[38] 서적 『ニュルンベルグ裁判記録』、p.313-314
[39] 서적 『ニュルンベルグ裁判記録』、p.314
[40] 서적 パーシコ(1996)、下巻p.280
[41] 서적 バード(1976)、p.125
[42] 서적 バード(1976)、p.130
[43] 서적 バード(1976)、p.192
[44] 서적 バード(1976)、p.203
[45] 서적 バード(1976)、p.205-206
[46] 서적 バード(1976)、p.206
[47] 간행물 独国外務大臣男爵「フォン、ノイラート」外三十三名叙勲ノ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48] 서적 Foreign Policy and Preparation for War Clarendon Press 1990
[49] 서적 Arms, Autarky and Aggression Edward Arnold 1972
[50]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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