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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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1800–1859)는 영국의 역사가, 정치가, 수필가였다. 19세기의 번영을 배경으로 성장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변호사 자격을 얻었지만 정치에 집중했다. 그는 의회 의원, 인도 법률 위원, 육군 장관 등을 역임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인도에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저술은 웅변적인 문체와 휘그 사관에 입각한 영국사 서술로 유명하며, 특히 《영국사》는 19세기 내내 베스트셀러였다. 하지만 그의 역사 서술은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과 인종차별적 편견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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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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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토마스 배빙턴 매콜리 |
| 작위 | 초대 매콜리 남작 |
| 로마자 표기 | Thomas Babington Macaulay, 1st Baron Macaulay |
| 출생일 | 1800년 10월 2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레스터셔 |
| 사망일 | 1859년 12월 28일 |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영국 |
| 직업 | 정치가, 역사가, 시인 |
| 학력 |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
| 부모 | 재커리 매콜리, 셀리나 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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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경력 | |
| 소속 정당 | 휘그당 |
| 직책 | 전시 장관 육군 회계 감사관 |
| 의회 의원 | 칼른 선거구 (1830년 2월 15일 – 1832년 12월 10일) 리즈 선거구 (1832년 12월 10일 – 1834년) 에든버러 선거구 (1839년 6월 4일 – 1847년 7월 29일, 1852년 7월 7일 – 1856년) |
| 귀족원 의원 | 1857년 – 1859년 |
| 전시 장관 임기 | 1839년 9월 27일 – 1841년 8월 30일 |
| 전시 장관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 전시 장관 총리 | 멜버른 자작 |
| 전시 장관 전임 | 하윅 자작 |
| 전시 장관 후임 | 헨리 하딩 경 |
| 육군 회계 감사관 임기 | 1846년 7월 7일 – 1848년 5월 8일 |
| 육군 회계 감사관 군주 | 빅토리아 여왕 |
| 육군 회계 감사관 총리 | 존 러셀 경 |
| 육군 회계 감사관 전임 | 빙엄 배링 경 |
| 육군 회계 감사관 후임 | 그랜빌 백작 |
| 기타 정보 | |
| 수상 | 추밀원 왕립 학회 회원 (FRS) 에든버러 왕립 학회 회원 (FRSE) |
2. 시대적 배경
매콜리는 1800년 10월 25일 레스터셔 로슬리 템플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고지대 출신의 식민지 총독이자 노예 폐지론자였던 자카리 매콜리이며, 어머니는 브리스틀 출신으로 해나 모어의 제자였던 셀리나 밀스였다.[3] 매콜리 가문은 첫째 아이의 이름을 자카리의 누이와 결혼한 레스터셔의 지주이자 정치가인 삼촌 토머스 배빙턴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4] 어린 매콜리는 신동으로 알려졌는데, 갓난아기였을 때 요람에서 창밖을 보며 지역 공장의 굴뚝을 보고 아버지에게 연기가 지옥의 불에서 나는지 물었다고 한다.
영국의 19세기는 번영의 세기였다. 철도가 전국에 뻗어 나가고, 항구에는 세계 각지에서 물품이 도착했으며, 부를 축적한 상인들 사이에서는 귀족풍의 생활이 유행했다. 19세기 후반에는 가난한 노동자들도 차를 마실 수 있었던[27] 것은 당시 영국뿐이었다. 유럽 전체가 혁명의 재앙으로 유혈 사태를 겪는 가운데, 영국만이 식민지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말단 민중이 행복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장에서는 노동자가 필요해졌고, 지방에서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다. 그들이 사는 낡은 아파트는 가족 전체가 한 방을 사용했으며, 하수도도 없어 거리는 분변과 오물로 뒤덮여 있었다. 이러한 집에 살면서, 매연과 그을음이 가득한 공장 등에서 하루 14-15시간 동안 그들은 일했다[29]。 그 결과 그들은 일찍 죽는 경향을 보였고, 사망자의 평균 연령은 15-19세였다[30]。 노동자나 그들에게 동조한 사람들은 노동자의 대표를 의회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통 선거를 주장했다. 이른바 차티스트 운동이다.
3. 생애
허트퍼드셔의 사립학교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5] 케임브리지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인도에서 공부했다. 1826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지만, 이후 정치 경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32년부터 1833년까지 그레이 경 아래에서 통제 위원회 비서를 지냈다. 1833년 국회의원 무보수 직보다 더 보수가 좋은 직책이 필요해지자, 인도 통치법 1833이 통과된 후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 총독 의회의 초대 법률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34년 인도로 가서 1838년까지 최고 의회에서 활동했다.[9]
1838년 영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에든버러에서 국회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839년 멜버른 경에 의해 육군 장관이 되었고, 같은 해 추밀원의 일원이 되었다.[13] 1841년 저작권 문제에 대해 연설했는데, 그의 입장은 약간 수정되어 수십 년 동안 영어권 세계의 저작권법의 기초가 되었다.[14] 멜버른 정부가 몰락한 후 문학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1846년 존 러셀 경의 행정부에서 지급 장관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1847년 선거에서 에든버러에서 의석을 잃었으나,[15] 1852년 에든버러 유권자들의 제안으로 국회에 재선출되었다. 선거 운동을 할 필요가 없고 어떤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을 표명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건강 악화로 하원에 거의 출석하지 않았고, 심장 발작을 겪은 후 1856년 1월 의원직을 사임했다.[18] 1857년 레스터셔 주 로슬리의 '''매콜리 남작'''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으나,[19] 귀족원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18]
매콜리의 정치 저술은 웅변적인 문체와, 종교적 미신, 독재, 혼란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헌법과 진보적인 문화를 창조한 영국의 진보적 역사관에 대한 확신에 찬, 때로는 독단적인 강조로 유명하다.
