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마게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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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콤마게네 왕국은 오늘날 터키 남중부에 위치했던 고대 시리아-히타이트 왕국으로, 수도는 사모사타였다.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6세기에 아케메네스 제국에 정복되었고,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 분열 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기원전 162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트라프 프톨레마이오스가 독립을 선언하며 콤마게네 왕국이 건국되었다. 콤마게네는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하여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으며, 안티오코스 1세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서기 17년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으나, 38년에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72년에 로마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콤마게네 왕국의 유적은 현재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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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콤마게네 왕국 - 넴루트산
튀르키예 아디야만 주에 있는 넴루트 산은 코마게네 왕국 안티오코스 1세의 묘소와 성소로, 거대한 조각상과 신들의 석상, 돌무덤 등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헬레니즘 시대 유적지이다.
콤마게네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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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위치 | 로마 및 파르티아 제국 근처 |
시대 | 헬레니즘 시대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사모사타 |
공용어 | 그리스어 (공식어) 페르시아어 (초기 통치 왕조) 지역 아람어 |
종교 | 그리스-이란 종교 혼합 |
현재 국가 | 튀르키예 |
역사 | |
성립 | 기원전 163년 |
멸망 | 서기 72년 |
이전 국가 | 소페네 왕국 |
이후 국가 | 로마 제국 |
통치자 | |
왕 | 콤마게네의 프톨레마이오스 (기원전 163년–130년) 콤마게네의 안티오코스 4세 (서기 38년–72년)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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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콤마게네는 오늘날 터키 중남부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으로, 그 역사는 시리아-히타이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3] 유프라테스강 인근의 사모사타(오늘날 삼사트)를 수도로 삼았던 이 지역은 아시리아 문헌에 '쿰무후'(Kummuh)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아시리아의 동맹국이었으나 기원전 708년 사르곤 2세에 의해 아시리아 영토로 편입되었고,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이 분열되면서 콤마게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기원전 162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트라프(총독)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독립을 선언하며 콤마게네 왕국이 시작되었다. 그의 후계자 미트리다테스 1세 칼리니코스는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고 시리아 왕녀와 결혼하여 왕국의 정체성을 그리스-페르시아적 전통 위에 세우려 했다.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1세는 로마와 동맹을 맺어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가 서기 17년에 사망하자,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콤마게네를 시리아 속주에 병합했다. 이후 서기 38년 칼리굴라 황제가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4세를 왕으로 복위시키기도 했으나, 이는 로마의 종속왕으로서의 지위였다. 결국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안티오코스 4세가 반란을 꾀한다는 이유로 왕조를 폐위시키고 콤마게네를 로마 제국에 완전히 합병하였다.[25] 왕국 멸망 후에도 안티오코스 4세의 후손들은 로마 제국 내 여러 지역에서 명망 있는 가문으로 존속했다.
2. 1. 초기 역사 (시리아-히타이트 왕국,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

콤마게네는 오늘날 터키 중남부에 위치했던 소규모 시리아-히타이트 왕국에서 시작되었다.[23] 수도는 유프라테스강 인근의 사모사타(오늘날 삼사트)였다.
