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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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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탄허는 유교, 불교, 도교에 능통했던 승려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배우고 불교에 귀의했다. 1934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출가하여 한암선사에게 사사받았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을 강의하며 불교 경전을 번역했다. 1951년 한암선사 열반 후 월정사 조실과 동국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 및 역경 사업에 힘썼다. 또한, 동양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발언을 했으며, 정치 관련 논란도 있었다. 저서로는 《신화엄경합론》 등이 있으며, 인촌문화상과 국민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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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기본 정보
탄허 스님 사진
탄허 스님
법명탄허 (呑虛)
속성김(金)
화현(化現)
탄허(呑虛)
만오(晩悟)
출생1913년 3월 19일
사망1983년 6월 7일 (향년 70세)
출생지전라북도 김제시
법랍57세
학력불교 경전
종교불교
주요 활동
활동 분야불교
역경사업
주요 저서《신화엄경합론》
《대방광불화엄경소초》
《주역선해》
《불교강좌》
《탄허록》
《遁世無悶歌》 (둔세무민가)
주요 역서《화엄경》
《주역》
사상
주요 사상화엄사상

2. 생애

탄허는 1913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김홍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식과 학문적 소양을 길렀다. 유학, 천도교, 증산교 등 다양한 사상을 접했으며, 특히 도덕경장자를 읽고 '도(道)'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투옥으로 옥바라지를 했다.[1]

1934년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하여 한암 선사를 은사로 모시고 불문에 귀의했다. 이후 3년간 묵언 수행을 하고, 금강경, 대승기신론 등 불교 경전을 강의하며 선교(禪敎) 겸수(兼修)의 길을 걸었다. 1939년에는 화엄경과 화엄론을 강의하고, 한암의 유촉으로 <신화엄경합론> 번역에 착수하여 훗날 역경 불사의 초석을 다졌다.

1951년 한암 선사 열반 후, 탄허는 월정사 조실 및 대한불교 강원도 종무원장에 추대되었다. 1956년 오대산 수도원을 설립하여 불교 인재 양성에 힘썼고, <신화엄경합론> 번역에 매진하였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장을 역임하고, 1966년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 원장에 추대되는 등 한국 불교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7년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를 탈고하고, 1975년 총 47권을 간행하였다. 1977년 월정사에서 <신화엄경합론> 간행 기념 제1회 화엄법회를 개최하였다. 일본 도쿄대학, 타이완 국립타이완대학교, 미국 등에서 특강 및 설법을 통해 한국 불교의 위상을 높였다.

2. 1. 출가 이전 (1913년 ~ 1934년)

탄허는 1913년 음력 1월 15일, 전라북도 김제 만경에서 유학자이자 천도교 신자로 개종한 항일 독립운동가 김홍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10여 년간 부친과 조부, 향리의 선배들에게서 사서삼경 등 유학의 전 과정을 배웠다. 13세까지는 정읍 증산교의 일파인 차천자교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1929년에는 충청남도 보령으로 옮겨 기호학파 최익현의 제자인 이극종으로부터 사서삼경과 예기, 춘추좌전 등 경서를 배웠다.

1932년 즈음 노자도덕경장자 등 도가 경전을 읽으며 '도(道)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같은 해 음력 8월 14일, 방한암 선사에게 처음 서신을 보낸 후 출가할 때까지 3년간 약 2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1934년부터 탄허는 새벽 2시에 일어나 참선하고 경전을 읽는 것을 49년간 한결같이 실천했다. 16세에 가문의 중매로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으나, 21세에 출가하였다. 출가 전 탄허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는데, 처가에서 소를 팔아 《주역》을 사주자 글방에서 미친 듯 춤을 추며 큰 소리로 읽었다고 한다. 이를 본 처가에서는 탄허가 처자식과 집안일을 돌보지 않을 것이라 여겨 탄허의 학문 추구를 포기했다고 한다. 탄허는 당시 《주역》을 500독 하였다고 전해진다.

2. 1. 1. 독립운동 투신 (1919년 ~ 1924년)

1919년부터 부친 김홍규가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 수감되어 1924년까지 옥바라지를 하였다.[1]

2. 2. 출가와 수행 (1934년 ~ 1951년)

1934년 22세 (음력 9월 5일)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다. 같은 해 음력 10월 15일(동안거 결제일)에 한암선사를 은사(恩師)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이후 3년여간 묵언(默言) 수행하였다.[2][3][4]

1936년 6월 상원사에서 선교(禪敎) 겸수(兼修) 인재 양성을 위해 설치한 승려 연합수련소에서 한암선사의 증명 아래 중강으로서 금강경, 대승기신론, 범망경 등을 강의했다.[2][3][4]