3. 1. 유년 시절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는 1800년 10월 25일 레스터셔 로슬리 템플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고지대 출신의 식민지 총독이자 노예 폐지론자였던 자카리 매콜리이고, 어머니는 브리스틀 출신으로 해나 모어의 제자였던 셀리나 밀스였다.[3] 매콜리 가문은 첫째 아이의 이름을 자카리의 누이와 결혼한 레스터셔의 지주이자 정치가인 삼촌 토머스 배빙턴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4] 어린 매콜리는 신동으로 알려졌는데, 갓난아기였을 때 요람에서 창밖을 보며 지역 공장의 굴뚝을 보고 아버지에게 연기가 지옥의 불에서 나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는 허트퍼드셔의 사립학교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5] 1821년 6월 총장 금메달을 포함한 여러 상을 수상했고,[9] 1825년에는 밀턴에 관한 중요한 에세이를 ''에든버러 리뷰''에 발표했다. 케임브리지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인도에서 공부했다. 그의 편지에서 그는 1851년 몰번에서 ''아이네이스''를 읽었고 베르길리우스의 시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묘사한다. 그는 스스로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를 공부했고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법학을 공부했고 1826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지만, 이후 정치 경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27년 매콜리는 ''에든버러 리뷰''와 익명의 편지를 통해 ''모닝 크로니클''에서 영국 식민지부 전문가인 토머스 무디 대령, 경의 강제 노동 분석을 비판했다.[6][7] 아프리카인들의 평등보다는 '자유 흑인 농민'을 원했던 매콜리의 복음주의 휘그당 아버지 자카리 매콜리도 ''반노예제 보도''에서 무디의 주장을 비판했다.[6]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었던 매콜리는 리처드 '대화' 샤프의 부유한 후견인이었던 마리아 키나드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있었다. 매콜리의 가장 강한 정서적 관계는 그의 막내 여동생들이었다. 인디아에 있는 동안 사망한 마가렛과 딸 마가렛(그는 '바바'라고 불렀다)에게도 애착을 가진 한나였다.
3. 2. 인도에서의 활동 (1834–1838)
매콜리는 1832년부터 1833년까지 그레이 경 아래에서 통제 위원회 비서를 지냈다. 1833년 아버지의 빈곤으로 인해 국회의원 무보수 직보다 더 보수가 좋은 직책이 필요해지자, 인도 통치법 1833이 통과된 후 국회의원직을 사임하고 총독 의회의 초대 법률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834년 인도로 가서 1838년까지 최고 의회에서 활동했다.[9]
그의 1835년 2월의 ''인도 교육에 관한 보고서''는 인도에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매콜리는 모든 학교에서 2차 교육의 공용어로 영어를 도입하고, 영어 구사 인도인을 교사로 훈련시킬 것을 권고했다.[1] 그는 당시 총독이었던 윌리엄 벤팅크 경에게 "유용한 학습"(그에게 서구 문화와 동의어였다)을 제공하기 위해 공리주의적 원칙에 따라 중등 교육을 개혁할 것을 촉구했다. 토착 언어로는 중등 교육 전통이 없었으며, 동인도 회사가 지원하는 기관에서는 산스크리트어 또는 페르시아어로 가르쳤다. 그는 "우리는 현재 모국어를 통해 교육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외국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콜리는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가 인도 토착 언어 사용자에게 영어보다 접근성이 낮지 않으며, 기존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 문서는 "유용한 학습"에 거의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저는 산스크리트어와 아랍어 모두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 저는 그들 중 한 명도 유럽 도서관의 좋은 서가 하나가 인도와 아라비아의 모든 토착 문학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저는 동양 작가가 가장 뛰어난 문학 분야가 시라는 것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에서 사실이 기록되고 일반적인 원리가 조사되는 작품으로 넘어갈 때 유럽인의 우월성은 절대적으로 측량할 수 없게 됩니다. ... 물리 철학이나 도덕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두 국가의 상대적 위치는 거의 동일합니다.