아시리아 문헌에는 '쿰무후'(Kummuh)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초기에는 아시리아와 동맹 관계를 맺었으나, 기원전 708년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에 의해 아시리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했으며, 기원전 4세기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면서 콤마게네 역시 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이 분열되자, 콤마게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시기에 콤마게네는 그리스-시리아계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이자 속주로서 자리 잡았다. 일각에서는 초기 헬레니즘 시대에 아르메니아 왕국의 일부였다가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에 합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24]
2. 2. 콤마게네 왕국 (독립과 번영)
콤마게네는 원래 오늘날 터키 남중부에 위치했던 소규모 시리아-히타이트 왕국으로,[23] 수도는 사모사타였다.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배를 거쳐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24]
헬레니즘 시대 콤마게네 왕국은 기원전 162년에 건국되었다.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이 약화되자, 콤마게네 지역의 사트라프(총독)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독립을 선언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왕조는 파르티아 왕들과 혈연 관계가 있었지만, 그의 후계자인 미트리다테스 1세 칼리니코스 (기원전 109년–기원전 70년)는 헬레니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시리아의 그리스 왕녀 라오디케 7세 테아와 결혼하여 자신의 왕조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 왕실 모두와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이 결혼은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평화 조약의 일부였을 수도 있으며, 이후 콤마게네는 페르시아적 요소보다 그리스적 성격이 강해졌다. 콤마게네는 소페네와 함께 이 지역에서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트리다테스 1세는 티그라네스 2세가 다스리던 아르메니아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미트리다테스 1세와 라오디케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세 (재위 기원전 70년–기원전 38년)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했다. 그는 기원전 64년, 로마 공화정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일 때 폼페이우스와 동맹을 맺었다. 이를 통해 폰토스,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등의 위협 속에서도 로마의 힘을 빌려 왕국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콤마게네의 독립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서기 17년에 사망하자, 로마 제국의 황제 티베리우스는 콤마게네를 시리아 속주에 병합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결정은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왕정 유지를 원했던 많은 백성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한다. 반면 타키투스는 로마 통치를 선호하는 이들과 왕가 통치를 선호하는 이들로 나뉘었다고 기록했다.
서기 38년, 칼리굴라 황제는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4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고, 킬리키아의 일부 지역까지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그는 로마의 종속왕일 뿐이었다. 잠시 칼리굴라에게 폐위되었다가 서기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즉위 후 다시 왕위를 되찾은 안티오코스 4세는 서기 72년까지 통치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안티오코스 4세가 로마에 대항해 반란을 꾀한다는 시리아 총독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의 보고[25]를 근거로 왕조를 폐위시키고 콤마게네를 시리아 속주에 완전히 합병했다. 파이투스가 이끈 로마 제6군단 페라타가 콤마게네에 진입했을 때 백성들의 큰 저항은 없었으며,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들인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코스가 로마군과 벌인 하루 동안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고 결국 안티오코스 4세는 항복했다. 이후 제3군단 갈리카가 이 지역을 점령했다 (서기 73년경). 시리아어로 쓰인 1세기 마라 바르 세라피온의 편지는 로마군을 피해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는 난민들의 모습과 로마 당국이 이들의 귀환을 거부하는 상황을 묘사하는데, 이는 서기 18년 또는 72년 로마의 콤마게네 점령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26]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안티오코스 4세의 후손들은 아나톨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중동 등지에서 명성을 누리며 살았다. 예를 들어, 서기 116년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의 후원자였던 안티오코스 4세의 손자 필로파포스를 기리기 위해 장례 기념물을 세웠다. 또한 3세기 로마의 역사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콰드라투스도 그의 후손 중 한 명이다.
2. 3. 로마 제국 편입
17년 안티오코스 3세가 사망하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콤마게네를 시리아 속주에 편입시켰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조치는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왕의 통치를 선호했던 많은 대중은 반대했다.[25] 반면 타키투스는 "대부분 로마의 통치를 원했지만, 다른 이들은 왕가의 지배를 선호했다"고 기록했다.[25]38년,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황제 칼리굴라는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4세를 왕으로 복위시키며 콤마게네 왕국을 부활시켰다.[25] 칼리굴라는 안티오코스 4세에게 킬리키아의 넓은 지역까지 통치하도록 하였다.[25]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 제국 치하의 종속왕이었으며, 칼리굴라에 의해 잠시 폐위되었다가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안티오코스 4세는 72년까지 왕위를 유지했으나, 69년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그가 로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시리아 총독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의 보고[25](또는 의혹[25])를 근거로 왕조를 폐위시키고 콤마게네를 다시 시리아 속주에 영구히 합병했다. 이때 안티오코스 4세의 나이는 72세였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콤마게네 왕국의 독립 역사는 끝나게 되었다.
