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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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제6대 왕으로, 53년에 즉위하여 146년까지 93년간 재위했다. 어린 시절 이름은 어수이며, 휘는 궁이다. 모본왕의 뒤를 이어 7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며, 어머니 부여태후가 섭정했다. 재위 기간 동안 영토를 확장하여 동옥저를 병합하고 요서 지역에 성을 쌓는 등 국력을 신장시켰다. 132년경 동생 수성이 왕위를 탐하자, 146년에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이후 차대왕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태조라는 묘호는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하는 등 왕조의 시조에 버금가는 공적을 세운 것을 기려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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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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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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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 | 태조대왕 |
별칭 | 국조왕(國祖王) |
출생일 | 47년 |
출생지 | 고구려 계루부 |
사망일 | 165년 3월 (음력) (118세) |
사망지 | 고구려 별궁 |
능묘 | 칠성산 871호(七星山 871号) (추정) |
묘호 | 태조(太祖) |
시호 | 태조대(太祖大) |
휘 | 궁(宮), 어수(於漱) |
정치 | |
작위 | 제6대 고구려 국왕 |
재위 | 53년 11월 ~ 146년 12월 (음력) |
전임자 | 모본왕 |
후임자 | 차대왕 |
가족 관계 | |
부친 | 재사 |
모친 | 부여태후 |
형제자매 | 차대왕? · 신대왕? |
배우자 | 막근의 모후, 수성의 모후? |
자녀 | 막근 · 막덕 |
언어별 명칭 | |
영어 | Taejo-daewang, Gukjo-wang |
한글 | 태조대왕, 국조왕 |
한자 | 太祖大王, 國祖王 |
가타카나 | 테조데완, 쿳쵸완 |
2. 치세
모본왕 사후 7세의 나이로 즉위한 태조대왕은 섭정을 받았다. 이후 옥저를 병합하고 갈사국을 정벌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였다. 56년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쪽으로는 창해(滄海), 남쪽으로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17] 68년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항복하자 우태(于台)에 임명했고, 70년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병합하였다.[17] 72년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17]
98년 책성(柵城)을 순수하고, 102년 책성을 안무(安撫)하였으며, 114년 남해(南海)를 순수하는 등 넓어진 영토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121년부터는 동생인 수성에게 국정을 맡겼다.
후한과의 관계는 평화와 전쟁을 반복하였다. 105년 요동군을 공격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 외교를 펼쳤다. 118년 예맥과 함께 현도군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자 수성을 보내 요동군·현도군을 공격, 큰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음력 4월 요동의 선비족과 요수현(遼隧縣)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 마한·예맥과 현도성을 공격했으나 부여왕 위구태(尉仇台)의 협공으로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예맥과 현도성을 공격했으나 부여에 의해 패배하였다. 146년 요동의 신안(新安)·거향(居鄕)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 태수를 죽였으며, 낙랑군을 공략하여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146년, 태조대왕은 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나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 165년에 서거하였다.[19]
2. 1. 탄생과 즉위
모본왕이 신하 두로에게 살해된 후, 고구려의 신하들은 대무신왕의 동생이자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재사(再思)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재사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양하여, 그의 아들인 궁(宮)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궁의 나이는 7세였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부여태후가 섭정을 하였다.[17] 어릴 적 이름은 어수(於漱)이며 휘는 궁(宮)이다.[5]《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5][5]
2. 2. 내정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56년에는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쪽으로는 창해(滄海), 남쪽으로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17] 68년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항복하자 그를 우태(于台)에 임명했고, 70년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병합하였다.[17] 72년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17] 일반적으로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증거로 여겨진다.[17] 98년 책성(柵城)을 순수하고, 102년 책성을 안무(安撫)했으며, 114년 남해(南海)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했다.[17]항복한 갈사왕의 손자 도두를 우태(優台)에 봉하고, 정벌 시 포로로 잡은 주나국 왕자를 고추가에 봉했다.[17] 118년 8월 국내의 현인, 선량한 사람, 효행하는 사람을 천거하게 했다.[17] 123년 목도루(穆度婁)를 좌보(左輔), 고복장(高福章)을 우보(右輔)로 등용하여, 왕제(王弟)인 수성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게 했다.[17]
2. 3. 정복 전쟁과 영토 확장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56년에는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滄海, 동조선만)·남으로는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다.[17] 68년에는 갈사국(曷思國) 왕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그를 우태(于台)에 임명했다. 70년에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서 조나(藻那)를 병합하였다. 72년에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를 보내 주나(朱那)를 병합하고 그 왕자 을음(乙音)을 고추가에 임명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증거로 여겨진다.98년에는 책성(柵城)을 순수하고,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安撫)하였으며, 114년에는 남해(南海)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한편 후한과의 대외 관계에서는 평화적인 외교와 적극적인 공세를 함께 펼쳤다. 105년에는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였고, 왕은 자신의 동생 또는 서자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군·현도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遼隧縣)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왕 위구태(尉仇台)가 한나라 군과 협공을 펼쳐, 고구려군이 크게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新安)·거향(居鄕)을 약탈하였다.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 태수를 죽이고, 낙랑군도 공략하여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2. 4. 외교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105년에는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였고, 왕은 자신의 동생 또는 서자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다.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군·현도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왕 위구태가 한나라 군과 협공을 펼쳐, 고구려군이 크게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22년 후한과 화친하였으나,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거향을 약탈하였다.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 태수를 죽이고, 낙랑군도 공략하여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17]2. 5. 퇴위와 최후
132년 무렵부터 동생인 수성(차대왕)은 왕위에 욕심을 냈다. 그러나 태조대왕이 죽지 않자 146년에 측근들이 부추기니, 수성은 역모를 도모하였다. 이에 태조대왕은 수성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그 후에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65년에 서거하였다.[19] 사인은 자연사로 추정되지만, 차대왕 또는 신대왕에게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왕제(王弟)인 수성(遂成)에게 다른 마음이 있음을 간파한 고복장(高福章) 등은 왕에게 수성을 주살할 것을 권했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146년 12월에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수성은 차대왕이 되어 즉시 고복장을 처형하고, 측근이었던 간신들을 등용하여 고위직에 앉혔다. 더욱이 태조대왕의 적자 막근(莫勤, 모곤)을 죽이게 했고, 이를 들은 막근의 동생 막덕(莫徳, 모덕)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태조대왕은 차대왕 20년(165년) 3월, 실의 속에 119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태조대왕이 죽은 해가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공히 165년이라고 기록되었지만, 후한서에는 121년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조에는 "궁(宮)이 죽고 그 아들 수성(遂成, 차대왕)이 왕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19] 만약 후한서를 따른다면 태조대왕의 재위가 121년에 끝나므로, 122년 이후의 사실은 태조대왕의 업적이 아니고 아우(혹은 아들)인 차대왕의 업적이 된다.