1939년 강원도 3본산 승려 연합 수련소와 선원의 고참 선객인 고암, 탄옹의 청으로 화엄경과 화엄론 강의가 개설되었다. 이 강의 역시 한암선사의 증명하에 탄허가 강의하였다. 11개월 강의 후 한암은 탄허에게 <신화엄경합론> 번역을 유촉하였다. 이에 탄허는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47권)을 비롯한 사교(四敎), 사집(四集), 사미(沙彌) 등 불교내전(佛敎內典) 총 14종, 70권의 불교경전을 현토(懸吐), 역해(譯解)하였다. 이는 훗날 역경불사의 저본이 되었다.[2][3][4]

1949년까지 출가 후 약 15년간(6.25 이전) 탄허는 월정사를 벗어나지 않고 한암선사를 모시며 선원에서 참선하고, 강원의 이력(履歷) 과정, 보조법어(普照法語), 육조단경, 영가집(永嘉集), 전등록(傳燈錄), 선문염송, 선어록(禪語錄) 등 주요경전을 사사(師事)하였다.[2][3][4]

1951년 탄허의 나이 34세에 한암선사가 열반하였다.[2][3][4]

2. 3. 교육 및 역경 사업 (1951년 ~ 1983년)

1951년 탄허의 스승인 한암선사가 열반하였다.[2][3][4]

1955년 탄허는 월정사 조실(祖室) 및 대한불교 강원도 종무원장에 추대되었다.[2][3][4]

1956년 탄허는 불교와 사회 전반에 걸쳐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이상 아래 오대산 월정사에 대한불교 조계종 오대산 수도원을 설치했다. 같은 해 가을부터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등에 대한 번역에 착수하였다.[2][3][4]

1958년 영은사로 옮겨 1962년 10월까지 인재 양성 교육 불사를 이어갔다.[2][3][4]

1962년 10월 월정사 주지 발령을 받고 월정사 방산굴에 거처했다.[2][3][4]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장을 역임했다.[2][3][4]

1966년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 원장에 추대되었다.[2][3][4]

1967년 10년 만에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번역 원고를 탈고하였다.[2][3][4]

1969년 대전 학하리에 자광사(慈光寺)를 창건하였다. 같은 해에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을 중창하였다.[2][3][4]

1972년 화엄학 연구를 위하여 서울 낙원동에 화엄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1973년 3월부터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간행에 착수하였다. 청룡사(靑龍寺) 중창 사적비기를 썼다.[2][3][4]

1975년 동국학원(東國大學校) 이사에 취임하였다. <신화엄경합론> 총 47권을 간행하였다.[2][3][4]

1977년 월정사에서 <신화엄경합론> 간행을 기념으로 제1회 화엄법회를 개최하였다. 전북 이리역 재난 이재민 돕기 서예전의 수익금을 전액 희사하였다.[2][3][4]

1978년 인도 4대 불교 성지를 참배했다. KBS TV에서 동행, 촬영하여 ‘불교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11회 방영하였다.[2][3][4]

2. 4. 해외 활동

탄허는 일본 도쿄대학의 동양학 세미나에서 화엄학 특강을 했다.[1] 타이완 국립타이완대학교의 심포지엄에서 비교종교에 대한 특강을 했다.[1] 1982년 9월 15일 미국에서 개최된 세계고승법회, 미국 홍법원 10주년 대법회에서 설법하였다.[1]

3. 사상과 평가

탄허는 불교, 유교, 도교를 아우르는 회통 사상으로 유명하며, 노장사상에도 깊은 이해를 보였다. 함석헌과 양주동에게 장자 강의를 한 일화는 그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주는 예시이다. 양주동은 탄허의 강의를 듣고 "장자가 다시 살아와도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며 극찬했다.[7]

탄허는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을 '예지' 혹은 '미래학'이라고 칭하며,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예언가와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5] 그는 불교의 말세론과 주역의 원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했는데, 특히 한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강조했다.[6]

탄허의 사상과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정치적인 논란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탄허는 10월 유신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으로 암울했던 시기에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예지는 단순한 예언이 아닌, '선의 가득한 당위의 미래학'으로 평가받기도 한다.[5]

정치적인 논란으로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혼담에 대한 부정적 의견 제시,[7] 10.26 사건 이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전화 통화 거절,[8] 전두환 대통령의 아호(雅號)를 일해(日海)로 지은 것[9] 등이 있다. 또한, 탄허는 "최고의 지도자가 소인일 때" 백성이 도탄에 빠진다고 경고하기도 했다.[7]

3. 1. 회통 사상

탄허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 불교, 도교를 회통한 것으로 유명하다. 난해한 노장사상에 대해서도 회통을 통하여 그 뜻을 드러내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다.