파이투스가 이끈 페라타 제6군단이 콤마게네로 진군했을 때 민중의 저항은 없었다. 안티오코스 4세의 아들들인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코스와의 하루 동안의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고, 안티오코스 4세는 결국 항복했다.[25] 갈리카 제3군단은 73년경 이 지역을 점령했을 것으로 보인다.[25] 시리아어로 쓰인 1세기 마라 바르 세라피온의 편지에는 로마군을 피해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도망치는 난민들의 모습과 로마 당국이 이들의 귀환을 거부하는 상황을 비통하게 묘사하고 있는데,[25] 이는 18년이나 72년의 로마 점령 시기를 묘사한 것일 수 있다.[26]

콤마게네를 정복한 로마는 역대 왕들이 지켜온 네므루트 산의 분묘를 버려두었으며, 로마 제16 플라비아 피르마 군단은 재물을 빼앗고 산의 목재를 수탈했다. "카라쿠쉬"(Karakush, 검은 새) 문양이 새겨진 여성 묘비 역시 로마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안티오코스 4세의 후손들은 아나톨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중동 등지로 흩어져 살면서 번영을 누렸다. 비문 등을 통해 이들의 유복했던 삶을 엿볼 수 있으며, 이들은 "왕국의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의 손자인 필로파포스는 아테네의 후원자였으며, 그의 사후 116년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기리는 장례 기념물(필로파포스 기념비)을 세웠다. 필로파포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집정관이 된 다음 해인 109년에 역시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또 다른 후손으로는 3세기의 역사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콰드라투스가 있다.
3. 문화
콤마게네 왕국의 문화는 그리스,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 여러 문명이 교차하는 지리적 위치를 반영하여 다양한 요소가 융합된 복합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적 혼합은 통치 이념, 종교, 언어 등 여러 측면에서 나타났다. 학자들은 콤마게네의 문화적 정체성을 "반은 이란화, 반은 그리스화"[21], "옛 아르메니아의 위성 왕국", "그리스계 왕국", "그리스화된 아르메니아 왕국"[16]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한다.
3. 1. 문화적 정체성 (그리스, 페르시아, 아르메니아의 융합)


콤마게네 왕국의 문화적 정체성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마다 그 성격을 다르게 규정하는데, 피에르 메를라(Pierre Merlat)는 콤마게네의 도시 돌리케가 주변 도시들처럼 "반은 이란화되고, 반은 그리스화"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21] 데이비드 M. 랭(David M. Lang)은 콤마게네를 "옛 아르메니아의 위성 왕국"으로 묘사했으며, 블뢰머(Blömer)와 윈터(Winter)는 "그리스계 왕국"이라고 불렀다. 프랭크 맥린(Frank McLynn)은 "아나톨리아 남부의 작은 그리스화된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표현했다.[16] 퍼거스 밀러(Fergus Millar)는 아람어 지방어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콤마게네와 같은 유프라테스 지역 일부에서는 지역 문화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공공 기념물에는 주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지만, 콤마게네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페르시아 혈통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콤마게네 왕들은 스스로 오론테스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아르메니아 왕국을 세운 가문과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다만 이 주장의 역사적 정확성은 불확실하다.[22]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는 넴루트산 성소에 제우스-오로마스데스처럼 그리스와 이란의 신 이름을 합친 신들의 조각상을 세웠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어로 쓰인 비문을 통해 자신이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왕족의 후손임을 기념했다.
콤마게네 통치자들은 안티오코스, 사모스, 미트리다테스 등 이란과 그리스식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콤마게네 지역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이란식 이름들은 이 지역에 이란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1세기 사이 소프라즈쾨이(Sofraz Köy) 무덤에 기록된 이름들은 "전형적인 그리스 왕가의 이름과 초기 라틴어 이름"이 섞여 나타나는 양상을 보인다. 데이비드 M. 랭은 콤마게네에서 그리스-로마 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언급했다.
콤마게네 왕국의 사모사타 출신으로 알려진 2세기 아티카 그리스어 시인 루키아노스의 사례는 이러한 복합적인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의 기원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적지만, 루키아노스 스스로는 한 풍자 작품에서 자신을 "아시리아인"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로마가 콤마게네를 정복한 지 한참 뒤에 활동했지만, "여전히 말이 서툴고 아시리아식 상의(''kandys'')를 주로 입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모어가 아람어였을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콤마게네의 문화는 그리스와 이란(페르시아), 아르메니아적 요소가 혼합된 특징을 보였다. 미트리다테스 1세는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페르시아 문화를 계승했다고 자처했으며,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1세는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문화적 융합은 종교에서도 나타나, 안티오코스 1세가 숭배한 신앙 체계는 코마게네에 이전부터 존재했던 그리스-이란 종교를 종합한 형태였다.