매콜리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영어로 교육을 진행하고, 유럽의 학습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의 문화적 중개자 역할을 할 서구화된 인도인 계층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저는 우리에게 제한된 수단으로 인구 전체를 교육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 느낍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와 우리가 통치하는 수백만 명 사이의 통역자가 될 계층을 형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피와 피부색은 인도인이지만, 취향, 의견, 도덕, 지성은 영국인인 사람들의 계층 말입니다. 우리는 그 계층에게 나라의 토착 방언을 정제하고, 서구 명칭에서 빌린 과학 용어로 그 방언을 풍부하게 만들고, 점진적으로 지식 전달에 적합한 수단으로 만들도록 맡길 수 있습니다.
매콜리의 견해는 벤팅크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으며, 벤팅크의 영어 교육법 1835는 매콜리의 권고와 거의 일치했다(1836년, 라 마르티니에르 콜카타라는 학교는 그의 이름을 딴 기숙사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총독들은 기존 인도 교육에 대해 더 유화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의 인도에서의 마지막 몇 년은 법률 위원회의 주요 멤버로서 형법 제정에 헌신했다. 인도 대반란 1857 이후 매콜리의 형법 초안이 제정되었다. 1860년의 인도 형법에 이어 1872년의 형사 소송법과 1908년의 민사 소송법이 제정되었다. 인도 형법은 대부분의 다른 영국 식민지의 법률에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이러한 법률 중 다수는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및 짐바브웨는 물론 인도 자체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10] 여기에는 인도 형법 제377조가 포함되는데, 이 조항은 여러 영연방 국가에서 동성애를 범죄화하는 법률의 근거로 남아 있다.[11]
인도 문화에서 "매콜리의 아이들"이라는 용어는 서구 문화를 생활 방식으로 채택하거나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는 태도를 보이는 인도 출신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데 ("매콜리주의"),[12] 이는 경멸적인 표현이다. 독립 인도에서 매콜리의 문명화 사명에 대한 생각은 특히 신자유주의 찬드라 반 프라사드를 포함한 달릿 운동가들이 달릿 공동체가 힌두 문화를 폄하하고 인도에서 서구식 교육을 지지함으로써 권한을 얻었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자기 권한 부여를 위한 창의적 전용"으로 사용해 왔다.
도메니코 로수르도는 "매콜리는 인도에서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헬롯''과 맞서 싸우는 스파르타인처럼 행동했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며, 영국이 식민지를 독재적인 방식으로 통치할 권리에 대해 매콜리로부터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3. 3. 영국으로의 귀환과 정치 활동 (1838–1857)
1838년 영국으로 돌아온 매콜리는 이듬해 에든버러에서 국회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839년 멜버른 경에 의해 육군 장관이 되었고, 같은 해 추밀원의 일원이 되었다.[13] 1841년 매콜리는 저작권 문제에 대해 연설했는데, 그의 입장은 약간 수정되어 수십 년 동안 영어권 세계의 저작권법의 기초가 되었다.[14] 매콜리는 저작권은 독점이며,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14] 멜버른 정부가 몰락한 후 매콜리는 문학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1846년 존 러셀 경의 행정부에서 지급 장관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1847년 선거에서 그는 에든버러에서 의석을 잃었다.[15] 그는 이 손실을 아일랜드 메이누스 대학교에 대한 연례 정부 보조금을 확대하는 것을 지지하는 연설에 대한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의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대학은 가톨릭 사제를 양성하는 곳이었고, 일부 관찰자들은 그의 손실이 지역 문제에 대한 그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1849년 그는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행정적 임무가 없는 자리로 종종 정치적 또는 문학적 명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학생들이 수여하는 자리였다.[16] 그는 또한 자유 시민권을 받았다.[17]
1852년, 에든버러의 유권자들은 그를 국회로 재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선거 운동을 할 필요가 없고 어떤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을 표명하지 않겠다는 명시적인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놀랍게도 그는 그러한 조건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건강 악화로 인해 하원에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심장 발작을 겪은 후 그의 쇠약함은 그가 에든버러 유권자들에게 감사의 연설을 몇 달 동안 연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1856년 1월 의원직을 사임했다.[18] 1857년 그는 레스터셔 주 로슬리의 '''매콜리 남작'''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19] 하지만 귀족원에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18]