해방 후 함석헌과 양주동은 탄허에게서 장자 강의를 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양주동은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듣고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까지 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 학문적 깊이에 탄복했다고 전해진다.[7]

3. 2. 미래에 대한 예지

탄허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단순한 예언이 아닌, 예지 혹은 미래학이라고 칭했다. 그는 스스로를 노스트라다무스 류의 예언가와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5] 탄허는 대방등대집경 등에서 보이는 불교의 말세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미래를 구체적으로 예견했다. 그는 인류가 앞으로 고난을 겪겠지만, 이는 성숙을 위한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한국인의 역할을 강조했다.[6]

탄허는 주역의 원리에 따라 세계 열강들의 관계와 미래를 예측했다. 특히 자연재해와 핵으로 인해 전 세계가 70% 정도 타격을 입을 때, 한국 역시 피해를 보겠지만, 결국 세계사의 주역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강조했다.[6]

3. 2. 1. 긍정적 평가

탄허는 자신의 국가와 인류 세계에 대한 전망을 예언이 아닌 예지 내지 미래학이라 불렀다. 또한 스스로를 노스트라다무스 류의 예언가가 아니라 했다.[5]

탄허는 선(禪)과 교(敎)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사서삼경과 노장사상, 역사와 민족종교, 음양오행과 풍수지리 모두를 꿰뚫는 혜안을 갖춘 인물이었다. 탄허의 활동기는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피살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정치적 암흑기였기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도참적 발언에서 희망을 찾으려 하였다. 탄허는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의 강한 영향 아래서 성장하였고, 면암 최익현 계통에서 유학을 공부하였는데, 그의 예지에서 보이는 '진한 민족주의적 정서'는 이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와 지구의 변화에 대한 탄허의 도참적 발언들은 주로 김일부의 『정역』에 근거한 것으로 많은 내용들이 그대로 실현되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도 많이 있었다. 탄허의 도참사상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 세계의 변방에서 정치적 암흑기에 신음하던 우리 사회의 구성원을 향해 던진 희망의 메시지였다고 생각된다. 탄허의 예지는 '선의 가득한 당위의 미래학'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5]

탄허는 대방등대집경 등에서 보이는 불교의 말세론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 구체적으로 예견하기도 했다. 그는 향후 인류가 고난을 겪을지라도 그것은 성숙을 위한 것이라 하였고 한국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6]

탄허는 주역의 원리에 의거해서 세계 열강들의 관계와 미래상을 예측하였으며, 자연재해와 핵으로 인해 전 세계가 70% 정도의 타격을 입을 때 우리도 피해를 보나, 한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서 우뚝 서게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6]

3. 3. 정치 관련 논란

탄허는 “최고의 지도자가 소인일 때는 그에 따라 10퍼센트의 극악질(아주 악질형) 관리가 등용되어, 10퍼센트의 극선질(아주 선한 부류)은 모두 암혈에 숨을 수밖에 없어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7]

1979년 늦은 봄, 한 대학 여교수가 지인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과의 혼담에 대해 질문하자 탄허는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7]

1979년 10월 26일 이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전화 통화를 원했으나, 12월 12일 이후에는 자격이 없다며 부탁을 거절하였다.[8]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아호(雅號)를 일해(日海)라고 지었다.[9]

1983년 탄허는 통일 예언에서 월악산 자락에 달빛이 비칠 수 있는 호수충주호 건설을 언급했다.[10]

4. 저서


  • 신화엄경합론 총 47권 (1975)
  • 서장(書狀)
  • 도서(都序)
  • 절요(節要)
  • 선요(禪要) (1976)
  • 능엄경
  • 금강경
  • 원각경
  • 기신론 등 사교(四敎)
  • <부처님이 계신다면> (1980)
  • <현토 역해 주역선해(周易禪解)>
  • <현토 역해 도덕경선주(道德經選註)> (1982)
  • <피안을 이끄는 사자후> (1997)
  • <발심삼론(發心三論)> (2001)
  • <동양사상(東洋思想)> 특강 CD 18장(교재1권 포함) (2002)
  •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 과 법문 CD (2004)

5. 수상 및 서훈

1975년 《신화엄경합론》 간행 공로로 동아일보사 주최 제3회 인촌문화상과 조계종 종정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 국민훈장이 추서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탄허 공식웹사이트 http://www.tanheo.co[...]
[2] 웹사이트 http://www.tanheo.or[...]
[3] 웹사이트 http://www.tanheo.co[...]
[4] 영상 "<특집> 한암스님 마음의 달을 비추다" http://www.btn.co.kr[...] BTN불교TV 2018-05-22
[5] 논문 탄허스님의 예지, 그 배경과 의의 한국불교학회 2012-08
[6] 뉴스 무분별 개발, 과욕이 지구촌 멸망 재촉 http://sportsworldi.[...] 한국대학신문 2010-10-13
[7] 웹인용 박정희와의 결혼 막은 ‘쪽집게 예언’ 스님 http://www.hani.co.k[...] 한겨레 2012-04-04
[8] 웹인용 "[왜냐면] 기미년, 탄허 큰스님과 정승화 / 원행 스님" http://www.hani.co.k[...] 한겨레 2012-12-10
[9] 뉴스 “도덕·철학 빈곤한 정치 지도자는 실정” 역설 http://www.hyunbulne[...] 현대불교신문 2013-04-29
[10] 웹인용 오늘의 묵상 9월 2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https://www.casuwon.[...] 천주교수원교구청 2018-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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