『삼국사기』에는 퇴위할 때 태조대왕이라 칭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시호와 매장지에 대한 기술은 없다. 또한 이 직후 차대왕 20년 10월 조에 명림답부에 의해 차대왕도 살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삼국유사』 왕력에는 국조왕(태조대왕)은 을사년(165년)에 119세 때 동생 왕(차대왕)과 함께 신왕(신대왕)에게 살해되었다고 적혀 있다.
3. 가계 논란
태조대왕의 가계에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再思)는 유리명왕의 아들이다. 재사의 조카 모본왕이 사망한 시기는 53년으로, 유리명왕 사망 후 38년이 지난 시점이다. 따라서 재사가 유리명왕 말년에 태어났다고 해도 재사의 나이는 최대 35세이다. 그러나 재사는 모본왕 사후 연로함을 이유로 왕위를 사양했으므로 35세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또한 재사의 다른 아들들로 기록된 차대왕과 신대왕의 출생 연도는 각각 71년과 89년이므로, 신대왕 출생 당시 재사의 나이는 최소 70세를 넘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채호는 태조대왕이 유리명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이며, 재사는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20]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후한 안제 건광 원년(121)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즉위했다는 후한서 기록을 인용하기도 했다.
3. 1. 차대왕, 신대왕과의 관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후한서』와 이를 인용한 신채호의 견해에 따르면, 차대왕·신대왕·인고 3형제는 태조대왕의 동생이 아니라 서자라고 한다.[18]한편, 『후한서』에는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로, 신대왕은 차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에는 차대왕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21] 이러한 태조대왕 가계의 의문점은 《삼국지》에 "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라고 쓰인 기록의 흔적으로 보기도 한다.[22]
《북사(北史)》에는 산상왕의 다른 이름이 위궁(位宮)이라 하면서 그가 태조대왕의 증손자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다른 기사 및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는 산상왕의 아버지인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동생이라 하므로, 태조대왕은 산상왕의 큰아버지가 된다. 위궁이 산상왕이 아니라 그 장남 동천왕의 이름이라고 고쳐 이해하더라도,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이라면 동천왕은 태조대왕의 증손이 아닌 종손이 된다.
왕제(王弟)인 수성(遂成, 차대왕)에게 다른 마음이 있음을 간파한 고복장(高福章) 등은 왕에게 수성을 주살할 것을 권했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146년 12월에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하였다. 수성은 차대왕이 되어 즉시 고복장을 처형하고, 측근이었던 간신들을 등용하여 고위직에 앉혔다. 더욱이 태조대왕의 적자 막근(莫勤, 모곤)을 죽이게 했고, 이를 들은 막근의 동생 막덕(莫徳, 모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2. 산상왕과의 관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일부와 삼국유사, 중국 북사(北史)의 기록에는 산상왕의 다른 이름이 위궁(位宮)이라 되어 있으며, 태조대왕의 증손자라고 한다.[18]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다른 기사와 삼국유사의 다른 기록에는 산상왕의 아버지인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이라 되어 있어, 태조대왕은 산상왕의 큰아버지가 된다. 위궁이 산상왕이 아니라 그의 장남 동천왕의 이름이라고 해석하더라도,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이라면 동천왕은 태조대왕의 증손이 아닌 종손이 된다.4. 평가
묘호인 태조는 보통 왕조의 첫 번째 왕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태조대왕은 동명성왕으로부터 6대째 왕이지만, 고구려가 작은 속국에서 벗어나 영토를 넓히는 등 왕조의 시조와 거의 같은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태조"와 "대조"라는 표기가 함께 나타난다.
참조
[1]
서적
삼국사기
평판사
[2]
뉴스
예왜동계론
고대문자자료관
2021-07
[3]
서적
「고구려 지명」중의 왜어와 한어
전수대학학회
2019-11-30
[4]
서적
고구려 건국신화의 영웅전승적 성격
국사편찬위원회
1995-08-18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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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역사민속박물관
2009-03-31
[6]
문서
갈사국
[7]
문서
대무신왕 치세
[8]
서적
삼국사기
[9]
서적
후한서
[10]
서적
삼국지
[11]
서적
조선상고사
[12]
서적
삼국사기
[13]
서적
후한서
[14]
서적
삼국사기
[15]
서적
후한서
[16]
웹사이트
후한서
https://db.history.g[...]
[17]
서적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8]
서적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19]
서적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역사의 아침
[20]
서적
조선상고사
종로서원
[21]
논문
고구려 초기 왕계의 복원을 위한 검토
[22]
논문
고구려왕가의 상세의 세손에 관하여, 고구려오족오부고, 백제사회와 그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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