귀국 후 매콜리는 육군 장관을 역임했다. 저작권법안의 작성·심의에서도 매콜리의 치적이 보인다.[38] 1847년, 현직 각료이면서 매콜리는 선거에서 패배했다. 본인이 분석한 패인은, 아일랜드에 있는 가톨릭 성직자 양성 기관에 대한 보조금 증액에 찬성한 것으로, 선거구의 개신교 주민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잉글랜드 성공회와 가톨릭이 동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에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1856년에 하원 의원을 사임했다. 후에 초대 매콜리 남작으로 서임되어 귀족원 의원이 되었지만, 관상 동맥 혈전증으로 추정되는 병 때문에 귀족원에 출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40]
3. 4. 만년 (1857–1859)
매콜리의 정치 저술은 웅변적인 문체와, 종교적 미신, 독재, 혼란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헌법과 진보적인 문화를 창조한 영국의 진보적 역사관에 대한 확신에 찬, 때로는 독단적인 강조로 유명하다. 이는 신념과 표현의 자유를 결합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 진보 모델은 휘그 사관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철학은 매콜리가 ''에든버러 리뷰''와 기타 간행물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는 책으로 묶여 19세기 내내 꾸준한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이 철학은 ''역사''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이 작품에서 가장 감동적인 구절은 1688년의 명예 혁명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매콜리의 접근 방식은 이후 역사가들로부터 편향성과 자기만족으로 비판받았다. 칼 마르크스는 그를 '체계적인 역사 왜곡자'라고 언급했다.[1] 이후 역사가들은 또한 그가 비유럽 문화와 철학에 대해 명백한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예를 들어 그는 '훌륭한 유럽 도서관의 단 하나의 서가가 인도와 아라비아의 모든 고유 문학 작품보다 가치가 있다'라고 언급했다. 역사를 드라마로 보는 그의 경향은 그가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인물을 악당처럼 취급하고, 그가 찬성하는 인물을 영웅으로 묘사하게 했다. 예를 들어 매콜리는 그의 주요 영웅인 윌리엄 3세가 글렌코 학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윈스턴 처칠은 4권짜리 전기를 바쳐 말버러 공작에 대한 매콜리의 비난을 반박하며 "그의 고상한 옷자락에 '거짓말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2]
4. 주요 활동 및 업적
1830년 랜스다운 후작은 밀턴론과 공리주의자와의 논쟁으로 유명해진 매콜리를 윌트셔의 소도시 카운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시켰다.[36] 매콜리는 시와 산문뿐만 아니라 연설가로서도 뛰어났다. 유대인 선거 배제 비판, 선거법 개정 연설 등으로 유명해졌으며,[34] 1832년 선거법 개정 후 리즈에서 하원 의원이 되었다.[34] 영국 동인도 회사 인도 식민지 경영 위원회에 참가했다.[37]
1834년 인도에 부임, 인도 형법전 편찬과 영어 교육 보급에 힘썼다. 그의 형법전은 현재 인도 및 싱가포르, 나이지리아 등 다른 식민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영어 교육으로 인도의 공용어 중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귀국 후 육군장관, Paymaster-General 등 각료를 역임, 저작권법안 작성·심의에도 기여했다.[38] 1847년 선거에서 패배 후 정계에 복귀, 1856년 건강 문제로 하원 의원 사임, 매콜리 남작 서임 후 귀족원 의원이 되었으나 병으로 거의 출석하지 못했다.[40]
''고대 로마의 노래'', ''비평 및 역사 에세이'' 등을 저술했다. 대표작 『잉글랜드사』는 제임스 2세 즉위부터 앤 여왕의 죽음까지 다루려 했으나, 윌리엄 3세의 죽음까지만 완성하고 미완성으로 사망했다.
4. 1. 정치 활동
1830년 랜스다운 후작은 밀턴론과 공리주의자와의 논쟁으로 유명해진 젊은 매콜리를 눈여겨보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선거구[36] 윌트셔의 소도시 카운에서 하원에 당선시켰다. 매콜리는 시와 산문뿐만 아니라 연설가로서도 뛰어나다는 것을 곧 증명했다. 유대인이 선거에서 배제되는 것을 비판하고, 선거법 개정에 열변을 토한 연설로 일약 유명해졌다.[34] 1832년 선거법 개정 후, 리즈에서 하원의원이 되었다.[34] 당선 후 영국 동인도 회사 인도 식민지 경영에 관한 위원회에 참가한 것은,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거액의 급여가 매콜리에게 생활상 필요했기 때문이다.[37]1834년에는 직접 인도에 부임했다. 인도 형법전의 편찬, 그리고 영어 교육의 보급에 관해 장대한 각서를 남겼다. 형법전은 개정되면서 지금도 매콜리가 편찬한 형태를 남기고 있으며, 한편 싱가포르, 나이지리아 등 다른 식민지의 형법전도 매콜리의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영어 교육에서는, 영어 사용자를 인도에 대거 배출하여 인도인을 영국인으로 바꾸려고 설파했다. 영어는 후에 인도의 공용어 중 하나가 되었다.