3. 2. 종교 (혼합주의)
코마게네 왕국의 종교는 그리스와 이란 요소가 결합된 혼합주의(Syncretism)적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는 왕국의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코마게네를 "절반은 이란화되고 절반은 헬레니화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안티오코스 1세가 건설한 넴루트 산의 성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티오코스 1세는 이곳에 거대한 신상들을 세웠는데, 신들의 이름은 제우스-오르마즈데스와 같이 그리스와 이란의 신명을 결합한 형태였다. 또한, 그는 그리스어 비문을 통해 자신이 페르시아 및 아르메니아 왕족의 후예임을 강조하며, 오론티드 왕조와의 연관성을 주장했다. 다만 이 주장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왕가의 이름에서도 혼합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 안티오코스, 사모스, 미트리다테스 등 그리스식과 이란식 이름이 함께 사용되었다. 코마게네 지역의 여러 지명에서도 이란어의 영향이 확인되어 광범위한 이란 문화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공용어로는 주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지만, 사모사타 출신의 작가 루키아노스는 자신을 "아시리아인"으로 칭하며 현지 아람어 방언의 사용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안티오코스 1세의 신격화(컬트)는 코마게네에 이미 존재하던 그리스-이란 종교 종합의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3. 3. 언어
콤마게네 왕국의 문화적 정체성은 다양하게 특징지어진다. 피에르 메를라(Pierre Merlat)는 콤마게네의 도시 돌리케가 인근 다른 도시들처럼 "반은 이란화, 반은 그리스화"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21] 데이비드 M. 랭은 콤마게네를 "옛 아르메니아의 위성 왕국"으로 묘사했고, 블뢰머(Blömer)와 윈터(Winter)는 "그리스계 왕국"이라 칭했으며, 프랭크 맥린은 "아나톨리아 남부의 작은 그리스화 된 아르메니아 왕국"이라고 표현했다.[16] 퍼거스 밀러는 현지에서 아람어 방언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콤마게네와 같은 유프라테스 지역 일부에서는 지역 문화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고 보았다.
공공 기념물에는 주로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지만, 콤마게네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페르시아 혈통과의 연관성을 숨기지 않았다. 왕들은 자신들이 오론테스 왕조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아르메니아 왕국을 세운 가문과 관련이 있다고 내세웠으나, 이 주장의 정확성은 불확실하다.[22] 넴루트산에 있는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의 성소에서는 왕이 제우스-오로마스데스처럼 그리스와 이란의 신 이름을 혼합하여 사용한 신들의 기념 조각상을 세웠고, 동시에 그리스어로 작성된 비문에는 자신의 페르시아 및 아르메니아 왕족 혈통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았다.
콤마게네 통치자들은 안티오코스, 사모스, 미트리다테스 등 이란식과 그리스식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또한 콤마게네 지역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이란어 명칭들은 이 지역에 이란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1세기 사이 소프라즈쾨이(Sofraz Köy)의 무덤에서 발견된 이름들은 "전형적인 그리스 왕조의 이름들과 초기 라틴어 인명의 도입"이 혼합된 양상을 보여준다. 랭은 콤마게네에서 그리스-로마 문화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언급했다.
기원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2세기 아티카 그리스어 시인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는 옛 콤마게네 왕국의 사모사타에서 태어났다고 밝혔으며, 한 풍자 작품에서는 스스로를 "아시리아인"이라고 묘사했다. 로마가 콤마게네를 정복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글을 썼음에도, 루키아노스는 자신이 "여전히 말이 서툴고 거의 아시리아 스타일의 상의(''kandys'')를 입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모어가 아람어 방언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할 수 있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4. 지리
콤마게네는 유프라테스강의 오른쪽 유역부터 타우루스 산맥과 아마누스 산맥에 걸쳐 있었다. 스트라본은 콤마게네를 시리아의 일부로 기록했으며[27][9], 그 비옥함에 대해 언급했다.[28][10] 콤마게네의 수도이자 주요 도시는 사모사타(현재 아타튀르크 댐 아래에 잠겨 있다)였다.