귀국한 후 육군장관, Paymaster-General으로 각료를 역임했다. 저작권법안의 작성·심의에서도 매콜리의 치적이 보인다.[38] 1847년, 현직 각료이면서 매콜리는 선거에서 패배했다. 본인이 분석한 패인은, 아일랜드에 있는 가톨릭 성직자 양성 기관에 대한 보조금 증액에 찬성한 것으로, 선거구의 개신교 주민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잉글랜드 성공회와 가톨릭이 동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에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9] 그 후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1856년에 하원 의원을 사임했다. 후에 초대 매콜리 남작으로 서임되어 귀족원 의원이 되었지만, 병[40] 때문에 귀족원에 출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4. 2. 인도 형법 제정 및 영어 교육 도입
1834년 매콜리는 총독 의회의 초대 법률 위원으로 임명되어 인도로 건너가 1834년부터 1838년까지 최고 의회에서 활동했다.[9] 그의 1835년 2월의 ''인도 교육에 관한 보고서''는 인도에 서구식 교육 제도를 도입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매콜리는 모든 학교에서 2차 교육의 공용어로 영어를 도입하고, 영어 구사 인도인을 교사로 훈련시킬 것을 권고했다.[1] 그는 윌리엄 벤팅크 경에게 "유용한 학습"을 제공하기 위해 공리주의적 원칙에 따라 중등 교육을 개혁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 문구는 그에게 서구 문화와 동의어였다. 그는 "우리는 현재 모국어를 통해 교육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떤 외국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콜리는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가 인도 토착 언어 사용자에게 영어보다 접근성이 낮지 않으며, 기존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 문서는 "유용한 학습"에 거의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I have no knowledge of either Sanscrit or Arabic. But I have done what I could to form a correct estimate of their value. I have read translations of the most celebrated Arabic and Sanscrit works. I have conversed both here and at home with men distinguished by their proficiency in the Eastern tongues. I am quite ready to take the Oriental learning at the valuation of the Orientalists themselves. I have never found one among them who could deny that a single shelf of a good European library was worth the whole native literature of India and Arabia.영어
저는 산스크리트어와 아랍어 모두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저는 가장 유명한 아랍어와 산스크리트어 작품의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저는 동양 언어에 능통한 사람들과 여기서, 그리고 집에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동양 학자들의 가치 평가에 따라 동양 학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들 중 한 명도 유럽 도서관의 좋은 서가 하나가 인도와 아라비아의 모든 토착 문학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한국어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And I certainly never met with any Orientalist who ventured to maintain that the Arabic and Sanscrit poetry could be compared to that of the great European nations. But when we pass from works of imagination to works in which facts are recorded and general principles investigated, the superiority of the Europeans becomes absolutely immeasurable. It is, I believe, no exaggeration to say that all the historical information which has been collected from all the books written in the Sanscrit language is less valuable than what may be found in the most paltry abridgments used at preparatory schools in England. In every branch of physical or moral philosophy, the relative position of the two nations is nearly the same.영어
저는 동양 작가가 가장 뛰어난 문학 분야가 시라는 것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아랍 시와 산스크리트 시를 유럽의 위대한 국가의 시와 비교할 수 있다고 감히 주장하는 동양 학자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에서 사실이 기록되고 일반적인 원리가 조사되는 작품으로 넘어갈 때 유럽인의 우월성은 절대적으로 측량할 수 없게 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모든 책에서 수집된 모든 역사적 정보는 영국의 예비 학교에서 사용되는 가장 보잘것없는 요약본보다 가치가 적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리 철학이나 도덕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두 국가의 상대적 위치는 거의 동일합니다.한국어
따라서 초등학교 6학년부터는 영어로 교육을 진행하고, 유럽의 학습을 가르쳐야 했다. 이는 영국인과 인도인 사이의 문화적 중개자 역할을 할 서구화된 인도인 계층을 만들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I feel… that it is impossible for us, with our limited means, to attempt to educate the body of the people. We must at present do our best to form a class who may be interpreters between us and the millions whom we govern, – a class of persons Indian in blood and colour, but English in tastes, in opinions, in morals and in intellect. To that class we may leave it to refine the vernacular dialects of the country, to enrich those dialects with terms of science borrowed from the Western nomenclature, and to render them by degrees fit vehicles for conveying knowledge to the great mass of the population.영어
저는 우리에게 제한된 수단으로 인구 전체를 교육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과 함께 느낍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와 우리가 통치하는 수백만 명 사이의 통역자가 될 계층을 형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피와 피부색은 인도인이지만, 취향, 의견, 도덕, 지성은 영국인인 사람들의 계층 말입니다. 우리는 그 계층에게 나라의 토착 방언을 정제하고, 서구 명칭에서 빌린 과학 용어로 그 방언을 풍부하게 만들고, 점진적으로 지식 전달에 적합한 수단으로 만들도록 맡길 수 있습니다.한국어
매콜리의 견해는 윌리엄 벤팅크 경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했으며 벤팅크의 영어 교육법 1835는 매콜리의 권고와 거의 일치했다.[1] 그러나 이후의 총독들은 기존 인도 교육에 대해 더 유화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의 인도에서의 마지막 몇 년은 법률 위원회의 주요 멤버로서 형법 제정에 헌신했다. 인도 대반란 1857 이후 매콜리의 형법 초안이 제정되었다. 1860년의 인도 형법에 이어 1872년의 형사 소송법과 1908년의 민사 소송법이 제정되었다. 인도 형법은 대부분의 다른 영국 식민지의 법률에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까지 이러한 법률 중 다수는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및 짐바브웨는 물론 인도 자체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10] 여기에는 인도 형법 제377조가 포함되는데, 이 조항은 여러 영연방 국가에서 동성애를 범죄화하는 법률의 근거로 남아 있다.[11]
인도 문화에서 "매콜리의 아이들"이라는 용어는 서구 문화를 생활 방식으로 채택하거나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는 태도를 보이는 인도 출신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데 ("매콜리주의")[12] - 이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국가와 유산에 대한 불충성을 암시한다.
4. 3. 저술 활동
매콜리는 젊은 시절 발라드 "이브리"와 "아르마다"를 작곡했는데[24], 이 작품들은 나중에 매우 인기 있는 시집인 ''고대 로마의 노래''의 일부로 포함되었다. 1842년에 출판된 이 시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호라티우스 코클레스의 영웅담을 다룬 ''호라티우스''이다. 이 시에는 다음과 같은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있다.[25]:그때 용감한 호라티우스가 말했네,
:성문의 지휘관이: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곧 찾아오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으랴
:두려운 역경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더 낫게,
:그의 조상들의 유해를 위해,
:그리고 그의 신들의 신전을 위해?"
그의 에세이는 원래 ''에든버러 리뷰''에 게재되었으며, 1843년에 ''비평 및 역사 에세이''로 수집되었다.
1840년대에 매콜리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제임스 2세의 즉위부터 잉글랜드 역사''를 시작하여 1848년에 처음 두 권을 출판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역사를 조지 3세의 통치까지 다루려고 계획했으나, 이후 앤 여왕이 1714년에 사망하는 시점까지 완성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1855년에 출판된 세 번째와 네 번째 권은 리스윅 조약까지의 역사를 다루었다. 1859년 그가 사망했을 때, 그는 다섯 번째 권을 작업 중이었으며, 이 권은 윌리엄 3세의 죽음까지 다루었다. 다섯번째 권은 그의 사후 여동생인 트레벨리안 부인이 출판을 준비했다.
매콜리의 저작과 연설은 종종 독단적이지만 강력하고 명확하며 문학적으로 뛰어나고 자신감 넘치는 논조로 유명하다. 대표작인 『잉글랜드사』(직역하면 『제임스 2세 즉위부터의 잉글랜드 역사』)는 사망 직전에 출판되었으며, 그 이후 150년 이상 절판되지 않고 계속 판매되고 있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기관지 『에든버러 리뷰』에 기고한 밀턴론 이후에도 동지에 여러 번 투고했으며, 매콜리의 명쾌하고 단정적인 필치의 논문은 때로는 미움을 사기도 했다. 지면에서 꺾어 놓은 상대와 험악해져 결투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의회에서의 연설도 마찬가지여서, 명연설을 여러 개 남겼고 에드먼드 버크와 동급이라는 소리도 있었다[41]。
1842년 『고대 로마 시가집』을 발표했다. 매콜리의 유려한 필치는 더욱 완성도를 더해, 발매와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30년 이상 계속 팔렸다. 『잉글랜드사』 집필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근대사 흠정 강좌 교수 자리를 여왕의 남편 앨버트로부터 추천받았지만, 자유로운 시간을 우선시하고 싶었던 탓인지 고사했다. 『잉글랜드사』는 1848년에 제1권·제2권을 출판, 이어 제3·제4권은 1855년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당초 예정했던 조지 3세의 통치 시기(1738년)까지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결국 앤 여왕의 죽음(1714년)까지 쓰는 것도 달성하지 못한 채 1859년 제5권이 미완성인 상태로 사망했다.
5. 논란과 비판
매콜리는 종교적 관용과 자유를 찬미하며, 개인의 윤리 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억압받아 자유를 갖지 못한 노예, 아일랜드인, 유대인 등에게 자유를 주는 온건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유혈 혁명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매콜리는 정부가 사람들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31]
5. 1. 휘그 사관과 역사 서술 방식
토리당 당원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매콜리는 휘그당적인 사고방식에 더 공감했다. 피털루 학살 사건에 대한 토리당의 경찰 옹호 입장에 반대하며 도덕적으로 관헌의 탄압을 용서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대학 졸업 무렵에는 완전히 휘그당원이 되었다.[31]매콜리는 1830년대 차티스트 운동에 대해 보통 선거가 사유 재산 제도와 공존할 수 없을 것이라며 혐오했다.[42] 그는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정부의 가장 큰 혜택이지만, 보통 선거로 선출된 의회로부터 지지를 얻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보통 선거에 반대했다.[43] 혁명을 막기 위해 1832년 선거법 개정 법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44]
매콜리는 휘그 사관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은 독자를 사로잡는 기술과 문장의 선명함에 중점을 두었다.[51] 그의 영향력은 막대하여, 이후 100년 가까이 휘그 사관은 영국사에서 정통의 지위를 유지했다.