콤마게네의 국경은 시간에 따라 변동했다. 특히 안티오코스 테오스 시기에 왕국은 넓은 영역을 다스렸다. 돌리케는 콤마게네의 통치하에서 약 35년간 있었으며, 안티오코스 테오스의 통치를 받은 이후 이르면 기원전 31년에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합병되었을 수도 있다. 게르마니케아는 본래 콤마게네의 도시가 아니었지만, 로마 시대에 콤마게네의 도시로 여겨졌다. 다른 한편, 한동안 콤마게네의 지배를 받았던 제우그마는 전통적으로 키레스티케 지역에 속한다고 여겨졌는데, 스트라본은 폼페이우스가 이곳을 콤마게네에 넘겼다고 언급했다.[29][11]
5. 고고학 유적
로마가 콤마게네를 정복한 후, 넴루트산에 있던 거대한 왕가의 성소는 버려졌다. 로마 군대는 고분의 부장품들을 약탈했으며, 플라비아 피르마 제16군단은 다리를 건설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목재와 숯을 얻기 위해 무덤 주위의 무성한 숲을 마구 베어내어 이 지역에 심각한 토양 침식을 유발했다.[30]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 치세에 세워진 선전 목적의 석회암 조각상과 부조는 당시 조각 양식에서 파르티아의 영향을 보여준다.
콤마게네의 또 다른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로는 미트리다테스 2세 때 봉헌된 담르자(Damlıca)의 제우스 소테르 성소가 있다.
카라쿠슈에는 독수리 조각이 올려진 기둥이 있는데, 이 때문에 해당 고분은 카라쿠슈(Karakuş), 즉 '검은 새'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기둥의 명문에는 여성 세 명이 묻힌 왕가의 무덤임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무덤의 매장실 역시 도굴된 상태이다. 이곳의 주요 발굴 작업은 뮌스터 대학교의 프리드리히 카를 되너(Friedrich Karl Dörner)가 진행했다.[12]
또 다른 왕릉은 아르사메이아에 위치하며, 이곳은 콤마게네 왕들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12]
콤마게네 왕국의 유물 다수는 아디야만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6. 콤마게네의 통치자
콤마게네는 원래 오늘날 터키 중남부에 위치했던 소규모 시리아-히타이트 왕국으로 시작하여[23],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제국,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초기에는 아시리아의 동맹이었으나 기원전 708년 사르곤 2세에 의해 아시리아 영토로 합병되었고, 이후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한때 아르메니아 왕국의 일부였다가 다시 셀레우코스 제국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24]
기원전 162년,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트라프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콤마게네 왕국이 시작되었다. 그의 후손인 미트리다테스 1세 칼리니코스는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고 시리아의 그리스 왕녀 라오디케 7세 테아와 혼인하여 왕가의 혈통적 정통성을 강화했다. 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는 로마와 동맹을 맺으면서도 외교술을 통해 왕국의 독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 사후인 서기 17년,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콤마게네를 시리아 속주에 병합했다. 이에 대해 지역 귀족들은 로마 통치를 지지했으나, 일반 대중은 왕정 유지를 선호하며 반발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기 38년 칼리굴라 황제는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4세를 왕으로 복위시켜 잠시 종속왕국으로 존속했으나, 서기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안티오코스 4세가 반란을 꾀한다는 이유로 왕조를 폐위시키고 콤마게네를 다시 시리아 속주에 영구히 합병했다.[25] 이후 콤마게네 왕가의 후손들은 로마 제국 내 여러 지역에서 명맥을 이어갔다.