매콜리는 랑케의 사료 수집 및 분석 방식과는 달리, 이야기를 먼저 구성하고 거기에 맞는 사료를 덧붙이는 방식을 취했다. 액턴 경은 매콜리가 휘그당과 다른 당파와의 진실한 대립점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52] 존 스튜어트 밀과 칼라일 등은 매콜리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번영을 천진난만하게 기뻐한다고 비판했다.[53]
휘그 사관은 영국 서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인기를 얻어 주류가 되었지만, 시리는 매콜리가 독자를 재미있게 하는 데만 신경 쓴다고 비판했다.[54] 20세기 초, 조지 매콜리 트레벨리언은 매콜리의 역사 서술 방식을 계승했지만, 허버트 버터필드는 1931년 『휘그 사관 비판』을 발표하여 매콜리의 역사 해석을 비판했다.[57]
5. 2. 유럽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적 시각
매콜리는 아일랜드인, 유대인과 같은 이민족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잉글랜드는 국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였지만, 이들은 가톨릭과 유대교를 믿었다. 자연스럽게 매콜리는 국교회 체제 유지를 목표로 하는 토리당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매콜리는 아일랜드 가톨릭 성직자 양성 기관이었던 메누스 칼리지에 대한 보조금 증액을 요구했다. 종교 개혁 이후 가톨릭은 서로 죽고 죽이는 적이었고, 그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보조금 증액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지만, 매콜리는 찬성 연설을 했다.
한편, 유대교도는 가톨릭 이상으로 꺼리는 존재였으며,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에서 박해를 받아왔다.[1] 유대교도가 의원이 될 자격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출하자, 영국에서는 반대론이 뿌리 깊었다. 그 이유는 국교회가 국가의 신앙이라는 점, 성서에서 유대인은 방황하는 민족이 되어 억압받을 것이라고 예언된 점, 그리고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에게 동포 의식이 있어 영국에 대한 애국심을 가질 리가 없다는 점 등이었다.
이에 매콜리는 하나하나 반론을 제기했다. 첫째, 국가가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로 구성된 입법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자신의 언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에 애매하게 쓰여진 예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셋째, 억압받는다고 애국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 리 없고, 통치자는 그들을 애국적으로 만들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위그노가 그랬다고 덧붙였다.[2]
이러한 주장을 연설과 논문에서 펼쳤고,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유대인의 시민권을 인정하는 법안은 하원에서 가결되었지만, 상원에서 반대 다수가 되었다. 이후 1858년에 이르기까지 하원 가결·상원 부결을 반복하게 된다.

6. 평가와 영향
액턴 경은 매콜리의 ''영국사''를 네 번이나 읽고 푹 빠졌지만, 나중에 독일의 영향을 받은 후 매콜리에게서 결점을 발견하게 된다.[49] 1880년 액턴은 매콜리를 버크, 글래드스턴과 함께 "가장 위대한 자유주의자 3인" 중 한 명으로 분류했다.[50] 1885년 액턴은 매콜리가 "자유주의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세계 문학에서 어떤 작가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라고 평가했다.[51]
- -. 액턴도 휘그 사관의 입장을 취하는 역사가였지만, 매콜리의 저작에는 비판적이었다.
W. S. 길버트는 매콜리의 재치를 묘사했는데, "앤 여왕에 대해 썼던" 재치는 1881년 오페레타 ''Patience''의 대본에서 칼버리 대령의 1막 대사 노래의 일부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육받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매콜리가 앤 여왕에 대해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대령의 가짜 지적 자랑에 대한 농담이었을 수도 있다.
허버트 버터필드의 ''역사의 휘그 해석''(1931)은 휘그 역사를 공격했다. 네덜란드 역사가 피터 게일은 매콜리의 ''에세이''를 "배타적이고 편협한 영국적"이라고 생각했다.
1954년, 윈스턴 처칠 경의 주치의였던 모란 경은 매콜리가 자신의 젊은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조지 리처드 포터는 매콜리의 편지가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지만, 그의 관점이 편협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포터는 매콜리가 ''역사''에 언급된 장소를 직접 조사하여 사회사 연구와 지역사 연구를 도입했다고 평가하며, 런던데리 구호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스코틀랜드를 영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룬 점을 높이 평가했다.
피어스 브렌든은 매콜리를 기번에 필적하는 역사가로 평가했다. J. R. 웨스턴은 매콜리의 ''영국사''가 여전히 대체되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J. P. 케니언은 매콜리가 정확했다고 말했다.
W. A. 스펙은 매콜리의 ''영국사''가 방대한 연구에 기초했기 때문에 존경받는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스펙은 매콜리가 과거를 현재의 서곡으로 취급하고, 1685년의 후진성을 1848년의 진보와 대비하여 차이점을 과장했다고 비판했다. 동시에 스펙은 매콜리가 "악인의 미덕조차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고, 미덕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라고 썼고, "거짓이라고 알고 있는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증거를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죄를 결코 범하지 않았다"라고 옹호했다. 스펙은 매콜리의 ''영국사''가 이후 연구에서 살아남았다는 점, 명예 혁명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진보에 대한 매콜리의 확신에 찬 믿음은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이후 파괴되었고, 천연 자원의 고갈로 인해 지속적인 물질적 진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J. W. 버로우는 매콜리의 ''영국사''가 단순히 당파적이지 않으며, 17세기 휘그당의 근본적인 생각에 동의했지만, ''역사''의 영웅은 휘그당이 아닌 윌리엄이었다고 주장했다. 버로우는 매콜리가 영국인에게 역사와 토론에 의한 정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고 평가했다.
거트루드 힘멜파르브는 대부분의 전문 역사가들이 매콜리를 읽지 않게 되었지만,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콜리를 읽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언급하며, ''역사''의 역사가 우리 시대의 문화적 퇴행을 보여준다고 한탄했다.
소설 ''마라톤 맨''과 그 영화 각색에서 주인공은 매콜리를 따라 '토마스 배빙턴'으로 이름 지어졌다.
2008년, 월터 올슨은 매콜리가 영국 고전 자유주의의 탁월함을 주장했다고 평가했다.
매콜리는 휘그 사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역사가가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전통이 있는 영국에서, 매콜리는 불멸의 명성을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 시가집』의 유명한 구절을 알고 있는 영국인은 지금도 많고, 그의 문장 표현을 칭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매콜리는 역사 연구 방법을 누구에게서 배웠다는 흔적도 보이지 않고, "그는 진실을 이처럼 허구로 썼다. 훨씬 더 재미있게 읽히도록 하기 위해"라는 자세로 집필을 했다. 매콜리의 정수는 정확함보다는 독자를 사로잡는 기술, 문장의 선명함에 있었다. 문필가로서의 매콜리의 평판은 지금도 건재하지만, 역사가로서는 훌륭한 표현력을 칭찬받으면서도 혹독한 비판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콜리의 영향력은 막대했고, 이후 100년 가까이 휘그 사관은 영국사에서 정통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 후 네이어나 아날 학파 등의 등장으로 역사는 더욱 전문화되고 심화되었다. 현대에 들어서 매콜리에 대한 언급은 식민지를 포함한 영국 제국 전체에서 분리하여 본국과 해외는 무관하게 해버렸다는 지적 등이 있다. 그리하여 매콜리도 휘그 사관도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1980-90년대 이후, 미세한 부분까지 파고드는 연구를 아무리 쌓아도 전체 역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역사를 포괄적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또한 스토리를 말한다는 측면이 다시 주목받는 시대, 즉 "서술의 부활"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매콜리나 트레벨리언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전체를 이야기할 것인가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네오=휘그라고 불리는 역사가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의식은 다시 높아지고 있다. 매콜리의 알기 쉽고 생생한 묘사가 지금도 존경받는 이유이다.
7. 한국에 미친 영향
일본에서 매콜리 자체의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개혁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변혁할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섬나라면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모든 개혁을 달성한 국가로 여겨졌고, 가장 적합한 사례로 여겨졌다. 과학 기술이 아니라 정치와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었다[59]. 영국사에 대한 관심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사의 일본어 번역은 매년 출판되었지만, 매콜리의 『영국사』 번역은 나오지 않았다[60]。당시 출판된 역사서는 옥석이 섞여 있어서, 지금은 대부분 잊혀진 역사서가 번역되거나, 본국 영국에서 반향이 컸던 역사서나 후에 이름을 남길 역사서가 간과되기도 했다[61]。매콜리의 영향은 다케코시 요사부로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다케코시가 1893년에 발표한 『마코울리』[62] 전기는, 당시 출판된 지 얼마 안 된 트레벨리안의 전기를 참조한 것으로 여겨진다[63]。다케코시는 "충분한 동정심은 그 아름다움을 아는 데에 족하고, 충분한 냉정함은 그 결점을 아는 데에 족하다고 믿는 까닭이다[64]"라며 냉정한 판단을 할 것을 전제하면서도 "영국인 중의 영국인이다. 신사 중의 신사다[65]" 등 각처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한편, 단점은 한 곳 "(매콜리와 에드먼드 버크를 비교하면, 매콜리는)철학적 심오함을 결여했다[66]"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다케코시의 매콜리 평가는 일정 독자를 얻었고, 다케코시도 "일본의 매콜리"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부흥기의 일본에서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매콜리라는 인물이 아니라 휘그 사관이다. 대전으로 초토화된 일본에 비해, 영국은 성공한 근대화의 전형으로 여겨졌다. 세계 최초로 시민 혁명을 경험한 최첨단의 존재였고, 크게 참조되었다[67]。동시대 영국의 찬양하는 휘그 사관은, 일본인의 영국에 대한 이미지에 부합했고, 또한 그것을 보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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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Macaulay's speeches on copyright law
http://www.baen.com/[...]
201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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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es, p.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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グーチ、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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ケニヨン、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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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井[a]、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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ケニヨン、pp. 20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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ケニヨン、p.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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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今井[a]、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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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福井、p. 145
[59]
문서
福沢のイギリスに対する認識については今井[b]、pp. 48-57
[60]
문서
現在は部分訳がある。中村経一 訳『マコーリー英国史 : 革命の部』上中下巻、旺世社、1948-50
[61]
문서
今井[b]、pp. 94-97
[62]
간행물
竹越与三郎、民友社、1893
"{{NDLDC|782465}}"
[63]
문서
今井[b]、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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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竹越、p. 127
[65]
문서
竹越、p. 129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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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越、p. 172
[67]
문서
今井[b]、pp. 283-284
[68]
웹인용
Macaulay by Zareer Masani – review
https://www.theguard[...]
201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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