6. 1. 콤마게네의 사트라프
이름 | 재위 기간 |
---|---|
사메스 | 기원전 290년 - 기원전 260년 |
아르사메스 1세 | 기원전 260년 - 기원전 228년 |
크세르크세스 | 기원전 228년 - 기원전 201년 |
프톨레마이오스 |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63년 |
6. 2. 콤마게네 국왕
헬레니즘 콤마게네 왕국은 서쪽으로는 킬리키아, 북쪽으로는 카파도키아와 경계를 이루었으며, 기원전 162년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트라프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독립을 선언하며 건국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왕조는 파르티아 왕들과 혈연관계가 있었으나, 그의 후손인 미트리다테스 1세 칼리니코스 (기원전 109년–기원전 70년)는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고 시리아의 그리스 왕녀 라오디케 7세 테아와 혼인하였다. 이를 통해 그의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 왕들과의 연관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콤마게네와 셀레우코스 제국 간의 평화 조약의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이 시점부터 콤마게네 왕국은 페르시아적 요소보다 그리스적 성격이 강해졌고, 소페네와 더불어 이 지역에서 그리스 및 로마 문화 전파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자세한 기록은 부족하지만, 미트리다테스 칼리니코스는 티그라네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트리다테스와 라오디케의 아들은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 (재위 기원전 70년–기원전 38년)였다. 안티오코스 1세는 기원전 64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일 때 폼페이우스의 동맹으로 참전했다. 그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로마로부터 콤마게네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서기 17년에 사망하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콤마게네를 시리아 속주에 병합시켰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러한 로마의 결정은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왕가의 통치를 선호했던 많은 일반 대중의 반대에 부딪혔다. 반면, 타키투스는 "대부분 로마의 통치를 원했지만, 다른 이들은 왕가의 지배를 선호했다"고 기록했다.
서기 38년, 로마 황제 칼리굴라는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인 안티오코스 4세를 콤마게네의 왕으로 복위시키고, 킬리키아의 넓은 지역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 제국 치하의 종속왕이었으며, 칼리굴라에 의해 잠시 폐위되었다가 서기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즉위 후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그는 서기 72년까지 통치했으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로부터 안티오코스 4세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결국 왕조를 폐위시키고 콤마게네를 시리아 속주에 영구히 합병하였다.[25] 파이투스가 이끈 페라타 제6군단은 콤마게네에 진입했을 때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고, 안티오코스의 아들들인 에피파네스와 칼리니코스와의 전투는 하루 만에 무승부로 끝났으며 안티오코스는 항복했다. 갈리카 제3군단이 서기 73년경 이 지역을 점령했을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어로 쓰인 1세기 마라 바르 세라피온의 편지는 로마군을 피해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는 난민들의 모습과 로마 당국이 이들의 귀환을 거부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서기 18년 또는 72년 로마의 콤마게네 점령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26]
안티오코스 4세의 후손들은 아나톨리아, 그리스, 이탈리아, 중동 등지에서 번영하며 명성을 누렸다. 대표적인 예로, 아테네 시민들은 서기 116년 안티오코스 4세의 손자이자 아테네의 후원자였던 필로파포스를 기리기 위해 장례 기념물을 세웠다. 또한 3세기의 역사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콰드라투스 역시 안티오코스 4세의 후손이다.
국왕 | 재위 기간 | 비고 |
---|---|---|
프톨레마이오스 |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30년 | 콤마게네 왕국 건국 |
사메스 2세 테오세베스 디카이오스 | 기원전 130년 – 기원전 109년 | |
미트리다테스 1세 칼리니코스 | 기원전 109년 – 기원전 70년 | 라오디케 7세 테아와 혼인 |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 | 기원전 70년 – 기원전 38년 | 로마와 동맹, 독립 유지 |
미트리다테스 2세 | 기원전 38년 – 기원전 20년 | |
미트리다테스 3세 | 기원전 20년 – 기원전 12년 | |
안티오코스 3세 | 기원전 12년 – 서기 17년 | 사후 로마 속주 편입 |
로마 직접 통치 | 서기 17년 – 서기 38년 | 시리아 속주의 일부 |
안티오코스 4세 | 서기 38년 – 서기 72년 | 로마의 종속왕, 누이이자 아내 율리아 아이오타파, 최종적으로 로마에 병합됨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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